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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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종의 관능적인 탐욕

 

나는 다시 한 번 집을 옮길 작정이다. 내 주위로는, 가구가 빠져 나온 구석의 은밀한 먼지 속에 쓰러질 듯 쌓인 책더미들이 마치 사막 한가운데의 풍화에 깎인 바위 모양으로 불안하게 서 있다. 눈에 익은 책들을(어떤 책은 색깔로 알아보고, 어떤 책들은 모양으로도 무슨 책인지 알고, 대다수는 표지에 쓰인 세부 사항을 읽어야 알지만 이런 책들은 거꾸로 놓였거나 비뚤게 놓여 있기 십상이어서 제목을 읽으려면 거꾸로 혹은 기묘한 각도로 봐야 한다) 한 권 한 권 쌓아올리면서 나는,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다시는 읽지 않을 것이 뻔한 데도 그렇게 많은 책을 간직하려는 이유는 대체 뭘까 궁금해한다. 책 한 권을 뽑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혼자서 이렇게 말한다. 며칠 후면 그 책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또 어느 책이든 지금까지 나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던 책은 한 권도 없었다고. 그리고 이 많은 책들을 집으로 가져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고, 그 이유란 것이 장래 어느 날 다시 한 번 유효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나는 철저함과 희귀함, 그리고 얄팍한 학식을 구실로 내세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계속 늘어만 가는 이 책 무리들을 계속 움켜쥐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일종의 관능적인 탐욕이라는 사실을.(342쪽)

 

 

거의 잊혀진 책 속에서 한때 그 책의 독자였던 나의 흔적을 발견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책으로 흘러 넘치는 서가를, 다소 익숙한 이름이 꽂혀 있는 그런 서가를 보기를 즐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내 인생의 목록이랄 수 있는 것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에게 넌지시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또 거의 잊혀진 책 속에서 한때 그 책의 독자였던 나의 흔적을-갈겨쓴 글자나 끼워 놓은 버스표, 이상한 이름과 숫자가 적힌 종이 쪽지, 책의 앞뒤 여백에 적힌 날짜나 어떤 장소, 이런 것들은 아주 오랜 옛날 어느 여름날의 머나먼 호텔방이나 어느 카페로 나를 데려다 주는데-발견하기를 좋아한다. 책을 꼭 포기해야 했다면 그렇게 했을 테고 또다시 어느 책을 시작으로 책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몇 차례 필요에 의해 책을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때는 견디기 힘든 상실감을 느껴야 했다. 책을 포기할 때는 무엇인가가 죽어 가고 있다는 기분을 피할 수 없었고, 나의 기억은 슬픈 향수처럼 끊임없이 그 책으로 되돌아가곤 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세월이 흘러 기억력도 쇠잔해지고 과거를 떠올리는 힘도 점점 약해지는 마당에 그 책들은 이제 약탈당한 도서관처럼 느껴진다. 많은 열람실은 굳게 닫혀 버렸고, 아직 들락거릴 수 있도록 개방된 열람실의 서가에는 거대한 구멍이 뻥 뚫려 있다. 나는 남아 있는 책 중에서 한 권을 끄집어내고는 책장 몇 장이 파괴자에 의해 찢겨 나간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다. 기억이 희미해지면 희미해질수록 내가 읽었던 책들의 창고를, 텍스트와 목소리와 향기가 함께 어우러지는 이 수집품들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 더욱 간절해진다. 이제 이 책들을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나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 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과거에 대한 질투 때문이 아닌가 싶다.(342∼343쪽)

 

(나의 생각)

오래된 책, 더 이상은 '함께 하기에 지친' 책들과 마침내 결별하는 순간은 늘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오래된 책들과 결별할 때라도 그냥 단칼에 헤어질 수는 없다. 혹시라도 그 책 속에서 '뭔가' 나와의 인연을 끊기 어려운 '지푸라기 하나'라도 발견하게 될지, 혹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소중한 옛 추억'으로 이끌 끄나풀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지 그 누가 장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결별의 순간'에 오랜 과거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그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의 황홀함이 그립다.

 

 

아득한 과거 속에 살고 있다는 꿈

 

발터 벤야민은 "수집가들은 자신들이 아득히 먼 곳이나 아득한 과거 속에 살고 있다는 꿈을 꿈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일상의 생활 필수품조차 제대로 손에 넣지 못해 허덕이는 마당에 자신들은 장당의 필요성에는 초연하며 좀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다"고 쓰고 있다.(344쪽)

 

 

개인 서재야 말로 대를 이어 더욱 넓혀야 하는 가보(家寶)

 

18세기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는 개인 서재야 말로 대를 이어 더욱 넓혀야 하는 가보(家寶)로 통했다. 서재에 꽂힌 책들은 화려한 의상과 품행 못지않게 주인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상이었다. 우리는 18세기 상반기에 가장 유명했던 애서가의 한 사람이었던 호임 백작(그는 1736년에 마흔 살을 일기로 사망했다)이 책으로 가득한 서가 하나에서 키케로의 『웅변집』한 권을 뽑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그 책이 수많은 도서관에 흩어져 있는 수백 권 혹은 수천 권의 똑같은 책 중 하나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뜻에 따라 제본되고 자신의 손으로 해설도 적고 가문의 문장까지 금박으로 새긴 자기만의 책으로 간주했을 것이다.(344∼345쪽)

 

책 도둑에 대한 경고문

 

아니면 이런 위협은 어떤가. 바르셀로나에 있는 산 페드로 수도원의 도서관에 적힌 것이다.

