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리야르의 마지막 유작 <사라짐에 대하여>를 보고, 참으로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교보에서 보고 책값이 너무 비싸 사지 않고 구경만 한 책이다. 물론 넘겨보지도 않았다. 예쁘게 만들어 책값만 터무니없이 올린다고 생각했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이 눈에 띤 김에 빌려봤다. 도대체 민음사는 무슨 생각으로 책을 이따위로 편집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짧은 소논문 한 편 정도의 분량을 100페이지 넘게 편집해 놨다. 정말 놀라운 것은 왼 편을 아예 비워 버리고 줄 간격을 아주 시원스럽게 떨어뜨려 100페이지 단행본을 만드는 편집 기술! 정말 경탄할만하다. 그리고 편집의 승리를 자축하듯, 하드커버 장정에 가격을 1만 원으로 찍는다~
사실 가격에 비해 번역이 좋은 것도 아니다. 역자는 프루스트를 번역한 하태환 씨 인데 번역 문장들이 디지게 난삽하다(좋게 말해서! 나쁘게 말하면 개 X같다). ‘~적’을 매우 많이 남발한다. 물론 비문도 간간이 섞여 있다. 번역된 본문을 잠깐 옮겨 본다.
나는 유일 세상의 자동 기록일 수 있는 어떤 이미지를 꿈꿔 본다. 그 유명한 비잔틴의 논쟁 속에서 성상 파괴주의자들이 꿈꿨던 바로 그런 이미지 말이다. 그들은 예수의 얼굴이 새겨졌다는 베로니카 베일처럼, 신성이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만 진정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것은 사진 필름의 음화와 유사한 일종의 데칼코마니로서, 인간의 손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신성한 얼굴의 자동기록이었다. 반대로 그들은 인간의 손으로 제작한 모든 아이콘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그것들이 신성의 시뮬라크르에 불과했다.
반대로 사진적 행위는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손이 게임되지 않은’ 것이다. 현실과 현실의 생각을 거치지 않은, 빛의 자동 기록인 사진은, 따라서 이런 자동성에 의해 인간의 손으로부터 해방된 세상 그대로의 원형일 것이다. 극단적 환상으로서, 순수한 흔적으로서, 그 어떤 시뮬레이션도 없이, 인간의 개입도 없이, 세상은 스스로를 생산하고 있는데, 그것은 특히 진실로 귀착해 버리지 않는다. 인간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최고의 인위적 생산물, 그것은 바로 진실이고, 객관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pp66~67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저런 문장들이 나열된다. 해당 소 챕터(이 책은 5개의 소 챕터로 돼 있다)를 3번 정도 읽으면 대충 이해할 수 있지만, 처음 책을 펼쳐 쭉쭉 읽어 나가면 도대체 뭔 소린지 맥락을 잡을 수 없다. 물론 내가 지하철에서 주로 읽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집에서 정독 해 본 결과 이건 매끄럽지 못한 번역 문장 탓이 크다는 걸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됐다.
줄친 부분을 위주로 봐 보면, 역자는 우리말 통사구조를 아주 우습게 초월(?)하고 있다. ‘유일 세상의 자동 기록’ 이라니. ‘자동 기록’이 ‘사진’을 가리킨다 하더라도 이를 형용하는 구로 ‘유일 세상의’라니, 이건 뭐 영어 문장 해석 시간인가..
밑에 ‘사진적 행위’는 어떻고. 짜증의 파고가 오를 찰나 ‘인간의 손이 게임되지 않은’이 연결 된다. ‘썅~’ 소리가 절로 나며, 첨 읽을 때 책을 던져버릴 뻔했다. 이걸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번역했다? 하하, 그러고도 민음사는 1만원의 책값을 쳐 받는단 말인가?
마지막 두 문장은 매우 난해하다. 줄친 문장의 주어는 ‘세상은’이다. ‘세상은 특히 진실로 귀착해 버리지 않는다.’ 당췌 어색하다. 물론 반복해서 읽으면 어떤 의미인지 대략 알겠다. 아마도 이런 의미이겠지. 사진 렌즈에 비친 세상은 인간의 개입 없이(사진가의 의도가 있는 ‘찰칵’ 찍는 행위 없이) 존재하지만 진실이 아니라는 거. 진실은 인간에 의해 구현된 ‘사진(인위적 생산물)’이기에. 이 내용을 위처럼 번역해 놓은 거다.
