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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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으면 몰래 버리고 싶은 존재

또는 나의 살아가는 힘

그 두가지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가족은 나의 힘이고 나의 존재이며 내가 가장 소중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나에게 가장 상처주는 대상이고 버리고 떠나고 싶은 곳이다.

 

흔히 가족은 화목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세상에 다시 없는 존재이며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희생해야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게 한다.

그래서 가족 때문에 힘들거나 가족에게 상처받거나 가족에게 배신을 당하는 경우

그 가족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멀리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동시에 그 마음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나쁜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심한 건 아닐까 내가 참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정말 그러고 싶어서 한 건 아니었을 텐데 내가 잘못했다는 마음을 갖는다.

내가 그 상황에서 화를 내서는 안되는 거였고

내가 돈을 마련하거나 빌려서라도 줘야 하는 거였고

내가 말을 잘 들었어야 했고 그냥 니가 맞다고 말을 해주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엄마니까 아내이니까 가족을 돌봐야 하는 게 맞는 거였는데

내 일보다는 가족이 우선이었어야 했는데 나는 엄마답지 못하고 아내로서 자격이 없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맞아도 내가 맞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밥상을 뒤엎은 그 사람에게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그럴 만했다고 생각한다.

가족은 절대 깨지면 안되는 그 무언가이기도 하다.

아무리 힘들고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족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서 남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내 부모님의 실망과 충격을 견딜 수 없어서

가족을 떠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어서 나는 가족을 깰 수 없다.

가족을 깬다는 생각조차 불순하고 불온하다.

 

가족이란... 이라는 질문에 아마 대부분 비슷한 문장을 완성하지 않을까

어디에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화목하고 다정한 사람들 서로 이해하고 돌보고 사랑하는 관계들

 

이 책은 그런 가족에게 질문을 던진다.

불편하고 불온하지만 어쩌면 한 번쯤 혼자 몰래 해봤을 생각이다.

아니 어쩌면 입장에 따라 이 책의 내용이 몹시 불편하고 화가나고 되먹지 않은 내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도데체 가족을 어떻게 보고 이런 발칙한 질문을 할까 라고 말이다.

 

왜 며느리가 남자면 안될까

역사적으로 남성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가 구축되고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이 독립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소유물로 여겨졌따는 점에서 한국이나 서구나 다르지 않다. 둘 다 가부장제 안엥서 여성은 예속된 상태에서 순종을 욕받았따. 그러나 한국의 유고 가부장제에서 결혼한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는 아내로서의 지위에 한정되지 않고 시부모의 지배를 받는 며느리로서의 지위를 가졌다.

며느리의 역할은 중대했으나 그 지위는 낮다는 모순이 있다.

며느리의 지위는 남편을 ᄄᆞ라 정해지지만 남편과 동등한 지위가 아니다.

허나 지위가 종속적이었다고 그 역할이 수동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전통적으로 아내이자 며느리에게는 높은 수준의 대처능력과 판단력이 요구되었고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들을 이끌고 어르고 돌보며 이들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관리능역과 경제적 수완이 기대되었다. 주도성을 요구하는 종속 상태라는 모순된 위치다. 이러한 모순은 남성의 역할에서도 나타난다. 남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은 사회적 출세인데 이를 이루지 못했을 때 가족 내의 권위는 형식만 남는다. 권력을 가지지만 생활에서 무력한 수동적인 상태를 경험한다.

 

가부장제에서 성별 역할은 구분되어 정해졌다.

딸 아내 며느리 라는 역할은 여성의 역할이며 동시에 여성이다.

며느리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 되는 경우 생물학적인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맡게 된다.

종속적이고 희생적이며 주체적이지 않은 하나의 소유된 존재로서의 역할을 하는 남자

그런 남자를 지배하는 다른 남자라는 인식은 가부장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셈이다.

단순히 동성 결혼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서 전통이라고 믿어 이어온 가족이라는 제도와 통념을 뒤흔드는 일이 된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와 역할이 모호히져버리는 일

그것이 동성결혼보다 더 중요하고 두려운 일이 아닐까

 

2.결혼과 출산의 절대 공식

한국은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해야한다는 공식이 존재한다. 부모가 낳은 자식만을 인정해야 결혼과 가정이라는 공식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 공식이 흔들리는 건 존재의 근간이 흔들린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곧 무너질 거라는 착각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위해 결혼제도를 수호하는가?

결혼 밖에서 사람이 태어나면 정말 안되는 것일까?

출산이 결혼의 테두리에 있어야 정상이라는 관념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사람을 적법과 불법으로 구분하며 생애의 시작부터 불평등을 만들었따. 이런 불평등을 사회가 모르는 게 아니라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은 출산의 기반이라는 이념이 무너지면 사회의 근간이 붕괴되는 것과 같은 불안감에 차별을 정당해 해왔다.