 

책을 훔치거나 빌려 가서 돌려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손안에 든 책을 뱀이 되게 하여 그 사람을 갈기갈기 찢게 하여라. 그 사람의 전신을 마비시키고 육신을 시들게 하여라. 자비를 구하며 큰 소리로 울부짖게 하고, 죽을 때까지 절대로 고통을 멎게 하지 말라. 절대로 죽지 않는 버러지라는 증거로, 책벌레로 하여 그의 내장을 갉아먹도록 하라. 마침내 그가 마지막 처벌장으로 향하면 지옥의 불길이 그를 영원히 삼키게 되리라.


그렇지만 열정적인 연인 사이처럼, 그 어떤 저주의 말도 특정 책을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독서가들을 망설이게 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어떤 책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 그래서 그 책의 유일한 소유자가 되겠다는 욕망은 다른 욕망과는 달리 탐욕스런 면을 지니고 있다. 리브리의 동시대인인 찰스 램도 "한 권의 책은 그것이 나의 소유가 될 때, 그리고 얼룩이 어디에 묻어 있는지 또 어느 책장이 접혀 있는지를 잘 알게 될 때, 그래서 그런 얼룩을 보면서 버터를 바른 머핀을 앞에 놓고 차를 마시던 그 어느 날을 추억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질 때 더 잘 읽힌다"고 고백했다.(352∼353쪽)

 

 

사랑에서의 정절만큼이나 지키기 어려운 것

 

독서 행위는 신체의 모든 감각이 개입하여 친밀한 육체 관계를 구축한다. 두 눈은 책장에서 단어를 끌어내고, 두 귀는 읽는 소리를 듣고, 코는 종이와 잉크, 접착제, 판지나 가죽 냄새를 맡고, 손으로는 거칠거나 부드러운 책장, 아니면 부드럽거나 딱딱한 표지를 어루만진다. 심지어 독서가의 손가락이 혓바닥에 닿을 때에는 간혹 미각까지도 독서 행위에 동참하기도 한다(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살인자가 사람들을 독살하는 것도 이런 방식이다). 이 모든 것들을 독서가들은 다른 사람들과 나눠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이 다른 사람의 소유로 되어 있을 경우, 소유권법은 사랑에서의 정절만큼이나 지키기 어려운 것이 된다.(353쪽)

 

이 모든 책이 나의 것이로구나

 

또 물리적 소유는 때때로 지적 이해와 동의어가 된다. 우리는 자신이 소유한 책은 이미 내용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경향이 강하다.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재에서도 마치 가진 사람이 임자인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부르는 책의 등짝을, 그것도 방의 사방 벽을 따라서 나를 지키려는 듯 얌전하게 쭉 서서 책장을 넘겨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 책의 등을 흘끗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입에서는 이런 말이 쉽게 튀어나온다. "이 모든 책이 나의 것이로구나." 그럴 때면 내용을 들추며 머리를 싸매지 않아도 책에 담긴 지혜가 우리를 충만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이 대목에서 나는 리브리 백작 못지않은 죄를 짓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같은 제목으로 똑같이 찍히는 책이 수천 부에 이르고 판도 수십 개가 될 텐데도 나는 내 손에 쥐어진 책만이, 다른 어느 책도 아니고 바로 그 책만이 '책'이라 믿고 있다. 주석(註釋), 얼룩, 이런저런 표시, 어떤 특정한 순간과 장소, 이런 것들이 그 책에 값으로 매기기 어려운 가치, 필사본과 같은 성격을 부여한다. 우리는 리브리의 도둑질을 정당화하고 싶지는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행위의 밑바닥에 깔린 갈망, 이를테면 한순간이나마 한 권의 책을 '나만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충동은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정직한 남성이나 여성에게도 흔하게 나타난다.(353∼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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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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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 『엉클 톰스 캐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나의 집 가까운 길모퉁이에는 어린이용 책을 제법 잘 갖춘 문구점이 있었다. 그때 나는 노트(아르헨티나에서는 노트의 표지에 국가 영웅이 한 명씩 그려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간혹 아르헨티나의 역사나 전투 장면을 묘사한 스티커를 붙여 놓고 그 페이지만을 별도로 뗄 수 있도록 만든 노트도 있었다)에 대한 소유욕이 대단해서 자주 그 가게를 맴돌곤 했다. 문방구류는 앞쪽에 있었고 책은 뒤편에 몇 줄로 진열되어 있었다. 서적 코너에는 콘스탄시오 C. 비힐(죽은 뒤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많은 포르노 문학 작품을 수집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이 어린이들을 위해 쓴 커다란 그림책이 있었다. 이 책은 글씨가 크고 그림이 밝은 것이 특징이었다. 그 문구점에는 또 노란 표지의 로빈 후드 시리즈도 있었다. 또 표지가 두꺼운 포켓판 책들이 두 줄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어떤 것은 표지가 초록색이었고 어떤 것은 분홍색이었다. 초록색 시리지는 아서왕의 모험을 그린 책과 번역이 형편없는 저스트 윌리엄의 스페인어판 책, 『삼총사』, 호라시오 키로가의 동물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분홍색 시리즈는 루이자 메이 올콧의 소설들과 『엉클 톰스 캐빈』, 세귀르 백작 부인의 이야기, 하이디 전집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326쪽)

 

(나의 생각)

나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어쩌면 그렇게도 비슷할까. 세상은 넓디 넓고, 대륙별로 혹은 나라별로 그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아무리 다른 언어와 생활 습관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독서 경험'에서만큼은 놀랍도록 '긴밀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도(심지어 충격적일 정도로) 놀랍다.

