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은의 세계사 - 1500~1800년, 아메리카의 은은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장문석 옮김 / 미지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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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레알은 약 3.4그램이었으므로 8레알 은화는 27~27.5그램이었는데, 이는 굴디너보다는 가볍고 초창기 탈러와는 동등한 무게였다. 순도는 천분율로 930.555퍼밀이었으므로 순은 함유량은 약 25.5그램에 달했을 것이다. 두께는 약3밀리미터였고 지름은 40밀리미터였다. 그러므로 이 은화는 대형 은화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몇몇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형편없이 주조되어 쉽게 부러지는 나쁜 주화였다. 그럼에도 이 은화는 엄청난 양으로 시장에서 유통되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96


 카를로 M. 치폴라 (Carlo Maria Cipolla,1922 ~ 2000)의 <스페인 은의 세계사 Conquistadores, pirati, mercatanti: La saga dell'argento spagnuolo>는 페소(peso)라 불리는 16~17세기 기축 통화였던 8레알 은화를 다룬다. 그렇지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 Bad money drives out good'는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을 실증이라도 하듯, 세상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8레알 은화는 양질의 화폐가 아니었다. 조악한 품질에도 불구하고 레알화가 표준이 되었던 것은 거대 은(銀)의 생산지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지속적인 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8레알 은화의 힘이 본질적으로 물량 공세에 있었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에 국제 무역의 거대한 발전은 레알 은화가 세계 각지로 대량으로 확산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 당시 국제 무역이 도달한 수준이 유지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대량의 레알로 대표되는 유동성이 시장에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만일 레알이 거부되어 유통량이 감소한다면, 국제 무역은 급격한 쇠퇴를 감수해야 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29


  아메리카 대륙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걸쳐 식민 영토를 가졌던 스페인이었기에 수입된 은은 곧바로 제국 전역으로 흩어져 공급되었는데 제국에 공급된 은은 오늘날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QE)에 견줄 정도로 빠르게 회전되었기에 세계경제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스페인 왕실은 검소한 검은 색의 의상을 선호했다지만, 의상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서는 그다지 절약하는 편은 아닌듯하다.


 왜 스페인은 식민지들이 공급해 준, 또 계속해서 공급하게 될 이 막대한 양의 은을 잃어버렸을까?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에 도착한 보물 중 약 75~80퍼센트가 사적 거래로 획득된 것이었고, 나머지 20~25퍼센트만이 왕실 수입, 즉 신민들의 광산 활동과 물품의 수출입 관세, 기타 다양한 증여에 대해 징수한 세금 수입이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알마덴 광산의 수은 판매 수입과 왕실이 도처에서 푸거 가문과 싸우며 확립한 독점체제를 통해 발생한 판매 수입이 덧붙어야 한다. 그럼에도 스페인 왕실은 줄기차게 빚을 지곤 하는 나쁜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스페인에 도착한 왕실 소속의 보물은 통상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비되고 말았다. 왕실의 채무가 무엇보다 다양한 전선에서 군대를 유지하느라 발생했으므로 왕실이 빚을 청산하기 위해 지불한 보물들은 스페인에서 빠져나와 교전 구역에서 재등장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04


 마치 오늘날의 기축통화인 달러를 무제한으로 찍어낼 수 있는 권한을 갖는 미 FRB(Federal Reserve Board, 연방준비제도)처럼 막대한 은을 보유한 스페인은 세계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는 16세기 기축통화국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몰락 또한 예정된 것이다, 책의 본문에서 치폴라는 피셔의 교환방정식(Quantity theory of Money)을 통해 이를 뒷받침한다.


 은(銀)은 국제 시장에 무제한적인 유동성을 부여한 재화이자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가지려고 한 재화였다. 바로 이 때문에 스페인은 아메리카로부터 막대한 양의 은을 건네받아 인적 자원으로나 물적 자원으로나 보잘적없던 나라(카스티야)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스페인 신학자 토마스 데 메르카도는 1569년에 올바르게도 "세비야와 대서양 연안 스페인은 예전에는 세상의 끝이었으나 이제 중심이 되었다."라고 쓸 수 있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83


