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거나 슬픈 장면을 봐도 가슴에서 욱하고 치어 오르는게 있지만 어느 순간 내가 나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

"그만한 일로 우는 거 아닌거 같은데"

그러면 희안하게도 눈물은 쑥 들어가고 가슴을 막고 있던 것이 풀린다, 다만 치밀어 오른 무언가가 남긴 묵직한 통증과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감정이 남겨놓은 목매임만 남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면서  내내 한 생각은 그거였다

"울음이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다행히 적재적소에서 울음이 나왔고 무사히 상을 치르고 돌아왔다,

나는 누군가의 앞에서 우는 일이 싫었다,

물론 한 번도 남앞에서 울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울지 않는다

울음이 터져고 참아내는 힘이 더 강해서 언제나 누르는 쪽이 이긴다

함께 영화를 보고 옆사람은 눈물콧물을 쏟으며 휴지를 뽑아낼 때도 나는 그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게 다다,  슬프다, 마음 아프다, 그 인물이 공감되고 구구절절 이해된다, 그런데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무슨 병일까?

우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걸까

 

그런 내가 책을 읽고 펑펑 정말 소리내어 펑펑 운 적이 있다,

딱  두권의 책

 

 

 

 

 

 

 

 

 

 

 

 

 

 

 

나도 어쩌지 못할만큼 눈물이 나더니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어쩌면 처음 읽었으니까 그럴거라고 시간이 한 참 지난 후 다시 읽었더니 여전히 나는 꺽꺽 울었다,

누군가 들을까 조바심내며 울음을 삼켜도  꺽꺽거렸다,

이후 두 권은 내게 금서가 되었다,

그리고 어제 저녁세번째 책이 찾아왔다

 

<기억의 빈자리>

진짜 별 이야기  아니고 심지어 해피엔딩임에도 꺽꺽대며 무언가가 올라왔다,

당황스러웠다, 이러려는게 아니었는데

다행히 12시가 훨씬 넘었고 대부분 잠들고 큰아이는 방에서 수학숙제를 하고 있을거고 혼자 거실에 있어서 얼른 입을 막고 참아냈다,

나이를 먹으면 눈물이 많아진다더니 정말 늙었나싶어서 그냥 억지로 잠을 청해버렸다

 

다시 곰곰히 생각 해본다,

이 세권의 책이 왜 나를 울렸을까?  그건 모르겠다,

나랑 비슷한 무언가가 있나?

나를 스치는 무언가가 있나?

모르겠다,

그렇다면 세권의 공통점은 있나?

금서가 된 세권을 나란히 놓고 본다,

생각해본다,

세권은 모두 그랬다,

주인공이 너무 너무 아프고 힘든데 한 번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다, 그냥 꾸역꾸역 견뎌냈고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하고 있었다

동구는 가족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어린아이인 척 아무것도 모른적 괜찮은 적 모두가 나에게 화풀이를 하고 스트레스를 풀어대는 걸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다,

나의 나종지닌 것의 화자는 아들의 죽음을 속으로 삼키고 한번이라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 민가협 활동으로 사회운동으로 더욱 씩씩해져야 할 이유들을 생각해내면서 내 개인적 아픔을 묻었다,

제이미 역시 괜찮은 척 살고 있다, 말을 건네고 위로 받을 대상도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혼자 그 기억을 지우고 싶어할 뿐이었다,

셋다 혼자 짊어지고 끙끙대면서도 자기가  왜 아픈지 왜 힘든지 모르는 그저 얼굴은 웃고 있는 삐에로 같은 인물이었다,

아... 난 그저 견디는 인물들이 아팠구나

 

나는 울지 않는 아이였다,

어린 시절 잠시 스케이트를 배운 적이 있는데 그 때 코치가 무슨 이유인지 (어쩌면 맹장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입원을 했고 엄마와 언니와 친구와 친구 엄마와 병문안을 간 전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때였던 거 같고 병원까지는 갔는데 나 혼자 병실을 들어가지 못했다,

무어라 무어라 고집을 피우며 나는 안 들어가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랬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나 혼자도 아니었고 함께 우우 들어갔다가 잠시 얼굴 보고 나오면 그만인 자리였고 다들  아는 사람들이엇는데 나는 병실이니 문병이니 하는 것이 두려웠던 거 같다.

결국 나머지만 들어갔다 나왔고 나는 밖에서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진 않았다. 뭐 취미로 배우는 스케이트 강사랑 무슨 말이 많이 있겠는가

굳이 갈 필요도 없던거 같지만 그땐 정이 더 있던 때가 그랬나 싶기도 하고

그때 나오면서 엄마고 나더라 독하다고 독하게 여기까지 와서 안들어 가냐고 했었고

나는 이유없이 억울하고 아니라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말대답도 없으니 더 지독하다고 했던 것도 같고

뭐 그런 오래된 기억이 있었다,

 

