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그리는 무늬 - 욕망하는 인문적 통찰의 힘
최진석 지음 / 소나무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첫번째 인문의 숲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는 나누었나요?

인문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다 그런데 그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걸 제대로 볼 수 있으려면 자아가 준비되어있어야 한다, 자아의 준비는 뭐냐? 자기를 지배하고 있던 이념이나 신념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 것들으르 부정하고 제거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것들로부터 자기가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듯이다, 반대로 그것들을 지배하고 희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로 존재할 수 있다, ,... 뭐 그런 이야기들... 

여러분에게 몇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자유로워졌습니까?

여르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행복해졌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유연해졌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관용적인 사람이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가족이나 이웃들과 더 잘 지내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눈매가 더 그윽해졌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생기발랄해 졌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상상력과 창의력도 더 늘어났습니까?

 

                                         p 94

 

 

 

더 많이 알고 더 똑똑해졌음에도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어서 책을 계속 읽어갈 수밖에 없었다,  인문학이 대두로 떠오르는 지금도 그 인문학이 과연 인문학 자체로서의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인지 또하나의 스펙으로, 경쟁에서 살아남기위해 갖추어야할  조건으로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책장을 다시 넘긴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인류 역사상 '버릇있는 요즘 애들'이 존재했던 적이 있을까요?

언제나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었던  것 같지 않아요? 제가 생각하건대 인류 역사상 버릇 있는 요즘 애들은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요즘 애들이 버릇이 없다고 비판하는 바로 그 사람도 사실은 얼마전 까지만 해도 버릇없는 요즘 애들 가운데 한 명이었을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사실 인류 역사는 버릇없는 요즘 애들이 버릇있는 어른으로 변해가는 과정입니다,

버릇이라는 게 뭡니까? 아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딱 태어나서 보니까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닌데 세상에는 버릇이라는 것이 이미 있는 거예요 버릇은 단독자로서의 나들이 집단으로서의 우리가 되도록 만들어진 장치가 아니겠습니까? 자기하고 잘 맞지 않을 것임이 더 분명하고 또 이미 정해져 있는 버릇이라는 것을 집단이라는 우리에 갇히기 이전의 아이가 어찌 편안히 감당할 수 있겠어요? 당연히 그들과 잘 맞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아이가 버릇이 없다는 것은 그 아이가 아직 우리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아직 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버릇이 없다는 말은 어른들끼리 만들어 놓은 어떤 틀안에 그 아이들이 아직 들어가지 않았다는 애깁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이들에게 버릇이 없는 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아이들의 작업입니다,

(중략)

여기서 또 한가지 어른들이 어른의 단계가 인간으로서의 이상적인 단계 내지는 바람직한 단계라고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해요. 어린이들을 아직 어른이 아닌 단계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린이를 미성숙한 상태롤 본다는 것은 어른의 단계를 성숙한 단계로 전제하고 그 시각으로 어린이들을 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러면 어린이는 어린이로서의 삶 어린이로서의 세게를 한 번도 살 수가 없습니다, 항상 아직 미성숙한 어른으로서만 대접받는 것이지요 어린이를 어린이의 세계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요즘 애들에게 버릇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목적론적 폭력일 뿐입니다, 이미 있는 버릇에 굳어 있는 어른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요즘 애들은 항상 버릇없이 보일 수 밖에 없지요 요즘 애들을 버릇 없다고 비판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딱딱하게 굳은 버룻의 체게가 견고하게 내재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요즘 애들 참 버릇이 없다'고 말 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럼 한 번 반성해 보셔야 합니다

'아 내가 많이 굳어 있구나 '라고 말입니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

'이렇게 살아오다 보니 딱 보면 알게 되는 게 있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아온 경험과 시간으로 그런걸 보는 촉이랄까  뚫어 보는 시선이 생겼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다,

내가 촉이 좋고 감이 좋고 보는 눈이 있다는 말은 물론 그렇게 보는 혜안이 있다는 아주 극소수의 경지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나는 이미 살만큼 살아온 시간만큼의 틀을 가졌다는 말이라는 것

내가 살고 경험하며 익숙하게 굳어진 틀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틀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세상에는 관용이나 상식이라고 말하는 세상의 틀도 있다,

