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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ㅣ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평점 :
이렇게 이십대들에게 개인의 고통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누군가를 본받으면서 마땅히 참아야 할 것이 되어버렸다. 흥미로운 건 앞선 장에 등장한 이심대들은 한편으론 취업을 못하고 있는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요구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일이 또 어디 있는가. p92
고통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지면 필여적으로 툭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화된다. 기실 "공감"이란 단지 함께 느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시작으로 한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권장된다. 그래서 타인의 상황을 깊고 넓게 이해할수록 당연히 타인을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재단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로 이렇게 되는 걸 일컬어 '공감대가 넓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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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 공감이란 '가난한 사람은 왜 맨날 저렇게만 살지?'라는 편견을 깨기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문제삼아 '저렇게 사니 저모양이지'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저렇게 사는 건 가난이 제공한 결과이지, 한 개인의 가난을 만들어낸 원인이 결코 아니다. 좋은 데 뭇살고 좋은 움식 못먹으며 힘들게 살다보니 사람이 구질구질해지는 거지 그 반대가 아니다. p 94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으로 치장된 그래서 읽기에 한없이 편안하게 씌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게발서라면어떤 책이든 패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내용이 넘쳐난다. 그 사람이 취업하지 못한건 이 때문이다. 그런 태도로 어떻게 승진할 수 있느냐 저렇게 사니 살을 못빼지.... 하는 식으로 실패의 원인을 구구절절하게 하지만 근시안적으로만 제시한다. 그만큼 패자에 대한 편견들을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확인하게 될 이십대들의 일상은 바로 이런 편견이 내재된 결과이다. 이는 가난한 것도 우울한 것도 다 자기잘못인데 왜 그걸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냐는 식의 반문과도 직결된다.
패자에 대한 편견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클수록 비교적 안전한 '기존의 길'에 대한 선호 역시 커진다. 더 나아가선 그 길만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다른 길을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된다. 그리하여 '몇가지 길만이 당연한 길이 되고 그 외의길을 걷는다는 건 다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만다. 이런 생각이 ㄱ'그 외의 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만들어내는 건 시간문제다. 다름에 대한 거부감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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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질서'에 어긋난 일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때로 강의시간에 이십대들이 사회적약자에 대한 연대의식이 부족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 '정치적으로 편향된 수업을 한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도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모든 것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 ' 열심히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등의 논의를 비판해본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했다. 그래서 경쟁 시장질서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조금이라도 비판하게 되면 일반적인 논쟁에서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마치 금기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p98
사실 대학서열화문제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의 잣대를 학습역량(수능점수0만으로 줄을 세워 판단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을 판단하는 데 학습 역량은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다른 역량들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수능점수처럼 단번에 드러나거나 쉽게 확인되기 어렵다는 특징을 갖고 있을 뿐이다.
과거의 이십대들은 이러한 편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래서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흔들면서 사회 전체적으로는 어떤 균형을 맞춰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십대들은 과거의 이십대들이 삼십대가 넘어가면서 천천히 형성하던 생각들을 어차피 사회에 진출할것 이상 빨리 알아두면 좋은 가르침 정도로 자주 접하게 된다. 사회적 선행학습이랄까. 자기 계발서는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자기 계발서의 상당수가 성공한 직장인들의 입을 통해 미리알아두면 좋을 사회상식 달리 말하면 사회적 고정관념들을 전달하기에 바쁘다. 사회는 어쩔 수 없다. 사회는 무지막지하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성새대의 오래묵은 편견은 그대로 전승되고 고착된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하자면
예전 대학졸업무렵 그간 연락이 없던 고등학교때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때 난 서울의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그 친구는 지방국립대를 다녔었다.
그땐 '지잡대"라는 개념이 없었고 나름 공부 잘하던 여학생은 아주 성적이 좋지 않은 이상 지방국립대로 몰리던 시절이기도 했다. 꼭 여학생만이 아니고 대부분이 연고대 이상 안될바에는 학비도 싼 지방 국립대로 가는 거였다.
