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보수당은, 기본적으로 다시 집권하는 유일한 방법은 예산안을 노동당과 똑같이 맞추는 길뿐이라고 여겼을 뿐 아니라, 사실 정부지출을 노동당보다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엘리엇이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예전 보수파가 취했던 자세를 향한 경멸을 겨우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보수당의 그런 저자세 덕분에 엘리엇의 말처럼 ‘낮은 세금과 자유시장의 메시지’를 밀어붙일 수 있는 ‘정치적 여지’가 생겼다.

공공정책연구소가 노동조합에서 기부를 좀 받긴 하지만, 그 연구소의 가장 큰 기부자에는 조세회피 다국적 기업인 구글, 공공자산을 인수해 돈을 벌어들이는 사기업 캐피타(Capita), 그리고 EDF 에너지나 E. ON UK 같은 에너지기업이 있다. 다시 말해 공공정책연구소는 기득권에 도전하기는커녕 기득권에서 독립된 싱크탱크조차 아니라는 말이다.

정치인들은 감히 언급도 못할 사상이나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선동자의 본성이다. 그런 활동을 통해서, 그들은 창을 옮겨놓았다. 설령 정치인들이 선동자들의 개념을 절충시킨다 해도, 무엇이 중도적이라고 여겨지는지가 이미 변한 것이다. NHS의 민영화가 한 예다. 마거릿 대처조차 감히 NHS를 민영화하진 못했지만 보수-자민당 연립정부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그들은 그냥 국가 지배엘리트의 핵심부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선동자들은 국가 지배엘리트가 현재와 같은 형태로 구조화되는 데 기여했다. 선동자들은 신자유주의 영국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며 번영하는 기업과 부유한 은행가들에게 현명한 투자처임이 증명되었다. 국가의 정치 담화는 가차없이 부와 권력이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언어로 이루어진다.

국가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처럼 묘사된 사람들이 특히나 악마화되었는데, 하원의원들은 대중의 분노를 사회에서 가장 빈곤한 사람들에게 집중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럼으로써 최상류층을 향하던 면밀한 감시의 눈길을 굉장히 효과적으로 분산시킬 수 있었다. 국가개입을 후퇴시켜야 한다고 가장 목청 높여 부르짖던 자들이 종종 국가의 단물을 가장 많이 빨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권위자들은 한때 천하무적이었던, 이 보수당이라는 정치세력이 과연 다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겠는지를 두고 심각한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대처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토니 블레어가 우리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그녀는 자신을 경외하는 무리에게 선언했다. "우리는 우리의 반대자에게서 변화를 이끌어낸 것입니다." 노동당이 집권은 했을지 모르나, 대처가 보기에 노동당은 진실로 대처 자신의 정치적 신념의 불꽃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오늘날 노동당의 성격은 매우 달라졌다. 1994년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지도부를 장악한 이후, 당 활동가들의 이의제기가 두려웠던 신노동당 지도부는 당내 민주주의를 축소했다.

"신노동당은 계속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진보 정치라면 이의를 제기해야만 하는 부분에선 맞서지 않은 채로 이겼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신노동당은 선거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며 한때는 노동당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던 불의의 종식 같은 문제는 떠맡을 이유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대처리즘이 이뤄낸 합의가 존속되었다.

고위 각료들은 유권자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를 정당화할 때 자유시장의 세계화를 들먹인다. 부자에게 세금을 더 물리라는 대중의 요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자들,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이 해외로 달아나버릴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요구는 억제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노동자의 권리 향상이나 최저임금 인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정치인들이 행정부 탓으로 기득권층의 관념에 갇혀 있는 건 아니다. 주류 정치인들을 자연스럽게 현상의 수호자로 만드는 것이 바로 영국 정치엘리트의 본성이다. 정치는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

전반적으로 유권자들이 정치인 하면 떠올리는 단어는 암울하다. "거짓말쟁이, 거만함, 그들과 우리, 자기 잇속 챙기기… 아주 안 좋았죠." 이토록 널리 퍼진 선출 정치인에 대한 경멸은 민주주의 상태에 대한 고발임이 분명하나, 만연한 냉소는 낮은 투표율이나 당원수의 감소와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체념의 표현이다. 투표율은 1992년 77.6%에서 2010년 65.1%로 떨어졌다.