이후 아버지가 입원을 오래하셨음에도 나는 자주 가지 않았다,

가야한다는 부담은 안고 있으면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걱정되는 마음 불안한 마음이 뒤엉키면서 나 자신도 어쩌지 못해 누군가를 찾아가고 위로하고 살핀다는 것이 자신없었다. 어쩌면 이기적인 것일 수도 있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나중에 그 일로 섭섭했다고 엄마가 뭐라고 하셔도 할 말이 없었고 면목도 없었지만 그땐 정말 힘들었다,  막상 병실에 들어가면 곰살맞게 말도 잘 하고 눈치껏 움직이며 도와드리지만 들어서기 전까지 내 마음이 지옥이고 전쟁이었음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순간 우는 게 힘들었고 위로받는게 힘들었고 견디는게 편해졌다,

지금도 누군가가 칭찬하고 좋은 말을 하는 건 부끄럽고 어렵다,

오히려 충고나 비난은 쉽게 흘려 넘긴다, 그러든가 말든가... 뭐

그러나 칭찬이나 공감의 말은 왠지 간지럽다. 얼굴에 개미가 열을 지어 지나가는 느낌. 얼른 이자리를 빨리 뜨고 싶다는 안달감. 내 것이 아닌걸 받아든 난처함이 나를  채운다.

왜 난 칭찬에 약할까 왜 난 위로나  지지에 약할까

내가 가장 편한 상황은 아무도 아무말도 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저 알겠다고 고개만 한두번 끄덕이고 말없이 옆에 앉아주는 사람이 가장 편하고 위안되는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나 역시 누군가 아파하고 힘들어할 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냥 얖에서 등만 쓸어주는 것이 전부다

내가 보여주는 행동은 단순해서 때떄로 무심하다고 오해받기도 하지만 내 속은 정신없이 휘몰아친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어떤 말을 해야할까? 그냥 침묵하고 있어도 괜찮을까?

옆에 있는게 거추장스럽진 않을까? 그렇다고 혼자 두면 또 무심하다고 하지 않을까?

나는 내내 불편하고 불안하면서도 곁을 떠날 수도 없다

 

 

 

 

 

 

 

 

 

 

 

 

 

 

나와 닮은 아이를 찾았다. 모모

로자 아줌마를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옆에 있다고 해도 뭔가 해줄 수도 없는 모모는 거리를 서성인다. 누군가를 만나고  이야기하고 관심을 돌리고 싶지만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는 로자 아줌마를 떼어 낼 수 없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살아내야하는 이유가 로자 아줌마이기도 했을 것이다.

울지 않는 모모

누군가에게 아프다고 말해 본 적이 없는 모모,

그래서 감정을 나누는 것이 서툰 모모 그래서 늘 외로웠지만 외롭다는 감정조차 알지 못했던 모모가 마음에 들어왔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 일은 달걀을 훔치고 따귀를 맞는 일이고 권총으로 은행을 털어서 주목을 받는것 이외를 생각할 수 없는 아이

그냥 아무도 몰라도 상관없다고 여기지만 그 속에서는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손을 잡아주고 괜찮다고 그동안 애썼다고 등을 쓸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아이였다,

누구앞에서도 울지 않고 누구에게 위로받는 것이 어색한 내가 거기 있었다.

나는 모모처럼 창녀의 버려진 자식도 아니었고 배고픔과 무관심에 익숙한 아이도 아니었는데

나는 늘 외롭고 쓸쓸하고 아득했다.

아이에게도 그런 감정이 스며들 수 있는 걸까?

지금 돌아보면 조숙했던 건지 영악했던건지 아니면 그저 어른 흉내를 내고 싶은 허당이었는지모르겠지만 늘 쓸쓸하고 아득한 감정이 있었다는 기억은 있다,

뭐가 힘드냐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무어라고 꼭 집어 말 할 수는 없는데  딱히 힘든 건 아닌데 아득하고 막막한 기분이었다,

그냥 앞이 뿌연거 같기도 하고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다는 기분도 있고 또 누구에게도 기대서는 안된다는  강박도 있었던 거같다.

울어서도 안되고 힘들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늘 가득했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그래야 한다고 말해준것도 아니지만 그랬다,

모모도 누가 시킨건 아니다. 상황이 그랬다고 할 수 있을거고 제이미도 누군가에게 들어서 설득을 당했던 것도 아니다. 소설속의 어떤 인물도 그냥 알게 된 것이다,

이제 징징거려서도 안되고 누군가에게 내 연한 속살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

그건 타인에게 나온 소리가 아니라 내 안속에서 나온 목소리였고  우리는 그 소리에 길들여졌고익숙해졌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어색했고 마음과는 다르게 냉정하기도 하고 매몰차기도 했을 모습에 스스로 익숙해지면서 많이 외로웠다.

나는 스스로 내 속에 깊은 우물을 지니고 있었다,

그 깊은 우물속에 돌을 던지면 절대 풍덩이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다

그 속에 나는 모든 걸 넣어두었던 모양이다,

울고 싶은 마음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화가나고 터져버리고 싶은 마음

날뛰며 기쁨을 마구 뿌리고 싶은 마음 사랑한다고 설레임을 전하고 싶은 마음마저 나는 모두 우물속에 넣어두였다,

나의 모든 마음은 우물속에 있고 나는 서늘하고 건조하게 서 있다.

