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리야르의 마지막 유작 <사라짐에 대하여>를 보고, 참으로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교보에서 보고 책값이 너무 비싸 사지 않고 구경만 한 책이다. 물론 넘겨보지도 않았다. 예쁘게 만들어 책값만 터무니없이 올린다고 생각했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이 눈에 띤 김에 빌려봤다. 도대체 민음사는 무슨 생각으로 책을 이따위로 편집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짧은 소논문 한 편 정도의 분량을 100페이지 넘게 편집해 놨다. 정말 놀라운 것은 왼 편을 아예 비워 버리고 줄 간격을 아주 시원스럽게 떨어뜨려 100페이지 단행본을 만드는 편집 기술! 정말 경탄할만하다. 그리고 편집의 승리를 자축하듯, 하드커버 장정에 가격을 1만 원으로 찍는다~

 

 

 

 

 

 

사실 가격에 비해 번역이 좋은 것도 아니다. 역자는 프루스트를 번역한 하태환 씨 인데 번역 문장들이 디지게 난삽하다(좋게 말해서! 나쁘게 말하면 개 X같다). ‘~적’을 매우 많이 남발한다. 물론 비문도 간간이 섞여 있다. 번역된 본문을 잠깐 옮겨 본다.

 

 

나는 유일 세상의 자동 기록일 수 있는 어떤 이미지를 꿈꿔 본다. 그 유명한 비잔틴의 논쟁 속에서 성상 파괴주의자들이 꿈꿨던 바로 그런 이미지 말이다. 그들은 예수의 얼굴이 새겨졌다는 베로니카 베일처럼, 신성이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만 진정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것은 사진 필름의 음화와 유사한 일종의 데칼코마니로서, 인간의 손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신성한 얼굴의 자동기록이었다. 반대로 그들은 인간의 손으로 제작한 모든 아이콘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그것들이 신성의 시뮬라크르에 불과했다.

반대로 사진적 행위는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손이 게임되지 않은’ 것이다. 현실과 현실의 생각을 거치지 않은, 빛의 자동 기록인 사진은, 따라서 이런 자동성에 의해 인간의 손으로부터 해방된 세상 그대로의 원형일 것이다. 극단적 환상으로서, 순수한 흔적으로서, 그 어떤 시뮬레이션도 없이, 인간의 개입도 없이, 세상은 스스로를 생산하고 있는데, 그것은 특히 진실로 귀착해 버리지 않는다. 인간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최고의 인위적 생산물, 그것은 바로 진실이고, 객관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pp66~67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저런 문장들이 나열된다. 해당 소 챕터(이 책은 5개의 소 챕터로 돼 있다)를 3번 정도 읽으면 대충 이해할 수 있지만, 처음 책을 펼쳐 쭉쭉 읽어 나가면 도대체 뭔 소린지 맥락을 잡을 수 없다. 물론 내가 지하철에서 주로 읽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집에서 정독 해 본 결과 이건 매끄럽지 못한 번역 문장 탓이 크다는 걸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됐다.

 

 

줄친 부분을 위주로 봐 보면, 역자는 우리말 통사구조를 아주 우습게 초월(?)하고 있다. ‘유일 세상의 자동 기록’ 이라니. ‘자동 기록’이 ‘사진’을 가리킨다 하더라도 이를 형용하는 구로 ‘유일 세상의’라니, 이건 뭐 영어 문장 해석 시간인가..

 

 

밑에 ‘사진적 행위’는 어떻고. 짜증의 파고가 오를 찰나 ‘인간의 손이 게임되지 않은’이 연결 된다. ‘썅~’ 소리가 절로 나며, 첨 읽을 때 책을 던져버릴 뻔했다. 이걸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번역했다? 하하, 그러고도 민음사는 1만원의 책값을 쳐 받는단 말인가?

 

 

마지막 두 문장은 매우 난해하다. 줄친 문장의 주어는 ‘세상은’이다. ‘세상은 특히 진실로 귀착해 버리지 않는다.’ 당췌 어색하다. 물론 반복해서 읽으면 어떤 의미인지 대략 알겠다. 아마도 이런 의미이겠지. 사진 렌즈에 비친 세상은 인간의 개입 없이(사진가의 의도가 있는 ‘찰칵’ 찍는 행위 없이) 존재하지만 진실이 아니라는 거. 진실은 인간에 의해 구현된 ‘사진(인위적 생산물)’이기에. 이 내용을 위처럼 번역해 놓은 거다.

 

 

처음 읽으면 맥락을 놓치기 일쑤다.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을 매우 난해하게 번역하는 게 이 번역자의 특기인가 보다. 물론 보드리야르의 문장 자체가 난해하고 수사적 기교가 현란해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건 번역자의 몫이다. 보드리야르가 자국의 고등교육을 받는 프랑스인들이 한 번 읽어 무슨 소린지 모를 문장으로 책을 쓰지는 않았을 거다. 내가 기억하기론, 보드리야르는 글을 어렵게 쓰는 사상가가 절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건 역자가 우리말 표현 능력이 딸려 읽기 힘들게 번역한 탓이 크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시뮬라르크가 구현하는 세계의 극단은 어떨까’라는 것. 세상이 과학적으로 발달할수록, 세상이 객관화될수록 인간이라는 주체는 점점 제거되어가다가 마침내 소멸된다는 게 이 책의 핵심 요지이다. 읽고 나니, 이 책을 다 읽을 필요도 없었다. 첫 소 챕터인 ‘아르키메데스의 점’에서 아주 명확하게 정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명명되고 나면, 필히 기울기 시작한다. 하나의 사물이 명명되고, 재현과 개념이 그 사물을 포박하는 순간은 바로 사물이 그 에너지를 상실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러다 결국엔 하나의 진실이 되거나 이데올로기로서 강제되고 만다. 프로이트에 의한 무의식의 발견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은 그 개념이 나타나면 사라지기 시작한다. (중략) 그러니까 실재는 개념 속에서 사그라진다. 그러나 그 반대의 움직임은 더욱 역설적이어서, 개념과 생각도(물론 환상, 유토피아, 꿈과 욕망도) 그 실현 속에서 사그라진다. 모든 것이 현실성 과도로 인해 사라지면, 그리고 인간이 무제한의 기술 전개 덕분에,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자기 가능성의 극단에 이를 수 있게 되면, 그러면 인간은 자신을 추방하는 인위적 세상에 자리를 넘기면서 사라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최고단계의 유물론적 성과에 자리를 넘긴다. 그 세상은 완벽하게 객관적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볼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pp18-19

