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적인 모욕이 가장 고통스러운 모욕이자 모욕적인 고통이 된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된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낼 수 없는 인간 자신의 고통을 아무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인간은 자신이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은 것처럼 아무 고통도 없는 것처럼 자신을 숨기고서야 비로소 사회에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을 숨겨야 사회에 포괄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유령이 아닌가?
아픔과 이로움의 이면에는 그것을 침묵하는 친구들이 있다. 고통은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것이겠지만 그만큼 그것에 대해 침묵하는 사람들, 그것을 내밀하고 사적인 것으로 만든 세력과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반증한다. 죽음은 침묵을 폭로하는 또는 당사자들에게 그 사실을 인지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것은 자살이다. ......
우리가 잘못 산게 아니었어... p 180
어쩌면 우리가 모두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어서 문제가 잘 보이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뭐 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이긴 해도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예요 성적도 좋았고 수업태도도 좋았으니까요.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그애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선생님들에게도 관심받는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건 사실일것이다. 그래서 친하고 싶어하고 부러워하고 싶어하는 학생들도 있었을 것이고 꽤 괜찬은 아이라고 보는 시선도 잘못된 건 아닐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그렇게 반듯하고 성적이 좋고 태도가 좋은 아이에게 그렇게 악마같은 면도 있다는 걸 왜아무도 모랐을까.. 어쩌면 그렇게 대단한 아이이니까 그런면쯤은 인간적인 면으로 그저 하나 있는 단점정도로 넘어가도 되지 않나하고 여겼던 걸까
모두가 맞다 옳다고 하는 상황에서 아니라고 목소리를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목소리를 내야하는 아이가 존재감도 없고 성적도 별로고 태도도 좋지 않은 아이라면 누구나 쉽게 무시해도 상관없다고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니가 질투하니까.. 너랑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그게 어딘데...
그 애가 그럴 리가 없어.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그 나이때는 다그런거 아니야? 그걸 못참아하는 니가 좀 이상하고 튀는 거야..
사람하나 유령만드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냥 다들 한 방향으로 가면서 그게 옳다고 믿어버리면 그만이다.
어른이란 후손에게 무엇을 전수해야 하는 지 아는 사람이다. 후손이 무엇을 경험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이 경험이 삶에 주는 의미를 아는 사람읻. 또한 어른이란 이 지혜를 전달하는 방법 언어를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처럼 지혜에는 두가지 뜻이담겨 있다. 하나는 삶의 교훈이라는 의미에서의 지혜 다른 하나는 그것을 잘 전달하는 지혜를 말한다. 단적으로 말해 어른이란 후손들이 제대로 잘 경험할 수 있도록 용기를 복돋우고 지혜를 건네주는 사람이다. 이 것이 바로 스승의 고유한 역할이자 어른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 그런데 우리 사회를 둘러보라. 우리 사회에 어른은 없다. 어른이 무엇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이 경험을 후손에게 전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사회에는 어른이 없다. 어버이는 존쟇지만 이들은 자기 존재를 과시하는 데 열중하지 자식들이 깨닫고 경험의 주체가 되게 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 어른은 사라지고 애새끼와 꼰대들만 남았다.
어른들에게는 그저 말잘듣고 성적이 좋기만 하면 다른 모든 것이 좋다고 믿어버리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다. 드러나 보이는 것 자신들에게 편하고 맞는 것이기만 하면 다 옳은 것이고 맞는 것이다. 그 법칙이 뒤집어지는 일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이다.
내 눈에 모범생이 곧 모범생이며 그 이면이란 있을 수없다.
그 아이가 그럴 리 없다.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참다참다 했을 것이다.
난 내 제자를 믿는다.
그 믿는 제자에 말썽을 피우거나 성적이 좋지 않거나 말안듣는 제자는 없다 그들에게는 애초에 믿음이 없고 믿어줄 건덕지가 없다, 그들은 또 그들 나륾의 아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그것대로 고착화되어있다. 문제아.