내 감정은 깊은 우물속에 있어 그 구체적인 모습은 보이질 않으니 나는 늘 외롭고 서늘하고 먹먹했던 것일까

 

그렇게 우물속에 봉인되었던 감정이 책과 함께 올라온다,

그 감정의 이름을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솔직하게 마주해야할 것이다.

자꾸 따지고 분석해서 지치지 말고 그냥 가만히 들여다 봐야 할거같다

 

책을 읽는 좋은 이유중 또 하나가 나를 알아간다는 것도 있다는 걸 세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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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었다, 무슨 일을 하든 글을 쓰는 것과 관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었다

그러나 나는 전형적인 머리속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글이란 진중한 엉덩이와 펜 끝에서 나온다는 걸 몰랐다,

그저 머리속으로 집을 수십채를 지었다 허물면서 글을 그려내고 있었다,

늘 생각은 많았다,

아이가 어려서 생각하고 고생하고 자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늘 이야기는 머리속에서만 맴돌았고 펜끝에서는 늘  손끝이 떨려서 점점점만 나왔다,

나중에 그런 이야기가 성장소설이라는 걸 알았다,

글을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고 들어서 줄곧 읽어댔다, 어떤 원칙도 없이 흥미위주로 읽고 어려워 보이는 책들은 그냥 꾸역꾸역 읽었다,. 그리고 차라리 읽은 책에 대해 글을 쓰면 어떨까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여자가 낸 책을 누가 볼까 싶어 어쩌면 어떤 네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궁리만 하다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한 참 후에 독서에 관한 책들이 쏟아졌다, 유명한 사람도 있었지만 의외로 누구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드라마를 쓰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 누구나 그렇듯이

운명적인 사랑이 아니라고 그냥 오래 공기처럼 물처럼 있던 친구가 연인이 되는 이야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밋밋한가 싶었다, 연애경험도 없고 오래된 이성친구 따위는 더구나 없던 내게 이야기는 그저 구름위의 개미집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질투"라는 드라마가 나왔다,

나는  나혼자 늘 몇발 앞서 있었다, 내 생각속에서

글은 여전히 머리속에서 뭉개뭉개 그렸고 노트들은 앞의 몇장만 빽빽하게 채워진 채로 쌓여만 갔다,  한 번은 자원절약 차원에서 앞장을 모주 북북 찢고 새로 이용하기로 했다,

찢어낸 종이뭉치를 그냥 버리려다 한 번 읽었더니 어.. 제법이었다,

버리기 아까웠다, 그리도 혹시나 싶어 파일에 챙겨두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서랍아래서 잊혀지고 있는 중이다,

일단 일기를 쓰기로 했다,'나날이 무료했다. 화끈한 사건도 없었다, 당연히 쓸 이야기도 없다,

나는 나이를 먹도록 초등학교 2학년이상의 일기를 쓸 수 없었다, 하루에 기막힌 일이 없다면 쓸거리가 없어 지루해 하는 단순한 아이 그 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여전히 방황하고 꿈만 꾸고 있었다,

글쓰기 책들은 책장에서 새책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잊혀져 가고  나는 여전히 웹서핑에서 그런 책들만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남이 쓴 책 읽은 이야기도 열심히 읽었다,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단지 그는 그 생각이 문장으로 나올 수 있었고 나는 여전히 내 머리 속에서만 맴돈다는 것이 다른 뿐이었다,

읽고 쓰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떤 생산성도 없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내 삶의 일부였다, 누가 그랬더라 시간많은 백수가 문화적으로 더 고상하고 수준높은 면이 있다고

딱 내가 그랬다, 일이 없고 시간이 많으니.. 아니 솔직이 내 일을 내팽개치고 났더니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끄적일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났다,

책에 씌여진 이야기처럼 나도 시간을 정해서 무조건 쓰자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

반짝 삼일을 했다, 역시 작심삼일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것이 오래된 진리라는 것만 깨우치고 끝났다,

나는 계속 읽고 있었고 그 이외의 즐거움이 없었다,

삶이 지루하고 무료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sns가 생겨나면서 세상의 모둔 은둔 고수들이 드러났다,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무지하게 많다,

이야기를 잘 쓰는 사람, 유머있게 쓸 줄 아는 사람, 이성적으로 쓸 줄 아는 사람 멋진 말들을 나열하길 잘하는 사람  라디오 방송의 오프닝처럼 쓰는 사람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며 쓰는 사람 세상에 잘 쓰는 사람은 너무 널렸고 책은 너무 많아졌고 작가는  내 이웃에도 있었다,

갑자기 세상의 나무들이 안쓰러워졌다, 서점에는 이렇게 책이 많은데  그리고 이렇게 쉽게 잊혀지고 있는데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요즘 케이블이며 종편이며 텔레비젼 보는 맛을 들이다 보면 세상에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많은지 몰랐다, 모든 오디션 프로에 가수를 흉내내는 프로에 계속 사람들이 흘러넘쳤고 그들은 어느 가수 못지 않았다,

