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지나간 이후

혹은 고통을 겪고 시간이 많이 흐른 이후

그 고통이 끝나고 그 흔적은 남았더라도 이후 새로운 행복이 찾아오고 참 괜찮았다 싶은 삶을 살았다면 그 고통도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을까

그땐 그랬지 하고 편안하게 돌아보게 될까?

한 30년의 시간이 흐른 후라면 말이다.

 

또 한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무의식 아래 넣고 꼭꼭 덮어둔 무언가는 아직도 꺼내어 마주하고 싶지 않을까? 이제 삶을 정리하는 순간이 왔지만 끝까지 마주 하지 않고 그대로 덮고 넘어가게 되는 것도 남는 걸까

 

 

어릴적 내게 위안을 준 책들 중에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물들이 있었다.

소녀소녀하고 달콤한 이야기인 빨강머리 앤이나 키다리 아저시 소공녀  그리고 작은 아씨들과 제인에어도 좋았고 낭만저인 모험인 80일간의 세계일주도 좋았지만 마지막까지 오래오래 읽은 건 셜록홈즈와 그녀의 추리물들 이었다, 셜록홈즈 시리즈는 재미있으면서도 어딘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면 그녀의 작품들은 왠지 슬펐다, 누군가가 죽고 죽이는 살인사건이 주를  이루고 피가 나오고 광기가 나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슬펐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그 때의 감정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홈즈 시리즈도 그랬겠지만 그녀의 추리물들에는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에 살인에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가 때로는 탐욕이나 질투가 있었지만 그 외에도 복수 절망 모욕감등이 주는 슬픔이 있었다, 그가 나를 모욕하고 내 가족을 모욕하고 절망을 안겨주어서 죽었다는 것 그래서 적어도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나름의 스토리가 있는 죽음이고 사건이라는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생명을 아무렇게나 여긴다는 것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

그의 추리물을 읽으면 그때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인과 응보 권선징악이 드러나면서 어린 내가 느끼기엔 묘한 슬픔  왠지 그냥 푹 빠지고 나른해지는 슬픔을 느꼈던 거 같다, 포와로나 미스 마플역시 홈즈처럼 냉정하고 초이성적인 인물이 아니라 인간적이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에거사 크리스티의 자서전을 읽으면 그는 꽤  운도 좋고 평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흔한 말로 초복도 좋았고 한번의 이혼의 경험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때의 방황과 실종사건도 있었지만 그래도 곧 (나로서는) 새로운 사랑을 찾았고 써내는 책들도 다 반응이 좋아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없었고 자녀도 속 썩이지 않고 성장했고 하고 싶은 일(유물 발굴) 가고 싶은 곳 (오리엔트 특급 여행 등등)을 모두 하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분

딱 그 느낌이었다.

좋았겠네,,

내가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고 위로받았던 경험이 없었덛라면 나와 상관없이 스쳐지나간 팔자졶았던 노인네였을것이 분명하다,

물론 자서전의 스쳐가는 한줄 한줄에 무언가 암시하는 듯한 문장도 보였지만 그 오랜 삶속에 그런거 하나 없는게 더 이상하지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필명  메리 웨스트웨콧이란 이름으로 쓴 책들을 읽으며 또 다른 생각을 한다,

적어도 이 책들은 노년 전에 쓰여졌던 책이라면

<두번째 봄>에는 그녀의 그때의 고통이 절절히 드러난다, 소설을 읽으며 그 내용속에서 저자를 찾는 건 조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긴 하지만 왠지 이건 저자 자기 이야기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올 때가 있다 이 시리즈의 책들이 그랬다, 특히 <두번째 봄>은 더욱...

자서전에 없던 혹은 그냥 몇장으로 지나갔던 그녀의 이혼과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나름 상세하게 나온다, 어린 시절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쫒겼던 손없는 남자 혹은 총을 든 남자 이야기부터 어쩌면 자서전보다 좀 더 내밀하고 솔직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속된 호기심을 가졌다,)

누군가가 들려주는 셀리아의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하고 전개된다,

주인공 셀리아는 영락없는 아가사 자신이다,

아닌 척 하면서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보여지는 것이 어쩌면 좀 더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내 얘긴 아니구 내 친구의 사촌 이야기인데 말이야... 하면서 시작되는 은밀흔 고백같은 것

 

이혼이라는 걸 생각하는 여자는 아가사가 살았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 한국이든 거기 영국이든 이혼을 생각하는 여자는 늘 자기보다 주위의 시선을 생각하고 아이를 생각하고 나기의 감정과 분노와 모멸감은 늘 뒷전이 된다

셀리아도 딸 주디가 상처받고 알게 되는데 가장 전전긍긍했고 자서전의 아가사도 딸 로잘린느의 충격이 우선이었다,

샐리아도 아가사도 둘 다 남편을 몹시 사랑했다고 이혼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기적으로 슬픔이나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이 아주 떨어지는 남편에 대해 그럴 수 있다고 보고 내가 잘못 판단했기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혼을 아프게 받아들인다,

자서전에는 흘러지나갔고 소설은 좀 더 세밀할 뿐이다,

셀리아는 나이가 들어 자신과 엄마사이의 애착이 너무나 강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 심하게 고착된 애착관계에서 성장이 멈춘 부분도 있다고 느꼇던 거 같다, 사랑도 결혼도 소꼽장난같고 친구들 사이의 놀이처럼 느껴졌다는 것  어쩌면 무엇하나 어려움 없이 지내다가 맞닥뜨린 엄마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는 그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를 가진 셀리아에게 태풍은 연달아 들이닥친 셈이다,

누구보다 강하게 연결된 엄마의 부재에 이젠 엄마를 대신해 기대고 싶은 남편의 배신은 그녀를 죽게 싶게 만들었고 현실에서 도망가게 만든다, 그때야 셀리아는 안다. 나는 아직도 어린 소녀였구나 그 소녀가 꿈에서 무서워 했던 총을 든 남자는 언제나 그녀 곁에 있었던 것이다,

그 총을 가진 남자가 두려운 까닭은 그가 낯선 타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언제나 우리곁에 있고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여기는 사람이 순간 총을 든 남자 혹은 손목만을 가진 남자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

그러나 어떤 고통 뒤에 셀리아는 자신을 돌아보고 그 통을 든 남자를 마주하면서 어린 소녀와 마주하고 그리고 자신을 얻는다,

자서전에서 조차 언급하지 않은 아가사 그녀의 이야기를 여기서 봤다고 느껴지는 건 과장은 아닐 것이다,.