문제는 그들이 일으키는 것이고 그들이 조용하면 세상이 조용한 것이고 그들은 절대 살면서 억울하거나 분한 일은 있을 수 없다. 모범생 역시 살면서 억울하거나 분한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
어른들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서 보고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수연이가그럴리가 있겠니. 너랑 제일 친한 친구잖아. 보면 항상 같이 다니고 있던데... 그리고 수연이도 너랑 단짝이라고 했단다. 아마 수연이가 메사가 뛰어나다보니 질투도 나고 그랬겠지만 그렇다고 엄한 애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야. 내가 수연이랑도 이야기해 보겠지만 너도 잘 생각해봐. 수연인 니 생각 끔찍하게 하던데...
결국 그애가 옳고 나는 틀렸다.
한번 세워진 기준은 웬만해서는 뒤집어지지 않는다
지혜는 오래 묵을수록 더 가치가 있지만 정보는 새로운 것일 때만 의미가 있다. 경험이 죽고 스펙터클이 된 체험만 소비하는 사회에서 교육이 겪을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위기다. ..................
체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실시간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저기로 달려가야하고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만들어낸다. 여기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과 거리를 두고 생각하는 여유가 들어갈 틈이 없다. 실시간의 행동은 반응이지 실천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른 사건이 찾아오고 마음은 다시 긴박햊ㄴ다. 조금 전에 벌어진 사건의 의미나 가치 실패로부터 사유하고 교훈을 찾아내는 일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대처가 중요하다. 매순간 순간 사라져가는 시간에 매몰되느라 순간은 짜릿할 지 몰라도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실시간에는 역사가 없다.
반면 경험의 시간은 지금 여기의 시간이다. 이 실시간 과 지금여기 의 시간은 종이 한장 차이다. 둘 다 지금 벌어지는 사건에 충실하다는 점에서는 같은 시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경험의 시간은 긴박함이 아니라 충실함과 기쁨의 시간이다. 사유와 교훈의 시간이다. 지금 여기에 충실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삶의 자체 그리고 산다는 것의 의미이지 사건 자체가 아니다. 그렇기에 경험의 시간은 실천의 시간이다. ...교육의 목표하는 행동하는 사람은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렇듯 공감은 삶을 견뎌나가는 가장 큰 힘이다. 사회가 개인의 삶을 보호해주지 못하고더 이상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못하게되었을 때 허무함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너도 나도 같이 상처받았다 라는 공감이다. 내 삶이 누군가에게 공감될 때 그래서 내가 그에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인정 받을 때 삶은 살아갈 만한 것이 된다. 이 상처가 나만의 상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상처임을 깨달았을 때 시대에 대한 인식이 되고 더불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용기가 될 수 있다. 그래야 내가 응원 받는 느끼믈 가질 수 있다.
모두가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을까. 사실은 나도 무서웠다고. 그애가 아니라면 그 타겟이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도 있었다고.. 나도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이 나쁜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렇게 동조하지 않으면 나만 도드라져서 쟤는 뭐가 잘나서 저 혼자 튀는 거야? 혼자 잘났다는거야? 저거 미친거 아냐? 하는 말이나 들으며 그 다음으로 내가 타겟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일이 두려웠다고, 그래서 모르는 척 눈을 돌리고 귀를 막고 외며했다고 말이다. 누군가 단 한명만 용기를 내어 말했다면 다들 공감하지 않았을까. 사실은 나도 그랬다고 나도 입닫고 귀막고 있는 이 순간이 숨막히게 힘들고 싫었노라고
누군가 함께 경험을 이야기하고 고백을 하고 부끄러움을 털어놓는다면 그래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힘들었어. 나도 무서워서 그랬어. 내가 따돌림 당할까봐 내가 도드라져서 왕따를 당할까봐 무서워서 모른 척 한거야 정말 미안해 정말 잘못했어.
어쩌면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꼭꼭 숨겨놓은 이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사회가 점점 아이들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함께라면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서 아니라고 말 할 수 있고 이건 옳지 않다는 것 이럴 수록 우리가 모두 함께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텐데,,
서로의 상처를 털어놓는다면 서로의 부끄러움을 털어놓는다면 우린 어쩌면 친구가 되었을 것이고 서로에게 힘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 그 누구도 믿을 수도 없고 의지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고 점점 나빠져갔다.