이곳 알라딘만해도 작가들은 흘러넘친다,  세상에 숨든 고수들은 어디든 무리지어 있었다, 이젠 고수라고 할 수 없을만큼 글을 쓴다는 것은 그저 흔한 재능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에전에 책을 많이 읽었고 한때 좀 쓴다고 여겨졌었던 어떤 중년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책들을 부지런히 모으고 읽고 또 읽고 있다,

문구코너에 갈 때마다 노트는 하나 둘씩 필기구도 하나둘 씩 사 모으지만 그것들은 서랍에서 책장 한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 쓰고 계속 텅 빈 채 잊혀지고 있지만 책들은 밑줄이 그어지고 귀퉁이가 접혀가며 쌓이고 있다,

난 여전히 쓰지않고 쓰기를 배우는 중이었다,

글로 배운 글쓰기 글로 배운 책읽기

나는 전형적인 모든 걸 책으로 배우고 실전경혐은 꽝인 인간형으로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목록에 두 권의 책을 더 추가하고 있다,

 

 

 

 

 

 

 

 

 

 

 

 

 

 

 

 

이게 머리로 쓰는 글쓰기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내가 무엇을 쓸지 알 수 없으니 픽션과 논픽션 두가지를 모두 읽기로 한다

문제는 이 두 저자가 글을 잘 쓴다는 거다

굳이 글을 써야한다는 강박없이 그냥 읽어도 재미있다,

이게 글쓰기 비법을 풀어놓은 책인지 그걸 미끼로 던지는 개인적인 에세이인지 그 정체가 모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열심히 줄을 그어가면서 읽고 있다.

글을 쓴다는 건 나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걸 이제 비로소 깨닫는다,

나를 꽁꽁 감추고  무언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 다른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며 쓰는 글은 사기도 아니고 뭣도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나를 드러내는 방법을 몰랐다는 걸 알았다,

나를 드러내는 방식이 지어낸 이야기든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글이라 하더라도 두가지에 다 해당된다. 내가 쓴 글에는 내가 들어갈 수 밖에 없다,

허접하고 짧은 식견과 완고하고 오만한 고집도 있고 귀가 얇아 모든 말에 솔직하는 가벼움도 들어갈 것이다.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그 빈곤함을 드러내는 글이 어쩌면 화려하게 치장하고 감추어 둔 나 자신보다 더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 그걸 두 책의 저자 그리고 그동안 읽은 모든 글쓰기 책의 저자는 이야기 해준다,

 

결국은 쓰라는 거다

나를 드러내든 논리를 세우고 검증을 하며 칼을 갈든 일단은 쓰고 볼 일이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쓰고 손으로 쓴다

뭐라도 끄적여야 글이 되는 거지

 

하루가 지났다 즐거운게 없다. 어제와 같다 끝

하고 공책을 덮어버리는 어린시절 일기처럼 뭐라도 쓴 건 글이 되겠지만 머리속으로 쌓은 웅장한 만리장성은 그냥 허상이다,

 

모든 책을 읽은 결론..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아니 이전 이 모든 책을 읽을 필요가 없었다,

김연수의 글에서 딱 하나가 기억난다,

용기는 동사라고 했던가. 행동하는 것 움직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가물가물

그렇다, 일단 쓰고 볼 일이다,

이것이 좋은 글인지 나쁜 글인지는 다 쓰기 전엔 알 수 없는 일이다,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걸 듣고 밑줄 좍좍 그어봐야 아무 소용없다,

너는 너고 나는 나만의 글쓰기 방법으로 쓸 수 밖에,,

많이 비문이 나오고 잡스럽고 문장이 어수선해서 내가 진심을 담아 쓰면 그게 좋은거라고 그렇게 끝을 맺어보자고 그게 모든 글쓰기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이다,

고로 .. 앞으로 쓸데없는 데는 절대 돈을 쓰지 말아야겠다,

안그래도 사고싶은 책은 넘처나는데 굳이 이런 책들은 그냥 가볍게 넘겨야겠다,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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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벤트]


 1. 모집 기간: 12월 16일(화) ~ 22일(월)

당첨자 발표 : 12월 23일(화)

서평단에 선정되신 분은 12월 28일(일)까지 개인정보를 비밀 댓글로 적어주세요!

12월 28일(일)까지 확인이 되지 않으면 선정이 자동 취소됩니다.

서평 기간 : 12월 29일(월)~1월 9일(금)


2. 인원: 10명 (최종 응모자 수에 따라, 추첨 인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3. 참여 방법


- 응모 방법: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와 스크랩 주소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 서평 방법 : 서평 기간 동안 알라딘 계정으로 서평을 작성 후, 

<녹스머신> 서평단 발표 포스팅에 알라딘 개인 블로그와 그 외 블로그, 외부 채널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셔야 완료됩니다.




“본격 미스터리와 본격 SF, 두 장르의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의 탄생!” 