 

 

내가 좀 수고를 들여 본문을 인용한 것은 바로 위 부분이 이 책에 담겨 있는 핵심 사상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소챕터들, 즉 [사라짐의 예술], [헤게모니와 디지털에 대하여], [이미지에 가해진 폭력], [이중성] 등은 이 총론적 주장의 각론 쯤 된다. 이를 요약하면 이렇다.

 

 

예술 자체도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만 존재하고, 모든 현실의 갈등은 디지털화된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사라진다. 이미지에 가해진 컴퓨터 합성의 폭력으로 인해 인간 고유의 이중성은 인간을 버린다. 그러면 인간 고유의 이중성은 사물들 속으로 옮겨 가고, 모든 비평적 사유가 사라진다. 모든 것의 소실점이 완성되고, 모든 것은 침묵한다.

 

 

 

원래 이렇게 친절하고 자세한(?) 리뷰를 작성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번역도 그리 좋지 않으면서, 가공할(?) 편집 능력을 발휘해 책을 비싸게 내놓는 민음사를 성토할 생각으로 글을 시작했다. 하지만 능력도 안 되면서 이 책의 핵심을 요약한 것은 독자들을 위해서다. 보드리야르의 마지막 유고라는 유혹으로 이 책을 구입하지 말라는 거다. (아, 품절인가. 불행 중 다행이다!) 읽지 않으면 더욱 좋고!

 

 

번역이 매우 x같이 돼 있어, 읽으면 혈압이 오르고 신경질이 도진다. 이것도 이해하지 못하다니, 내가 바보가 아닌가, 하는 심한 자괴감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당신이 이해 못해서가 아니라 번역이 거지같아서 그런 거다. 번역에 대한 짜증은 위에서 이미 언급했다. 헌데 번역 문제는 민음사의 ‘편집 장난’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

 

 

정말 심한 빡침을 감내해야 했다. 물론 내가 책을 구입해서 읽지는 않았지만, 출판사의 이런 관행은 정말 없어져야 하는 악폐 중 하나다. 독자들이 나서 박멸할 의지를 천명하지 않으면 출판사는 이런 만행을 서슴지 않고 지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줄곧 이를 경험해 오고 있으니..

 

 

사실 2007년에 갤브레이스의 마지막 유고 <갤브레이스에게 듣는 경제의 진실>을 읽고 매우 빡쳤었다. 왜냐, 이 책이 A4 30장을 채울 수 없는 분량이었기에. (열 받아 내가 그냥 본문을 타이핑 해 봤다.) 그리고 책값은 1만원이나 쳐 받았다. 물론 나는 서평 도서로 받았다. 하지만 빡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아, 근데 <사라짐에 대하여>는 정말 쌍 욕이 절로 나온다. 글자 수를 헤아려 보니, 이 책의 총 자수는 약14,154자 정도 된다. 오차 100자 범위 내. 얍삽한 편집이라, 일반 인문서와 비교를 해 봐야 민음사의 만행이 드러난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삼성출판사의 <죽음에 이르는 병>(오래 전 출간된 책이다. 1990년판)과 비교해 보면 정말 경악할 수준이다.

 

 

삼성출판사의 ‘세계의 사상’ 시리즈는 빡빡하게 편집돼 있는 걸로 정평이 나 있는 책이다. 한 페이지에 33줄. 한 줄당 약 30자. 자수를 비교해 보면 <사라짐에 대하여>는 <죽음에 이르는 병>의 14페이지(단7장) 분량밖에 안 된다. 이를 1만원에 판다? 출판사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편집으로 책을 판단말인가.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새우깡을 1만원에 파는 격이랄까.

 

 

(저 분량을 1만원에 팔고 있는 민음사의 <사라짐에 대하여>)

 

 

그냥 제대로 편집해서, 하드커버 말고 페이퍼백으로 40페이지 분량으로 편집해서 5천원만 책정했어도 이런 성토는 하지 않겠다. 이건 출판사 양심의 문제다. 더 이상 이런 페이지 늘리기 식 편집은 독자를 우롱하는 짓이라는 걸, 출판사가 꼭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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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6-05-27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또 공감!!!

yamoo 2016-05-30 13:53   좋아요 0 | URL
공감하신다니, 저와 같은 출판사의 만행을 겪으신 거군요~^^
출판사의 저런 편집 만행은 없어져야 합니다!

cyrus 2016-05-28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량이 많지 않은 책에 터무니없이 가격을 높게 책정하면, 불 보듯 뻔합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1만 원이라면 독자들이 지갑을 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현실을 그렇지 않죠. ^^;;

yamoo 2016-05-30 13:54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1차적으로 사 주니, 저런 만행을 저지르는 거 같아요. 도서관용으로만 적은 부수 인쇄해서요. 일반 독자가 사려면 진짜 열받지요. 제발 저런 편집 만행은 없어졌으면 합니다~

oren 2016-05-2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쪽이 넘고 가격도 1만원이나 하는 책이지만, 여느 다른 책들처럼 빽빽한 편집으로 바꿀 경우 고작 14쪽 분량에 불과하다니 정말 `편집 기술`이 놀랍네요.