(지난 밤 남편이 별 일 아닌것으로 버럭 화를 내고 아주 유치하게 침묵속으로 들어갔다. 예전같으면 혼자 자책하거나 미워서 길길이 뛰거나 할텐데 이젠 평온하다. 화는 그의 옧이고 내 탓은 아니다. 나는 내가 오해하게 만든 부분을 사과하면 그만인 것이라고 생각할 단계가 되었다,

그런데 순가 나도 역시 아직 자라지 않은 소녀가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남편의 욱하는 성질과 유치한 초딩같은 태도에 질려하면서 어쩌지 못하고 당황하게 군건 나 역시 자라지 않은 어린 소녀였다는 걸 알았다. 부모 그늘아래서 살다가 나는 남편이 그 대신의 역활을 해주길 바랬던 것이다, 그런데 나와 남편은 아직 채 자라지 않은 소녀와 소년이 아니 조금더 말하지만 사춘기에 막 들어선  소녀와 아직은 초등학교때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이 만난것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상대에게서 부모를 바란다, 그러나 서로의 부모가 되어 줄 수는 없다, 나의 기대를 상대에게 얻지 못한 우리는 늘 부딪치고 화를 냈다. 나는 그가 화를 내는 상황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그는 내가 무심해지고 냉정해지는 지점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셀리아는 타인이 아니라 나였다, 사랑도 결혼도 호기심어린 놀이였고 경험이었고 그리고 여전히 어린 아이였던 내가 셀리아를 통해 보였다,   어쩌면 어떤 결정 이전에 내가 먼저 어른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두번째책 (내가 읽은) "딸은 딸이다"

 

 

앤과 세라는 모녀지간이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앤은 활발하고 명랑한 딸 세라가 있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모녀는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세라가 스키여행을 떠난 3주 동안 앤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낯설고 서투르고 무뚝뚝하고 고집이 세지만 여리고 착한 남자 콜드필드  앤의 여리고 섬세한 성격은 콜드필드의 여린 부분을 알아보고 그도 앤의 가치를 알아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문제는 세라였다, 세라는 도무지 이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사건건 나와 반대 의견을 가지고 부딪치고 잔소리하는 남자다.

내성적이고 고집이 센 콜드필드는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줄 몰라 늘 설교로 이어지고 지적질로 이어진다.  젊은 세라에게 호감을 줄 수 없는게 당연하다. 세라 역시 젊은이답게 반항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앤은 둘 사이의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두통뒤로 숨어버린다,

결국 콜드필드는 떠나고 모녀는 남는다, 그리고

앤이 변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사색적인 앤은 없고 화려하고 바쁘고 술과 파티의 나날을 보내는 앤이 나타난다, 세라역시 바쁘다, 세라는 개리라는 늘 실패만 하는 불운한 청년을 아프리카로 보낸 후 위험하고 나쁜 남자에게 끌리고 결혼한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난 후 앤은 모든 것이 신경질 적이다, 두통은 심해지고 파티는 시들하고 혼자는 불안하다., 그때 멀리 떠난  불운의 청년 개리가 돌아온다, 그리고 앤을 탓한다. 세라가 타락한 것은 엄마인 앤의 탓이라고 ... 세라는 나쁜 남자와 결혼 한 후 중독과 향략에 빠져있다,

개리는 세라를 설득하고 함께 캐나다로 가자고 한다, 자기는 비운의 아이콘이긴 하지만 세라가 옆에서 충고하고 북돋우어 준다면 할 수 있다고 세라 역시 누군가를 겪려하고 독하게 다그치며 함께 가 줄는 것이 그녀의 가치라고 한다. 세라는 흔들린다,

그리고 모녀의 설전이 나온다,

모든 통속적인 모녀처럼

앤은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도 너를 위해 포기했다,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너만을 위해 살았다고 소리친다,

세라 역시 그렇다. 엄마가 나에게 해준게 뭐가 있느냐?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교묘하게 빠진다. 엄마는 내가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걸 그냥 내버려두었다 엄마라면 응당 해야할 엄마로서의 역활을 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불행한건 모두 엄마탓이다. 엄마에게 애정을 받지 못했고 엄마에게 질투를 받았고 엄마에게 버림받은 거라고 한다,

앤은 말한다, 니가 그때 내 결혼을 막지만 않았어도 나는 지금 이렇게 되지 않았다,

세라가 말한다, 그래서 나에게 복수를 한거냐 내가 불행하길 바란거냐

둘은 돌이킬 수 없는 말을 쏟아내고 돌아선다, 그리고 서로 가슴을 쥐어뜯을 것이다,

입이 웬수다,,

정숙하고 조용한 앤은 어느 순간 찾아온 사랑을 포기한다, 전혀 그녀의 의사가 아니다, 딸을 위한 일이라 누구에게 하소연 할 곳이 없다, 딸은 내 유일한 혈육이고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존재다, 사랑은 어쩔 수 없다, 헤어지면 타인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후회가 많은 슬픔이 가슴 깊이 자리한다, 스스로 망각하고 잊었지만 어느 순간 우연히 만난, 이제는 짝을 만난 콜드필드를 보면서 그때의 아픔이 올라온다, 나는 그렇게 가슴아프게 너를 위해 희생을 했는데 세라는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내 사랑은 내 추억은 어디서도 가치를 찾을 수 없다. 화가 난 앤 어쩔 줄 몰라하는 앤.. 그러나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사려깊다는 이름표를 가진 앤은 미치지도 못하고 화를 내지 못한다, 그냥 자기도 모르게 은밀하게 딸을 질투하고 미워하고 실패하길 바란다, 그 은밀한 마음은 세라도 모르지만 앤도 역시 모른다,

세라는 철없고 무서울 것이 없는 아가씨다. 좋은 감정을 가진 청년은 늘 실패만 하고 그녀는 그 앞에서 늘 우쭐하게 조언한다, 누구나 호감을 갖는 외모와 조건을 가졌다, 엄마의 연애를 권장하지만 어디까지나  모든 것에는 내가 우선이다. 내가 없을 때 심심풀이로 엄마가 연애를 하면 그만이고 내 생활을 침범하지 않은 범위내에서 해야한다, 물론 말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여긴다는 걸 세라자신도 모르지만 은연중 그렇게 이기적이었다. 엄마의 사랑? 어디서 놀던 뼈다귀인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괜찮아 내 일 아니니까 엄마의 사랑이니까 하면서도 어느틈에 손톱을 세우고 공격한다, 정말 싫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싫어하니까 나는 정당하다,

그리고 잊었다, 남의 아픔이 절대 나를 뚫고 들어오진 않는다, 공감은 나를 뚫고 들어와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것인데 세라는 아직 그럴 능력이 없었다, 엄마는 행복할 것이고 나는 어떤 불운한 사내로부터 엄마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미친 사랑이 찾아오지만 어디선가 경고음이 들린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가까이 하지마라

가장 믿고 의지하는 엄마에게 물어본다, 어쩌죠 엄마?

엄마는 말한다, 니 삶이니 니가 결정하는거야 너의 자유의지에 달린 거야 엄마는 너의 결정을 지지한다, 어딘가 아쉽고 서운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더 재수없기도 하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한다, 잘못되면 엄마탓이니까 아직도 자라지 않은 세라는 그렇게 믿는다,

 

(누구탓을 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다, 내가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땐 그게 가장 좋은 해결치고 도피처다, 내가 어릴적 받은 상처들 아픔들 억울하고 소외받은 기억을 엄마는 모른다, 엄마는 말한다, 나는 그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너를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들은 때때로 한없이 약해지기도 한다,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너의 결정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왜 내가 말리는 걸 듣지 않았니?  내가 말리지 않은게 아니지 않니? 그러게 엄마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지 않든? 이미 나이를 먹어서 엄마탓을 할 수 없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고 있다. 인생에 떨 지랄이 정해져 있다고 그렇다면 엄마가 젊고 좀 더 나보다 쎄다고 느낄 때 떨어야 한다, 그래서 엄마도 강하게 받아치고 나도 죄책감이 덜하다, 나이먹어 내가 떠는 지랄은 주책이고 그걸 감당하기엔 우리엄마는 너무 늙어버렸다, 그래서 아직 남은 나의 지랄들을 나는 그저 꽁꽁 묶어두고 있다, 이러다 바스라지면 좋겠다, 죽기전에 튀어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제풀에 지쳐 떨어지기를.. 바란다, 어느 순간 엄마는 늙어버렸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  퍼붓고 싶은 잔소리가 많지만 얼굴을 마주하거나 전화기를 통해서 할 수 없다, 이미 퍼부을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 그냥 꾹꾹 담았다, 내가 참으면 그만이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한 평생 그것이 옳다고 믿은 엄마를 내가 지금 어떻게 바꾸겠는가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그런데 내가 아프다, 울컥해서 퍼붓고 나도 아프고 꾹꾹 눌러 참아도 아프다,