그 친구도 아마 그렇게 부산대를 갔고 나름 공부를 잘 한 모양이었다.
그친구가 연락이 온 이유는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우리학교로 오고싶다는 거였다. 그래서 교수들이나 시험에 대한 정보를 부탁한다는 거였었다.
그때 난 진학은 안하고 취직을 하기로 결정했고 거의 취직이 되어가고 있던 입장이었다.
친한 친구들이 많이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기때문에 정보를 알아보는건 어렵지 않았지만 조금 귀찮기도 했다. 고등학교때는 친했지만 대학오면서 거의 연락이 없던 친구였기에 어색하고 귀찮았다.
그래서 대충 얘기했었는데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사실 우리전공이 우리학교가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나름 대학레벨이 있는 거일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친구는 자기가 대학 4년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리고 그곳 교수들에게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를 늘어놓았고 그래도 대학원은 큰 물에서 놀고 싶어서 우리학교로 진학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왠만하면 자기 실력으로 붙겠지만 그래도 조금의 정보가 필요하다고 했던거 같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잘났으면 혼자 알아보면 되지. 아니 그 대학에 남아서 계속 공부해서 박사까지 하고 자리를 잡던지....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그 친구는 떨어졌다. 그 다음학기에 다시 도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우리 학교에는 오지 않았던 거 같다.
그 당시 함께 대학원 시험을 봐야헸던 과친구를 통해 그 고등학교 동창 이야기를 들었다.
부산대 나와서 너무 잘난체 하더라
여기를 무시하면서 왜 오려고 하는 건지..
지방대에서 여기오기가 쉬운줄 아나.. 떨어지는 건 당연하지
우리가 들어갈 티오도 부족한데 타교생 그것도 지방에서 온 학생을 어떻게 받아주나...
그냥 들었다
한편으로 그래도 친구인데 여기 서울내기들이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하는 반발심도 없진 않았지만 나도 내 과친구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여길......
그때도 지잡대 라는 명사화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차별은 존재했다.
그건 차이가 아니었고 차별이었을 것이다.
나의 우월감도 차별이었고 기를 쓰고 자기를 피알하던 그 동창도 차별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그 친구가 생각났다.
억척스럽던 친구이니 뭐가 되도 되어 하고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미안하다.. 도움도 못되고 나도 나쁜 마음만 가지고 있어서...
내가 읽는 자기게발서가 진정한 자기계발서가 되는 순간은 나도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뭐라도 되어있는 순간에 완성된다.
그렇지 않고 그저 그 책에서 씌여진대로 뭐든 열심히 준비하고 자기를 개발하는 과정속에서는 그 책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연훼손이고 종이낭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 자기계발서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지 못한 자기를 탓하고 자기 노력을 탓하고 책은 점점 신격화된다. 언젠가 완성될 나의 성공을 위해 그 책이 말하는 대로 우리는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게 아닌게 아닐까 하는 불손한 생각은 급하게 머리속에서 지워야한다.
누군가가 노력했구나 정말 열심히 해냈구나 하고 인정하는 지점은 결국 그 사람의 결과물이다.
특목고를 가고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정규직이 되고 좋은 아파트를 가지고 높은 연봉을 받고 수치로 내밀 수 있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 순간 그 사람은 정말 노력한 사람이 되고 어려움을 이겨낸 인간승리자가 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들이 단지 이십대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그들에게 스며들었던 것이고 이젠 두렵게도 십대들고 그 현실을 냉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결과를 쥘 수 없다면 차라리 노력도 하지 않겠다는 더 무시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측면에서 이십대는 보편적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해자 역할응ㄹ 할 때 이들은 마치 정의의 이름으로 학살을 서슴치 않았던 십자군 원정대처럼 동년배들의 어떤 집단을 멸시한다(그러니까 자신보다 수능점수가 낮은 학교) 그래서 논랄 정도의 비논리적인 하지만 확신에 찬 학력차별을 과거에 비해 휠씬 노골적인 수위에서 공격적으로 전개하는 이들이 바로 오늘날 이십대들이다. ...................
