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힘드 일은 육체적 한계 극복도 아니고 지적 성취도 아닌 도덕적 행동이다.

증오에 사랑으로 답하는 것, 소외된 사람을 포용하는 것

그리고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시드니 해리스(sydney herris)-

 

자신의 중요한 정체성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으면 우리는 더욱 강력하고 다급하게 자기 확인을 갈구한다. 이것을 자기위협(self-threat).라고 한다.

누구나 자기 정체성을 주장하고 이 정체성을 다른 사람도 알아주기를 기대한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받지 못하면 위협을 느끼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이런 자기위협적인 상황에서는 자신이 바라는 선한 사람이 되기 힘들다.

도덕적 정체성 (moral identity) 자신이 정말 선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한 사람임을 슷로 신경쓰는지 판단하는 척도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선한 사람이라고 느끼고 싶어한다. 선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주장하면서 이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모두 심지어 선한 사람들도 악행을 저지른다 다른 사람의 악행은 금세 눈에 띄지만 자신의 악행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이 완벽히 윤리적이고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히며 완벽히 선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수치심과 죄책감의 차이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이런 강력한 자기 위협을 맞닥뜨리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마음을 닫은 채 회피하고 싶어진다. 반면 죄책감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보다는 자신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수치심은 사람을 마비시킨다. 수치심을 느낄 때 하게 되는 행동은 그것이 무엇이 됐든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죄책감은 동기를 부여한다. 죄책감을 느끼면 우리는 행동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대인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를 받아들인다.

나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난 너저분한 사람이다.

모범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완벽하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다.

모든 해답을 안다고 떵떵거리지도 않는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노력할 뿐이다.

내가 믿는 것들을 지지하려고 하고 노력하고 이세상에 이로운 일을 몇 가지 해보려고 노력하며

글을 써서 조금이나마 소란을 피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내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록산 게이( rotane gay)-

 

고정형 사고방식을 갖는 사람은 오로지 틀리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틀리지 않은 것에 집착한다는 말은 실수에서 배우지 않으려고 한다는 뜻이고 그러면 틀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고정형 사고방식세에는 큰 대가가 따를 수 있다.

이같은 반응은 스트레스가 높고 자기 위협이 높아지는 순간 유발된다. 반대 의견에 맞닥뜨릴 경우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거나 아예 노력자체를 중단할 수 있다, 그러면 이다음 무언가를 말할 때 발전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기보다는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추측만 하다가 더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반면 성장형 사고방식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똑같지만 그로부터 배우기 때문에 이후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적다. 성장형 사고방식을 추구하면 좋은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간혹 실수가 학습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면 누구나 실수를 남발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발전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기꺼이 책임을 지려고 한다. 상처를 준 사람에게 사과를 할 뿐 아니라 더 나은 더 완전한 사과를 하려고 한다. 스스로 성장할 여지를 주면 책임감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높아진다.

 

다양해 보인다고 해서 다양성을 이루었다는 것은 아니다.

 

고정형사고방식은 내 진심이 무엇인지 계속 이야기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성장형 사고방식은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세요 혹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시간을 두고 스스로 헤아리려고 할 것이다.

구축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의식적인 편견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자신이 문화적 법적 구조적으로 편견이 내재한 시스템의 일부임을 자각한다.

 

당신이 누리는 특권을 확인해보라이 말은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누렸을지 모르는 상대적 이익이 무엇인지 깊이 되돌아보라는 뜻이다.

고단한 삶의 효과란 내가 어떤 어떤 집단에 속했기 때문에 다른 집단보다 좀 더 많은 이득을 얻었고 혜택을 입었다 (반대로 불이익을 덜 당했다)라는 통계를 보면서 내가 속한 집단은 좀 더 이득을 봤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집단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혜택을 보았다기다 보다는 뭔가 힘들었고 고단하게 이 혜택을 이루었다고 믿고 주장하는 것이다.

강남이나 목동거주 학생들이 사교육을 더 잘 이용하고 입시에 유리했다고 나오면 그 지역에서도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고 하거나. 특목고 혜택에 대한 기사에 특목고가 내신따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며 내가 얻은 혜택이 당연하지만 그걸 얻기 위해 나도 애썼고 쉽지 않았고 또 내가 그렇게 혜택을 받은 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자기가 가장 애처롭다.

 

집단 이익은 시스템을 통해 영속된다. 시스템이란 어떤 일이 소규모로 가족 내에서 일어나거나 대규모로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는 방식을 일컫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등의 공식적인 시스템이 있고 가장 저렴한 판매처를 찾으려고 카페활동을 하는 등의 비공식적 시스템이 있다. 무엇이든 두 명 이상이 포함되는 것은 시스템을 수반한다고 할 수 있다.

특권은 모든 사람이 문화적 법적 제도적 시스템을 동일하게 경험하느냐의 문제다. 대다수의 시스템에서 일부만 이 특권을 부여받는다.

시스템에서의 특권은 대단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살아가면서 내가 불편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거나 받아들이는 것들이 많으면 나는 특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선택에 불편함이 없고 쉽게 구입할 수 있고 내 의견이나 가치관이 사회에 쉽게 통용되고 인정되는 것 내가 나를 계속 증명하고 주장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 당연한 일들이 자꾸 캐묻게 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경우 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특권은 대단한 권력이나 부만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시스템을 만들거나 구축할 때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조사하거나 검사하지 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일부 사람들 보통의 사람들이라고 여겨지는 대상을 표본조사한다. 그러나 보통의 평균적인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내가 가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준다면 나는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고 역풍이 분다면 나는 늦게 도착할 것이다. 같은 거리 같은 체력에서도 환경의 차이는 미묘하게 다른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변수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풍을 맞으면 더 힘껏 달려야 하고 그 느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순풍은 쉽게 감지되지 않기도 한다.

 

공평과 평등은 다르다.

평등은 역풍을 맞든 순풍을 맞든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이다.

공평은 역풍을 맞는 사람들을 고려해 그들이 타인과 동등한 기회와 접근성을 누릴 수 있도록 필요한 부분을 제공하는 것으로 일부 집단을 차등을 두어 대우한다는 뜻이다.

자수성가 서사는 순풍과 역풍의 결정적 역할을 무시한다.

능력주의사회라는 것을 믿으면 순풍과 역풍은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얻은 이 결과가 능력에 의한 것인가 행운인가를 잘 생각할 필요가 있다. 능력이라고 믿는다면 성과주의에 더 초점을 맞출것이고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면 기회균등에 더 집중할 것이다.

관점의 유연성. 초점을 개인의 능력에서 행운으로 혹은 그 반대로 바꾸기만 해도 중요한 사회문제에 대한 관점이 바뀐다.

