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매큐언의 속죄..

이야기와 이야기와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둘러싼 커다란 테두리(?)

사건이 일어나고 그 결과 한 사람은 어던 죄도 없이  댓가를 치러야 하고

알맞은 시간에 속죄를 하지 못했던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벌주면서 속죄를 한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커다란 속죄였음이 드러나는 반전 반전 또 반전

 

속죄 용서 이런 단어를 떠올리면 사라믈은 김창동의 영화  <밀양>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의 또다른 작품 <시>도 용서와 속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떠올리는 것은 이정향의 <오늘>이다,

용서를 해야히지만 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 피해자에게는

용서 이전에 반성이 있어야 하고 변화가 있어야 하고  사죄하는 과정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지만 용서는 선택사항이지 의무사항이 아니다,

사람들은 용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거룩한지를 말하지만 막상 사죄에 대해서는 잊는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진심인지 얼마나 댓가를 현실적으로 치렀는지는 넘어간다,

그저 용서만이 온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살기좋게 하고 옳은 것이라고만 말한다,

피해자는 제 상처를 추스르기도 전에 용서해야하는 압박속에 갖히고 만다,

용서 하지 않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사죄는 권리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할 과제이다,

 

 

 

 

 

 

 

 

 

 

김애란의 <서른살>의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희도 자라면 내가 되겠지 고작 내가 되겠지"

 결국 자신처럼 되어버린 제자를 생각하며 주인공은 어쩌지를 못한다

 일껏 외면하고 모른 척하고 살아가려고 했는데 노량진에서 함께 생활했던 언니의 편지를 받고

지금의 "내"가 되기전 그 어리고 발랄했던 제자의 나이였던 "나"를 떠올리며

다시 내가 버리고 온 제자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죄책감이란 그런 것일까

기껏 떼어냈다고  돌아서서 휴우 한숨을 돌리는 순간에도 그 놈은 내 등뒤에 짤싹 붙어 있다,

보이지 않아서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렇게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

그러나 내 등뒤의 무게에 혼자 휘청거리는 사람은 있다,

보이지 않아서 없다고 믿고 싶지만 그 무게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은 약하고 미미하고 보잘것없는게 그래서 그 무게를 어쩌지 못한다,

<서른살>의 주인공은 힘겨운 노량진에서의 재수생활끝에 미미한 대학에 진학하지만 취업은 또 아득하고 그렇게 학원가를 전전하면서 나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보람도 느낀다,

지독히도 공부를 안하고 희망도 없는 아이들이 순진하고 발랄하게 다가오는 것

그래서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 다가섰던 그 순간은 희망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라는 유혹으로 시작한 다단계 생활과 그로 인해 피폐해진 생활 관계속에서 마지막으로 아직 순수하고 발랄한 제자를 끌어넣는 순간까지 그는 아직까지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제자의 문자를 씹고 전화를 거부하는 순간 그는 ..... 죄인이었다,

자기를 아직도 순수하게 기억하는 언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부칠지 알 수도 없는 편지를 쓰면서

주인공은 그게 속죄라고 생각할까

이미 자기치럼 피폐해지고 자기정도의 어른밖에 되지 못한 제자를 졔속 밀어내면서도 그는 아마

오래오래 그 아이와 함께 할 것이다, 그게 그의 벌이다,

 

내가 읽은 책은 이언 매큐언의 <속죄>인데

나는 자꾸 김애란의 <서른>이 떠올랐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속죄와 아직 살아있고 내곁을 계속 맴도는 사람에 대한 속죄

어느 것이 더 쉬울까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없다는 회한이 남았지만

아직 살아있고 내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 희망이 있지 않냐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차라리 죽어버려서 모든게 끝나버려서 가벼워질 수 있는 (그게 어쩔 수 없는 자기기만일 수 밖에 없드라도) 것이 있다면 아직 현재진행형이어서 점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우유부단 회피 망설임의 덧대어지는 죄들이 있다,

누구의 죄가 더 클까

나는 신이 아닌데도 아무것도 아닌데도 자꾸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었다,

 

 

 

 

 

                

 

 

이차대전과 작가라는 소재에서는 두 책이 연상된다,

전쟁동안 사람들이 모여 책을 읽게 되는 이야기와

전쟁을 겪으며 궁핍한 상태를 견디는 작가가 멀리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있는 서점주인과 교류하며 서로를 공감하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이 책도 다른 인물이지만 전쟁을 겪는 이야기와 글을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겹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를 기록해서 남기고 싶다는 것이다,

남기고 싶은 것

그저 흩어지고 엷어져서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고 싶은 그 순간 그 감정 그 사람을 영원히 박제하고 싶은 마음이 다,