그러나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늘 생각해야한다,

내가 보고 있는 이 대상의 뒷면도 존재한다,

내가 다시 뒤로 돌아가서 그 이면을 볼 수  없다면 무언가 내가 모르는 부분도 있는 거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야 한다,

버릇도 그렇다, 내가 생각하고 주입받은 버릇이라는 것 그건 이 세상 이치의 혹은 사람들의 개성의 극히 일부라는 것,

 

엄마 품속에 있으면서도 나뭇잎 배를 생각하는 나이 이때가 아마 일곱살 정도인 것 같아요. 자기만의 그리움. 자기만의 생각으로 점점 자기가 확대되는 거지요 그래서 버릇이 없다는 것은 아마 자기만의 생각을 갖기 시작하는 것과 상관이 있을 것입니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사실 버릇없어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익숙한 것 당연한 것 정해진 것들에 한번 고개를 쳐들어 보는 일이예요 왜? 익수갛게 하는 것 편안하게 하는 것들은 자기가 아니기 대문이예요 그럼 무엇이냐? 관습이거나 이념이거나 가치관이거나 뭐 그런 것들이죠

인문학의 기본 출발은 '생각이예요 인문학은 출발부터 생각과 함께합니다, 철학의 출발 자체가 믿음의 체게인 신화로부터 벗어나면서 시작되지 않았나요? 철학 즉 인문적 사조가 시작되기 전인 신화의 시대에 인간이 하는 일은 뭡니까? 바로 믿는 일이에요 이 믿음을 거부하고 믿음의 대상에 고개를 쳐들고 인간의 길을 가겟다고 하고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 이때가 바로 철학의 시작입니다, 바로 인문학의 시작입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뭐라 할 수 없지만 가장 짜증나는 일은 끊임없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일이나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꾸 튀어나가거나 몸은 여기에 있는데 생각은 저기에 있는 아이를 대하는 것이다,

엄마 품에서도 낮에 놀던 나뭇잎배를 생각하고 걱정하고 사랑하는 그 딴 데로 가 버린 마음을 돌리는 일 그리고 나는 생각지도 않았고 그냥 받아들이는 일들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해대는 일 그건 고역이었다,

그런데 그 때 아이는 인문학적 사고를 하는 중이었구나

나는 참 딱딱한 사람이었구나

내가 처음부터 이랫나 스스로 우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명사가 딱딱합니까? 동사가 딱딱합니까?

명사가 딱딱하겠죠 모든 개념은 딱딱해요. 개념으로 무장한 사람은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가요. 우리의 이념 지식 신념들은 다  무엇이냐? 개념의 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이념을 가지고 부드러운 동사적 세계를 제어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동사적 세계가 얼마나 힘들어요 임들 뿐 만 아니라 사실은 가능하지도 않아요.

우리가 인문적 통찰을 한다는 것은 뭡니까?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있는 상태를 부드러운 상태로 볼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명사적으로 세계를 보는 습관을 동사화하는 거지요. 점점 굳어져가면서 명사화 되어 가는 자신을 율동감이 있는 동사로 되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바로 예술이 필요한 겁니다, 에술은 명사적으로 굳어진 나를 동사화하도록 자극시켜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단계를 미학적 삶이랄지 예술적 경지랄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문적 통찰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이 바로 여기예요.

여러분 이념따위는 잘근잘근 씹은 다음에 과감히 뱉어버리세요. 이념 같은 딱딱한 명사들이 목울대에 걸려 있는 한 말캉한 동사들이 입을 통해 나오기 어렵습니다, 몸속에 들끓는 욕망의 꿈틀거림이 이념과 개념의 핉터에 막혀 터져 나오지 못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이념 따위의 명사들은 몸밖으로 뱉어머리세요 핏발서린 이념의 눈빛은 얼마나 촌스러운지요

(중략)