                  - 오모리 노조미(평론가, SF번역가)


시간여행과 같은 장르 장치에 그럴싸하게 들리는 현대물리학 지식을 총동원해 얹었다고 해서 《녹스머신》에 실린 단편들의 SF적 속성을 직설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노리즈키 린타로가 이 책에서 들려주는 네 편의 현란한 모험담이, 퍼즐 추리소설에 대한 연구와 예찬이 극한에 이르면 어쩔 수 없이 SF의 지평선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막힌 예라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듀나(영화평론가, SF작가)


첫 장을 펴면서 가졌던 호기심이 작품 내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서 오히려 마지막 장이 아쉬워졌다.향만 피워도 가능해졌던 유치한(?) 시간여행이 진지하게 자기자리를 찾았고, 지끈지끈한 양자역학 문제 역시 기발한 미스터리로 변신했다. 내게는 최고의 미스터리인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을 작품 안에서 되살려준 작가에게 감사를!                                       

- 김상연(과학동아 편집장) 




▌2014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1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3위, ‘본격미스터리 베스트 10’ 4위 등 화려한 수상에 빛나는,

  논리와 기발한 생각의 원더랜드!

 

《녹스머신》은 2013년 3월 일본에서 출간되어 독자들을 뜨겁게 달군 그야말로 ‘핫한’ 소설이다. 많은 작품을 쓰지 않는 저자 노리즈키 린타로는, 신작을 펴내면 어김없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본격 미스터리 대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이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등 미스터리 분야의 1~2위 상을 석권하는 거장 중 거장이다. 그 점에서는 《녹스머신》 역시 마찬가지다.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3위, ‘본격미스터리 베스트 10’ 4위에 올랐으며,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와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이렇듯 절대적인 독자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착상의 기발함과 신선함, 논리적이고도 과학적인 추리, 허를 찌르는 반전 등 미스터리 소설이 가져야 할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매번 독자들은 ‘이번에는 또 어떤 기발한 스토리와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나를 놀라게 하고 짜릿한 미스터리의 세계에 빠져들게 할까’라는 기대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녹스 머신》에 수록된 네 편의 작품은 기발한 상상력과 탄탄한 논리력, 추리력으로 무장한 SF 미스터리이다. 각 작품은 연작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녹스 머신〉과 〈논리증발 - 녹스 머신 2〉는 발표 직후 SF 미스터리의 역사를 새롭게 쓸 위대한 소설로 찬사 받은 바 있으며, 〈바벨의 감옥〉은 천재적인 작가의 상상력에 한계가 없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준 공전의 히트 탈옥소설이다. 〈들러리클럽의 음모〉는 불멸의 고전 추리물에서 주인공인 셜록 홈스와 에르큘 포와로의 조수로 등장하는 왓슨 박사, 헤이스팅스 대위 등 이른바 ‘들러리’들이 모여 추리소설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서로 합종연횡하며 미스터리의 최고 거장 애거서 크리스티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는 스토리로 신선함을 더해 준다. 

소설을 읽다 보면 머릿속에 퍼즐 조각이 펼쳐지고 작가가 걸어오는 두뇌싸움에 휘말린다. 각각의 작품들은 완벽하게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절묘하게 연결돼 있다. 촘촘한 논리의 구조 속을 헤치고 나와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다시 첫 번째 소설의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 복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탐정소설에 중국인을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

                              ― 로널드 A. 녹스(Ronald A. Knox)


대표작품이자 표제작인 <녹스머신>은 이 문구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가톨릭신부이자 추리소설가였던 로널드 녹스가 쓴, 추리소설의 원칙인 〈녹스의 십계〉중 한 항목이다. 녹스는 모두 열 개의 탐정소설 규칙을 정리했는데, 그중 도저히 해석 불가능한 독특한 항목이 하나 존재한다. 바로 제5항 “중국인을 탐정소설에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이다.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네 편의 소설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촘촘한 논리의 그물망을 치기 시작한다. 시간여행과 양자역학 그리고 미래사회에서의 소설읽기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없는 상상력을 풀어나간다.


2058년 4월의 어느 날, 유안 친루 박사는 국가과학기술국으로부터 소환장을 받는다. 영국작가 로널드 녹스가 1928년에 발표한 〈녹스의 십계〉를 주제로 쓴 그의 논문에 양방향 시간여행의 난제를 해결할 결정적인 실마리가 있다는 것. 유안은 녹스가 이 책을 집필하던 130년 전으로 돌아가 양방향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돌아오라는 임무를 맡게 되는데……. 


편집자 코멘트> 

200여 쪽의 짧은 소설집이지만 각각의 작품들은 서로 놀라운 반전을 거듭하면서 종에서 횡으로 연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리라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여름 휴가지보다는 잠이 오지 않는 깊은 겨울밤의 독서를 추천한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면 당신도 역시 일본 아마존에 남겨진 것처럼 “굉장한 소설이다. 이 한마디밖에는!”이라는 멘트를 내뱉게 될 것이다. 아, 밝혀둘 것이라면, 다음날 충혈된 눈은 보상할 수 없다. 또 이 작품 속에 언급되는 애거서 크리스티나 앨러리 퀸의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 예정에 없던 지출을 하게 되는 것도.