이들은 동년배의 공격성이 가차없다는 걸 알기에 일단 자신이 멸시적 대상이 될 가능성을 먼저 차단하는데 익숙하다. 수능 시험을 망쳤다는 자기방어는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십자군 원정대가 칼을 들고 돌진하고 있으면 일단 피하는 것이 상책 아니겠는가 그게 정당한지 아닌지는 나중에 따질 문제다. 살아남기 위해 냉혹해져야 하는 현실 그 슬픈 현실을 모르진 않지만 이렇게 초라하고 치졸하게 변한 청춘이라니.. 무엇보다 더 슬픈건 이들이 바로 스무살 청춘이란 점이다. p 127
책에서 저자와 대학생의 대화가 나온다. 그때 대학생들이 자기보다 서열이 낮은 대학에 대해 갗는 여러가지 편견들이 있다. 사소한 행동들 대화들 그 모든것이 대학생이 보기에 수준이 낮고 도덕성이 떨어지고 결국 그 모든 것은 서열이 낮은 대학에 다닐 수 밖에 없는 수능점수가 낮았던 조금 떨어지는 사람들의 특징처럼 표현한다. 이 모든 것이 자기가 가진 편견과 차별이라는 필터로 보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로...
이 역시 이십대의 문제는 아니다.
나역시 그렇다.
자녀들 학원에 본낼때 그 학원 선생의 학력을 알아본다. 어느 대학 이상은 되어야 하고 어느 대학 이하는 어느정도 금액이상은 줄 수 없고...
어떤 학교가 명문인 이유는 그 학교 교사들이 다들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이라는 것
외고를 다니고 좋은 대학을 다니는 학생은 다시 보이고 좀 더 과장하면 뒤에서 후광도 보인다는 우스개소리들
기왕이면 좋은 학교 나온 부모의 자녀랑 우리아이가 친하면 좋겠다는 허영심 그래서 교묘하게 물어보는 출신학교에 대한 질문 들들들...
어른들도 기성새대로 그들과 다르지 않게 그런 필터를 끼고 세상을 보고 서열화 한다.
일등부터 이백등까지.. 그리고 그이하는 정말 기타등등...
다만 저자는 모든 편견과 차별로 힘든 상황에 있고 불안한미래를 가진 그들이 함께 연대하지 않고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통용하고 더 확대 재셍산해낸다는 걸 경악하고 우려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사회가 모두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규정짓는데..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도태되는 현실이 바로 코앞인데 그들만 정의롭고 연대하고 함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 악착같이 매달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어쨌든 '저 친구보다 내가 더 나은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자기 개발서가 강죠하는 바로 그것!!) 사회에서 이들은 타인과 작은 구별점 하나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상대를 깍아 내리려는 강한 동기는 여기에서 나온다. p148
사회적 차별이 강한 나라일수록 명품에 대한 집착이 과도하게 나타난다. 값비싼 명품가방을 들고 다니면 최소한 경제적 부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오는 무시는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편에 맞지 않아도 과도한 소비를 통해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문화가 생겨나게 된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그대로 보여줄 경우 온갖 편견에 가득 찬 시선이 날아올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야구 잠바를 입지 못하는 저 친구들도 자신들의 학교 이름을 대놓고 드러냈을 때 어떤 취급을 받을 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 충청도 소재 대학의 학생들이 자신보다 수능 배치표에서 낮은 대학의 학생들을 향해 '우리 함께 이 더러운 학력주의의 세상을 이겨내자"고 손을 내밀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학력위계주의의 구조는 구성원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유지되지도 확대 재생산 되지도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멸시했다고 멸시를 받지 않으리란 법도 없듯이 자신이 멸시를 당했다고 누군가를 멸시하지 않을 이유도 또 없다. p 164
초등교실에서의 왕따는 조금 촌스럽게 드러난다., 누군가가 눈에 띄고 재수없고 잘난척하면 왕따 대상이 된다고 한다. 튀지말고 가능한한 묻혀서 지내라... 고 부모들은 말한다.