영국의 정치적 삶은 숨 막히는 이데올로기 통제하에 있다. 부자의 세금을 깎고, 공적 자산을 팔아치우고, 국가개입 영역을 후퇴시키고, 사회안전망을 축소하고, 노조를 약화시키는 이 모든 일은 주류, ‘중심부’로 무자비하게 침투하여, 선거에서 당선될 수 없는 극단적인 이들만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

이 합의를 옹호하는 자들은 합의의 지속에 개인적 이해가 달려 있다. 정계와 부유층 엘리트들은 서로 분리된 독립체가 아니라 극심하게 겹쳐지는 집단이다.
물론 기득권층의 생각을 집행하는 건 정치인만이 아니다. 제대로 기능하는 민주주의에서 언론은 아마 현 상태를 비판하고 거기에 도전하기 위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기득권층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로비처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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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하는 ‘기득권층’의 의미는 이렇다.
오늘날 기득권층은 언제나 그렇듯이 권력있는 자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성인 인구의 거의 전체가 투표권을 가지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지킬 필요가 있다. 기득권층은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도록 ‘관리’하려는 권력 집단의 시도를 대표한다. 이런 점에서, 기득권층은 권력자 집단을 더 광범위한 인구로부터 보호하려는 방화벽으로 볼 수도 있다.

자주 ‘신자유주의’로 묘사되곤 하는 이 이데올로기는 소위 ‘자유시장’이라는 신념을 토대로 삼는다. 공공자산을 되도록 많이 영리사업으로 전환하고, 이전에 국가가 경제에서 담당해온 역할에 어느 정도 반대하거나 혹은 그런 국가개입을 적대시하며, 사익에 부과되는 세금의 감면을 지지하고, 어떤 형태이건 현 상태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조직을 격퇴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자주 ‘자유’, 특히 ‘경제적 자유’라는 명목으로 합리화되며, 자신을 개인주의의 언어로 방어한다. 기득권층은 이것이 마치 날씨처럼 당연한 것이자 삶의 진실이라고 여긴다.

기득권층은 그들이 받아야 할 철저한 감시를 받지 않는다. 결국, 권력있는 자들의 행동을 조명하는 건 언론의 책무다. 그러나 언론은 기득권층의 필요불가결한 부분이다. 언론 소유주들과 기득권층은 같은 전제와 신조를 공유한다. 권력자를 조명하는 대신, 언론인과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비난하고 공격한다. 실업수당을 받는 실업자나 다른 국가보조금 청구인, 이민자, 공공부문 노동자?이들은 비난조의 폭로나 심지어 명백한 비방에 직면한 집단이다. 이런 힘없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실제로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향한 분노의 방향을 너무나 편리하게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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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역사 2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88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지음, 한정숙.허승철 옮김 / 아카넷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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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7세기의 우크라이나의 민중 운동은 어떠한 해악적 외부 영향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형제단은 우크라이나의 종교적 삶의 연원을 순구한 사도(使徒) 시대 기독교에서 찾았고, 코자크 제도의 기원은 자유, 평등, 형제애에 바탕을 둔 고대 슬라브인들의 민주주의의 토대와 결부시켰다.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국처럼 차르를 사랑하지 않고, 폴란드처럼 지주를 사랑하지 않으며 대신 코자크 제도, 즉 형제단을 만들었다고 코스토마로프는 썼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528


 17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다룬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Mykhailo Hrushevskyi, 1866~1934)의 <우크라이나의 역사 2>는 리투아니아-폴란드, 모스크바(러시아), 스웨덴, 오스트리아,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서 끊임없이 독립하려는 코자크를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의 민족의 의지와 열망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17세기)에 이르면 코자크 체제는 이미 충분히 정비되고 확정되었다. 이 제도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지만, 단순함과 자유로운 성격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코자크 형제단의 영혼과 몸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코자크 조직에서 경이로운 조직 구성의 소질을, 다시 말해 단순한 수단과 원시적이고 채 다듬어지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이토록 탁월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소질을 보여주었다. 코자크 조직의 가장 중요한 중심은 여전히 드니프로 강 하류 유역(니즈)에 자리잡고 있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25


 흐루셰브스키에게 '코자크'는 단순한 군사조직이 아니다. 코자크와 지휘자 헤트만을 선출하는 방식은 아래로는 우크라이나 민중과 조직을 연결시켜주었고, 코자크의 군사력은 대외적으로 이들은 폴란드, 러시아 지배계급과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자치권을 가진 군사집단. 훗날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1729~1796)에 의해 헤트만 통치권이 폐지되기 전까지 코자크 제도는 우크라니아 민족을 유지하는 중추였음을 역사 속에서 확인하게 된다.