 

교육을 많이 시킬 경우 여자들이 말다툼을 하거나 쓰잘데없는 쑥덕공론을 벌이게 된다는 것

 

비록 플라톤이 자신의 이상적인 공화국에서는 소년 소녀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강제로 교육을 시키게 될 것이라고 썼지만 그의 제자 중 하나인 테오프라스토스는 여자들에게는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만큼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교육을 많이 시킬 경우 여자들이 말다툼을 하거나 쓰잘데없는 쑥덕공론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여성 중에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적었기 때문에 (비록 고급 창녀들은 '완벽하게 교육받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교육받은 노예들이 여성들에게 큰 소리로 소설들을 읽어 주곤 했다. 당시 작가들의 언어 구사 능력이 세련되었던 데 비해 전해오는 작품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을 근거로, 역사학자 윌리엄 V. 해리스는 이런 소설들이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교육 수준을 갖춘 일부 여성들 사이에서 가볍게 읽혔을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327쪽)

 

무저항에 빠지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

 

이렇게 허용된 픽션을 읽으면서, 1세기 그리스의 가부장적 사회에서부터 내리 12세기 비잔티움까지(이런 유의 소설이 마지막으로 쓰여진 때), 여자들은 쓰잘데없는 이야기에서 어떤 형태의 지적 자극을 발견했음이 분명하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고민과 위험과 진통을 통해 여성들은 간혹 뜻밖에도 사고하는 데 필요한 자양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세기 뒤 성녀 테레사는 어린 시적에 기사도 소설을 읽으면서 (간혹 그리스 연애 소설에 고무받아) 훗날 자신이 신앙심 깊은 글을 쓸 때 발휘할 문학적 표현의 상당 부분을 섭취했다. "나도 그런 책들을 읽는 데 익숙해졌는데 그 하찮은 행위는 다른 일을 하고픈 나의 욕망과 의지를 식혀 주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 몰래 이런 헛된 짓을 하느라 밤낮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 짓에서 느끼는 환희가 얼마나 컸던지 나는 만약 읽을 책이 없었다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짓거리가 헛되어 보였을지는 몰라도,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이야기들과 라 파예트 부인이 쓴 『클레브 공작 부인』, 브론테 자매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은 연애 소설을 읽는 이러한 풍조 덕분에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영국의 비평가인 케이트 플린트의 지적처럼, 이런 소설류를 읽는 건 여성 독서가들에게 "픽션이라는 아편이 유발하는 무저항 속으로 침잠하는 수단을 공급해 주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다. 더욱 감동적이게도 자아감까지 심어 줘 무저항에 빠지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초기부터 여성 독서가들은 사회가 자신들의 서가에 놓아 주는 것들을 뒤엎어 버리는 방법을 발견했다.(328∼329쪽)

 

 

『겐지 이야기』와 『마쿠라노소시』

 

발터 벤야민은 "책을 획득하는 방법 중에서도 책을 직접 쓴 것이야말로 가장 칭송할 만한 방법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논평했던 적이 있다. 헤이안 시대의 여자들도 깨달았듯이 어떤 경우에는 책을 직접 쓰는 방법만이 유일한 길일 수가 있다. 헤이안 시대의 여자들은 그들만의 새로운 언어로 일본 문학사에서, 아마도 전시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품 몇 편을 남겼다. 이런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무리사키 부인이 쓴 기념비적 작품 『겐지 이야기』인데, 영국 학자이자 번역가인 아서 웨일리는 아마도 1001년에 시작해서 1010년 이전에 끝냈을 이 작품을 두고 세계 최초의 진정한 소설이라고 격찬했다. 다른 하나는 『겐지 이야기』와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작가 세이 쇼나곤(淸少納言)의 침실에서 창작되어 그녀의 목침 서랍에 보관되었다고 해서 '베개책'이란 의미를 갖는 『마쿠라노소시枕草子』라 불리는 책이다.(334쪽)

 

그들 자신의 삶을 향해 거울을 받쳐 들고 있었던 셈

 

『겐지 이야기』와 『마쿠라노소시』같은 책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문화적·사회적 삶이 소상하게 나타나지만 그 당시 궁정의 남자 관리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던 정치적 술책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웨일리는 "이런 책들에서 여성들이 지극히 남성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매우 애매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언어와 정치 현장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이 쇼나곤과 무라사키 부인조차도 이런 활동에 대해서는 풍문 이상으로 묘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예이든 이런 여성들은 근본적으로 그들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 자신의 삶을 향해 거울을 받쳐 들고 있었던 셈이다. 문학을 통해 그들이 추구한 것은 남자 작가들이 관심을 갖고 심취했던 관념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이 느리고 대화도 드물고 풍경마저도 계절이 몰고 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변화가 없는 그런 세계의 영상이었다. 『겐지 이야기』는 동시대 삶의 거대한 캔버스를 펼쳐 보이고 있지만 주된 목적은 작가 자신과 같은 여성들에게 읽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심리적인 문제에서 그녀만한 지능과 예리한 안목을 갖춘 여성들이 그 독자층이었다. (334∼335쪽)

 

'몹시 유쾌한 것' 두 가지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는 인상과 묘사, 뜬소문, 유쾌하거나 불쾌한 일들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기록한 것 같다. ······ 그녀가 풍기는 매력의 상당 부분은 바로 그런 담박함에서 기인한다. 여기서 '몹시 유쾌한 것' 두 가지만 예로 들어 본다.

 

아직 한번도 읽어 보지 못한 이야기를 무더기로 발견하는 것.