에초에 사람이 태어난다는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출생부터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용인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출생률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결혼이나 자녀 출산에 관한 결정은 헌법적으로 보면 국가나 제 3자가 간섭할 수 없는 사생활의 영역이다. 국가는 개인이 자율적으로 가족을 형성하고 존엄하고 평등하게 가족생활을 영위하도록 보호하고 지원할 의무가 있따. 결혼한 부부가 자녀를 낳을지 여부는 전적으로 두 사람이 결정할 일이다. 그러나 때떄로 한국사회에서 결혼과 자녀 출산은 타인의 의견과 희망이 오가는 공적 의제 같다. 부모의 은근한 압력부터 결혼에 대한 주변의 충고까지 결혼과 출산에 관한 간섭은 꽤 일상적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불확실한 세계를 여는 일이다. 태어나는 아이가 어떤 아이일지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양육자의 상황이 어떠할지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현재의 상황을 토대로 미래를 가늠할 수 밖에 없다. 현재의 세상이 불평등하고 양육자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면, 앞으로 나아질 기미가 없다면 ... 양육자가 제공하는 가족이라는 환경이 자녀의 삶을 결정해버리는 현실에서 누가 자녀를 낳고 싶을까

 

동성가족이나 비혼출산등을 합법화하고 사회에서 받아들인다고 사회가 붕괴되고 질서가 사라질까

비정상적인 가족을 막으려는 사람과 다른 쪽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누가 결정하냐고 되묻는 사람들 시아이서 여전히 아이들은 자라고 있다. ‘비정상 가족에서 사람이 태어났을 때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여전히 우리에게는 중요한 질문으로 남는다.

현재 아이들은 여전히 태어난다.

결혼을 한 정상 가족의 아이만 합법적이 정상이라고 인정하는 사회에서 여전히 비정상 가족의 아이들도 태어나고 자라고 있는데 그저 정상가족과 정상 출산만을 인정하고 다름을 배척하는 지금 누구든 행복할 수 없다.

 

3. 초대받지 않은 탄생 허락받지 않은 출산

대한민국은 평등과 자유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민주주의 헌법을 채댁하였고 정부를 수립하였다.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하다며 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고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하며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가족 제도는 예외다.

가족에 관해서는 평등보다 전통을 수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유독 가족에 대해서는 한민족의 미풍양속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평등은 전통적인 가족질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허용된다는 생각은 지금까지 가족제도를 동결시키는 절대적이 원리가 되왔다.

가족제도를 바꾸는 대신 혼혈아동과 그 어머니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장애부부는 임신이나 출산을 하지 않은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해왔다.

어떤 가족에게 어떤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있다면 제도적인 뒷받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거나 제외시키는 방식을 택해 기존 정상가족을 유지해왔다. 물론 이유는 그럴 듯하다.

태어나는 자녀가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것

차별받지 않기 위해 혼혈아동은 해외로 입양을 보내가 장애 부부는 강제 불임을 하도록 해 왔었다.

아이의 불행한 삶을 예측하면서도 아이를 갖거나 낳겠다는 것은 부모의 이기심이라고 비난해왔다.

오늘날도 건전하지 못한 자녀를 출산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질타는 계속된다. 누군가 사회가 원치 않은 아이를 출산할 때 이기적인 행동이라며 출산을 결정한 그개인에게 잘못을 돌린다.

그렇게 혼혈아동에게 그랬듯이 아동을 사회적 차별과 불행한 인생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은 출산과 가족생활을 하기 어려운 사회를 만든다. 여전히 우생학에 기반한 차별은 정상적이고 우수한 사람만이 출산하고 출생하도록 자격을 부여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때떄로 가장 강력한 차별은 온정적인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태어날 아이의 불행을 예고하는 염려가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출산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온정적인 염려와 경고를 보냄으로써 세상의 차별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될 것임을 기정사실화 하였다. 그리하여 실제로 닥치는 불행은 오롯이 출산을 선택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결국 그렇게 차별을 보존하고 전승하며 어떤 집단의 미래를 영구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에 가담한다. 이런 식으로 어떤 사람들을 이 땅에 오지 못하게 막는 행위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이는 사회가 변화를 도모하지 않겠다는 변명이다.

부모가 출산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사회는 이미 아동에게도 좋은 사회일 것이다.

태어나는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면 이미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누군가의 출산을 막을 것이 아니라 출생으로 등장하는 예측 불가능한 구성원을 위해 변화하며 고옹체를 형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임신과 출산은 국가적 수단이 아니라 국가가 보장하는 개인의 권리이다.

 

재생산 권리를 보장한다는 건 임신 출산에 관한 개인의 결정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여 출생하는 사람을 존엄하고 평등하게 대우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차별을 용인하고 묵인할 때 누군가의 출산을 막는 일이 아동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처럼 보였겠지만 차별과 맞서기로 결정한다면 양육자의 권리가 곧 아동의 권리이고 그 가족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모든 사람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된다.

 

 

4, 역할은 성별에 따라 평등하게?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가능하려면

(남성이 가장으로서 나가서 돈을 벌고 여성은 전업주부로 집에서 자녀를 돌보는 것)

이는 꽤 비현실적인 가정 위에 올려진 꿈이다.

사회가 성별분업을 지배적인 관념으로 채택하면 연쇄작용이 생긴다. 성별분업이 가능하려면 남성 한 사람의 노동으로 가족구성원 모두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는 일자리를 남성에게 우선하여 준다. 이런 사회가 되면 여성은 마땅한 일자리를 갖기 어렵고 어쩔 수 없이 남성에게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성별분업이 일종의 이념으로 자리잡은 사회에서 결혼은 중요한 생존요건이 된다. 그것도 결혼한 상태가 평생 유지되어야 한다. 남성에게 부여된 과업도 만만치 않다. 남성은 가족 전체를 부양할 수 있을 정도로 소득이 넉넉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기대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지다.