 

 코자크들의 최고 지도자는 보통 헤트만이라고 불린 선출된 장교가 맡았다. 이 직위를 맡은 지휘관들은 코자크에게 보낸 편지뿐 아니라 폴란드 정부와 심지어 국왕에게 서신을 보낸 때에도 스스로 헤트만이라는 명칭을 즐겨 사용한 반면, 폴란드 정부는 이들을 '최선임지휘관'이라 불렀다(p27)... 코자크들은 자기네 최고지도자를 직접 선출하는 권한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권리는 코자크 자치의 기초였다. 코자크들은 단지 자신들이 선출한 헤트만을 인정할 권한만을 폴란드 정부에게 허용했다. 그러나 정부가 선출 결과를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들의 헤트만 선출과 해임을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정부가 무엇은 원하는지 그 희망사항의 의향은 고려하지 않았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28


 코자크들은 폴란드와 용병계약을 체결하고 형식적인 지배를 받아들이는 대신 실질적인 독립을 추구하였으나, 코자크들이 강성해지길 원치 않는 폴란드 지배계급은 실질적인 자치를 억누르는 정책을 일관되게 펼쳤기에, 이들은 또다른 외세인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된다. 이러한 코자크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은 이들 두 나라에 그치지 않았다. 때로는 스웨덴과 투르크에게도 손을 내민 그들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우안과 좌안이 각각 폴란드와 모스크바(러시아)에 분할되는 비극을 낳고 말았다. 외세에 의존한 개혁이나 독립의 추구가 가져오는 비극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보편법칙인 듯하다.


 페트로 사하이다치니는 폴란드가 전쟁 수행을 위해 또다시 코자크 군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올 터이니 그때까지 폴란드와 전쟁으로 치달아서는 안 되며 코자크들은 국왕에게 복종하겠다고 약속하고 실제로 표면적으로는 복종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코자크들의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정책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46


 흐멜니츠키는 타타르 칸에게 폴란드를 공격하도록 촉구했으며, 더 나아가 투르크의 술탄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그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칸으로 하여금 술탄의 명령에 따라 폴란드 전쟁에 나서게 강요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그는 동시에 모스크바와도 접촉해 이 나라가 폴란드와 전쟁에 나서게 하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모스크바 정치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는 우크라이나를 차르의 지배권 아래 두겠다고 약속했다. 흐멜니츠키는 투르크의 종주권 아래 있는 이웃 국가들, 곧 몰다비아의 군주와 트란실바니아 공과도 교섭했다... 이러한 모든 교섭 중 우크라이나의 장래 정책과 관련해서 가장 큰 중요성을 가진 것은 흐멜니츠키와 모스크바국의 협상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146


 스웨덴에서는 카를 10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는데, 그는 폴란드와의 옛 전쟁을 다시 시작하는 문제를 고려했다. 개신교 국가인 스웨덴과 트란실바니아는 폴란드를 완전히 패배시킬 희망을 갖게 되었고, 두 나라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정교도들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귀족들과 정부의 학정에 크게 시달리고 있는 신교도 권문세가의 지원을 기대했고, 오랜 기간 동안 트란실바니아와 스웨덴을 폴란드와의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교섭해 온 흐멜니츠키에게도 기대를 걸었다... 그는 폴란드와의 전쟁에 연합해서 참여하자는 스웨덴 왕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161


 그리고, 폴란드-러시아의 분할점령기간 동안 코자크의 장교층들은 각각 폴란드 지주와 러시아 귀족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우크라이나 민중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우크라이나 민중과 코자크의 긴밀한 연대는 이로써 깨어지면서 우크라이나 민족의 한 기둥의 힘을 사라졌다. 식민통치가 가져오는 가장 큰 폐해는 수탈이나 약탈이 아닌 계급분할, 새로운 기득권의 출현이며, 이들이 갖지 못한 정당성의 상실은 매우 오랜 기간 사회 문제로 남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또한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흐루셰브스키 역시 이후 우크라이나 민족 정신의 근간을 동방정교회와 정교회 중심의 교육제도, 문학에서 찾는다. 