 

 아들은 아내를 얻을 때 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다

 

책속에서 가장 지혜로운 인물 이디스의 말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큰 상처를 준다, 그게 상처인걸 안 순간 동시에 그게 사랑인것도 안다, 그가 준 사랑이 내게는 독이다, 내가 준 사랑도 그에겐 독이다, 그와 나는 가장 가까운 사이인데 서로 독을 독인 줄 모르고 주고 받는다, 그게 아닌데,,,, 이 말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 끼리의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엄마 엄마, 그 이름이 내게도 몹시 아프다, 몹시 싫을 때가 있었고 귀찮을 때가 있었고 위로가 될 때도 있고 그리울 때가 있지만 이제는 가장 아픈 이름이다, 어쩌면 그에게 나도 가장 아픈 이름이 되어버렸을지 모르겠다, 물어볼까, 절대 물어보면 안된다,

그냥 둘이 함께 할 시간을 좀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밖에,,, )

 

 

 

 

가장 먼저 읽은  그녀의 소설이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이기도 하고...

읽으며  우리나라 아침 드라마로 딱 인 소재라는 생각을 햇다,

타인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삶을 결정해주고 지지해주고 막아주고 쓸어주는 여자 조앤 그녀가 모르는 단 한가지는 모든 주위 사람이 그녀를 힘겨워한다는 사실이다.

" 난 알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  진실? 그게 진실이라는 걸 어떻게 알지?"

 

기억은 내가 결정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한것만 기억하고 지우고 싶은 것은 그냥 지워버린다,

그리고 사실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기억하는 그 형태가 그 언어가 바로 진실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내 선택이, 결정이 옳다고 믿어야 한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녀의 삶은 정말 열성적이었고 희생적이었으나.... 그 이면에 있는 그녀의 독선과 기만은 보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 편의에 의한 것이라는 걸 그녀는 사막 한 가운데서 절절하게 깨닫지만 다시 기차가 움직이고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오면서 그녀는 다시 익숙한 기억으로 익숙한 행동으로 돌아갈 뿐이다,

 봄에 그녀도 없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타인을 어디까지 알 수 있을까?

아니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읽고난 후 몹시 혼란스러운 생각이 든다,

여태 메리 웨스트메콧이 여성에 대한 이야기에 정통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 스펙트럼이 넓다,

이건 누구의 이야기인가

휴 노리스의 이야기일까 존 게이브리얼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사벨라의 이야기일까

서로는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사랑하고 오래 속마음을 터놓았어도 서로를 몰랐다

그리고 자기도 몰랐다 싶다,

타인을 안다고 말하는 것. 난 촉이 좋아서 모든 게 보인다는 말이 얼마나 위험하고 오만한 말인지 생각하게 한다,

나아가  세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내 기억으로도 세익스피어가 만든 인물 중 가장 입체적인 인물인 이아고가 다시 그리워졌다,

장미의 시간과 주목의 시간은 같다,,,

알쏭달쏭하면서도 알것같은 말....

타인의 삶을 바라볼 때 늘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한다는 것을 다시 배운다.,

타인은 나와 다른 사람일뿐 그는 틀린 사람이 아니다,

나도 그에게 다만 다른 사람일 뿐이다.

 

 

 

눈앞에 있는 건 뒤에 있는 것만큼 무섭지 않아,

뒤돌아 마주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거야, 

책장을 덮고 역자후기를 읽어본다.

독자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저자와 주인공의 의도가 여러가지로 읽힐 수 있다는 구절이 보인다. 네 사람의 몇년에 걸친 우정 사랑 혹은 절망등이 읽히기도 하고 읽는 입장에서 누구에게 감정을 이입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이야기이다,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많은 주인공이 제각각 얽히며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듯 얽혀들면서 이어진다,

버넌이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넬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고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던 레빈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기도 한다, 불쑥 튀어나온 제인이 모든 사람을 끌고 가기도 하고  큰 비중을 보인 조는 어느 순간 사라지기도 한다.

정해진 인물을 따라 가며 씌여지니 다른 작품과 달리 여러사람을 따라가다보니 사실 집중은 떨어지지만 책장을 덮고 나니 결국 이 작가의 인간에 대한 통잘에 다시 존경심이 느껴진다,

회피형 인간..

버넌은 한번도 눈 앞에 있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두려움이기도 하고 거절 불안이기도하다,

불안정한 엄마 어정쩡하게 무심하고 역할에 갈팡질팡하는 아빠 사이에서 버넌은 자기보호막을 치며 안으로  집중하며 불안과 두려움을 회피한다. 그의 그런 행동이 늘 드러나진 않는다,

아빠의 피를 닮아 현실적인 외가와는 다른  그는 모든 것을 주춤하고 피한다

그리고 나중에 기억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의 회피는 최고조에 달한다,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 내 마음을 고요하게 들여다 보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자신마저 버린다.

버넌뿐 아니라 어린 시절을 함께한 네명은 가족관계와 성장배경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고 그 가족력 그대로 성장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도 변함이 없다. 제인이 네명을 한순간 흔들어보지만 자기를 들여다 볼 줄 아는 사람만 남을 뿐 모두 흔들리고 도망치고 운명처럼 거부하지 않는다.

 

 

 

 

 

 

 

 

 

 

 

 

 

 

 

 

 

사람은 의외로 배워야 아는 것들이 많은 모양이다

저절로 알았다고 꺠쳤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의외로 배움이 필요하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알아가는 것은 내가 느끼는 내 감정들 그리고 내가 무심코 하는 내 반응들도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냥 막연히 알거야.. 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정교하고 오랜 반복의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랑... 역시 감정의 하나 이지만 배워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감정을 배운다는 것 사랑을 배운다는 것은 그 감정을 많이 느끼고 사랑을 받아야  배울 수 있다,

오롯히 담겨본 사람만이 누군가를 담을 수 있고 공감받은 사람이 타인을 공감하고 사랑받았던 아이들이 아무런 계산없이 사람을 사랑한다,

로라는 어쩌면 글로 사랑을 배운 사람같다,

물론 책을 통해 배운 건 아니지만 이제 부터 나는 셜리를 사랑할거야 라는 다짐으로 사랑이 시작된다,

어린 노라가 가진 셜리에 대한 미움은 당연하다,

둘째로 늘 비교대상이 되었고 더구나 자기보다 월등하게 사랑스럽고 사랃받던 오빠와 비교되며 자기 자존감을 죽이던 노라에게 오빠의 죽음은 슬픔과 함께 자기가 사랑받을 차례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설레임이 함께 한다,. 그 나이의 로라라면 당연하다고 말한다면 너무 심한 걸까?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나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않은가?