처음 읽으면 맥락을 놓치기 일쑤다.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을 매우 난해하게 번역하는 게 이 번역자의 특기인가 보다. 물론 보드리야르의 문장 자체가 난해하고 수사적 기교가 현란해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건 번역자의 몫이다. 보드리야르가 자국의 고등교육을 받는 프랑스인들이 한 번 읽어 무슨 소린지 모를 문장으로 책을 쓰지는 않았을 거다. 내가 기억하기론, 보드리야르는 글을 어렵게 쓰는 사상가가 절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건 역자가 우리말 표현 능력이 딸려 읽기 힘들게 번역한 탓이 크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시뮬라르크가 구현하는 세계의 극단은 어떨까’라는 것. 세상이 과학적으로 발달할수록, 세상이 객관화될수록 인간이라는 주체는 점점 제거되어가다가 마침내 소멸된다는 게 이 책의 핵심 요지이다. 읽고 나니, 이 책을 다 읽을 필요도 없었다. 첫 소 챕터인 ‘아르키메데스의 점’에서 아주 명확하게 정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명명되고 나면, 필히 기울기 시작한다. 하나의 사물이 명명되고, 재현과 개념이 그 사물을 포박하는 순간은 바로 사물이 그 에너지를 상실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러다 결국엔 하나의 진실이 되거나 이데올로기로서 강제되고 만다. 프로이트에 의한 무의식의 발견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은 그 개념이 나타나면 사라지기 시작한다. (중략) 그러니까 실재는 개념 속에서 사그라진다. 그러나 그 반대의 움직임은 더욱 역설적이어서, 개념과 생각도(물론 환상, 유토피아, 꿈과 욕망도) 그 실현 속에서 사그라진다. 모든 것이 현실성 과도로 인해 사라지면, 그리고 인간이 무제한의 기술 전개 덕분에,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자기 가능성의 극단에 이를 수 있게 되면, 그러면 인간은 자신을 추방하는 인위적 세상에 자리를 넘기면서 사라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최고단계의 유물론적 성과에 자리를 넘긴다. 그 세상은 완벽하게 객관적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볼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pp18-19
내가 좀 수고를 들여 본문을 인용한 것은 바로 위 부분이 이 책에 담겨 있는 핵심 사상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소챕터들, 즉 [사라짐의 예술], [헤게모니와 디지털에 대하여], [이미지에 가해진 폭력], [이중성] 등은 이 총론적 주장의 각론 쯤 된다. 이를 요약하면 이렇다.
예술 자체도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만 존재하고, 모든 현실의 갈등은 디지털화된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사라진다. 이미지에 가해진 컴퓨터 합성의 폭력으로 인해 인간 고유의 이중성은 인간을 버린다. 그러면 인간 고유의 이중성은 사물들 속으로 옮겨 가고, 모든 비평적 사유가 사라진다. 모든 것의 소실점이 완성되고, 모든 것은 침묵한다.
원래 이렇게 친절하고 자세한(?) 리뷰를 작성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번역도 그리 좋지 않으면서, 가공할(?) 편집 능력을 발휘해 책을 비싸게 내놓는 민음사를 성토할 생각으로 글을 시작했다. 하지만 능력도 안 되면서 이 책의 핵심을 요약한 것은 독자들을 위해서다. 보드리야르의 마지막 유고라는 유혹으로 이 책을 구입하지 말라는 거다. (아, 품절인가. 불행 중 다행이다!) 읽지 않으면 더욱 좋고!
번역이 매우 x같이 돼 있어, 읽으면 혈압이 오르고 신경질이 도진다. 이것도 이해하지 못하다니, 내가 바보가 아닌가, 하는 심한 자괴감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당신이 이해 못해서가 아니라 번역이 거지같아서 그런 거다. 번역에 대한 짜증은 위에서 이미 언급했다. 헌데 번역 문제는 민음사의 ‘편집 장난’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
정말 심한 빡침을 감내해야 했다. 물론 내가 책을 구입해서 읽지는 않았지만, 출판사의 이런 관행은 정말 없어져야 하는 악폐 중 하나다. 독자들이 나서 박멸할 의지를 천명하지 않으면 출판사는 이런 만행을 서슴지 않고 지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줄곧 이를 경험해 오고 있으니..
사실 2007년에 갤브레이스의 마지막 유고 <갤브레이스에게 듣는 경제의 진실>을 읽고 매우 빡쳤었다. 왜냐, 이 책이 A4 30장을 채울 수 없는 분량이었기에. (열 받아 내가 그냥 본문을 타이핑 해 봤다.) 그리고 책값은 1만원이나 쳐 받았다. 물론 나는 서평 도서로 받았다. 하지만 빡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아, 근데 <사라짐에 대하여>는 정말 쌍 욕이 절로 나온다. 글자 수를 헤아려 보니, 이 책의 총 자수는 약14,154자 정도 된다. 오차 100자 범위 내. 얍삽한 편집이라, 일반 인문서와 비교를 해 봐야 민음사의 만행이 드러난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삼성출판사의 <죽음에 이르는 병>(오래 전 출간된 책이다. 1990년판)과 비교해 보면 정말 경악할 수준이다.
삼성출판사의 ‘세계의 사상’ 시리즈는 빡빡하게 편집돼 있는 걸로 정평이 나 있는 책이다. 한 페이지에 33줄. 한 줄당 약 30자. 자수를 비교해 보면 <사라짐에 대하여>는 <죽음에 이르는 병>의 14페이지(단7장) 분량밖에 안 된다. 이를 1만원에 판다? 출판사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편집으로 책을 판단말인가.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새우깡을 1만원에 파는 격이랄까.
(저 분량을 1만원에 팔고 있는 민음사의 <사라짐에 대하여>)
그냥 제대로 편집해서, 하드커버 말고 페이퍼백으로 40페이지 분량으로 편집해서 5천원만 책정했어도 이런 성토는 하지 않겠다. 이건 출판사 양심의 문제다. 더 이상 이런 페이지 늘리기 식 편집은 독자를 우롱하는 짓이라는 걸, 출판사가 꼭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