과거의 차이가 현재의 차이를 만들고 현재의 차이가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리는 것이다.

결과에 따라 열심히 노력했는가 게을렀는가가 판단된다.

자수성가 케이스는 이름이 붙은 개인의 일이고 불행이나 나쁜 일은 익명으로 일어난다.

*시스템 차원, 개인적 차원 내재적 차원의 불평등

 

시스템적 인종차별로 흑인이 백인에 비해 교육수준이 낮고 소득 수준이 낮다. 이런 격차는 흑인이 백인보다 더 어리석고 게으르다는 개인적(무의식적) 편견을 유발한다. 이런 개인적 편견은 일부 흑인이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스스로 내재화하는데도 기여한다, 시스템적 편견은 의식적 무의식적 편견으로 구체화된다.

개인적인 편견으로 인해 사람들은 실수를 용인하지 않고 불운의 희생자를 비난하고 이로서 공정하다고 믿는 시스템은 더욱 요원하다. 각 차원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개인의 편견은 눈에 띄지만 순풍은 보이지않아 시스템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일부 개인의 역량이라거나 개인의 욕심은 눈에 띄지만 불평등한 시스템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 세대는 악한 자들의 증오에 찬 말과 행동에 대해 가책을 느껴야 할 뿐만 아니라

선한 자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에 대해 역시 가책을 느껴야 할 것이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ruther king jr.)-

 

눈이 멀어서 그런게 아니다.

그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저스틴 시미엔(justin simien)-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은 어던 관점을 가지고 세상에 접근한다. 그런 다음 이 관점을 확증하는 증거를 무의식적으로 찾아 나선다. 이런 확증 편향은 자신의 관점을 지지하는 대상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반면 자신의 관점과 모순되는 대상은 무시하거나 인지조차 하지 않는 자연적 반응이다.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과 일치하는 정보에 끌릴 뿐 불일치하는 정보에는 끌리지 않는다. 자신이 믿는 것에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새로운 자료를 찾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확증할 자료만 찾아 모으려 한다.

의식적 무의식적 고정관념 역시 확증 편향을 유발한다. 사람들은 추가적인 정보가 자신의 고정관념을 확증할 때 그것을 더 잘 인지하고 기억하며 찾아 나선다.

우리는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도 자신의 세계관과 일치하지 않으면 놓치고 만다. 이 과정에서 무언가는 배제되고 차별 받는다.

보고싶은 것만 보려고 하면 세상에 대한 이해도 달라진다.

 

sns를 하거나 인터넷 서치를 하다보면 내가 관심을 가지고 찾았던 상품이나 어떤 정보가 그대로 축적되어 다음에 내가 접속을 해도 그 상품이나 정보들을 한단에 배너로 띄워놓는다. 내 정보가 고스란히 넷 세상에 노출되어 내가 어떤 거대한 힘에 감시받는다는 기분도 들지만 동시에 나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것 관심있는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유투브에서도 내가 자주 찾는 카테고리가 가장 첫 화면에 노출되고 연이어 비슷한 목록으로 나를 유도한다. 페이스북도 내가 좋아요를 눌렀거나 자주가는 이웃의 글들이 우선 노출되고 그와 비슷한 성향의 이웃들을 나에게 추천한다. 인터넷 세상에서 나는 다른 세상을 볼 필요가 없다.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익숙한 세상만 본다.

내가 아미라면 다른 계층 나라의 아미들과만 소통해도 충분히 세상 전부를 볼 수 있고 그 속에서 방탄은 언제나 위대하고 우수하다. 다른 신생 아이돌의 노래는 들을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지 않다. 내 세상은 그렇게 좁아진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내가 세상 전부를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나는 점점 좁은 울타리에 갇히는데 나의 영역은 넷에서 점점 확대된다.

성에 갖혀 보여주는 것만 보고 믿는 어리석은 왕처럼 나는 거대한 인공지능이 보여주고 추천하는 것들에 길들여져 다른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세상은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은 세상이며 존재하지 않은 가치관이며 보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이다. 차별과 편견이 그렇게 구축된다. 동시에 나는 보편적이고 선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를 차별하지도 미워하지도 혐오하지도 않았으니까. 내 세상에는 내가 차별하거나 혐오해야할 대상이 전혀 없으므로.

 

 

여러 세계관중에서 특히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것은 바로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이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공정한 시스템 안에서 열심히 노력한 끝에 성공을 거머쥔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단결이라는 말이 때로는 침묵을 강요하기도 한다. 다른 이들의 경험을 이해하고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시끄럽지 않게 모두가 침묵하고 그냥 따르기만 하라고 강요한다.그리고 강요당하는 이들은 수치심을 느끼고 움츠려들고 단결이 아닌 조용한 분열을 일으키게 한다.

소수의 경험을 공유하거나 그에 다른 감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다수가 분열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소수를 부정한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단결해야한다. 더 큰 외부의 적이 있다. 그렇게 겁박하고 입을 다물게 한다.진정한 분열은 햇빛 아래 서 있는 사람이 빗속에 서 있는 사람에게 지금 비가 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의도적 무지 ;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때 위협이 될 수 잇는 정보는 모른 척 하겠다는 개인의 선택을 뜻하는 법률용어

일상에서 사용될 경우 의도적 무지는 마음이 불편해지는 정보를 모른 척하는

개인의 선택을 뜻한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고 자신의 관점과 경험을 이야기하지 말라

다른 이들에 대해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주목하라

그들의 말을 믿든 말든 그중 절반은 진실이라고 가정하라.

 

일상적인 특권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반대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규범과 다르다는 것을 주기적으로 떠올릴 수 밖에 없다. 나는 ......................이다. 빈칸을 채워 자신을 표현하시오

지배적인 문화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은 굳이 이 빈칸에 쓸 이유가 없다. 정상인이고 애성애자이고 그렇다면...

일상적인 특권은 특권이 것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얻을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깊은 변화에 이르는 가장 간단한 길은 힘없이 사람들이 그동안 들은 만큼 말하게 하고

힘있는 사람들은 말한만큼 듣게 하는 것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

 

우리는 우리 생각만큼 완벽하지 않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타인으로 만드는 자연적 성향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람들이 서로 알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타자화 할 때 우리는 그를 사람이 아닌 무언가로 인식할 수 있다. 상대를 실제와 달리 인간보다 못한 존재 자신과 같지 않은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타자화하면 그들은 사람이 아닌 어떤 물체나 범주로 규정된다. 그들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과 다르다고 간주하면서 다름을 존중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영웅이 되려 하거나 상대를 안쓰러워하면서 다름을 용인하거나 무시해야할 무언가로 취급하면서 또는 누군가를 실제 그 자신이 아닌 고정된 배역으로 인식하면서 우리는 상대에게 도움을 주기보다 해를 입힌다.

