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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997년 [뉴욕타임스]로부터 “프로이트 이후 출간된 가장 중요한 정신의학서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으며 등장한 <트라우마>는 사람들이 트라우마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전문용어로 불리는 한 정신과정 증상에 관한 이야기를 인간 해방의 역사라는 도덕적, 정치적 차원의 이야기로 전환시킨 것이다.
허먼은 가정폭력이든 정치적 테러이든 폭력의 메커니즘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며, 이러한 폭력을 종결짓기 위해서는 인권 운동 같은 정치적이고 공적인 행위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왜? 남성이 여성보다, 어른이 아이보다, 국가가 군인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인간이 폭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인간은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지를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고통의 심연을 드러내는 생존자들의 증언과 인간 심리에 대한 허먼의 깊은 통찰력은 인간 조건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 보일 것이다.
1.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흔적을 남긴다.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고 더 나를 옥좨는 압박으로 다가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게 하고 나는 이미 끝났다고 여기게 만들기도 한다. 왜 잊지 못하느냐고 왜 너만 그 모양이냐고 세상은 나를 나무라지만 내 몸속에 남은 폭력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걸 내가 어쩌지 못한다. 내게 남은 흔적이고 내 것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폭력은 그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로 와서 나의 주인이 되고 나를 무너뜨리고 나를 서서히 죽여간다. 그래서 폭력이다.
2. 한때 여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리를 하는 불결한 존재였고 그저 생명을 낳고 세대를 이어주는 동물적인 존재였다. 여성은 남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존중의 의미가 아니라 여성이 처한 상황과 현실에 대한 무지였다. 충분히 무시할 수 있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라고 여기면서 동시에 그로 안한 상처나 열패감은 의식하지 않는다. 예민하고 불안하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보이지 않고 그로 인한 고통만 마구 함부로 말한다.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존재 성녀가 아니면 마녀이거나 엄마가 아니면 창녀라고 여길 뿐이다. 여성의 문제는 문제라고 할 수 없는 배부른 투정이거나 사회성이 떨어지거나 남성보다 하등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히스테리가 그저 여성이 하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억압받고 강요 당하는 사회적인 문제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 남성 위주의 사회질서는 뒤집어 질 수 밖에 없다.
전쟁이 국가의 정의와 사회의 질서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투쟁이 아니라 욕망에 의한 폭력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 수많은 죽음과 상처는 말그대로 개죽음이 되고 헛짓거리가 된다. 전쟁은 당연히 명분이 있었던 일이고 정의를 수호하는 일이고 국가를 위한 애국적 행동일 수 밖에 없다. 전쟁 영웅이거나 포로이거나 아니면 죽었거나... 사람은 그 이외의 선택은 할 수 없다. 피폐해지고 망가지는 몸과 마음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다. 기존의 정의의 깃발을 붙들기 위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가정폭력이란 있을 수 없다. 훈육이 있고 가정 질서를 위한 훈계가 있고 체벌이 있을 뿐이다.
가부장은 가정의 안녕과 질서를 이해 가족원들을 다스릴 책임이 있고 가족원들은 가부장에게 보종할 의무가 있다. 집안의 소리는 담장을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저 개인적인 일이니 국가나 사회제도가 게입할 수 없다. 집집마다 제각각의 질서가 있으니 그걸 존중해야 한다.
사흘에 한번은 맞아야 질서가 이루어진다면 그렇게 하는 건 당연하다.
가족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누군가 입을 막고 귀를 막고 눈을 막아도 유지만 된다면 괜찮다.
그렇게 트라우마는 작은 구멍에서 시작된다.
다들 괜찮다는데 왜 너만 별나게 구냐고... 니가 이상하다고 손가락질 하고 무시하고 터부시 여기는 곳에서 서서히 곪아가면서 무너지고 망가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아프다고 소리칠 수 없어서 드러내지 못해서 모두가 아니라고 하니까... 그저 내 개인적인 문제이며 나의 문제일 뿐이다. 내가 못나고 열등하고 부족해서...
그러나 어떤 억압도 폭력이고 그 폭력은 흔적을 남긴다.
오래도록 병들었던 개인들을 방치하면 병든 사회가 된다.
그리고 그 병은 무색 무취의 상태에서 서서히 사방으로 번져간다. 그래서 모두가 아프다.
오랜 시간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 폭력은 물리적인 힘일 수도 있고 정서적 학대일 수도 있고 내가 옳다고 믿었던 질서 (젅쟁이나 독재 사회적 문제)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은밀하게 진행되는 아동학대 가정폭력 성폭력도 포함된다. 그렇게 폭력에 오랫동안 은말하게 혹은 공개적으로 노출된 사람은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세상이 모두 나에게 공격할거라는 ,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는 공포속에 노출된다.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기에 오로지 나 자신밖에 없다는 단절을 느낀다.
나는 어떤 자유도 없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했다고 믿었던 나의 신념이나 행동이 결국은 나를 둘러싼 분위기나 억압으로 생겨났다는 걸 모른다. 내가 결정해야하는 자유가 가장 두렵고 누군가가 결정해주고 지정해주는 것이 가장 편하고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속박된다. 그리고 가장 약하고 작은 어린이들이 고스란히 학대에 노출된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가 못나서 스스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
남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다들 이겨내고 잘 사는데 왜 나만? 왜 너만? 그게 개인적인 문제일까?