아이답게 천진하고 순수한(?) 영악함이 푸른 가운을 입은 성모에게 기도하게 하고 그 날밤 그 기도가 이루어질때 아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대로 불이 나고 방에 갖힌 아이와 유모가 못나오고 사망한다면 .....

잠깐의 감사와 함께 긴 죄책감이 남았을 것이다

그 순간 노라에게 간건 책임감이 아니라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이건 아니다, 이건 내 탓일지도 몰라 하는 죄책감이  무의식의 용기를 내게하고 아기 셜리를 구한다 그리고 그 댓가로 노라는 영원히 아기 셜리를 사랑할 것을 맹세하고 그런 삶을 산다,

 

이웃집 존은 노라의 얼굴에서 아이다운 천진함이나 대책없는 명랑함 을 찾지 못했다,

아이가 아이의 얼굴이 아니라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 만큼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

존이 계속 노라의 친구가 되고 그의 멘토가 되는 건 그래서일것이다,

아이답지 않은 아이를  보는 불안감

지나치게 셜리를 사랑하는 노라를 보며 존은 늘 말한다,

셜리는 셜리의 인생이 있다. 그 아이가 볼행하건 행복하건 그건 그 아이의 몫이고 그 아이의 책임이야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도 없고 누군가의 탓도 아니야

그러나 노라는 셜리의 모든 상황을 자기의 탓으로 하면서도 늘 셜리에게 끌려간다,

그의 결정에 뭐라고 할 수 없이 끌려가고 그러면서 전전긍긍하고

나의 사랑이 상대에게는 독일 수도 있다는 것

그걸 노라는 몰랐다,

내가 주는 사랑은 나의 사랑일 뿐 상대가 원하는 사랑이 아닐 수 있다,

나는 주었지만 상대는 받지 못했다,

그 사랑은.. 서로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고 셜리는 죽었다,

노라는  아프지만 그 현실을 봐야 한다, 그래서 나중에 맥락없어 보이는 등장인물  루엘린을 통해 노라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드디어 노라는 사랑이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랑은  불행하게도 늘 일방적이다,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게 느껴지기도 하고 받아도 받아도 부족하기만하다,

주는 쪽은 열을 주어도 받는 쪽에서는 둘밖에 못받기도 한다,

사랑에는 수학공식이 맞아떨어지지도 않는다,

정확함이란게 없다,

넘치는 사랑이 왜곡되고 일방적일 때 그만한 폭력이 없다,

그러나 주는 쪽은 내가 폭력을 행사하는 걸 알지 못한다,

받는 입장에서도 상대에게 뭐라고 하기가 애매하다, 사랑을 준다는 건 알겠지만 그게 나에게 부담이고 원치않는 거라는 걸 말하기 힘들때가 많다, 가까운 사이  가족사이가 더욱 그렇다,

사랑도 결국은 배워야한다는 입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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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치유 수업을 듣는다. 누군가를 상담할때 책을 매개로 하는 독서 심리 상담이다.

내담자가 상담자와의 대화가 불편할  수 있다. 그때 책을 매개로 해서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등장인물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며 자기와 동일시하고 등장인물의 갈등해결방법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방법이다,

이때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제대로 된 발문을 하며 스스로를 생각하고 알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많이 아파서 병리적인 치료가 목적이 아닌 보통의 일반사람들에게 상담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왜 그런 순간을 못견디는지, 왜 듣기 싫고 하기 힘든 말이 있는지 왜 혼자가 편하거나 혼자가 불안한지를 알기위해 결국 나에게로 집중되어야 한다. 그냥 내 속으로 여행을 하는건 세계여행을 걸어 가겠다는 무모함이 보여지기도 하다, 그때 책이 필요하다.

동화책도 그림책도 상관없다. 조금 쉽게 씌여진 심리학 책들도 요즘 많다.

책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에서 교통수단이 되어준다. 조금 쉽고 빠르게 도달하는 힘이 된다,

책과 함께 하는 심리치유는 함께 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다,

나는 책에서 이것을 보았는데 타인은 저것을 보고  그것을 본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내가 보기 힘들 었던 부분에 감동하기도 하고 내가 밑줄 친 부분을 불편해하기도 한다,

아.. 사람은 다양하구나. 다양한 얼굴만큼 다양한 생각을 하는구나.. 그걸 알게 되는 것도 큰 소득이다.

그리고 내 말에 공감하고 나만 힘들고 아픈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도 한다. 내가 비정상인게 아닐까 싶은 강박과 불안을 누군가 타인도 가지고 있음을 알면 내 불안과 걱정이 별거 아니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함께 공감하고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이 텍스트의 이용이다,

영화나 드라나 공연 그림 무엇이든 가능하지만 그중에 책이 가장 좋다,

글을 알고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상담을 하며 동시에 책도 읽어 교양을 늘여갈 수 있는 기회도 된다,

책은 그렇게 내담자에게 많은 길을 쉽게 보여준다,

그러나,,

책은 주인공이 아니다,

책은 그저 매개일 뿐이다,

독서치유를 공부한 건 책 때문이었다,

책 읽는 걸 좋아했고 책 속에 숨는 게 편했다. 그래서 책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을 알고 누군가의 마음을 치유한다는 것은 무척 매력있었다.

그러나 첫 날 강사가 말했다.

독서 치유는 독서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치유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다,

책이 주가 아니라 치유가 목적이다,

심리를 알고 상담을 알기 위해 공부를 해야하고 그리고 책을 거기에 접목해야한다,

당연한 말이다,

그래도 수업은 재미있었다. 나이 먹어 듣는 강의라 간혹 머리가 돌지 않아 멍해질 때도 있었지만 낯설고 새로운 이론들은 흥미를 끌었고 의외로 이론 수업을 통해서도 내면에서 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실제 상담도 했다. 나는 둔감하고 초이성적인 사람이라 내 속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면에서 무언가가 불쑥 오르는 경험은 했다.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였고 심리학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마음을 엿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라는 것도 배웠다.

이론을 배우고 독서치유 지도안을 짜며 책을 고민했다.

나는 욕심을 부렸다.

기왕 할거 좀 폼나는 책을 읽으며 치유도 함께 하면 좋겠다라는.....

내가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상들 책을 통해 발견한 나와 닮은 모습들 내가 아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공감하면서  책읽기가 더 좋아졌다.

책도 읽고 내 마음도 알아가고 치유도 된다면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가 될까?

그러나,,

책은 역시 매개물이었다. 지도안을 짜고 실제 상담을 받으며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책은 그냥 맥거핀이었다,

중요하게 보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고 그게 중심이 아니다,.

내 마음을 알고 나를 표현할 줄아는 것 그래서 나를 인정하는 것이 주인공이었다,

책을 읽고 오지 않아도 책을 많이 읽지 않아도 솔직해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책은 그냥 책이었다.

책이 없어선 안되는 거였지만 책이 모든 것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틀렸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우리가 많이 닮았다는 걸 알았다,

어릴 적 아빠 닮았다는 말이 진저리치게 싫었다,

나는 아빠가 이상하게 싫었다,

개천 용이었던 아빠가 본가에 더  노골적으로 신경쓰는 것도 싫었고 무뚝뚝하고 촌스러운 것도 싫었고  어눌하면서도 대꾸할 수 없게 만드는 말솜씨도 싫었다.