잡고 싶은 그 마음은 나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잡고 싶은 그것은 어떤 대상일 수 있지만 그것은 '나'를 그대로 박제하는 일이다,

브리오니는 자기의 죄를 반성하기 위해 그 순간을 기록하기로 하고

건지감저껍질 파이의 작가는 그 시대의 상황을 씀으로써 그 시대의 모습과 함께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다,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은 어떤 대상인 동시에 자신이다,

그것이 반성이든 생계를 위한 것이든 어떤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든

그가 쓴 글에는 작가가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너무  택도 없는 비유겠지만

어쩌면 이 서재에 글을 남기는 나도 내가 읽은 책들(대상)을 기록하는 일인 동시에 나를 드러내느 일이다, 내가 여기서 쓰는 글은 그 책이 아니라 그 책을 읽은 나라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쓴다는 것

기록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내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브리오니가 자기가 들어가는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것은 그가 아직 어리고 유치하고 서툴러서가 아니라 그때부터 누구가 품고 있는 욕망이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주인공이가 자기가 겪어야 하는 그 순간

그것이 바로 자기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

 

 

 

역사에서 if 란 있을 수 없다,

이미 벌어진 사건이나 사실을 되돌릴 수 없는 것

역사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이라는 것도 그렇다,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없다, 되돌리려고 하고 돌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꿰맨 상처는 흉터로 남아버린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되돌리는 일은 없으며 원인에 대한 결과는 단 하나뿐이다,

소설은 그 역사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결말을 바꾸고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혹은 일아나게 하는 일

그때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은 지워버리고 해야만 했어야 하는 말을 삽입한다

신은 아니지만 작가는 그렇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자기가 쓰는 작품안에서

브리오니가 그렇게 자기 작품속에서 세상을 바꿈으로써 속죄를 한다,

미안한 마음  그러나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그 마음으로 몇번은 고치고 고쳐가며 소설을 썼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것이 모두 브리오니의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그가 앞에서 언급했던  "소설에 없던 것은 내 삶에도 없었다"

부딘칠 수 없던 일들을 차마 쓸 수 없던 그는 드디어 직면해서 쓰기 시작했다,

지나버린 역사 지나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만

다시 만들어내면서 자기 마음을 드러내고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브리오니는 자기가 꼭 들어가야만 한다고 믿었던 유년시절의 미성숙한 의지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작가가 되었다,

 

 

브리오니는 결국 언니 세실리아에게도 그의 연인 로비에게도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

미처 그럴 틈도 없이 두 사람은 사망했고 용서를 빌어야 할 대상을 잃어버린 브리오니는 그 커다란 속죄를 해피앤딩이 있는 소설로 대신한다,

허무하게 죽어버린 연인을 소설속에서 아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려내면서

스스로는  용서를 구하지만 결국 용서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 대상으로 만들어버림으로서

스스로를 속죄하려고했다,

열세살의 브리오니는 어쩌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했다,

아직 어리고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나이였고

이제 어른이 된다는 어쩌면 설레고 짜릿하면서 아찔한  그 순간이  얼마나 그릇되고 독선적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본 사실 내가 받아들이는 진실이 전부라고 믿는다,

이미 틀을 만들고 그 틀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틀이 어른의 틀이라고 생각하는 어린 아이였다,

존중받고 관심을 끌고 싶고 세상의 중심이고 정의를 실현해야하는 인물을 자기여야 한다고 믿는 아이 그 아이의 거짓말은 아니지만 잘못된 판단이 사람들을 끝으로 몰아갔다,

이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도 앞으로 밀고 나가려는 힘에 밀리고 만다,

그리고 후회는 언제나 때가 늦었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속죄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모두를 아울러 속죄에 대해 죄책감에 대해 글을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떤 죄도 업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죄 이후가 사람을 결정하는 게 아닐까

직면하고 반성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 잘못을 모르는 사람이 있고

잘못을 알지만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누구나 세가지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적거나 크거나,,,

 

그냥 이야기의 재미를 따라 읽다가

주인공에 따라 나를 생각하고 내가 아는 누군가를 생각하다가

전쟁과 역사에 대해 생각하다가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다가

결국 속죄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결국 인간이란 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그 이후가

속죄를 어떤 타이밍에 어떤 방범으로 하는가 의 문제가 그 품격을 결정하는게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도덕책에서는 가장 쉽게 서술되어있지만

삶속에서는 가장 어려운 행동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가져다 주는 이언 매큐언은 진정 작가라고 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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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1-1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언 메큐언...미루고만 있었는데,
이동진 때도 안 읽던걸 펼쳐들고 싶게 만드셨습니다요~^^

