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3대 심리학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의 대표적인 저서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ㅈ취를 간직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랑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에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면 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책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담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처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니체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촛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한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의미를 찾을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기보다는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람은 어느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로고테라피에 의미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시련이 피할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유란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조건에 대해 자기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 것이다,  

 

저자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오랜 기간 그곳에서의 체험을 통해 사람은 어떤 시련앞에서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고 또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가질 수 있으며 그렇게 시련을 견뎌내는 것이 삶에 대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어떤 갈등상황 앞에서 사람은 본 모습이 드러난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것은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최종 선택을 하는 것은 나이다, 그때 사람은 동물이 되기도 하고 인간으로 남기도 하는 것이다,

수용소 안에서 저자는 많은 동물로의 전락과 함께 인간으로 남아 있는 고결한 영혼들도 보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비현실적인 낙관이 아니라 현재 처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  현재의 내 삶에 충실하게 나 답게 살려는 마음이 사람을 살아남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운명이라는 말을 한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거대한 흐름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태어나는 곳 태어나는 시기를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처음으로 세상에서 만나는 환경도 내가 택하는 것이 아니다,

운명은 나의 의지가 단 1 %도 들어갈 수 없는 어떤 던져진 상황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사람은 개개인에 따른 선택을 한다, 그 선택들이 모여서 업이 된다,

업이란 운명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내가 그동안 선택해온 내 길이 인도하는 것  선택들이 모여 만들어진 내 과거이고 내 모습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내가 선택하는 것 내 의지가 들어가는 것에는 내 자유가 있고 내 책임이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개인의 선택 의지를 자꾸 듣다보면 괜히 심통이 났다,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이고 의지라면 결국 내가 지금 이렇게 된 현재의 내 모습은 오롯이 나만의 책임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세상은 결국 만인에 대한 만인의 책임으로 각자 도생의 길로 나가는 것뿐이란 말인가

내가 지금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은 것은 내 노력의 부족이고 내가 지금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도 나의 나태함 때문이고 내가 비정규직인것 내가 쉽게 해고당하는 위치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내 가족이도 죽어도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도 이유를 물을 수도 없다는 것  그것도 오롯이 내가 갖야할 내몫의 고난이고 모든 것이 내가 내 삶에서 의미를 찾지 않고 혼돈으로 어지럽고  무언가로 도망치기때문이라는 모든 것이 나때문이란 말인가 하는 심통이 났다,

사회에서 해야하는 것 함께 바꾸어야 하는 것 세상에는 혼자만의 의미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는 불만이 자꾸 삐져나온다,

그냥 버티라 고난을 버티고 마주하라는 말이 너무 무책임하게 들리는 지금이다,

그때 저자는 피할 수 있고 바꾸어야 하는 시련은 맞서지 말고 바꾸려고 하라고 한다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라고 했다,  오히려 어떤 말보다 그 한마디가 내겐 빛이 되었다,

세상에는 맞서지 말야야 할 시련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련을 바꾸고 제거해아하는 것도 결국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니 나도 함께 해야하는 일이 맞다,,,,

 

1장 수용소에서의 상황들의 묘사가 그저 지나가 과거같지 않았다,

지금 이순간으로 데처해도 다를바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언제나 기회를 잡아 더 약한 사람들에게 모진 사람이 있다,

지금 상황에서 앞을 볼 수 없고 어떤 희망이 없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내가 좀 더 노력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다,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만 늘 나보다 여유있게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제자리이기만 해도 다행이고 뒤쳐지는 것은 정해진 사실처럼 느껴지고

모든 것이 부당한데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따져야 하는 것인지 그 대상이 없고

사람은 저마다 의미가 있고 존귀하다지만 지금 세상에선 가장 흔해빠진게 사람이라는 생각만 들고 나는 언제든 어디서든 데체될 수 있는 보잘것 없는 수용소안의 죄수와 다를 바없다는 생각만 드는 것이 현실이다,

끔찍하게 그때와 지금이 오버랩된다,

그런데도 삶의 의미를 생각하라고....

싫다고 버티고 버티다 백기를 든다,

그 마저 안하겠다면 어쩌겠는가

나는 소중하니까 내 삶의 의미는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므로 살에게 의미를 묻지 말고 삶이 나에게 물어올 의미를 잦아 나서는 수밖에 없겠다,

나를 스스로 귀하게 생각하는 것

실존이란 지금 이순간 내가 여기에 살고 있고 나는 나 스스로 이미 의미가 있음을 믿고 당당해지는 것에서 시작되는게 아닐까

이미 속되고 속되어서 한마디 한마디가 속속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 부정하고 싶고 반박하고 싶지만

빅터 프랭클 박사에게 많이 의지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세상 그대로는 아름답다,

