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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평점 :
나는 술을 마셔야만 하는, 주정하는 마음을 모른다. 술을 마셔야만 잊을 수 있는 무언가- 그 시커먼 고통이나 공허같은 것들- 을 알지 못한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안녕 주정뱅이>의 글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 책에 알코올중독자만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나와 무관하게 느껴지는 삶만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필연같은 우연이, 호된 뒤통수가, 방심하지 말라고, 삶은 그리 예측 가능하지 않다고 경고하는 듯 하다.
「봄밤」에 등장하는 영경은 진성 알코올중독자다. 아이를 빼앗긴 후 시작된 알코올중독은,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라고 느낀 수환을 만나고서도 치유되지 않는다. 류머티즘으로 요양원에 입원한 수환과 중증 알코올중독으로 뒤따라 입원한 영경, 12년 동안 그들이 사랑한 의미는 어디 있었을까. 사랑이 상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관념에서 본다면 그들의 사랑은 실패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환은 알코올중독을 치료해야 하는 영경을 요양원에 붙잡아두고 설득하기는커녕 그녀의 외출을 용인한다, 나가면 술을 진탕 마시고 더 좋지 않은 상태로 돌아 오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나 사랑이 상대의 가장 밑바닥까지 받아들이고 상대를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이라는 관념에서 본다면, 결코 그들의 사랑을 함부로 평할 수 없겠다. 수환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자신의 병증은 나을 가망이 없고, 이미 병든 영경에게 망각의 선물이라도 주는 편이 낫겠다고.. 적어도 자신이 그걸 막을 권리는 없다고.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라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는 윤경호라는 인물을 그린 「이모」는 시조카인 '나'가 췌장암에 걸려 입원한 경호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후 '나'는 경호의 집에 찾아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평생을 어머니와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며 살다가 쉰 살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가족과 연을 끊고 5년을 자신만을 위해 산 경호. 자신의 등골을 빼 먹은 '등허리'와 자신이 모질게 대한 '무력한 손바닥' 사이를 오가던 그녀의 인생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되고 만다. 그녀는 세상과 스스로 거리를 둠으로써 들끓는 증오를 갈무리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본 그들은 나름대로 사랑스러운 데가 있는 이웃들이었다."
「카메라」와 「실내화 한 켤레」는 독자의 뒤통수를 팡 치는 소설적 재미가 있다. 그러면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건, 어떤 비극이 일어나기까지 이어진 우연과 우연의 연결 고리, 그 어딘가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단지 내가 그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가능성 때문이다. 「카메라」의 문정은 결별 후 관주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이 없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책임이 없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인과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문정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단지 관희로부터 우연히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뿐. 「실내화 한 켤레」에서 작가는 고등학교 동창인 세 친구의 14년만의 재회를 경쾌하게 풀어 나가는데, 결국 독자를 아연실색 하게 만들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너무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는 곤란하여 생략하지만, 나는 선미가 혜련을 향하여 한 말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독한 원시답게 아주 가까이 있는 친구의 불행을 보지 못했던 혜련에게 던진 질 나쁜 벌이랄까.
마지막에 실린「층」은 '주정뱅이'라는 표제로 묶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작품인데, 서로 끌렸던 두 사람이 오해와 어긋난 우연으로 헤어지는 과정을 그리는 가운데, 순간적인 선택이 일으키는 결과에 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초밥집을 운영하는 인태는 간밤에 손님이 두고 간 휴대폰을 발견한다. 그날 밤, 예연의 직장 동료는 회식 자리에서 어제 알던 사람이 죽은 걸 뒤늦게 알고 무덤에 다녀왔다고 하면서, 초밥집에 휴대폰을 두고 왔으니 3차로 거길 가자고 하지만 예연은 거절한다. 그렇게 인태와 예연의 재회가 이루어질 우연을 예연이 걷어찼지만 그녀는 알지 못할 것이다. 예연은 집에 돌아와 누군가 집에 몰래 드나든다는 확신에 몸을 떨면서, 과거 인태가 그녀에게 집에 누가 드나드는 것 같다며 만나 달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때 그녀는 뭐라고 했나.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초추의 양광'을 인용하는 여자와 이를 듣고 '꼬추의 발광'을 연상하는 남자는 그렇게 영영 스쳐 지나간다.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라는 거절과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라는 변명이 교차하며, 그들은 영영 결별의 이유도 알지 못할 것이다.
「봄밤」「삼인행」「이모」까지 읽은 후 중단되어 한참 시간이 흘렀다. 다시 집어 들어 「카메라」를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다. 이어 「역광」「실내화 한 켤레」「층」을 읽고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을 읽은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봄밤」「삼인행」「이모」를 재독하니, 이 책은 처분 대상에서 빠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