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학자를 붙인다는 건 굉장히 어마어마한 일이예요 어떤 건 아직 '학'자를 안붙이잖아요. '술'일 수도 있는 거고 영어에서도 '-ology'  '-tics'등 다양하게 구분하죠. 제 전공인 문화학같은 경우도 '문화학'이 아닌 ' 문화연구' 라고 하거든요. 'culturral studies' 라고, '학'자를 붙인다는 것은 어마아마한 일이예요  체계를 만들어가야하는 일이죠. 그런데 이모든 걸 다규격화해내는 거 같아요. 공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삶의 영역에서 배워야 하는 것들까지 게속해서 식민화하고 규격화하는 데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생각해봤을 때 구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첫번째는 시장의 창출이예요. 이 시장은 어마어마하게 만들어지거든요.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걸로 해서 교수직 만들어지고 학생들 등록금을 내고 하는게 엄청난 시장이죠. 또 하나는 한국과 같은 경우가  "이 분야가 먹고 살 만한 곳이다' 그러다 보면 공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경쟁이 심한 사회이다 보니까 그렇겠지요. 그리고 그러자면 평가가 표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표준화된 평가는 곧 자격증을 의미하죠. 그리고 자격증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시험이 있다는 것인데 시험이란 능력의 위계를 상정하는 것이죠. 결국 그렇게 되어야만 공정하다고 생각하면서 능력과 자격을 동치시키는 것이 한국에서는 굉장히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배움이 출현해야 할 곳에서 다양한 배움이 출현하지 못하고 다양한 영역을 획일적인 배움으로 식민화 한 상태가 된거죠.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최악의 상태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다양성조차도 힉일화해버리는 거죠

또하나 픽업아티스트같은 직업이 만들어지는 게 사람들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것도 있지만 더 무시무시한 것은 이걸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그러니까 학원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요즘 교육쪽에서 강의하는 주제중의 하나가 아까 말씀드린 거처럼  ' 배울 수는 있되 가르칠 수 없는 게 있다'예요 사람들이 교육에 대해서 괸ㅇ장히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가르치면 배운다'예요 그런데 어떤 건 가르칠 수 있지만 어떤 건 가르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건 가르칠 수 없는대 배우는 것이 있다 그것을 파가름하는게 저는 교육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최근에 강의한 주제가 가르칠 수 없는 것 그러나 배울 수 있는 것이예요. 인성 교육 비판하면서 제가 하는 얘기인데요 "효자가 되라" 이걸 어떻게 가르쳐요? 효자는 자기가 살면서 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배우는 거거든요. 학교라고 하는 건 여기 와서 배우는 것도 있지만 우리가 가르치겠다 가르칠 수 있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고 가르칠 수 있으니까 거기에 체계를 만들어서 학문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 정점에 대학이 있는거죠. 원래 가르칠 수 없는 것들 이성을 사귀는 법 남들에게 사랑바든 법 상사와의 관계 이런건 가르칠 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건 부딪히면서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건데 이걸 지금 다 가르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놨죠.

 

 

 

그런 맥락에서 보면 삶이라는 것이 굉장히 허약해지고 빈약해지고 있는 것이죠 공부는 삶의 보조이고 살아가기위해서 공부하는 것인데 지금은 거의 공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되었어요.  삶의 영역에서는 배움이 일어나지 않고 있고 배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배움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되고 배움이 일어나더라도 계속 불안해지게 되는 거예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학원 가서 깔끔하고 매끄럽게 배우는 게 속 편하겠다는 생각응ㄹ 하게끔 되는 것 같아요. 공부 중독인데 공부가 없어요. 그리고 결국 삶이 사라지는 거죠.

 

공부중독의 비극적 역설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데 공부와 삶을 분리 시키고 공부에 올인하다 보니 삶이 더욱더 빈약하고 허약해지고 있다는 것 그 빈약함과 허약함을 채우기 위해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을 또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면서 삶은 공부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고요

이 과정에서 공부가 교육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널벡 보면 삶은 그 자체가 공부의 과정 배움의 과정이잖아요. 인간은 살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늘 배울 수 밖에 없죠. 그걸 우리가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반면 교육은 그것을 단계적으로 구분되어 제도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죠  가르치지 않으면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예요 그러나 공부 전체가 교육이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가르칠 수 없는 것도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거든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하는 공부 중독이란 사실은 교육 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바닥에는 삶의 위기에 대한 초조함이 크게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간이라도 가려면 막차라도 타야하고 그 막차를 타는 유일한 방법이 교육 자본을 축적하는 공부라고 생각하다 보니 이 상황이 더욱더 악화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어찌되었건 교육자본이 신분을 상승시키고  삶을 안정시키는 첩경이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이 신화에서 벗어나야 할 때 벗어나기는 커녕 더욱더 강화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고 그러다 보니 삶이 더욱더 빠른 속도로 망가지고 있고요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걸까요? 공부는 성장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능력이 신장되는 것이건 인격이 성숙하는 것이건 또는 시민으로서 성장하는 것이건 공부는 성장을 하기위해 하는 것이죠.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의 공부는 성장과 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어요 성장과 아무 상관없는 공부를 공부라고 하고 있고 그걸 청소년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학생들이 "이걸 공부한다고 제가 뭔가가 될 수 있나요?" 라고 하는 말을 단지 실용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이 말을 직업을 구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데 혹은 살아가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지를 묻는 것을 휠씬 넘어서는 적극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걸 공부하느 것이 자신을 무엇으로 성장시키는가 에 대한 질문이죠.