세상을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건 결국 사람이다,

내가 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보는 것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내가 무언가를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을 내 삶의 의미로 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실 학자를 붙인다는 건 굉장히 어마어마한 일이예요 어떤 건 아직 '학'자를 안붙이잖아요. '술'일 수도 있는 거고 영어에서도 '-ology'  '-tics'등 다양하게 구분하죠. 제 전공인 문화학같은 경우도 '문화학'이 아닌 ' 문화연구' 라고 하거든요. 'culturral studies' 라고, '학'자를 붙인다는 것은 어마아마한 일이예요  체계를 만들어가야하는 일이죠. 그런데 이모든 걸 다규격화해내는 거 같아요. 공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삶의 영역에서 배워야 하는 것들까지 게속해서 식민화하고 규격화하는 데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생각해봤을 때 구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첫번째는 시장의 창출이예요. 이 시장은 어마어마하게 만들어지거든요.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걸로 해서 교수직 만들어지고 학생들 등록금을 내고 하는게 엄청난 시장이죠. 또 하나는 한국과 같은 경우가  "이 분야가 먹고 살 만한 곳이다' 그러다 보면 공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경쟁이 심한 사회이다 보니까 그렇겠지요. 그리고 그러자면 평가가 표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표준화된 평가는 곧 자격증을 의미하죠. 그리고 자격증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시험이 있다는 것인데 시험이란 능력의 위계를 상정하는 것이죠. 결국 그렇게 되어야만 공정하다고 생각하면서 능력과 자격을 동치시키는 것이 한국에서는 굉장히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배움이 출현해야 할 곳에서 다양한 배움이 출현하지 못하고 다양한 영역을 획일적인 배움으로 식민화 한 상태가 된거죠.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최악의 상태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다양성조차도 힉일화해버리는 거죠

또하나 픽업아티스트같은 직업이 만들어지는 게 사람들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것도 있지만 더 무시무시한 것은 이걸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그러니까 학원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요즘 교육쪽에서 강의하는 주제중의 하나가 아까 말씀드린 거처럼  ' 배울 수는 있되 가르칠 수 없는 게 있다'예요 사람들이 교육에 대해서 괸ㅇ장히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가르치면 배운다'예요 그런데 어떤 건 가르칠 수 있지만 어떤 건 가르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건 가르칠 수 없는대 배우는 것이 있다 그것을 파가름하는게 저는 교육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최근에 강의한 주제가 가르칠 수 없는 것 그러나 배울 수 있는 것이예요. 인성 교육 비판하면서 제가 하는 얘기인데요 "효자가 되라" 이걸 어떻게 가르쳐요? 효자는 자기가 살면서 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배우는 거거든요. 학교라고 하는 건 여기 와서 배우는 것도 있지만 우리가 가르치겠다 가르칠 수 있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고 가르칠 수 있으니까 거기에 체계를 만들어서 학문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 정점에 대학이 있는거죠. 원래 가르칠 수 없는 것들 이성을 사귀는 법 남들에게 사랑바든 법 상사와의 관계 이런건 가르칠 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건 부딪히면서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건데 이걸 지금 다 가르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놨죠.

 

 

 

그런 맥락에서 보면 삶이라는 것이 굉장히 허약해지고 빈약해지고 있는 것이죠 공부는 삶의 보조이고 살아가기위해서 공부하는 것인데 지금은 거의 공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되었어요.  삶의 영역에서는 배움이 일어나지 않고 있고 배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배움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되고 배움이 일어나더라도 계속 불안해지게 되는 거예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학원 가서 깔끔하고 매끄럽게 배우는 게 속 편하겠다는 생각응ㄹ 하게끔 되는 것 같아요. 공부 중독인데 공부가 없어요. 그리고 결국 삶이 사라지는 거죠.

 

공부중독의 비극적 역설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데 공부와 삶을 분리 시키고 공부에 올인하다 보니 삶이 더욱더 빈약하고 허약해지고 있다는 것 그 빈약함과 허약함을 채우기 위해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을 또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면서 삶은 공부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고요

이 과정에서 공부가 교육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널벡 보면 삶은 그 자체가 공부의 과정 배움의 과정이잖아요. 인간은 살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늘 배울 수 밖에 없죠. 그걸 우리가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반면 교육은 그것을 단계적으로 구분되어 제도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죠  가르치지 않으면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예요 그러나 공부 전체가 교육이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가르칠 수 없는 것도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거든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하는 공부 중독이란 사실은 교육 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바닥에는 삶의 위기에 대한 초조함이 크게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간이라도 가려면 막차라도 타야하고 그 막차를 타는 유일한 방법이 교육 자본을 축적하는 공부라고 생각하다 보니 이 상황이 더욱더 악화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어찌되었건 교육자본이 신분을 상승시키고  삶을 안정시키는 첩경이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이 신화에서 벗어나야 할 때 벗어나기는 커녕 더욱더 강화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고 그러다 보니 삶이 더욱더 빠른 속도로 망가지고 있고요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걸까요? 공부는 성장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능력이 신장되는 것이건 인격이 성숙하는 것이건 또는 시민으로서 성장하는 것이건 공부는 성장을 하기위해 하는 것이죠.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의 공부는 성장과 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어요 성장과 아무 상관없는 공부를 공부라고 하고 있고 그걸 청소년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학생들이 "이걸 공부한다고 제가 뭔가가 될 수 있나요?" 라고 하는 말을 단지 실용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이 말을 직업을 구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데 혹은 살아가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지를 묻는 것을 휠씬 넘어서는 적극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걸 공부하느 것이 자신을 무엇으로 성장시키는가 에 대한 질문이죠.

이 문제에 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가 사람의 성장에 대해  성공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답도 줄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공부를 통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공부를 해야한다는 당위에 대해 수긍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이들을 붙들어 놓고 지금'공부'를 시키는 것은 정말 무의미한데도  그저 맹목적으로 공부를 시키고만 있어요. 공부를 하는 자가 아니라 공부를 시키는 자가 공부말고는 시킬 숭 ㅣㅆ는 게 없다보니 그저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시키는 자의 '공부중독'이예요

삶이 성장의 과정이라면 공부는 성장하는 삶을 위한 도구여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공부는 삶을 식민화하는 도구일 뿐이예요. 이런 공부를 그만두자는 것입니다, 대신 공부의 자리를 원래대로 돌려 놓아야 되요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혜처나가는 삶의 지례 기술을 익히는 과정으로서의 공부 말이예요. 청소년들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어른들도 잘 모르고 있어요. 무능력하기는 어른들도 매한가지입니다, 공부라는 맥락에서 보면 어른과 청소년 모두가 처한 동시대서이죠.

