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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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이라는 말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본 총칭으로 사용했다. "한국미술"이라는 호칭을 일부러 쓰지 않은 이유는 한국이라는 용어가 제시하는 범위가 민족 전체를 나타내기에는 협소하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중략)

'조선'이라는 용어를 고른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말이 학대를 받아온 호칭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던 나에게는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민족의 호칭은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는 차별의 멍에를 지게 되었고 민족 분안과정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짐을 떠안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긴장과 불안 때로는 공포마저 느껴왔는데 이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정직한 반영이다. 나는 억울함을 당한 이 호칭을 그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학대에서 더욱 구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대의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의 좁은 사고방식으로 조선시대.. 즉 이씨 조선 시대의 미술인가보다 했다

그러나 목차에 적히 작가들은 신윤복을 제외하고 생소했고 휘리릭 넘기며 눈에 들어온 그림들은 내가 상상했던 그림은 아니었다.

저자는 넓은 의미의 조선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국 혹은 우리. 라는 단어가 주는 울타리 밖에 배제된  모양새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말 이외에는 뭉뚱거릴 수 없는 모두를 담고 싶은 바람이 조선 이라는 말을 어렵게 가져왔다.

그리고 책은 계속 된다.

 

......내가 지키려 했던 원칙은 작가 본인과 시간을  들여 대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내 관심이 작품 그 자체는 물론이고 항상 미술가라는 인간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이 미술에 대한 책이라기 보다는 작가를 향한 책이라고 했다.

미술작품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한 사람을 들여다 보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 배경을 들여다 보고 그 사람의 생각 마음 감정을 들여다 보고자 했다.

저자는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작가들을 선택했고 그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가족'  그리고 그 정체성에 대해 많은 것을 물었고 또 물었다.

 

1. 긍지 높은 촌놈.... 신경호

그의 이름은 낯설었고 작품도 처음 보는 것이지만 어딘가 낯익은 구석이 있었다.

본 적이 있지는 않은데 어디선가 익숙하고 기억에 남았있다는 느낌이 드는...

읽은지 오래되지 않은 한강의 소년들 이야기가 오버랩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고향이 광주이고 그때 그 곳에 있었다는 공통점때문일 것이다.

미안함, 우리는 그 당신 그 곳에 있던 당사자가 아니어서 증언할 수 없다는 결국 살아남아버렸다는 죄책감 그럼에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감을 그에게서 읽는다.

'외로이'인가 '함께'인가

그는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는 리얼리즘을 그리지만 그가 그리는 현실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이 아니라 삶의 방향점,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 고민의 끝에 나온 그의 작품들은 삶에 대한 확신성과 뱡향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은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어딘가 낯설면서 동시에 많이 익숙하다.

그래서 새롭다.

 

2. 완고한 맏아들... 정연두.

 

마흔을 넘긴 나이지만 그는 신세대 작가라고 불린다,.

젊은 작가이다.

그는 복종도 거부도 하지 않는다. 부딪치고 또 동시에 함께 살아가면서도 제 길을 알아서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한국적이라는 것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대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만이 아니냐고 우리에게 말한다,

 

3. 우아한 미친년..........윤석남

 

새로운 개념의 페미니즘을 보여준다.

여성의 연대성을 이야기힌다.

통념을 거부함녀서 얻게 되는 자유와 쾌락 에 대햐여..

전체적이고 전인류적인 구원을 이야기하고 보살핌의 능력을 가진 여성의 힘을 이야기한다.

소외받은 사람에 대한 관삼 그들에 대한 애정과 공감 그것이 강하고 조용한 힘이 된다.

그림은 그녀를 구원했고 이제 그녀는 세상을 위로한다.

여성이어서일까

가장 관심이 가는 작가였다.

 

4.분열이라는 콘텍스트...........이쾌대

 

어쩌면 저자가 가장  흥을 내며 써내려간 작가가 아닐까 싶다.

가장 잘 알고 있고 들려줄 것이 많은 일본 미술사의 이야기를 열심히 풀어내면서 그 속에서 작가 이쾌대를 소개한다. 아는 이야기 생각을 많이 한 이야기인 만큼 몰입도가 있다.

이쾌대의 분열성은 역사의 결과물이라는 걸까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사에서 이쾌대의 완성되지 않은 작품관은 우리의 역사와 시대상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소속감이 없는 주변인으로서의 삶이 주는 불안함과 여유없음을 이쾌대라는 작가를 통해 저자도 공감하고 있는게 아닐까

작가 자신의 분열성을 이쾌대를 통해 설명하고 변명하며 드러낸다.

이 작가를 알아가면서 나는 조금씩 이 책의 저자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5. 성별조차 초월한 이단아..............신윤복

 

신윤복을 만나는 대신 그를 소재로 소설을 쓴 이정명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신윤복의 작품을 통해 어쩌면 그가 여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순간적인 의문으로 시작한 소설과 그 소설을 보고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저자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 시대 화원이라는 신분으로 이렇게 자유분방하고 음탕하기까지 한 그림을 그려낸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이 너무나 당당하고 위축되지 않음은 정말 작가가 같은 여성이어서 가능한 것이었을까

신윤복의 젠더가 어떠하던 상관없이 그는 어쩔 수 없는 그 시대의 이방인이고 주변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그림들이 아름답다는 걸 세삼 느낀다.

 

6. 이름이 많은 아이.......... 미희

 

생소한 작가였다.

벨기에로 입양되었고 한국에서 살다가 캐나다로 갔다가 거기서도 영주권을 얻지 못하고 아직도 떠돌고 있는 노마드 ... 작가

그의 엄마는 한국인이고 아빠는 일본인.. 그리고 국적은 아마 벨기에가 아닐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우리.. 조선 이라는 테두리안에 넣을까 하는 문제마저도 몹시 고민하게 만드는 존재

이 작가를 알아가면서 저자의 생각이 조금씩 잡혀간다.