영화 <룸>에서의 여주인공은 그 작은 방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난 후 더 혼란스러웠다. 작은 방에 갇혀서 어떤 것도 스스로 결정내릴 수 없고 모든 것이 억압이고 공포였고 단절이었던 순간에학습된 습관이나 행동들이 자유를 얻게된 세상에서 무용하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자기 습성을 버릴 수 없다. 해보지 않았던 건 아무리 좋은 것도 익숙하지 않고 두렵고 어렵다.
찬물에서 서서히 끓여지는 냄비속 개구리처럼 나도 모르게 익숙해지는 동시에 죽어가는 것이다.
그냥 단칼에 죽어버리는게 아니라 그렇게 서서히 나도 모르게 나에게서 자존감을 하나하나 빼내고 힘을 앗아가는 것이 폭력이다.
가정폭력에서 성폭력에서 사회적인 폭력에서 나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트라우마를 가진 오랫동안 폭력에 시달린 생존자( 폭력에서 살아남은) 위한 치료 과정은 크게 세단계를 가진다.
안전 --- 기억과 애도---- 연결의 복구 ---- 공통성
일단 무조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해야한다. 어떤 과제해결보다 안전이 우선이다.
내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어떤 것도 모래위에 지어진 성이다.
안전은 모든 스포츠의 기초 체력같은 것이고 어떤 공연을 위한 가장 기본적일 호흡법 발성법 스트레칭이다.
내가 피해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체력을 길러야 한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설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안전하지 않으면 먹을 수도 잘 수도 쌀 수도 없다.
기본적인 생리작용만 잘 되도 60퍼센트는 완성이다. 몸이 이겨내야 정신이 이겨낼 수 있다.
정신력으로 몸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정신을 지탱한다.
모든 치료과정을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그 결정을 존중받아야 한다. 필요한 치료나 상담과정을 그저 고지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고 할 것이냐 말것이냐를 내가 결정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 그리고 내 선택이 받아들여진다는 존중받는 경험은 중요하다. 내가 받아들여진다는 경험은 안전을 의미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안전하다는 경험이다.
내 안전이 확보된 이후 나는 문제에 직면한다.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상황이라고 그 이전부터 상황발생시까지의 기억과 상황의 기억을 내가 직면해야한다. 기억하는 것 그건 힘이다.
고통스러우니 덮어버리자는 건 지금 이순간만의 위한 면피이다.
기억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몸을 데굴데굴 구르며 열흘 밤낮을 목놓아 울고 화를 내고 자해를 하더라도 내 감정을 끝까지 쏟아내야 한다. 지치면 쉬었다 가더라도 다시 힘내서 다시 울고 화내고 말하고 소리쳐야 한다. 그렇게 하는 동안 내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길을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트라우마는 관계에서 상처받고 파괴된 흔적이다. 관계가 무섭고 사람이 두렵다.
그러나 그 상처의 치유도 결국 관계에서 얻게 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어떤 관계없이 혼자 살 수 없다. 세상에 오롯이 나만 있는 게 아니므로 결국 관계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사건 이전의 내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모든 치유의 끝이다.
관계속으로 들어가 내가 결정하고 안전하다고 믿는 관계부터 시작하는 일 그리고 안전하게 삶을 살아가는 일이 치유의 마지막 단계이다.
그러나 어떤 치유든 끝!! 하고 문들 닫아버리는 일은 없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상의 사건들 전환기들에서 다시 나의 트라우마는 얼굴을 드러내고 나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그러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언제든 내가 안전하고 다시 사건을 곱씹고 사람들에게 위로받고 도와달라고 하면서... 그리고 또 다시...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그렇게 부끄럽고 남사스러운 일을 왜 자꾸 언급하느냐?
너만 당한 일도 아닌데 남들은 가만 있는데 왜 너만 유별나게 구느냐?
사람 사는게 다 그런거지 참 뾰족하게 군다.
똑같이 맞았는데 아홉은 괜찮다고 하는데 한명이 아프다고 한다면..아픈게 정상일까 괜찮은게 정상일까?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 이웃에서 누군가는 공포에 떨면서도 가족일이라 수치스러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친구끼리 장난이라는데 나는 너무 마음이 두근거리고 떨리고 그만하고 싶은데 그걸 말하면 내가 찌질한 사람이 된다. 멀쩡해 보이던 배가 가라앉고 내 아이가 이유도 모른 채 죽었는데 사람들은 사고난 걸 가지고 왜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한다. 몇십년이 지난 과거지만 내가 그 때 이유도 모르고 끌려가 여자로 수치감을 느끼며 폭력을 당했는데 이제와서 그런 남사스런 과거를 들추며 사과를 요구하는 이유가 뭐냐고 한다.
왜 너만 시끄럽고 너만 나대냐고...
모두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게 될까?
모두가 아니라니 아닌거라고 탕탕탕!!!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이 폭력의 순간이고 누군가는 상처를 안게 된다. 그게 나일 수도 있다.
트라우마는 나의 문제이며 동시에 모두의 문제이다.
지금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지금 우리 주변에 익숙하게 벌어지는 폭력의 피해자이며 생존자라고 하면 너무 지나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