한 사람이 아닌 한 범주로 보며 타자화하게 된다.

*온정은 호의를 베푸는 자신이 구원자라고 여기면서 어떤 대의를 앞세우고 조직 사회로 파고 들어가 구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구원자라는 덫에 빠진 사람은 온정에 중독된다. 이제 모든 일은 타인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 된다. 자신이 구원자가 될 기회를 잃을까 봐 상대가 주도적으로 나서거나 능력을 키울 기회를 박탈하기도 한다. 그렇게 타인을 타자화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욕구를 그 상대의 욕구보다 우선한다.

 

연민은 원 안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이다. 그 사람의 처지를 안타까워는 하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을 애써 느끼려 하지 않는다.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서 그들의 감정을 자신의 것과 타자화한다. 선의에서 비롯된 연민도 상대보다는 자신을 위한다 자기 감정을 중심에 두는 것이다.

공감은 다르다. 원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스스로 느끼려 한다. 원 안의 감정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게 하거나 스스로 기꺼이 원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내가 아니라 상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공감은 지지자들이 도달하고자 애쓰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연민에는 또 다른 희생이 따른다. 누군가를 안타까워할 때 우리는 무심코 자신을 더 높은 위치에 올려 놓는다. 권력감은 쉽게 찾아온다.

 

내 피부색을 보지 않는다고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가 있어? 내 피부색을 보지 않는다는 건 나라는 사람 자체를 부정한다는 거야. 나의 멋진 부분을 부정하는 거고 내가 그동안 겪은 무수한 시련을 부정하는 거야. 결국 나를 부정하는 거라구

없다고 생각하는 것. 보지 않는다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있는 문제를 없다고 믿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그런걸 개의치 않아. 그런 문제는 중요하지 않아. 라고 할 때 그 말한 당사자는 쿨하고 세련되 보이겠지만 듣는 상대방에게는 나를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내가 경험하고 내가 받아들인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의는 상대의 경험을 존중하고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고 치부해버리는 건 내가 그런 문제로 불편을 겪지 않았으니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너도 그럴 수 있다는 이기적이고 무지한 믿음이다.

구분은 하되 차별하면 안된다.

 

배역의 고정화

어떤 사람이 어떤 존재가 어떤 성격이라거나 어떤 존재라는 고정된 사고로 바라보는 것

상대에게 기대되는 행동이나 태도가 있고 그것을 벗어나거나 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비난하게 되고 이상하다고 여기게 된다.

기대라는 받침대에 초점을 맞추면 인간을 놓치게 된다.

 

당신이 하지 않았고 나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책임은 나에게 있다.

나는 사람이고 이 나라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

 

그저 침묵만 하면 지지의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좋은 사람은 온화한 표정으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절대 목청을 높이지않고 욕설을 쓰지 않고 이성적으로 설득하고 말하며 침묵하는 사람이 아니다.

가끔 그런 겉모습에 나는 혼란스럽다.

부부가 상담실에 들어왔을 때 한 쪽은 흥분하고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자기를 표현한다. 억울하고 화가 나고 너무 힘들고 완전 끝을 내고 싶지만 아이가 있고 혼자 살 자신이 없고 이렇게 나만 포기하기가 억울해서 어떤 결정도 할 수 없다.

다른 한 쪽은 그저 듣는다.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그리고 높낮이가 없는 음성으로 자기 입장을 말한다. 절대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절대 상대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자기 논리가 완벽하다. 자기가 해야할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주변 누군가 외롭거나 힘들거나 한 건 문제가 아니다. 늘 문제는 나로부터 발생할지 몰라도 그 문제를 크게 키우는 사람은 상대방이다. 나는 다 준비가 되었다고 한다. 들을 준비도 되었고 원하는대로 해 줄 준비도 되어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좋은 미소를 짓고 잘 알겠다고 하지만 안다. 그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옆에 있는 상대는 미치고 팔짝 뛰겠으면 누가 봐도 문제가 어느쪽인지 알만큼 흥분하고 화가 나있다.

좋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아니다

사회생활에서 직장에서 좋은 상사이거나 선배이거나 괜찮은 동료가 집에서는 기고만장하고 꽉 막혀서 자기 주장과 사고 이외 더 이상 확장하지 않는다. 원하지 않고 타인이 맞춰주기를 명령한다.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명령한다. 그리고 외부에서 칭찬하는 목소리만 가지고 와서 자기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그걸 모르냐고 한다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식당 종업원에게 반말하지 않고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운전중에 끼어들기를 양보하는 사람

그 사람이 자기 물건을 만지는 아이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제자리에 놓이지 않은 물건에 짜증을 내고 어제와 같은 반찬에 수저를 던진다는 걸 누가 알까

그렇게 드러나게 나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알았다고 이제 알겠다고 말을 하면서 전혀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노력하는데 억울하다고 한다.

화를 내고 물건을 던지고 다음날 꽃다발을 사오는 사이코도 다정할 때가 있다.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캣맘이 자기 건물 세입자에게는 냉정하게 보증금을 빼앗는다.

아직 갈 곳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나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기 손녀는 끔찍해서 뭐라도 하나 좋은 걸로 입에 넣어주고 싶은 할머니가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학교도 책임지지 않는 아이들이 그깟 미술학원이 뭐라고 아이들때문이라도 철거를 연기해 달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지닌다.

동네에서 맘좋고 손 크다고 소문한 할머니는 자기 며느리에게는 인색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라는 이유가 있고 보잘 것 없는 집안 딸이라는 불만도 있다. 그러나 뭐든 마음에 들지 않아 사사건건 불만을 이야기 하면서 부녀회에서는 함께 김장을 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좋은 왕언니 노릇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선하게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말을 하고 커피도 잘 사고 잘 나눠주는 이웃 엄마는 자신이 무심코 뱉는 말의 무게는 알지 못한다. 요즘 밥 굶는 애가 어디 있어요? 다들 집에서 지내느라 밥 챙기는게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이때 아니면 언제 가족들이 오순도순 지내겠느냐는 말이 틀리진 않았다. 그러나 누구나 집이 안전하고 따뜻한 곳이 아니다.

고시원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딸이 집으로 왔다. 학원이 문을 닫았다. 자기 방이 없는 딸은 수험생 동생과 함께 방을 써야 한다. 함께 있는 것이 고역이다. 이제 날이 선선해져서 조금이라도 신경이 무뎌졌기를 바랄 뿐이다. 그 아이가 혼자 챙겨먹는 밥은 고시원에서 챙겨먹는 밥과 다르지 않다. 일해야 하는 엄마는 아이 밥을 제때 제때 챙겨줄 수 없다. 라면도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집에 간만에 모두 있을 때 잘 해먹여야지 않겠냐는 그 말이 내겐 비수가 된다.