그가 무 얼 말하고 싶었을까..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저자는 여러 작가들을 만나면서 '가족'을 묻고 '소속감'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한다.

한국이라는 곳에 대해 더 크게 우리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코리아 디아스포라라는 의미라면 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최근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저는 단지 외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디아스포라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이스포라가 된 배경에는 어떤 식으로든 강제성이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경제건 전쟁이건 혹은 입양제도이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억지로 갈라지고 헤어진 경험이 바로 디아스포라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디아스포라 예술은 꼭 태어난 곳을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향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 디아스포라 예술도 가능합니다.

...................

그건 죽음으로 끝나겠죠. 최종적으로 죽음에 의해 끝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도 저는 한탄스러운 이야기만 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예요. 수없이 많은 멋진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고 나이를 먹어갈 수록 독립적인 존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p 325   미희의 인텨뷰중..

 

작가 미희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지만 어쩌면 저자도 같은 생각인지 모르겠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떠돌아 다닐 수 밖에 없는 삶들

그것이 구체적 사실이건 사상적인 뷰유건 상관없이 이 곳에서 이곳의 정통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없는 , 혹은 하기 힘든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미술이라는 커다란 거울을 통해서 그는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선택한 작가들 역시 미안해하고 외로워하면서도 단단하게 살아가는 힘을 가진 작가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저자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책을 덮으며

 

저자는 계속 자기는 미술에 대해 특히 한국 '조선'의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래서 더 신중하게 행동하고 공감하고 이해햐려고 서툴지만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유명한 전문가에게 홀리듯 듣는 미술 이야기도 매력적이지만 서툰 이방인. 관람자가 수줍게 들려주고 또 어는 부분에서는 막혀서 우물거리고 한참을 정적속에 잠기게 하는 대화도 좋았다. 모르는 사람끼리 머리르 맞대로 그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해야할까..막막해하면서 동시에 뭐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알것 같은  이름붙이기 묘한 감정을 나누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아끼는 작가들을 보여주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이야기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을 내보이는 이야기가 좋았다.

단지'미술'만이 아닌 '미술'을 통해 '나' '사회' '국가' 를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살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책이었다.

나 역시 짧은 미술지식과 처음 만나는 작가들 앞에서 그저 꾸역꾸역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알 수 없이 중얼거린 말이 '다행이다' 다행이야' 였다.

뭐가 다행이란 말인지..

이런 작가들을 알게 되어 다행이고 이들 작가를 서경석을 통해 보게 되어 다행이라는 조금은 감상적인 기분도  들었다.

 

글을 써서 나눈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나는 이 책에서 '미술' 보다는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을 '글'로 소개하는 따뜻하고 뭉클한 방법을 배웠다.

사랑하고 관심을 가진다는 것. 그 대상을 깊고 오래 들여다 본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배웠다.

 

17~8세기 조선의 미술이 나오는 책인줄 오해하고 펼친 책에서 나는 나와 멀지 않은 작가들을 차례로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의 따뜻한 시선을 함께 들었다.

짧은 지식이라 무어라 근사한 해석은 할 수 없지만 이 책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깊고 따뜻한 시선만큼은 대단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다.

내가 몰랐던 꽤 괜찮은 사람에게 그가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차례 차례 소개받은 그런 벅찬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의외로 꽤 괜찮다.. 이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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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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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며 내가 떠올린 수신인은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였다. "철학이 일상에게" 그리고 일상이 철학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그런 걸 떠올렸다. 그리고 처음부터 알 고 있었다. 이 편지들은 잔잔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철학은 일상에게 대단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고 일상은 철학에게 드라마틱한 영웅담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천국으로의 구원은 신의 몫이고 스펙타클한 영웅담은 극장에나 걸리는 것. 다만 철학은 지옥에 함께 있어주겠다는 말을 일상에게 전할 뿐이며 일상은 창백하게 떠도는 철학의 말들에 한 방울의 피. 다시 말해 하나의 체험을 선사할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선물의 교환인지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사실은 "그"가 "나"였다. " 왜 지금 여기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사람 말이다. 나 역시 스스로에게 여러 번 그 물음을 던져왔다. 나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철학자임을 보증하는 어떤 자격증도 갖고 있지 않다. 철학이란게 단지 그런 지식과 자격증에 대한 이름이라면 나는 언제든 그 이름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철학 내가 고마움을 느끼는 철학은 누군가의 표현처럼 언제나 내 정신에 찬물 한바가지를 끼얹는 그런 것이었다. 그 물 한바가지를 뒤집어 쓰고서야 나는 삶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정서들에 머리채가 잡혀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았고 바깥의 스펙터클한 풍경에 눈이 팔려 삶의 소중한 것들을 소홀히 해왔다.  그나마 내가 이렇게라도 살아가는 것은 때로는 책 속에서 때로는 책 바까에서 내 정신의 등짝을 후려쳐 둔 이들 덕분이다. 그 경험이 내게는 철학이다.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도 철학이 그런 친구이기를 바란다.