아니면 아주 즐겁게 읽었던 책의 두 번째 권을 손에 넣는 것.

그렇지마 가끔 실망스럽기도 하다.

 

편지는 이제 진부할 정도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 얼마나 멋진가! 누군가가 먼 지방에 떨어져 있어 그 사람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편지가 날아든다면 마치 그 사람을 직접 대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편지에 쏟아넣었다는 시실은 더없는 위안이 된다. 비록 그 편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때조차도.

 

(335∼36쪽)

 

 

소외된 일상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격리된 그룹 내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책읽기가 일어나는 것 같다. 먼저 첫 번째 독서법부터 살펴보자. 이 경우 독서가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고고학자들처럼 공인된 문학의 행간을 파헤치면서,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거트루드, 그리고 발자크의 창녀 이야기에서는 자신들을 투영할 거울들을, 말하자면 자신들처럼 버림받은 인물들의 흔적을 잡아 내려고 노력한다. 두 번째 부류의 독서법에서는 독서가들 본인이 부엌이나 바느질방, 그리고 아이들의 방에서 지내야 하는 소외된 일상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스스로 작가가 된다.(336쪽)

 

자신들의 이야기를 발견할 곳이 달리 없기 때문

 

캐롤린 G. 하일브런의 조심스런 형태 구분은 또한 헤이안 시대의 여류 작가들이 생산해 낸 문학의 변천-모노가타리(이야기), 마쿠라노소시, 그리고 기타 등등-과도 상통한다. 그런 텍스트에서 독자들은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자신의 삶이 이상적인 것인지 아니면 형편없는 것인지 깨닫게 된다. 일반적으로 격리된 독서가들에게는 이런 점들이 그대로 적용된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문학은 고백적이고 자전적이고 심지어 교훈적이기까지 한데,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당한 독서가들의 경우 그들 자신이 생산해 내는 문학이 아니고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발견할 곳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남성 동성 연애자들의 책 읽기에 관한 논의에서-여성의 책 읽기, 더 나아가 권력의 영역에서 배제된 모든 그룹의 책 읽기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미국 작가인 에드먼드 화이트는 누구든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왜 다른지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이때의 설명은 '침실이나 술집 아니면 정신병원 침대에서 거듭 되풀이되는 구두(口頭) 이야기로' 일종의 원시적인 픽션이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니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적대적인 세계를 향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과거를 보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정체성까지 만들어 냄으로써 미래를 다듬기도 한다. 무라사키 부인에서와 마찬가지로 세이 쇼나곤에서도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여성 문학의 전조가 담겨 있는 것이다. (339쪽)

 

누구나 여행을 할 때는 기차 안에서 읽을 무엇인가를 가져야 하기 때문

 

조지 엘리엇보다 한 세대 뒤인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작품 『진지함의 중요성』에서 그웬들린이라는 인물이 자신은 일기를 휴대하지 않고 여행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누구나 여행을 할 때는 기차 안에서 읽을 무엇인가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상대인 세실리도 일기를 '단순히 나이 어린 소녀가 자신의 생각과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지만 종국적으로는 세상에 발표하고 싶은 희망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발표, 즉 원고를 복사하거나 큰 소리로 읽어 주거나 아니면 인쇄로 텍스트를 재생산해 내는 행위로 인해 여성들은 자신들과 유사한 목소리를 발견했고, 그들이 처한 처지도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런 경험을 확인함으로써 장래 자신들의 진정한 이미지를 구축할 탄탄한 바탕을 발견하게 되었다.(339∼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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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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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이 친밀감의 기호나 증표로 작용한다는 사실

 

토론토의 지하철에서 어느 여인이 내 건너편에 앉아 팽귄판으로 나온 보르헤스의 『미로』를 읽고 있다. 불현듯 나는 그녀를 불러 손을 흔들고 나 역시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싶어진다. 이미 얼굴도 잊어버렸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아슴프레하고 늙었는지 젊었는지조차 말할 수 없지만, 그녀는 바로 그 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내가 일상에서 접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인 내 사촌도 책들이 친밀감의 기호나 증표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사촌은 여행을 떠날 때 가져갈 책을 고를 때도 핸드백을 고를 때만큼이나 세심하게 신경을 쏟는다. 그 여사촌이 로맹 롤랑의 소설을 가지고 여행을 떠나는 적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녀의 판단으로 볼 때 롤랑의 책이 지나치게 과시적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며,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 역시 가져가지 않는데 그 책 또한 지나치게 통속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단거리 여행에는 카뮈의 작품이 어울리고, 긴 여행에서는 크로닌이 적당하다. 시골에서 주말을 보내는 데는 베라 캐스패리나 엘러리 퀸의 탐정 소설이 그럴듯하고, 배나 비행기로 여행할 때는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이 어울린다.(309∼310쪽)

 

누군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면

 