기대수명이 길어진 것

비혼 미혼의 비율 증가

남성이 받는 가족임금이 가족 모두가 생활할 수 잇을 만큼 받는 경우가 절반도 채 되지 않은 현실

능력있는 가장과 전업주부라는 역할은 가족문화의 귀족화를 추구한 결과이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가족모델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불안정한 노동시장으로 평생 동일한 직어을 유지할 수 있는 퍼센테이지는 높지 않고 주변 노동으로 이동하여 노동이 불안정해질 경우 성별분업은 지속되지 못하고 아내의 취업이 증가한다.

 

일제 강점기 늘어난 여성의 교육은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자기성장이 아니라 자녀를 잘 키워야 하는 현모의 역할 때문이다. 국가에 필요한 적절한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여성이 교육을 받고 자녀를 잘 교육시켜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후 유신체제의 현모양처 교육은 충효의 정신을 강조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든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내용이다. 모든 사회 관계를 가족적 관계로 전환하여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는 개인을 길러내려는 의도였다.

현모양처란 여성의 교육기회를 여는 열쇠였지만 결국 여성의 역할을 집안으로 한정했다.

한국은 전통적인 성역할 이념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우호적인 국가

여성이 일도 하면서 가사 책임도 받아야 하는 이중부담을 지닌 경우 출생율을 낮을 수 밖에 없다.

 

5. 가족각본을 배우는 성교육

청소년의 성교육은 죄책감과 수치감을 심어줌으로 성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성이란 가족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교육한다.

사회는 결혼이란 테두리 안에서만 사람이 태어나야 적법하다고 보는 제도를 통해 가부장제 가족질서를 구축했다. 또 승인된 가족질서에서 벗어난 출산과 출생에 낙인을 찍음으로 가족제도의 불합리함을 수정하는 대신 불행을 개인사로 돌렸다.

성교육은 성역할의 구분을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만듦으로 가족각본이 유지되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기도 한다.

 

가족이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한다는 명분아래 명예를 이유로 하는 폭력이 촉발된다고 설명한다.

남성 혈통을 따라 계승되는 가족체제가 있다.

한 가족이 다른 가족과 친족 관계를 형성하려면 결혼을 해야한다.

이때 여성은 좋은 조건의 집안과 친족을 형성하기 위한 거래에 사용되는 중요한 자본디다.

이 거래에서 순결은 여성이 결혼 가능하다는 가치를 담보하는 일종의 상징적인 자본으로 중요하게 기능한다. 만일 여성이 순결을 잃거나 처신을 잘하지 않으면 결혼 거래에서 불리해진다. 여성의 성에 따라 가족 전체의 번영과 쇠락이 좌우되는 것이다.

온 가족이 여성의 성을 통제하는 일에 관여하기로 한다.

여성은 조신하고 순결해야한다는 엄숙한 성규범이 가족안에서 만들어진다.

남성은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 보호자 역할을 맡는다.

진실이 아니어도 소문이 나게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행실을 문제 삼을 수 있고 반대로 진실이어도 소문을 막을 수 있다면 폭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어지기도 한다.

 

6, 가족 각본은 불평등하다

근본적으로 사람의 생존을 맡기에 가족이란 단위는 불안정하다.

경제적 단위로서 가족은 규모가 작아서 가족 상황이 조금만 변해도 가족 구성원 전체는 쉽게 휘텅댄다.

성별분업이념으로 설계된 사회라면 남성 갱계부양자의 존재여부나 상황에 따라 여러사람의 생계가 흔들린다. 국가가 이런 취약한 구조를 만들어놓고 가족끼리 서로 부양하라는 의무를 부여해 자력 생존을 유거하는 건 처음부터 위험을 안고 있다.

 

한국은 복지국가를 표방하면서도 가족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운 사람에게 기초적인 수준의 생활을 지원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운영하면서도 국가는 가족의 부양의무를 우선해왔다. 가족부양 우선의 원칙으로 하여 우선적으로 부양의무자로 정해진 가족의 보호를 받고 부양의무자의 보호를 받을 수 없을 때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 사회안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일은 가족의 실패를 증명해야하는 과제를 떠안은 것과 같다. 가족이 있어도 없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가족의 실패가 사회보장의 전제조건이 되면서 사회복지제도는 마치 가족이 없는 자들을 위한 낙오된 세계인 것처럼 만들어졌다.

있는 자가 가족제도를 통해 계층을 세습하는 동안 없는 자는 가족생활 자체가 어려운 상태가 된다.

 

결혼으로 가족이 된다는 건 그 당사자들 사이에 권리와 위무가 생긴다는 뜻이다. 동거하며 서로를 부양하고 협조해야 한다 서로를 대신해 공동생활에 관한 일을 처리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생긴 채무에 대한 책임도 공동으로 진다. 결혼 중 협력해 모은 재산은 명의와 상관없이 공동재산이 되어 둘이 헤어질 때 나누어야 하며 이때 가사노동을 분담한 기여도 인정된다. 서로에게 수술동의 연명의료 중단 결정 등 의료적인 결정을 내리는 보호자 역할도 하고 배우자로서 사회보장급여를 받고 상대방이 사망하면 유족으로서 장례를 치른다.