그나저나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의 사상’ 시리즈를 정말 오랫만에 실물로 다시 보니 너무 반갑네요. 제가 20대 초반에 주로 읽었던 책들이 바로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저 시리즈였거든요. 지금은 실물로는 단 한 권도 가지고 있질 않으니, 그 책의 모습만 봐도 감개무량입니다. 그 당시에 저 책들에 코를 박고 책을 읽던 시절에 맡았던 `향기로운 책냄새`가 제 코끝을 다시 스치는 듯한 착각마저 생길 정도로요.. 그 사라진 책들과 냄새들이 너무 그립네요...

yamoo 2016-05-30 13:56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시리즈를 차근차근 한 권씩 모아서 이제 시리즈 전집을 다 구비했습니다. 그러니 이 책 판본의 역사가 들어오더군요. 세로쓰기에서부터 시작해서 하얀 바탕에 파란 색 표지, 하드 커버에 이르기까지 4종류 이상이나 되는 거 같습니다.

읽어보니 지금도 당시 번역이 상당히 괜찮았던 걸로 생각하고, 지금도 찾아 읽고 있는 와중에 있습니다^^

노너 2016-10-17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한 편집과 디자인에 대해서는 백번 동감합니다. 다만 분량과 가격에 대한 의견은 동의하기 어렵네요. 중세시대처럼 책을 근수 달아서 파는 것이 아니고, 저로서는 이론서나 문학서 중에서도 고도로 짜인 책과 짜깁기 책이 있다면 전자가 몇배 비싼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책 가격에 대한 저항이 너무 높아요. 무엇보다 이 책의 원서는 물론 한국어판처럼 `코드`로 한쪽을 채우는 짓은 안했고 `브로셔` 시리즈로 나왔지만 9.6유로입니다.

yamoo 2016-10-19 20:56   좋아요 0 | URL
책을 근수달아서 파는 곳도 있습니다~ --;; 신개념 헌책방으로 제가 많이 구매하고 있습니다. ㅎㅎ 중세가 아니라도 책을 근수로 파는 곳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ㅎ

9.6유로 정도에 맞게 제대로 만들면 좀 비싼 책이구나 하겠지만 편집이 저러니, 욕을 할 수밖에요..--;;
 

비도 오고 기분도 꿀꿀한데, 사진 한 장 때문에 너무 웃어 우울한 기분이 날라갔네요..ㅎㅎㅎ

 

뒷북일 수 있지만, 혹시 모르니, 재 서재에 들르신 분 중 이 사진으로 시원하게 웃고 가셨으면 합니다~ㅎ

 

전 너무 재밌게 봐서, 배가 막 아팠다는..

 

동물, 특히 개 기르시는 분들이 보시면 훨씬 재밌을 듯..ㅎ

 

 

 

발 좀 씻지....개가 죽을라고 하네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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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5-24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
애완견 키우는 한 사람으로서 정말 보는 순간 빵 터지네요.
고맙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yamoo 2016-05-27 14:05   좋아요 0 | URL
저 이거 보고 첨에 웃겨 밥도 못 먹었슴다~ㅎㅎ
근데, 이 거 본 분들 꽤 많은 듯..ㅎ

아, 스텔라 님두 애완견 키우시는 군요~ 요즘 반려 동물 학대로 뉴스에 연일 이슈화 되고 있습니다. 싫증 나면 보린다는 군요. 헐~

cyrus 2016-05-24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개의 후각은 알아줘야 합니다. ㅎㅎㅎㅎ

yamoo 2016-05-27 14:06   좋아요 0 | URL
얼마나 냄새가 심했으면 저랬을까요? 아님, 순전히 편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어쨌든 재밌는 사진임에는 틀림 없어요..네..ㅎ
 

알라딘 검색무력화 도서 (5)

<정치사상 강좌>, 칼 프리드릭, 법문사, 1981

 

 

칼 요하임 프리드리히(프레드릭)의 <정치학사상 강좌>라는 책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본 것은 아주 오래 전 동아일보 신간 소개란(내 기억에 저자가 '칼 프리드리히'라 표기 돼 있었다!)에서이다. 신문의 서평을 보고 책을 사 볼 요량으로 대형 서점에 갔는데, 이상하게도 이 책을 구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자가 C.J. 프리드릭 으로 표기 되어 있는 거다. 책 제목도 <정치사상강좌>. 내겐 참으로 황당한 사건이었는데, 어찌됐건 당시에 난 이 책을 읽지 못했다.

 

사실 이 책이 필요한 이유가 ‘내 멍청함’에서 비롯했다. 정치학 수업 시간에 교수가 중간고사 겸 페이퍼 숙제를 내줬다. 흑판에 페이퍼 주제를 ‘자유선택’이라 썼다. 난 이걸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유 선택]의 문제라니, 참으로 어렵군!’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난 페이퍼 주제가 정말로 ‘자유 선택’의 문제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자유와 제약’에 대한 페이퍼를 작성해 제출했다. 작성하면서 얼마나 머리에 쥐가 났는지 모른다. 다 쓰고 나서야 자기가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제출하라는 걸 알았다. 얼마나 내 멍청함을 자책해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모, 당시 나의 멍청함이 ‘자유’라는 주제에 대해서 아주 심도 깊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나 스스로 제공받아 내심 위안을 삼고 있다. ‘자유’라는 주제가 얼마나 큰 개념인지 난 그때 보고서를 쓰면서 처음 알았다.

 

‘자유’는 철학과 정치학 그리고 경제학, 사회학, 법학, 행정학 등 소위 ‘이데올로기 학문’라고 일컬어지는 제학문에 걸쳐있는 중요 주제였다.

 

그래서 나는, 개인의 자유를 토대로 하여 정치철학적 자유와 이데올로기적 자유의 개념을 차례로 검토해 나갔다. 출발은 칸트의 자유관으로부터 시작했는데, 제도적 자유의 개념에 이르러 논의가 막혀버렸다.

