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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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성취들 중에서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들만큼 안정성을 갖는 것은 없기 때문


그가 진정 행복한 때에 그가 행복하다는 것이-살아 있는 사람은 그 우여곡절 탓에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또 행복을 어떤 지속적인 것으로, 결코 쉽게 변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반면, 운수는 동일한 사람 주변을 여러 차례 돌고 도는 것이라고 파악한다는 이유로-그에 대해 참되게 서술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이상하지 않단 말인가?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면 분명하다. 만약 우리가 그때 그때 변하는 운을 따라가 본다고 한다면, 동일한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르다가 다시 비참한 사람으로 부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할 것이며, 그로써 행복한 사람을 일종의 '카멜레온으로, 취약한 기반을 가진 사람'으로 드러낼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의 운을 좇아 자신의 행복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 아닐까? 잘 되고 못됨은 이런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인간적 삶은 다만 이런 것들을 추가적으로 필요로 할 뿐이며, 행복에 결정적인 것은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고, 그 반대의 활동은 불행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도 행복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옳았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인간적인 성취들 중에서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들만큼 안정성을 갖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들은 학문적 인식보다도 더 지속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 이러한 활동들 중에서 가장 명예로운 활동들이 더 지속적인데, 그것은 지극히 복된 사람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활동들 속에서, 그리고 가장 연속적으로 그들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들과 관련해서 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39∼40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1권 제10장 「행복과 운명」 중에서

 

 

 


실천적 지혜에는 망각이 없다는 사실이 그 징표


이성을 가지고 있는 영혼에는 두 부분이 있는데, 실천적 지혜는 [학문적 인식이 관련하는 부분과는] 다른 부분의 탁월성, 즉 의견을 형성하는 부분의 탁월성이다. 의견도 실천적 지혜도 모두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들에 관련하니까. 다른 한편, 실천적 지혜가 단순히 이성을 동반한 품성상태인 것만은 아니다. 단순히 이성을 동반한 품성상태에는 망각이 있지만, 실천적 지혜에는 망각이 없다는 사실이 그 징표이다.(212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6권 제5장 「실천적 지혜」 중에서

 

 

 


탁월성은 지속적인 것


가장 완전한 친애는 좋은 사람들, 또 탁월성에 있어서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친애이다. 이들은 서로가 잘 되기를 똑같이 바라는데, 그들이 좋은 사람인 한 그렇게 바라며, 또 그들은 그 자체로서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를 위해 그 친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최고의 친구이다. 이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우연한 것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이유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의 친애는 그들이 좋은 사람인 한 유지된다. 그런데 탁월성은 지속적인 것이다. 각자는 또 단적으로도 좋은 사람이고 친구에 대해서도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들은 단적으로도 좋으며 서로에 대해서도 도움을 준다.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들은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적으로도 즐거우며 서로에게도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들은, 또 그와 같은 종류의 행위들은 좋은 사람들 각각에게 즐거운 것이며, 좋은 사람들의 행위들은 [이런 점에서] 같거나 유사하다. (283∼284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8권 제3장 「친애의 세 종류」 중에서 

 

 

 


사랑하는 것이 가치에 따라 생겨날 때 그런 사람들이 오래 지속되는 친구

 

친애는 사랑하는 데에서 더 [잘] 성립하며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칭찬받기에, 사랑하는 것은 친구들에게 속하는 탁월성 같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가치에 따라 생겨날 때 그런 사람들이 오래 지속되는 친구이며, 이들의 친애 역시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서로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대단한 친구가 될 것이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동등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애[친구 사이]란 동등성과 유사성이며, 무엇보다도 탁월성에 따른 유사성이다. 그들은 그 자신에 있어서든 서로에 대해서든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서, 저열한 것들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그것들의 하인이 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세간에서 말하듯 그것들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잘못하지 않을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그러라고 하지도 않는 것이 바로 좋은 사람들의 특징이니까. 못된 사람들은 그 항구적인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에게조차 동질적인 사람으로 지속되지 못하니까. 그들은 상대편의 못됨을 기뻐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만 친구가 된다. (295∼296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8권 제8장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 중에서

 

 

 


품성에 근거한 친애는 자체적인 것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지속적이다


'사랑을 구하는 사람'은 즐거움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은 유익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는데, 이런 일[불평]들은 자신들이 사랑하게 된 이유가 된 것들을 갖지 못할 때 생겨난다. 이런 것들을 근거로 성립하는 친애는, 그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이 얻어지지 않으면 해체된다. 그들이 서로 사랑한 것은 상대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것이었는데, 그 소유물은 지속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 종류의 친애들 역시 지속적이지 않다. 반면 이야기한 바와 같이 품성에 근거한 친애는 자체적인 것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지속적이다. (315∼316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9권 제1장 「친애에 있어서 교환의 원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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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공원을 거의 다 올라갈 때쯤 한강 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성산대교와 그 너머 여의도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저쯤 어디에서 불꽃놀이를 한다지?

 

 

 

 - 아뿔싸! '만발한 코스모스'를 기대했건만 '코스모스밭에' 코스모스가 없다. 

 

 

 

 - 햇살은 강렬하고, 한껏 치켜세운 억새는 이웃한 코스모스 아가씨와 함께 부드럽게 이리 저리 몸을 흔들고 있다.

 

 

 

 - 그래도 가을인데.. 드물게 피어난 코스모스라도 좀 '붙들고' 이런 사진이라도 한 장 담아 봐야지... 

 

 

 

 - 억새는 가을 바람을 제각기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듯 '가지껏' 가는 목을 빼고 서 있다. 

 

 

 

 - 아빠의 품에 안긴 아가의 보드라운 뺨에도 첫 가을은 찾아 오고......

 

 

 

 - 가을을 담기에 몹시도 바쁜 처녀 총각들. 

 

 

 

 - 쌀 한 톨 만들어 내지 못할 망정 그래도 '볏과'라고 빛깔만은 황금 들녘을 닮았다.

 

 

 

 - 억새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억새가 궁금한 사람들.

 

 

 

 -  일렁이는 억새가 황금빛 햇살을 받아 한층 더 의기양양한 순간.

 

 

 

 - 사람들의 얼굴에도 저녁 햇살이 물들고 어느새 저녁달이 저만치 떠올라 있다.

 

 

 

 - 억새들이 온통 황금빛 옷으로 갈아 입은 걸까?

 

 

 

 - 처녀의 머리에도 어느새 억새풀이 돋았다. 

 

 

 

 - 억새들은 이제 언제라도 타오를 준비를 마쳤다.

 

 

 

 - 기어코 억새에 불이 붙었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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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0-0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사진을 보는데 몸에 전율이 옵니다^^
어쩜~~~~ 전 지금 작품을 보고 있는거죠.
마지막 사진, 세번째 사진 특히 예뻐요.
출력하고 싶네요.

oren 2014-10-08 10:57   좋아요 0 | URL
세실 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도 몹시 기쁩니다. ㅎㅎ

사실 세 번째 사진은 지나친 역광임에도 불구하고 그 눈부신 햇빛 속에서 어우러지는 억새와 코스모스가 너무 아름다워 찍어 본 사진인데, 버리기가 너무 아까워 버릴까 말까 몇 번을 고심하다가 올려본 것이랍니다. 세실 님께서 좋게 봐주시니 Delete 키를 아낀 보람을 비로소 느끼게 됩니다. 고마워요~ 세실 님.
 
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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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의 서양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라틴문학의 걸작으로 흔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꼽는다고 한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베르길리우스가 쓴 '로마 건국 신화'가 아무리 장중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로마의 위대함'을 노래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수백 년 혹은 천 년 이상이나 오랜 세월 동안 로마 제국에 편입되어 지냈던' 유럽 사람들의 자의식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오비디우스가 쓴 신화 속에 담긴 드넓은 주제와 광활한 시공간을 넘나들며 종횡무진으로 펼쳐지는 온갖 흥미롭고도 별의별 기가 막힌 이야기들에 비춰 보면, 먼저 내세운 시인의 이야기는 너무 로마 중심적인 데다가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엄숙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지닌 탓에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에게조차 여전히 접근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책이었지 싶은 생각을 해 본다.