바로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소년을 우리와 더불어 당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동시대인으로서 이 난국의 시대를 헤쳐갈 삶의 기술을 배우는 성장의 도구로서의 공부를 해나갈 수 있을 거예요.

이것은 청소년들이게 필요한 만큼이나 어른들에게도 어른읃ㄹ만큼이나 아이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청소년들을 문제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부와 관련한 우리 모두를 문제화해야합니다,

 

 

왜 공부를 해야하나.. 하는 질문에 현명한 대답이라고 하는 것이 떠돈 적이 있다,

내가 지금 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다는 명확한 꿈이 있는게 아닐지라도

나중에 내가 무엇이 되고 섶거나 무엇을 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올때

그때 지금 하지 않은 공부가 내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나는 지금 공부를 한다

아니 공부를 해야한다는 ,....

 

꿈이 없다고 무얼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아이에게 나도 보여준 적이 있고

이 말을 들은 적이 었는 작은 아이가 그래서 공부를 해야하지 않을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공부다,

무엇이 되기 위한 준비 언젠가 이룰 무언가를 위해 지금 이순간 내가 만능감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해야한다,

'공부하고 있다'는 말은 누구나 수긍을 할 수 있다,'

노력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지금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당위성을 준다, 그렇게 공부를 하지만 정작 타석에 들어서서 헛방망이를 휘두르거나 공을 맞추는 일은 두렵다, 공부하는 순간도 불안하지만 공부를 마치는 그 시점이 돌아온다는 것도 두렵다,

그렇게 모두가 실패일 줄 알면서 이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걸 알면서 그 패턴에서 내려올 수 없고 계속 맴돈다,

헛짓도 함꼐하면 마음이 놓이는 법이다,

나만 헛지랄을 하는게 아니라는 게 큰 위안이 되고 그 지랄이 언젠가 성공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한다,

미안해 공부를 못해서...

공부를 못해서 분하고 화가 난다는 게 아니라 부모에게 미안한 일이 되어버린다,

당연히 공부를 해야하고 하는 이상 잘 해야하는데 못한다는 것

그건 죄송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달리기를 꼴지 했다고 노래를 못한다고 눈물을 흘리며 부그러워히지 않는다,

심지어 길거리에 슬쩍 쓰레기를 버렸다거나 새치기를 했다거나 어른에게 못본 척 인사를 안했다고 울며 고백하는 일은 없다,

공부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이 패턴을 버려야하는데

사실 그 대안은 두렵다,

끝없이 달리는 열차에서 단백질 스틱을 먹으며 견디는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달리는 열차에서 내리는 일은 더 두려운 것처럼

공부는 괴물이 되었고...

대안은 모두가 알면서 아무도 하지 않는다,

 

책은 모든 문제점이 파해쳐지고 분석되어 있지만 대안을 주지 않는다

아마 대안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안이란게 어떤 선동적 구호가 될 수는 있지만 정말 바라는 답은 아닐테니

이게 아니라고 하면서 여전히 누군가가 답을 주기 바라는 것

그것역시 공부 중독이다,

나 역시 지금의 만능감에 만족하면서 지금 잘 하고 있는 줄 착각하는 중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간이 그리는 무늬 - 욕망하는 인문적 통찰의 힘
최진석 지음 / 소나무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첫번째 인문의 숲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는 나누었나요?

인문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다 그런데 그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걸 제대로 볼 수 있으려면 자아가 준비되어있어야 한다, 자아의 준비는 뭐냐? 자기를 지배하고 있던 이념이나 신념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 것들으르 부정하고 제거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것들로부터 자기가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듯이다, 반대로 그것들을 지배하고 희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로 존재할 수 있다, ,... 뭐 그런 이야기들... 

여러분에게 몇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자유로워졌습니까?

여르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행복해졌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유연해졌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관용적인 사람이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가족이나 이웃들과 더 잘 지내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눈매가 더 그윽해졌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생기발랄해 졌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상상력과 창의력도 더 늘어났습니까?

 

                                         p 94

 

 

 

더 많이 알고 더 똑똑해졌음에도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어서 책을 계속 읽어갈 수밖에 없었다,  인문학이 대두로 떠오르는 지금도 그 인문학이 과연 인문학 자체로서의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인지 또하나의 스펙으로, 경쟁에서 살아남기위해 갖추어야할  조건으로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책장을 다시 넘긴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인류 역사상 '버릇있는 요즘 애들'이 존재했던 적이 있을까요?