 교환방정식 MV=PY 에서 M : 통화량, V : 화폐유통속도, P : 물가수준, Y: 실질소득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은의 공급과 세계 각지로의 활발한 공급은 각각 통화량 M과 화폐유통속도 V를 증가시킨다. 이에 대응해서 실질소득이 충분하게 증가하지 않는다면, 결국 물가 상승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아메리카로부터 은을 수입해 구입한 물품을 다시 아메리카로 보내야 하는 스페인으로서는 교역조건이 불리해지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에 결국 더 많은 은을 식민지로부터 가져올 수밖에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스페인의 식민지 수탈은 가속화될 수 밖에 없었고, 생산량이 한계점에 이르는 순간 스페인 제국은 급격하게 붕괴되고 만다. 스페인 제국은 아르마다(Armada)가 칼레에서 불타 멸망한 것이 아니라, 포토시(Potosi) 은 광산의 산출량이 감소하면서 몰락한 것이다.


 지금 경제 균형 상태에 있는 A국, B국, C국 세 나라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특정 시점에 A국에서 통화량이 급격히 증가하여 균형 상태가 깨졌다고 가정하자. 만일 문제의 나라가 그들의 생산 체제로는 유통 화폐량이 증가한 만큼 총생산량을 증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면, 경제 이론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는 A국은 가격 상승과 B국, C국으로의 귀금속 유출을 겪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B국, C국으로부터 A국으로 재화와 용역의 수출이 증가할 것임에 틀림없다.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막대한 은을 소유한 스페인에서 일어난 일은 이러한 이론 모델을 완전히 증명한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06


 <스페인 은의 세계사>는 이처럼 중상주의(重商主義) 제국주의 국가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처럼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긴밀하게 엮이지 않은 과거 16세기 기축통화국은 껍데기에 불과했음을 우리는 스페인 제국과 8레알 은화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을 확인 한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스페인 이후 헤게모니(Hegemony)를 잡은 네덜란드와 영국은 식민지를 보다 현명하게 수탈한다. 플랜테이션(Plantation)으로 화폐가 아닌 생산물을 식민지로부터 들여옴으로써, 화폐수량방정식의 대변을 증가시키고, 차변의 금융부분은 중앙은행의 통제 하에 두면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활용하며 제국주의 통치수단을 한 단계 발전시켜 나갔다.


 16세기와 17세기의 국제 무역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은화로건 은괴로건 멕시코와 페루에서 스페인으로 이동한 대량의 은이 다시 스페인에서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그리고 유럽 각지로부터 많은 양의 은이 다시 동양으로 향했고, 궁극적으로 인도와 중국에 기착했다. 거꾸로, 대량의 아시아 생산물이 유럽으로 향했고, 대량의 유럽 생산물은 다시 아메리카로 갔다. 주로 8레알 은화로 대표되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은은 이와 같은 무역체제가 기능하는 데 필요한 유동성을 공급했다. 이러한 체제는 적절한 유동성이 결핍되어 있던 중세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21


 이처럼 <스페인 은의 세계사>를 통해 16세기 세계 경제의 단면과 함께 중상주의 제국주의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아메리카의 자원, 아프리카의 인력 유출이 이 대륙에 미친 부정적 영향은 오늘날 세계 체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스페인 은의 세계사>는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1492년 콜롬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0~1506)의 항해가 만들어낸 문명간의 만남은 <1492: Conquest of Paradise>의 OST처럼 장중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체제의 서막이라는 점은 오늘날 세계화(gloabalization)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알려준다...


 점점 더 많은 8레알 은화가 시장에 쇄도함에 따라, 점점 더 이 화폐는 환대받고 선호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유럽인들이 은을 지불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생산품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 비유럽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8레알 은화를 소지한 사람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통하는 구매력을 소유했다. 그 반면, 레알이 없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레알 은화는 유럽 민족들에게 동양과의 무역을 현저하게 팽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11


 정복자들의 용기와 근면함, 과감함과 희생정신은 그들의 원주민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되는 잔혹함, 비인간성과 짝을 이루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적어놓은 항해일지의 명시적인 기록들에 따르면, 그가 자신들의 숙원이었던 운명적인 항해를 완수했을 때 그의 궁극적인 항해 동기는 명백히 금으로 가득 찬 땅의 발견과 정복에 있었다. 이 제노바 제독의 기록들에는 "금"이라는 표현이 강박적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도돌이표처럼 등장한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41