동성결혼 또는 동거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경제적 정서적 돌돔의 공동체를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들도 공동생활을 보호받아야 한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한 돌봄의 공동체를 국가와 사회가 존중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일까

혈족 안에서 사람의 순서를 매기고 부양의 의무를 부가해 생존을 담보해온 지금까지의 가족은 사람을 타고난 운명에 순응케하며 권위적인 통제에 의지해 체제를 유지한 경직된 질서였다.

 

7 각본없는 가족.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성별에 따라 세밀하게 구조화된 체계이다.

모든 사람을 남과 여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고 성별에 따라 달리 기대되는 역할이 있음을 대전제로 한다. 남녀가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법적으로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해야 하는 일련의 가족 각본을 충실히 따르기를 기대하고 때때로 압박한다.

 

가족관계로서 신분을 증명한다는 말은 나라는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의 정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다른 가족 구성원도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면서 내 정보를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개인이 자기자신으로 존재하지 않고 가족안에서 존재하는 가족관계등록제로 되어 있다. ) 상세증명서를 통해 과거 정보가 불필요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정보를 가린다 해도 서류에 가족관계가 드러나는 이상 비정상이라고 불리는 상황들이 포착된다면 차별을 피할 수 없다.

(가족의 여러 가지 개인적인 상황을 모두 기록하고 노출시킨다.)

 

 

환자 또한 전체 법질서 안에서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엽다아야 하고 국가는 성전환자의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여야 한다.

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것은 그의 가족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이는 부 또는 모의 성전환이라는 사실의 발생에 따라 부모의 권리왕 mlan가 실현되는 모습이 그에 맞게 변화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따름이다. 이렇게 형성되는 부모자녀 관계와 가족질서 또한 법질서 내에서 똑같이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

성전환자가 이혼하여 혼인 중에 있지 않다거나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 정정이 이루어진다 하고 이러한 점이 달라지지 않는다. 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도 여전히 그의 부 또는 모로서 그에 따른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수행하여야 하며 이를 할 수 있다

 

건강가족의 의미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

가족 구성원의 욕구가 충족되고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가족

 

가족각본은 이분법적 성열할 관념에 기초한 가족 질서를 유지하면서 성평등에 실현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현모양처 만들기를 목적으로한 여성교육)

가족과 사회가 별개의 질서가 가능한 분리된 세계가 아니다. 성별 구분을 바탕으로 설계된 가족제도는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적 현실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가족각본은 가족제도가 만드는 계층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지금의 가족제도는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없는 자는 가족생활을 유지하기도 새로운 가족을 꿈꾸기도 힘들다.

가족각본은 아동에게 가장 불평등하고 가혹한 사회를 만든다.

수많은 아동들이 가족 배경을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차별을 겪는다. 아동이 겪는 온갖 놀림과 괴롭힘을 들여다 보면 가족형태 가족 소득 가족 구성원의 특징 등 가족에 관한 이유인 경우가 많다. 가족의 상황이 아동들 사이에 권력관계를 만든다. 흔히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면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는 가장 부정의한 불평등이다.

어느 가족에게 태어났는지에 따라 누구는 존중을 받는 반면 누구는 무시를 당하고 누구는 풍족한 기화를 얻는 반면 누구는 생존도 어렵다면 아기때부터 우리의 몸에 계급이 새겨져 있다는 뜻이다.

 

아직도 가족각본은 여전히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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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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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것은  가끔 스산하고 먹먹하다

지난 시간이  마무리되지 않고 흐지부지 지나가버렸다면 더욱 그러하다.

만나서 마음을 나누었고 시간을 공유한 사이가 어느 순간 오래 연락이 없고 만나지 못해 그냥 그렇게 흐릿하게 지워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누군들 쉬울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상대가 어떤 오해를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카메라>의 문정이 그러했다.

한참이후 관희를 만나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들과 말을 통해 조금씩 지난 시간을 유추한다.

왜 관주가 연락을 끊었는지 그리고 어떤 일들이 있었고 그녀가 모르는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하나씩 퍼즐을 맞춰간다. 

이 단편은 그리스 비극을 닮았다.

빗나간 과녁의 화살처럼 누구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 거리에 돌을 깔았던 지자체를 원망해야할지  사진을 배우고 싶다는 나 자신을 원망해야할지 아니면 오해하고 두려웠던 그 노숙인을 원망해야할지

어떤 우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비극은 발생한다

부당하게 불행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연민과 그 불행속의 사람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공포감은 비극을 더 크게 만든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실수라고 하기엔 누구도 잘못한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불행은 누구를 원망하지도 못하고 그 대상을 찾아 해매다가 결국 그 화살을 나에게 돌린다.

빗나간 화살은 나에게 돌아온다.

관희가 그랬고 이제 문정이 그렇다.

물른 그때 그 노숙인이 가장 잘못했다. 오해했고 두려웠다고 타인을 폭행하고 내버려둬서는 안되지만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고 또 올라가다보면 사람은 누군나 그 끝에 자신이 있다고 믿는다.

관희는 그끝에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불행이 묻을까봐 말로 꺼내지도 못한 동생을  잃었고 

어느날의 말다툼같지도 않은 갈등에서 서로 서먹해진채 연락하지 않았던 문정은 긴 시간 오해만 했다.


