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더 큰 감정은 수치심이 아니었을까?

안나가 가진 큰 비밀은 글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건 그녀에게 큰 비밀이며 동시에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수치심이다. 글을 모르는 그는 글을 아는 이가 읽어주는 이야기에 푹 빠진다.

마이클과 사랑을 나누기 전에 책을 읽는 행위는 그녀의 수치심을 감출 수 있고 스스로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중간중간 마이클이 책이야기를 해 줄 때  그리고 사랑에 들떠서 안나를 바라볼 때 자기의 비밀을 말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안나는 그렇지 않았을것이다.

수용소에서도 어린 소녀들을 불러 다정하게 대하며 책을 읽어주게 했고 마이클도 그녀에게는 어린 아이였다. 그녀는 자기보다 어리고 약한 존재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절대 자신의 문맹을 들키지 않을 상대들에게 말이다. 그렇게 안나는 자기의 비밀을 꼭꼭 숨기길 원했다.

글을 읽지 못해 사무직으로 승진도 하지 않았다. 수용소로 가기전 지멘스에서도 아마 승진이 두려워 이직을 했을 것이다.글을 읽지 못해 자기가 서명한 서류가 무엇인지 알 지못하면서도  문맹임을 밝혀서 스스로의 범죄를 낮출 생각보다 차라리 죄를 모두 자기가 뒤집어쓰는 쪽을 택한다. 문맹이라는 사실은 그녀에게 죽음과도 기꺼이 바꿀 수 있는 수치였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을 뒤늦게 법정참관을 한 마이클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안나는 글은 알지 못하지만 참 완벽한 감시원이었다.

수용자를 감시해야한다는 자신의 업무를 고지식하게 철저하게 지킨다.

자기의 신념이 타인에게 어떤 폭력으로 가해지는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수감자를 감시해야하고 그들이 절대 소용시설 밖으로 나가 무질서와 혼란을 야기하면 안되는 것이 그녀가 해야할 모든 것이다. 가스실로 가야할 사람을 골라내라고 하면 스스로의 기준으로 아무런 감정없이 사람들을 골라냈고 새로 오는 수용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누군가는 가스실로 가야한다는 당위성에 철저하게 복종한다.

그녀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명령받은 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 그것이 그녀에겐 전부였고 그건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는 문맹이어서였을까 스스로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았다.

내가 글을 알지 못한다는 수치심이 그녀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통제했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할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걸까?

법정에서의 모습은 너무나 태연하고 당당하게 자기의 행동을 구술한다. 어떤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치장도 없이 말이다.

굳이 악의 보편성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생각하지 않은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안나가 잘 보여줬다.

오랜 감옥생활에서도 안나는 스스로의 죄를 잘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키는대로 했다는 것 그들의 명령이 당위성만을 생각하며 그냥 그 속에서 견디고만 살았을 것이다.그런 안나에게 마이클의 녹음이 도착하고 책을 읽고 글을 읽게 되면서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마이클을 만나면서 그녀는 자기의 진짜 수치심과 마주하지 않았을까?

글을 모른다는 건 수치감이 될 수 없다.

자기가 아무 생각없이 아무 감정없이 명령에 복종하고 그 명령에 당위성을 주며 따랐다는  사실이 더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별 거 아닌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더 큰 죄를 만들고 죄책감을 알게 된 안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안나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마이클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은 자기가 읽고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 더 큰 다른 것이었다는 것 그것을 마주 하고서 말이다.

 

마이클은 ...

열다섯살 소년에게 안나의 존재와 안나와의 관계는 큰 충격이고 영향을 준다.

내가 사랑한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상대가 말도 없이 떠나고 그리고 훗날 우연히 만난 그녀의 더 큰 비밀을 알게 되면서 마이클은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누구든 내 곁을 쉽게 떠날 수 있을 것이고 크다란 비밀을 나몰래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면.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할까?

믿음에 대한 배신과 함께  마이클과 그가 속한 사회가 가진 신념에 전혀 맞지 않는 안나를 보며 또 다시 실망을 했을 것이고 거기에 더해져 혼자만 알게 된 안나의 비밀을 안나를 위해서? 아니면 안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결국 혼자 안고 입을 다물어버린 행동까지 더해지면서 그 역시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을까?

 

두 사람은 한 때 사랑했던  시간과 기억으로 각각 죄책감을 안고 간다.

사랑이 죄책감을 붚풀린다.

마이클은 죄책감이 책을 녹음해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알게 된 안나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안나가 조금 더 일찍 자기의 진짜 수치와 죄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생을 허비하며 마감했을까?

사랑에 대한 배신이 죄책감을 만들과 그리고 삶을 다른 방향으로 쿨꼬를 돌리기도 한다.

 

그저 19금의 격정적인 사랑의 기억이라고만 보기엔 뭐랄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내가 가진 신념이 신념인지 모른다.

그저 타인이 가진 신념을 비판하고 틀렸다고 지적할 수 있다.

혹은 신념과 현실은 다르다며 나의 타협을 인정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 생각이 없다고 그저 현실에 맞춘다고 믿었던 나의 말과 행동도 결국은 내가 가진 신념이고 틀이라는 걸 나만 모른다.

 

다시 책을 읽어 봐야 겠다.

 

 

 

사랑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뒤 그 시간을 되돌아 볼 때 왠지 뭉클해진다.

그 사람도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고 다시 볼 일이 없게 되어 그때의 열정은 이제 두 사람의 기억 어딘가에 쓸쓸하게 남겨져 있거나 그마저 없거나 할테지만

가끔 아주 오랜 후에 되돌아 보는 미쳤거나  격정적이었을 그 때의 감정을 생각하면

왜 그렇게 안달하고 애태웠나 알 수 없으면서도 그 감정이 슬프다.

그렇게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렇게 미치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경주마처럼 오직 눈앞에 그 사람만 보였던 그 시간이 부질없다 싶게 쓸쓸하면서도

그것 마저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더 외롭고 슬프고 삭막할까 생각한다.

엣사랑은 그것이 무엇이건 다 조금씩 상투적이며 유치하고 속물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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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lp 2019-06-27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영화이자 책이었습니다. 나치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나치나 친일은 단죄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푸른희망 2019-06-27 22:31   좋아요 1 | URL
맞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