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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예전에 본 영화 '봄날은 간다'가 있었다.
처음 상영관에서 영화를 보고 검은 화면위로 자막이 올라가고 불이 켜질무렵 혼자 중얼거렸다.
ㅆ 년....
그땐 그랬다. 나이를 먹을만큼 먹은 여자가 어린 남자를 상대로 무슨 짓인지..
변하는게 사랑인지.. 그렇게 살랑살랑 순진한 마음에 돌을 던지고 싸늘하게 돌아서더니 그래도 아쉬웠는지 슬그머니 와서 다시 사귀자고?
미쳤냐? 너랑 다시 사귀길...
극중 유지태가 거절하고 돌아서서 담담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
그래그래 미련같은 건 두지 않는거야
그래서 마지막 넓은 초원에서 녹음을 하는 그의 모습이 그냥 자유로워보였다.
그리고 몇년이 흐른 후 다시 그 영화를 봤다
집에서 혼자 조금은 청승맞게... 하지만 여유있고 삐뚜름하게..
영화가 끝나고 혼자 또 중얼거렸다.
미친놈... 사랑이 변하냐고? 이놈아 세상에 변하지 않는게 뭐가 있는 줄아니?
고인 물은 썩을 수 밖에 없어. 감정도 흘러야지 그저 고여있기만 하면 악취만 풍기는 거야.
니가 나이먹어 세상을 알아버린 여자에게 아무리 들이댄들 그 여자가 꿈쩍할 줄 아니?
너랑 라면을 먹었다고... 너랑 몇번 잤다고... 그 여자가 너것일거 같아?
누군가를 절절하게 사랑할 수도 있지만 책임지거나 끝까지 몰고 가고 싶지 않은 수도 있단다
그게 사랑일 수도 있지. 그게 인생일 수도 있지
그걸 모르면.. 넌 아직 한참 배워야 할게 남은거란다.....
나이먹고 닳고닳은 세상을 모두 알아버린 여자처럼 그렇게 남자를 보며 혀를 찼다.
그래서였을까 마지막 유지태의 모습은 그제야 조금 자란 .. 소년을 벗어난 남자로 보였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다. 그때 그 영화가 생각났다.
영화 내용보다 그 영화를 보고 변해가는 내 모습이 생각났다.
뭐가 달라진걸까
폴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필요하지 않는 나이든 여자다.익숙한 것들 이젠 몸에 익어서 긴장할 필요도 없고 조금은 지루하고 너덜해졌어도 편안한 그것을 더 선호하게된 여자다
물론 여자라서 그리고 아직 그렇게 많은 나이를 먹은 것은 아니니까 조금의 설레임은 남았다
하지만 잠깐의 일탈은 허락할지 모르지만 삶을 송두리째 바꿀 용기는 없다.
용기는 없는대신 안락하고 편안한 일상을 얻었고 조금은 비굴하고 비겁한 삶의 요령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로제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살아남느라 닳고 닳았고 속되고 탐욕스럽지만 그래도 무엇이 자기에게 필요한지 아는 남자다. 오래된 연인 폴을 보험처럼 여기기도 하고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고 우쭐할만한 지적 허영심도 있는 하지만 속되고 속된 남자다.
그들도 열렬한 사랑을 했었고 앞을 보지 않는 맹목적인 열정에 들뜨기도 했을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젊음이 지나고 지금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나를 보호하는지 알아버린 나이의 사람들이었다.
시몽온.. 아직 젊고 철이없다.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한국의 중2처럼 그는 세상이 아직도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고 여기는 피끓고 서투른 청춘이다.
폴이 그에게 끌리는 건 당연하다.
자기를 너무 편하게 여기는 로제에게 소외감을 느끼고 나이들어감이 두려운 폴에게 시몽은 어쩌면 마지막 기회였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줄 멋진 상대
나에게 애닳아하고 마구 빠져드는 서툴고 열정적인 상대 게다가 그가 외모나 배경이 모두가 근사하다면 그건 무지무지한 유혹이다.
하지만 폴은 시몽이 편하지 않다.
나에게만 목 매는 상대는 부담스럽다.
나의 일상이 흔들리고 편하고 나른한 휴식이 없는 격정은 이제 피로해질 뿐이다.
무엇보다 폴은 더 이상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익숙한 것들이 좋은 때이다.
결국 둘은 딱 그만큼만 사랑하고 헤어질 상황이었다.
물론 로제에게 돌아가더라도 드라마틱한 해피앤딩이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저 진부하고 지리멸렬한 일상일 뿐이지만... 폴은 더이상 기대하지 않음이 편하다. 외롭고 허무할지라도
나이들어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일이 죄일까
젊은 시절 내 삶에 뭔가 드라마틱한 사건이 일어나기를... 커다란 파도를 타는 짜릿함이 생기기를 바라고 또 바라지만 지금은.. 나의 오늘이 어제와 다르지 않기를.. 내일이라고 새롭지 않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저 편안할 걸 바란다.
삶의 모퉁이에서 나타날 어떤 무언가를 기대하지더라도 그것이 내가 견딜만한 무언가이기를 내가 버틸 수 있고 내 근간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이기를 바란다.
이미 탈만큼 롤러코스터를 탔기때문일 수도 있고 굳이 찍어먹지 않아도 그 맛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삶의 혜안을 가졌다.
그래서 편안함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젊음은 아직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길모퉁이를 돌때마다 두근거리고 설레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유지태의 할머니는 모든 인생의 모퉁이를 다 돌았다. 그리고 이젠 엣기억조차 뒤죽박죽이 된 치매 상태였다. 하지만 젊어서 모진 일들이 모두 엉기고 지워지고 쌓여가면서 이젠 내가 기억하고 싶은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남편을 기다린다. 사랑하고 지치고 배신당하고 슬펐던 그 모든 것이 지나고 이젠 그 모든것이 예쁘게 기억되어 그냥 행복하다. 편안하다.
그런거 아닐까.....
한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말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면 먹고 가래?"
하지만 그 때 그 말이 진심이었듯 지금 변한 내 마음도 진심이다.
지금 변한게 있다고 그때의 진심이 무시되는 건 아니다.
그때 그 마음이 그말이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는건 아쩌면 지금 변하고 잊혀지고 익숙해진 편안함 때문일 수도 있다.
간만에 엣영화를 다시봐야겠다.
이번엔 마지막에 내가 무어라 중얼거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