우리는 스페인에 유입된 모든 은 - 은괴, 식민지에서 주조된 은화, 스페인에서 주조된 은화 - 중에서 매우 적은 양만이 스페인에 남았고, 나머지 거의 모든 양이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 중상주의 신조가 우세했던 시대에 밖으로 바져나갔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 중상주의 신조가 우세했던 시대에 일어난 이렇듯 지속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은 유출은 각별한 관심 속에서 평가되었다. - P103

중국에서는 그들이 귀금속으로 직접 주조한 화폐가 없었으나, 은은 은괴나 외국에서 수입한 주화의 형태로 풍부하게 유통되었다. 중국인들은 은으로 지불할 필요가 있을 때면, 가위로 은괴나 8레알 은화 등의 주화를 편리한 무게만큼 조각들로 잘라냈다. 각 조각은 무게에 상응하는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해, 중국에서 은은 화폐라기보다는 물품으로, 즉 무게 단위로 다루어졌다 - P118

식민지 정착과 인적 이동에 대한 통제 조치는 매뉴팩처와 일부 농업 생산물의 식민지 이식에 대한 통제 조치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즉 스페인 정부가 정복 초기부터 행했던 엄격한 일체의 통제 조치들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아메리카로 오가는 일체의 물품 교역과 인적 이동을 모국 스페인의 항구 한곳에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식민지로 통하는 유일한 항구로는 1503년 이래 통상원 건물이 있던 세비야가 선택되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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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서유럽 역사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독과 영국의 경제적 성취였다. 독일은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두 번이나 패전을 겪었다. 도시는 박살 났고, 통화는 붕괴되었으며, 남성 노동력은 사망하거나 포로수용소에 갇혔고, 운송과 공공사업의 기반 시설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영국은 분명히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유럽 국가였다. 폭격에 의한 파괴와 인적 손실을 차치하면, 도로와 철도, 조선소, 공장, 광산 등 국가 기반 시설은 전쟁을 거치면서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초에 독일 연방 공화국은 급속하게 발전하여 유럽의 발전소로 번창한 반면, 영국은 성장률에서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한참 뒤처진 낙오자가 되어 있었다. 서독 경제의 규모는 이미 1958년에 영국 경제의 규모를 능가했다. 많은 평자들에게 영국은 유럽의 환자가 되고 있었다.

1950년대에 독일이 경제 〈기적〉을 이루게 된 배경은 1930년대의 회복이었다. 나치는 통신, 군수, 운송 수단 제조, 광학, 화학, 엔지니어링, 비철금속 등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에 투자했다. 그러나 그 성과는 뜻밖에도 20년 후에 찾아왔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사회적 시장 경제의 뿌리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정책에 있었다.

강요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 그리고 개인적 욕구의 과감한 무시는 공산당의 도시 계획이 초래한 재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서유럽의 도시 설립자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특히 지중해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많이 이주한 탓에 도시의 재원에 대한 압박이 상당히 심했다.

엄청난 규모의 도시 파괴, 그리고 과거를 정리하고 한 세대 만에 폐허에서 초현대적 상태로 도약하려는 범유럽적 충동은 응분의 대가를 받게 된다(고맙게도 1970년대에는 경기 후퇴의 도움을 받았다. 경기 침체로 공공 예산과 가계는 동시에 축소되었으며 광적인 재개발은 중단되었다)

전후 유럽 자본주의의 성공담에는 어디서나 공공 부문의 역할 증대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국가 개입의 성격은 상당히 다양했다. 대륙 유럽의 국가들은 대체로 산업의 직접 소유를 삼가고 간접 통제를 선택했다(대중교통과 통신은 예외였다). 종종 이론상 자율적인 기관들을 매개로 했는데, 문어발처럼 여러 곳에 관여했던 이탈리아의 산업재건공사가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사례였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 민주당들은 해마다 전체 투표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으며, 그 결과로 수십 년간 중단 없이 정권을 담당했다. 때때로 고분고분한 군소 정당들이 참여하는 연립 정부를 이끌기도 했으나 대체로 단독으로 정부를 통제했다.