아빠는 말이 많을 때는 많지만 없을 때가 더 많았다. 자기가 아는 이야기나 주제가 나오면 늘 분위기를 주도했지만 그 분위기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자식에게 곰살맞게 말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잔소리가 심하거나 꾸짖음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늘 말이 없어서 싫어하나? 관심이 없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책임감이 강했던 아빠는 당신 본가에 한 만큼 자식에게도 할만큼 하셨다,

교육은 엄마에게 맡기고 직접 야단을 치거나 간섬하지는 않아도 은연중에 간접적으로 엄마를 들들볶으면서 욕심을 부리신 것으로 안다.

자식들과 직접적인 대화는 어눌했고 적었지만 아버지로서의 책임은 다 했다,

그 아버지의 모습이 뉴스나 프로야구를 티비로 보는 모습 식사하는 모습이외에 늘 책상에 앉은 뒷모습으로 기억된다. 집에서는..

일이 많아 집에서도 해야할 경우가 많아서 그랬는지 일찍 와서도 식사하고 뉴스보고 나면 주로 아빠방이라고 부르는 서재에서 등을 돌리고 일을 했다.

어쩌면 그 시간이 아빠에게는 가장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생각이 든다,

일을 하고 책을 읽고 때로는 책상엪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졸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책상에 앉아 궁싯거리는 일이 가장 편하다는 걸 나도 이젠 너무 잘 안다,

아빠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다,

간혹 내가 산 책들도 언제인지 모르게 읽고는 늘 한마디씩 했다,

책을 권하기도 했고 사준 기억도 있지만 책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냥 그 책 별로다. 읽기에 좀 야한거 아니냐? 유치하다 등등 좋은 소리를 들은 기억은 없다.

나는 늘 아빠가 뭘 알아서... 하는 마음으로 귓등으로 흘렸지만 그때 아빠가 무슨 생각으로 사주셨는지 모르지만 한국단편소설들(감자나 봄봄등)을 읽으며 성인물을 시작했고 나중에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별 공부없이도 점수를 잘 받았던 거 같다,그땐 아동문학이나 청소년 문학이 발달하지 않아서였는지 나는 주로 학원물을 읽었는데 그건 아빠가 늘 유치하고 웃기지도 않는다고 해서 약이 올랐고 그래서 반대로 얼지로라도 한국 단편들과 이광수니 하는 걸  꾸역꾸역 읽었다,

그때 읽은 풍월로 아직도 버티는 중이다,

그리고 그때 심취했던건 셜록 홈즈와 포와로였는데 나는 후자에 더 빠졌다.

추리물이면서 로맨스이기도하고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는 사람을 죽이는 것도 이유가 있고 사연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크리스티의 추리물은 무섭다기보다는 슬펐다는 기억도 있다,

아빠는 한 번도 책을 읽으라고 한 적이 없고 이걸 꼭 읽으라고 권했던 기억은 없지만 당신이 읽는 모습 혹은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공부는 하지 않아도 책은 읽었다.

그래서 엄마가 지긋지긋해하는 책만 많이 읽고 잘난척해서 말하지 않은 어른이 되었다.

잘난 척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책을 많이 읽어서 세상이 유치하고 책만 읽어서 사람과의 대화가 서툴러서 말 하지 않은 편을 택한 걸 보면 엄마는 정확하게 자식을 알긴 하셨다.

아빠의 삶속에서 위안은 사람이 아니라 책이었고 책을 읽는 시간이었고 책을 읽으며 보낸 혼자만의 공간이었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나는 꽤 친구도 많고 사교적이라고 보여졌지만 결국 나이 먹어 돌아온 내 모습은 혼자가 편한 회피형 인간이 되었다. 그래도 결혼을 하고 아이도 있는 걸 보면 세상에 적응을 잘 한 편이라고 믿어진다,

책을 많이 보는 사람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타인의 시선일 뿐이다.

늘 책을 보는 모습을 보였지만 책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서툴렀고 그게 들키고 싶지 않았고 나를 지켜줄  방어벽이 필요햇고 그게 마침 책이었을 뿐이다,

책은 그냥 보여지는 것이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사람보다 말없는 존재가 좋아서 나에게 상처 주지 않을 존재가 좋아서 그리고 나를 표현하는 방법 사람 속에 어울리는 방법을 몰라서 선택당했던 책이 무슨 죄가 있으랴

책은 그냥 책일 뿐이다.

 

 

 

어른들은 책읽는 아이들을 좋아한다.

책을 읽는 아이들은 일단 조용하고 아무른 해도 끼치지 않으며 어른을 귀찮게 하지도 않는다,

책을 읽는 동안은 떠들거나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귀찮게 하거나 염려하는 사고가 일어나지도 않는다. 주의를 주고 견제하고 통제해야 할 필요도 잠시 접어둘 수 있다,

책을 읽는 아이는 왠지 똑똑하게 느껴지고 모범생일거 같고 손대지 않아도 알아서 제 할일을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을 주 ㄴ다.

또 책을 읽는 아이는 어디에 내어 놓아도 누가 보아도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누군가의 생일이나 모임에서 장난치고 게임기를 찾고 거칠게 놀거나 빈둥거리는 아이보다는 책을 손에 지고 읽고 있는 아이가 쉽게 눈이 가고 부럽다,

- 어머나 책을 읽고 있네 기특해라

-그렇게 놀라고 해도 책만 봐요 걱정이예요  저러다 친구가 싫어할까 걱정도 되구요

-뭐가 걱정이예요 알아서 잘할까 놀고 싶은 나이인데 저렇게 책을 보다니 어떻게 키우면 저렇게 되나요?

-내가 뭐 한게 있나요 그저 어릴 때 부터 책을 그렇게 좋아하네요

책을 읽는 아이는 어른들의 관심을 순간 끌지만 그 잠깐이 지나면 쉽게 관심에서 사라진다. 누구의 간섭이나 관심에서 숨고 싶을 때 책은 좋은 피난처가 된다,

책을 읽는 아이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다

조금 재수없다는 소리르 들을 수는 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둔다,

책을 읽는 아이는 외로움을 감출 줄 안다,

아니 어쩌면 제 감정들이 제 속에서 차오르는 복잡하고 뭐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할 수 없어서, 혹은 표현하기 주저되어서 책으로 들어간다,

책 속은 고요하다,

이야기를 따라 피흘리는 전투를 겪어내고 산골짜기를  구르는 모험이나 배꼽아래가 간질거리는 연애나 목구멍을 아프게 조이는 슬픔으로 정신없기도 하겠지만 그 모든 혼돈이나 정신없음은 음소거 상태로 나를 감싼다,  책을 읽는 동안 그 이야기 가운데 들어가 있으며 동시에 고요속에 있는 묘한 체험을 한다. 책은 그런 은신처다,

책을 읽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거나 성적이 뛰어나거나 글을 잘 쓰거나 말을 논리적으로 잘하는 것은 아니다. 전혀 책을 읽지 않아도 잘하는 아이가 있고 책을 읽어도 좀처럼 잘하지 않는 아이도 있다. 

책을 읽는 아이는 그저 책을 읽는 아이일 뿐이다. 책을 읽는 것이 또다른 능력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긴하다. 세상에는 사람수만큼이나 많은 경우의 수들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는다는 행위자체가 전부이고 그것이 목적이다,.