푸른희망 2017-01-17 21:20   좋아요 0 | URL
꼭 읽어보셔요. 김중혁도 추천했잖아요~~^^님의 리뷰 기대합니다

cyrus 2017-01-1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글쓴이 자신을 드러내는 글이라는 생각, 푸른희망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글쓴이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생각들은 완벽히 옳을 수가 없어요. 틀릴 수 있습니다. 생각이 틀리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사람은 자신의 리뷰가 비판받으면 불편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시인하면 뭐라 할 사람 없습니다. 다만 자꾸 자신의 생각이 옳다면서 고집 부리고, 상대방의 의견을 무시하면 주변 사람들의 잡음이 더 많아집니다. 글은 글쓴이의 결함을 가리기 위한 옷이 아닙니다. 글은 글쓴이의 분신입니다.

푸른희망 2017-01-17 21:21   좋아요 1 | URL
그래서 가끔 서재에 글을 올리고 나면 너무 부끄러울 때가 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계속 기록하려고 노력합니다~~

cyrus 2017-01-17 21:26   좋아요 0 | URL
2, 3년 전의 글을 다시 읽어보면 부끄러워요. 그 당시 글을 쓰면서 발견하지 못했던 비문이 보여요. 벌거벗은 아기 시절 모습이 찍힌 앨범사진을 보는 기분입니다. ^^
 

그림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이가 크면서 글밥이 많은 동화책으로 넘어 간후 그림책을 보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나도 성장하고 단계를 밟아가고 마음이 조급해지면서 그림만 많은 그림책을 잊었다.

그러다 상담 공부를 하면서 무엇보다 그림책만큼 쉽게 마음을 열기 쉬운 도구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림책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글을 알아도 글을 몰라도 상관없다,

시간을 쪼개내지 않아도 휘리릭 볼 수 있고

하루종일 책을 끼고 앉아 아까운 곶감 빼먹듯이 두고두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림책에서 받은 느낌은 제각각이다,

나의 처지난 상황 감정에 따라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를 볼 수 있다,

누구나 주목하는 가운데 커다란 주인공 대신 구석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있는 누군가에게 마음이 가기도 하고 흘려그리듯 대충 그린 구석의 꽃 하나 혹은 배경 하나에 꽂힐 수도 있다,

그게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게 그림책이다,

다시 아이가 되고 싶은 내 아이에게 읽어주기도 편하고 듣기도 편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그냥 그림책 한권을 슬쩍 밀어넣어도 괜찮다,

나는 이런 의미를 주고 싶은데 아이는 혹은 상대는 저런 의미를 발견해도 상관없다,'

서로 미처 보지 못한 그 그림에 그 한 줄에 의미를 나눌 기회가 된다,

 

                  

 

 

 

 

 

 

 

 

 

 

 

 

 

 

두 작가의 그림책 이야기를 읽는다,

미스다 마리는 자기가 어렸을 때 읽은 그림책을 이야기한다,

그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어떤 편견으로 읽다 만 혹은 들춰보지도 못한 그림책을 이야기하며 그때의 감정과 추억을 이야기한다,

지금 알게 된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

그때 그 친구가 준 그림책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우리 사이는 달랐을까

그때 무서워서 펼치지 못한 책을 내가 읽었더라면

그때 너무 아끼던 그림책을 아직 가지고 있었더라면

다 부질없지만 그래도 의미는 있다,

그때의 미련이나 후회가 다시 그림책을 들추게 하고 그 때 발견하지 못한 혹은 느끼지 못한 감정이나 의미를 다시 알아본다,

그림책은 나의 과거로 가는 문이기도 하고 내가 미처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저 아래의 무의식을 건드리기도 하고 아주 어이없이 간단하게 타인을 공감하게도 만든다,

그림책속의 인물중에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인물은 이제 없다,

단 한줄 혹은 귀퉁이의 조그만 인물도 그냥 허투루 넘어가지지 않는다,

그때 못 본걸 지금은 볼 수 있다,

내가 못 본걸 누가 보고 이야기 해 줄 수도 있다,

단순하다. 그래서 더 깊고 넓다,

 

<그림책에 흔들리다> 저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아픔에 그림책으로 위로하고 스스로도 위로받는다,

아팠던 과거나 속상했던 순간 그림책이 함께 한다,

그림책을 읽으며 주인공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주인공을 따라 불안하고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은 그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마치 내가 모든 걸 해낸것 처럼 공감하게 된다,

그림책의 주인공에게 공감해본 사람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미스다 마리보다 이 책의 저자는 그림책이 주는 위로와 공감을 더 내밀하게 이야기해준다,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여러가지 감정들   죄책감  불안  패배감 등등을 그림책을 통해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감정이 잘못이 아님을 알고 안도한다, 내 감정에 솔직해지고 나만 겪는 어려움이 아님을 아는 것 그래서 나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는 일 '