 

그냥 쉽게 ‘자유의 차원’을 언급해 주기만 하면 됐는데, 논점을 제대로 잡지 못해 우와좌왕 한 꼴이 되어, 페이퍼를 정리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칼 프리드리히의 <정치사상 강좌> 한 권만 봤어도 엄한 시간낭비는 하지 않아도 됐을 터였다.

 

이 책 1장이 바로 ‘자유의 차원’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 2장 자유주의의 교리까지 봤다면 난 페이퍼를 아주 쌈박하게 정리해서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을 거다. 그만큼 이 책은 ‘자유’와 ‘자유주의’의 개념과 발전을 아주 잘 정리해 주고 있다.

 

한 마디로 프리드리히의 <정치학사상 강좌>는 자유와 자유주의에 대한 책을 쓸 때 반드시 언급해 주고 넘어가야 할 중요 저작이라는 거다.

 

비록 이 책이 하버드에서 행한 정치학 입문 12강좌를 녹음하여 출간한 책이지만, 노교수의 학문적 역량이 집결된 중요 저작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이유가 광범위한 주제를 매우 쉽게 설명한 책이라서 학생들의 관심이 고조되었고, 결국 강좌를 녹음하여 출간까지 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주의’를 논한 책이라면, 누구든 하이예크의 <자유주의>와 칼 프리드리히의 <정치사상 강좌>는 중요 참고문헌으로 반드시 언급해야 될 책이라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유주의’는 ‘자유’의 철학적 논의로부터 파생된 이데올로기 개념이기 때문이다. 정치학에 기반한 ‘자유주의’ 연구이건, 아니면 경제학에 기반한 ‘자유주의’ 연구이건 ‘자유의 차원’은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야하는 소주제이기 때문이다.

 

헌데 근래 읽었던 이나미 씨의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책세상, 2001)은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와 <정치사상 강좌>가 완전히 빠져 있다. 중요 서지 목록에도 없고 추천도서에도 없다. ‘자유주의의 기원’이라는 타이틀을 단 책이 ‘자유의 차원’도 다루지 않다니, 개인적으로 실망을 많이 한 책이다.

 

어쨌거나 칼 프리드리히 박사의 <정치사상 강좌>는 매우 평이하면서도 정치학의 주요 논점과 쟁점을 일별할 수 있게끔 정리된 명저다. 프리드리히 교수가 밝힌 이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정치학계에서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던 6가지의 기본적이면서도 영원한 문제들을 선별하여, 한 강좌에서는 그 쟁점의 성격을 제시하고, 그 다음 강좌에서는 주어진 특정문제에 중요한 공헌을 한 한 두 명의 고전적 학자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가 하는 점을 밝혀 보았다.

 

아직까지 절판인데, 하루 빨리 재간되길 바라마지 않는 책이다. 특히 책의 말미에 있는 참고문헌은 정치학을 공부하는 또는 정치학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일급 목록이다.

 

 

목차

역자서문

서문

제1강좌 자유의 차원 …………………………………………………………… 9

제2강좌 자유주의의 교리 : 로크와 밀 ……………………………………… 23

제3강좌 혁명과 사회정의……………………………………………………… 37

제4강좌 맑스와 맑스주의 그리고 전체주의적 도전 ……………………… 50

제5강좌 정의와 엘리트의 기능 ……………………………………………… 64

제6강좌 플라톤의 정의의 개념과 정치 엘리트 …………………………… 78

제7강좌 공동체와 질서………………………………………………………… 92

제8강좌 아리스토텔레스 : 정치공동체의 철학자 …………………………107

제9강좌 권력과 권위 ………………………………………………………… 124

제10강좌 마키아벨리와 홉스 : 정치권력의 이론가들………………… 137

제11강좌 정치적 평등과 평범한 인간…………………………………… 156

제12강좌 루소와 칸트에 있어서의 평등………………………………… 171

참고문헌……………………………………………………………………… 187

 

 

저자

칼 프리드리히 : (현재 고인이 되었음)

- 전) 하버드대 Eaton Professor of the Science of Goverment

- 전) 하이델베르크대 정치학과 교수

- 전) 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회장

- 전) International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부회장

- 전) Institut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Politique 회장

- 전) Institut fuer Politische Wissenschaft 소장

주요 저서

- Constitutional Goverment and Democracy

- Inevitable Peace

- The Philosophy of Kant

- The Age of the Baroque

- The Philosophy of Hegel

- Totalitarian Dictatorship and Autocracy(Z.Brzinski 공저)

- The Philosophy of Law in Historical Perspective

- Transcendent Justice

- Man and His Government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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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2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에크의 책도 거의 절판된 게 아쉬워요. 이 책들 대부분이 자유경제원에서 나온 거라서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자유경제원이 정신 차리고 하이에크 책이나 제대로 번역해서 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거긴 이미 썩을 대로 썩은 단체라서 정신 차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

yamoo 2016-05-23 21:36   좋아요 0 | URL
엔날 자유경제원에서 나온 책 중 건질만한 책들이 꽤 됐습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 번역서들이 몇 권 있었지요. 저는 20여 권 정도 구매했습니다.

많이 썩었나 봐요..ㅋㅋ 전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공병호는 정말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자유경제원이 상태가 아주 안 좋은 지경에 까지 이르렀나 보군요..ㅎㅎ
 
 전출처 : 중고서점지기님의 "알라딘 중고서점 수유점 오픈 "

5월 17일 알라딘 중고서점 수유점에 갔다 왔다. 길음에 일이 있어 가는 중에 알라딘 중고서점을 검색하려고 접속했는데, 이런! 또 한 곳의 알라딘 중고서점이 오픈한 거다!! 이번엔 수유역 점이다.

 

(보다시피 공간은 적은 편이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가 양 옆이 공간의 전부나 마찬가지. 이 서고 뒤는 계산대와 카페 공간이다.)