어쩌면 책따위를 읽어 무얼 할거냐는 지난 시절  어려웠던 아버지의 역성섞인 목소리가 더 옳을 수 있다.

책 따위를 읽어 무얼할꺼냐...... 답을 할 수 없다.

그저 읽어 낼 뿐이다.

소금 반찬으로 거친 밥을 꾸역꾸역 입안으로 밀어넣는 것과 같이 그저 책에서 글자를 한자한자 내 몸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책을 읽는 동안 아이는 책을 읽고 무얼 하겠다거나 무엇이 되겠다거나 어떤 능력을 키우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저 책에 집중하는 지금 이 순간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아이는 친구들과 말싸움에서 이길 요령도 없고 자기 주장을 내세울 용기도 없다.

몸이 둔해서 공차기나 캐치볼에 능숙하지도 않고 몸으로 하는 놀이나 게임에도 익숙하지 않다. 손이 굼떠서 공기놀이도 서출고 종이접기도 그때 뿐이다. 무얼 하든 자신있는 것이 없고  잘 하는 것도 없다. 아이는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그러나 존재하기는 하는 배경이다,

피곤하게 끼어서 누군가와 겨루고  놀이하는 것은 자신이 없다.

편을 나눌 때도 끝까지 남았다가 하는 수 없이 선택되어지고 그래도 자꾸 밀려나고 잊혀진다.

차라리 혼자가 편하고 혼자서 뭐하냐는 질문을 피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이 책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 밖에 방법이 없다.

-자식 책을 많이 읽기는 하는데 글쓰기는 영 아니네

-다 알고 읽는거냐?

-책 재미있냐? 무슨 얘기야? 누가 나와?

가끔 책속으로 숨어도 책 때문에 고요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책 읽는 사람은 그렇다,

나를 내버려두라고 혼자 있고 싶다는 고요한 외침이다,

나는 부끄럽고 수줍은 사람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이가 예전에는 책을 좋아해서 곧 잘 읽더니 이젠 책을 읽지 않는다,

책 읽을 시간이 없는 바쁜 아이를 이해하지만 손에서 놓지 않은 핸드폰을 보면 그건 또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자고 떠들고 카톡하고 빈둥거릴 시간은 있어도 책읽을 시간이 없는 아이를 보면 화가 나기도 하다.

책을 읽고 지식을 얻고 사고를 확장시키고 공부에 도움도 되고 좋은 점수를 얻어서 좋은 대학가고 괜찮은 직업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책일기로 생각은 계속 확장된다,

계란두개로 소를 사오겠다고 다짐하는  터무니없이 야무진 농부와 같다,

책을 보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백일몽이 농부와 다를 게 없다,

아이는 이제 책을 읽지 않는다,

세상에는 어울려 놀지 않아도 책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더 많이 있고 더 유혹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아이는 이제 숨지 않고 세상에 마주하고 작지만 분명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유혹도 느끼고 빠져도 보고 재미도 찾아보고 부딪치면서세상과 마주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지치고 힘들면 언제든 기다려주는 책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책에 빠지는 아이는 위험핟,

세상이 두려운 아이는 거기서 자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의 힘을 믿는 아이들 언제든 돌아갈 이야기를 가진 아이들 은신처를 가진 아이들은 다시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

책 읽는 아이를 자랑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

책 읽는 행위를 자랑스러워하고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 우위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아이는 책에서 나올 수 없다.

책읽기는 공차기 공기놀이 게임이나 수다와 다르지 않다,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의 하나이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휴식이다,

책읽기를 숭배해버리면 아이는 책에서 나올 수 없고 그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거나 아예 책으로 숨어드는 방법만 익히고 세상을 두려워할 수 있다,

책읽기는 그저 책일기 뿐이다,

책은 그냥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자라서 그냥 책읽기를 좋아했던 어른이 되는 것 뿐이다,

조금 느리고  뒤쳐져도 몸으로 익히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아이든 어른이든 살아가는데 책이 필요하다. 중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책이 모든 것은 아니다,

책은 책일 뿐이다,

삶은 책이 아니다. 삶이 중심이다,

책은 그저 무시할 수 없고 자꾸 걸려서 기억하게 되는 맥거핀일 뿐이다.

책이 내 삶을 살아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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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메이 아줌마 (반양장) 사계절 1318 문고 13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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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을 때 누군가가 등짝이라도 두둘겨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뺨을 맞기엔 좀 심하다 싶고 등짝이라도 세게 누군가가 두들겨 준다면 그걸 핑계로 그냥 펑펑 울어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요즘 생각하는 주제중 하나인데

감정이라는 것에 사람들이 참 서툴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쩌면 나만의 문제일지 모르겠지만 내 감정을 직면하고 느끼고 알아가는 일이 참 힘들다

기쁘다, 너무너무 좋다 어쩔 줄 모르겠다,

이런 감정을 내보이는 건 너무 건방지고 오만한거 같아서 되도록이면 누르고 싶다,

슬프다, 그냥 펑펑 울고 싶다

이건 쪽팔리니까 힘들고 누군가 내 속에서 징징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거 같아 쉽게 내색하기 힘들다

화가 난다, 뭐든 때려부수고 싶고 아무에게나 소리치고 싶다, 내가 폭발해버릴 거 같다

이런 건 사회악이 될까봐 내가 쫀쫀하고 못난 놈이 될까봐 함부로 듣러내기 위험하다

한없이 우울하다 땅을 파고 그 속으로 꺼지고 싶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 것도 먹기 싫고 하기 싫다,

이건 때때로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온전하고 푹 빠지는 건 늘 시간에 쫒기는 일상탓에 힘들다

그렇게 감정을 온전하게 드러내고 마주하는 건 쉽지 않다,

 

특히 슬픔이 닥쳤을 때 그 슬픔을 드러내는 방식은 제각각 다르지만 어쩌면 모두가 억제하고 누르며 그냥 살아가는 게 아닐까?

어떻게 보면 그 상황은 메이 아줌마의 장례식부다 더 장례식답고 푸근했다, 일단 장례식을 직업으로 삼은 장의사나 목사같은 외부인들이 오면 사람들의 슬픔마저 어떤 틀에 맞춰야 한다, 마치 극장에 들어갈 때 누구나 줄을 서는 것처럼 또는 병원에 가서 앉아 있는 것처럼.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저씨와 나는 그저 트레일러안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몇날 며칠이고 엉엉 울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짬도 없었다, 사람들은 결혼을 하거나 교회에 다니거나 아이를 키울 때와 마찬가지로 친척이 죽어서 슬픔에 잠기는 시간도 정해진 틀에 따리기를 바란다,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저씨와 나는 장레식장을 찾아가 사무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목사를 찾아가 종교 절차를 애기 했으며 그 전에는 얼굴도  보기 힘들었던 수십명의 친척과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그들이 준비한 음식을 먹어야 했고 그들의 포옹을 받아들여야 했다, 우리가 혹시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았나 하고 안색을 살피는 눈길도 그대로 받아낼 도리밖에 없었다.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보브 아저씨와 나는 난데없이 사교계 명사라도 된 듯했고 그렇게 우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목놓아 통곡할 기회조차 빼앗기고 말았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틀에 맞춰 슬퍼하기를 바랐다.  p 53-54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2년전 아버지 상을 떠올렸다,