누군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마음 속으로 그 독서가의 신분의 색깔이 그 책과 독서가 이뤄지고 있는 분위기에 크게 좌우되는 듯한 야릇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호머에 나오는 영웅들과 여러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알렉산더 대제가 늘상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를 지니고 다녔다는 것은 그럴듯해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에서 폴로니어스가 "각하, 무엇을 읽고 계십니까?" 라고 묻자 햄릿이 "말, 말, 말" 이라는 대답으로 일축했을 때, 그의 손에 쥐어진 책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너무도 궁금하다. 손에 잡힐 듯도 한 그 책의 제목이야말로 울적한 왕자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머리가 돌 정도로 어지러운 돈키호테의 서재를 불사르기 위해 쌓아 올린 장작더미에서 요왕 마르토렐의 소설을 구해 낸 그 사제는 미래 세대를 위해 출중한 기사도 소설을 구조해 낸 것이었다. 돈키호테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정확히 앎으로써 우리는 비탄에 빠진 기사를 그렇게 사로잡았던 세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독서를 통해 우리 또한 한순간이나마 돈키호테가 될 수 있지 않을까.(321∼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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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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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B.C. 83년에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그 '무녀'들의 예언들은-그 중 많은 부분은 여자 예언자들이 예언한 사건 이후에 태어난 인간 시인에 의해 창작된 것이 분명한데-그리스, 로마, 팔레스타인과 기독교 유럽에서는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그 예언들은 큐메의 여자 예언자에 의해 손수 아홉 권의 책으로 묶여 고대 로마의 7번째이자 마지막 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앞에 제시되었다. 타르퀴니우스가 돈을 지불하려 하지 않자 그 여자 예언자는 그 책 중 3권을 불태웠다. 또다시 그가 거절하자 그녀는 또 다른 3권에 불을 질렀다. 결국 왕은 원래의 9권 값을 다 치르고 남은 3권을 구입했는데, 그 책들은 B.C. 83년에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주피터 사원 및 돌로 만든 지하실의 상자 안에 보관되었다.(290∼291쪽)

 

 

예수 탄생일이 동지에 가까운 날로 옮겨진 사연

 

원래 소아시아 출신이었던 콘스탄티누스의 가족은 태양을 아폴로 신, 즉 274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로마 최고의 신으로 소개했던 바로 그 무적의 신으로 숭배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리키니우스와 전투를 벌이기 전에 "이것으로 그대는 승리를 얻으리라"라는 경구가 새겨진 십자가의 환상을 받았던 것도 태양으로부터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새로운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은 그의 어머니가 갈보리 언적 가까운 곳에서 발굴했다는, 진짜 십자가에 박혔던 못으로 만든 햇살 무늬 왕관이었다. 그 태양신의 광휘가 얼마나 막강했던지 콘스탄티누스가 죽고 17년도 채 지나지 않아 예수 탄생일-크리스마스-이 태양의 탄생일인 동지에 가까운 날로 옮겨지기에 이르렀다.(293쪽)

 

 

각자가 좋아하는 종교를 따를 자유를 누리는 게 옳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제국의 정권을 나눠 가졌다가 결국에는 그를 배신하고 만다) '왕국의 안녕과 안전'을 논의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만나 그 유명한 칙령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유익한 것 중에서 신을 숭배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고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이다.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각자가 좋아하는 종교를 따를 자유를 누리는 게 옳다"라고 선언했다. 이 밀라노 칙령으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 내에서 자행되던 기독교인 박해에 공식적인 종지부를 찍었다. 그때까지 기독교도들은 범법자와 배신자로 여겨졌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았었다.(293쪽)

 

 

마침내 이 역겨운 인간도 죽었도다.

 

그러나 박해받던 사람들이 박해자로 돌변하고 말았다. 새로운 국가 종교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몇몇 기독교 지도자들이 과거 자신의 적들이 활용했던 방법을 채택했던 것이다. 예컨대, 전설적 인물 카타리나가 막센티우스 황제에 의해 나무 바퀴에 못박힌 채 순교했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361년 주교 자신이 직접 나서서 페르시아 신인 미트라의 사원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이 신은 당시 군인들 사이에 매우 인기가 높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경쟁 상대였다. 또 391년에는 사교(司敎)였던 테오필루스가 다산의 신 디오니소스를 모시는 의식이 은밀히 치러지던 디오니소스의 사원을 약탈하고, 기독교인 무리들에게 이집트 신인 세라피스의 거대한 조각상을 파괴하도록 부추겼다. 이어서 415년에는 키릴루스 사교가 젊은 기독교도들에게 이교도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히파티아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녀를 길거리로 끌어내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시체는 광장에서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여기서 키릴루스 사제 자신도 그렇게 사랑받던 존재가 아니었음을 밝혀야만 한다. 444년에 그가 죽자, 알렉산드리아의 어느 주교는 다음과 같은 추도문을 읽었다. "마침내 이 역겨운 인간도 죽었도다. 그의 떠남은 그를 버텨 낸 사람들을 즐겁게 하겠지만 죽은 사람들을 낙담시키게 될지어다. 어쩌면 언젠가는 죽은 사람들이 그에게 질려 그를 다시 우리에게로 돌려보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의 무덤에는 엄청 무거운 돌을 올려놓아야 하리라. 그래야만 우리는 그를, 심지어 귀신으로라도 다시 보게 될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좋을 테니."(294쪽)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올라간 예언녀

 

······ 그는 더 나아가 "키케로도 이 시와 친숙한 나머지 라틴어로 옮겨서 자신의 작품 속에 살며시 차용했다"고까지 말했다. 불행하게도 키케로가 여자 예언자-에리트리아가 아니고 큐메의 예언자임-를 설명한 문장에는 눈을 씻고 봐도 이런 시구나 머리글자 맞추는 유희시(遊戱詩)에 대한 언급은 없고, 그 문장들도 사실은 예언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가 얼마나 그럴싸하게 들렸던지 그 후에도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세계는 여자 예언자를 그들의 선조로 받아들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쓴 『신국론神國論』에서 여자 예언자를 복자(福者)의 반열에 올려놓기까지 했다. 12세기 말경 랑 성당의 건축가들은 정면에 에리트리아 여자 예언자를 조각했는데, 그녀의 손에 쥔 신탁의 서책은 모세의 그것과 비슷하고 그녀의 발 아래에는 경외성서 시의 둘째 행이 새겨 있다. 그리고 4백 년이 더 지나 미켈란젤로도 구약에 등장하는 4명의 예언자를 완성케 하는 4명의 다른 여자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그녀를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올려놓기까지 했다.(297∼298쪽)