그에 비해 오비디우스가 쓴 이 작품은 그 주제의 범속성이나
세계성 측면에서 베르길리우스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치 폭넓고도 보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후세의 서양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조각 등 온갖 예술작품 등에 두루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그리고 로마의 밖에서만 살아온 수많은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조차도 낯설지 않거나 심지어 친숙한 이야기들이 많다는 점에서도 나로서는 두 천재 시인 가운데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보다 좀 더 쉽게 읽어볼 만한 책으로 남들에게 권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오늘날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많이 쏟아져 나온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룬 온갖 책들도 결국 그 내용의 대부분은 오비디우스의 작품에 담긴 이야기에서 비롯됐다는 사실까지 고려해 본다면, 그런 이야기들의 원조격이나 다름없는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한번쯤 제대로 살펴보는 일은 이천 년 동안의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신화의 원형'을 직접 고스란히 마주 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좀 특별한 경험을 맛보는 일이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서양에서조차 오비디우스가 쓴 '원전' 형태의 변신 이야기가 '서사시' 형식으로 쓰여진 탓에 읽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던 때문인지 미국 사람 토마스 불핀치가 산문으로 풀어 쓴 신화집이 오비디우스의 작품보다 오히려 더 큰 인기를 끌었다는 기이한 형편까지 고려하면 오비디우스에게 다가가는 일이 더욱 흥분되는 모험처럼 느껴진다.

 

그러면 도대체 모든 그리스·로마 신화의 원조나 다름없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왜 그토록 재미있고도 유명한 책이면서도 여전히 읽기 쉽지만은 않은 묘한 책이 되었을까. 그 이유를 나는 무엇보다도 우선 '신화'가 지니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찾아보고 싶다. 신화는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신들만 하더라도 너무나 여러 '계보'가 있어서 그들의 족보와 촌수를 따지는 일이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닌데다가, 거기에 덧붙여 온갖 다양하고 낯선 이름들을 지닌 인간들조차 쉼없이 끼어드니 신화는 일단 너무나 복잡하다는 느낌부터 든다. 게다가 신화에는 결코 신과 인간만 등장하는 법이 없다. 수많은 강과 바다에 사는 온갖 요정들도 신과 인간들 사이에 쉼없이 끼어들기 마련이고, 다양한 이름들을 지닌 여러 지방과 섬과 도시, 산과 강, 호수와 바다가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니 도무지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신들의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다 한들 갈피도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더군다나 온갖 함축적인 표현들로 가득찬 '시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신화'를 읽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오비디우스의 신화를 읽게 되면서 겪게 되는 두 번째 어려움은 대체로 '이야기의 방대함'에 있지 싶다. 이 작품만 하더라도 '시로 함축시켜' 펼쳐 놓은 이야기의 전체 행수가 무려 1만 2천 행에 이르는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9천 9백 행에 못 미치는 걸 고려해 보면 그 길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1만 5천 행, 『오뒷세이아』가 1만 2천 행 정도여서 그와 비슷한 길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나, 라틴어는 그리스어에 비해 표현이 훨씬 더 함축적이기 때문에 오비디우스의 작품이 길이가 훨씬 더 긴 작품으로 느껴진다고 다들 말한다.

 

오비디우스의 신화를 읽게 되면서 겪게 되는 세 번째 어려움이자 쉽게 극복하기 힘든 난제는 대체로 '사전 지식의 부족'에서 찾는 게 맞지 싶다. 호메로스의 작품이 되었건,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이 되었건, 혹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들의 작품이 되었건 그 작품들은 거의 모두 기본적으로는 시로 쓰여진 작품들이며, 아무리 이야기 형태의 시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함축적인 표현'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그런 경향이 유난히 더 강하다. 가령 헤르쿨레스(헤라클레스)의 죽음을 다룬 짧은 이야기만 하더라도 그 유명한 '12 고역'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어리둥절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 대목을 여기서 조금만 살펴 보자.

 

"이러자고 내가 잔혹한 안타이우스에게서 어머니의 힘을 빼앗았던가요?"라는 짧은 구절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안타이우스가 땅의 자식으로서 땅에 닿을 때마다 힘을 얻기 때문에 헤르쿨레스가 그를 공중에 들어 올린 후 졸라 죽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석'을 살펴보고 겨우 그 뜻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뭔가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 남게 마련이어서 알 듯 모를 듯한 애매함과 곤란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이러자고'가 그저 한 두번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마치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듯이 줄기차게 계속 이어져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이러자고 내가 이 책을 펼쳤단 말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갑자기 그 틈을 비집고 불쑥 튀어나오지나 않을까.

사실 헤르쿨레스의 '12 고역'만 하더라도 이야기 하나 하나가 온갖 흥미로운 요소들을 두루 지니고 있는 데다가(가령 불을 내뿜는 용이 지키고 있는 '황금 사과'를 따오기 위해 지축을 떠받치고 있던 아틀라스를 찾아가, 어쩔 수 없이 그를 대신해서 그 무거운 짐을 떠메고 있다가 나중에 결국 황금사과를 손에 넣게 되자 이 영웅이 교묘한 꾀를 내어 그 무거운 짐을 도로 아틀라스에게 되돌려주는 이야기는 얼마나 '상상력'을 즐겁게 자극하는가), 도저히 이뤄낼 수 없을 듯한 난제들을 척척 해내는 이 영웅을 보고 열광하지 않을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탓에 마치 고대판 '미션 임파서블'을 보는 즐거움과 통쾌함을 누구나 만끽할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들조차 이 영웅의 이야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33편의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 가운데 무려 3편이 '그의 신화'를 다룬 작품이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또한 '그의 신화'만 따로 떼어내어 온전히 한 권의 책으로 펴냈을 정도다. 최근에는 '현대판 헤르쿨레스'로 종종 여겨지는 축구 영웅 호날두의 연인 이리나 샤크가 '대작 영화'로 만들어진 『허큘리스』에서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일이 화제가 된 적도 있었을 정도로 그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영웅'처럼 가까이 있다. 그의 도무지 믿기지 않는 영웅적인 활약을 고대 로마의 시인이 '헤르쿨레스의 입'을 통해 '이러자고 내가 그 고생을 했단 말인가'하고 열두 번 거푸 탄식을 연발하는 식으로 응축시켜 놓았으니 그 이야기가 온전히 '귀에 들리는 사람에게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반쯤만 열려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지 싶다.
(헤르쿨레스의 죽음)

 

이러한 난관들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여전히 매혹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오비디우스가 집대성해 놓은 수많은 신화들 자체가 지닌 이야기의 매력과 더불어 시인이 풀어가는 기가 막힌 이야기 솜씨 덕분일 것이다. 그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널리 알려진, 그래서 나름대로 꽤나 식상한 이야기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문체로 그 이야기들을 정말 기가 막히도록 재미있게 술술 풀어낸다. 이 책을 번역한 천병희 선생님은 '그의 표현이 평이하고 유려하고 우아하면서도 재치와 유머와 파토스와 위엄이 있기 때문에' 오비디우스가 널리 읽힌다고 했는데, 역자의 평가만 들어봐도 그의 문체가 얼마나 다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금세 알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신화가 여전히 매혹적인 또다른 이유는 좀 더 근본적이다. 그가 쓴 신화를 읽으면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인간 본성을 탐구할 수 있는 상징체계'를 무수히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아무리 위엄있는 신이라고 하더라도 오비디우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인간 속물들과 크게 달리 비치지 않는다. 신들도 인간처럼 질투하고 시기하고 남의 아내를 넘보고 자신의 욕망이 좌절될 때마다 분을 이기지 못한다. 신화 속의 영웅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도 우리처럼 쉽게 걸려 넘어지며 어떨 땐 너무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어서 나라도 얼른 달려가서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 주고 싶을 만큼 안쓰러워 보일 때조차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신화 속의 영웅들을 우리와는 다른 머나먼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와 비슷한 또는 가까운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오비디우스의 생애는 특기할 만한 대목이 몇 있다. 그는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바로 이듬해에 태어났는데, 그가 차츰 성장하여 로마에서 시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마침 로마의 정치 체제가 공화정을 끝내고 제정으로 넘어간 때였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된 이후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대권'을 위해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끝에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개막된 소위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살았던 인물인 셈이다.