나쁜 사람이 아니어서 그렇다. 내가 옹졸하고 내가 가난하고 내가 삶이 고달파서 그렇지만 그 이웃이 밉다.

좋은 선생님은 아이 한두명의 일탈이 자꾸 걸린다. 재들만 잘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쟤들이 눈에 가시다. 그냥 없으면 싶어서 그 아이들이 결석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학업 부진한 아이들도 잘 챙기고 언제나 파이팅넘치는 알림장을 써주지만 내 마음에 들지않는 두 녀석만 없으면.. 그녀는 더 완벽해질 수 있다.

아픈 사람에게 위로하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존재를 증명하는 일도 있다.

이혼을 알렸을 때 그 표정이라니.. 이해해주지 못할 거라고 짐작했고 사실 말하지 말까도 생각했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 없다.

그가 커피도 사주고 가끔 반찬도 주고 내 앞에서 절대 남편 이야기도 하지 않고 가족끼리 어디 다녀온 이야기도 딱 나에게만 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배려일까 그는 그냥 내가 불편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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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레 대한 정서적 영향이나 원인에 대한 내용뿐 아니라 그 치료법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어떤 큰 충격 혹은 오래 지속된 학대나 방임 폭력으로 인해 정서적 불안 이상의 뇌에 문제가 생긴경우 그것을 단순히 트라우마  외상증후군이라고 이름붙일 수는 있지만 그럴 경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나와있다.

그 원인이 존재하는데 현상과 지금 현재의 증상만 보고 약물투여만 하거나 정신의 문제라고 보고 지금 의 현상에만 집중하면 순간 좋아질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원인자체가 남아 있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

어쩌면 트라우마의 문제에 접근하는 건 개인의 정서나 감정의 문제 이상 사회적 정치적 개입도 필요하다.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야 하는 문제일 수 있고 법이나 제도를 바꾸어 촘촘하게 인간을 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더 필요할 때도 있다.

폭력에 노출되고 지속적으로 그 환경에 놓이다 보면 인간은 변할 수 밖에 없다. 그 변화라는 것이 잘못된 환경탓이므로 환경을 바꾸면 사람이 바뀌는 문제 이상이다. 사람은 아주 단순하게 살려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순간에 우아하고 고상한 선택을 하기 어렵다.

살아야 하고 편안해야 할  방향으로 움직인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지키려고 할 수도 있고 폭력속으로 다시 걸어갑으로 그것에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왜 그래야하는지

왜 그러고 사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들이 문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참 운이 좋다는 증거이고 당신은 모르겠지만 당신은 많은 힘을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폭력이 좋아서 그 곳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도 그 폭력의 대상이 유일하게 나를 인정하고 예뻐하고 안전하게 해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오래 노출되고 익숙한 불안과 폭력이 오히려 낯선 평화나  안락보다 안전하고  편안하다.

그런 사람도 있다.

이것이 폭력이고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냥 무기력하게 모든 걸 놓아버릴 수도 있고 그 속에서 변해야 하지만 아무것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미칠지경일 수 있다

폭력이 나쁘다는 걸 알지만  그 폭력이 누구에게서 자행되는가 그리고 그와 나의 관계에서 그리고 나의 힘과 나의 능력에서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뿐이다.

타인의 눈엔 그저 한없이 미련하고 한심하고 도와줄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마음까지 들만큼  말도 안되는 선택이지만 그럴 때가 있다,

 

저자는 오랫동안 트라우마를 연구하고  현장에 있던 사람답게 다밤면으로 다양한 트라우마 환자들을 예를 들며 그 증상이나 상황에 대해 알려준다. 더불어 아직도 학계에서 반신반의하는 다양한 치료법을 이야기해준다.

이성적이고 확실한 연구 결과와 통계로 나온 검증된 방법을 원하는 과학의 세계에서 어쩌면 검증자체가 쉽지 않고  누군가에게는 잘 적용된 방법이 누구 다른 사람의 눈에는 전혀 과학적이지도 않고 순간적이거나 즉흥적이거나 비이성적인 방법이 사람에게 통하기도 한다.

 

짧은 경험의 위기상담에서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내담자가 많았다.

왜 그렇게 까지 참고 살아야 할까

아이를 위해서? 경제력때문에 ?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서

그리고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삶에 실패했다는 결론밖에 남지 않아서

그냥 내가 나를 속이고 아닌 척 하고 조금만 버티면 아이는 괜찮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고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고 남들은 모르니까 나를 부러워할 수 있고 우리는 정상가정이 되며 정상이라는 삶이 된다.

그럼 정상이 뭘까

내가 망가지고 내가 나를 속이지만 남들의 기준에만 맞으면 정상일까?

그렇다고 쉽게 삶을 바꾸라고 할 수 없다.

나도 타인이라 그의 삶에 내가 관여할 수 없다. 누구도 내 삶에 관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럴 때 왜 저렇게 살까

왜 저런 증상을 가졌으면서 병원가는 걸 그렇게 싫어하지?

약물의 도움을 받는 게 우선 아닐까?

저건 지독한 망상이나 분열이 아닐까

그렇지만 조금 달리하면 저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고 어쩌면 그 방법 자체가 그에게 최선이고 가장 안전하고 오래 고심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나는 뭐라고 관여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들 제안들이 그를 더 혼란하게 하고

어렵게 이어오고 지탷한 삶을 부정하는 건 아닐까

그럼에도 그건 건강하지 않다고

누구 한명 희생으로 번듯한 정상이라는 라벨을 갖는게 그렇게 중요할까 생각한다.

 

저자는 트라우마 증상과 치료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들이 그렇게 된 원인에 그리고 그 과정에 더 주목하라고 한다. 약물로 지금 증상을칠 치료할 수는 있을지 모르고 지금 상황을 조금 누그러뜨릴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원인은 그대로 나았고 그 치료에 의해 더 망가지고 무기력해질 수도 있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받고 망가진 사람이 결국 사람으로 인해 다시 일어서야 한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치료하고 보호하는 일 그에 못지 않은 것이

사회적 제도와 정서 그리고 사고방식의 변화다.

 

지금 현재 내가 익숙하고 편해서 이게 문제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어떤 제도나 관념때문에 누군가는 고통받을 수 있다.

세상은 그래서 조금은 더 예민할 필요가 있고  내가 편하다고 모든게 다 잘 돌아간다는 생각은 조금 뒤로 돌려야 한다.