 

 

'원본에 보다 가깝게, 포용성은 보다 덜하게'

 

콘스탄티누스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독서법만이 진실이었고, 그런 독서의 열쇠도 그와 그의 신봉자들에게 달려 있었다. 밀라노 칙령이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신양의 자유를 부여했다면, 니케아 공의회는 그런 자유를 콘스탄티누스의 신조를 따르는 사람으로 국한시켜 버렸다. 밀라노에서 각자 좋아하는 방식대로, 그리고 각자 읽고 싶은 것을 읽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던 사람들은 채 12년도 지나지 않아 한번은 안티오크에서, 또 한번은 니케아에서 오로지 한 가지 독서만이 진실하다는 명령의 소리를 들었다. 종교 텍스트에 대해 한 가지 독서법을 요구하는 일은 만장일치 제국이라는 콘스탄티누스의 개념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원본에 보다 가깝게, 포용성은 보다 덜하게', 이거야말로 당시에 베르길리우스의 시 같은 세속적인 텍스트를 읽는 데 유일하게 허용됐던 정통적인 독서 개념이었다.(300∼301쪽)

 

 

찰스 1세의 경우

 

그런 예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예는 아마도 1642년 말인가 1643년 초 영국 내전 중에 옥스퍼드의 어느 도서관을 방문했던 찰스 1세의 경우일 것이다. 그를 즐겁게 해주려고 포클랜드 백작이 왕에게 '몇 세대 전까지 길흉화복을 점치는 방법으로 널리 쓰였던 베르길리우스 점법으로 왕의 운명을 점쳐 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자 왕은 『아이네이스』의 제4권을 들추고서 읽었다. "아마 그는 전쟁중에 호기로운 종족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고국을 등지고 망명길에 올라야 할지도 모르노라." 1649년 1월 30일 화요일, 찰스 1세는 국민들에게 배신자로 몰려 화이트홀 궁전에서 참수형당했다. 그리고도 약 70년 뒤에 로빈슨 크루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섬에서 여전히 그와 유사한 방법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너무나 기가 막혀 성서를 펼쳤다. '절대로 그대를 그냥 두지 않으리라. 내다버리지도 않으리라.' 그때 내가 읽은 구절은 바로 그 문장이었다. 즉각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말씀들은 나를 향한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내가 신과 인간의 버림을 받은 존재로서 내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 어찌 그 말씀들이 나에게 제시될 수 있겠는가?' 라고." 그리고 정확히 150년 후 토머스 하디의 소설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에서 밧세바는 볼드우드 씨와 결혼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여전히 성경을 펼쳤다.(304∼305쪽)

 

 

시가 가지는 모방적인 특징과 관계가 깊다는 사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베르길리우스 같은 작가의 예언적 재능이 초자연적인 재능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시가 가지는 모방적인 특징과 관계가 깊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시구는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들에게 거리낌없이, 그리고 매우 강력하게 하나의 신호로 다가온다는 설명이다. 『썰물』에서 스티븐슨이 내세운 주인공은 외딴 섬에서 길을 잃고서는 너덜너덜해진 베르길리우스 책에서 자신의 운명을 알아 보려 노력하지만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책장 속에서 '확고하거나 용기를 붇돋워 줄 목소리라고는 전혀 담기지 않은' 투로 대답하면서 주인공의 고향에 대한 환상만을 불러일으킨다. 스티븐슨은 이렇게 쓰고 있다. "억압받던 유명한 고전 작가들은 우리와는 학교를 통해 가끔은 고통스럽게 익숙해지기도 하는데, 그들은 점진적으로 우리 각자의 피 속으로 흘러 들어와 기억 속에 같은 민족처럼 자리잡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베르길리우스의 시구는 만토바나 아우구스티누스를 노래하고 있다기보다는 영국의 어느 장소나 독자의 되돌릴 수 없는 젊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305쪽)

 

 

베르길리우스의 위엄

 

콘스탄티누스야말로 베르길리우스에게서 기독교의 예언적 의미를 처음으로 읽어 낸 인물이었으며, 그의 독서법을 통해 베르길리우스는 모든 예언적 작가 중에서 가장 고명한 시인이 되었다. 제국의 시인에서 기독교적 공상가로 탈바꿈하면서 베르길리우스는 기독교 신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의 공식 찬가가 있고 10세기가 더 흘러서도 단테를 지옥과 연옥으로 안내할 수 있었다. 베르길리우스의 위엄은 심지어 거꾸로 흐르기까지 했다. 중세의 라틴어 미사의 한 절에 담긴 이야기는 성 바울 자신이 그 고대 시인의 묘지에서 눈물을 흘리려고 나폴리로 여행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305쪽)

 

 