그 어려운 일을 그림책이 해낸다,

 

미스다 마리의 책을 보면서 나도 다시 그림책을 읽어봐야지 마음을 먹게 되고

김미자 저자의 책에서 나는 나도 나름 괜찮은 엄마고 괜찮은 살이라는 위로를 받는다,

누군가의 내밀하지만 솔직한 고백이  나에게도 힘이 되기도 하나보다,

 

별 거 아니라면 아니겠지만

소소하고 자잘한 자기고백이 때로는 힘이 될 때도 있다,

그림책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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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고전적이다, 클래식하다... 뭐랄까 신인다운 발랄함이나 참신함 보다 우직하다고 생각했다,

기교도 없고  어찌보면 그저  담담하게 그러나 절실하게 써내려간 그런 투박한 이야기가 그대로 마음을 치고 들어와 앉아버렸다,

이건 뭐지 싶었다,

내가 평론가는 아니니까 뭐라고 평을 할 수는 없지만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시작한 독서가 어느 순간 정자세를 하게 만들고 읽다가 잠들든지 뭐... 하던 나른함이 다시 어깨를 토닥이면서 다  읽어야 할거 같은 의무감을 들게 했다,

별 거 아닌데,.. 멋진 구성도 아니고 어딘가 툭툭 끊어지고 이어지고 하는 이야기인데

그냥 그렇게 쑥 들어왔다, 어떤 예고도 없이

이건 반칙이지...

사실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싶었었다,

누군가를 담담하게 기억하면서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순식간에 들어가버리는 글을 쓰고 싶었다.

소설 거의 중반이후에 나오는 주인공 소유의 감정의 결이 거의 내것처럼 그대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다, 그가 쇼코를 바라보는 시선 할아버지를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기대했다가 경멸했다가 혐오했다가 그렇게 인정하게 되는 순간순간이 퍽이나 이해가 가면서 동시에 내가 이해받고 있는 기분 그러면서 이런 이해와 공감을 한 10년도 더 전에 내가 느꼈더라면 나는 지금 다른 내가 되어있지 않았을까 하는 억울한 감정도 들었다,

이건 뭐지? 싶어 한참을 있다가 다음 작품을 읽었다,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를 읽으면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어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라는 공통점때문일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스며드는 일 누군가가 내게 스며드는 일에 대해  조금 더 나도 그렇게 스며들고 싶었던 거 같다,

80분의 기억을 가진 수학자 그리고 그녀의 집을 드나드는 가사도우미 그리고 그녀의 아들

그리고 수학과 야구

예전에 나는 이 책을 '사람이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예의이자 배려'라고 했다,

지금도 그럴까?

그때나 지금이나 책에서의 첫 인상은 일본인답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등장인물의 성격이라고 해야할까 서로가 서로에게 어색해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하고 그래서 깍듯해지고 서로에게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두며 그 사이의 공간을 존중해주는 느낌... 그거였다,

누군가의 바운더리를 존중해주는 것 나에게 그건 예의의 처음이었다,

친해지고 다가오고 다정한 사이도 좋지만 그렇게 상대가 가지고 있는 공간을 인정해주는 것

그리고 그 공간을 가만 내버려 둘 줄 아는  여유가 예의이자 배려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냉정하기도 하고 못되기도 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사가 가지는 기억의 한계는  늘 박사를 깍듯하게 만든다.

내겐 낯선 사람이지만 어쩌면 내가 아는 나를 아는 사람일 수도 있는 상대에게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조금은 미안해하며 다가가는 박사의 모습과 그런 박사의 이질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인정하는 도우미와 그의 아들 루트 ..

그건 어쩌면 최은영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공감과 이해 그것과 같은 결일것이다,

누군가에게 훅 하고 다가가진 않지만, 그저 주변에서 서성이고 주저하고  생각이 많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 주저하는 시간동안 상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 입장을 이해하고 또 이애하고 머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그렇게 인정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 그것이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박사가 말하는 여러 수식과 숫자의 아름다움은 낯선 것들이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지만 그 말들이 나를 인정하고 나를 배려하고 나를 존중한다는 의미라는 걸 도우미는 금방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누구에게 그렇게 존중받고 인정받고 존재감을 느꼈을까

낯설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수식의 세계에서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공감하고 서로를 배려할 수 있었다,

지속되지 못할 기억일지라도 추억을 만들고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이 비록 잊혀졌더라도 개의치 않는 것

기억은 없어도 관계와 존중은 지속되는 것... 그것이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밋밋하지만 따뜻하다,

그저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고고 뻐근한 근육들을 풀어주는 나른한 시간같은 순간들이었다,

 

문득 그런 박사와 도우미와 아들의 아름다운 풍경을 안채에서 보고 있던 미망인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했다,

영원히 나와의 시간은 잊지 못하는 사람

나를 잊어서는 안되는 그 사람이 지금은 불구가 되어 80분의 기억밖에 지속하지 못하지만

그가 가진 낡고 오래된 기억속에 나는 영원하다는 사실은

그 미망인에게 위로였을까 아니면  저주였을까?