하~ 알라딘이 일년에 중고서점을 2-3개 씩 오픈하는 거 같다. 더군다나, 연신내점부터인가, 중고서점 넓이를 줄이고 대신 카페를 함께 오픈하는 모양새. 알라딘이 카페 사업에 용감한(?) 투자를 계속하고 있는 모양새다.

누누이 얘기하지만 중고서점과 카페는 뭔가 궁합이 맞지 않는 듯한데 말이다. 아니, 첨에는 신림점의 빈 공간을 보면서 생각했더랬다. ‘저 빈공간을 차라리 카페로 활용하면 좋을 텐데’. 지금도 역시 공간은 비어 있다.

헌데 사람들의 행태를 면밀히 분석해보고, 수지타산을 얼추 계산해 본 결과 알라딘 중고서점 내에 카페를 여는 것은 거의 흑자를 볼 수 없는 시도라는 거.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알라딘 중고서점 카페가 지향하는 바는 일명 스페셜 커피다. 요즘 점점 시장세를 확대하고 있는 스페셜 커피. 타 스페셜 커피 전문점에 비해 가격이 약간 싸다는 장점은 있지만 커피가 되게 맛이 없다는 거. 이게 치명적이다.

사실 이 커피가 맛있다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수익성이 높지 않은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메리트는 있다. 맛있는 스페셜 커피를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4천원에 먹을 수 있다면, 그 맛을 찾아 오는 수요도 분명 있으니까.

하지만 알라딘에서 팔고 있는 커피는 정말 맛이 없다. 적어도 헬커피 수준은 돼야 어느 정도 장사가 되는데...쩝~

어쨌거나 요즘 오픈하는 알라딘 중고서점들은 공간의 넓이보다는 카페에 방점이 찍히는 듯하다. 내가 가본 카페가 있는 연신내점, 합정점, 수유점은 모두 면적이 그리 크지 않다. 거의 건대점 정도의 공간에 단층 구조. 책 수량 역시 분당점의 1/3 수준이다.

 

(카페의 의자와 책상은 원목으로 나무랄 데 없다. 작은 테이블들이 다른 알라딘 카페보다 많은 듯하다.)



하지만 점점 역과의 근접성은 좋아지는 듯하다. 합정점은 역 출구에서 나오면 10미터 전방에 위치해 있고, 수유점 역시 수유역 2번 출구로 나와 보이는 첫 건물 2층에 입점해 있다. 단지 아직 오픈한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알라딘의 상징인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토요일(5월 14일)에 오픈했다고.

알라딘 중고서점 홈피에 있는 약도도 좀 수정해야 할 듯. 수유역 2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면 안 되고, 출구로 나와 뒤로 약 15미터 정도 이동해야 알라딘 특유의 나무 출입구를 발견할 수 있다.

헌데, 여닫는 문이 없다! 그냥 슉 들어가면 알라딘 특유의 한국 문학가 흑백 삽화들을 만날 수 있다. 붙인지 얼마 안지나 그런지 냄새가 장난 아니다. 아파트 새집증후군에서 보여주는 냄새는 약과다. 들어가면 아주 강렬한 냄새가 온 몸을 휘감는다. ^^;;

얼른 위층으로 올라가면 냄새는 사라지고 알라딘 서고들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문은 2층에 올라와봐야 보인다. 화장실은 알라딘 서점 내에는 없는 듯하다. (일단 건물 밖으로 나가 돌아서 찾아가야 하는 듯.)

직원들이 아직 훈련이 덜 되어 좀 버벅거리는 느낌이다. 직원들도 별로 없다. 책을 팔러오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구매하여 분류를 기다리는 책들도 거의 없다. 전체적으로 매우 한가한 느낌. 방문한 시간 대가 오후 3시 경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전체적인 책 값은 확실히 롯데타워점 보다는 싸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출간일 1년 미만의 책들은 정가 대비 20~30% 정도 할인율을 보이고 있다. 정가 15000원 짜리가 11000원 정도 책정된 듯.

수유점은 새로 오픈해서 그런지 골라올 책들은 꽤 됐다. 20여 권 정도 골랐지만, 5만원 대 가격을 맞추기 위해 오랜(?) 선별작업을 행한 끝에 12권을 구매했다. 5월1일부터 오늘까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만 구입한 책이 62권이다. --;; 다시 책 수집 병이 도진 듯. 비용은 23만5천700원.

알라딘 노원점은 너무 멀었는데, 그나마 수유역에 중고서점이 오픈해서 좀 다행이다. 4호선 라인에 산본점, 대학로점, 수유점, 노원점 총 4개 지점이 되었구나. 그러고 보니 4호선 라인에 있는 지점들은 크기가 모두 작은 듯. 이수역 부근에만 생기면 완전 대박일 듯..

알라딘 중고서점. 다음 오픈 지점은 어디일지 무쟈게 궁금하다!

 


알라딘 수유점에서 구입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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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5-1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엔 카페 때문에 2층에 매장을 내는가 봅니다.
강남점은 아직도 지하던데...
강남점도 카페를 겸하고 있다면 좋다는 생각이 들까요?
저는 예스24가 훨 좋더라구요.

yamoo 2016-05-22 19:59   좋아요 0 | URL
카페 때문에 2층 매장을 내는 게 아닌거 같아요. 합정점의 경우는 지하임에도 카페가 있어요~ㅎ

제가 수도권 알라딘 지점들 다 돌아다녀 봤는데요(아, 수원점 제외) 지하와 지상이 나눠져 있어요.
지하 : 강남, 건대, 노원, 대학로, 부천, 분당, 산본, 신림, 신촌, 잠실, 종로, 합정
자상1층 이상 : 연신내, 일산, 수유
대세는 지하이고, 지상 1층 이상은 현재로서는 아주 적습니다.