희미하게 끝이 난 관계는 이렇게 쓸쓸하고 아릿하다

자신에게 겨눠진 화살로 결론을 내려야 비로소 뭔가 아귀가 맞아지는 불행과 슬픔은 아직도 여기저기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울고 있다.


<층>의 남녀는 다른 양상의 비극을 보인다.

그리스 비극을 이어 세익스피어의 비극처럼 개인의 성격적 결함으로  불행하다.

여자는 남자의 통화를 듣고 그동안 남자에 대해 쌓아왔던 이미지를 와르르 무너뜨린다.

남자의 쌍소리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과정에서 나온 것인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차단하고 판단 내린다.

어쩌면 그 소리를 듣는 그 시간 여자가 겪은 상황과  맥락이 또 존재할 것이다.

힘든 가족을 잊으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애를 써온 남자의 일상은 그 순간 감정을 이기지 못한 한두 마디로 그냥 오해된다.

그렇게 오해하고  판단한 뒤 여자는 행복했을까

여자는 자신의 무심한 한마디 '아무것도 아니야' 라는 말을 들은 남자는 다시 무너진다.

어쩌면 자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듣게 했는지 모르는 남자는 여자의 그 말이 비수였고  원망이었고 배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희미한 이별은 여기에도 있다.

다만 여자는 자신이 그 관계를 끊어냈다고 믿으면서도 일상에서 불쑥 떠오르는 기억마저 지우지는 못한다.

가장 힘들고 가장 지쳤을 때 만나 물에 말은 밥에  잘 구운 굴비살을 올려주었던 기억

그날의 맛과 온도와 분위기에 대한 기억은 오래간다.

사실 굴비를 먹던 날 여자는 남자의 사촌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남자만 혼자 전전긍긍했고 모든 비극은 사촌의 혀에서 시작되었고 그 말을 듣고 믿은 여자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또 믿어버린다.

남자의 성급함 불안함이 비극을 잉태했고

여자의 성급함과 편견 역시 비극을 완성했다.


비극은 언제나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찝찝함이 있고 내가 그때 무언가를 잘못했는지 생각을 한다.

역시 빗나간 화살이다.

다만 이번에 화살은 자신에게 꽂히지는 않고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서 두렵고 자책한다. 


<이모>는  비극을 관통하는 인물이 나온다.

이모는 가장으로 집안을 책임지고 자신을 희생하다가 어느 순간 그런 삶의 도돌이표를  던져버린다.

더 이상 같은 공간 같은 관계에서 맴돌지 않으려고 결단을 내린다.

모두가 냉정하다고 말하지만 관계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끊어낼 수 없다.

작가의 최근 작 <실버들 만천사>처럼 끊어낸다고 아무리 시도해도 점점 더 엉켜서 서로가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친밀한 사이일 수록 더욱 그러하다.

좋은 말로 서로 좋게 좋게 끊어지는 관계란 없다. 

이모는 스스로 비극을 선택했다. 

다만 본인의 선택에도 본인이 납득해야할 이유가 필요하다.

나레티브는 우연의 연속과 맥락없이 성립될 수 없다.

예전 남자의 손에 담배불을 비벼 끈 일과   좀 더 가까운 시간에 얼어붙은 수도계량기를 녹이며 옆집과 일어난 헤프닝 등은

본인의 비극에 맥락과 연관성을 넣어준다.

그런 전환점이 필요하다.

길게 이어진 시간에서 어떤 전환점은 꼭 필요하다.

그게 나에게 밥을 주지도 않고 사랑을 주지도 않지만 삶을 길게길게 지루하게 늘어뜨리는 것 말고 단계 단계 잘라서 맥락을 만들어주는 것

그게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하고 내 삶의 의미가 된다.

이모의 정갈하고 소박한 생활속에 그런 맥락들은 그녀의 삶이 무의미하지는 않았음을 말해준다.

비극이지만 깔끔하고 명쾌하다.

이모도 그렇게 생각하고 삶을 매듭지었을까... 그건 모르겠다.


술냄새를 푹푹 풍기는 <봄밤>이나 주구장창 먹어대는 <삼인행> 이나 친구들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주는 <실내화 한켤레> 등

모든 이야기는 비극을 안고 있다.

내가 선택한 엇갈림도 있고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우연의 결과도 있다.

결국 세상 일은 인간의 의지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정해지는 것도 아닌 아직도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다만 인간은 언제나 그 원인을 알고 싶어한다.

원인을 알면 다시 그런 비극을 겪지 않을 것이고 그 원인을 기록하고 보존해서 다음 세대로 넘기면 내 자손들은 나보다 편안할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비극은 여전히 반복되고 

여전히 원인을 찾아내고 

여전히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하거나  스스로 자책해야 편안해지는 모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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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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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떻게든 그렇게 살아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하고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하고 그렇게 아무렇지않을 수 있지?

라는 짓들이

어느 순간 나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더라

나만 모르고 있더라

내가 무수히 손가락질하고 뒷말을 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을 그런 짓을

나도 다르지 않게 하고 있더라

뭐라고 해야하나

그때 흔들어댄 내 손가락 탓을 해야할까


어떻게 그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염치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사니?

라는  악다구니가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어쩌다 보니 그럴 수도 있고 어쩌다 보니 이런 일도 가능하고 염치없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숱하다.

젊은 시절은 젊은 줄 모른다.