언제나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었던  것 같지 않아요? 제가 생각하건대 인류 역사상 버릇 있는 요즘 애들은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요즘 애들이 버릇이 없다고 비판하는 바로 그 사람도 사실은 얼마전 까지만 해도 버릇없는 요즘 애들 가운데 한 명이었을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사실 인류 역사는 버릇없는 요즘 애들이 버릇있는 어른으로 변해가는 과정입니다,

버릇이라는 게 뭡니까? 아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딱 태어나서 보니까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닌데 세상에는 버릇이라는 것이 이미 있는 거예요 버릇은 단독자로서의 나들이 집단으로서의 우리가 되도록 만들어진 장치가 아니겠습니까? 자기하고 잘 맞지 않을 것임이 더 분명하고 또 이미 정해져 있는 버릇이라는 것을 집단이라는 우리에 갇히기 이전의 아이가 어찌 편안히 감당할 수 있겠어요? 당연히 그들과 잘 맞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아이가 버릇이 없다는 것은 그 아이가 아직 우리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아직 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버릇이 없다는 말은 어른들끼리 만들어 놓은 어떤 틀안에 그 아이들이 아직 들어가지 않았다는 애깁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이들에게 버릇이 없는 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아이들의 작업입니다,

(중략)

여기서 또 한가지 어른들이 어른의 단계가 인간으로서의 이상적인 단계 내지는 바람직한 단계라고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해요. 어린이들을 아직 어른이 아닌 단계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린이를 미성숙한 상태롤 본다는 것은 어른의 단계를 성숙한 단계로 전제하고 그 시각으로 어린이들을 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러면 어린이는 어린이로서의 삶 어린이로서의 세게를 한 번도 살 수가 없습니다, 항상 아직 미성숙한 어른으로서만 대접받는 것이지요 어린이를 어린이의 세계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요즘 애들에게 버릇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목적론적 폭력일 뿐입니다, 이미 있는 버릇에 굳어 있는 어른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요즘 애들은 항상 버릇없이 보일 수 밖에 없지요 요즘 애들을 버릇 없다고 비판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딱딱하게 굳은 버룻의 체게가 견고하게 내재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요즘 애들 참 버릇이 없다'고 말 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럼 한 번 반성해 보셔야 합니다

'아 내가 많이 굳어 있구나 '라고 말입니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

'이렇게 살아오다 보니 딱 보면 알게 되는 게 있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아온 경험과 시간으로 그런걸 보는 촉이랄까  뚫어 보는 시선이 생겼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다,

내가 촉이 좋고 감이 좋고 보는 눈이 있다는 말은 물론 그렇게 보는 혜안이 있다는 아주 극소수의 경지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나는 이미 살만큼 살아온 시간만큼의 틀을 가졌다는 말이라는 것

내가 살고 경험하며 익숙하게 굳어진 틀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틀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세상에는 관용이나 상식이라고 말하는 세상의 틀도 있다,

그러나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늘 생각해야한다,

내가 보고 있는 이 대상의 뒷면도 존재한다,

내가 다시 뒤로 돌아가서 그 이면을 볼 수  없다면 무언가 내가 모르는 부분도 있는 거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야 한다,

버릇도 그렇다, 내가 생각하고 주입받은 버릇이라는 것 그건 이 세상 이치의 혹은 사람들의 개성의 극히 일부라는 것,

 

엄마 품속에 있으면서도 나뭇잎 배를 생각하는 나이 이때가 아마 일곱살 정도인 것 같아요. 자기만의 그리움. 자기만의 생각으로 점점 자기가 확대되는 거지요 그래서 버릇이 없다는 것은 아마 자기만의 생각을 갖기 시작하는 것과 상관이 있을 것입니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사실 버릇없어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익숙한 것 당연한 것 정해진 것들에 한번 고개를 쳐들어 보는 일이예요 왜? 익수갛게 하는 것 편안하게 하는 것들은 자기가 아니기 대문이예요 그럼 무엇이냐? 관습이거나 이념이거나 가치관이거나 뭐 그런 것들이죠

인문학의 기본 출발은 '생각이예요 인문학은 출발부터 생각과 함께합니다, 철학의 출발 자체가 믿음의 체게인 신화로부터 벗어나면서 시작되지 않았나요? 철학 즉 인문적 사조가 시작되기 전인 신화의 시대에 인간이 하는 일은 뭡니까? 바로 믿는 일이에요 이 믿음을 거부하고 믿음의 대상에 고개를 쳐들고 인간의 길을 가겟다고 하고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 이때가 바로 철학의 시작입니다, 바로 인문학의 시작입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뭐라 할 수 없지만 가장 짜증나는 일은 끊임없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일이나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꾸 튀어나가거나 몸은 여기에 있는데 생각은 저기에 있는 아이를 대하는 것이다,

엄마 품에서도 낮에 놀던 나뭇잎배를 생각하고 걱정하고 사랑하는 그 딴 데로 가 버린 마음을 돌리는 일 그리고 나는 생각지도 않았고 그냥 받아들이는 일들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해대는 일 그건 고역이었다,

그런데 그 때 아이는 인문학적 사고를 하는 중이었구나

나는 참 딱딱한 사람이었구나

내가 처음부터 이랫나 스스로 우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명사가 딱딱합니까? 동사가 딱딱합니까?

명사가 딱딱하겠죠 모든 개념은 딱딱해요. 개념으로 무장한 사람은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가요. 우리의 이념 지식 신념들은 다  무엇이냐? 개념의 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이념을 가지고 부드러운 동사적 세계를 제어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동사적 세계가 얼마나 힘들어요 임들 뿐 만 아니라 사실은 가능하지도 않아요.

우리가 인문적 통찰을 한다는 것은 뭡니까?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있는 상태를 부드러운 상태로 볼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명사적으로 세계를 보는 습관을 동사화하는 거지요. 점점 굳어져가면서 명사화 되어 가는 자신을 율동감이 있는 동사로 되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바로 예술이 필요한 겁니다, 에술은 명사적으로 굳어진 나를 동사화하도록 자극시켜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단계를 미학적 삶이랄지 예술적 경지랄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문적 통찰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이 바로 여기예요.