우리는 학교에서 관계를 배우기보다는 권력을 먼저 배운다. 아니 관계가 곧 권력이라는 진실을 너무 빨리 너무 일찍 깨닫는다. 교사와 학생들 사이만이아니다. 학생과 학생 사이에도 엄처난 폭력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왕따를 경험한 친구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극단적인 경우가 많다. 한 학생은 "어짜피 삶이란 정글"이고 "인생은 폭력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폭력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존재했지만 아무도 그 존재를 기억해주지 못하는 유력 같은 존재였다. 때린 교사에 대해 두고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일진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다시 상기하면서도 이들에 의해 죽은 사람의 고통은 아무에게도 공감되지 못하고 있었다. p 134-135
정신의학자 하지현에 따르면 적선을 하는 쪽이 동감이고 거지와 자신 사이에 공통의 운명 같은 것을 직감하고 공포를 느껴 외면할 수 있는 쪽이 공감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보고 동감하는 사람은 후쿠시마 주민들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사람이다. 감정이입이 되면서 나는 사라진다. 대신 그 주민들의 불쌍한 처지만 남는다. 불쌍한 마음에 모금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감은 다른 것이다. 공감하는 사람은 후쿠시마를 보며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는 사람이다. 후쿠시마는 단지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 시대의 암흑과 실체를 드ㅓ내는 사건이다. 따라서 공감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연민이 아니라 공포일 수도 있고 공포에 따른 외면일 수도 있다. 공포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후쿠시마를 보는 순간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위험사회에 대한 공통의 운명을 직감하게 되고 시대ㅔ 대한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후쿠시마 주민들을 동시대인으로 끌어안게 된다 공감이야 말로 동시대인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능려기다. ..............................................................................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 인간성의 핵에 자리한다. 이것이 공감의 본질이고 윤리의 시작이다. (이언 매큐언)
이자크 디네센은 '모든 슬픔은 고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고 말했다. 내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 이사람이 동료다. 동료란 내 슬픈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동료란 또한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람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슬픔에 공감하는 동료가 있을 때 ㄴ 삶이 아무리 비루하더라도 나는 삼이 견딜만하다고 느껴진다. 동료가 공유하는 것이 바로 언어다.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드러내는 어어가 같을 때 우리는이 친구에게 내가 공감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슬픔을 타인에게 나누어지지 못하고 피상적으로만 공감된다고 느꼈을 때 인간은 자기연민에 빠지고 우울증을 겪게된다. 김상봉은 플라톤이 비극에 대해 그렇게 비판적이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우울증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울증과 비극은 전혀 다르다. 우울증은 오로지 정신의 허약함만을 드러내어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이라면 비극은 고통받는 타인의 자리에 우리들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즉 타인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자기 고통을 초월하고 극복한다. 이것이 카타르시스다.
"아이 씨바 졸라 아파 아이 씨바 졸라 아파"
" 와 씨바 졸라 아프겠다"
그냥 욕이라고만 생각했던 씨바와 졸라가 아이들에게는 공감이 신호였다. 이들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을 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못알아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우리와 아이들의 고악ㅁ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뜻을 가지고 공감하는 사람들이다. 뜻이 같아야 공감을 한다. 그래서 글을 읽고 난 다음에 ㅡㄴ히 동의한다고 맗ㄴ다 공감이라는 말을 쓸때도 말을 하는 사람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한닥보다는 대부분 말뜻을 이해한다는 의미로 쓴다. 하지만 아이들이 쓰는 씨바와 졸라는 뜻을 통ㅎㄴ 공감이 아니다. 감정의 강도에 대한 공감이다. 내가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재수 없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씨바와 졸라를 통해 드러낸다. 이들에게 공감은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강도의 문제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참여한다는 건 의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강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데 유ㅜ리는 이 강도의 문제를 늘 놓쳐버린다.