한번 왕따를 당한 친구가 다시 학년이 바뀌고 입장이 바뀌어 왕따를 시킬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은 중학교까지 지속된다. 가장 이드가 활발한 시기라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순수해서 잔인한 초등시절과는 또다른 양상을 띈다.
알면서 모른 척 할 수도 있고 자존심을 죽이고 살기도 하며 견딘다.
그리고 고등시절은 앞에 닥친 수험생활로 조금 잠잠해지기도 한다고 한다. 성적의 압박이 더 크기도 하고 이젠 조금 유치해지기도 하고..
그리고 대학을 가면 이젠 촘촘하게 줄지어진 서열로 왕따가 생기는지 몰랐다.
어쨌든 같은 캠퍼스면 다 같은 입장이 아닌가 하고 순진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촘촘한 배열은 단시 수능철 입시철에만 반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평생을 따라다니는 주홍글씨가 된다는 걸 지금 알았다.
학창시절 왕따는 누군가에게 하소연 하거나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선과 악이 구분된다는 점에서 참 순진한 거였다.
사회가 묵인하고 모두가 알고 있는 계급에서 학벌이 주는 의미는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고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것이라는 나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눈길말고는 내가 얻을 것이 없다.
그냥 묵묵히 그 순서를 지키고 절대 추월하지도 않는 복종만이 남아있는 셈이다.
............우리가 흔히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당부분 자기 것이 아닌 요소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개인의 능력과 의지는 그 사람 개인의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샌델이 말하듯 결코 그렇지 않다. 첫째로 태어난 것이 성공에 큰 영향을 주는가 하면 더 좋은 집안에 태어나거나 좋은 집안에 태어나는 것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아버지를 잘 만난 것은 죄가 아니다. 다만 그 덕에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능력주의만 강조하면 그 덕이 없었던 사람은 도데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p 211
지금 기말고사기간이다. 아이에게 시험공부 열심히 하라고 닥달한다.
이제 중학생이고 곧 고등학생이되는데도 아무 생각도 없어보이는 아이가 불안하다. 남들처럼 친구 아들 딸처럼 자기가 특목고를 외고를 가고 싶어하는 욕심도 없고 그냥 일반고로 가겠다고 하고 하고 싶은 공부도 모르겠고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지 알 수 없다고 우는 아이를 보면 안쓰럽기보다는 답답했다. 그러다 세월호가 터졌고 그저 살아있고 건강한게 감사해서 며칠을 두고 보다가 다시 시험을 앞두고 말은 못하고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 중이다.
작은 아이가 어버이날 편지를 줬다.. 이런저런 글귀끝에 한마디가 있었다.
"절대 엄마 아빠보다 먼저 죽어 슬프게 하지 않을게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 아이에게 우리가 무얼 해야하는지 .. 막막하다.
살아있는것이 행복이게는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죽지 못해 살아가고 경쟁으로 말라가고 어쨌든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아 앞날을 막히는 일따위는 없어야 하지 않은가.
못해도 되고 다시 해도 되고 조금 적게 벌고 먹고 살아도 내가 좋을 수 있는 세상은 과연 오기는 할까
세상이 엉망이고 그래서 젊은이들에 힘들다고는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모순되고 부끄러운 생각들이 그들에게도 깊이 스며 있을지는 몰랐다.
나중에 우리 아이도 패배감에 젖어 살지 모른다.
지금 내겐 아이에게 물려준 금전적인 자산도 없고 휼륭한 정신정 모토도 없다.
그저 이 세상에서 엄마나 아빠보다 조금은 더 현명하기를 대책없이 바랄 뿐이다.
책을 덮고 막막하고 눈물이 난다. (이건 절대 음주후에 오는 습관때문은 아니다)
몇년후 내 아이가 느끼고 겪게될 패배감이 이 책에 고스란히 있다.
세상이 좋아져서
내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이 모두 내가 덜 노력했고 내 책임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엉덩이 툭툭 털고 일어나 또 해보지 뭐.... 하는 그런 세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