여러분 이념따위는 잘근잘근 씹은 다음에 과감히 뱉어버리세요. 이념 같은 딱딱한 명사들이 목울대에 걸려 있는 한 말캉한 동사들이 입을 통해 나오기 어렵습니다, 몸속에 들끓는 욕망의 꿈틀거림이 이념과 개념의 핉터에 막혀 터져 나오지 못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이념 따위의 명사들은 몸밖으로 뱉어머리세요 핏발서린 이념의 눈빛은 얼마나 촌스러운지요

(중략)

우리가 개념을 이해하는 일을 뭐한다고 하죠? 파악한다고 하지요. 파악, 즉 손으로 잡아 꽉 쥐는 거지요. 동양의 개념도 영어의 곤셉트도 독일어의 베그리프도 모두 다 이 세게를 자기가 잡고 싶은 만큼 잡을 수 있는 만큼 잡아서 손으 남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싶은 만큼 가질 수 있는 만큼 잡고 빠져나가는 것은 포기하고 손에 남겨진 것을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 것 이것이 바로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개념은 출발부터 세계를 전면적으로 반영하기에 부족한 것이고 출발 부터 소유적 상태이고 출발부터 제한된 상태이고 출발부터 딱딱한 거예요  P 121-122

 

 

수학의 공식을 암기해서 문제를 풀고 여러 이론들의 한두마디로 정의 할 수 있고 그것을 외우고

사상가와 사상을 딱딱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은 시험에는 유리하다,

개념정리 개념파악 개념 이해 등등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그 개념이라는 것이 머리속에 자리잡지 않으면 어떤 것도 머리속에 남지 않고 들어오면서 동시에 나가고 있었다,

어떤 틀을 일단 만들어 넣고 그 속에 모든 과정을 우겨넣어 그에 맞게 외울 것과 잊어도 될 것들을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며  배운 삶은 12년이다, 그래서 개념이 일단 정리되지 않으면 불안하다

개념을 익혀야 응용문제를 풀 수 있고 모든 문제풀이가 끝나면 요약된 개념을 외워야 하는 삶

물론 개념은 중요하다,

가끔 딱딱한 명사의 세계가 명확하고 정리해 줄 때도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그 다음은 말랑하고 헝클어진 동사가 필요하다

우리의 삶은 결국 움직임들이 모인것이고 움직이는 것들은 동사니까,

그런데 딱 정리되고 요약된 개념은 늘 유혹적이다, 왠지 있어보이니까

 

지식은 무엇을 이해하는 데 머물러 있는 것이 되어선 안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식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까지여야 합니다, 아는 것을 근거로 하여 우리에게 아직 열려져 있지 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식은 우리에게 뿌리로 기능하지 않고 날개로 기능할 것입니다,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날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지식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계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세게에 실제하는 것은 사건입니다, 이론은 사건이 남긴 똥이라고 했지요? 그럼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가 똥이라고 자극적으로 표현하였던 이론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사건과 이론 사이에 작동하는 유기적 관게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중략)

 

어떤 지식도 예측 할 수 있는 힘을 주지 않는 것이면 다 가짜예요. 어떤 지식인도 예측할 능력없다면 그가 가진 지식은 모두 허구입니다, 에측한다면 응용할 수 있어요. 적용할 수 있지요. 지식에 정통하는 이유가 응용할 수 있는 데 있지 않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공자님도 <논어> 의 <자로>편에서 <시경>에 나오는 시 삼백수를 모두 외웠다고 하지만 그에게 조그만 정치적 사안을 맡겨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도 혼자 응대할 수 없다면 아무리 시를 많이 외웠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일갈하신 거지요. 응용의 범위안에서라야 행복 성숙 인격의 함양등등도 합께합니다, 그렇다면 왜 에측을 할 수 없는가? 그 까닭은 단순합니다, 에측할 힘이 없으니까요 그럼 왜 힘이 없는가? 개념과 지식과 이념의 노예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P 148

 

 

덕을 갖춘 이 마음은 아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원래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마음이라고 하기에는 의미가 훨씬더 복잡합니다, 그것은 단ㄴ순한 심리상태가 아니라 거기서 자신을 표출하고 성장시키는 모든 힘이 나오는 어떤 내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덕은 나중에 만들어진 욕망이나 지식 혹은 믿음 첵게등이 닿기전의 원래 상태를 말합니다, 즉 어떤 사특한 마음도 침범하지 않고 오직 인간으로밖에 없는 마음 순수한 마음의 상태 그러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명이전의 마음 언어 이전읨 ㅏ음 가ㅣ 이전의 마음이지요.

  P171

 

 

노자도 이 비슷한 말을 해요. 노자는 ' 함덕후 비어적자' 곧 두터운 덕을 가지고 있는 상태는 어린애와 같다라고 했어요. 어떤 의지나 이념이나 신념이나 가치관이 아직 틀로 형성되기 전에 인간이 간직하고 잇는 순수한 마음의 상태 그것을 노자는 덕이라고 했어요. 바로 지식과 이념의 지배를 받기 이전에 오로지 나로만 존재할 때의 본래적인 상태인 것이지요.