저두 예스24가 훨씬 잘해 놓았더라구요. 단지 검색시스템은 매우 불편하더이다..ㅎ

2016-05-19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6-05-22 20:00   좋아요 1 | URL
전 계속 사재기하고 있어요..ㅋㅋ 갈 때만다 평균 10권 이상씩 쓸어담아 옵니다..ㅎ
클랐습니다..ㅜㅜ

cyrus 2016-05-19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점 개장한 지 얼마 안 됐을 땐 손님이 많지 않고, 책 보급률이 낮은 편이에요. 그래도 주의 깊게 잘 보면 좋은 절판본을 만날 수 있어요. 역시 서점에 가면 손님이 많이 없을 때가 좋아요. 손님이 북적거리면 책장을 관찰할 수가 없어요. 손님들의 움직임에 신경 쓰입니다. ㅎㅎㅎ

yamoo 2016-05-22 20:01   좋아요 1 | URL
그래요, 주의 깊게 잘 보면 절판본이 보이더이다...ㅎㅎ 아주 잘 봐야해요..ㅎ
그쵸, 손님이 많이 없어야 자세히 잘 볼 수 있죠. 사람 많으면 좋은 책을 먼저 선점하기가 힘들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9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자정의 픽션 반갑네요. 박형서가 은근 짧은 단편을 잘 씁니다..

yamoo 2016-05-22 20:01   좋아요 0 | URL
누가 박형서 단편이 좋다구 해서 함 읽어보려구요~ㅎㅎ 한 강 작가 대신 전 박형서 읽게 생겼습니다..ㅋㅋ

감은빛 2016-05-20 1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연신내점이 생긴 후로 40여 년 운영했던 대표적인 헌책방이 문을 닫았어요.

집에서 가깝지만 아직 한번도 안 가봤고, 앞으로도 갈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책은 가능하면 동네서점에서 사려구요.

yamoo 2016-05-22 20:05   좋아요 1 | URL
헛! 그 헌책방이 로데오 거리에 있는 그 헌책방인가요? 서점 쥔장께서 연신내점 생기고 힘들다고 하셨었는데...연신내점 생기고 2주 후인가, 거기 서점 가서 책사고 주인 아저씨와 이야기 하고 왔는데요, 정말 문을 닫았는지요? 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진짜 오프라인 헌책방을 다 죽이는 거 같습니다..ㅜㅜ

저는 주로 절판된 책을 주로 사러 가는지라...동네 서점을 이용하기 힘듭니다.

그나저나 감은빛 님 반갑습니다~ 연신내 점 그 헌책방 함 가봐야 겠네요~ 진짜 그 서점이면 어쩌지..ㅜㅜ

페크pek0501 2016-05-20 1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중고서점, 우리 동네에도 생겼으면 좋겠네요.
제 눈이 호강할 것 같다는...

사진 속 책장의 책을 보니 책은 참 잘생겼어요~~.


yamoo 2016-05-22 20:07   좋아요 1 | URL
어디 사시는지 모르지만 대체로 알라딘 중고서점은 유동인구가 좀 되는 곳에 위치하는 거 같습니다.

요즘 알라딘 중고서점 책값이 착하지 않아서 물만이 많아요. 이제 알라딘의 매력이 점점 가시는 거 같습니다만..단기간에 너무나 많이 생기는 거 같아, 좀 거시기 하긴 합니다..

우유쿠키 2019-09-14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반, 아이돌 앨범도 있나요?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드디어 영국의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고 있다. 연일 우리문학의 힘을 세계가 알아줬다고 언론에서 호들갑을 떤다.

 

 

 

 

급기야 아버지 한승원 작가의 인터뷰도 실렸다. 소설가로서 딸의 수상을 어떻게 평가하냐는 질문에 한승원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문학동네, 민음사 등 큰 출판사들이 지원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이 자랄 수 있었다. .... 우리 세대 때는 좋은 번역가를 만나지 못했지만 ... 이제 한국문학번역원이나 정부에서도 힘을 기울여 번역자를 양성하고 이번에 좋은 번역자를 만나서 햇빛을 보게 된 듯하다.”

 

 

 

나는 창비, 문지, 문동, 민음사 등 큰 출판사들이 작가를 지원해서 이번에 부커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번 수상이 한국문학번역원이나 정부의 지원으로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번역해서 수상작을 낸 사례가 아니지 않는가?

 

 

뉘앙스를 보면, 한국에서 좋은 번역을 지원받아 작품이 햇빛을 보게 된 것처럼 읽혀진다. 이런 걸 아마도 ‘호도한다’고 표현한다지?

 

 

지금까지 우리나라 주요 작품들이 꾸준히 불어나 영어 또는 독일어로 번역되어 해당 국가에 소개되고 있는 줄 안다. 그 최초가 내가 기억하기론 이승우의 <생의 이면>이었던 걸로 안다. 프랑스에 최초로 번역된 우리나라 현대 작가의 작품이라고.

 

 

 

 

아쉽게도 <생의 이면>은 프랑스 콩쿠르상 아니, 매디치상이나 르노도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내가 꼽는 우리나라 최고의 작품 중 하나가 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작품은 세계에서 경쟁력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선정된 걸로 봐서는 우리 문학의 경쟁력이 아예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걸 간접적으로 확인했다. 결국은 번역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그 나라 토박이가 우리말을 배워 영어로 제대로 옮겨야 우리문학이 갖는 힘이 제대로 전달된다는 사실 말이다. 이를 이번 부커상 수상 사례로 확실히 인지하게 되었다.

 

 

나는 순전히 이번 맨부커상 수상의 공로를 데보라 스미스에게 돌리고 싶다. 아무리 우리나라 작품이 좋다고 한들, 번역이 그 작품에 베인 감정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면 밋밋할 수밖에 없다. 줄거리가 아무리 재밌더라도 문학성은 떨어질 수밖에.