나쁘다 좋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관혼상제라는 틀속에서 우리는 기뻐하고 슬퍼하게된다는 걸 그때 경험했다,

예전 어릴적 아직 어떤 사별도 한  경험이 없을 때 간혹 조문을 가면 웃거나 일상적인 말을 나누는 상주들이 그렇게 어색했고 언짢았다, 누군가는 죽었는데 그 사람이 가장 가까운 가족인데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을까? 그 생각과 동시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할지도 몹시 곤혹스러웠다,

장레다운 엄숙하고 슬픔이 충만한 것 그런건 영화나 드라마 속인 모양이었다,

우리 가족도 그때 슬픔과 함께 일상적으로 처리해야할 일들이 함께 했다,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고 종종 사무실에 가서 필요한 물품을 요구하고 중간 정산을 하고 일정을 다시 확인하고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를 듣고 그리고 화장실도 가고 세수도 하고 밥도 먹었다,

일상과 슬픔이 뒤섞였고 이때는 그저 정신차리고 지금 하는 일들을 잘 해나가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딱 한번 시신을 염하는 자리에 가서야 모두가 목놓아 통곡을 하긴 했지만 그리고 돌아와서는 어머니나 형제들 아버지의 형제들 모두가 일상적인 일을 이어갔다,

입관을 하고 모든 절차가 끝나고 뿔쭐히 집으로 와서는 지친 몸뚱이 속에 어떤 사고도 감정도 없었다, 그땐 부끄럽지만 그냥 자고 싶었다,

그리고 여러가지 절차가 끝나고 금전관계 행정절차를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이사하고 전입신고하듯이 아이 학교에 가게 취학통지서를 받듯이 담담하게 일처리가 지났다,

그리고 첫 명절이 지나고 제사가 지나고 그제야 슬픔이 나타났다,

느닷없는 일이었다,

이제 정리되고 감정도 추스려졌다고 여기는 순간 모든 것이 들이닥쳤다,

이제 아버지가 없다는 것 남편이 없다는 것이 가족을 덮치고 슬픔이 밀려오고 두려움이 밀려오고 멀쩡하게 살아가는 내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감정을 도무지 내 보일 수가 없었다,

이미 정리되었다고 믿는 타인들에게 그 감정을 드러내는 건 쉽지 않았다,

눌러야 하는가? 터뜨려야 하는가?

나이를 먹도록 알지 못하는 건 여전히 많았다,

책속에서 어떤 상황속에서 아버지가 떠오르고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과 함꼐 두 발을 뻣대고 울고 싶은 마음이 뒤석이면서 힘들었다,

가장 힘든건 역시 절대 힘들다는 걸 내보이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때  도움이 된 책이  줄리언 반스였다,

 

 

 

앞의 기구 이야기를 꾸역꾸역 읽어내려간 후 만난 줄리언 반스의 애도 이야기가 나를 위로했다,

애도의 시간은 끝이 없다. 지나치게 긴 것도 없다는 말이 가슴을 쳤다,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느냐?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느냐? 잊어라...

하는 위안이 진심임을 안다. 위로하기 위해 나름 생각하고 생각해서 한 말인 걸 알지만

그건 절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충분한 애도와 슬픔에 잠기지 않는다면 끝날 수 없는 것이 애도이다,

그걸 줄리언 반스가 이야기해주었고 나는 위안을 얻었다,

 

오브 아저씨와 서머도 충분히 메이 아줌마를 애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죽음과 부재는  남은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는 의지와 더 이상 무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자조가 하루에도 수십번을 교차하는 시간을 지나야 하고 충분히 슬픔에 젖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항상 누군가가 해야하는 숙제와 같았던 섬머는 처음 알게된 천국같은 메이아줌마 오브 아저씨와 함께한 트레일러 생활에 금이 갈까 전전긍긍이다. 메이아줌마의 빈 자리는 너무나 크고 조만간 오브 아저씨마저 떠날까 마음을 놓을 틈이 없다. 늘 긴장하고 화가 나있고 무언가를 준비하고 살피는 나날이었을 것이다,

오브아저씨조차 그 나이에도 처음 겪는 상실로 주위를 볼 수도 챙길 수도 없다,

서로를 잊고 자기 슬픔에 빠졌으되 그 속에 깊이 잠기지도 못하는 두 사람은 너무 불안할 뿐이다,

그때 클리스터가 나타났다,

엉뚱하고 더럽고 아무거나 모으는 클리스터는 뜻밖에 두 사람에게 중요한 역활을 한다,

그 아이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 아이는 두 사람을 깊은 애도와 슬픔으로 빠져들게 한다,

충분히 기억하고 충분히 슬퍼할 시간 .....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분수처럼 슬픔이 터지고 나면 비로소 후련하고 그 사람을 진짜 보낼 수 있다,

메이 아줌마의 마지막 독백은 참 슬프면서 따뜻하다,

이제 오브 아저씨도 서머도 살아갈 힘이 생길 것이다,

 

 

 

 

 

그림책속의 아이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 이제 괜찮아진 것처럼 두 사람도 함께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나의 애도는 이제 끝에 닿았을까?

아직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냄새를 위해 환기를 하지 않는 아이나 모두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슈퍼앞에서 보초를 서는 여자의 표정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틈틈히 아버지를 기억하고 그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면서 조금씩 내 감정을 들여다 본다,

한때 미워하고 무심했고 부담스러웠지만 언제나 내갠 든든한 산이었음을 이제 안다,

많이 닮아서 미웠던 것도 알았고 그래서 모른 척하기 더 힘들다는 것  알고 보면 큰 산이 아니라 아주 인간적이고 약하다는 것도 알아가면서 그를 애도하려 한다,

얼마나 더 걸릴지는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또 한가지....

엄마의 역활을 생각해본다,

부모란 엄마 이외에 아빠도 있고 조부모도있고 친척이나 형제도 있겠지만 늘 엄마의 역활이 모든 걸 떠안는다,

심리학을 공부하다보면 막말로 모든 정신적 문제는 엄마의 양육탓이다,

어릴 적 트라우마나 대상관게 애착관계 등등 엄마에게 너무 무겁게 짐을 지운다,

그 부담감에 저항하면서도 엄마란 어떤 역활을 해야하나 생각하게 한다,

메이 아줌마는 엄마로서 꽤 괜찮다,

가난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해 줄 수 있는 것에 많은 제약이 있지만 늘 긍정적인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것 어떤 말이든 귀기울여 들어주는 것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아끼지 않고 마음껏 드러내는 것...

그건 가장 쉬운데 가장 어렵다,

어쩌면 건강해서 늘 따라다니며 챙기고 돈이 여유있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가장 쉬운지 모르겠다,

솔직하고 건강해서 언제나 아이를 품어줄 수 있는... 아이가 무엇이든 말하고 털어놓을 수 있는 안전기지.. 그것이 엄마라는 사실이 참 어렵고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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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연쇄 살인범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

그는 이제 점점 기억을 잃어간다,

기억을 잃고 시간이 뒤섞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잃어간다

사람은 살과 뼈와 피와 같은 유기물로도 이루어져 있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들 기억들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나는 내가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살며 미래를 계획할 수 있어서 비로소 내가 된다.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어떤 계급이나 부 역할들이 아니더라도 내가 기억하고 살아온 시간이 나를 스스로 증명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건 나를 잃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존엄함을 잃게 하는 것이고 나를 더 이상 인정할 수도 없고 존재를 증명하라 수 없다.