한없이 젊음이 지속될거라고 믿거나 이미 더 이상 젊지않다고  착각하거나 

아주 긴 시간이 있다고 믿거나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다고 믿거나 나는 늘 지금의 내가 옳다고 새각했다  틀리지 않은 내가 영원히 지속될거라고 믿었다. 젊음이 계속되는 동안 지속되거나 이미 젊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계속 흘러오는 시간동안 나는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렇게 흘러내리는 시간을 나는 겪어내고 살아냈다고 믿었다.

변하지 않았다고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는데

나는 흐르는 시간에 휩쓸려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었고 상황이 바뀌었고 그렇게 변하면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거나 어쩌면 그 때 그 시간의 내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따.

사슴벌레문답에 오래오래 머물렀다.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인간은 무었으로 살아?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강철은 어떻게 단련돼?  강철은 어떻게든 단련돼


답이 있따고 길이 있따고 믿었던 질문과 계획은 널 어디선가 어그러질졌다.

길이 있고 답은 있지만 내가 생각한것과 달랐다.

어쨌뜬 답이 나오고 길은 계속되었지만 그 뿐이다.

그렇게 허무하지만 버티고 견뎌온 밀도 높은 시간과 경험들이 있었다.

어쨌든 어떻게든 하게 되...

결국 그거였다. 후회든 뿌듯함이든


엄마와 딸의 대화가 점점 짙어진다.

처음엔 툭툭 잽을 날린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마나 강한 힘을 숨기고 있는지 어쩌면  뒷주머니에 무기를 숨기고있는지 툭툭

탐색하지만 그 탐색이 애써 나를 지키려는 안간힘이 아니라  설령 뒷주머니에서 칼날이 나온다면 기꺼이 맞아주겠다는 마음?

서로에게 가지는 미안함과 그만큼의 이해가 됨이 모순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마음들이 오간다.

실버들처럼 늘어진 인연을 끊어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엉기고 질기게 이어지는 것이

결국은 잘라내기를 포기하고 그냥 그렇게 단단히 붙들고 끝을 보자는 마음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잘라내고 멀리멀리 도망갔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동안

서로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았을 것이다.

그래서 잘라냈따고 믿었던 그 실버들같이 축축 쳐진 가닥가닥들이 그냥 엉키고 설켜서 단단한 매듭같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관계라는 게 끊어내려면 쉽지 않고 그냥 두겠다 싶으면 사라진다.

좀 더 진해진 두 사람 반희와 채운의 다음이야기가 궁금하다.


마리아는 마리아구나

세상 모든 고난과 역경에서 자신의 죄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사람

언제나 속죄가 필요한 사람

태극기를 팔고 있는 그 빈 시간에서 위로를 받는 사람

우리는 타인을 늘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고 판단한다. 

배르타를 비롯한 성당 식구들이 기억하는 마리아는  인내하고 봉사하고 겸허하게 몸을 낮추는 사람이라 표현되지만 어쩌면 그들 눈앞의 마리아에게는 그렇게 관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추앙하고 너도나도 좋은 말만 보태지만 날이 바뀌면 점차 기억에서 지워낼 것이다.

베르타가 느끼는  부끄러움 역시 언젠가 그냥 지워질 것이고 마리아가 지워질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

내가 얼마나 편협한가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문득문득   내 속에서 자리잡으면

사람은 그래도 조금 더 나아지고 있닥 믿고 싶다.

별 이야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펼쳐 아무 곳이나 읽다 보면 마리아를 읽고 있다.

(책 가운데있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 많아지고 점점 딸들에게 의지하는 엄마

공주같기도 하고 누구에게나 의지하고 기대지만 누군가 자신에게 기대는 건 딱 질색인 엄마와

깜빡깜빡하는 딸롸 무심한 딸

엄마와의 식사이후 단둘이 피우는 담배가 무척 맛있게 느껴진다.

(깜빡이)


이번 엄마는 계속 자식에게 하소연한다.

딸에 대한 하소연을 아들에게 하고 있지만 결국 딸을 빗대어 아들에게 서운한 것들을 토로한다.

오익은 좋은 아들이 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엄마의 하소연 정도는 감당할 수 있따고 믿었던 걸까

본인의 지리하고 여기저기 눈치보고 깊은 마음을 주지 않은 부초같은 마음이 엄마에게도 여전하다 그러나 엄마와는 댧지만 길게 이어진 뿌리가 있다.

자식에게 죄책감을 주면 엄마는 무엇을 얻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식이 못한 걸 이야기하고 한탄하면서 대놓고 요구하지도 못하면서

은근히 알아차리기를 바라는 마음은 뭘까

어쩌면 내가 자기 욕구에 충실하고 원색적으로 요구하는 유형이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해버리는 건 

가장 불현하고 힘든 대상이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타인에게 부과해버리는 이런 유형이어서다.

그냥 읽으며 오익아 도망쳐... 라고 말하고 있었다.


기억의 활츠는 많이 마음이 아프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믿고 산다는 것

그냥 열심히 살았고 나는 내 시간에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 뒤에

문득  아파오는 것들이 있다.

숲속 국수집에서 다시 기억해는 그날의 시간들

강아지 국수 노래 활츠.. 수박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후회나 미안한 마음이 그냥 하나의 좋은 기억을 만들어줘서 감사하다는  그마음만 남게 될 것이다.