 

그는 초창기엔 주로 여러 가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사랑의 노래』, 신화와 전설 속의 유명 여성들이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된『여걸들의 서한집』, 연애 기술을 다룬『사랑의 기술』, 실연한 자들을 위한 『사랑의 치료약』등을 썼는데, 여기서 크게 성공을 거둔다. 그 뒤에 그는 기원후 2년에『로마의 축제일들』과 함께 자신의 대표작인『변신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이미 선배 시인들이었던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가 세상을 떠나고 오비디우스가 로마의 문학계를 대표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돌연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흑해 서안의 토미스(오늘날의 루마니아)로 유배된다. 거기서 그는 비참하고 쓸쓸한 만년을 보내다가 유배된 지 10년 만인 기원후 17년 또는 18년에 눈을 감고 마는데, 그가 얼마나 간절히 로마도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는 유배지에서 쓴『비탄의 노래』와『흑해로부터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그가 유배된 이유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두 가지 죄('詩'와 '과오') 때문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이에 관해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까지『비탄의 노래』에서 말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말한 '시(詩)가 『사랑의 기술』일 것으로 보는 데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작품은 그가 추방되기 무려 8년 전에 나온 작품이기 때문에 유배의 직접적인 이유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가 추방된 결정적인 이유는 결국 '과오' 때문으로 보이는데, 오비디우스는 자신의 처지를 '악타이온'에 비교했다고 한다.(☞ 디아나의 알몸을 본 악타이온) 쉽게 말해서 '못 볼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오비디우스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의 역사』를 쓴 피터 왓슨은 오비디우스가 추방된 이유를 보다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는 황제의 손녀가 난잡한 성적 습관을 가졌다는 글을 쓴 죄로 흑해로 추방되었을 때 가혹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실용성을 강조했던 로마인들은 '읽기는 쓰기와 이어질 때에만 유용한 활동'이라고 생각했으며 특히 "글은 무엇보다도 도덕적으로 유용해야 했다." 그 때문에 결국 시는 문제가 되었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했지만 시를 통째로 감싸는 것은 확실히 경솔한 짓이었던 것이다.


비록 오비디우스는 끝내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그의 작품은 자신이 예언했던 대로-이 작품은 윱피테르의 노여움도, 불도, 칼도, 게걸스런 노년의 이빨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끝까지 살아남아 영생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오비디우스의『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_맺는 말) 오비디우스는 비록 로마인이었지만 '예전의 그리스인들처럼' 시인이 어떤 면에서 특별하다고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시인을 우아테스uates, 즉 '예언자'라고 불렀으니 말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변신 이야기』에 담긴 '이야기'를 이야기할 때이다.

 

이 작품에 담긴 이야기는 약 250편이며, 크게 신들에 관한 이야기(1권 452∼6권 420행),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6권 421∼11권 193행),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11권 194∼15권 744행)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신화의 경우에는 전후 관계나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기 몹시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제의 유사성이나 상이성, 지리나 계보 등을 따라 절묘하게 이야기들을 연결시켜놓았다. 그래서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어쩌면 거의 대부분 따로 떼어놓아도 좋을 이야기들이지만 시인의 솜씨 덕분에 느슨하게나마 주욱 이어진 이야기처럼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신들의 이야기든 영웅들의 이야기든 서로 아무런 관계조차 없을 정도로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오비디우스가 이 작품에서 한데 두루 붙들어놓을 수 있도록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물론 '변신'이다. 그렇지만 '변신'은 이 작품의 주제라기 보다는 이야기를 끌어모으는 데 필요한 하나의 '구실'이나 '핑계거리'에 더 가까운 인상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 담긴 모든 이야기들이 반드시 '변신'을 포함하지는 않는 데다가, '변신'이 꼭 필요하거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변신'은 그저 인간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신화 속에 자연히 딸려나오는 또다른 상상으로의 자연스런 변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게 되는 건 '여자들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섬세한 심리 묘사'인데, 이 책을 번역하신 천병희 선생님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부분은 그리스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헤르쿨레스의 죽음'을 노래한 대목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작품을 온전히 제대로 감상하려면 '당연히' 오비디우스가 여기 저기서 끌어온 이야기들을 독자들이 미리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좋겠다는 생각이 정말 여러 번 들었다. 이에 대해 옮긴이 해제의 일부분을 다시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베르길리우스 시의 묘미를 느끼려면 호메로스의 시를 알아야 하듯,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도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그 깊은 맛을 구석구석 느낄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비롯한 그리스 라틴문학의 읽는 재미를 극대화하려면 텍스트 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을 파악할 것을 권한다. 앞서 말했듯이 네스토르는 젊은 나이에 칼뤼돈의 멧돼지 사냥에 참가하지만 멧돼지가 덤벼들자 당장 이를 피해 마치 장대높이뛰기 하듯 창자루를 짚고 나무 위로 도망치는데(8권 260∼546행 참조), 이 장면은 그가 『일리아스 』에서 그리스 장수들의 회의석상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는 젊었을 때 아무리 강한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며 다른 장수들을 나무라는 장면들을 알고 있어야만 더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과연 얼마만큼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좋을까. 내 판단으로는 적어도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 그리스 3대 비극작가들의 비극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정도는 미리 읽고 난 뒤에 이 시를 읽는 게 좋겠다 싶다. 가령 이 책에 실린 대표적인 명문장 가운데 하나인 '아킬레스의 무구를 두고 벌이는 아이약스와 울릭세스의 설전'만 하더라도, 이 두 영웅이 트로이아 전쟁에서 얼마만큼 드높은 무공을 쌓았으며(『일리아스 』), 아킬레스만 빼고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장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약스(아이아스)가 '무구 재판'에서 울릭세스(오뒷세우스)에게 패했을 때 그가 왜 기어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소포클레스의 비극『아이아스』), 또한 트로이아 전쟁이 끝난 뒤 오뒷세우스가 귀향하던 중에 고난을 겪는 와중에 잠시 저승으로 내려갔을 때, 그의 눈에 띄었던 '아이아스의 혼령'이 오뒷세우스에게 '끝내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그냥 돌아서고 말았던 장면까지 떠올릴 수 있다면(『오뒷세우스』), 오비디우스가 노래한 두 영웅 사이의 설전이 훨씬 더 깊은 울림과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오비디우스는 이 책 속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온갖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변주'해서 들려준다. 이미 젊은 시절부터 '연애시'에 특별한 능력을 발휘했던 시인이 자신의 특출난 재능을 '사랑 이야기'에 아낌없이 쏟아낸 덕분에 시인의 노래는 '어떤 사랑'에서나 거침이 없으며, 몽테뉴가 말했던 '마치 풍부한 물이 억지로 맹렬하게 밀려 나가다가 좁은 홈통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은 조금도 찾을 수 없다.