함께 산다는게 뭔지 그걸 먼저 생각해본다.

트라우마가 생겼고 그래서 치료가 필요한 건 당연하지만

그 이전에 쉽게 누군가 배제되고  고통받고 있음을 예민하게 고미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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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해의 폴짝 - 정은숙 인터뷰집
정은숙 지음 / 마음산책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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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은밀한 사생활을 들여다 보는 즐거움이라는 발칙하고 못된 심보로 선택했다.

시간도 없었고 조금씩 아껴 읽는다는 핑계로 아직 다 읽지 못했고 일단 내가 궁금한 작가들  중심으로 여기저기를 읽고 있다.

자기 글쓰기에 대한 치열함과 지금 이 글에 독자에게 어떻게 닿고 있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의 고민은 작가들 누구도 다르지 않다.

다만 어떤 작가는 자기고민과 자기 치열함에 집중하고 있지만 어떤 작가는 자신의 일상과 자신의 작품활동을 나눠야 한다. 어쩌면 이런 시각조차 편견일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나눈다고 그 작가의 작품이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흥미가 덜 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궁금하고  두근거리는 작품을 써나가는 작가가 있고

이제 반짝이는 설레임이 조금씩 퇴색하는 작가가 있다.

어쩌면 그들 잘못은 아닐 것이다.

사랑만 변하지 않는다. 독자도 변하는 법이니까.

작가도 사람이고 일상이 있고 삶이 있으므로.. 그걸 알게 된다.

마저 읽고 나면 또 어떤 생각이 들지.. 그때 다시 정리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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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이 어눌한 사람이다. 표현도 서툴다. 자식인 네게는 더더욱 그랬다. 내 자식이어서 일 게다.

내 부모는 간섭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한 번도 내가 원했던 길로 가 본 적이 없다. 나는 절에서 수행을 하고 싶었다. 할 수 없이 대학을 갔다. 어쩌다 보니 운동권에 있었다. 원했던 바는 아니었다.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탓이다. 괴로운 일이 많이 있었다. 세월에 씻어버렸다. 그래도 남은 것은 받아들였다. 너를 키울 때 한 가지만은 지키려고 했다. 무엇이 됐건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고. 어려운 일이었다. 자식에 대한 집착이란 부모에게 천형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토록 내 부모를 싫어했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노력했다.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은혜도 빚도 없다. 혹여 지게를 진 일이 너에게 짐이 된다면 버려라. 나는 인간에 대해 실망을 많이 한 사람이다. 지게를 진 건 내 두 손과 두 발로 누구에게도 신세 지지도 도움 받지도 않고 어떤 인간관계도 없이 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지 너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부자가 먹고 살았다면 부차적인 일이지 내게 감사할 일도 아니다. 혹여 그런 애비가 부끄러웠다면 이 종이는 버려라. 네겐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는 말이 어눌하고 표현이 서툰 사람이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하지 않겠다. 나는 사랑에도 서툰 사람이다.

이것은 유언장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너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너는 너의 인생을 살아라. 너에게 부모라는 굴레는 여기까지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죽은 것이다. 내 죽음을 맞는다면 유해는 화장해서 동해에 뿌려라. 딱 한 번 동해바다를 본 적이 있다. 마음에 들었다. 장례를 치르지 마라. 삶은 충분했다.

이 글을 네가 읽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다. 혹여 읽은 후면 불태워 버려라. 이 역시 굴레다.

이 부분을 첨 읽었을 땐 이 아버지가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이런 무거운 시간을 견딘 사람이었구나 하는 마음 그래서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참 아프게 다가왔다.

죄책감 책임감이라는게 참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 말의 무게에 휘청이는 누군가에게는 무섭고 어려운 의미 그것을 자식에게 주지않겠다는 아비가 보였다.

아 부모가 이럴 수도 있구나.

자식에게 뭐든 주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부리고 내 용량이상을 퍼붓는 것, 그리고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며 자식의 머리에 새겨넣으려는 사람이 부지기순데 이렇게 모든 걸 놓아버릴 수도 있구나 했었다.

그런데.....

다시 읽으니  "웃기고 있네"라는 마음이 불쑥 쏟구친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 아비는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과 죄책감이 너무 커서 자기는 자식의 어깨에 무게를 얹지 않겠노라고 깃털처럼 가볍게 사라질거라고 결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하나 가볍자고 하면 모두가 가벼워지는 걸까?

내가 너를 가볍게 할 터이니 너는 아무런 부담도 갖지 말아라 하면 자식이 네~ 하고 모든 무게를 내려놓고 훌훌 자유로워지는 걸까?

자식은 아니 아이는 어른의 눈치를 본다.

사랑과 돌봄을 베푸는 것은 어른이지만 아이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먹지만은 않는다.

아이의 생존본능은 지금 이 사랑과 돌봄이 지속적일 것인지 언제든 단절될 수 있는 것인지 나의 생존이 어떻게 될 것인지 매우 민감하다.

지속가능하다고 믿는 순간 아이는 아이가 되어 살아가지만 지속불가능할수도 있다는 불안이 한방울이라도 퍼지는 순간 아이는 시간을 당겨 성장한다. 욕구를 줄이고 눈치를 보고 자기가 어떻게 해야 생존가능한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일찍 철이 들거나 주눅이 들거나 자포자기하거나

결국 저 애비의 아들은 일찍 철이 들었다.

남들이 보기엔 손안대고 코푼것처럼 쉽게 자식잘 키웠다고 하겠지만 아들은 분노로 가득찼고 욍로웠고 그리고 언제든 집을 떠나고 싶어했고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했다.

뒤늦게 아비의 역사를 알고 아비의 삶을 알게 되어도 그냥 이해하는 것 이상이 될 수는 없다.

아 저런 삶을 살았구나. 고단했겠구나

그리고 끝.

아무리 그의 고단하고 힘든 삶을 알고 그의 의도가 선했음을 알아도 이미 생채기가 깊어진 마음은 돌이킬 수 없다. 허탈하고 어디에다 누구에게 따지고 물어내라고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아비는 참 쿨하고 자유롭고 아들을 위해 한 행동들이 아들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가끔 그런 일들이 있다.

너를 위해서 이렇게 할 것이다. 내가 겪어보니 그건 못할 짓이고 너무 상처가 되더라

그러니 나는 절대 이런 일로 너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 너는 자유롭게 너가 원하는대로 살게 해주겠다.

반대로 나는 너무 외로웠고 누군가 의지할 곳이 없었다. 누구든 단 한사람 나를 지지하고 나를 도와주었더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뭐든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너를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 언제나 니곁에 있겠다.

깊어진 결심은 타인에게 종종 상처가 된다.