 모스크바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았기에 코자크 장교들에게 충성스러운 봉사의 대가로 관급소유지를 후하게 나누어 주었고, 헤트만의 청원도 들어주었다. 이런 식으로 모스크바 정부는 코자크 장교들에게 안단한 멍에를 덮어 씌웠다. 그러나 이 멍에는 달콤한 것이었으니, 코자크 장교단은 기꺼이 이를 받아쓰고 그 속에는 모스크바 정부가 지시하는 길을 가볍게 따라갔다. 그들은 모스크바 권력에 순종하고 그 뜻을 이행하면서 장교단의 이익에 봉사했다. 그들은 코자크 군단 토지를 사유화하고 주민들을 농노화하는 이 같은 과정에서 모스크바 권력에 협력했다(p246)... 헤트만 사모일로비치와 마제파의 시대는 40년간 지속되었다. 이 기간은 1648~1649년의 위대한 봉기에 의해 형성된 자유로운 체제의 운명이 결정된 시기였다. 다시 말해 이 시기는 불완전하게 형성된 이 자유로운 체제가 무너진 폐허 위에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새로운 예속이 형성된 시기였고, 이 예속이 그후 자유로운 정치 체제의 유산과 새싹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그것은 토지의 탈취와 주민의 농노화였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247


 18세기 후반 드니프로 좌안 지역과 자포로쟈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의 제도가 최종적으로 파괴되었던 바로 그 시기에, 드니프로 우안 지역과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 우크라이나의 독자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새로운 여건이 조성되고 새로운 기초가 형성되었다. 폴란드 자체가 무너진 것이다. 폴란드는 우안 우크라이나 최후의 민중 운동을 진압하고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에 통합교회를 도입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생활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러자마자 폴란드 자체의 국가생활이 예상치 못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471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민중어는 출판물과 학교 교육에서는 배제되었지만, 문학에서는 결코 그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러시아 검열 기관이 우크라이나어와 고대슬라브어 혼합어인 우크라이나 문어의 사용을 금지하여 이 언어가 사멸지경과 빠져버리자, 순수 우크라이나어는 유일한 현지 언어로서 심지어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500


 흐루셰브스키의 <우크라이나의 역사 2>의 마지막은 우크라이나 문학에 기반한 민족의식이 폴란드-러시아에게 분할, 폴란드의 삼국분할, 오스트리아 지배, 볼셰비키 혁명, 독일 지배 등 숨가쁘게 바뀌는 상황 속에서도 이어져왔음을 기록한다. 민족 역사의 많은 시기 동안 독립된 국가가 아닌 예속된 상황을 겪어야 했던 이들의 비극과 비극 안에서 민족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언어인 우크라이나 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어를 둘러싼 우크라니아-러시아 갈등의 문제가 중요성을 이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고,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드네프르 강 좌안과 우안의 서로 다른 성향이 폴란드-러시아 지배에 있음을 독자들은 역사로부터 알게 된다. 현재 전쟁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상황의 모든 문제를 역사 속에서 찾을 수는 없지만, 우크라이나인이 바라보는 역사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인의 역사>는 매우 유용한 책이라 여겨진다.


 우크라이나 문학은 민중의 경제적, 사회적 필요 사항을 이해하며 농노적 예속 상태에 놓인 몽매하고 불행한 우크라이나 인민대중의 사회적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을 사회적-정치적 방법을 깨닫는 길로 차츰 다가갔다. 상층이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토양과 만나야 했고, 우크라이나 생활의 모든 희망은 촌락 주민 대중과 그들의 해방 및 정신적 발달의 전망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크라이나 민중을 인간적인 관계가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문제가 우크라이나 소생의 중심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513

교육과 서책문화에 큰 관심을 가졌던 사하이다치니는 키예프의 교회인사들 및 학계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우크라이나 생활의 역사에서 그야말로 지극히 중요한 순간이었다. 수백 년간 세인의 인식에서 사라져 망각 속에 있었고, 스스로도 자신의 옛 문화적, 민족적 의미를 점점 더 잊어가고 있던 키예프가 16세기에 갑자기 새로운 생명을 찾게 되었다(p53)... 키예프 인맥은 코자크 집단이 우크라이나 사회의 상류 계층과 처음으로 접촉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었다.이제까지 코자크들은 단지 우크라이나 농민들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을 뿐이다. 농민들은 코자크들을 통해 농노제의 멍에에서 해방될 기회를 찾고 있었다. - P60