 

오비디우스가 노래한 사랑 이야기 가운데 내게 특히 매혹적으로 다가온 이야기들만 해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다. '사랑의 쾌감'에 대한 남녀간의 차이를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현명하게' 밝힌 사랑의 쾌감을 이야기한 티레시아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한 나르킷수스와 에코 이야기, (오비디우스로부터 특히 깊은 영향을 받은) 셰익스피어가 지어낸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조가 된 퓌라무스와 티스베 이야기,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투스 이야기, 낙랑공주 이야기를 닮은 이아손과 메데아 이야기, 해서는 안 될 사랑, 오라비를 사랑한 뷔블리스 이야기, 소녀에서 남자로 바뀌는 이피스 이야기,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 나오는 아리아 '에우리디체 없이 어찌 살라고'라는 노래로 더욱 유명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이야기, 자신의 조각 작품을 사랑한 이야기 퓌그말리온의 기도, '말도 안되는 사랑'을 절묘하게 노래한 아버지를 사랑한 뮈르라 이야기, 애닯고도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인 물총새로 변한 케윅스와 알퀴오네 등이 내게는 하나같이 매혹적으로 다가왔고, 그 얘기들에 얽힌 명화들을 찾느라 한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링크를 통해 보았듯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술가들의 보물 창고'와 다름없는 작품이 되었다. 숱한 회화와 조각 작품들은 물론 수많은 음악 작품에도 그 소재를 제공했던 것이다. 오페라의 효시로 인정받는 1607년에 초연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캉캉 춤'으로 유명한 오펜바흐의 <지옥의 오르페오> 등이 모두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이야기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아예 <변신 이야기>를 교향곡의 제목으로 단 작품들도 여럿인데, 벤자민 브리튼의 <변신 이야기>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디터스도르프(1739∼1799)의 <변신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1783년에 작곡된 디터스도르프의 작품은 6개의 교향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곡에는 제목은 물론 오비디우스가 쓴 '라틴어 원문에서 발췌한 인용문'까지 붙어 있다고 한다. 그 작품의 제1번 교향곡은 <네 시대>, 제2번은 <파에톤의 추락>(☞ 아버지의 마차를 모는 파에톤), 제3번은 <사슴으로 변한 악타이온>.(☞ 디아나의 알몸을 본 악타이온), 제4번은 <안드로메다를 구한 페르세우스>, 제5번은 <개구리로 변한 뤼키아의 농부들>, 제6번은 <돌로 변한 피네오스와 그 친구들>이다. 이천 년 전에 죽은 오비디우스가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불어 넣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이미 적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이쯤에서 나는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책을 쓴 이탈로 칼비노의 이야기를 좀 덧붙이고 싶다. 그는 자신의 책 속에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세 번째로 올려 놓고, 그 글의 제목을〈오비디우스와 우주의 인접성〉으로 붙였을 정도로『변신 이야기』에 담긴 매우 심오한 이야기들을 길게 펼쳐 놓는다. 나는 칼비노가 짚어낸 '사물의 기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오비디우스의 생각까지 여기서 언급할 엄두는 차마 못내겠다. 다만 그가 '여러 고전들'을 내세우기에 앞서 미리 꺼내 놓은 '고전의 정의'에 관한 몇몇 대목만큼은 여기서 다시금 들춰 보고 싶다. 그는 '고전'에 대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정의를 여럿 만들어냈지만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정의는 그 책의 두 번째 줄에 나오는 다음의 정의일 것이다.

 

 1.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그는 이 정의를 내린 이후 곧바로 '동사 '읽다' 앞에 붙은 '다시'라는 말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궁색한 위선을 드러낸다.'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그리고 '그들이 안심하도록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아무리 청소년기부터 폭넓게 책을 읽어 왔다 해도, 항상 읽지 못한 중요한 작품들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라는 위안도 덧붙인다. 이탈로 칼비노의 첫 번째 정의에 의하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내게는 좀 독특한 고전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결코 '다시' 읽지 않고 이번에 난생 '처음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속 이어지는 칼비노의 '고전의 정의'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의중을 금세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읽는다'라고 말하느냐, '다시 읽는다'라고 말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는 게 칼비노의 핵심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고전의 정의'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5.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6.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내게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그런 표현에 딱 어울리는 바로 그런 책이었다. 이탈로 칼비노의 주장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그의 고전에 대한 정의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어찌 그리 찰떡 궁합을 이루고 있는지 자꾸만 놀라게 된다. 이왕 이야기를 시작하였으니 칼비노의 이야기를 계속 인용해 보자.

 

7. 고전이란 이전에 행해졌던 해석의 그림자와 함께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것이 한 문화 혹은 여러 다른 문화들에(더 단순하게는 언어나 관습들에) 남긴 과거의 흔적들을 우리의 눈앞으로 다시 끌어오는 책들이다.

 

고전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이전에 그 책에 대해 생각했던 이미지와 비교해 보면서 새삼 놀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작품에 대한 이차 서적이나 주석본, 해설서 들을 가능한 피하고, 원전을 직접 읽으라고 계속해서 충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는 다른 책을 해설하는 어떠한 책도 해당 원전보다 많은 이야기를 해 주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한다. 그러나 학교는 실제로 학생들이 이러한 사실을 반대로 기억하게 만든다. 이와는 상반되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즉 원전의 의미를 원전 자체보다 더 풍부하게 말해 준다고 떠벌리는 매개물들이 없을 때만 읽어 낼 수 있는 것들을, 수많은 서문, 비평문, 참고 서적들이 연막처럼 차단하는 것이다.

 

 칼비노는 어쩌면 이토록 '고전'에 대해 날카로운 혜안을 지녔는지, 또 내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읽으며 느꼈던 '절실한 생각들'을 어쩌면 그토록 미리 그 사정에 꼭 알맞게 얘기해 놓았는지 그저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그의 아홉 번째 정의(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와 열 번째 정의(고전이란 고대 전통 사회의 부적처럼 우주 전체를 드러내는 모든 책에 붙이는 이름이다.) 또한 다른 수많은 고전에게도 그런 것처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도 너무나 잘 들어맞는 설명이다. 그러면 그 나머지 정의들은? 나머지도 전부 내 마음에 쏙 든다. 특히나 그런 정의들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함께 어울릴 때면 더욱 더.

 

 이쯤 되면 근본적인 문제를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즉 고전을 읽은 체험을, 고전이 아닌 책을 읽은 경험과 어떻게 관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동시대를 잘 이해하게 해 주는 다른 책들을 제쳐 두고 왜 굳이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여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오늘날 홍수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는 고전을 읽을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와 시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중략)

 

이상적인 상황은 한 고전 작품에서 잘 구성된 음악처럼 울리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현재에 관한 모든 것들은 창밖의 자동차 소음, 날씨의 변화와 같은 저 바깥의 잡음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행동하기 일쑤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전의 실체를 먼 메아리처럼 듣는다. 지금 발생하는 일들과 관련한 소식들은 쩌렁쩌렁 울리는 텔레비전 소리처럼 듣고, 고전은 그 바깥에서 들려오는 머나먼 메아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길게 이어지는 칼비노의 얘기는 결국 자신이 만든 14개에 이르는 '고전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할 듯하다면서 덧붙이는 다음 글에서 드디어 멈춘다. '고전이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이와 같은 결론은『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의 얘기와 너무나 닮았다. "고전을 다시 읽게 되면 당신은 그 책 속에서 전보다 더 많은 내용을 발견하지는 않는다. 단지 전보다 더 많이 당신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차라리 (칼비노와 패디먼의 견해에서 좀 더 나아가) 에머슨이 남긴 "좋은 책을 읽을 때면 나는 3천 년은 더 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는 말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훨씬 더 어울린다고 느낀다. 그리고 에머슨과 절친 사이였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다음 말 또한 주석처럼 맨끝에 덧붙이는 데 아무런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

요즘 저렴한 가격에 많은 출판물이 쏟아져 나오고 번역된 책도 많지만, 고대의 영웅을 그린 작가들은 좀처럼 소개되지 않는다.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멀리 동떨어진 사람들처럼 보이고, 그들의 작품을 인쇄한 문자는 희한하고 이상해 보인다. 그래도 고대 언어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암시와 자극이 될 만한 몇 마디를 배워 길거리의 천박함을 딛고 일어선다면, 젊은 날과 소중한 시간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다. 농부가 어딘가에서 들은 라틴어 몇 마디를 머릿속에 담아두고 반복해서 사용한다고 해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욕할 것은 없다. 때때로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결국에는 더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모험을 즐기는 학생이라면 어떤 언어로 얼마나 오래전에 쓰인 것인지 상관하지 않고 고전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고전이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고전은 결코 썩지 않는 유일한 신탁이어서, 지금 이 시대의 의문에 대한 해답까지 담겨 있다. 델포이와 도도나도 그 시대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달린 월든』, <독서>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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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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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피지 쪽들에 호메로스가 다 담기다니!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그 많은 모험이

프리아모스 왕국의 적이었던 오뒷세우스 말야!