 

                                                            프롤로그... 에서

 

 

세상에 말들이 부족하지 않다. 누군가는 페스트푸드처럼 빨리 사라지는 말들의 운명을 걱정한다고 하지만 우리 삶을 가꾸는 데 필요한 좋은 말들은 인류의 역사가 부지런히 생산해온 위대한 인물들 덕분에 여전히 정신의 계주를 이어오고 있다. 내가 걱정하는 말의 운명은 다른 것이다. 언어학자의 관점과 철학자의 관심은 여기서 나뉘는 걸까 말들의 수량과 수명보다 내게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은 "말들의 방황"이다. 한마디로 "겉도는 말"의 문제이다.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들을 때 우리는 소위 "좋은 글 좋은 말씀"을 많이 접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선생님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그런데 강연이나 원고지에서 만난 그"좋으느 말씀"들 때로는 무릎을 치게 하고 때로는 가슴에 와닿아 어딘가에 적어두기까지 한 그 "좋은 말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안에서 잠시 머물기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지금 그것들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선생님의 말씀"으로 들어와:선생님의 말씀"으로 머물다가 애초에 그것이 선생님의 것이었음을 확인하듯 내게서 떠나가 버린 말들. 누군가 건네준 빵 한조각도 금세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데 왜 "선생님"의 그 "좋은 말씀"들은 순간의 짜릿함만을 안기는 탄산음료처럼 그냥 그때뿐인걸까?
아마도 우리가 그 좋은 말들을 위장으로 직접 소화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그 말들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나 공자, 예수와 석가의 아름다운 말들을 구경만 했을 뿐 그것들을 진지하게 체험하지 않았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들의 권위였지 그 말들이 아니다. 말을 믿었다면 우리는 벌써 그것을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말의 실천이 아니라 그 말을 한 사람에 대한 숭배로 나타낸다. 즐 우리가 믿는 것들은 말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점이다.  바로 이런 식이다 "나는 그가 특별한 존재임을 믿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사람. 그 믿음을 과시하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처럼 사는 사람은 드물다. 니체가 예수만이 유일한 기독교도였다고 한 것은 그런 뜻에서였다. 천국은 예수의 실천속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예수에 대한 믿음에 달렸다고 착각한다. 물론 이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말씀을 듣고 읽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리는 무소유 정신을 갈파한 어느 스님의 책을 백만 권 넘게 사지만 정작 무소유를 실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좋은 말을 박물관이나 명승지를 관람하듯 그저 듣고 구경하면서 입장료로 책값을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앎은 어떻게 해서 우리의 피가 되는가? 앎은 언제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가? 실로소피 즉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 라는 말뜻에서 알 수 있듯이 " 앎을 통한 삶의 구원"을 확신하는 학문이다. "악덕은 무지에서 나온다"고 했던 소크라테스부터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던 계몽주의 철학자들까지 모두 그랬다. 철학자들이 싸운 것은 다만 그 '앎"의 내용에 해서였다. 하지만 좋은 "앎"은 자동으로 우리'삶"을 구원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공자님 말씀을 틀어놓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 듯 그것이 그렇지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좋은 말씀"들은 내게 잠시 머물다 금새 사라져 버린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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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무리 대단한 권의를 가진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말이 아무리 올바른 것일지라도 환자가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치료의 관건은 환가가 현재의 증상을 유발하는 과거의 사건으로 돌아가는 것에 있으며 거기서 그 사건을 과거와는 다르게 체험해야한다. 즉 과거를 반복하지만 다르게 반복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치료만이 아니라 깨우침 일반이 그렇다, 과거에 내가 저지른 일을 그대로 떠올리지만 그것을 달리 느끼고 달리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꺠우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좋은 말은 그저 좋은 말일 뿐이다.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내 안에서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내가 내 식으로 체험하지 않은 말이란 한낱 떠다니는 정보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여전히 옳은 말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세상에 옳은 말들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정처 없이 여기저기 흘러다니고 있을 뿐이다. 

요즘 잘 나가는 선생들의 인문학 강연장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책도 많고 강년도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말들은 모두가 쓰고 버리는 심지어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는 상품처럼 되었다. 누군가에게 좋은 말을 들었다면 최소한 한번은 내 목소리로 그것을 다시 들어야 한다.그때만이 그것은 내 피가 된다.  "높이 오를 생각이라면 그대들 자신의 발로 오르도록 하라"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구원해달라며 찾아온 이들에게 던진 말이다.  확실히 그렇다. 내 발로 오르지 않은 산은 풍문과 구경거리로만 존재하는 산이다. 그러니 산에 오르려면 스스로 오르는 수밖에 없다.

책을 마무리 하다보니 세상에 내보내는 말들이 결국 내게 돌아오는 걸 느낀다. 나는 내 말을 얼마나 체험했던가? 내 글은 정말로 내 피로 쓴것인가 부끄러움을 솔직히 고백하고 노력하는 수 밖에.. 철학하는 이가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하고 끝까지 사랑해야 할 운명이 저 물음이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에서 

 

 

 

빌린 책에는 줄을 그을 수도 없고 함부로 접은 표시를 할 수 없었다.

모든 구절에 줄을 긋고 접어두는 것도 부질없어 보였다.

이 책이 어떻게 내 눈에 들어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20년도 전에 교양과목으로 들었던 철학개론을 연상케 하면서 그때 글로만 배웠던 철학이 어떻게 우리 현실에 적용되고 사람에게 들어와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를 이 책은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앎이란 내 지식의 폭이나 깊이를 넓히는 일이 아니라 내게 용기를 낼 수 있게 하는 것

지금 이순간 여기에서 시작하를 말

죄의식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그때  그때 반성하고 마주하면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

모두가 여기서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서 읽고 어딘가에서 들었던 좋은 말씀이고 글귀였다. 그럼에도 이 책에 씌여진 이 말들이 왜 이토록 가슴을 치며 다가왔을까

저자는 철학이 단순히 생각하고 지식과 사고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행동이고 그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용기라고 한다.

지금 이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채워살아내는 일이 바로 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책을 많이 읽으면 그냥 책을 많이 읽는 어른이 되는 것뿐이라고도 알고 있다. 읽는다는 행위는 그다음 책장을 덮고 문을 열고 나가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내가 잘못할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며 행동하는 것이다.