▌책 속으로


불겅그레받이가 일곱 색깔 무지개로 빛나는가 싶더니 난로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거기서 끝없는 심연의 검은 구멍이 열렸다. 그 구멍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얼굴 전체를 덮은 희한한 모양의 헬멧을 쓰고 은색 잠수복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등에는 커다란 상자 같은 것을 짊어지고 있었다. 녹스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채 헤벌쭉 입을 벌리고, 그 인물이 헬멧을 벗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늘게 찢어진 눈매의 동양인 남성이었다.

“자네, 대체 어디로 들어왔나?”

녹스가 억누른 음성으로 묻자 남자는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이쪽을 보고 되물었다.

“혹시 로널드 녹스 사제이십니까?”

직위인 사제와 경칭인 신부를 혼동하는 점만 빼면 동양인 특유의 어투가 느껴지지 않는 매끄러운 발음의 영어였다.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젊은 남자로, 유약한 인상을 벗어던질 수는 없지만 눈동자에는 지성의 빛이 살아 있었다.

“그렇네만, 자네는 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네.”

“죄송합니다. 그 질문에 답변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여기는 1929년 2월 28일 옥스퍼드입니까?”

참으로 이상한 질문을 하는 남자라고 생각하면서 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무사히 도착했군요! 집필 중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녹스 사제님. 소개가 늦었는데, 제 이름은 유안 친루입니다. 2058년 중국에서 온 시간여행자입니다.”

  ― <녹스머신> 중. 본문 52~53쪽



밴 다인은 클럽의 긴급이사회에서 크리스티 여사에 대한 탄핵 연설을 했다. 들러리 클럽에 대한 모욕죄,

독자에 대한 사기죄 그리고 탐정소설 형식 자체에 대한 모독죄로 《에크로이드 살인사건》의 죄상을 열

거하고는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탐정소설계의 규율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지금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들러리클럽의 음모> 중. 본문 100쪽



고전 탐정소설을 읽기 시작한 계기는 거린다 고모의 양자장서에 있던 애거서 크리스티 컬렉션이었다. 크리스티 작품을 다 읽고 추천 목록에 이끌려 황금기의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빠짐없이 찾아 읽은 뒤 어떤 가상현실보다도 자신의 감성에 맞는, 미스터리와 논리의 이상향에 다다랐다. 그것이 바로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였다.

  ― <논리증발> 중. 본문 194~195쪽


▌저‧역자 소개


지은이_ 노리즈키 린타로

추리소설 작가이자 평론가. 일본 추리소설의 흐름을 뒤바꿔놓은 신본격파(新本格派)의 대표작가 중 한 명이다. 1964년 시마네 현에서 태어나 교토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교토 대학교 추리소설 연구회에서 현재 일본 추리소설을 이끌고 있는 아비코 다케마루, 아야쓰지 유키토 등과 함께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1988년에 쓴 첫 소설 <밀폐교실>을 눈여겨본 대작가 시마다 소지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에도가와 란포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미국 추리소설의 거장인 엘러리 퀸에 매료되어 그녀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컨대, 천재 탐정이 등장해 단숨에 난제를 해결하는 현실성 없는 전개에 의지하기보다는 차근차근 치밀한 논리와 추리를 전개시켜 범인을 좁혀나가며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또 추리소설의 존재 의의나 밀실 구성의 필연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고뇌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엄격함을 기반으로 치밀하게 구축되는 추리소설을 쓰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장르의 근원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다고 평가받는다. 

〈도시 전설 퍼즐〉로 제55회 단편 부문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로 제5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 2005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2005년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에 올랐다. 《킹을 찾아라》는 교환 살인을 소재로 도입부에서 범인과 동기를 밝히는 ‘도서(倒敍) 추리’를 도입한 형식으로 2013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이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2위 등 각종 미스터리 문학 순위에 올라 저력을 과시했다. 그 밖의 작품으로 《요리코를 위하여》, 《1의 비극》, 《또다시 붉은 악몽》,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눈 밀실》,《수수께끼가 다 풀리면》 등이 있다. 《녹스머신》은 2014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1위에 선정되었다. 


옮긴이_ 박재현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상명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외국어전문학교 일한 통・번역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도서 저작권 에이전트로 일했으며, 현재는 출판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에 《유령인명구조대》, 《하늘색 히치하이커》,  《도망치지 마 미하루 씨》,  《움직이는 집의 살인》, 《회오리바람 식당의 밤》, 《토막 난 시체의 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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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인문교양 출판그룹 반비입니다. ^^


사이언스북스에서 제인 구달 신간, 나의 조선미술 순례』가 출간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서경식의 신간으로, 조국의 미술가들을 직접 만나 예술을 탐구하고

그에 얽힌 조선의 역사와 더불어 자아를 찾아가기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







『나의 조선미술 순례』


디아스포라 서경식이 만난

조국의 미술과 미술가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이후 20년, 

디아스포라 서경식의 또 다른 미술 순례기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저자로서 기억하게 된 것은 1993년 번역 출간된 『나의 서양미술 순례』 덕분일 것이다. 이 책은 이제는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 거의 하나의 분야로 자리 잡은 ‘미술 기행’의 거의 첫 출발에 해당하는 책이었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판매되는 몇 안 되는 미술 기행기이기도 하다. 