국가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20세기 초의 신뢰는 여러 형태를 띠었다. 스칸디나비아 사회 민주당은 영국 복지 국가의 페이비언 개혁주의처럼 온갖 종류의 사회 공학에 폭넓게 매료되어 탄생했다. 그래서 소득과 지출, 고용, 정보를 조정하는 데 국가를 이용했으나, 조금만 정도가 지나치면 개개인의 삶에 어설프게 관여하려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급부금과 서비스를 정액으로 제공하는 영국식 제도는 유복한 전문직 중간 계급에 지나치게 유리하다는 점에서 기묘할 정도로 퇴행적이었다. 하지만 비록 표면적이었을지라도 이 또한 어쨌든 평등주의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군말 없이 이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960년대 노동당 정부의 가장 중요한 혁신은(종합 중등 교육 제도의 도입과 선택 중등학교 입학시험 폐지는 노동당의 장기적인 공약이었으나 1945년 이후 애틀리가 무시해 버렸다) 그 내재적인 장점이 아니라 〈반(反)엘리트주의〉적이어서 〈공정〉하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졌다.

국가가 시민의 고용과 복지에 점점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동안, 시민의 도덕과 의견에 대한 국가의 권위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당시에 이러한 현상은 역설이 아니었다. 유럽의 복지 국가를 옹호했던 자유당과 사회 민주당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정부가 주민의 경제적 안녕이나 의료 복지에 면밀히 주의를 기울이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민의 복지를 보장하면서, 종교와 섹스 또는 예술적 취향이나 판단 같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시민들의 견해와 관행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이 지당하다고 보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1962년 10월 11일에 소집되었다. 공의회는 이후 며칠간 작업을 진행하면서 가톨릭 기독교의 전례와 언어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말 그대로다. 소수의 전통주의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했지만 라틴어는 이제 교회의 일상적 의식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현대적 삶의 딜레마에 대한 교회의 반응도 바꾸었는데 이 점이 더 중요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을 보면 교회는 이제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유 민주주의와 혼합 경제, 현대 과학, 합리적인 사고, 나아가 세속 정치의 반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했다. 다른 기독교 종파와 화해하려는 첫 번째 매우 시험적인 조치들이 취해졌으며, 유대인이 예수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오래 지속된 설명을 고침으로써 교회에 반유대주의를 억제할 책임이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많이 인정한 것은 아니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이제 더는 권위주의 정권의 지지 기반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톨릭교회는 권위주의 정권의 반대자들 편에 설 가능성이 높았다.

1960년대는 유럽 국가들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19세기 서유럽에서 시민과 국가의 관계는 군사적 필요와 정치적 요구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새로 선거권을 획득한 시민들의 현대적 권리는 왕국을 보호할 오래된 의무의 이행과 상계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이래로 그 관계의 특징은 국민이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이루어지는 사회 복지 혜택과 경제 전략의 조밀한 조직이었다.

세월이 더 흐르면, 모든 것을 망라하려는 서유럽 복지 국가의 야심은 매력의 일부를 상실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약속을 절반이라도 지키려 했지만 실업과 인플레이션, 노령화한 인구, 경기 침체 탓에 극복할 수 없는 제약을 안았다. 국내 경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은 국제 자본 시장과 현대 전자통신의 변화로 불구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개입주의적 국가의 정통성 자체가 허물어졌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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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시기 지중해 지역에서 사망 원인은 주로 장(腸)과 관련된 질병이었다. 그래서 사망률이 여름에  집중되었다. 더 춥고 비가 더 많이 내리는 겨울 날씨는 인구의폭발적 성장을 가져왔다. 구체적으로 증거 자료를 수집한 사람은 없겠지만, 기원전 800~500년 이베리아반도에서 서부 이란 지역까지 거의 어디서나 인구가  성장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원전 제천년기 말엽에 이르러 지중해 연안의 인구는 거의 2배로 늘어났다.
- P101

그중 가장 중요한 주제는 규모와 지속성의 문제다. 식량 생산에서부터 도시 내 다양한 공동체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관계에 이르기까지도시의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친 일시적 혼란의 빈도와 강도가 모두 포함된다.  내부적으로 권력 구조에 대한 도전이 생겼을 때는 (인구가 성장하거나 감소하거나 분산되는 등의 급격한 인구 변화가 나타날 테고, 이는 기존 조직의 안정성에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급속한 변화란 것이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과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은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도시의 다양한 구조에 따라 그러한 변화에 더 유리하게 (혹은 더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이 사례 비교 연구를  통해  검토해야 할 주제다. - P159