 

많은 곳에 밑줄을 그을 수 없는 책이어서 결국 플롤로그와 에필로그만을 적어두기로 한다.

더운 날 얼음처럼 차가운 물 한바가지를 뒤짚어 쓴 기분.

책을 덮으며 그런 서늘함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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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성적인 성향은 그에게 받은 것이었다.

그도 무척이나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무난한 사회생활을 했고 모임에서 장도 몇년을 해왔고 늘 모임에서 대화를 주도하고 주로 말하는 사람이었고 술자리도 즐겼지만 그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술을 좋아하고 친구가 많고 모임이 많고 목소리도 무척이나 컸고 관심받기를 좋아했지만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모임에서 떠들썩한 시간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거나 쉬는 날이 되면 늘 무표정하고 뚱했던 표정이나 말없이 책상앞에 오래오래 앉아 있는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내성적인 사람이 받는 오해는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잘난척 한다. 오만하다. 제멋대로다.다른 사람들을 무시한다.

하지만 그가 혼자만의 방으로 들어가서 누구와도 마주하지 않은 시간을 갖는것은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오만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지쳤고 피곤했던 거였다. 떠들썩한 시간들을 가진만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고 어떤 사람의 목소리보다는 그저 적막한 고요속으로 숨어들어 숨을 쉴 여유를 찾아야 했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공개된 자리에서 너무 떠들어댄건 아니었는지 어떤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를 곰곰히 되짚어가며 복기하는 시간들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고 침묵의 가치를 다시 꺠닫는 시간들이었다.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조금 편한 가족들의 질문이나 말에 대꾸하지 않은 것은 잘나서가 아니었고 지쳤고 부끄럽고 또 수줍어서였던 거였다.

하지만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하고 적절한 맞장구를 쳐야한다. 그리고 잘 어울리고 잘 웃고 말을 재미앴게 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과 정반대점에 있던 그는 긴 가방끈과 높은 학력만큼이나 오만한 것이었고 잘나서 주위의 모두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보였다.

그가 보는 어려워보이는 책들도 그런 주위 사람들의 판단을 보충해주는 증거였다.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어쩌면 오만하고 잘난척 한다는 오해뒤에 숨어버리는 것이  원치않은 수다나 과장된 적극성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젊어서는 사회생활을 왕성하게 할때는 원치않은 행돋들도 필요했지만 나이가 들고 이제 사회의 뒤안으로 물러난 시점에서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내 마음이 편한 곳을 선택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래서 외로웠고 고독했겠지만 변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가장이었던 사람이 사나이였던 사람이 외롭다고 하는 것은 사실 내가 레이스가 있는 팬티를 입는다고 고백하는 것만큼 생뚱하고 수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를 가장 많이 닮아있던 나도 그땐 그를 잘 알지 못했다.

무뚝뚝하고 별 대꾸없고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질서에 숨어드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불편했고 피하고 싶었고 가능한 짧은 시간만 마주하고 싶었다.

그때도 그가 외로웠을거라는 걸 짐작했지만 애써 모른 척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불편하니까

내성적인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위로하는 것도 아닌것같다,

어쩌면 내가 혼자 있는 것이 편한만큼 상대도 그럴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이고 그래서 내편한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젊었고 여유가 있었고 언제든 사람속으로 들어갈 기회가 많았으므로 그때 나의 외로움이나 고독은 심각한 것이 아니었고 그저 치기어린 낭만주의였을 테지만 그의 나이먹은 외로움은 그 색채도 다르고 냄새도 다를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가고 그의 빈 책상을 바라보면서 그가 수줍은 사내였다는 걸 알아버렸다.

잘나서가 아니라 사람사이에 끼어드는 일이 두렵고 어색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젊어서 잘 했던 개방적이고 외향적인 것들이 어쩌면 살아가기 위해서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서 짊어졌던 무게였다는 것,. 그래서 그 의무에서 벗어났을 때  내성적인 그의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본능에 반한 오랜 시간의 갈등끝에 자신에게 깊이 빠져버린 내성적인 행동이 결국 다시 상황에 따라 외향적이어야 하는 상황에도 머뭇거리게 했던 거였다는 걸 몰랐다.

비슷한 사람이 비슷한 사람을 알아보지만 오히려 비슷하다는 걸 아는 순간 그대로 모른 척 스쳐지나가는 잔인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내성적이어서  공개된 공간에서 말하고 웃고 에너지를 쏟은 만큼 나만의 방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질 시간이 필요한 건 맞다. 혼자 있는 시간이 어색하지 않고 혼자 먹는 밥 혼자 마시는 커피 혼자 보는 영화가 편하다는 것도 맞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것도 좋아한다. 사람은 혼자가 편하다고 영원히 혼자 있을 수는 없는 일이므로...

그걸 아는 내가 그가 혼자가 편한 수줍은 사람이어도 누군가가  무언가를 요구하고 조르면 마저못하는 척 방에서 나올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아주지 못했다. 아니 모른 척했다.'

 

책을 읽으며 내내 그를 생각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의 행동들이 하나하나 책속에 있었고 그 이유가 세심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건 그의 모습이고 그리고 나의 모습이었다.

내가 받는 오해들이 그때 그가 받은 오해들이었고 내가 무시하는 것이 그가 무시했던 것이었다.

책의 글귀에서 내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받으면서 그가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를 위로했을까

 

 

책을 읽으며 그가 그립다. 그리고 미안하다.