그 모든 것이 양피 한 조각에 갇혀 버리다니

겨우 자그마한 몇 장으로 접은 양피 조각에!

 - 마르티알리스

 

 * * *

 

만약에 인류의 역사에서 호메로스라는 시인이 없었더라면 세상은 과연 지금과는 얼마만큼 달라졌을까. 단 한 사람의 시인을 두고, 그의 존재 여부에 따라 세상이 얼마나 더 달라졌을지를 상상해 보는 일이 과연 온당키나 한 일일까. 비록 내가 이 시인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들이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이 인물에 대해서만큼은 내가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아낌없이 다 바치고 싶다. 그만큼 나는 그로부터 만들어진 단 두 편의 서사시가 후세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이 견줄 데 없이 심원하고도 광대하다고 믿는다.

 

그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라는 불후의 작품을 남긴 덕분에, 우리 인류의 삶은 그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빨리 앞당기지 못했을 '인간다운 세상'에 보다 일찍 살게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가 지어낸 몹시도 훌륭한 두 가지 이야기 덕분에 우리 인류는 야만으로부터 좀 더 일찍 고상한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도 여겨지고, 또 그가 지어낸 『오뒷세이아』라는 매혹적인 모험 이야기 덕분에 우리 인류는 훨씬 더 일찍부터 미지의 세계를 향해 좀 더 두려움없이 용기있게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만큼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무수한 문학작품과 예술작품에 놀라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끊임없이 지속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창조해낸 숱한 이야기들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또한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지금까지 지구 위에서 창조되었던 온갖 그림들과 조각들, 혹은 음악이나 연극작품들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줄어들었음이 틀림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가 쓴 불멸의 두 작품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주요한 문학작품들이 얼마나 많았을지를 헤아려 보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마는, 그래도 나는 내가 읽었던 몇몇 작품들만이라도 당장 손에 꼽아 보고 싶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들은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들의 작품들이다. 그 세 사람의 천재 시인들이 쏟아낸 수많은 걸작들 가운데 상당수는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창조해낸 것들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무려 8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로마 최고의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의 걸작 서사시 『아이네이스』로 이어졌으며, 거기서 또다시 천 년 이상의 세월을 건너뛰고 나면 단테의『신곡』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불후의 명성을 얻은 문학작품들 말고도 그 사이사이에 호메로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가와 문학작품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내가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작가들만 하더라도 몽테뉴, 셰익스피어, 괴테, 헨리 데이빗 소로우 등을 아주 쉽게 예로 들 수 있다.(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5년 동안 독문학을 공부했던 이 책의 역자 천병희 선생님은 <옮긴이 서문>에서 '괴테의 소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가 얼마나 호메로스에 심취해 있었는지 엿볼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한다.) 

 

호메로스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시도는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추앙받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와 영국의 계관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율리시스』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심지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니메이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까지도 이어졌다.

 

흔히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는 서양 최초의 문학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 최초의 두 작품이 그 이후의 모든 유럽 문학의 '근원이자 원천'이 되었으며, 새로운 사상으로 향하는 '드넓은 관문'이 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다. 최근에 들어 서양 철학의 원천을 호메로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연구도 드물지 않다고 하는데,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목숨이 걸린 재판에서 『일리아스』의 구절을 인용한 점이나, 심지어 플라톤이 '호메로스를 능가하기 위해' 애쓴 결과물이 대화편이라는 주장이 있을 정도이니 그런 연구 성과 또한 조금도 이상할 이유가 없을 듯싶다.

    

 

경쟁자와 싸우듯이 호메로스와 상을 다툰 플라톤

헤로도토스만이 가장 호메로스적이었을까요? 천만에 그 이전에 스테시코로스와 아르킬로코스가 있었고 어느 누구보다도 플라톤이 있었소. 그는 호메로스라는 샘으로부터 그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여 수많은 실개천을 냈던 것이오. 나는 그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겠지요. 암모니오스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들을 간추려 기록해두지 않았더라면 말이오. 그런 것은 표절이 아니오. 그것은 조각이나 그 밖에 다른 예술에 의하여 아름다운 형상들을 재현하는 것과도 같소. 그리고 생각건대, 플라톤은 마치 젊은 전사가 만인이 경탄하는 경쟁자와 싸우듯이 호메로스와, 제우스 신께 맹세코, 온 마음을 다해 상을 다투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철학 이론들을 그렇게까지 꽃피우지 못했을 것이고, 시의 주제와 언어에 그렇게 자주 함께 승선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는 아마도 경쟁심에서 지나치게 투지에 넘쳐 있지만, 그런 다툼은 결코 무익한 것이 아니었소.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그런 불화는 인간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이오. 그리고 선배들에게 지더라도 그것이 불명예가 아닌 곳에서는 명성을 위한 투쟁과 승리의 영관(榮冠)은 정말이지 그 무엇보다도 다투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숭고에 관하여〉중에서

 

 