나는 늙고 이렇게 변했는데 그의 기억속에서 나는 영원히 영원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예전엔 외롭겠다 싶었는데 그렇게 스스로 위안하며 바라보고 또 바라보기만 하는 미앙인의 마음도 이젠 알 거 같다,

 

 

다시 <쇼코의 미소>로 돌아와서....

 

"넌 왜 그런 얘길 하면서 웃어?"   (씬짜오 씬짜오 중에서)

 

어린 투이의 그 한마디에 나는 순간 무안해졌을것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 웃는 아이는 자기에게 박히는 말들을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고 한다,

애써 지우리고 하는 게 아니라 애써 기억해내지 않으려고 한다

이 두가지는 비슷해보이지만 다르다,

지우겠다는 적극적 의지조차 내 보이지 못하고 그저 보이지 않도록 보여지지 않도록 남모르게 혼자 애쓸 뿐이다,

웃으며 이야기하는 건 그 이야기가 아프다는 걸 안다는 거다,

아픈 이야기지만 아프다는 걸 보이고 싶지 않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쿨하다고 보여지고 싶고 그리고 누구에게도 내 속내를 보이고 싶지 않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한자락 깔려있다,

 

나와 발음이 같은 응웬 아줌마도 역시 잘 웃었다 잘 이해해주었고 상대의 좋은 점을 잘 알아봐 주었고 슬프면서도 언제나 웃고 있었다, "행복이 슬픔과 너무나 가까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목이 매이거나 괜히 명치 끝이 먹먹해지는 기분

그걸 다른 사람도 가지고 있을까

이런 모순되고 이상한 마음을 나만 느끼는 게 아닐까 하고 어릴적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을 다른 사람도 느끼고 알고 있는 걸까

혹시 나만 느끼는 것 아는 게 아닐까

나만 아는게 좋은 건지 나쁜건지도 몰랐지만 왠지 나만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반이고 나말고도 다 아는 것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반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신은 항상 그런식이야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못해 안해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은 혹은 못하는 사람을 나도 알고 있다,

언제나 자신은 잘못을 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잘못이구나 하고  알겠지만 그걸 입밖으로 꺼내는 순간 자기가 사라질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잘못을 말하는 순간 자기가 지는 거라고 자기가 없어지는 거라고 믿어서 그게 두려워서 절대 미안하다는 말을 못하는 사람일지 모른다고 요즘 생각을 한다,

그냥 못나고 고집세고 안하무인으로 보이는게 차라리 낫다고 믿어버리는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안쓰럽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절대 그런 내색을 나는 하지 않는다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동안 나는 절대 그를 이제는 알거같다는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다

끝까지 모른 척 이해 못하고 알지 못하는 저쪽 별에 사는 사람처럼 대하면서 내가 조금 그를 알아가고 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해인지 오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받아주려고 한다는 걸 절대 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유치하지만 이게 복수라고 믿고 있는 중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루이의 유치한 말과 행동이 속깊은 애들이 쓰는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애들 보다 훨씬 더 전에어른이 되어 가장 무지하고 순진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각자의 무게를 잠시 잊고 웃을 수 있도록 가볍고 어리석은 사람을 자처하는 것이다, 진지하고 냉소적인 아이들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투이의 깊은 속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

 

아니다 속이 깊은 아이들은 아이처럼 유치하게 굴기도 하지만 다 아는 어른 처럼 냉소적이고 진지하기도 하다, 어떤 행동을 보이든 그게 타인의 눈에는 어리게만 보인다는 걸 본인만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거나 웃기거나 혹은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팔짱을 끼고 찡그리고 있거나 그건 지금 내가 몹시 약하고 불안하고 힘들다는 말인데 그걸 사실 타인은 모른다 나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오래되면 그게 나의 본성인듯 여겨진다,

나는 원래 냉소적이고 쿨한 사람이야. 라고 자기를 착각하거나 나는 웃기고 유머감각이 있는 아직은 아이같은 면이 있지.. 하고 자기를 그렇게  정해버린다,