이 문제에 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가 사람의 성장에 대해  성공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답도 줄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공부를 통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공부를 해야한다는 당위에 대해 수긍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이들을 붙들어 놓고 지금'공부'를 시키는 것은 정말 무의미한데도  그저 맹목적으로 공부를 시키고만 있어요. 공부를 하는 자가 아니라 공부를 시키는 자가 공부말고는 시킬 숭 ㅣㅆ는 게 없다보니 그저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시키는 자의 '공부중독'이예요

삶이 성장의 과정이라면 공부는 성장하는 삶을 위한 도구여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공부는 삶을 식민화하는 도구일 뿐이예요. 이런 공부를 그만두자는 것입니다, 대신 공부의 자리를 원래대로 돌려 놓아야 되요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혜처나가는 삶의 지례 기술을 익히는 과정으로서의 공부 말이예요. 청소년들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어른들도 잘 모르고 있어요. 무능력하기는 어른들도 매한가지입니다, 공부라는 맥락에서 보면 어른과 청소년 모두가 처한 동시대서이죠.

바로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소년을 우리와 더불어 당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동시대인으로서 이 난국의 시대를 헤쳐갈 삶의 기술을 배우는 성장의 도구로서의 공부를 해나갈 수 있을 거예요.

이것은 청소년들이게 필요한 만큼이나 어른들에게도 어른읃ㄹ만큼이나 아이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청소년들을 문제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부와 관련한 우리 모두를 문제화해야합니다,

 

 

왜 공부를 해야하나.. 하는 질문에 현명한 대답이라고 하는 것이 떠돈 적이 있다,

내가 지금 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다는 명확한 꿈이 있는게 아닐지라도

나중에 내가 무엇이 되고 섶거나 무엇을 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올때

그때 지금 하지 않은 공부가 내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나는 지금 공부를 한다

아니 공부를 해야한다는 ,....

 

꿈이 없다고 무얼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아이에게 나도 보여준 적이 있고

이 말을 들은 적이 었는 작은 아이가 그래서 공부를 해야하지 않을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공부다,

무엇이 되기 위한 준비 언젠가 이룰 무언가를 위해 지금 이순간 내가 만능감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해야한다,

'공부하고 있다'는 말은 누구나 수긍을 할 수 있다,'

노력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지금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당위성을 준다, 그렇게 공부를 하지만 정작 타석에 들어서서 헛방망이를 휘두르거나 공을 맞추는 일은 두렵다, 공부하는 순간도 불안하지만 공부를 마치는 그 시점이 돌아온다는 것도 두렵다,

그렇게 모두가 실패일 줄 알면서 이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걸 알면서 그 패턴에서 내려올 수 없고 계속 맴돈다,

헛짓도 함꼐하면 마음이 놓이는 법이다,

나만 헛지랄을 하는게 아니라는 게 큰 위안이 되고 그 지랄이 언젠가 성공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한다,

미안해 공부를 못해서...

공부를 못해서 분하고 화가 난다는 게 아니라 부모에게 미안한 일이 되어버린다,

당연히 공부를 해야하고 하는 이상 잘 해야하는데 못한다는 것

그건 죄송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달리기를 꼴지 했다고 노래를 못한다고 눈물을 흘리며 부그러워히지 않는다,

심지어 길거리에 슬쩍 쓰레기를 버렸다거나 새치기를 했다거나 어른에게 못본 척 인사를 안했다고 울며 고백하는 일은 없다,

공부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이 패턴을 버려야하는데

사실 그 대안은 두렵다,

끝없이 달리는 열차에서 단백질 스틱을 먹으며 견디는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달리는 열차에서 내리는 일은 더 두려운 것처럼

공부는 괴물이 되었고...

대안은 모두가 알면서 아무도 하지 않는다,

 

책은 모든 문제점이 파해쳐지고 분석되어 있지만 대안을 주지 않는다

아마 대안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안이란게 어떤 선동적 구호가 될 수는 있지만 정말 바라는 답은 아닐테니

이게 아니라고 하면서 여전히 누군가가 답을 주기 바라는 것

그것역시 공부 중독이다,

나 역시 지금의 만능감에 만족하면서 지금 잘 하고 있는 줄 착각하는 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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