그러니 입심 좋은 몽테뉴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특출한 인물을 골라 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탁월한 인물' 가운데 첫 번째로 호메로스를 꼽는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
아리스토텔레스나 바로가 그만큼 박식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니고, 예술에서 베르길리우스가 그에게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이 판단은 그들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 둔다. 한편밖에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단지 내가 아는 한도로 시신(詩神)들까지도 이 로마 시인보다 뛰어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단에서도 베르길리우스가 그 재질을 주로 호메로스에게서 배워 온 것이었으며, 이 시인이 그의 안내자이며 스승이었고, 《일리아드》의 단 한 줄이 저 위대하고 거룩한 《아에네이스》에 본체와 재료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고찰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사실 나는 자기 권위로 많은 신들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을 믿게 한 그가, 자신이 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자주 이상하게 여겨 왔다. 앞을 보지 못하며 궁핍한 몸으로 학문이 아직 규칙과 확실한 관찰로 사물들을 기록해 놓기도 전에, 그는 이런 일을 모두 알고 있어서, 다음에 정치를 세우고 전쟁을 지휘하고, 어느 학파에 속하건 종교나 철학에 관한 것을 쓰고, 기술을 다루는 일에 간섭하는 자들을 누구나 다 그를 모든 사물들에 관한 지식의 지극히 완벽한 스승과 같이 보며, 그의 작품을 모든 종류의 능력을 기르는 기초 터전 같이 이용했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받는 호메로스의 작품을 나는 왜 이토록 뒤늦게 접하게 되었던 것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호메로스의 작품을 꼭 그렇게 늦게 읽은 것만은 아니었다.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온갖 영웅들이 등장하는 그 유명한 이야기를 은연중에 들어서 알게 된 사람들 가운데 그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고 싶어하지 않을 독자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서 나도 대학 입시를 막 끝낸 이후 서울로 상경하기 전까지의 몇 달 동안에 대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붙잡고 읽기 시작했다. 입시 공부에 여념이 없을 때조차,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도서관에서 여러 권으로 이어지는 '완역판'『삼국지』를 대출해서 읽으며, '수학의 정석'에 담긴 오묘한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는 영웅호걸들이 말을 타고 내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무용담이 수천 배는 더 재미있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기에 까마득한 옛날에 트로이아의 벌판에서 벌어진 서양 고대의 전쟁을 둘러싼 영웅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작품은 삼국지와는 전혀 다른 낯선 고대의 '서사시'였고, 내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무수한 지명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는 데다가, 수많은 신들과 인간들이 오래 전부터 복잡한 사건들로 깊숙하게 얽혀 있어서, 마치 오랜 세월 동안 같은 나라나 도시에서 살고 있어서 모두들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들을 나만 홀로 까맣게 모르는 나그네가 된 심정과도 닮은 당혹감을 그 책을 읽는 내내 좀처럼 떨치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때만 하더라도 나의 독서 경험은 정말 보잘 것 없었을 테고, 호메로스의 걸작 서사시에 대해서도 충분히 그 매력을 깨닫지 못했을 게 틀림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애를 쓰며 꼼꼼하게 그의 서사시를 끝까지 다 읽었다 하더라도, 그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느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 갑자기 발을 내디딘 어느 이방인처럼 느껴졌고, 이국의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에는 몹시 흥미를 느끼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말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아 힘겨워 하는 고달픈 여행자와 다름없는 신세였던 것이다. 
그때 내가 겪었던 일들은 어쩌면 어느 책에서 만났던 하버드의 문학부 졸업생이 학창 시절의 '고전 강의'를 회고하면서 남긴 다음과 같은 모습과 얼마간 똑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일리아스』가 무슨 늪지대라도 되는 양 여기저기 발이 푹푹 빠지면서 호메로스를 그저 읽어내는 게 과제였다. ······ 이 불후의 서사시가 담고 있는 영광과 찬란함과 부드러움과 매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었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Great Books』을 쓴 데이비드 덴비David Denby(1943∼ )는 "고전은 사람을 기죽게 하는 점령군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다시 또 독자와 싸우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들의 왕국"이라고 말했는데, 어쩌면 내가 그 당시 아무런 무장도 갖추지 않고 너무 일찍 '야수들의 왕국'에 발을 들여놓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나는 그 이후로 호메로스가 꾸며낸 이야기 뿐만 아니라 호메로스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에 대해 쓴 이야기들을 여러 책들 속에서 적잖이 마주쳤지만 정작 그의 두 작품을 다시 읽을 시간은 좀처럼 할애하지 못했다. 그건 아마도 얼마쯤은 다음의 두 가지 생각에다 핑계를 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하나는 아마도 '호메로스의 작품은 이미 꽤 오래 전에 깔끔하게 다 읽었거든...'과 같은 얄팍한 정복감이었을 테고, 또다른 하나는 아마 지금까지도 여전히 '야수들의 왕국'에 섣불리 들어갔다가는 아직도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릴 것 같은 일말의 두려움이나 걱정 같은 감정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만큼 흥미진진한 모험담도 드물지 싶고,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특별히 좋아했던 이야기가 바로 '오뒷세이아'를 닮은, 주인공이 낯선 곳을 떠돌며 수많은 모험과 고난을 겪는 바로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어쩌면 내가 어릴 때 완전히 매료되며 읽었던 많은 이야기들, 가령 <보물섬>, <15 소년 표류기>, <80일간의 세계 일주>, <걸리버 여행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알라딘의 요술 램프>, <신밧드의 모험>, <정글북>, <톰 소여의 모험>, <로빈슨 크루소> 등등이 모두 『오뒷세이아』의 머나먼 자식들인지도 모르겠다.

제법 나이가 들어서 이번에야 다시 읽은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그 둘 중에서도 특히『오뒷세이아』는 까마득한 옛날에 그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도 미묘한 이야기로 내게 다가왔다. 그건 아마 무엇보다도 내가 그저 '옛날의 내가 아니기 때문'임에서 비롯되는 것임이 틀림없다.

우선, 내가 처음으로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두발의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던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머리카락조차 제대로 기르지 못한 더벅머리 총각이었으나 어느새 나도 이젠 세상 경험을 적잖이 겪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오뒷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에) 어엿한 성년으로 자라났듯이 내 자식들도 어느새 모두 스무 살을 넘긴 나이가 되었을 만큼 '장성한 자식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니 오뒷세우스가 '가족'과 '고향'을 애타게 그리는 이 이야기가 단지 애송이에 불과했던 그 까마득한 옛날보다 얼마만큼 더 달리 읽혀지겠는가.

 

그 다음으로, 나는 어쨌든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제대로 읽기 위해 필요한 '여러 다양한 사전 지식들'을 예전보다는 훨씬 더 많이 부지불식간에 자연스럽게 습득했으리라 스스로 여긴다. 그래서 내가 경험을 통해 더욱 뚜렷이 알게 된 일이지만, 서양의 다양한 고전들 가운데 특히 '호메로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들의 작품을 어느 정도 미리 읽고 나면 확실히 '늪지대'를 덜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옛날에 늪지대로만 느꼈던 곳들이 어느새 바닥이 단단하게 굳어 있는 땅으로 변했음을 느끼거나 혹은 친숙한 사람들조차 가끔씩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광장처럼 변해 있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그런 작품들 가운데 호메로스를 다시 만났을 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작품들은 단연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오늘날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총 33편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천병희 선생님의 각별한 노고에 힘입어 (전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원전 번역을 다 갖추게 되었고, 그 덕분에 나도 그 작품들을 오롯이 우리말로 다 읽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오뒷세우스가 겪는 모험들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들이 꽤나 많으며,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한 영웅들 가운데 끝까지 살아남은 인물들 중에서는 그리스군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의 두 형제를 빼고는 가장 우뚝했던 그가, 전쟁을 끝낸 직후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고향 이타케로 돌아오면서 겪게 되는 놀랍고도 눈물겨운 이야기들은 그 하나 하나를 따로 떼어놓아도 훌륭한 '모험 단편'처럼 다채롭고 흥미롭기 그지 없다.

그 이야기들을 굳이 오뒷세우스가 겪은 시간대별로 여기서 다시 길게 나열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트라키아 지방 이스마로스라는 도시에서의 해적질, 그 열매를 먹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잊어버린다는 '로토스를 먹는 종족'을 만난 이야기, 외눈박이 괴물들인 퀴클롭스 종족들이 사는 섬에서 폴뤼페모스를 눈 멀게 하고 도망치는 이야기, 바람들의 왕 아이올로스가 사는 아이올리에 섬의 이야기, 식인 거한들의 나라 라이스트뤼고네스족을 만난 이야기, 마녀 키르케의 섬에서 1년 동안 지낸 이야기, 오뒷세우스가 저승으로 내려가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아가멤논과 아이아스 등 트로이아 전쟁에서 함께 싸웠던 '이미 죽은' 영웅들과 만난 이야기, '세이렌 자매들의 섬'에서 밀랍으로 귀를 막으며 노래의 유혹을 견디는 이야기, 떠다니는 플랑크타이 바위들을 피해 괴물 스퀼라가 살고 있는 동굴 옆으로 배를 모는 이야기, 헬리오스의 수많은 암소들과 양들이 있는 트리나키에 섬에서 도망치다가 전우들을 모두 잃는 이야기, 머리를 곱게 땋은 칼륍소에게 붙잡혀 7년 동안 동굴에 갇혀 사는 이야기, 뗏목을 타고 열여드레 동안 항해한 끝에 
나우시카아 공주가 살고 있는 파이아케스족의 나라 스케리아 섬에 당도하여 알키노오스의 궁정에 머문 이야기, 거기서 다시 고향 이타케로 돌아와 '귀향자' 오뒷세우스가 '고향에서 겪는 모험' 이야기 등.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가 무려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은 단지 '기가 막힌 이야기들을 기가 막힌 솜씨로 풀어냈기 때문에' 불후의 걸작으로 떠받들려지는 것일까. 물론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사실이 변함이 없다는 점은 월트 디즈니를 오랫동안 경영했던 마이크 아이스너의 다음 이야기만 들어보아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호머(Homer), 초서(Chaucer), 그리고 세익스피어(Shakespeare) 시대로 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전달 매체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이었다."