흐멜니츠키와 코자크 장교단은 자신들의 계획이 모스크바국의 계획과 얼마나 다른지를 깨달았다. 그들이 원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해방과 새로운 자유로운 관계의 수립을 위해 폴란드와 싸우는 데 필요한 지원을 모스크바로부터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국은 우크라이나를 새로 얻은 자국 영토로 간주해 여타의 행정구역이나 영토처럼 지배하려 했다. 모스크바국이 폴란드와 전쟁에 돌입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러한 행동에는 전에도 차지했던 적이 있는 벨라루스 영토를 획득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 P159

테테랴와 브루호베츠키가 각각 헤트만에 선출되면서 헤트만령도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드니프로 강 우안 지역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상급권 아래 여전히 남아 있었고, 좌안 지역은 모스크바국의 상급권 아래 들어 있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힘은 더욱더 약화되어 이 나라의 해방은 꿈꾸기조차 어려워졌다. 양 진영의 반목으로 인해 많은 힘이 낭비되었고 설장가상으로 혼란과 무관심, 정치적 의식의 취약성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를 이 어려운 상황에서 구출해내는 것보다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과 명예욕을 달성하는데 더 관심이 많은 음모자들과 야심가들이 도처에서 준동하여 수중에 권력을 틀어쥐었다. - P202

코자크 장교단은 리투아니아 기본법을 현행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법규집의 일관된 특징을 이루고 있던 신분제 원칙과 귀족적 특권을 모든 경우에 적용하려 했다. 그들은 스스로 귀족신분이라 자칭했고 ‘소러시아 귀족단‘이라는 이 용어는 18세기 중반 이후 공식용어에서 점점 더 널리 사용되었다. 코자크 장교들은 리투아니아 기본법 가운데 귀족의 권리와 특권에 대한 규정들을 자신들에게 적용함으로써 폴란드 귀족층이 누렸던 똑같은 권리를 우크라니아의 체제와 생활에서도 차지하려 했다. - P363

우크라이나의 정파들과 정당들은 원칙적으로 연방 제도가 미래를 위해 가장 유용한 삶의 형태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가 되면 우크라이나 정체성에 대해 비우호적이고 한마디로 적대적인 온갖 세력들이, 러시아 국가의 통일성과 분리불가성을 옹호했던 온갖 세력들이 연방제라는 보호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연방제를 지지하고 있엇는데, 그 목적은 오직 하나, 곧 러시아 제국의 유산과 러시아 제국의 통일성이라는 노선을 내세워 (우크라이나의) 국가건설과 경제건설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지하겠다는 것이었다. - P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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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5-22 1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513쪽을 넘어서는 두툼한 역사서, 겨울호랑이님.발췌해주신 문장으로 살짝살짝.간만보고 갑니다^^;,항상 깊게 꾸준히.읽으시는.겨울호랑이님께 감탄사를.맘 속으로 연발하고 가게됩니다. 형제단은 말그대로 brothers뉘앙스인 걸까요?^^;

겨울호랑이 2022-05-22 13:50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얄라얄라님. 말씀하신 형제단은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으로 일종의 비밀결사 조직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는 18세기 폴란드-러시아 분할 점령 이후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주된 흐름으로 가톨릭-정교회의 통합교단에 대한 정교회 차원에서의 대응과 함께 교육, 출판 등을 통한 문화투쟁이 그려집니다. 한길 그레이트 문고에서 출판된 셰브첸코의 <유랑시인>이 이 시대의 흐름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소개되구요. 우크라이나 역사를 잘 알기 위해서는 더 깊게 공부해야겠지만, 대략 이 정도로 큰 줄기를 잡은 독서였습니다. ^^:)

2022-05-23 0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23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은 종교와 함께 한 단계 더 올라간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조직 또는 정신성의 조직이다. 세계는 인간 정신을 통해 해석되고 초월된다. 흔히 몇몇 예언자나 신이 계시해 주던 것을 이제는 인간이, 더 정확히는 인간 정신이 파악해 보겠다는 것이다.

반세기 전부터 인류를 정의하는 기준들에 관심이 많아졌는데, 가령 역사적 관점에서만 흥미로운 호모 파베르(Homo faber)와 너무 낙관적인 개념인 호모 사피엔스 대신에, 나는 호모 스피리투알리스(Homo spiritualis)를 제안하고 싶다. 세계는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들은 비물질적 힘에 호소해 이런 새로운 복잡성을 이해하고 최대한 잘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그에게 어떻게 주니의 전통 신앙과 가톨릭 신앙을 조합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 "공존하는 데는 어떤 문제도 없어요. 형과 저 둘 다 기독교인입니다. 핵심은, 초자연적인 세계를 믿으며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이죠. 나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별로 모순되지 않는 지엽적인 것들일 뿐입니다."