우리가 개념을 이해하는 일을 뭐한다고 하죠? 파악한다고 하지요. 파악, 즉 손으로 잡아 꽉 쥐는 거지요. 동양의 개념도 영어의 곤셉트도 독일어의 베그리프도 모두 다 이 세게를 자기가 잡고 싶은 만큼 잡을 수 있는 만큼 잡아서 손으 남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싶은 만큼 가질 수 있는 만큼 잡고 빠져나가는 것은 포기하고 손에 남겨진 것을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 것 이것이 바로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개념은 출발부터 세계를 전면적으로 반영하기에 부족한 것이고 출발 부터 소유적 상태이고 출발부터 제한된 상태이고 출발부터 딱딱한 거예요  P 121-122

 

 

수학의 공식을 암기해서 문제를 풀고 여러 이론들의 한두마디로 정의 할 수 있고 그것을 외우고

사상가와 사상을 딱딱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은 시험에는 유리하다,

개념정리 개념파악 개념 이해 등등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그 개념이라는 것이 머리속에 자리잡지 않으면 어떤 것도 머리속에 남지 않고 들어오면서 동시에 나가고 있었다,

어떤 틀을 일단 만들어 넣고 그 속에 모든 과정을 우겨넣어 그에 맞게 외울 것과 잊어도 될 것들을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며  배운 삶은 12년이다, 그래서 개념이 일단 정리되지 않으면 불안하다

개념을 익혀야 응용문제를 풀 수 있고 모든 문제풀이가 끝나면 요약된 개념을 외워야 하는 삶

물론 개념은 중요하다,

가끔 딱딱한 명사의 세계가 명확하고 정리해 줄 때도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그 다음은 말랑하고 헝클어진 동사가 필요하다

우리의 삶은 결국 움직임들이 모인것이고 움직이는 것들은 동사니까,

그런데 딱 정리되고 요약된 개념은 늘 유혹적이다, 왠지 있어보이니까

 

지식은 무엇을 이해하는 데 머물러 있는 것이 되어선 안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식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까지여야 합니다, 아는 것을 근거로 하여 우리에게 아직 열려져 있지 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식은 우리에게 뿌리로 기능하지 않고 날개로 기능할 것입니다,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날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지식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계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세게에 실제하는 것은 사건입니다, 이론은 사건이 남긴 똥이라고 했지요? 그럼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가 똥이라고 자극적으로 표현하였던 이론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사건과 이론 사이에 작동하는 유기적 관게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중략)

 

어떤 지식도 예측 할 수 있는 힘을 주지 않는 것이면 다 가짜예요. 어떤 지식인도 예측할 능력없다면 그가 가진 지식은 모두 허구입니다, 에측한다면 응용할 수 있어요. 적용할 수 있지요. 지식에 정통하는 이유가 응용할 수 있는 데 있지 않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공자님도 <논어> 의 <자로>편에서 <시경>에 나오는 시 삼백수를 모두 외웠다고 하지만 그에게 조그만 정치적 사안을 맡겨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도 혼자 응대할 수 없다면 아무리 시를 많이 외웠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일갈하신 거지요. 응용의 범위안에서라야 행복 성숙 인격의 함양등등도 합께합니다, 그렇다면 왜 에측을 할 수 없는가? 그 까닭은 단순합니다, 에측할 힘이 없으니까요 그럼 왜 힘이 없는가? 개념과 지식과 이념의 노예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P 148

 

 

덕을 갖춘 이 마음은 아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원래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마음이라고 하기에는 의미가 훨씬더 복잡합니다, 그것은 단ㄴ순한 심리상태가 아니라 거기서 자신을 표출하고 성장시키는 모든 힘이 나오는 어떤 내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덕은 나중에 만들어진 욕망이나 지식 혹은 믿음 첵게등이 닿기전의 원래 상태를 말합니다, 즉 어떤 사특한 마음도 침범하지 않고 오직 인간으로밖에 없는 마음 순수한 마음의 상태 그러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명이전의 마음 언어 이전읨 ㅏ음 가ㅣ 이전의 마음이지요.

  P171

 

 

노자도 이 비슷한 말을 해요. 노자는 ' 함덕후 비어적자' 곧 두터운 덕을 가지고 있는 상태는 어린애와 같다라고 했어요. 어떤 의지나 이념이나 신념이나 가치관이 아직 틀로 형성되기 전에 인간이 간직하고 잇는 순수한 마음의 상태 그것을 노자는 덕이라고 했어요. 바로 지식과 이념의 지배를 받기 이전에 오로지 나로만 존재할 때의 본래적인 상태인 것이지요.