그게 뻔뻔해서도 아니고 정신승리도 아니다.

오래오래 미안하고 후히하고 곱씹다 보면 기억아나 시간들이 걸러지고 걸러져서

그 시간을  지나온 내가 대견하고 괜찮고  그런 시간을 만들어준 누군가가 마냥 고맙다.

그렇게 된다.


등장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함. 어디서 만난듯한  낯익음 

결국 나도 그렇게 뻔뻔하기도 하고 소물적이기도 하고 후회하다가도 절대 그럴지 않을거라고 극악스러워지는 사람이어서다.



타인이 이해가 되기만 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만 생기면 나이든 증거라던데..

나도 나이 먹었다..

좋아하는 작가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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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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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그가 겪은 어마어마한 시간의 밀도를 알기전에는... 그러나 타인의 성급한 판단을 뭐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시간을 나의 언어로 다시 말하거나 쓸 필요가 있다.등장인물들이 어디서 만났거나 스쳐갔거나 혹은 나일 수도 있어 조금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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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징 솔로 - 혼자를 선택한 사람들은 어떻게 나이 드는가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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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형태의 관계들

혼자 살아가며 나이 먹어가는 사람들

사회 시스템과 볍의 필요성

돌봄을 개인에게 맡겨버리는 현 상황의 여러 가지 문제들

 

우리사회에서 가장 작은 사화 단위를 가족으로 본다.

개인은 중요하지 않다.

개인이 모여 가족을 이루면 비로소 우리 사회의 가장 작은 단이가 된다.

서회 시스템을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사실 그동안 학교에서 그렇게 배워왔지만 후기 자본주의에서는 개인이 중요해졌었다.

집단이 아닌 개인주의가 많아지고 당연해지면서 그렇게 사회가 변해간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페데믹을 겪으면서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고

가족이 서로를 돌봐야 한다고 했다.

재난지원금이 가족단위로 지급되었고 개인의 행동은 모든 것이 막혀 있었다.

가족이 모든 상황에서 만능키였을까

 

그 기간동안 가정폭력은 더 많아졌다

집이 잠을 자기 위해 돌아가는 공간이었을 뿐이었던 사람들은 갈 곳이 없었다.

집을 나오는 순간 어디에도 머물 곳이 없었다.

가족이 없는 사람 가족이 없는거나 다름 없는 사람 가족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혼자 살 때 가장 걱정이 되는 건 아플 때 어떻게 할까 하는 문제다

혼자 죽을만큼 아플 때 연락할 사람이 있을까> 나를 위해 달려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수술이라도 하려면 가족이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함꼐 사는 친구도 연인도 공동체 동지도 아무 것ㄷ 할 수가 없다.

수술할 때 보호자의 동의서를 받는 관행은 이미 2007년도에 대한병원협회에서 공분을 보내 보호자의 수술 동의서가 없다고 환자의 수술을 지연시키거나 거부하면 의료법의 진료 거부 행위에 해당해 처벌이나 행정처분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직계가족인 보호자를 찾고 동의서를 요구하는 관행은 여전했다.

이 관행은 1인가구 동성커플 등 소위 정상가족의 틀을 벗어난 사람은 실제 일상을 함꼐 하는 이가 실질적 보호자가 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이는 단순히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 조건이 사회에서 쳬계적으로 무시되고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뜻하기도 한다.

 

오래 아프게 되면 누가 나를 돌봐 줄까

돌봄은 가족이 전담해야 한다는 통념을 벗어나 바깥의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는 돌봄의 관계망을 주목한다.

돌봄이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고 월차나 주말을 구성원을 돌보는데 사용하는 일종의 상호부조의 모임이 있다. 돌봄은 간병등 전문적인 도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체활동 보조와 위생관리이외 아픈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밥을 먹고 병원을 가고 산책을 하고 남겨진 반려동물이나 식물을 돌봐주는 것 등 다양하다.

 

단순하게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료받고 치료를 받고 수술을 한다는 등 단순하게 생각하다 보면 아픈 몸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모르게 된다. 모르면 아픈 이에게 점점 더 공감하기 어렵고 정상을 자꾸 요구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함께 병원을 가는 것 이상의 수준을 위해 공부를 해야한다.

서로의 몸을 봐주는 것 서로에게 신세지는 것을 받아주고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혼자 오래 살아온 솔로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아니 이건 솔로뿐 아니라 가족이 있어도 어렵다. 가족은 당연히 나를 돌봐주야 한다는 마음을 솔직히 여자들은 갖기 쉽지 않다.

내가 아프다는 사실이 죄책감이 되고 나의 병으로 인해 다른 가족구성원의 일상이 엉망이 된다는 사실에 점점 내 아픔은 뒷전이 될 수도 있다.

누구나 나의 아픔은 숨기고 남에게 폐끼치는 상황을 극도로 꺼리게 된다. 남에게 무엇인가를 도와달라고 요청하거나 부탁하는 일은 어렵고 싫어서 어지간하면 혼자 해결하려고 한다.

그런 마음은 내가 남에게 부담을 주고 페 끼치는 걸 실ㅇ허하는 만큼 다른 사람이 나에게 폐를 입히는 상황이나 부탁하는 것 혹은 타인에게 무언가를 받는 것을 꺼리게 된다.