뜨거운 태양과 사막의 고독 속에서, 그들은 집중과 명상을 하며 전통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마침내 하나의 영상을, 또는 여러 개의 영상을 보게 되었을 것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혼을 영접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들의 영혼이 돌아와 몸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방금 보았던 그 환영의 이미지를 바위에 그렸다. 태평양 연안의 북동부 지역 부족들이 하듯 그 환영을 잊지 않고, 그들의 힘을 보존하고, 또 이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토록 장구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들이 바로 내 옆에, 기암절벽 아래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물을 그곳 정령들과 동일시하는 그들은,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진 우리와는 분명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전통 문화에서는 모든 사건이 하나의 기호이며, 자연의 영역과 이른바 우리가 초자연이라 부르는 힘 또는 피조물 영역 사이에 경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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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탄생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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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는 대중의 지상적 메시아로서의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력한 존재로 비쳤던 것이다. 제자들조차 대부분 그를 저버린 것(요한 6,66)은 그가 자신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서의 중요한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무력했던 예수가 어째서 죽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간주되었는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저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이 왜 그 후에 목숨을 걸고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것일까? 무력한 예수가 영광의 그리스도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 겁쟁이였던 제자들이 어떻게 강한 신념과 신앙을 지니게 되었을까?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8


 엔도 슈사쿠 (遠藤周作, 1923~1996)의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작 <예수의 생애>에 뒤이어 예수의 죽음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을 다룬다. 대중의 기대를 저버린 메시아. 엔도 슈사쿠가 바라본 예수의 이미지는 무기력한 한 명의 인간이다. 너무도 무력한 모습을 보였기에 주변으로 배신을 당하고 결국은 죽음을 당한 한 인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류사의 거대한 종교로 부활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이를 쫓아가는 작가의 여정이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제자들은 굴욕적인 타협으로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 후에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평생 스승이 자신들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부끄러움과 회한이 남았던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에 대한 이미지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p16)... 베드로가 의회와 그러한 타협을 한 이튿날, 예수는 군중의 욕설과 멸시를 받으며 좁고 무더운 예루살렘의 길을 걸어 처형한 골고타로 향했다. 그동안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며 자신들의 배신을 되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예수가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감정은 그들에게 관념이 아니라 사실이었던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7


 슈사쿠는 스승의 마지막 순간에 도망친 제자들의 회개(Metanoia)에 주목한다. 자신들의 배신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평소 자신이 강조한 '사랑'에 충실한 스승의 모습. 이러한 예수의 죽음은 생전이 아닌 사후에 온전하게 제자들의 마음에 뿌리내리게 되고, 비로소 믿음이 결실이 되어,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듯 내적 부활(復活)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모(metamorphosis)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 동기를 설명한다.


 제자들은 예수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이들, 자신을 저버린 제자들에 대해 원망과 증오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을 징벌하도록 하느님께 청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말들을 전해들은 제자들을 충격을 받았다(p20)... 그들은 그때 비로소 자신들이 예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자들은 비로소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생전에 예수가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통해서 예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지 조금씩 알 듯했다(p21)... 예수는 죽었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 가운데 생존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예수는 다름아닌 그들의 마음속에 부활한 것이다. 부활의 본질적인 의미 중 하나는 제자들이 예수를 재발견했다는 점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22


 원시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저버리고 배신한 비애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배신한 제자들을 미워하기는커녕 끝까지 사랑하려고 했던, 어머니와 같은 예수의 이미지에서 생겨난 것이다. 배신한 자식과 사랑을 베푼 어머니와의 관계,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는 예수의 이미지가 생겨났으며 인간의 그러한 나약함, 가련함을 이해해주는 동반자 예수의 이미지가 생겨났고, 그 동반자 예수가 다시 자신들 옆에 와줄 것이라는 신념이 생겨났다. 그리스도가 되기 전까지 예수가 지닌 이미지는 모두 생생한 제자들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63