결심이 나를 향해야지 타인을 향하는 순간 그것도 여리고 순한 아이를 향하는 순간, 그와 나를 별개라고 여기지 않고 한몸이라고 여기는 순간 상처는 시작되고 멀어질 일만 남았다.

 

책이 아주 좋지는 않았지만 흥미로웠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갸우뚱할때도 있고 이게 현실인가 싶다가도 환타지 같았다. 그럼에도 저 한 대목 아비의 편지는 꽤 오래 남는다.

책이 때로 한 단락만 내게 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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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환대 장희원

 

우리는 누구나 환대할 수 있다. 우리는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누구든 품어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경계가 있다.

어떤 도덕적인 선을 넘는 것.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용납할 수 없는 어떤 선이 아닌 것들은 환대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선한 사람이므로 악이 아니라면 품어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법을 어기지 않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하면 단 하나 걸리는 부분이 있다. 한창 호기심이 많을 청소년 무렵 그 또래가 봐선 안되는 영상물을 보는 아들을 훈계한 적이 있다. 분명 훈계다. 나는 아들에게 놀랐고 실망했고 그리고 아들이 절대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아들을 때렸다.

그리고 다행히 아들은 한 번도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게 들키지 않았던 것만이 아니라 아예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아들이니까.

그리고 그 아들을 만나러 지금 나는 호주로 간다.

낯선 땅 낯선 언어가 있는 곳. 그 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다르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남편이 아들을 심하게 때렸다는 걸 안다. 이유는 제대로 모른다. 아니 아는 게 두렵다.

그냥 그 나이 청소년들이 흔히 가지는 호기심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누구나 하는 걸 아들도 했고 조금 선을 넘는 영상을 봤고 그걸 남편이 또 봤고 남편이 놀라서 아이를 다그치고 때린 것.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 아이는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조금 철이 들었고 말이 줄었고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을 뿐이다. 그건 남자 아이들이 누구나 하는 행동들일뿐 아들의 별난 모습은 아니다.

아들이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간다고 했을 때 사실 말리고 싶었다.

굳이 그렇게 고생해서 외국에서 경험을 쌓아야 하나 싶은 엄마의 오지랖이었다.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은 다들 그렇게 경험하고 온다기에 말리지 않았다. 형편이 안되는 것도 아니고 아들이 뭔가 하다못해 영어라도 늘어서 오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들은 그 과정이 끝나고 다시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겠다고 한다. 대단한 대학도 아닌 지역대학에서 공부하겠다는 아들을 말릴 수 없었다. 이제 나이도 먹었고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가 아닌가

서운했지만 조금 일찍 독립시킨걸로 생각하기로 한다.

가끔 연락도 오고 화면으로나마 얼굴을 보여주니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어쩌면 함께 지지고 볶고 살다가 서로 갈등이 생기고 다투는 것보다 멀리서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 아들을 보러간다.

아들의 옷가지. 아들이 좋아했던 것들 어쩌면 그리워할지 모르는 먹거리들 등등을 챙겼다.

남편은 뭘 그렇게 가지고 가냐고 했지만 그는 모른다.

당신은 몰라. 아무것도 몰라

남자들은 모른다. 내가 아는 아들이 전부는 아닌데 내가 아는 것만 전부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들은 것 그리고 내가 상상하는 것 그 범위를 넘어가면 남자들은 당황한다. 그리고 자기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분노하거나 좌절하거나 어깨를 늘어뜨린다.

단순한 사람들

남편은 정말 아들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아들을 알까?

짐으로 부치라는 남편의 말을 기어이 어기고 꾸역꾸역 들고 기내에 올라 수화물칸에 넣었다.

그래도 아들 물건인데 아무 짐짝처럼 취급되는 건 싫었다. 이건 아들이 아니지만 아들 물건이니까 아들처럼... 우습긴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그 짐을 경유지 싱가포르에서 잊어버렸다. 그리고 잃어버렸다.

부랴부랴 말도 통하지 않은 곳에서 손짓발짓으로 물건을 찾으러 갔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일까 우리 행색이 꾀죄죄해서였을까

지들끼리 웃고 뭐라고 하는 말들이 영 고깝게 들린다. . 그래봤자 일개 작은 아시아국가주제에

물건을 찾았다. 어딘가 모르게 낡았고 조금 초라해져보였지만 내 물건이 맞다.

조금 달라보여도 내 아들을 몰라보진 않은 것처럼 내가 그렇게 정성껏 챙겼던 내 상자가 맞다.

이제 놓치지 않을거다.

호주는 햇살이 강하다. 두 눈을 제대로 뜨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쨍하다.

아들이 나왔다. 조금 말랐나? 조금 거칠어졌나? 환하게 웃으며 우릴 맞이한다.

그리고 택시를 불렀는지 뚱뚱하고 늙은 흑인이 모는 차로 우리를 안내한다.

아들과 운전사는 뭐라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기다리면서 알게 되었나? 내 아들이 저리 붙임성이 좋았던가?

아들 표정이 밝아보인다. 여기서 잘 지내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한편으로 섭섭하다.

 

한참을 들어가 아들이 사는 곳에 도착한다. 그곳은 내가 상상했던 곳과 다르다.

낡았고 잡초가 무성하고 그리고 외따로 떨어져 있다. 저쪽엔 분명 동네를 이루고 상가가 있을 것이 분명한 내가 상상한 호주의 주택가가 보이는데 이곳은...

남편을 보니 나와 다르지 않을 모양이다. 당황했지만 티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흑인 운전사는 짐만 내리는 게 아니다. 열쇠로 문을 연다. ? 이게 뭐지?

이 사람이 아들의 룸메이트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아들은 했다고 한다. 공항에서 만나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렸나? 아니다. 내가 아들 말을 잊을 리 없다. 우리를 보고 환하게 웃던 얼굴 긴 비행은 괜찮았느냐는 말. 다행이 날씨가 좋다는 말 다 기억하는데 차에 가서 짐은 내가 실을게요 했던 거. 조금 더우시죠 했던 거 다 기억하는데 이분이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그 중요한 말을 내가 잊을 리가 없다. 아들이 낯설다.

흑인은 다정하다. 말이 통하지 않아 어색하지만 우리에게 친절하려고 그게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게 느껴진다.

나는 아들이 또래 친구들과 사는 줄 알았다. 젊은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라 우리가 가면 어색해질테니 다른 숙소를 잡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많이 다르다.

그리고 이곳에는 둘 이외에 한국인 젊은 여자아이가 함께 있다.

이건 무슨 조화일까?

굉장히 낯설고 불편하다. 어찌된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애써 괜찮은 척 한다.