많은 독자들이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통해 그림 읽기의 새롭고도 친근한 방법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조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형들(서승, 서준식)의 옥바라지를 하는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에게 유럽의 다양한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은 지하실에 난 창문으로 겨우 들어오는 희박한 공기였다고, 저자는 그 책에서 기록한 바 있다. 예술이 역사와 현실과 삶과 독특하게 뒤섞이며 서로를 해석하거나 확장하는 놀라운 장면들이 그 책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번에 출간되는 『나의 조선미술 순례』에서 저자는 이제 60대가 되어 유럽의 미술관이 아닌 한국의 미술관들을 순례한다.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이 집착했던 주제들, 죽음, 섹슈얼리티, 가족, 민족…… 같은 것들이 여전히 60대 재일조선인 노교수의 눈과 귀와 온갖 감각들을 사로잡고 날카로운 통찰들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과 삶의 변화를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 지점들 역시 드러난다. 

가령 저자는 이제 홀로 유럽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작품과 고독하게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F와 함께 때로는 제자들과 함께 ‘조국’의 미술관을 찾는다. 그리고 정말로 원한다면 그 작품을 만든 작가들과 직접 한국어로 대화를 할 수도 있다. 조국은 더 이상 그가 70년대에 보았던 군사독재 치하의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또 이제 형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조국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와 활동을 위해 찾게 되었다. 이렇듯 달라진 상황에서 저자는 20년 전, 30년 전 그림들 앞에서 던졌던 것과 똑같은 물음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이번에는 이 물음들에 답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이전에는 단순히 목격자에 머물 수 있었던 독자들을 이번 순례에는 더 깊이 동참시킨다. 위의 답을 혼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20~30년 전의 그 순례와 지금의 이 순례의 미묘한 차이들을 읽어내는 것은 작가 자신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나 자신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이 된다.

한편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나란히 놓고 보는 일은 마치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나란히 걸린, 렘브란트의 34세 때와 63세 때의 자화상을 보는 일 같기도 하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삶의 질문, 궁극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갈구하는 그 빛나는 눈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



▶ 『희망의 씨앗』 서평단 모집 상세 내용



하나, 『희망의 씨앗』 서평단 모집 포스팅을 개인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 간단하고 성실하게 적어서 스크랩 링크와 함께 댓글로 올려주시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 2014년 12월 15일(월)부터 12월 21일(일)까지 입니다.


셋, 총 추첨인원 10명입니다. (최종 응모자 수에 따라 추첨인원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넷, 서평단 발표일 2014년 12월 22일 월요일입니다.

서평단에 선정되신 분은 12월 25일까지 개인정보를 비밀댓글로 적어야합니다.

12월 25일 이후까지 확인이 안되면 선정이 자동취소됩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12월 26일(금)부터 1월 9일(금)까지 15일간입니다.


마지막, 첨된 서평단 분들은 서평기간인 15일간 알라딘 개인 계정으로 서평을 작성한 후, 『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평단 발표 포스팅 알라딘 개인 블로그 및 그 외 블로그나 외부 채널 등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셔야 최종 서평이 완료됩니다.




※ 해당 기간 안에 서평 및 서평완료 댓글을 작성하지 않을 시,

다음 서평단 모집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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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의견이다.

 

 

맛은 기억이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우월한 맛도 없고 절대적으로  최악의 맛은 없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서 몸속을 흐르고 다시 나오는 과정을 통과하므로 위생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정의지만 그 맛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무언가는 없다.

맛이 있고 없고는 각자 나름이다.

흔한 말로 개인의 취향은 존중되어야 한다.

msg가 잔뜩 든 음식이 더 맛있고 그것이 더 끌리는 것은 그 화학작용이 일으키는 감칠맛에 끌리는 것도 물론 있지만 그 맛이 주는 나만의 기억이 나를 그 쪽으로 당길 수도 있다.

추운 날 귀가 빨개지고 손 끝에 아무런 감각도 없고 정신마저 얼얼해 진 상태에서 돌아온 날

집안에 퍼지는 라면 냄새는 그 무엇보다 유혹적이다. 그 냄새에 그 따끈함에 영혼도 팔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영양도 없고 몸에 안좋은 요소 덩어리라고 해도 그날 그 순간 낡고 허름한 부엌에서 찌그러진 냄비 위에서 김을 날리고 있던 그 라면은 무엇보다 가슴에 와서 푹 박혀버린다.

그 라면에는 맛과 온기 이외에 그걸 끓어내던 누군가의 정성과 그때의 안도감과  순간 확 풀려버리는 안도감  평안 어쨌던 좋다고 느끼는 막연함이 모두 버무려져서 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맛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사랑하는 맛이 될 수 있다.

그걸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라면은 몸에 좋지 않다고 그런 건 먹어선 안된다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기준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날 나를 안도하게 하고 긴장을 풀어준 그 순간이 그날 먹었던 그 라면의 맛과 함께 내 몸에 각인된다.