사실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타인이 나에게 기댈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든 혼자 살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혼자서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 솔로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솔로가 되어버리는 순간이 늘 존재한다. 가족이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도 아닐 것이고 내가 나이 먹어 다른 가족이 먼저 사망할 수도 있고 멀리 떠날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이고 지금은 입에 든 음식도 빼서 넣어줄 수 있는 가족이더라도 나이가 들고 서로 서먹해지기도 하고 부담스러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내 가족에게 당당하게 폐를 끼치고 그들이 나에게 의지하는 순간을 주저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이 없다.

결국 사람은 서로 꼴을 봐주고 폐를 끼침을 주고 받는 연습을 해야한다.

 

사실 가족을 이루고 사는 성인도 자신을 스스로 돌보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들이 만나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은 언제든 쉽게 와해되고 무너질 수 있는 구성이다.

가족이라서 서로 의지가 되고 든든한 보금자리이기도 하지만 솔로들 못지 않게 가족들도 언제나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부양이라는 모두 가족의 몴으로 돌아가는 지금 그 무게에서 도망가고 싶은 구성원도 있을 것이고 더 이상 책임지고 싶지 않거나 자식에게 부모에게 짐지우고 싶은 가족도 없을 것이다.

돈이란 솔로도 필요하지만 가족안의 여성들도 필요하다.

가족이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줄지 알 수 없다.

비관적이고 너무 부정적이지 않냐고 하겠지만 사실이다.

가족이니ᄁᆞ 서로의 역할이 있고 해야할 일이 있겠지만 그 역할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가족이라고 꼭 해야하는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의무와 관계가 누군가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부담이거나 갖다버리고 싶은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행리 현상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는 상태를 존엄이 훼손된 삶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인간의 존엄이 생리 현상과 위생으로 좌우되는 그렇게 하찮은 가치일까?

치매에 대한 공포와 대안으로 안락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 배후에는 살아있을 가치가 있는 생명과 없는 생명을 구분하는 생각이 깔려 있다.

안락사를 원한다는 거침없는 생각이 어쩌면 마음 속으로 은근히 인지증이나 다른 질병 등으로 자기 결정권을 잃어버린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보는 사고방식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아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어떤 것들은 치매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이전의 삶의 흔적들을 가진 몸의 사소한 행동들이 사실은 그 사람의 삶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사람의 몸은 그저 손상된 뇌를 담은 그릇이 아니다.

누군가를 하나의 인격 또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인지능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그 사람에 대해 , 그리고 그 사람과 내가 주고받은 제스터들에 대해 내가 기울이는 관심 무의미해보이는 그 사람의 몸짓들이 의미를 갖게 하는 관계와 돌봄의 제스쳐들이다.

 

노년의 상호 돌봄에 대해

서로서로 견디는 힘만 있으면 다른 건 해쳐나갈 수 있어요 누군가를 견디지 않고 가능한, 그렇게 아름답기만한 관계가 있나요? 그런 건 없어요, 그런데 좋으니까 견디는 거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좋으니까 견디는 거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ᄁᆞ 좋으니ᄁᆞ 그만큼 어떤 부분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 거죠 누군가가 나를 감당해 주기 때문에 나도 누군가를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본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혜진의 가장 완벽한 케이크의 맛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내가 친구의 부탁을 아무말 없이 들어주게 되는 것 절대 다시는 그 부탁을 들어주징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자꾸 마음이 불편해서 그냥 들어주고 돌봐주는 주인공이 그 친구 역시 나를 봐주고 말하지 않고 견디고 있는 부분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 결국 관계라는 건 서로가 알게 모르게 기대고 의지하고 이익을 취하고 손해를 입히면서 이어가는 것이다. 하나하나 따지고 계산하지 않는 것 속상하고 억울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그 마음이 결국 관계를 계속 이어가게 만든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들 , 오늘은 꼭 해야겠다고 결심한 말들을 결국 하지 않음으로서 그 관계가 다시 이어지고 새롭게 보여지는 그순간을 누구나 경험한다. 말하지 않기를 잘 했고 내가 견뎌주기를 잘 했고 감당할 수 있어 다행인 관계들 글격 우리가 살아가는 건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가족들 사이에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도 필요하다. 따박따박 따지고 물어보고 확인하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그냥 모른 척 넘어가고 손해보는 시간도 함께 필요한 것이 사람사는 모습이다.)

 

 

현재 가족의 모습도 다양하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양한데 재도나 시스템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정상 가족모델은 여전히 존재하고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는 여전히 개인이 아니고 가족이다.

가족이 족쇄인 사람이 있고 가족이 그늘인 사람도 있다.

버리고 싶은 가족도 있고 병풍이라도 있어만 주면 좋겠다는 가족도 있다.

서로 다른 욕구가 있고 상황이 있고 관계가 있다.

조금씩 지금 변하고 있는 중일까

 

사회복지나 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내가 혼자 나이를 먹게 되더라도 가족과 함께 나이를 먹게 되더라도 생각해야할 것들이 많이 있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그저 자녀들이 돌봐주고 뒷방에서 그렇게 잊혀져 가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면 가족이 있거나 없거나 노년이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나는 나이고 여전히 욕구가 있고 취향이 있고 내일의 삶을 계획하고 기대한다.

우리 사회에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그리고 우리 생각이 어떻게 변해갈지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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