다음주 월요일은 그의 첫 기일이다.. 이 책이 그래서 내게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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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8 1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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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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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십대들에게 개인의 고통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누군가를 본받으면서 마땅히 참아야 할 것이 되어버렸다. 흥미로운 건 앞선 장에 등장한 이심대들은 한편으론 취업을 못하고 있는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요구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일이  또 어디 있는가.  p92

 

 

 

고통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지면 필여적으로 툭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화된다. 기실 "공감"이란 단지 함께 느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시작으로 한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권장된다. 그래서 타인의 상황을 깊고 넓게 이해할수록 당연히 타인을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재단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로 이렇게 되는 걸 일컬어 '공감대가 넓다'고 하지 않는가

..............

이 경우 공감이란 '가난한 사람은 왜 맨날 저렇게만 살지?'라는 편견을 깨기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문제삼아 '저렇게 사니 저모양이지'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저렇게 사는 건 가난이 제공한 결과이지, 한 개인의 가난을 만들어낸  원인이 결코 아니다. 좋은 데 뭇살고 좋은 움식 못먹으며 힘들게 살다보니 사람이 구질구질해지는 거지 그 반대가 아니다. p 94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으로 치장된 그래서 읽기에 한없이 편안하게 씌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게발서라면어떤 책이든 패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내용이 넘쳐난다. 그 사람이 취업하지 못한건 이 때문이다. 그런 태도로 어떻게 승진할 수 있느냐 저렇게 사니 살을 못빼지.... 하는 식으로 실패의 원인을 구구절절하게 하지만 근시안적으로만 제시한다. 그만큼 패자에 대한 편견들을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확인하게 될 이십대들의 일상은 바로 이런 편견이 내재된 결과이다. 이는 가난한 것도 우울한 것도 다 자기잘못인데 왜 그걸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냐는 식의 반문과도 직결된다.

 

 

패자에 대한 편견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클수록 비교적 안전한 '기존의 길'에 대한 선호 역시 커진다. 더 나아가선 그 길만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다른 길을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된다. 그리하여 '몇가지 길만이 당연한 길이 되고 그 외의길을 걷는다는 건 다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만다. 이런 생각이 ㄱ'그 외의 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만들어내는 건 시간문제다. 다름에 대한 거부감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

 이는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질서'에 어긋난 일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때로 강의시간에 이십대들이 사회적약자에 대한 연대의식이 부족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 '정치적으로 편향된 수업을 한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도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모든 것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 ' 열심히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등의 논의를 비판해본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했다. 그래서 경쟁 시장질서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조금이라도 비판하게 되면 일반적인 논쟁에서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마치 금기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p98

 

 

사실 대학서열화문제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의 잣대를 학습역량(수능점수0만으로 줄을 세워 판단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을 판단하는 데 학습 역량은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다른 역량들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수능점수처럼 단번에 드러나거나 쉽게 확인되기 어렵다는 특징을 갖고 있을 뿐이다.

과거의 이십대들은 이러한 편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래서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흔들면서 사회 전체적으로는 어떤 균형을 맞춰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십대들은 과거의 이십대들이 삼십대가 넘어가면서 천천히 형성하던 생각들을 어차피 사회에 진출할것 이상 빨리 알아두면 좋은 가르침 정도로 자주 접하게 된다. 사회적 선행학습이랄까. 자기 계발서는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자기 계발서의 상당수가 성공한 직장인들의 입을 통해 미리알아두면 좋을 사회상식 달리 말하면 사회적 고정관념들을 전달하기에 바쁘다. 사회는 어쩔 수 없다. 사회는 무지막지하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성새대의 오래묵은 편견은 그대로 전승되고 고착된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하자면

예전 대학졸업무렵 그간 연락이 없던 고등학교때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때 난 서울의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그 친구는 지방국립대를 다녔었다.

그땐 '지잡대"라는 개념이 없었고 나름 공부 잘하던 여학생은 아주 성적이 좋지 않은 이상 지방국립대로 몰리던 시절이기도 했다. 꼭 여학생만이 아니고 대부분이 연고대 이상 안될바에는 학비도 싼 지방 국립대로 가는 거였다.

그 친구도 아마 그렇게 부산대를 갔고 나름 공부를 잘 한 모양이었다.

그친구가 연락이 온 이유는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우리학교로 오고싶다는 거였다. 그래서 교수들이나 시험에 대한 정보를 부탁한다는 거였었다.

그때 난 진학은 안하고 취직을 하기로 결정했고 거의 취직이 되어가고 있던 입장이었다.

친한 친구들이 많이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기때문에 정보를 알아보는건 어렵지 않았지만 조금 귀찮기도 했다. 고등학교때는 친했지만 대학오면서 거의 연락이 없던 친구였기에 어색하고 귀찮았다.

그래서 대충 얘기했었는데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사실 우리전공이 우리학교가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나름 대학레벨이 있는 거일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친구는 자기가 대학 4년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리고 그곳 교수들에게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를 늘어놓았고 그래도 대학원은 큰 물에서 놀고 싶어서 우리학교로 진학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왠만하면 자기 실력으로 붙겠지만 그래도 조금의 정보가 필요하다고 했던거 같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잘났으면 혼자 알아보면 되지. 아니 그 대학에 남아서 계속 공부해서 박사까지 하고 자리를 잡던지....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그 친구는 떨어졌다. 그 다음학기에 다시 도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우리 학교에는 오지 않았던 거 같다.

그 당시 함께 대학원 시험을 봐야헸던 과친구를 통해 그 고등학교 동창 이야기를 들었다.

부산대 나와서 너무 잘난체 하더라

여기를 무시하면서 왜 오려고 하는 건지..

지방대에서 여기오기가 쉬운줄 아나.. 떨어지는 건 당연하지

우리가 들어갈 티오도 부족한데 타교생 그것도 지방에서 온 학생을 어떻게 받아주나...

그냥 들었다

한편으로 그래도 친구인데 여기 서울내기들이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하는 반발심도 없진 않았지만 나도 내 과친구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여길......