 

그런데 호메로스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우리가 단순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스토리'와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들을 훨씬 더 뛰어넘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사실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훨씬 더 방대한 규모의 이야기인 서사시권(敍事詩圈 epikoskyklos)이라는 더 큰 전체의 일부로서, 작시(作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을 무엇보다도 '플롯의 통일'에서 찾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 점에 대해서는 호메로스를 따를 시인이 없다'는 것이며, 트로이아 서사시권 가운데 호메로스의 두 작품 말고는 다른 작품들이 아예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만큼 호메로스가 지어낸 두 이야기가 무엇보다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이 특별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통해 '호메로스의 탁월한 점'을 거듭 강조하는데,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그가 왜 10년 동안 벌어진 '트로이아 전쟁' 가운데 단 며칠 동안의 사건만을 다뤘으면서도, 『일리아스』가 영원불멸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아울러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에 '트로이아 전쟁'과 '고대 그리스 비극'과의 관계도 조금 더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호메로스는 앞서도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이 점에서도 다른 시인들보다 탁월한 것 같다. 그는 트로이아 전쟁이 시초와 종말을 가진 전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부 다 취급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필시 그 스토리가 너무 방대하여 통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든지, 혹은 그 길이를 제한한다 하더라도 그 속의 사건이 다양해서 너무 복잡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전체에서 한 부분만 취하고, 그 외 많은 사건은 삽화로 이용하고 있다. 예컨데 「함선 목록」이나 다른 사건은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덜기 위하여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시인들은 한 사람 또는 한 시기를 취급한다지만, 그들이 취급하는 행위는 하나라 하더라도 그 속에 여러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퀴프리아』와 『소(小) 일리아스』의 작가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 결과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로부터는 각각 한 편, 또는 많아야 두 편의 비극이 만들어질 수 있는 데 비하여 『퀴프리아』로부터는 다수의 비극이,  그리고 『소일리아스』로부터는 8편 이상의 비극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무구 재판』, 『필록테테스』, 『네옵톨레모스』, 『에우뤼필로스』, 『걸인 오뒷세우스』, 『라케다이몬의 여인들』, 『일리오스의 함락』, 『출범(出帆)』, 『시논』및 『트로이아의 여인들』이 그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제23장

 


흔히들 말하기를, 『일리아스』는 호메로스의 재능이 절정이 달했을 때 쓴 작품이어서, 작품 전체를 극적인 행동과 투쟁으로 가득 채운 반면, 『오뒷세이아』는 호메로스가 노년에 그 작품을 쓴 것으로 추정하며, 그런 특징 때문에 작품의 대부분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사람들은『오뒷세이아』에서의 호메로스를 '크기는 그대로지만 힘이 없는 지는 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하며, '
이미 『일리아스』의 노래들에서와 같은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니, 그곳에는 결코 범용으로 떨어지지 않는 숭고도 곤두박질치며 쏟아지는 격정도, 다재다능함도, 현실성도, 일상생활에서 끌어온 풍부한 심상도 없고, 그것은 마치 오케아노스가 자신 속으로 도로 흘러들어 자신의 경계 안에 조용히 머무는 것과도 같다'고도 말한다.

 

이런 지적은 『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의 지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들린다.

 

『일리아스』를 읽고 나서 『오디세이아』를 집어 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작품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조차도 다르게 들린다. 『일리아스』에서는 무기의 충돌로 시끄러운 쇳소리가 나는 데 비해, 『오디세이아』에서는 수많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바다의 속삭임 또는 노호努號가 들려온다.

하지만 두 작품 사이의 차이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일리아스』는 비극적이다. 그것은 서구 문학에서 되풀이 되어 온 주제, 우리의 마음속에서 늘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아무리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일지라도, 불변의 운명이 지배하는 세상과 맞서서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다는 주제이다. 하지만 『오디세이아』는 비극적이지 않다. 이 작품은 우리의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을 강조한다. 그 주제는 죽음과 맞선 용기가 아니라, 고난에 맞서는 지성이다. 그것은 지성의 힘이라는 또 다른 주제를 천명하는데, 우리 현대인은 이 주제에 즉각 반응한다. 오디세우스는 용감하지만 그의 영웅적 행위는 지성에서 나온다.


 

『오뒷세이아』를 읽으면서 새삼 '고전의 매력'을 실감하게 된다. 예전에 내가 스무 살을 갓 바라볼 때 읽었던 오뒷세우스의 모험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20년 동안이나 집을 비운 아버지를 기다리는 청년 텔레마코스'의 입장에서 많이 생각했을 듯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읽어 보니 비로소 나이를 먹은 오뒷세우스의 마음에 훨씬 더 쉬이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귀향'을 애타게 그리는 오뒷세우스의 간절한 처지와 고향에 남겨진 연로한 아버지와 훌쩍 나이가 든 아내와 어느덧 어른이 다 되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결코 작품 속의 이야기로만 들리지도 않는다.

지략이 뛰어나고, 꾀도 많고, 참을성도 많은 오디세우스는 천신만고 끝에 결국 '귀향'에 성공할 뿐만 아니라, 귀국하자마자 왕비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아가멤논의 사례를 거울 삼아, 온갖 세심한 주의와 노력을 다한 끝에 '20년 동안이나 수절하며 기다리는 페넬로페'를 괴롭히며 오뒷세우스 집안의 재산을 일삼아 축내던 악랄한 구혼자들을 모조리 물리친다. 그런 주인공 오뒷세우스를 통해 호메로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아닌 '수많은 도시를 보고,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된 영웅'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시인 호메로스가 무사(Mousa) 여신에게 드리는 간청이자, 기나긴『오뒷세이아』의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시를 보았고 그들의 마음을 알았으며

바다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전우들을 귀향시키려다

마음속으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못된 짓으로 말미암아

파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 이 일들에 관해 아무 대목이든,

여신이여, 제우스의 따님이여, 우리에게도 들려주소서!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제1권 제1∼10행

 

 

마샤 콜리시(Marcia Colish)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교도의 습관은 '그냥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에서' 아무 책이나 집어들어 펼쳤다고 한다. 그런데 그 습관은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읽던 이교도들의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백록』이라는 저서를 남긴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날 정원에서 독서하는 도중 아이들의 노래를 들었는데, 그가 실제로 들은 노랫말은 "집어들고 읽어라"는 구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바울의 로마서를 펼쳤다고 한다. 호메로스의 이야기가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집어들고 읽지 않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러니 나도 그저 다음과 같은 간결한 말로 이 기나긴 리뷰를 끝낼 수밖에.

 

"집어들고 읽어라"

 

 '이 일들에 관해 아무 대목이든' 다 좋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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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년 연주회 일정_예술의 전당
    from Value Investing 2016-01-12 23:53 
    사이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오디세우스는 귀에 밀랍을 틀어막고 자신을 돛대에 단단히 묶게 했다. 물론 사이렌들에 맞서기 위하여 고래로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그 비슷한 것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멀리서부터 이미 사이렌들에게 유혹당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이런 것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온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사이렌의 노래는 무엇이든 다 뚫고 들어가니 유혹당한 자들의 격정은 사슬이나 돛대보다 더한 것이라도 깨뜨렸으리라. 그러나 오
 
 
LionHeart 2014-09-12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성들인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는 아직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책에 대한 깊은 이해에 감탄했습니다.
저는 아직 말씀하신 "야수들의 왕국"에 가녀린 나뭇가지 하나 잡고 서있는 수준인 것 같습니다. 실은 지난 읽었던 몇 개의 고전 서적들 모두 종종 공감도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아 인상을 찌그러트리며 책장을 넘긴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좀더 소양을 쌓고, 시간이 지나면 이 책의 또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되겠지요? 그때는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지 기대됩니다. :)

oren 2014-09-12 22:01   좋아요 0 | URL
LionHeart 님께서 남겨 주신 댓글을 읽으니 문득 『오뒷세이아』에서 주인공이 퀴클롭스에게 붙잡혔을 때 자신을 '아무도 아니'라고 소개한 대목이 떠오르네요. 누구든지 상대하기 벅찬 유명한 고전들과 맞닥뜨릴 땐 마치 자신이 '아무도 아닌' 것과 같은 느낌이 들게 마련이라고 생각됩니다. 저 역시 오뒷세우스처럼 '아무도 아니'라는 이름을 달고 퀴클롭스와 같은 괴물과 싸울 때가 정말 많답니다. ㅎㅎ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하더라구요.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고도 하고요.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될 때' 찾아오는 남모르는 기쁨 때문에라도 부지런히 '야수들의 왕국'을 자꾸만 기웃거리지 않을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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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식을 들은 그대의 어머니는 불사의 바다 처녀들을

데리고 바다에서 나왔소. 그리하여 바다 위로 불가사의한 울음소리가

일자 전 아카이오이족이 아랫도리를 부들부들 떨었지요. 그리하여

그들은 벌떡 일어서서 속이 빈 함선들이 있는 곳으로 갔을 것이나

옛 일들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그들을 만류했으니,

네스토르의 조언은 전부터 가장 훌륭한 것으로 판명되었지요.