나는 예의 있고 상식 있고 다름을 받아들일 줄 아는 괜찮은 엄마이고 싶다.

남편도 그러리라. 쿨하고 편견 없는 사람의 역할을 처음 하는 것마냥 어색하다. 그런데 웃고 있다. 묻지 않고 있다. 궁금한 게 목까지 차올랐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니 당연히 아들은 아무것도 대답할 이유가 없다.

말이 짧아 흑인 룸메이트에게 물을 수도 없다. 그냥 마주치면 웃을 뿐이다. 최대한 근육을 당겨서.

나는 여자아이가 걸린다.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이렇게 남녀가 함께 살아도 되나?

짧은 바지아래 드러난 문신이 있는 다리 자꾸 걸린다.

아들에게 친밀하게 스킨쉽을 하는 것도 걸린다. 아들은 냉정하게 대한다.

내가 있어서? 아니면 여자 아이의 일방적인? 모르겠다. 이유가 뭐든 걸린다.

그래도 여자아이가 툭툭 말을 내뱉아서 상황을 짐작한다.

오빠가 여기 처음 왔을 때 많이 힘들어 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저 정도 된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런 일?

우리는 지금 잘 지낸다.

무슨 말일까

이들은 무슨 관계이며 이런 무리를 뭐라고 해야하나.

식사를 하면서 남편은 이제 허세를 떤다. 직업에 대해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고 얼마나 화목한 가족이었는지 아들과 얼마나 친밀했는지를 떠든다. 그만하면 좋겠다.

다들 분위기를 맞춰주는데 불편하다.

그들의 환대가 불편하다.

이건 아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지금 이해받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고 괜찮다고 하고 계속 하라고 하고 모든 걸 들어주겠다고 한다.

이건 아닌데...

길 건너 불빛을 본다. 남편도 본다. 저쪽에 가고 싶다.

여기가 아닌 저기. 저기에 가야 편안할 거 같다.

음식이 물컹한 식감이 그리고 어떤 상상이 나를 괴성을 지르게 했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다.

택시를 부르고 기다리고 우리는 숙소로 간다.

택시가 출발하는 순간 우리는 안도한다.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한국에서 가져온 기어이 내 손으로 끌고 온 그 박스를 뜯지도 않고 아들에게 주지도 못하고 내 손에 가지고 택시를 탔다.

그들은 저쪽에서 우리를 바라본다.

배웅한다. 걱정하며 환하게 웃으며 다정하게 친밀하게 우리에게 언제든 오라는 배려와함께

지금 내가 남편이 저쪽이 아닌 이쪽이라는 것이 가장 불편하다.

 

환대는. 배려는 내가 할 때 가장 편하다.

그걸 받는 입장이라는 건 불편하다. 그건 엿 같은 감정이다.

니들이 뭔데 나를 환대하고 배려하지?

뒤틀린 생각들 불편한 감정들 그리고 나는 환멸을 느낀다. 나에게 그리고 남편에게도

 

마땅히 내 것이어야 하는 우월한 입장을 타인에게 인터셉터 당했다는 느낌

감히 나를.... 이라는 마음

누구나 환대할 수 있다.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누구의 소유도 아니니까.

나는 내가 보이는 것을 본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리고 기억은 이기적이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방식으로 박제된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건 그럴 수 있다고

내 아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그렇게 기억된다.

 

어쩌면 내가 괜찮은 사람일 수 있는 건 내가 쳐놓은 울타리안에서만이다.

내가 용납할 수 있는 그 범위 내가 상처받지 않을 그 범위에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된다.

당연하다. 상처받은 적 없고 누구에게나 괜찮은 사람일 수 있는 그곳에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그 울타리 안의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울타리밖에 있는 존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멸시와 경멸 무시를 모른 척했다.

그런 감정을 가지는 건 나쁜 거니까 그 감정을 숨기기 위해 울타리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보이지 않았다. 있지 않았다. 누구도. 아무도

그 밖에 내 아들이 있다는 건 용납할 수 없어서 머리채를 집고서라도 멱살을 끌어서라도 울타리 안으로 집어넣어야 했다. 그리고 넣었다고 믿었다.

마땅히 내 것이어야할 배려와 환대가 저쪽으로 넘어가고 마땅히 무시와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어야 할 그 울타리바깥이 누군가에게는 울타리 안이었고 나는 경계선 밖에 서서 그들의 환대와 배려를 받고 있는 이 상황은 낯선 경험이다. 불쾌하고 불편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내가 내색하는 순간 이 관계는 그대로 굳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상황을 정해버리면 안되므로

내가 모른 척 하고 있는 한 상황은 절대 뒤집히지 않는다. 나는 굳게 믿는다.

나는 늘 환대하는 주체이지 대상이 아니다.

내가 베풀어야한다고 이 개돼지들아...

 

 

 

 

 

 

 

 

 

 

 

 

 

 

 

 

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둘째를 가졌을 때 나의 첫 감정은 실망이었다. 이게 아닌데.

환영하지 않았음은 물론 미....

나는 엄마가 될 사람이 아니었음을 한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알았다.

아이는 너무 이쁘고 사랑스럽고 손이 많이 가지 않은 순한 아이였지만 나는 아이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나는 아닌 척 괜찮은 척을 무척 잘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남들이 다 하는 결혼을 했고 남들이 다 하는 출산을 해서 아이 엄마가 되는 경험을 했고 부모와 아이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을 만들었으니 이제 다 된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둘째가 생겼다. 이건 아닌데

혼자 오래 고민했다.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워야 할까

그때도 지금처럼 중절은 불법이었지만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내가 산전검사를 갔을 때 누군가는 감기약 때문에 아이를 유산하고 누워있었다.모르고 감기약을 오래 먹어서요. 어쩔 수 없었어요. 내 기억에 그 말을 한 여자는 말간 얼굴로 편안해보였다. 안심하는 얼굴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게 기억되었다.

둘을 키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제법 아이가 자라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었고 어딘가 교육기관에 보낼 수 있을 것 같고 나도 뭔가를 할 수 있을 것같은 이 순간 덜컥 둘째라니...

혼자 오만 고민을 했지만 용기없고 실천력이 없는 이유로 그냥 남들에게 알려졌고 축하를 받으며 임신기간을 보내고 출산을 했다. 그리고 정신없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랑 너무 닮아서 너무 힘든, 아이를 보면서 어쩌면 이 아이가 그때 내 마음을 모두 꽤뚫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할 때가 있다. 그때 나를 미워했지? 나를 없애고 싶었지? 어디 한번 너도 당해봐. 나는 너를 괴롭히기 위해 마음껏 삐뚤어질테니까... 아이가 힘들게 했던 건 사실이지만 삐뚤어진 건 아니다. 그럼 기억을 못하는...