그때도 지잡대 라는  명사화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차별은 존재했다.

그건 차이가 아니었고 차별이었을 것이다.

나의 우월감도 차별이었고 기를 쓰고 자기를 피알하던 그 동창도 차별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그 친구가 생각났다.

억척스럽던 친구이니 뭐가 되도 되어 하고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미안하다.. 도움도 못되고 나도 나쁜 마음만 가지고 있어서...

 

 

내가 읽는 자기게발서가 진정한 자기계발서가 되는 순간은 나도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뭐라도 되어있는 순간에 완성된다.

그렇지 않고 그저 그 책에서 씌여진대로 뭐든 열심히 준비하고 자기를 개발하는 과정속에서는 그 책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연훼손이고 종이낭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 자기계발서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지 못한 자기를 탓하고 자기 노력을 탓하고 책은 점점 신격화된다. 언젠가 완성될 나의 성공을 위해 그 책이 말하는 대로 우리는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게 아닌게 아닐까 하는 불손한 생각은 급하게 머리속에서 지워야한다.

 

누군가가 노력했구나 정말 열심히 해냈구나 하고 인정하는 지점은 결국 그 사람의 결과물이다.

특목고를 가고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정규직이 되고 좋은 아파트를 가지고 높은 연봉을 받고 수치로 내밀 수 있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 순간 그 사람은 정말 노력한 사람이 되고 어려움을 이겨낸 인간승리자가 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들이 단지 이십대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그들에게 스며들었던 것이고 이젠 두렵게도 십대들고 그 현실을 냉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결과를 쥘 수 없다면 차라리 노력도 하지 않겠다는 더 무시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측면에서 이십대는 보편적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해자 역할응ㄹ 할 때 이들은 마치 정의의 이름으로 학살을 서슴치 않았던 십자군 원정대처럼 동년배들의 어떤 집단을 멸시한다(그러니까 자신보다 수능점수가 낮은 학교) 그래서 논랄 정도의 비논리적인 하지만 확신에 찬 학력차별을 과거에 비해 휠씬 노골적인 수위에서 공격적으로 전개하는 이들이 바로 오늘날 이십대들이다. ...................

이들은 동년배의 공격성이 가차없다는 걸 알기에 일단 자신이 멸시적 대상이 될 가능성을 먼저 차단하는데 익숙하다. 수능 시험을 망쳤다는 자기방어는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십자군 원정대가 칼을 들고 돌진하고 있으면 일단 피하는 것이 상책 아니겠는가 그게 정당한지 아닌지는 나중에 따질 문제다. 살아남기 위해 냉혹해져야 하는 현실 그 슬픈 현실을 모르진 않지만 이렇게 초라하고 치졸하게 변한 청춘이라니.. 무엇보다 더 슬픈건 이들이 바로 스무살 청춘이란 점이다. p 127

 

 

 책에서 저자와 대학생의 대화가 나온다. 그때 대학생들이 자기보다 서열이 낮은 대학에 대해 갗는 여러가지 편견들이 있다. 사소한 행동들 대화들 그 모든것이 대학생이 보기에 수준이 낮고 도덕성이 떨어지고 결국 그 모든 것은 서열이 낮은 대학에 다닐 수 밖에 없는 수능점수가 낮았던 조금 떨어지는 사람들의 특징처럼 표현한다. 이 모든 것이 자기가 가진 편견과 차별이라는 필터로 보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로...

이 역시 이십대의 문제는 아니다.

나역시 그렇다.

자녀들 학원에 본낼때 그 학원 선생의 학력을 알아본다. 어느 대학 이상은 되어야 하고 어느 대학 이하는 어느정도 금액이상은 줄 수 없고...

어떤 학교가 명문인 이유는 그 학교 교사들이 다들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이라는 것

외고를 다니고 좋은 대학을 다니는 학생은 다시 보이고 좀 더 과장하면 뒤에서 후광도 보인다는 우스개소리들

기왕이면 좋은 학교 나온 부모의 자녀랑 우리아이가 친하면 좋겠다는 허영심 그래서 교묘하게 물어보는 출신학교에 대한 질문 들들들...

어른들도 기성새대로 그들과 다르지 않게 그런 필터를 끼고 세상을 보고 서열화 한다.

일등부터 이백등까지.. 그리고 그이하는 정말 기타등등...

다만 저자는 모든 편견과 차별로 힘든 상황에 있고 불안한미래를 가진 그들이 함께 연대하지 않고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통용하고 더 확대 재셍산해낸다는 걸 경악하고 우려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사회가 모두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규정짓는데..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도태되는 현실이 바로 코앞인데 그들만 정의롭고 연대하고 함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 악착같이 매달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어쨌든 '저 친구보다 내가 더 나은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자기 개발서가 강죠하는 바로 그것!!) 사회에서 이들은 타인과 작은 구별점 하나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상대를 깍아 내리려는 강한 동기는 여기에서 나온다. p148

 

 

사회적 차별이 강한 나라일수록 명품에 대한 집착이 과도하게 나타난다. 값비싼 명품가방을 들고 다니면 최소한 경제적 부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오는 무시는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편에 맞지 않아도 과도한 소비를 통해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문화가 생겨나게 된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그대로 보여줄 경우 온갖 편견에 가득 찬 시선이 날아올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야구 잠바를 입지 못하는 저 친구들도 자신들의 학교 이름을 대놓고 드러냈을 때 어떤 취급을 받을 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 충청도 소재 대학의 학생들이 자신보다 수능 배치표에서 낮은 대학의 학생들을 향해 '우리 함께 이 더러운 학력주의의 세상을 이겨내자"고 손을 내밀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학력위계주의의 구조는 구성원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유지되지도 확대 재생산 되지도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멸시했다고 멸시를 받지 않으리란 법도 없듯이 자신이 멸시를 당했다고 누군가를 멸시하지 않을 이유도 또 없다.  p 164

 

 

초등교실에서의 왕따는 조금 촌스럽게 드러난다., 누군가가 눈에 띄고 재수없고 잘난척하면 왕따 대상이 된다고 한다. 튀지말고 가능한한 묻혀서 지내라... 고 부모들은 말한다.