 그렇지만, 스승의 위대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제자들을 완전하게 변화시킬 수 없었다. 슈사쿠는 제자(사도)들이 예수의 죽음 후 골방에 숨어 두려움에 떨던 그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바라본다. <사도행전>의 기록과는 달리 그들은 세상끝까지 복음(Gaspel)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을 죽게 만든 이들과의 공존을 선택했다. 성전의 중요성과 관련해서는 사두가이들과, 율법의 중요성과 관련해서는 바리사이들과 부딪히지 않고 유대인들 사이에 조용하게 스스의 가르침을 되새기던 이들. 이것이 슈사쿠가 바라본 소수의 유대교 분파에 지나지 않던 것이 초대 그리스도교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평온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불을 던진 사건이 바로 스테파노의 순교와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의 등장이다. 성전이 아닌 사랑의 중요성을 외치면서 스테파노는 사두가이파의 교리와 대립하고, 율법 대신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바오로는 바리사이와 대립하며 비로소 유대교의 분파가 아닌 세계 종교로서 변화되었다.


 루가는 명백히 스테파노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에 근거해서 묘사하고 있다. 예수가 재판을 받고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타에서 처형되었듯이 스테파노 또한 부당한 재판을 받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가 처형된다. 이 점은 저자 루가의 배후에 있었던 후대 원시 그리스도교 안에 스테파노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는 점을 가리키고 있다(p93)... 성전보다도 사랑을 위대하게 여긴 예수를 본받아 스테파노는 성전 절대주의를 통렬히 비판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베드로나 사도들보다 스테파노가 예수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95


 바오로는 우리 인간이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것과 인간 행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자신의 독선이며, 그것이 상대를 상처 입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p152)... 바오로의 그리스도론論이 전개된다. 율법은 인간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는다.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계율과 율법을 지키지만, 돌을 던진 수면에 물결이 일듯이 계속해서 새로운 죄에 휘말린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행위의 비애, 그리고 원죄의 고통이 있다.. 그런 인간을 원죄에서 해방시키는 존재, 그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하느님은 자신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속죄물인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53


  엔도 슈사쿠의  <그리스도의 탄생>은 무기력한 한 사내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세계 종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그려낸다. 십자가에서의 슬픈 절규가 후대에 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의 합창이 되는 원동력을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기적이 증표로 관여되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의 침묵에 대한 인간들의 끊임없는 질문이 신앙(信仰)을 고양시켰음을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여준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를 들 수 있다. 이 말은 시편 22편의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비애에 찬 하소연이지만, 시편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비애의 하소연이 이윽고 "당신의 이름을 겨레에게 알리고 예배 모임 한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리니"라는 찬가讚歌로 바뀐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말은 결코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의 첫 부분인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8


  흔히 독수리로 표현되는 <요한복음>에는 대표적인 7가지 기적이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이 복음서에서 카나의 혼인 잔치,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 중풍 환자, 빵과 물고기를 가진 소년, 물 위를 걸음, 태생 소경, 라자로의 부활 등이 서로 연관맺으며 점층적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간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그렇지만, 이와는 조금은 다른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더 인상깊었던 설명이 있어 옮겨본다.


 그것은 7가지 기적 중 마지막이 라자로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마저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실천이며, 기적이라는. 이는 예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 후 나타났던 악마가 결코 할 수 없는 경지이며 비로소 7에서 완성되는 설명으로 기억된다. 10년도 더 전에 들었던 강의라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느낌은 강렬했었다. 그리고, 아마도 엔도 슈사쿠의 예수도 같은 지평 위에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리뷰를 마무리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는 이외에도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절망에 빠진 유대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외쳤을 그들의 모습에서 <침묵>의 로드리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예수의 생애>에서 <사해 부근에서> 던져진 질문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음 페이퍼에서는 이들을 연관시켜 보려한다. 어쩌다 보니 리뷰의 마무리가 페이퍼의 인트로가 된 것은, 예수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연결되는 구도와 비슷해졌다...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소중한 곳이 불타 버리고, 그 지성소도 잿더미가 되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묵을 지켰으며, 그리스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원시 그리스도교에 가장 큰 시련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지옥과 같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즉, 하느님의 침묵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공동체에서 이탈하거나, 아니면 그 침묵의 이유를 되물음으로써 신앙을 더욱더 굳게 간직하는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231