 

 

시나 소설이나 문학작품은 작품 속에 내재된 그 강렬하고 독창적인 느낌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느냐가 그 작품의 성공의 시금석이기에 그렇다. (역시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는 맨부커상 심사위원장인 턴킨의 심사평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채식주의자>를 가리켜 "잊을 수 없을만큼 강렬하고 독창적이다. .... 이 치밀하고 정교하며 충격적인 책은 독자들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며 꿈에까지 나올 수 있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덧붙이길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은 스미스의 번역은 매 순간 아름다움과 공포가 묘하게 섞인 이 작품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턴킨 심사위원장이 말하는 ‘강렬’, ‘독창’, ‘치밀’, ‘정교’, ‘충격’, ‘아름다움과 공포가 매 순간 묘하게 섞인’ 등의 표현 속에는 번역이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공동 수상을 정례화 했는지도..)

 

 

한강 작가가 쓰고자 했던 느낌을 스미스 씨가 영어로 얼마나 잘 구현했는지 대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는 ‘완벽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한강 작가와 동등하게 공동 수상하며 상금을 반씩 나눠가졌다.

 

 

번역가의 위상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 생각한다. 번역을 창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라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풍경이다. 만일 한국문학번역원이 이 <채식주의자>를 번역했으면 아마도 부커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하지 않았을까.

 

 

더 놀라운 것은 번역자인 스미스 씨가 한국어를 배운지 6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스미스 씨는 지난 3월 우리나라 한 언론 매체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번역은 시를 쓰는 일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작가가 되고 싶어 번역가가 됐다고.

 

 

당시 그는 "번역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적 감수성"이라며 문맥에 맞는 두 음절 형용사를 찾으려 며칠간 머리를 쥐어짠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과연 우리나라 번역가들은 스미스 씨처럼 “문맥에 맞는 두 음절의 형용사를 위해 며칠간 머리를 쥐어짠‘ 경험을 얼마나 경험하고 번역을 했는지 묻고 싶다.

 

 

왜냐하면 서양의 명저들이 한국어 번역본으로 재단장하고 나올 때마다 ‘값비싼 쓰레기’로 둔갑해 버리는 기이한 경험을 매번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 덴마크 최대 문필가 중 한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키에르케고의 <죽음에 이르는 병> 그리고 유럽 제1의 작가라고 평가받는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 등은 모조리 한국어로 읽을 수 없는 수준으로 전락한 명저 번역본들이다.

 

 

 

 

 

 

 

 

 

 

내가 최근 들어 읽은 알베르토 바스케스 피게로아의 대표작 중 하나인 <우리 모두 잘못이다>(책세상, 2005). 이 책은 정말 가독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번역이면서, 작가가 의도했던 신랄한 풍자와 유머가 거세되어 버린 채 한국어 판본이 됐다. (물론 이 작품은 위에 열거한 작품과는 격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나름 읽을 만한 세계문학 작품 중 하나이다.)

 

 

역자는 정구석 씨인데, 번역이 얼마나 유치하고 조잡한지 한 대목만 소개해 보겠다. 내가 읽어왔던 다른 세계문학 작품 역시 여기서 오십보백보다.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사람이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비참함을 줄이는 데 자신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데 사용하길 원한다면, 부유층이 테러 행위를 척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지금의 부당함을 추방하는 것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할 때, 모든 것은 조화를 잃게 되는 것이요.” p422

 

 

완전 번역투의 한국어 문장이다. 우리말의 결을 살리고 작가가 의도한 느낌을 제대로 살리는 번역은 저따위 식의 문장으로 나열되지 않는다는 것 쯤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냥 우리나라 작가 소설책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저런 문장을 만날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헌데, 이건 매우 귀여운 수준(?)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한 번씩은 들어본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번역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수준이다. 이게 어떻게 좋은 번역의 모범이라고 상찬 받고 있는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 (나도 3-4번 읽고 나서야 번역이 개판 5분 전이라는 걸 알았다.)

 

 

베르그손 전문가라고 공히 회자되는 송수영 씨가 베르그손의 주저에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한 대목만 소개해 본다. <창조적 진화>(아카넷, 2009)

 

 

 

 

 

모든 일이 진행되는 양상은 마치 생명적 형태들을 통해 진화하는 힘은 제한된 힘이어서 자연적이거나 선천적인 인식의 영역에서 하나는 인식의 외연과 관련되고 또 하나는 내포와 관련되는 두 종류의 한정 사이에서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전자의 경우 인식은 풍부하고 충만할 수 있지만 그것은 특정한 대상으로 한정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 인식은 대상을 제한하지 않지만 그것은 질료 없는 형식일 뿐이어서 아무것도 더 이상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호 함축하고 있던 두 경향들은 성장하기 위해 분리되어야 했다. 그것들은, 각각 자신의 쪽에서, 행운을 찾으러 세계로 나갔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본능과 지석에 도달했다. (p229)

 

 

 

줄친 부분은 모두 비문들이다. 나머지 문장들도 매우 어색하다. 이후 연결되는 단락들을 보면 대명사 ‘그것’을 수없이 남발하고 있다.

 

 

이 책이 노벨상을 수상한 이유 중 하나가 ‘문장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정말 베르그손이 저런 식으로 프랑스 문장을 섰을까. 송수영 씨가 쓴 단행본들을 봐도, 저런 식의 문장 전개는 거의 볼 수 없다.

 

 

번역을 창작이 아닌 단순한 ‘해석 작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나 발견되는 문장들이다. <창조적 진화>에는 저거 보다 심한 문장들이 넘쳐난다. 대학원생에게 초벌 번역을 시키고 이를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은 듯한 문장들이 도처에 지뢰처럼 흩어져 있다.

 

 

번역서를 읽고 참담하여 영어 원서를 구입해서 해당 페이지를 읽어 보았다. 한국어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웠고 명확했다.

 

 

한 나라의 지식을 재는 척도 중 하나가 ‘번역’이다. 그 중요한 번역을 우리나라는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 전공자에게만 맡기는 우를 범하고 있다.