한번 왕따를 당한 친구가 다시 학년이 바뀌고 입장이 바뀌어 왕따를 시킬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은 중학교까지 지속된다. 가장 이드가 활발한 시기라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순수해서 잔인한 초등시절과는 또다른 양상을 띈다.

알면서 모른 척 할 수도 있고 자존심을 죽이고 살기도 하며 견딘다.

그리고 고등시절은 앞에 닥친 수험생활로 조금 잠잠해지기도 한다고 한다. 성적의 압박이 더 크기도 하고 이젠 조금 유치해지기도 하고..

그리고 대학을 가면 이젠 촘촘하게 줄지어진 서열로 왕따가 생기는지 몰랐다.

어쨌든 같은 캠퍼스면 다 같은 입장이 아닌가 하고 순진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촘촘한 배열은 단시 수능철 입시철에만 반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평생을 따라다니는 주홍글씨가 된다는 걸 지금 알았다.

학창시절 왕따는 누군가에게 하소연 하거나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선과 악이 구분된다는 점에서 참 순진한 거였다.

사회가 묵인하고 모두가 알고 있는 계급에서 학벌이 주는 의미는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고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것이라는 나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눈길말고는 내가 얻을 것이 없다.

그냥 묵묵히 그 순서를 지키고   절대 추월하지도 않는 복종만이 남아있는 셈이다.

 

............우리가 흔히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당부분 자기 것이 아닌 요소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개인의 능력과 의지는 그 사람 개인의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샌델이 말하듯  결코 그렇지 않다. 첫째로 태어난 것이 성공에 큰 영향을 주는가 하면 더 좋은 집안에 태어나거나 좋은 집안에 태어나는 것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아버지를 잘 만난 것은 죄가 아니다. 다만 그 덕에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능력주의만 강조하면 그 덕이 없었던 사람은 도데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p 211

 

지금 기말고사기간이다. 아이에게 시험공부 열심히 하라고 닥달한다.

이제 중학생이고 곧 고등학생이되는데도 아무 생각도 없어보이는 아이가 불안하다. 남들처럼 친구 아들 딸처럼 자기가 특목고를 외고를 가고 싶어하는 욕심도 없고 그냥 일반고로 가겠다고 하고 하고 싶은 공부도 모르겠고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지 알 수 없다고 우는 아이를 보면 안쓰럽기보다는 답답했다. 그러다 세월호가 터졌고 그저 살아있고 건강한게 감사해서 며칠을 두고 보다가 다시 시험을 앞두고 말은 못하고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 중이다.

작은 아이가 어버이날 편지를 줬다.. 이런저런 글귀끝에 한마디가 있었다.

"절대 엄마 아빠보다 먼저 죽어 슬프게 하지 않을게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 아이에게 우리가 무얼 해야하는지 .. 막막하다.

살아있는것이 행복이게는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죽지 못해 살아가고 경쟁으로 말라가고  어쨌든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아 앞날을 막히는 일따위는 없어야 하지 않은가.

못해도 되고 다시 해도 되고 조금 적게 벌고 먹고 살아도 내가 좋을 수 있는 세상은 과연 오기는 할까

세상이 엉망이고 그래서 젊은이들에 힘들다고는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모순되고 부끄러운 생각들이 그들에게도 깊이 스며 있을지는 몰랐다.

나중에 우리 아이도 패배감에 젖어 살지 모른다.

지금 내겐 아이에게 물려준 금전적인 자산도 없고 휼륭한 정신정 모토도 없다.

그저 이 세상에서 엄마나 아빠보다 조금은 더 현명하기를  대책없이 바랄 뿐이다.

책을 덮고 막막하고 눈물이 난다. (이건 절대 음주후에 오는 습관때문은 아니다)

몇년후 내 아이가 느끼고 겪게될 패배감이 이 책에 고스란히 있다.

 

세상이 좋아져서

내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이 모두 내가 덜 노력했고 내 책임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엉덩이 툭툭 털고 일어나 또 해보지 뭐.... 하는 그런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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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질까 - 당당한 나를 위한 관계의 심리학
크리스토프 앙드레 & 파트릭 레제롱 지음, 유정애 옮김 / 민음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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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봄이다. 모든 꽃들이 만발하는 봄이다.

여기저기 꽃소식이 들려온다. 봄이니까 당연하다.

진달래축제  산수유 축제 벛꽃은 이미 윤중로에서도 만발해서 예전보다 빨리 축제가 시작했다고 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만개한 꽃들이 여기저기서 화려한 자태를 뽑낸다.

우리동네 아파트 화단에서도 볼 수 있는 꽃이지만 축제현장에서 보는 꽃은 다르다. 화려하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그 때 그 장소의 꽃이 브랜드를 가지고 사람을 모으고 상품성을 가진다.

하지만 봄이 오면 아무도 보지 않는 구석의 나무들도 기를 쓰고 꽃을 피운다.

그건 나무의 생명살이의 한 부분이다.

봄이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씨를 뿌리고 그렇게 삶을 이어지고 살아간다.

누구 눈에도 띄지 않는 허약하고 초라한 꽃을 피우는 나무도 나름의 모든 힘을  들이고 노력한다.

나 여기 있음을 알리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삶을 이어가고 하루하루의 시간을 살아간다.