 

 

저는 왜 지금 '덕'의 문제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장황하게 애기할까요? 그곳은 앞에서도 줄곧 이야기했듯이 독립적 주체가 되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제 이야기의 일관된 주제이기도 합니다, 독립적 주체라야 다시 말해 이념이나 지식에 제한되거나 매몰되지 않은 자기의 맨 얼굴로 우뚝 선 자라야 이 세계의  움직임을 그 움직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게를 보고 싶은 대로 혹은 봐야하는대로 보지 않고 보이는대로 볼 수 있기 대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적 통찰의 한 모습입니다, 덕은 바로 화장기를 거두고 남은 한 인간의 '맨얼굴'입니다, 한 사람의 삶의 격발 지점입니다, 모든 통찰과 결정이 매듭을 짓는 곳입니다, 인격적으로 성숙이 무르익는 장소입니다, 미학적 비약이 숨을 고르는 곳입니다, 덕의 작동으로 한 인간은 비로소 카리스마를 갖게 됩니다, 자기가 비로소 자기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덕의 회복은 주체가 독립성을 횝고하는 일입니다,

 

 

사실 덕은 이성보다는 욕망쪽에 더 가까워요. 일반적으로 욕망이라고 하면 부정되고 제어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욕망을 느낄 때만 자기가 온전히 자기예요. 여러명이 같이 있을 때 우리가 즉 집단이 욕망을 느낍니까? 욕망은 누가 느끼나요? 내가 느끼는 겁니다, 욕망은 철저하게 개별적이고 사적인 것입니다, 집단을 지배하는 힘은 이성이고 체계예요. 그러니까 집단으로 있을 때 자기가 집단속에서 용해되어 있을 때는 매우 이성적이예요. (중략)

제가 어려분에게 덕을 강조해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성이 지배하는 집단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기를 구해내라는 겁니다, 집단속에 용해되어  흔적이 없이 사라지고 있는 고유한 자기로서의 자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입니다, 우리에 갇힌 나를 살려내라는 것입니다, 덕 그리고 욕망은 한 식구 입니다,

 

설마 여기서 말하는 집단이 집단에 들어가 익명성을 가지게 되면서 몰려다니며 치기어린 행패를 부리는 집단적 충동 행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당연히,,

여기서 집단과 개인을 유의 페르소나와 그림자로 봐도 될까?

사회적인 얼굴 지위와 역할에 맞는 페르소나를 가지는 것 그것은 이성으로 제어해야할 나이고

그 이면에 욕망을 가진 내 본래의 그림자는 그러니까 그것이 덕의 본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봐도 될까?

나 다운것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생각해보는 것

그걸 알기 위해 지식을 갖추고 개념을 알아가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찾는 것

그것이 인문학적인 삶이라고 생각해도 맞나?

뭐 내가 하고 있는 지금 이순간의 내 생각이 결국 나 이고 나 다운 것이라고 우기련다,

 

불안정? 이는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누구도 결함이 있거나 부족하다고 죄인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생명력이 넘치는 자족적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 여기서 자신에 대한 신뢰가 싹틉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력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행복해집니다, 자신에 대한 무한신뢰  자신에 대한 무한 사랑 딺은 인생이 무한으로 팽창하는 첫 출발입니다, 보편적 이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 개별자들이 아웅다웅 살고 있는 일상이 바로 실재하는 터전입니다, 우리의 모든 아름다운 이야기는 옹로지 진짜 존재하는 이 일상의 세계에서만 피어나고 새겨질 수 있습니다, (중략)

그런데 세상은 이런 하찮게 보이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찮은 일들 말고 다른 일들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사람이 감당하고 사는 일이라는 것들이 사실은 마치 이삿짐같은 것들이지요. 아무리 좋은 살림도 이삿짐으로 꾸려서 골목에 내놓으면 초라해 보이기 마련이예요. 이삿짐 같은 구체적인 일상을 무시하지 마세요.우리 삶은 사실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인생이에요 고상함이나 아름다움 혹은 이상적인 일들도 이런 잡다한 일들 사이에 존재합니다, 훌륭하다고  숭앙받던 사람들이 어디에서 무너집니까? 바로 일상에서 무너집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인간은 구체적인 일상을 같이 영위하는 가족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인간 성숙의 척도는 높고 크고 거대한 곳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일상에서 확인되는 것이 더 치명적이죠.