현재 젊은이(대학생)들에 대한 비난은 딱 한마디로 정리된다. 비겁하다는 것이다. 청춘의 핵심은 용기인데 도무지 현재의 청춘들 특히 자유까지 특혜로 받은 대학생들이 용기를 부리기는 커녕 지나치게 현실적이라는 말은 곧 이들이 비겁하다는 비판이다. 나는 대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에는 바로 이 "용기와 비겁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이 혼란스러운 불한당 같은 시대에 누가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용기는 영웅적인 개인이 내는 걸까 아니면 집단이 뒷받침될때 낼 수 있는 걸까 적어도 우리 시대에 개인 영웅의 출현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용기는 아마도 집단이 ㅂㅇ쳐주는 용기 동지 동료가 있기에 생기는 용기일 것이다. 용기는 서로 부추기는 것이지 개인이초인같은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초인같은 용기는 역사에 전태일 열사처럼 극히 예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용기란 공동체에서 공동체를 통해 최소한 아지트라도 있을 때 일어난다. 생각해보면 과거에 학생들이 시위에 나갔다가 최루탄을 맞고 물대포를 맞아 쓰러지면서도 도망가지 안았던 이유는 결코 그들이 용감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옆에 있는 친구가 나와 팔짱을 끼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놓아주지 않았기때문이었다. 그녀석 역시 내가 팔짱을 끼고 있어서 물대포와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데모가 끝나면 서로 할 말이 있었다. 함께 견뎌냈기 때문이다. 용기란 이렇게 내 옆에 팔짱을 같이 낀 사람이 있을 때 내는 것이다. ...... 그런데 우리에게 공부하는 과정은 공동의 용기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개인적인 고립과 비겁함을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공부하는 것이 동시대성을 사유하고 옆 자리 친구를 동료로 초대하고 더불어 용기를 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우리는 동료를 만나야 할 공간에서 경쟁자를 만난다. 용기를 내야할 순간에 비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한 교실에 앉아 있을 이유가 있을까
서로 두려워하고 본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면 더 이상 이 곳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함께이기에 용기를 내야하는데 함께여서 나의 비겁함을 감출 수 있게 되었다.
나만 비겁한게 아니라는 것 나만 잘못한건 아니라는 게 위안이 된다는 거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모두가 침을 뱉을때는 그것이 더럽거나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편리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그래서 환경이 더러워지고 누군가가 혐오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 심지어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을 우리가 오히려 비난하고 쫓아낸다. 우리는 우리가 되어 힘이 쎄져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되어 용기가 생기고 우리가 되어 우리는 일그러져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모두가 일그러진 괴물이어서 우리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현장의 비참함과 세상의 사악함을 맞닥뜨린 사람들의 마음을 분노가 아니라 공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분노하고 행동할 때는 여럿이 함꼐 하는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때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적이 너무 거대할 때 내 주변엣 나의 분노를 공유할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은 분누하기보다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혼자라도 살겠다는 방법을 찾게 마련이다. 그래서 아예 현실을 보지 않으려고 하거나 예상과는 전혀다른 판단을 하게 된다. 위에서 말한 학생처럼 말이다. (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역시 세상은 정의고 뭐고 힘을 가지는 것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저는 더 노력해서 부와 권력을 가지겠습니다.) 내가 이 책에서 공감과 동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동료가 있을 때 마음은 공포가 아니라 분녹 될 수 있다.
동료가 없다면 우리는 각자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나야 한다.
이 곳에서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지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아니면 적어도 찍히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았다면 일단 모른 척 하고 본다. 서로 눈치를 살피며 조금이라도 늦게 비겁해지고 조금이라도 늦게 용감해지기를 바란다. 나는 적어도 비겁이든 용기이든 어디에서건 앞장을 서고 싶지는 않다. 모두가 한마음이다. 그래서 누군가 희생양이 생기면 한숨을 돌리고 모른 척한다. 다음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모두에게 공포를 주고 더이상 튀지않고 용기를 내거나 어설픈 정의를 휘두르지 않는다. 납짝 엎드리고 이모든 것이 지나가리라.. 중얼거릴 뿐이다.