당시 제자들은 이사야서에서 가혹한 운명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의 부흥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부활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가 다시 온다! 자신들에게 돌아온다! 이러한 기대가 이때부터 제자들의 마음속에 생겨났다. 그들은 스승의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침묵의 의미를 부활이란 말에서 찾으려 했다(p38)... 부활이나 재림은 당시 유다인에게 일반적인 관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러한 관념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죽음과 재생이라는 관념이 깊이 잠재되어 있었던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죽음과 재생이라는 관념이 유다교 주변의 여러 동방 종교 가운데서 엿보이기 때문이다. - P39

동방 종교와 신약성서와의 관계를 분석한 학자들의 책을 대할 때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동방 종교가 지니고 있는 죽음과 재생의 감각과 유다교에 있는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대가 제자들과 그 배후에 있는 갈릴래아 집단의 의식 속에 뒤섞여 하나를 이루고 있었고, 그것이 비로소 처참한 예수의 죽음에 의해 촉발되어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유다교의 예언서 속에서 부활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가운데, 갈릴래아의 서민들은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죽음과 재생이라는 감각에 의거하여 예수가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는 결국 철저한 일신교 一神敎인 유다교적인 요소에 범신론적이고 비유다교적인 요소가 섞였음을 의미한다. - P41

예루살렘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이루어졌던 공동체의 활동은 스테파노 사건으로 뜻하지 않게 이 지방까지 퍼져가게 되었다. 그것은 사도들의 선교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상황 전개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결과적으로 좁은 예루살렘에 한정되었던 예수의 복음은 바깥 세계를 향해 퍼져 나가게 되었다.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전개될 그리스도교 선교의 최초의 씨앗이 스테파노 사건에 의해서 뿌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 P100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두 가지 내용에서 떠올릴 수 있는 내용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두 가지 내용에서 떠올릴 수 있는 당시 상황은 이방인 문제를 둘러싸고 바오로와 보수파 제자들과의 사이에 상당한 논쟁이 있었고, 그로 인한 분쟁을 피하기 위하여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타협안을 제시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 타협안이란 안티오키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계속해서 의연금 혹은 헌금을 보내는 것으로 이 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안티오키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종속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안티오키아의 선교는 용인되었지만, 구체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이방인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 P144

종교가 조직화, 체계화되고 신학神學이라는 이론으로 신神에 대한 수수께끼를 해명하고자 하여 결국 외형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인생과 세계에 대한 의문과 수수께끼가 모두 풀린 순간 쇠약해지고 부패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중세中世라는 시대가 그리스도교 신학의 확립기이자 쇠퇴기이기도 했다는 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시 그리스도교는 이 인생과 세계에 대한 의문과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신앙은 쇠퇴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왜 재림하지 않는가?‘, 이 두 가지 과제를 풀 수 없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고뇌하며 발버둥치고 괴로워했으며, 이 고통들이 신앙의 에너지가 되었던 것이다 - P232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를 신격화하지는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과정을 요약해 본다면, 그들은 처음에 자신들에게 제기된 ‘하느님의 침묵‘이라는 수수께끼와 마주하는 가운데 영광스러운 예수의 재림이라는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예수를 구름을 타고 나타날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렀는데, 그 칭호가 서서히 메시아로 바뀌고,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에서 나온다‘라는 유다교 전승에 의해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리라. 결국 예수는 최초에는 하느님에게 선택된 뛰어난 예언자이자 랍비였지만, 평생에 걸친 노력과 수난, 참혹한 죽음의 대가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격을 받았다는 것이 초기 제자들의 생각이었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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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2-05-21 0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궁금했던 책인데, 먼저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2-05-21 04:4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라파엘님 좋은 주말 되세요 ! ^^:)

캐모마일 2022-05-22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예수의 생애를 샀습니다. 살까말까 망설이다 호랑이님께서 쓰신 그리스도의 탄생 서평을 읽고 결심했네요. 아마 다음 달 초쯤이면 시리즈를 다 읽지 않을까 싶네요 리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예수 그리스도 번역 합본이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2 22:33   좋아요 1 | URL
제 부족한 글이 캐모마일님께 작은 도움이 되어 기분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예수의 생애>에서는 ‘신성(神性)‘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인간 예수의 모습이 생소하게 다가왔습니다만, 슈사쿠의 작품 세계 전반을 읽다 보니 역사적 지평 위의 한 인간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역시 <예수의 생애>가 매우 좋은 작품이라 생각하고, 캐모마일님께서도 의미있는 독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캐모마일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