 

 

구체적인 일상의 힘과 가치를 무시하고 거대한 보편적인 이념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구조속에서 쉽게 독재의 틀이 형성됩니다, 왜? 행복을 거대 이념이 책임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이념적으로 정해놓고 그 이념적인 행복을 추구하게 만드니까요. 즉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놓고 백성들을 그 속에 집어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재 아니겠어요?

 

행복은 자기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과 일치합니다, 자기가 사는 공간은ㅇ 일상의 구체적 터전이지요. 이 일상의 터전에서 삶의 역동성이 발휘된다는 것은 덕이 소외되어 있지 않다는 거예요. 이념에 주도권을 넘기지 않은 것이지요. 이념과 신념과 가치관을 그대로 추종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하면서 자기 욕망을 정면으로 대면하지요. 욕망은 우리한테 있습니까? 나한테 잇습니까? 나한테 있지요. 내가 사는 것이 일상인가요 아니면 이념인가요? 일상이지요. 우리가 우리를 지키는 힘이 발휜되는 공간은 사실은 보편적 이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 일상의 세계입니다, 자기가 자기로 존재할 대 자기 눈에 자기의 일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일상이 보이기 시작할 때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고 거기서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는거예요. 결국 진실한 태도로 자기를 만나게 됩니다,

인문적 덕성이 있는 사람은 현실 속에서 문제를 발견합니다, 인문적 덕성이 잇는 사람은 구체적 세계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세계 속으로 두벅뚜벅 걸어들어가지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이념을 사유의 원천으로 삼지 않고 구체적 세계를 사유의 원천으로 삼는 거예요.

 

 

 

일상의 가치를 아는 것

그건 동사의 세계고 움직임의 세계에 가치를 두는 일이다,

먹고 자고 웃고 울고 화내고 기뻐하는 일

집중하고 멍때리고  늘 반복적인 하루하루에 충실한 나는 인문학적 삶을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야 겠다, 암,...

일상의 힘을 나도 믿는다, 하루하루  쌓인 일상을 돌아보면 그것이 내 역사이고 내 이야기들이다.

 

 

인문적 사고를 시작한다고 하거나 철학을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낯설게 할 줄 안다는 말이에요. 낯설게 한 다음에 그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을 발휘하는게 중요하지요.

그 낯섦의 발생이나 집요함의 유지가 모두 주첻의 활동력 즉 덕의 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욕망의 작동이라는 것이지요. 이 관찰의 집요함 속에서 새로 등장한 세게 그것이 바로 자기의 세게입니다, 그것을 글로 써 놓으면 시가 되고 색깔로 표현하면 그림이 되고 소리로 표현하면 노래가 되고 명중한 범주의 틀로 구성하면 철학이 되는 겁니다, 새로운 세게지요 익숙한 세계가 아니예요

 

이것저것 많이 배운 사람이 대답만 할 줄 안다면 이건 바보입니다, 왜 바보일까요?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자기는 언제 존재합니다, 바로 질문 할 때 존재합니다, 질문을 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죠? 일단 문제가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생겨납니까? 호기심이 있어야 합니다, 호기심은 무엇이 만들어냅니까? 이성이 만들어내나요? 아닙니다, 욕망이 만들어 내죠 이 욕망이 무엇입니까?  우리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것입니까?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것이지요. 자기가 욕망의 주체로서 작동할 때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 호기심을 한번 내뱉어 보는 일 이것이 질문이예요. 대답하는 곳에는 자기가 존재하지 않아요. 질문하는 곳에 자기가 존재합니다, 자기가 우리라는 집단 속에 융해되어 있으면 대답만 가능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으로 살아 있을 때 질문은 시작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머리를 굴리고 혀를 놀려서 뱉어내는 말로는 근육에 맻히는 땀으로  배운 것을 절대 당해낼 수 없어요. 책속에는 길이 없어요. 책속에 길이 있다는 말에 속지 마세요. 책속에는 책을 쓴 그 사람이 생각한 길이 있을 뿐이지 나의 길이 아니예요. 다만 앞선 이들이 고뇌한 흔적을 엿보고 힌트를 얻으면 족할 뿐 책속에서 여러분의 진리를 구하지 마세요. 다른 이의 이야기를 내 것인양 받아들이지 마세요.