맛은 그렇게 나도 모르게 내 몸안에 새겨진다.

그래서 역으로 말하면 몸에 좋은 걸 좋은 기억이나 상황에서 먹는게 가장 좋다고 할 수도 있다.

 

엄마한테 등짝을 서너대 두드려 맞고 귀가 얼얼할 만큼 잔소리를 듣고 눈물콧물을 다 빼고 나서 기운이 쑥 빠져서 손가락하나 꼼짝하기 힘든 상황

해는 어둑하고 놀다가 혹은 딴 짓을 하다가 늦게 돌아온 내ㅁ에서 찬바람 냄새는 아직도 나고 울고난 뒤끝이라 기운이 빠지는 건지 아니면 때를 놓쳐 배가 고픈 건지 나도 알 수 없는 어딘가 후련하면서 어딘가 서러운 자락이 내안에 가득할때

이미 다른 식구들이 밥을 다먹고 아무것도 남은 게 없고 꼭 이렇게 일을 두번하게 만든다고 입으로 연신 잔소리를 하면서 함께 손도 함께 쉬지 않던 엄마가 내밀던 건 양푼이 하나뿐이다.

먹고 남은 밥에 먹고 남은 찬들 그래도 급하게 묵은 내 나는 김치도 급하게 들기름에 볶어얹고 냉장고 귀퉁이에서 잊혀졌던 무우 꼬랑이도 급하게 채썰고  대충의 양념으로 무쳐내서 올려놓고 큰 맘먹고 계란 후라이도 부쳐서 올려놓은 아무렇게나 올려놓았지만 절대 아무렇게나 만들 수 없는 그 양푼이 한그릇이 그저 눈물이 난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개도 아니고 어쩧게 이렇게 다 한데 섞어서 먹을 수 있냐고 투덜거릴 수도 없다.

밥 한귀퉁이는 이미 말라서 딱딱하게  이를 놀라게 하면서 입속을 굴러다니고 김치는 충분이 시어 볶아도 그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고 무채는 아직 아린 맛이 남아있지만 그건 내게 최고의 밥상이었다.

등짝 때린 엄마가 어느새 옆에 앉아서 그 등짝을 문질러주면서 천천히 먹으라고 퉁멱스레 내뱉아주는 걸 찬 삼아서 꾸역꾸역 먹고 있다.

세상에  이런 밥상은 누구에게도 내밀 수도 없다.

흉을 보는 건 고사하고 걷어차이지 않으면 다행일만큼 엉망인.. 아니 밥상도 아닌 달랑 양푼이 하나이지만 그 속엔 그 시간의 서러운 나의 마음과 그런 후 안도하는 나의 마음이 함께 섞여있을 것이고 자식때문에 이미 썩어버린 콤콤한 엄마의 속내와 그래도 뜨끈한 정성이 버무려져있다.

그 뒤섞임이 내 속에서 살이 되고 피가되고 내가 된다.

평소 나는 절대 이것저것 넣어 비벼먹지 않는다.

양념이 많은 음식도 좋아하지 않는다.

밥이 말라붙어버리면 아무 생각없이 버린다.

하지만 내 속에는 아무렇게나 비빈 그날의 그 밥이 아직 남아있고 그 맛을 그리워한다.

그 맛이 나이다.

내가 그 맛이다.

맛은 그렇게 맛 그자체로서가 아니라 기억으로 내몸에 들어와 쌓이고 내가 된다.

다양한 맛을 즐긴다는 건 다양한  기억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 기억은 아픈 것도 있고 잊고 싶은 것도 있고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그래서 잊고 싶은 맛도 있고 혐오스러운 맛도 있다.

좋아하는 맛과 싫어하는 맛이 어우러져서 내가 되고 내 기억이 된다.

내 몸이 된다.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기억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맛을 소개하고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었다.

내 아이들은 혹은 내가 만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어떤 기억을 함께 가져갈까?

엄마한테 잔소리듣고 눈물을 뚝뚝 흘린 후에 먹는 닭강정 한조각은 어떻게 기억될까

누구 몰래 봉지 뜯어 우적우적 우겨넣던 한 봉지 과자의 맛은?

먹지말라고 해도 기어이 유혹에 못이겨 손에 쥔 길거리표 떡꼬치의 기억은?

아껴놓다가 잊혀져 방한 구석에서 녹아내리던 저 사탕은 어떤 맛으로 내 아이의 몸에 들어갔을까

 

내 아이가 맛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좋겠다. 맛에 호기심을 가지면 좋겠다.

먹지 않고 거부하는 편견대신 먹어보고 이해하고 그 맛에 대한  의미를 나름 가지면 좋겠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나? 하는 말.

나는 먹어봐야 안다고 믿는다.

왜 된장은 된장인지 똥은 똥인지.. 그리고 똥이 된장이 될 수는 없는지..

모든 맛은 좋은 것이다.

맛이 악한 건 아닐것이다.

기억이 나쁘고 상황이 나쁘고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 뿐이다.

맛있는게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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