 

 

저는 왜 지금 '덕'의 문제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장황하게 애기할까요? 그곳은 앞에서도 줄곧 이야기했듯이 독립적 주체가 되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제 이야기의 일관된 주제이기도 합니다, 독립적 주체라야 다시 말해 이념이나 지식에 제한되거나 매몰되지 않은 자기의 맨 얼굴로 우뚝 선 자라야 이 세계의  움직임을 그 움직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게를 보고 싶은 대로 혹은 봐야하는대로 보지 않고 보이는대로 볼 수 있기 대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적 통찰의 한 모습입니다, 덕은 바로 화장기를 거두고 남은 한 인간의 '맨얼굴'입니다, 한 사람의 삶의 격발 지점입니다, 모든 통찰과 결정이 매듭을 짓는 곳입니다, 인격적으로 성숙이 무르익는 장소입니다, 미학적 비약이 숨을 고르는 곳입니다, 덕의 작동으로 한 인간은 비로소 카리스마를 갖게 됩니다, 자기가 비로소 자기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덕의 회복은 주체가 독립성을 횝고하는 일입니다,

 

 

사실 덕은 이성보다는 욕망쪽에 더 가까워요. 일반적으로 욕망이라고 하면 부정되고 제어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욕망을 느낄 때만 자기가 온전히 자기예요. 여러명이 같이 있을 때 우리가 즉 집단이 욕망을 느낍니까? 욕망은 누가 느끼나요? 내가 느끼는 겁니다, 욕망은 철저하게 개별적이고 사적인 것입니다, 집단을 지배하는 힘은 이성이고 체계예요. 그러니까 집단으로 있을 때 자기가 집단속에서 용해되어 있을 때는 매우 이성적이예요. (중략)

제가 어려분에게 덕을 강조해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성이 지배하는 집단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기를 구해내라는 겁니다, 집단속에 용해되어  흔적이 없이 사라지고 있는 고유한 자기로서의 자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입니다, 우리에 갇힌 나를 살려내라는 것입니다, 덕 그리고 욕망은 한 식구 입니다,

 

설마 여기서 말하는 집단이 집단에 들어가 익명성을 가지게 되면서 몰려다니며 치기어린 행패를 부리는 집단적 충동 행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당연히,,

여기서 집단과 개인을 유의 페르소나와 그림자로 봐도 될까?

사회적인 얼굴 지위와 역할에 맞는 페르소나를 가지는 것 그것은 이성으로 제어해야할 나이고

그 이면에 욕망을 가진 내 본래의 그림자는 그러니까 그것이 덕의 본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봐도 될까?

나 다운것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생각해보는 것

그걸 알기 위해 지식을 갖추고 개념을 알아가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찾는 것

그것이 인문학적인 삶이라고 생각해도 맞나?

뭐 내가 하고 있는 지금 이순간의 내 생각이 결국 나 이고 나 다운 것이라고 우기련다,

 

불안정? 이는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누구도 결함이 있거나 부족하다고 죄인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생명력이 넘치는 자족적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 여기서 자신에 대한 신뢰가 싹틉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력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행복해집니다, 자신에 대한 무한신뢰  자신에 대한 무한 사랑 딺은 인생이 무한으로 팽창하는 첫 출발입니다, 보편적 이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 개별자들이 아웅다웅 살고 있는 일상이 바로 실재하는 터전입니다, 우리의 모든 아름다운 이야기는 옹로지 진짜 존재하는 이 일상의 세계에서만 피어나고 새겨질 수 있습니다, (중략)

그런데 세상은 이런 하찮게 보이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찮은 일들 말고 다른 일들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사람이 감당하고 사는 일이라는 것들이 사실은 마치 이삿짐같은 것들이지요. 아무리 좋은 살림도 이삿짐으로 꾸려서 골목에 내놓으면 초라해 보이기 마련이예요. 이삿짐 같은 구체적인 일상을 무시하지 마세요.우리 삶은 사실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인생이에요 고상함이나 아름다움 혹은 이상적인 일들도 이런 잡다한 일들 사이에 존재합니다, 훌륭하다고  숭앙받던 사람들이 어디에서 무너집니까? 바로 일상에서 무너집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인간은 구체적인 일상을 같이 영위하는 가족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인간 성숙의 척도는 높고 크고 거대한 곳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일상에서 확인되는 것이 더 치명적이죠.

 

 

구체적인 일상의 힘과 가치를 무시하고 거대한 보편적인 이념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구조속에서 쉽게 독재의 틀이 형성됩니다, 왜? 행복을 거대 이념이 책임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이념적으로 정해놓고 그 이념적인 행복을 추구하게 만드니까요. 즉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놓고 백성들을 그 속에 집어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재 아니겠어요?

 

행복은 자기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과 일치합니다, 자기가 사는 공간은ㅇ 일상의 구체적 터전이지요. 이 일상의 터전에서 삶의 역동성이 발휘된다는 것은 덕이 소외되어 있지 않다는 거예요. 이념에 주도권을 넘기지 않은 것이지요. 이념과 신념과 가치관을 그대로 추종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하면서 자기 욕망을 정면으로 대면하지요. 욕망은 우리한테 있습니까? 나한테 잇습니까? 나한테 있지요. 내가 사는 것이 일상인가요 아니면 이념인가요? 일상이지요. 우리가 우리를 지키는 힘이 발휜되는 공간은 사실은 보편적 이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 일상의 세계입니다, 자기가 자기로 존재할 대 자기 눈에 자기의 일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일상이 보이기 시작할 때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고 거기서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는거예요. 결국 진실한 태도로 자기를 만나게 됩니다,

인문적 덕성이 있는 사람은 현실 속에서 문제를 발견합니다, 인문적 덕성이 잇는 사람은 구체적 세계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세계 속으로 두벅뚜벅 걸어들어가지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이념을 사유의 원천으로 삼지 않고 구체적 세계를 사유의 원천으로 삼는 거예요.

 

 

 

일상의 가치를 아는 것

그건 동사의 세계고 움직임의 세계에 가치를 두는 일이다,

먹고 자고 웃고 울고 화내고 기뻐하는 일

집중하고 멍때리고  늘 반복적인 하루하루에 충실한 나는 인문학적 삶을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야 겠다, 암,...