독서가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아득한 옛날 성 금요일에 콘스탄티누스가 발견한 것은 한 텍스트가 갖는 의미는 독서가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확대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대할 때 독자는 그 텍스트의 단어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역사적으로 그 텍스트나 저자와는 전혀 관계 없는 의문을 풀어 주는 메시지로 바꿔 버릴 수 있다. 이런 식의 의미 변질은 텍스트 자체를 확장시키거나 퇴보시킬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텍스트에 독서가 자신의 환경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무지, 맹신, 지성, 기만, 교활함, 그리고 계몽을 통해 책 읽는 사람은 원전과 똑같은 단어로 그 텍스트를 다시 쓰면서도 원본과는 다른 이름으로, 다시 말해 그것을 재창조해 내는 것이다.(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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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S. 엘리엇의『황무지』와 사랑 받았던 여자 시뷜라
    from Value Investing 2014-10-28 15:02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 멈춘다는 것, 끝낸다는 것, 광을 내지 않아 녹 슬어 버린다는 것, 사용해서 빛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 앨프리드 테니슨,『율리시스』 * * *내가 T.S.엘리엇과 그의 대표작 『황무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아마도 하워드 가드너가 쓴 『열정과 기질』이라는 책을 통해서였지 싶다. 그 책 속에는 무척이나 난해한 시로 이름난『황무지』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했다. 우선 이 불후의 걸작시가 탄생하는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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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는 책벌레 도시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만약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 인물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면 알렉산드리아는 책벌레 도시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필립포스 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들의 개인 교사로 고용했다. 그래서 알렉산더 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고 '배움과 읽기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얼마나 지독한 독서광이었는지 손에서 책을 놓을 때가 거의 없었다. 한번은 북부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다가 읽을 만한 책이 바닥나자 자신의 지휘관 한 명에게 책 몇 권을 보내 달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산더는 필리스투스의 『역사』와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의 희곡 몇 권, 텔레스테스와 필록세누스의 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271∼272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중요성

 

종국적으로 이런 공간은 전해진 대로 그 도서관이 50만 정도의 두루마리를 보관할 때까지 계속 확장되었다. 그리고도 나머지 4만여개의 두루마리는 라코티스의 유서 깊은 이집트 지역에 세워진 세라피스 사원에 딸린 다른 건물에 보관되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 기독교 서구 사회에서 소장 도서가 2천 권을 넘었던 도서관이 아비뇽의 교황청 도서관 한 곳뿐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중요성은 자명해진다.(273쪽)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기억을 모았던 것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책을 수집하는 일은 '기록에 꼭 필요한' 것으로, 학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임무의 일부분이었다.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도 단지 이런 뜻을 더욱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기억을 모았던 것이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집한 책들은 테오프라스토스에게로, 또다시 그것은 그의 친척이자 학생이었던 넬레우스에게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할 목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로 넘어갔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통치 때까지 어느 누구도 전체 도서를 모조리 읽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273쪽)

 

 

학자들이 몇 세기에 걸쳐 연구한 끝에야

 

왕의 칙령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정박하는 모든 선박들은 싣고 있던 책을 무조건 내놓아야만 했다. 그렇게 내놓은 책들은 복사를 한 뒤, 원본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복사본은 도서관에 보관했다(간혹 복사본을 돌려주고 원본을 도서관에서 소장할 때도 있었다). 당시 위대한 그리스 극작가들의 유명한 책들은 배우들이 베껴서 연구할 수 있도록 아테네에 소장되었는데, 이런 책들도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의 대사관에서 빌려 매우 조심스럽게 복사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책들이 모두 진짜였던 것은 아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이 고전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위조범들이 왕들에게 가짜 아리스토텔레스 논문을 팔았는데, 그 논문들은 학자들이 몇 세기에 걸쳐 연구한 끝에야 가짜로 판명되었다.(273∼274쪽)

 

 

그렇다고 지금 당장 그대가 학자가 되었다는 뜻인가?

 

지식의 단순한 축적은 지식이 아니다. 몇 세기 후 갈리아의 시인인 데시무스 마그누스 아우소니우스는 자신의 『소품집』에서 지식의 축적과 진정한 지식을 혼돈하는 것을 조롱했다.

 

당신은 책을 사서 서가를 채웠소,

오, 시신(詩神)을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렇다고 지금 당장 그대가 학자가 되었다는 뜻인가?

지금 그대가 플렉트럼과 하프를 산다고 해서 내일 음악 분야가 그대의 것이 되겠소?

 

(274쪽)

 

 

사서의 탄생

 

사람들이 그처럼 엄청난 양의 책을 쉽게 이용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어떤 요령이 필요했다. 어떤 독서가라도 관심 가는 분야의 특정한 책을 손쉽게 찾아낼 수 있는 방법 말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자기 서재에서 필요한 것을 골라낼 수 있는 그만의 은밀한 요령이 있었을 것이다(불행하게도 그 요령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꽂힌 책들은 그 숫자가 엄청났기 때문에 어쩌다 운이 좋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독서가 일개인이 특정 제목을 발견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결책은-나중에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지만-풍자 시인이자 학자였던 키레네의 칼리마코스에 의해 사서라는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274∼275쪽)

 

 

아리스토텔레스와 베르길리우스 같은 작가의 경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그 분류 목록은 처음에는 로마 황제의 도서관들, 그 뒤로는 동로마제국에 이어 전체 기독교 유럽 도서관들의 모델이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387년에 개종한 직후 아직도 신플라톤주의의 영향하에 있던 시기에 쓴 『기독교 교의에 대하여』에서 그리스 로마의 고전 중 일부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베르길리우스 같은 작가의 경우(플로티노스가 '영혼'이라고 불렀고,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 혹은 '로고스'라고 불렀던) 그 '진실을 소유했기 때문'이었다.(278쪽)

 

 

4백 마리나 되는 낙타들에게 알파벳 순서로 걷도록

 

간혹 알파벳이 책을 찾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예컨대 10세기 페르시아의 수상이었던 압둘 카셈 이스마엘은 여행을 할 때도 11만 7천 권에 달하는 책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4백 마리나 되는 낙타들에게 알파벳 순서로 걷도록 특별 훈련을 시켜서 책을 몽땅 싣게 했다고 한다.(279쪽)

 

 

그 사람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1251년부터 파리 대학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을 공식 교과 과정에 포함시켰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서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럽의 사서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을 발굴하느라 혈안이었다. 유럽의 사서들은 아베로에스와 아비센나 같은 회교도 학자들, 그리고 동과 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지지자들이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편집 해설해 놓은 책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를 발견했다.