오래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은 이제 내 피부인지 합성고무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처럼 이젠 그런 외피가 없으면 오히려 더 불안하다, 불안을 감추기 위해 써 온 내 겉모습이 이제 내가 된다, 익숙하다, 그렇게 미리 어른이 된 아이들은 나중에 영영 어른이 못되기도 하는 걸까

어릴 적에는 그렇게 조숙해버린 아이가 되었고 나중에 나이를 먹어서는 영원히 철들지 않고 어른이 되지 못한 어정쩡한 나이먹은 아이가 있다,

둘의 공통점은 언제나 지금 현실과 붕 떠있다는 것

아이일 적엔 아이인적이 없었고 지금은 어른이 너무 힘들고 낯설다,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요

이 말이 가장 많이 입을 통해나오면서 가장 저주스러운 말이되었다,

괜찮지 않다고 아무렇지 않을리가 있겠냐고 말을 해야하는데 그건 자존심의 문제가 되기도 하고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하고 언제나 나보다 타인이 더 중심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언제나 괜찮아야 하고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 일들이 쌓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억울하고 억울하고 억울한 마음이 계속 불어났다,

그리고는 이젠 습관처럼 그렇게 말이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간다,

괜찮아요.  별일 아니니까요

세상에 내게 별일은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이제 나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생의 행복과 꼭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엄마가 우리곁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건 생에 대한 무책임도 자기 자신에 대한 방임도 아니었다는 것을....

 

노력한 만큼 보상이 돌아온다,, 라는 말처럼 허무맹랑한 말이 있을까 이렇게 환상적인 환타지가 있을까 세상은 수학공식이 아닌데 늘 들어가는 수에 따라 나오는 수가 일정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박사는 수식의 아름다움을 말하지만 그건 그저 추상적인 수식일 때의 아름다움이다,

세상은 우리가 사는 이곳은 그렇게 딱 떨어지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다,

노력보다 큰 걸 갖는 사람도 있고 노력따위는 쓸모조차 없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해도해도 안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제로섬게임도 아니다, 누가 더 많이 가져서 누가 덜 가져가는 일이아니라 그냥 우연이고 운명이고  신의 장난같은 거다, 신도 가끔은 변덕을 부리거나 마음이 내키거나 말거나 할 일이 있을 테니까,,,,

커다란 우주의 진리는 그러한데 세상은 지금 소수점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세어가며 누가 얼마나 더 많이 노력했는지 더 많이 이루었는지를 깨알처럼 따진다, 이렇게 노력하고 애써서 이만큼 이루었는데 나보다 덜하고 덜 이룬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은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부당하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불을 켜고 세상을 본다, 누가 중간에 새치기를 하는지 누가 노력없이 먹으려고 하는지... 그래서 점점 세상이 모래알처럼 되어가고 있다,

가장 큰 세상의 비밀은 언제나 불공정하고 언제나  모든 것이 비례든 반비례든 딱딱 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인데 그걸 아무도 모른다,

 

 

이외의 다른 최은영의 단편들 속에서도 주인공은 늘 머뭇거리 오래 생각하고 멈칫하고 있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행동이 굼떠 보이고 그래서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 오해를 그냥 내버려둘 수 밖에 없어 혼자 속으로 곪아가기도 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렇게 오래오래 속에서 삭힌 생각들 상대에 대한 생각 자신에 대한 생각들이 배려가 된다,

아 그랬구나

켈리는 사람에게는 제각각의 개인구상개념이 있다고 했다,

내가 본 것 알아낸 것 느낀 것 배운 것들이 모여서 내가 세상을 판단하고 사람을 바라보는 어떤 틀 같이 각각 개인은 개인만의 개인구성개념을 가지게된다, 개인이 어떤 구성개념을 가졌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다 다르고 개인의 성격이 형성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개인의 구성개념은 또 다른 경험이나 감정 생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언제든 바뀔 수 있고 그렇게 딱딱하게 굳기도 하는 것이다,

최은영의 인물들은 모두가 스스로의 개인구성개념을 만들어 간다,

이렇게 봐도 될까 이렇게 받아들여도 될까  저건 어떤 의미일까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거나 오해하는 건 아닐까

그러다 아 다 싫다 피곤하다 남따위는 모르겠다고  주저앉기도 하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타인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그 입장에 서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넓어지고 깊어진 각각의 개인구상개념을 가진다고 하면

켈리박사에게 실례가 될까?