 

소극적인 사람. 수줍음이 많고 사회불안을 가진 사람들

그들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하루하루 어쩌면 남들보기엔 별거 아닌 상황에서도 죽음과 마주하는 비장한 각오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 최선이 치열하다.

 

아이 학교 상담을 갔다.

아이가 소극적이고 소심하다.

현대를 살아가는데는 자기 피알도 필요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인재가 필요한데 그런 면에서 소극적이고 소심한 사람은 눈에 띄지도 않고 불이익을 당할 경우도 있다.

이건 돌려서 유하게 하는 말이다.

한마디도 적극적이고 나서는 성격도 이제는 능력이고 실력이다.

자기가 10을 가지고 있든 5를 가지고 있든  그걸 드러내는 사람이 이긴다,

나는 이만큼 있다고 포장할 줄 알고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 더 가치있고 존중받는다는 세상이다.

그게 틀렸다고 할 생각은 없다.

사실 그렇다. 세상엔 바닷가 모래알만큼 많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정해져 있다. 그러니 실력이 있더라도 누군가의 눈에 뛸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저 사람이면 믿음이 간다는것  능력있어보인다. 매력적이다. 그건 다 적극적이고 활발하고 사교적인 사람들이다. 인간은 우선 눈에 보이는 걸 믿는 법이다.

나도 그러니 남을 탓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왠만하면 자기를 드러낼 필요가 있고 사교적일 필요가 있고 누군가와 잘 지내고 적극적인 것이 더 좋다.

하지만 당신 아이가 소극적이라는 말 그래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교사의 충고는...

한마디로 너 아이가 많이 부족하다는 말일 수도 있다.

뭐라고 시켜야 겨우 말을 하고 발표도 왠만하면 하지 않으니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도 없고

우는 아이 젖준다고 자꾸 나대야 보이고 보여야 이쁘기도 한데 있는듯 없는 듯 아무 존재감없는 아이 일단 학교를 다닐때는 걸리적거리는 게 없으니 나름 편한 아이지만 그런 무존재감은 사회생활이 힘들수도 있고 도태될 수도 있다는 ... 조금 삐딱하게 꼬아 들어면 그럴 수 이다.

 

하지만 천성은 누가 바꿀 수도 없다.

옆에서 닥달하고  뭐라고해도 가자 불편하고 힘든건 당사자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그것도 병이라고 이야기 한다.

수줍음이나  무대 공포 이상의 사회불안이고 사회공포증이다.

이건 기질이나 성격이 문제가 아니라 병이고 그러니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는지를 자세히 기술한다.

조금씩 사소하고 작은 일부터 시작해서 세사에 적응하도록해야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자기 의시를 표현하고 사소한 일에 사람과 눈을 마주 하고 이야기를 하는것

그리고 타인은 생각보다 남에게 그다지 관심이 업고 한 번 봐도 쉽게 잊을거라는 뻔뻔 함도 키워야 한다.

저 사람 성격이 이상하군. 너무 소심한거 아니야? 별 거 아닌데 왜 저렇게 떨어?

그러니 내가 정말 이상할거야. 남들이 우습게 생각하고 다시는 상대하지 않을거야

난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그냥 무조건 피하는게 장땡이야...

이렇게 움츠리고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말자고 저자는 말한다.

우울증이나 다른 것 처럼  질환이고 혼자의 문제도 아니고 치료를 하면 좋아질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사례도 많이 인용하과 치료과정도 상세하게 기술한다.

어쩌며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위로도 되고 나도 가능하거란 위안도 얻는다.

사실 그들은 누군가 타인이 나를 이상하게 보고 손가락질 하고 수군거리는 것보다 더 크게

스스로 위축되고 모든 최악의 가능성을 배재해서 스스로를 작은 울타리에 가두어 버리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드러내고 보여주는 걸 즐기는 쪽으로 흘러가고 인터넷이 발달하고 작아지면서 나의 존재를 어떻게 어필하는가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조금만 망설이고 쭈빗거리면 쉽게 잊혀지고 도태된다.

그렇게 변하는 세상도 점점 소극적인 사람의 병증을 심하게 하고 위축시킨다.

 

경주 보문다지나 진해 해군기지 혹은 윤주로에 피지 않은  허름한 동네의 벛나무도 봄에는 꽃을 피운다. 겨우 몇송이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아도 그곳에 벛나무가 있는지 목련이 있었는지 알아보지 못해도 몇년을 그 자리에서 묵묵히 꽃을 피웠고  시간이 되면 장렬하게 떨어지면서 삶을 이어았다.

누가 모르다고 그 나무를 가치없다 할 수 있을까

드러나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소심하고 드러나지 않는 아이를 키우면 늘 마음이  복잡하다.

이렇게 이쁜걸 이렇게 장점이 많은 걸 나만 보고 있구나 싶어 안타깝다.

그래서 책도 이런 제목으로 나오면 눈에도 잘 띄고 자꾸 손이 간다.

대단한 비책을 기대하고 뭔가 위안도 얻고 싶다.

하지만 대단한 명성의 저자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일단 병으로 인정하고 고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하지만 인정하고 나서기까지의 과정도 책에서 보여주는 것만큼 많은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책장을 덮고 위안과 함께 또 막막하다.

 

 

어제 외출했다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는데 노부부가 스쳐 지나가며 하는 말을 들었다.

어머 여기 동백이 피었네.

그러네.. 이동네 20년을 살았는데 여기 동백이 있다는 걸 몰랐어. 당신은 알았어?

몰랐지.. 작년 봄에도 여기 뻔질나게 다녔는데 못봤지,.

아이고  고와라..

정말 곱네

 

20년간 누구도 몰랐던 동백은 그동안 계속 꽃을 피웠을 것이다.

그리고 20년만에 누군가가 그를 알아본다.

그걸로 되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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