그들 사이에서 그는 좋은 뜻으로 열변을 토하며 말했소.

'멈추시오, 아르고스인들이여! 도망치지 마시오, 아카이오이족의

젊은이들이여! 저기 저것은 그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만나보려고

불사의 바다 처녀들을 데리고 바다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오.'

그가 이렇게 말하자 늠름한 아카이오이족은 도주를 멈추었소.

그러자 바다 노인의 딸들이 그대를 둘러서서 애처로이 울었고

그대에게 불멸의 옷들을 입혀주었소. 그리고 모두 아홉 명의

무사 여신들이 서로 화답하며 고운 목소리로 만가를 부르기 시작했소.

그곳에서 그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르고스인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을 것이오. 낭랑한 무사 여신의 노랫소리가 그만큼

힘차게 일었던 것이오. 그리하여 열흘하고도 이레 동안 밤낮으로

불사신들과 필멸의 인간들이 그대를 위해 울었지요.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24권 제47∼64행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네레이디스들(바다의 요정)

적회식 코린트식 히드리 화병, BC 560 ~ BC 550경, 루브르 박물관

 

 

열여드레째 되던 날, 우리는 그대를 불에 넘겨주었고

그대 주위에서 살진 양들과 뿔이 굽은 소들을 많이 잡았소.

그대는 신들의 옷을 입은 채 많은 연고와 달콤한 꿀 속에서

타고 있었고, 수많은 아카이오이족 영웅들이 무장한 채

불타는 그대의 화장용 장작더미 주위를 더러는 걸어서

더러는 전차를 타고 행진하니 큰 소음이 일었지요.

그러나 헤파이스토스의 불길이 그대를 완전히 없애버리자

우리는 이른 아침에, 아킬레우스여! 그대의 백골들을

주워 모아 물 타지 않은 포도주와 연고 속에 집어넣었소.

그러자 그대의 어머니가 손잡이가 둘 달린 황금 단지를 주며

디오뉘소스의 선물로 이름난 헤파이스토스의 작품이라고 했소.

그 안에, 영광스런 아킬레우스여! 그대의 백골들이 들어 있소.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24권 제65∼76행

 

 

 

리코메데스 궁전에서 여인으로 변장한 아킬레우스를 알아본 오뒷세우스

장 밥티스트 카르포(Jean-Baptiste Carpeaux, 1827~1875), 1854년경, 발랑시엔 미술관


 


그러니 그대는 죽어서도 이름을 잃지 아니하고 모든 인간들 사이에서

언제까지나 훌륭한 명성을 누리게 될 것이오, 아킬레우스여!

나는 전쟁을 이겨냈건만 그것이 내게 무슨 즐거움이 되었지요?

귀향하자마자 아이기스토스와 나의 잔혹한 아내의 손에 죽는

끔찍한 파멸을 제우스께서 나를 위해 생각해내셨으니 말이오."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24권 제93∼97행

 

 

 

오뒷세우스는 불쌍한 거지 노인의 행색을 하고는

지팡이를 짚고 몸에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소.

그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났으니 그가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우리 가운데 나이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소.

오히려 우리는 그를 욕설로 윽박지르고 물건을 던졌으며,

그는 우리가 욕설하고 물건을 던져도

자신의 홀에서 굳건한 마음으로 참고 견뎠소. 그러나 마침내

아이기스를 가지신 제우스의 마음이 그를 분기시키자

그는 텔레마코스와 함께 더없이 아름다운 무구들을

집어 들어 방에 갖다놓고는 문에 빗장을 질렀소.

그러고 나서 그는 교활하게도 아내를 시켜 구혼자들

앞에 활과 잿빛 무쇠를 갖다놓게 했소.

불운한 우리들의 시합을 위해 그리고 살육의 시작을 위해.

우리는 아무도 그 강력한 활에 시위를 얹을 수 없었으니

우리의 힘은 그에 훨씬 못 미쳤던 것이지요.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24권 제157∼171행

 

 


아트레우스의 아들의 혼백이 그에게 대답했다.

"행복하도다 그대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지략이 뛰어난

오뒷세우스여! 그대야말로 부덕(婦德)이 뛰어난 아내를 얻었구려!

이카리오스의 딸 나무랄 데 없는 페넬로페는 얼마나 착한 심성을

지녔던가! 그녀는 결혼한 남편 오뒷세우스를 얼마나 진심으로

사모했던가! 그러니 그녀의 미덕의 명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불사신들은 사려 깊은 페넬로페를 위해

지상의 인간들에게 사랑스런 노래를 지어주실 것이오.

그와는 달리 튄다레오스의 딸은 악행을 궁리해내어

결혼한 남편을 죽였으니 그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가증스런

노랫거리가 될 것이오. 그러니 그녀로 말미암아 모든 여인들이,

설사 행실이 바른 여인이라도, 나쁜 평판을 듣게 될 것이오."
그들은 대지의 깊숙한 곳에 있는 하데스의 집 안에 서서

서로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24권 제191∼204행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뒷세우스는 이렇듯 노년에 찌들고

마음속에 큰 슬픔을 품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키 큰 배나무 밑에 가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음속으로 심사숙고했다.

아버지를 끌어안고 입 맞추며 자신이 어떻게 돌아와서

고향 땅에 도착하게 되었는지 낱낱이 이야기할 것인지,

아니면 먼저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일일이 시험해볼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는 역시 먼저 빈정대는 말로

아버지를 시험해보는 것이 상책인 것 같았다.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24권 제232∼240행

 

 


 

그가 이렇게 말하자 슬픔의 먹구름이 노인을 덮쳤다.

그래서 노인은 두 손으로 시커먼 먼지를 움켜쥐더니

크게 신음하며 자신의 백발 위에 그것을 쏟아 부었다.

그러자 오뒷세우스의 마음은 감동되었고, 사랑하는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그는 가슴이 찡하고 코허리가 저리고 시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얼싸안고 입 맞추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여기 있는 제가 아버지께서 물으시는 바로

그 사람이에요. 이십 년 만에 저는 고향 땅에 돌아왔어요.

자, 울음과 눈물겨운 비탄일랑 그만 그치세요.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24권 제315∼323행

 

 

 

구름을 모으는 제우스가 그녀에게 이런 말로 대답했다.

"내 딸아! 그 문제를 왜 내게 따지고 묻는 것이냐?

오뒷세우스가 돌아와서 그자들에게 복수한다는 계획은

네가 생각해내지 않았더냐? 네 뜻대로 하려무나.

하지만 나는 너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말하겠다.

고귀한 오뒷세우스가 구혼자들에게 복수한 다음에는

양편이 굳은 맹약을 맺게 하고, 그가 언제까지나 왕이 되게 하라.

우리는 그들이 아들들과 형제들의 살육을 잊게 해주자꾸나.

그리하여 그들이 이전처럼 서로 사랑하게 되어

그들에게 부와 평화가 충만하게 해주어라!"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24권 제477∼486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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