모든 소설속에 내가 있고 내가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면서 그럴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혹은 미워하고 복잡하다가 쥐어짜다가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그를 사랑하는 나를 보기도 한다,

 

박사와 가정부도 서로에게 조심하고 조심하고  고용인과 고용주라는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키다가 서로를 살펴주고 상대가 불편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쌓이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것도 사랑이다,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나는 상대를 생각해서 조언이랍시고 하고 그 입장을 생각해서 말을 꺼내지만

그게 참 어설픈 조언이나 하나마나한 잔소리 심지어 소음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절실히 알아가는 요즘이다,

나는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냥 내가 보기에 저러지 않았으면 좋겠고 좀 더 세심하게 남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이라도 하면 좋겠고 비록 속마음은 아닐지라도  세련된 척 괜찮은 척하라고 조언하고 싶어 죽겠다,

그래도 남의 입장에 함부로 입질하지 말자고 참고참고 참다가 결국은 꼭 사단나는 한마디를 한다

말은 하는게  더 후회가 많고 왠만한 말은 다 사족이다,

내가 타인을 이해고 배려한다는 것

그건 그냥 오래오래 그를 마음에 품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말고

그냥 그럴 수 밖에 없겠구나 하고 믿어주고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냥 웃어주는 것 뿐이란 열패감이 섞인 깨달음이 든다,

아는 건  쉬운데 그렇게 해주는 건 참 어렵다,'

 

공감이라는게....

그게 오히려 폭력으로   전해질 수 도 있겠다 싶어서

열심히 책만 뒤적인 요 몇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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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 작품속의 등장인물은 어느 누구도 타인을 배제하지 않는다,

마을에 새로 들어오는 스즈에게도 나와는 다른 성향의 타인에게도 모두를 끌어안고 간다,

환타지적인 요소라고도 할 수 있지만  가마쿠라 라는 곳에 발을 디디는 순간 누구든 우리가 되어버리고 가마쿠라를 거쳤서 어디로 갔던 누구든 여전히 우리가 된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

어쩌면 조금 조심스럽고  적당한 간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어색함이랄까 거리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만큼 거리는 있을 지언정 사이에 금을 긋지는 않는다,

먼 우리 가까운 우리 조금 어중간한 우리들이 모여  이야기를 이어간다,

새로운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들의 시선, 전학생을 바라보는 동급생들의 시선

다리를  잃은 친구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

유부남을 사랑하는 사치를 바라보는 동생들과 축구 코치의 시선

스포츠 용품 점장과 카페 주인 아저씨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그 두사람이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 등등

모두가 타인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우리라고 생각한다.... 고 나는 믿는다,

만화니까 할 수 있는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곱권의 만화속에서 누구하나 타인은 없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아버지는 말한다

타인의  신발에 발을 넣어보기전에 판단하지 말라고

우리가 은연중에 받아들인 어떤 가치관이나  그냥 습관적으로  여기는 생각의 좌표속에 어쩌면 큰 편견이 있고 어떤 틀이 있어서 우리와 타인을 구분하고 타인을 나쁘다고 규정하고 벽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흑인이 나쁜게 아니고 마을에서 은둔하고 있는 이웃이 나쁜게 아니다,

우리는 그들을 잘 모를 뿐이다,

알고 나서 그가 악한 사람인게 드러난 후에 미워해도 늦지 않다,

우리가 타인과 다른 건 당연하지만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라고 남매에게 말해준다,

 

 

 

 

1968년  아이오와주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푸른눈 갈색눈의 체험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누군가를 편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차별을 하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는게 아니다,

아니 이유는 있지만 그 이유의 근원이 늘 옳은게 아니라는 것

누구든 누구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른 것들사이에서 기어이 동질감을 찾아내고 학연 혈연 지연 피부색 종교 신념으로 덩어리를 만들고 다른 덩어리들과 구분하면서 우리를 더 멋지고 옳다고 믿기위해 다른 덩어리들을 계속 깍아 내린다,

내가 더 우월해지는 일은 내가 올라갈 수 있는 어떤 방향이 아니라 타인들을 끌어내리른 것으로 드러내려고 한다,

 

#2

 

현재 우리 사회에도 많은 우리와 많은 타인이 존재한다,

다문화가정이 많아진 만큼 인종적인 문제도 새롭게 드러나고

남자냐 여자냐의 문제

어느 지역 출신이냐의 문제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의 문제

나아가 집의 평수에 따라 사는 동네에 따라

심지어 어떤 계급의 부모를 가졌느냐에 따라 많은 구분들이 있다,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끈끈한 의리를 드러낼수록 그 끈끈한 우리바깥이 존재할 수 밖에 없아,

우리는 점점 끈끈해지고 의리있고 간도 빼주지만 우리가 아닌 타인은 그냥 투명해서 보이지 않거나  두렵거나 성가실 뿐이다,

차라리 콩가루처럼 하나하나 제각각 제멋에 놀고 나만 생각하고 고민하는 쪽이 오히려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본다,

나만 빼고 모두가 타자라면 타인이라면 그건 외로울 일도 없고 이방인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을까

너무 극단적인가?