 

 

전공자가 전문가라는 이상한 논리로 석사 학위만 받으면 번역에 뛰어든다. 이런 미친 짓이 쌓여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 이른건 아닌지. 뭐, 우리나라는 전문가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니까.

 

 

특히나 문학이나 인문서 번역에서 전문가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저질 번역서가 판을 치고, ‘고전은 읽기 어려운 책’이라는 낙인이 찍혔는지 모르겠다.

 

 

이번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을 계기로 ‘번역은 새로운 창작’이라는 확고한 생각이 우리 문화에 뿌리내렸으면 좋겠다. 우리문학이 스미스 씨를 만난 건 그래서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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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5-18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형출판사가 문인을 돕는다는 지적은 금시초문이군요.
한국 소설의 금자탑이라고 하는 김승옥은 생활에 곤란을 겪고있다는 소릴 들었고,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소설 손창섭은 일본에서 쓸쓸히 죽어갔고
80년대 최고의 시인인 최승자는 굶어죽어가고 있는 마당에 무슨 대형출판사의 지원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3대 출판사는 돈이 될 만한 작가에게 투자할 뿐..

yamoo 2016-05-18 22: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금시초문 이었어요..ㅎㅎ
김승옥 씨는 절필하고 선교활동을 하고 있어서 그럴거에요~
손창섭과 최승자 씨는 그런 생활 고를 겪고 있군요!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돈 될만한 곳에만 투자하지, 지원같은 거 잘 안하는 업체라는 거...ㅎ

cyrus 2016-05-18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승원 씨 인터뷰 내용이 저는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꼭 ‘큰 출판사’들 덕분에 한국문학이 자란 건 아니잖아요. 국내 번역가 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yamoo 2016-05-18 22:03   좋아요 0 | URL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 인터뷰가 좀 와전된 거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자기 딸 책을 많이 읽히고 문단에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선심성 멘트일 수도 있구요. 좀 거시기한 발언 이었습니다.

저는 국낸 번역가가 제대로 양성되고 있는지 당최 모르겠다는 거. 거기서 나온 외국번역서에 대한 기사도 못봤다눈..--;;

transient-guest 2016-05-19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은 참 중요합니다. 저도 좋은 외국작품들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종이쓰레기가 되는 걸 많이 봤거든요. 저도 이번 수상은 작품성 외에도 번역자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보고, 여기에 금세기 들어 많이 늘어난 한국에 대한 외국의 관심이랄까, 이런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고 봐요. 한승원 작가의 말씀은 좀 이상하네요...특히 대형출판사가 작가를 지원한다는 얘긴 금시초문입니다..번역가도 문학인으로 대접을 받아야하고, 업체의 공동번역이 아닌 전문가가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이름난 분들도 꽤 있는데, 요즘의 신간들은 종종 업체번역이 많아서 그런지 일관성도 떨어지고, 번역자 특유의 캐릭터도 없어지는 것 같아요...

yamoo 2016-05-19 13:33   좋아요 0 | URL
저는 그런 종이 쓰레기가 어떻게 비싼 문화상품으로 팔리고 있는지 분노하고 있는 한 사람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번역가도 작가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 작품 뿐만 아니라 명저 번역도 반드시 번역 전문가의 감수를 받아 이상한 문장들을 치유받은 다음에 출간하는 문화가 정립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업체 번역...정말 짜증나는 일이죠. 업체가 성횡할수록 번역이 창작이라는 말은 허울 뿐이 안되겠죠. 하루 빨리 번역가를 전문가로 대접해 줘야 하겠습니다!

stella.K 2016-05-19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야무님 서슬 시퍼런 글은 정말...!
제가 번역하시는 분을 알고 있는데 그분도 만나면 나름 고충을 털어놓곤 하더군요.
작가 보다 못한 대접에 별로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그만두지 못하고 매번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고.
이 나라는 작가도 대접 못 받는데나란데 번역가는 더 더욱 택도 없죠.
알고 보면 번역가도 불쌍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양성하고 키워줘야 하는데 뭐하는지 모르겠슴다.

한승원은 제가 좋아하는 작간데 처음엔 그저 겸손 떠느라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안 좋으네요.
우리나라는 참 그게 안 변해요. 잘 나가는 사람이나 회사 들먹이는 거.
우등생 박수 쳐주기 뭐 이런 거 말입니다.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 이러는 거 보면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위화감 조장한다고.
알라딘 당선작 뽑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열 받네요. 흐~ㅋ

yamoo 2016-05-19 13:38   좋아요 0 | URL
번역 정말 힘들더군요. 저도 학부 과제로 1권하고, 군에서 3권 정도 번역을 했는데, 진짜 인내심을 시험하는 고된 일이더군요. 더군다나 우리말 실력이 턱없이 모자란다는 좌절감만 안겨준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번역 작업을 단순한 해석 작업으로 인식하는 한국 사회가 정말 짜증납니다. 그러니 쓰레기 번역이 도처에 널린 거겠지요. 이 사회의 지적 풍토가 부박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번역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는한 우리는 계속 지식의 식민 국가로 살아가야 할 듯합니다.

일본이 메이지시대 때 번역한 토마스의 <신학대전>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번역조차 안 돼 있는 현실...

정말 열 받는 상황이죠~ㅎ

북인더갭 2021-02-09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위에 언급하신 <특성 없는 남자>를 출간한 북인더갭입니다.
뒤늦게 이 글을 보았는데 저희 번역서에 관해 <한국어로 읽을 수 없는 수준으로 전락한>이라는 표현을 쓰셔서 매우 놀랐습니다. 이 번역본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어로 읽을 수 없는 수준>은 아닌 것 같고, 만약 그랬다면 독자들이 먼저 알았을 텐데, 책이 나온 지 7년 가까이 됐지만 여전히 독자들이 찾아주고 계십니다. 혹시 이전 판본을 두고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은 아닌지 싶어서 조심스레 출판사의 의견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