 

아랍인들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은 꿈에서 비롯된다. 9세기 어느 날 밤, 거의 전설적인 하룬 알 라시드의 아들이었던 알 마문 칼리프는 꿈 속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다. 칼리프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은 넓은 이마에 눈이 푸르고 얼굴이 창백한 남자였으며 미간을 찌푸린 채 제왕 같은 풍채로 왕좌에 앉아 있었다. (우리 모두가 꿈속에서 그런 경험을 하듯 칼리프가 확실히 알아봤던) 그 사람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들 사이에 오고간 은밀한 대화로 인해 영감을 받은 칼리프는 그날 밤 이후로 바그다드 아카데미의 학자들에게 그 그리스 철학자의 저작물을 번역하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도록 명령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및 다른 그리스 고전을 수집했던 도시는 바그다드만이 아니었다. 카이로에서도 1175년 수니파의 숙청이 있기 전 파티미드 도서관에 이런 책들이 110만 권 이상이나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었다(십자군들은 질투심 섞인 허풍을 떨면서 이교도들의 요새에는 3백만 권 이상의 책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

 

로저 베이컨은 13세기 초반에 쓴 어느 글에서 아랍어의 중역을 바탕으로 한 분류 시스템을 혹평하면서 이슬람의 가르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를 오염시켰다고 주장했다. 실험적인 과학자로 파리에서 수학과 천문학과 연금술을 연구했던 베이컨은 화약 제조술(그 다음 세기까지는 총에 사용되지 않았다)을 소상하게 묘사한 최초의 유럽인이었으며, 일찍부터 태양에너지를 잘 이용한다면 언젠가는 노 없는 보트, 말 없는 마차, 날 수 있는 기계까지도 나오게 되리라고 예견한 인물이었다. 그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학자들이 그리스어에 무지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 척한다고 비난했으며, 그 자신도 아랍권의 해설자들로부터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예를 들어 그는 아비센나를 높이 인정했으며 우리가 알다시피 알하이삼의 작품을 열렬히 연구했다) 독서가들이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때는 원전을 근거로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282∼284쪽)

 

 

이 우아한 희망으로 인해 나의 고독함도 희망을 얻도다

 

도서관처럼 인위적인 분류들로 나누어진 공간은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그 나름의 위치를 차지하고 또 그 위치에 의해 정의되는 하나의 논리적인 우주를 암시한다. 어느 탁월한 작품에서 보르헤스는 하나의 도서관을 우주만큼이나 드넓은 공간으로 상상하며 베이컨의 추론을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이 도서관(실제로는 보르헤스가 눈먼 관장으로 일했던, 카예 메히코에 있는 낡은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 도서관을 무한한 공간으로 상상한 것임)에서는 똑같은 책은 한 권도 없다. 이 도서관의 서가는 모든 가능한 알파벳 조합을 수용할 수 있어 해독 불가능한 횡설수설까지도 다 진열할 수 있기 때문에 실존하는 책만이 아니라 상상  속의 책까지도 모두 담을 수 있다. "미래 역사의 자세한 사항까지, 대천사의 자서전, 도서관의 충실한 카탈로그, 수십만 개의 가짜 카탈로그, 이런 카탈로그의 허위성 입증, 진짜 카탈로그의 허위성 입증, 바실리데스의 그노시스파의 복음, 그 복음에 대한 해설, 그 복음에 대한 해설에 대한 해설, 당신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설명, 모든 책을 모든 언어로 번역한 책, 다른 책 속에 인용되고 있는 어느 책의 구절, 영국의 수도사 비드가 영국의 신화에 대해 썼을 수도 있는 (결코 쓰지는 않았지만) 논문, 잃어버린 타키투스의 책들." 결국 보르헤스의 작품 속 내레이터(그 또한 사서임)는 자신의 심신을 지치게 만드는 복도를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그 도서관도 결국 도서관이라는 또 다른 압도적인 분류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책들을 거의 무한정 수집하는 일은 말 그대로 영겁의 세월을 두고 정기적으로 되풀이된다고 상상한다. 이 주인공은 "이 우아한 희망으로 인해 나의 고독함도 희망을 얻도다" 라고 결론을 짓는다.(286∼287쪽)

 

 

책 읽기는 그렇지 않을 뿐 아니라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픽션'으로 분류되면 유머가 넘치는 모험 소설이 되고, 사회학 밑으로 들어가면 18세기 영국의 풍자 연구서가 된다. 또 어린이 문학 쪽으로 분류하면 난쟁이와 거인, 그리고 말을 하는 말(馬)이 등장하는 아주 재미있는 우화가 되고, 환타지로 분류하면 과학 소설의 선구적 작품이 되고, 여행서로 나누면 상상 속의 여행이 되며, 고전으로 분류하면 서구 문학 전범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카테고리는 배타적이지만 책 읽기는 그렇지 않을 뿐 아니라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어떤 분류 체계를 선택하든 도서관은 예외 없이 책 읽기 행위를 지배하게 되며 그리하여 독서가들-호기심 많은 독서가, 예리한 독서가-로 하여금 각 범주의 울타리에서 책을 구출해 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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