 

어쩌면 이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없어지면서 그 틀은 더욱 견고해지고 우리끼리라는 내부적 단결이 강해지고 그 내부의 순수함을 더 강하게 지키고 싶어한다,

조금이라도 타인이 섞이는 것 그래서 어색해지고 내키는대로 말하고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어색하고 싫어서 그저 편하고 잘 아는 ... 서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를 더 편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이 편해지고 더 이상 우리 이외의 것에 호기심이 생기지도 않고 관심이 생길 필요가 없다면 벽은 더욱 높아지고 견고해진다,

편한 걸 마다할 이유가 없다,

편하고 익숙하다는 것만으로도 차별을 진행된다,

어떤 인식이 없고 나는 아무런  편견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나만의 익숙함에 만족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차별이 될 수 있다,

상상력을 가지고 누군가 다른 이의 입장을 생각해보는 것

차별을 줄이는 건 거기서 시작할 수 있다,

 

#3

 

모든 남자가 여혐은 아닐것이고 잠재적 범죄자는 아니라고 주장만을 할게 아니라

여자들이 두려워하는 현실을  한 번 쯤은 상상해보고 공감하려고 해보라는 거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다닐 수 있는 밤길이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의 원인일거구

그냥 내 마음이 급해서 발걸음을 빠르게 하며 앞사람을 따라잡았던 그 순간

그 앞사람은 혼자 생사를 오가는 상상을 했을 수도 있다고

어두운 골목길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고 벽으로 밀어붙이고 안아주는 연애가 누군가에게는 폭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는 것

내 좋은 의도가 상대에게도 똑같은 모양으로 갈 수 없을 수도 있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면 안될까,.. 라고

돈이 많은 집안의 어린이까지 공짜 급식을 먹을 필요는 없지않으냐는 합리적인 사고대신

의무교육중인 학생들은 누구나 공평하게 의무급식을 해야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 해볼 수 있는 것 , 내가 베푸는 선의의 시혜가 누군가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상처일수도 있다는 사고의 확장이 필요하다,

 

무언가 대단한 활동을 하는게 아니라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 내가 어떤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상식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는 순간 나의 경계가 더욱 확대되지 않을까

나와 같은 사람은 누구도 없다,

비슷한 사람은 있을지라도  하나하나는 다 다르다,

결국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사회생활이 가능하다,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 함께 먹고 함께 일한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웃어야 하는 것이다,

 

내 삶에서 타인이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으면 한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 타인은 궁금하고  신비로운 존재이길 바란다,

알지 못하는 대상이 무섭고 공포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확장이었으면,....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서,...

한줄 이상의 일기를 주저리주저리 오래오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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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16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특정 대상이나 상대방의 사정을 모르면 그/그것에 대한 편견이 생겨요. 그리고 그 편견을 바라보는 관점이 ‘차이’가 아니라 ‘차별’로 형성되고요. 타자를 알아야 편견의 오류를 알아낼 수 있는데, 무능한 생각이 들통날까봐 일부러 회피하는 것 같습니다. 편견의 가해나자 피해자 모두 지치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푸른희망 2016-06-16 18:3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모르면 두럽고 두려운건 나쁜 거라고 여기죠.다른건 결국 틀린것이되구요
 

 

수학여행가는 에피소드에서

"남자들은 바보가 한 명 있으면 휘둘리기 마련이야" 하든가

"바보는 쉽게 전염된다"는 말

한 사람이 바보짓을 하면 다른 사람도 쉽게 따라하게 된다는 뜻일게다 아마...

그 말이 따뜻했다,

바보를 바보라고 따돌리지 않고 그냥 어울린다는 말이라고 받아들였다,

넌 바보고 멍청하니까 우리가 될 수 없다고 우리 밖에 놔둬 버리는게 아니라

같이 바보가 되어 버리는 그런 멍청하고 어이없는 행동이 따뜻하다

 

7권동안 어떤 악인도 없다,

까칠하고 직설적인 사람들도 있고 철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악한 사람은 없다,

누구나 따뜻하게 받아주고 스며든다,

가마쿠라에 살러온 스즈를 맞이한 세자매뿐 아니라 축구하는 친구들  신용금고 사람들  식당 사람들 누구나 함께 어우러지는게 이 만화의 매력

 

이번 회는 읽으면서 울컥한 부분이 많이 생겼다,

사치가 따뜻해졌고  요시노가 외롭지 않게 생겼다, 스즈의 꽤 괜찮은 남친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다만 치카가 걸리지만 별일 아니기를....

누군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 좋다,

칼칼한 그 카페라고 우기는 식당이 되어버린 가게 아저씨같은 사람이 내 주변에도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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