주인공의 이웃에  살았던 치매 노인들의 이야기가 있다,

노부부 둘이 장성한 자식을 떠나보내고 살다가 남편이 그리고 아내가 치매에 걸렸다

둘은 점점 시간을 잊어가면서 기억을 잃고 점점 두 사람의 시간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모든것이 통제 당했고 감시 당했고 언제 어디로 끌러갈지 모르던 불안의 시절로 돌아간 노부부는 마주하는 사람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고  굽신거리고 쩔쩔맸다

결국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그 존엄마저 내려놓고 요양소로 떠난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주인공은 그 모습이 충격이었다,

인간이 그렇게 스스로를 떨어뜨리는 일 그건 무서운 일이다

그 모든 것이 기억을 잃고 시간을 거스를 수 없음에서 나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모에도 시간을 훔쳐가는 회색신사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의 시간을 훔쳐야 살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인간은 그들에게 시간을 빼앗기면서도 그것이 시간을 저축하는 일이고 좀 더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바쁜 일상에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놓친다,

친구를 만나고 대화하고 놀고 빈둥거리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법을 잃어벌인다,

그건 다름아니라 스스로의 존엄을 잃어버리는 일과도 같다,

내 삶을 내가 만들어 가지 못하고 동동거리게 하는 것 시간에 끌려다니게 되는 것은 스스로가 주인이지 못한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에 의한 것이든 전체주의에 의한 것이든 사람은 스스로를 놓아버리고 무언가에 속박되어버리는 것이다,

바빠진 사람들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추억할 것들이 없고 추억할 시간이 없다, 추억은 기억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고달프고 스스로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회색신사들은 시간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삶의 품격을 앗아간 것이다

 

다시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돌아와서

주인공 김병수도 그렇게 서서히 망가져 간다,

이렇게 누군가가 기억을 잃고 망가짐을 보며 서글프고 안타까워야하는데 문제는 김병수가 연쇄 살인범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 잡히지 않고 70이 넘어까지 잘 살고 있었다,

나름의 부를 이루고 안정을 이루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덜컥 알츠하이머에 걸린다,

쉽게 동정하고 연민을 느끼기엔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다,

알츠하이머는 현재의 기억부터 서서히 사라진다,

과거만 기억하고 그 시간을 살게 되며 현재는 망각되는 병이다,

김병수는 현재 잘 살고 있던 삶은 잊어버리고 과거의 살인범의 시간을 살아간다,

내가 누구인지 누군가를 죽였는지 나를 쫒는 사람이 누구인지 저 사람이 형사인지 또다른 살인자인지 모든것이 뒤죽박죽이다,

시간이 그에게 형벌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점점 당황하고 정신이 없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그것마저 진실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내게 딸이 있었는지 내가 죽인 사람이 있는지도 헷갈리면서 그는 어쩌면 그동안의 업을 짊어진 형벌로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스틸 엘리스" 그녀도 알츠하이머에 걸렸다

세 아이의 엄마로 언어학 교수로 한참을 더 삶에 힘을 쏟아야 할 시기에 덜컥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그리고 서서히 잊어가는 중이다,

기억이 시간이 한 사람의 존엄성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진짜 인간의 존엄은 그 모든 것을 잃어도 잃어버버릴 수 없음을 그녀는 보여준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고 모든 기억이 뒤죽박죽되고 주위 사람을 혼란하게 만들지만 그녀는 그녀로서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텅 빈 그녀의 얼굴을 보면 그래도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 존엄하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사회적인 이름이 아무것도 없고 기억을 잃고 시간을 뒤섞어버린 뒤에도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누군가 타인을 여전히 나는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는 책. 그리고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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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제목의 번역에 대해 말이 많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토니가,,, 계속 찌질하지 않을까했던 나의 첫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나이 먹어서도 찌질했고 구질구질 했으며 도통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했다, 여전히

허나 그의 자리에 나를 넣어보아도 모든 걸 알아차리지는 못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운명이 그렇게 꼬이리라고는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모두가 60대에 이른 토니긔 기억을 토대로 씌여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사실들은 모두 토니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 토니가 말하고 싶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토니를 통해 베로니카를 보고 에이드리언을 보고 포드 부인을 보고 그 당시 상황들을 알아낸다,

모든 건 철저하게 토니의 시각이다.

 

지나간 사실에 대해서는 현재의 정신상태와 나의 상황에서 판단하고 그 행위를 규정한다,

역사도 신문기사도 결국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진실을 보여준다,

사실= 진실은 아니다, 이건 이제 초등학생도 안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 않은 법이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벌어지는 확신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에 일어난 일을 내 입장에서 해석한 것을 기억에 떠올리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회고에 가깝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하게 가지를 쳐 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 다르며 다만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는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이야기 했다고 해도 결국 주로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읽으니 곳곳에 토니의 생각을 빌어 이 이야기는 모두 토니가 자신의 왕년 스토리를 들려주고 자기가 기억하고 윤색한 이야기라고 암시를 주고 있었다, 우리는 다만 어떤  나이든 사내의 회고담을 듣고 있는 것이다,

내가 왕년에....... 그래서 아주 멋지게 편지를 보냈는데........ 블라불라,........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러쿵 저러쿵이라고 여겼는데,....... 잘 들어 여기가 중요해,,, 세상에 세상에,,,

나만 몰랐네,,, 사실은 말이지,,,,,,,

 

그나마 토니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착오를 고칠 수 있고  인생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행이다, 나의 기억은 왜곡되고  잘못 주입되었다는 걸 깨닫는 행운아다,

끝까지 나는 모른 체 내가 아는 게 전부임을 굳게 믿고 삶은 마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깨달음이 전부는 아니다. 이미 알았을 때는 돌이킬 수 없을 때이기도 하다,

토니의 잘못흥 그 지랄같은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 아니라, 그 편지를 보내놓고 잘못 기억하고 있고 혹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고 그냥 스쳐보낸 것들이 있었고 혼자 짝각하고 껄떡거리고 혼자만 아는 만큼 반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무지와 무관심이 그의 죄이다,

 

사람들은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요즘 모르는게 정말 죄가 되는 경우가 있긴 있더라

모르고 던진 말이 누군가에게는 칼이 된다,

내가 몰랐잖아, 모르고 한 일이잖아,,.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정말 몰랐니? 진짜 몰랐어?

모른다고 믿고 싶었던 건 아닐까?

외면하고 싶었던 건....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사람이 누군지 알아? 

  바로 자기 촉이 좋다고 자랑하는 인간이야

 그런 인간은 아주 강한 자기 틀을 가지고 있거든 절대 깨지지 않지

 세상 모두를 그 틀로만 보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믿고.."

 

내가 보는 것 들은 것 기억하는 것 그건 단지 내게 전부 일 분이다

그리고 나는 우주에서 내려다본다면 눈에 띄이지도 않을 작은 미물이다,

가끔 살면서 그걸 잊을 때가 있다,

그때는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위험하다,

 

늦게라도 토니의 틀이 깨어져서 그리고 많이 돌아봐서 다행이다.

토니의 삶은 절대 찌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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