함께 분노할 필요없다. 괜히 어설프게 나서다가 찍히면 나만 손해아닌가
그러나 변화는 재빠르게 잡아 챌 줄도 알아야 한다.
지금 모두가 분노하고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임계점임을 느끼거나 그 권력을 쥔 누군가의 힘이 다 빠져버린 걸 느끼는 순간 내 행동을 빠르게 결정해야한다. 지금은 뒤집고 분노하고 함께 손가락질 할 차례다. 내가 말을 안하고 있었지 아는 건 다 안다고.. 나도 생각을 하고 있었노라고 얼른 증명하고 보여야 한다.
비굴하지만 살기위해서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결국 사람은 혼자 있으면 외롭고 함께 하면 괴롭다동료는 사람의 삶에서 가장 큰 딜레마이다.
관계에는 세심한 배려가 있다, 상대의 아픔이 무엇이고 고민이 무엇인가를배려한다. 그래서 침묵해야 할 것 떠들썩하게 웃어야 할것 진지하게 경청해야 할것을 현명하게 구분한다. 겉으로 뵈에는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겉도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이야기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말을 주고 받는 태도에 배려이 에너지가 담겨 있다. 너무 진지하게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벼움이라고 말하듯 오히려 의도적으로 무의미한 이야기와 농담과 엣일을 다시 끄집어 낸다. 에로티시즘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다. 배려다 무의미를 견뎌내고 즐거워해야하는 배려 말이다, ................... 관계를 만드는 것으 의미가 아니라 의례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다. 의미의 공동체가 아니라 의례의 공동체 몸의 공동체가 더 오래간다. 살은 의미가 아니라 무의미 안에서 의례처럼 반복된다.
세상의 모든 의미가 중요한건 아니다.
무의식적인 것, 가벼운 것 건성건성 건들거리는 것 그런 것들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것으로충분하다. 매사가 진지하게 무언가 도움이 되거나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건 강박일 수 있고 상대도 부담스럽다. 그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편하게 지내는 것 부담이 없는 것 그리고 어제가 오늘 같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오래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무의미함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
힘을 빼는 것.. 준비하고 긴장하는 마음을 푸는 연습이 필요하다. 살아가려면..
아이의 이야기에 매사 의미를 찾고 내가 도와 줄 것이 없는지 진지하게 대하지 말아야겠다.
아이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상대가 너무 진지하게 들어주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었나.. 그 때의 내 행동에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어쩌면 아이를 진지하게 성실하게 대하고자 하는 내 행동이 아이를 더 움츠려드고 소심하고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냥 편하게 흘려듣듯이 하지만 모든 걸 다 듣고 있다는 태고를 갖는것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는 건 매사가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오늘은 실수 하더라도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서
삶의 종말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당연히 삶이 있다. 담ㄴ 그 삶이 우리가 알던 삶과 차이같지 않은 창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차이 같지 않은 차이에 실망하는 대신 그대로 우리 삶에 충시라면 된다. 스스로 삶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할 필요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사실 만으로도 위대하다 삶이 비참하기에 삶은 더 없이 위대하다 파스칼은 인간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비참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란 진짜로 비참하기 때문이다.
오늘이 힘들고 괴로워도 바짝 엎드려라도 살아있으라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유령이라고 여기더라도 비굴하게라도 견뎌라..
그 끝이 비록 그 앞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견딘 시간 만큼의 무언가 달라진 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허무하게 용기를 내는 것 보다 가끔은 비굴하고 비겁하게 비티는 것이 더 큰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은 버티면 이긴다. 단순무식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우리가 해야 할일은 분명하다. 우리 살을 바꾸려고 하지 말자. 다만 우리 살을 옹호하자 무엇보다 비참하지만 이 비참함을 같이 껴안을 동료가 이다면 삶은 위대하다 아니 삶은 끈질기기에 위대한 것임을 이 삶의 끈지림에 충실하자 두더지의 힘은 충실함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