일상의 힘을 나도 믿는다, 하루하루  쌓인 일상을 돌아보면 그것이 내 역사이고 내 이야기들이다.

 

 

인문적 사고를 시작한다고 하거나 철학을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낯설게 할 줄 안다는 말이에요. 낯설게 한 다음에 그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을 발휘하는게 중요하지요.

그 낯섦의 발생이나 집요함의 유지가 모두 주첻의 활동력 즉 덕의 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욕망의 작동이라는 것이지요. 이 관찰의 집요함 속에서 새로 등장한 세게 그것이 바로 자기의 세게입니다, 그것을 글로 써 놓으면 시가 되고 색깔로 표현하면 그림이 되고 소리로 표현하면 노래가 되고 명중한 범주의 틀로 구성하면 철학이 되는 겁니다, 새로운 세게지요 익숙한 세계가 아니예요

 

이것저것 많이 배운 사람이 대답만 할 줄 안다면 이건 바보입니다, 왜 바보일까요?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자기는 언제 존재합니다, 바로 질문 할 때 존재합니다, 질문을 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죠? 일단 문제가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생겨납니까? 호기심이 있어야 합니다, 호기심은 무엇이 만들어냅니까? 이성이 만들어내나요? 아닙니다, 욕망이 만들어 내죠 이 욕망이 무엇입니까?  우리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것입니까?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것이지요. 자기가 욕망의 주체로서 작동할 때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 호기심을 한번 내뱉어 보는 일 이것이 질문이예요. 대답하는 곳에는 자기가 존재하지 않아요. 질문하는 곳에 자기가 존재합니다, 자기가 우리라는 집단 속에 융해되어 있으면 대답만 가능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으로 살아 있을 때 질문은 시작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머리를 굴리고 혀를 놀려서 뱉어내는 말로는 근육에 맻히는 땀으로  배운 것을 절대 당해낼 수 없어요. 책속에는 길이 없어요. 책속에 길이 있다는 말에 속지 마세요. 책속에는 책을 쓴 그 사람이 생각한 길이 있을 뿐이지 나의 길이 아니예요. 다만 앞선 이들이 고뇌한 흔적을 엿보고 힌트를 얻으면 족할 뿐 책속에서 여러분의 진리를 구하지 마세요. 다른 이의 이야기를 내 것인양 받아들이지 마세요.

 

몸을 움직여서 한계를 겅험할 때라야 자기를 극한의 경계선에 서 보게 할 때랴야 자기의 의식속으로 오히려 자기 자신이 성큼 드러납니다, 자기가 자기를 꽉 채우는 이 경험 오로지 자기 자신이 자신으로만 남는 일입니다, 자기를 몸으로 느낄 때가 자신에게는 가장 현실적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역사의 한편에는 지성과 이성 또 한편에는 쾌락과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지성과 이성이 지배하는 곳은 집단이 지배하는 곳이지요. 즉 우리 관념 이념 따위가 지배하는 곳이었어요. 반면 쾌락과 즐거움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잇나요? 집단 또는 우리가 아니라 나에게서 확인됩니다,

이제 미래는 집단속에 용해된 내가 아니라 나의 주도적활동성이 우리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여기에는 논증이나 설득대신 이야기가 개입되어야 해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 이야기를 하는 곳 바로 그때와 그곳에 자기가 존재합니다,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야기를 하는 활동속에는 이야기 하는 사람이 나로 존재하며 다른 나가 끼어들 수 있는 공간을 준배해두기 때문이지요. 이야기 하는 공간속엣어라야 내가 다른 나를 맞이 하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감동이 힘이 있는 것은 이런 이유지요. 그런데 논문에는 혹응ㄴ 주장에는 내가 있는 대신 진리라는 얼굴을 한 보편적인 이념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가 십상입니다, 여기에는 주장하는 사람외에는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거나 참여할 공간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백이 없는 것이지요. 논증이나 주장에서 여백이란 치명적인 결함이지요. 논증이나 주장은 우리것의 태두리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되풀이하건대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입니다, 나는 우리를 이겨내고 내가 되어서 자기만의 꿈 자기만의 행복 자기만의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자신에게 돌아가 자신의 욕망을 집중하는 것

어떤 딱딱한 명사로 우리어진 개념이나 이론 진리 이성 가치관이 아니라

말랑말랑하고 사소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이루이진 이야기를 할 수 잇는 힘

그것에서 인문학은 시작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책으로 강의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살아가는 것 행동하는 것 말하고 쓰면서 표현하는 것

나를 가장 나답게 드러내는 일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삶은 동사이므로 인문학도 동사일 수 밖에 없고

세상 사람의 수만큼 많고 다양한 동사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가끔 소설을 읽는다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겨우 이야기 나부랭이만 읽는냐고 남의 이야기를 왜그리 좋아햐냐고

그러나 뒷담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없는 곳에서 흉을 보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가 읽으라고 들어라고 써놓은 남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 어때서라는 반발을 하지만 입을 표현하진 못했다,

그 이야기에는 가치관이나  이성적 진리나 개념이상의 것들이 있다.