분명 뉴 카호키아는 근본적인 구조의 변화였다. 도시 중심 구역에는다양한 요소들이 조직화되어 있었고, 주거지의 배열은 기준을 지키면서도 변화를 꾀했으며, 장례 행사 장면은 세계의 다른 초기 도시들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결국 카호키아의 역사는 새롭게 정착하고 조직화된 토착민과 이주민 가족에 의한 옥수수 생산 확장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카호키아의 유산은, 혹은 유산의 부재는 아마도 건축 재료 때문일 수도 있다.  - P260

도시국가(아슈르Assur)에서 아시리아(Assyria) 제국으로 발전하면서주민의 생활에는 뚜렷한 변화가 생겨났고, 도시에는 왕국의 수도라는성격이 부가되었다. 예전의 전통적인 수도 아슈르는 더 이상 왕국의 정부 소재지가 아니게 되었고, 몇몇 왕들이 아시리아 핵심 지대에서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면서 인구 압력이 높아졌고, 경제가 성장했으며, 안전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리고 왕국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는 시각적 수요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못지않은 아시리아 왕들의 욕망도 있었다. 그들은 오랜 라이벌이었던 바빌론(Babylon) 왕국을 규모나 화려함, 그리고 종교적 명성에서  능가하고자 했다. 아슈르 사원이 제국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중심으로 남아 있는 한, 제국을 통치하는 정부의 소재지는 왕에 따라 또한 필요에 따라 옮겨 다녀도 무방한 일이었다. - P318

놀랍게도 로마에 관한 기존 이미지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다른 제국과 확연히 달랐던 로마의 특색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적·문화적 포용이었다. 로마인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가지고 있었다. 그 대신 팽창기의 로마인은 사회정치적 입장과 시민의지위에 주로 관심을 두었는데, 그것이 제국 포함 여부의 핵심이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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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의 끝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쾌락은 끝이 없는 듯 여겨졌다. 그런데 한두 번은 이러한 밤에 기쁨을 맛보기도 했는데, 고통이 가라앉은 데서 생겨난 기쁨이었으므로, 만일 갑자기 멈춘 불안이 반동 작용으로 다시 격렬하게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평온한 기쁨이라고 부를 만했다.

스완은 이 내적인 삶의 예기치 않은 풍요로움이 정확히 무엇에서 연유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욕구 역시 현실 세계 밖에서 전개되던 것으로, 바로 음악을 듣고 싶고 음악에 정통하고 싶다는 욕구였다.

그는 그녀라는 이 삼인칭 대명사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사랑이나 죽음과도 흡사하지만 막연한 닮음이라기보다는, 그 실재가 우리로부터 빠져나갈까 두려워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하는,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이 질문하게 하는 인격의 신비로움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스완의 사랑이라는 이 병은 너무도 확산되어 그의 모든 습관이나 모든 행동, 그의 생각이며 건강이며 수면이며 생명이며 심지어는 그의 죽음 뒤에 그가 소망하는 것에까지도 밀접하게 섞여 그와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에, 스완 자신을 거의 전부 파괴하지 않고는 그로부터 제거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단지 자신을 위해서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만 몸을 떠는 법이다. 우리 행복이 이미 사랑하는 사람 손에 달려 있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람 곁에서 얼마나 침착하고 편안하며 또 대담하게 행동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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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02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제 잃어버린 시간도 읽으시는군요. 겨울호랑이님 독서력에 정말 감탄할 따름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2-06-03 06:44   좋아요 0 | URL
에고 아닙니다. <잃어버린 시간 11>이 최근에 나와 읽으려 보니 앞부분이 캄캄하네요 ㅜㅜ 그래서 다시 읽고 있습니다. 바람돌이님 오늘도 활기찬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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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모든 것을 빨아들인 블랙홀의 역사
앤터니 비버 지음, 김규태 외 옮김, 김추성 감수 / 글항아리 / 2017년 3월
55,000원 → 49,500원(10%할인) / 마일리지 2,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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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제2차 세계대전 - 전2권- 발췌본
윈스턴 처칠 지음, 차병직 옮김 / 까치 / 2016년 6월
50,000원 → 45,000원(10%할인) / 마일리지 2,5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2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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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 하- 발췌본
윈스턴 처칠 지음, 차병직 옮김 / 까치 / 2016년 6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2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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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 상- 발췌본
윈스턴 처칠 지음, 차병직 옮김 / 까치 / 2016년 6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2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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