중절을 고민하는 여성중에는 미혼이나 미성년보다는 오히려 기혼의 아이가 있는 여성의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더 많이 한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만 중절을 허락한다는 개뼈다귀같은 사고가 아니라 아이를 가져본 경험이 있고 키워보았고 그리고 그럴 환경이 됨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은 여성들이 더 많다. 여전히 아들과 딸의 문제일 수도 있고 계획되지 않은 임신일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직장문제로 더 이상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은 수도 있다.

성폭행을 당했거나 미성년부모가 되거나 미혼모가 되는 일보다 오히려 사람들이 정상 가정이라는 곳에서도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충분히 망설여지는 일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돌아보면 다 어려운 일이며 동시에 별거 아닌 일이 되기도 하겠지만 일단 그 과정에서는 너무 힘들다. 아이는 어느 지점 성장까지 타인의 도움을 요구한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한다. 아이가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포유동물은 혼자 자립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점점 사람에게 요구하는 조건들이 까다롭고 목록이 늘어간다.

 

아이를 지워야 할 피치못할 상황들이 있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할까?

태아도 생명이라 차마 없앨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신파만 용납하는 세상. 그래서 중절을 선택하는 과정이 얼마나 괴롭고 죄책감이 느껴지고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노라고 이렇게 절절하게 타인에게 이해를 시켜야 나라에서 허락하는 상황이 조금은 코메디다.

내 몸에 대한 나의 결정권이라는 것을 떠나서 어떤 이유든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중요하다. 내 몸이고 내가 져야하는 그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국가가 개입을 한다?

그래서 이 글이 많이 와 닿았다.

꼭 이유가 있어야 할까

낳아야 한다는데 이유가 없다면 중절을 한다는 것도 큰 이유가 없다.

아니 저마다 이유가 있다. 다만 그 개인적이고 은밀할 수 있고 사적인 부분에 일일이 검열을?

소설은 그 지점을 이야기한다.

선택할 수 있는 출산이라면 선택할 수 있는 중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 아이를 만드는 과정의 쾌락은 다 즐겨놓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이기심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 하는 자아비판같은 거 이제 없으면 좋겠다.

누구나 쉽게 중절을 결정하지 않는다. (어떤 집단이든 완벽한 이기심을 가진 극 소수는 늘 있다.)

아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 쉽지 않은 결정을 한다. 오래 고민한다.

이래도 되나 싶게 자기를 돌아보고 두려워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결정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개인적이지만 절절한 이유로

소설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의 엄마는 동생의 결혼과 출산이 못마땅하다. 아직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 앞에서 출산이라는 것이 얼마나 걸림돌이 될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고 주변사람들을 봐서 안다. 그래서 말린다. 이유가 충분하다 그들에게도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도 이유가 충분하다.

두 충돌에서 결국 자신이 결정할 뿐이다.

어떤 신념을 주장하기 위해 그 신념이 꼭 순수하고 완전무결해야할까

약간의 개인적인 마음 이기적인 생각같은 것이 들어가서는 안되는 걸까

무균질의 신념만 통과가 가능한 걸까?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아이가 없었더라면... 아이가 하나였더라면

그 상상속에서 나는 지금 보다 덜 비루하고 더 자유롭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내가 아이를 대신해서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자유였을까? 능력이었을까? 돈이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엄마라는 옷이 맞지 않구나 하는 마음이 들 때면 동시에 나는 내가 무능하다고 말하면서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솔직하게 돌직구처럼.

자격없는 엄마. 이기적인 엄마. 그럼에도 인정받고 싶은 엄마는 이 이야기 앞에서 많이 서성이면서 응원한다.

한번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런생활 김봉곤

 

그의 단편집 여름 스피드를 읽다가 덮었다. 아직 나에게는 많이 버거운 주제인걸로 하고 포기했다. 그냥 내가 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속편한 이유를 대면서 나는 편견을 한겹 그대로 두었다.

그래도 많이 읽고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나 하나쯤 모른 척 해도... 하는 마음과 함께

그리고 소설집 속의 이 이야기를 읽는다.

어쩌자고 이 작가는 이렇게 대책 없이 솔직한 걸까? 이렇게 모든 걸 모두가 다 알도록 써도 되나? 이게 소설이 되나? 이런 개인적인 일을 꼭 읽어야 하나?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개인사가 훅하고 들어오면 어쩌란 말인가?

꼭 이런 tmi까지 알아야 할까?

그럼에도 책을 놓지 않는다. 이왕 시작한 거 끝이나 봐야겠다. 얼마나 찌질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는지 어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뭐 혼자 비장하게 읽기를 계속한다.

읽다보니 자꾸 빠져든다. 매력있다는 건 아니지만 끝이 궁금해진다. 그래서 어쩌자는 걸까?

별 이야기도 없이 제멋대로 왔다갔다하는 마음들. 팔랑거리는 감정들 미워해야하는데 자꾸 놓기 싫은 이율배반들이 너무 적나라하다.

누군들 그런 경험이 없을까

내가 왜 이럴까 싶으면서도 계속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들

이제 끝이다. 하고 단칼에 베어내야 함에도 흐지부지 미적미적 이러다 다시 저절로 봉합되기만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은근슬쩍 눈 감아버리는 것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걸 뻔히 알면서도 내 상처를 더 키우고 싶지 않아서 그냥 그의 상처는 눈감아버리는 일들 주로 가족에게 향하는 그 마음들

타인의 상처는 그가 비록 가족이거나 부모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나를 아프게 하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견딜 수 있게 되는 이기적이면서 애처러운 그 마음이 자꾸 불쑥 올라온다.

그냥 그런 생활이다.

뭐 대단한 제목이나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닌

혼자 정리했다가 찌질했다가 욱 했다가 그리고 잠잠하게 정리하면서 뭐 별거 있겠어 그러니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나는 아직도 같은 성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럴 수도 있지. 세상은 다양하니까. 잘 모르지만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물어보는 방식이 예의바른게 맞는 거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까. 다만 상대에게 상처주는 방식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정도.. 그 이상 알지 못하지만 그냥 이렇게 다르지만 열심히 나랑 다르지 않게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보면서 조금 나의 울타리를 넓히고 있다. 그 울타리가 아직은 견고할지라도 조금 넓어지고 낮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다시 여름 스피드를 들어볼까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다른 것들이 더 끌려서 조금만 더 보류.

 

 

 

 

음복 강화길

 

이제는 좀 발랄하고 앙큼해져도 괜찮지 않나?

모른다는 것. 그게 가장 센 공격이 되고 방어가 되는 것. 뭐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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