우리가 있고 내가 있고 내 감정이 있고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것이 인문학이고 미래지향적일거라 막연히 믿었던 것이 틀리지 않음을 믿는다,

앞날에 고민이 많아서 잠을 못이루는 내 아이가

이야기를 좋아했어면 하는 생각을 잠시해본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고 만화를 좋아하는 내 아이는 이미 인문학적인 아이라고 엉둥하게 생각을 튀어본다,

인문학이 어떤 추상적 언어로 쓰여진 논문이 아니기에

내 생각이 글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미친년마냥 널뛰는 일을 부끄러워히진 않겠다,

 

내 욕망에 충실하게 내가 느껴지고 이해되는대로 일단 받아들여보기

그리고 내 경험치에서 생각해보기

그리고 나를 조금씩 드러내는 일에 검열관을 두지 않는 것

거기서 인문학은 시작된다고 이해하면 될까? 맞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소설을 읽는다는 것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

남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아는 것

남의 삶을 바라보는 것 혹은 훔쳐보는 것

어떤 효용성도 없고 실용적인 이득  교환가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책에서 얻는 감정이나 생각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수 있고 작가의 의도와도 다를 수 있다, 같은 책을 읽으면서 누구나 저마다의 책을 읽고있다

어쩌면 읽는다는 것은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무가치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읽는다는 것은 바로 그 지점 무가치하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어떤 가치나 이득을 따지지 않고 남의 삶을 바라보고 이해하게 되는 것 타자를 이해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

나는 한없이 약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귀하기도 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책.. 그 중에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타인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일이다,

부끄러워지고 무모해지고 깊어지고 절망하고 행복해지는 것

소설속의 어떤 인물도 이해되지 않은 인물이 없게 되면서 나의 모든 면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자꾸자꾸 책을 보게 된다,

이야기속에서 나만큼 아픈 사람을 발견하거나 나만큼 힘든 사람 나만큼 가진 것이 없는 사람 나만큼 위선적이고 악랄한 사람을 보면서 나만 그렇게 아니라는  조금은 치사한 안도를 하기도 하고 나를 부끄러워하기도 하면서 나를 알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소설 나부랑이라고 하기도 한다.

삶에 없어도 그만인 이야기들 누군가 나 아닌 타인의 삶을 적어놓은 그 이야기들을 심심풀이라고 여기고 시간낭비라고 여기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힘이 있다,

적어도 시간을 견디고 사람을 견디면서 조금씩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 있다,

많이 읽는다고 좋은 건 아니겠지만

읽는다는 일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여기서 한가지

나를 알게되는 지점에서 내가 변하는 지점은 한없이 멀 수도 있다는 것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생각보다 가깝기도 하지만 머리에서 가슴 그곳에서 발까지는 닿을 수 없는 거리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아직 내가 나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김영하는 글만큼 말도 참 잘 하는구나를 알게 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와 잘 지내는 연습 - 빅터 프랭클에게 배우는 나를 지켜 내는 법
김영아 지음 / 라이스메이커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열두해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을 치고 있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게 없었다.
누군가는 생과사를 오가는 문제도 아니고 사지가 찢겨지는 아픔도 아니고 가족을 잃은 것도 아닌데 호들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또래에서 부모보다 더 중요한 친구 관계의 불안은 아이 인생 최고의 위기다.
개인적인 일이라 소상히 쓰진 못하겠다만
내가 억울하고 아픈만큼 나도 누군가에게 화가나고 속상해서 고의적으로 저지른 잘못도 있다는죄책감이 자기가 따돌림을 받는다는 것보다 더 크게 오는 고통이었다.

 바늘 끝처럼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정에 내게 있는 잘못이 내가 당한 억울함 보다 더 크게 느껴지고 있다는 걸 알아서 뭐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계속 미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억울함도 점점 커지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는 마음 너희들도 같이 되받아치지 않았느냐는 마음이 뒤엉키면서 아이는 몹시 힘들어 했고 극단까지 생각하기도 했다,
그저 이 또한 지나가는 성장통이길 성숙해지는 거름이 되길 바랄 뿐 나서서 해결해 줄 수가 없었다 .
이번에 많이 배우길 바랄 뿐이었다,

누군가 타인의 마음을 공감해주는 법 내 마음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법

내 감정에 대해 잘 콘트롤 하는 법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사회에서 처세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도 알아가기를 바랬다,

부모의 마음과 속물스런 마음이 늘 교차했다,


전에는 이런 책을 읽으면 그저 남의 이야기였다,

아 이렇게 아픈 사람도 있었구나 이렇게 극복하고 노력했구나 하는 걸 머리로 알았다면

이번 책읽기에서는 그게 마음으로 콕콕 와서 박히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극복방법을 내가 배울게 없을까 가져올게 없을까 싶었다,

 

빅터 프랭클이 창안한 로고테라피의 중심 내용을 압축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어떤 조건에서든 우리의 삶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둘째 사람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의미있는 선택을 한다. 셋째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그 성취를 통해 행복이 온다,

 

최악의 상황인 수용소에서도 의미와 희망을 발견한 빅터 프랭클을 아이는 아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 내 안에 자원이 있고 그것이 나를 일으키는 힘이 되는 것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도 있고 내가 싫어하는 나도 있다,

자랑스러운 나 , 부끄러운 나,  불안한 나,  만족스러운 나, 나도 몰랐던 나, 남들에게만 보여지는 나의 모습을 어느 것하나 외면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나"는 참 소중하고 의미있다는 걸 알았으면 하는 욕심에

아이 방에 책을 놓아주였다,


다 이해하지 못 할거고 할필요도 없지만
스스로를 믿을것
예쁜 나 미운 나 후회하는 나 자랑스러운 나 불안한 나
편안한 나 죄스러운 나 당당한 나 그 모두가 나자신이라고 믿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실수가 그리고 상처가 후회도 좋은 사람이 되는 바탕으로 여기면 좋겠다고

많이 욕심을 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