 

몸을 움직여서 한계를 겅험할 때라야 자기를 극한의 경계선에 서 보게 할 때랴야 자기의 의식속으로 오히려 자기 자신이 성큼 드러납니다, 자기가 자기를 꽉 채우는 이 경험 오로지 자기 자신이 자신으로만 남는 일입니다, 자기를 몸으로 느낄 때가 자신에게는 가장 현실적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역사의 한편에는 지성과 이성 또 한편에는 쾌락과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지성과 이성이 지배하는 곳은 집단이 지배하는 곳이지요. 즉 우리 관념 이념 따위가 지배하는 곳이었어요. 반면 쾌락과 즐거움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잇나요? 집단 또는 우리가 아니라 나에게서 확인됩니다,

이제 미래는 집단속에 용해된 내가 아니라 나의 주도적활동성이 우리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여기에는 논증이나 설득대신 이야기가 개입되어야 해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 이야기를 하는 곳 바로 그때와 그곳에 자기가 존재합니다,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야기를 하는 활동속에는 이야기 하는 사람이 나로 존재하며 다른 나가 끼어들 수 있는 공간을 준배해두기 때문이지요. 이야기 하는 공간속엣어라야 내가 다른 나를 맞이 하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감동이 힘이 있는 것은 이런 이유지요. 그런데 논문에는 혹응ㄴ 주장에는 내가 있는 대신 진리라는 얼굴을 한 보편적인 이념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가 십상입니다, 여기에는 주장하는 사람외에는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거나 참여할 공간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백이 없는 것이지요. 논증이나 주장에서 여백이란 치명적인 결함이지요. 논증이나 주장은 우리것의 태두리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되풀이하건대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입니다, 나는 우리를 이겨내고 내가 되어서 자기만의 꿈 자기만의 행복 자기만의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자신에게 돌아가 자신의 욕망을 집중하는 것

어떤 딱딱한 명사로 우리어진 개념이나 이론 진리 이성 가치관이 아니라

말랑말랑하고 사소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이루이진 이야기를 할 수 잇는 힘

그것에서 인문학은 시작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책으로 강의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살아가는 것 행동하는 것 말하고 쓰면서 표현하는 것

나를 가장 나답게 드러내는 일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삶은 동사이므로 인문학도 동사일 수 밖에 없고

세상 사람의 수만큼 많고 다양한 동사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가끔 소설을 읽는다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겨우 이야기 나부랭이만 읽는냐고 남의 이야기를 왜그리 좋아햐냐고

그러나 뒷담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없는 곳에서 흉을 보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가 읽으라고 들어라고 써놓은 남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 어때서라는 반발을 하지만 입을 표현하진 못했다,

그 이야기에는 가치관이나  이성적 진리나 개념이상의 것들이 있다.

우리가 있고 내가 있고 내 감정이 있고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것이 인문학이고 미래지향적일거라 막연히 믿었던 것이 틀리지 않음을 믿는다,

앞날에 고민이 많아서 잠을 못이루는 내 아이가

이야기를 좋아했어면 하는 생각을 잠시해본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고 만화를 좋아하는 내 아이는 이미 인문학적인 아이라고 엉둥하게 생각을 튀어본다,

인문학이 어떤 추상적 언어로 쓰여진 논문이 아니기에

내 생각이 글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미친년마냥 널뛰는 일을 부끄러워히진 않겠다,

 

내 욕망에 충실하게 내가 느껴지고 이해되는대로 일단 받아들여보기

그리고 내 경험치에서 생각해보기

그리고 나를 조금씩 드러내는 일에 검열관을 두지 않는 것

거기서 인문학은 시작된다고 이해하면 될까?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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