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필사자가 되려므나

 

필사자들은 텍스트를 읽는 입장이라는 데 따르는 굉장한 힘을 깨닫고 그런 특권을 열광적으로 지키려 들었음에 틀림없다. 오만방자하게도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필사자들은 텍스트 말미를 이런 간기로 장식하곤 했다. "현명한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들을 교육하도록 하자. 무식한 사람들은 볼 줄도 모를 테니까" 라고. 이집트에서는 B.C. 2300년경인 19대 왕조에 어느 필사자가 자신의 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렇게 적었다.

 

필사자가 되려므나! 이 말을 그대 가슴에 각인하라.

그대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두루마리는 돌새김보다 훌륭하느니라.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먼지가 되고,

그의 사람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니.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책이니라

그를 읽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26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건 책이 아닐세

 

동무여, 이건 책이 아닐세,

이걸 건드리는 이는 사람을 건드리는 걸세,

(지금 밤인가? 우리 여기 홀로인가?)

그대가 잡은 것, 그리고 그대를 붙잡은 것은 나일세,

나는 책장에서 그대 두 팔로 튀어 안기네-죽은 것이 나를 불러내는구려.

 

(241쪽)

 

휘트먼도 그의 시어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세월이 흘러 수정과 증보를 거듭했던 『풀잎』의 '임종' 판에서는 이 세상도 그의 시어를 '자극'하지 못하고 원초적인 목소리로 남는다. 휘트먼도 그의 시어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세상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세상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펼쳐져 있는 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1774년에 (휘트먼도 존경해 마지않았던) 괴테는 이렇게 노래했다.

 

자연이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책인지 보라,

잘못 이해할 순 있을지언정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지는 않지 않은가.

 

 

이제 1892년 죽음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휘트먼도 여기에 동의했다.

 

모든 대상에는, 산, 나무, 그리고 별-이 모든 생성과

죽음에는,

서로의 의미의 한 부분으로서-서로에게 진화한 존재로-각각의 표면 뒤에는

비밀의 신비한 암호가 고스란히 오므린 채 기다리고 있구려.

 

(241∼242쪽)

 

 

자연이 펼쳐지는 곳에서 책을 읽었기 때문

 

"훗날, 이따금 여름과 가을철에 나는 일주일 동안 시골이나 롱아일랜드 해안에서 보내곤 했다. 그곳의 확 트인 공간에서 나는 구약과 신약을 탐독했으며(아마도 나에게는 그 어느 도서관이나 실내 공간보다 유익했는데-어디에서 책을 읽느냐에 따라 책 읽기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셰익스피어와 오시안, 그리고 호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등의 작품 중 번역이 가장 뛰어난 판과 독일어로 된 『니벨룽겐의 노래』, 고대 인도의 시, 그리고 다른 걸작 한두 편, 특히 단테의 작품에 열중했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 대부분을 나는 무성한 나무슢에서 읽었다." 그리고 휘트먼은 이렇게 묻는다. "그런 위대한 거장들의 작품을 읽으면서도 왜 진한 감동을 받지 못했는지 의아했다. 그것은 아마 내가 묘사했던 것처럼 자연이 펼쳐지는 곳에서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태양 아래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과 전망, 혹은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와 함께 책을 읽었으니······." (244∼245쪽)

 

 

독서 행위에서 서로를 비추는 존재

 

휘트먼이 볼 때 텍스트와 작가, 독자, 그리고 이 세상은 독서 행위에서 서로를 비추는 존재였다. 서로를 비추는 이런 행위의 의미를, 그는 그런 행위들이 벌어지는 우주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까지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끊임없이 확대해 나갔다. 이런 연계선상에서 보면 독자는 작가를 반영하고(그와 나는 하나다), 세상은 한 권의 책(신의 책, 대자연의 책)을 반영하고, 책은 곧 피와 살이며(작가 자신의 살과 피이지만 문학적 변형을 통해 나의 것이 된다), 이 세계는 판독해 내야 할 책이 된다(작가의 시는 나의 세상 읽기가 된다). 휘트먼은 한평생 책 읽는 행위에 대한 정의와 이해에 천착했던 것처럼 보이는데, 독서 행위는 행위 그 자체이기도 하면서 그 행위에 참여하는 요소들의 은유이기도 하다.(247쪽)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을 읽는 것

 

스페인 태생의 미국 철학자인 조지 산타야나는 "이 세상에는 이름 모를 독자가 여백에 갈겨 쓴 각주나 논평들이 텍스트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책도 있다. 이 세상도 그런 책들 중 하나이다" 라고 덧붙였다.

 

휘트먼이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을 읽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세상이라는 방대한 책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249쪽)

 

 

어떤 책은 음미해야 하고 또 어떤 책은 삼켜야 하고

 

책 읽기는 은유의 수단으로 작용하지만 책 읽기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부터 은유로 인식되어야 한다. 작가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텍스트를 놓고 퇴고를 거듭하고, 하나의 줄거리를 위해 설익은 아이디어를 내놓고, 장면에 풍취를 더하고, 논쟁의 뼈다귀에 살을 붙이고, 돈을 노린 대중적인 요소들을 지루한 산문으로 녹여 내고, 삶의 한 단편에다가 독자들이 덥썩 물 만한 암시를 담느라 겪게 되는 고충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 책 읽는 사람들도 책 한 권을 음미하고 있다거나, 책에서 자양분을 섭취하고 있다거나, 또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 버렸다거나, 아니면 지루해서 진절머리를 냈다거나, 어느 문장을 몇 차례 반추했다거나, 어느 시인의 시구를 낭랑하게 낭송했다거나, 시에 흠뻑 빠졌다거나, 탐정 이야기를 읽는 재미로 산다는 따위 이야기를 한다. 공부하는 기술에 관한 에세이에서 16세기 영국 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어떤 책은 음미해야 하고 또 어떤 책은 삼켜야 하고 극히 일부는 씹어 소화시켜야 한다"고 공부 방법을 분류했다.(250∼251쪽)

 

 

너의 마음을 위해 향연을 베풀고 너의 육신을 불멸로 만들란 말야.

 

1695년경에 이르러 은유가 언어에 어느 정도 깊숙이 파고들었는가하면, 윌리엄 콩그리브가 『사랑을 위한 사랑』의 서막에서 은유를 패러디할 정도였다. 이 장면에서 학자연하는 발렌타인이 자기 종자(從者)에게 "이놈아, 읽고 또 읽어! 너의 식욕을 고상하게 하란 말야. 가르침을 좇아 사는 법을 배우라고. 너의 마음을 위해 향연을 베풀고 너의 육신을 불멸로 만들란 말야. 읽으면서 눈으로 자양분을 취해. 입은 굳게 다물고 이해의 되새김질을 하라구." 그러자 "주인장 어른이나 이 종이 음식으로 살이나 뛰룩뛰룩 찌우시지요"라고 그 종자가 대답했다.

 

그리고 한 세가도 채 지나지 않아 존슨 박사는 테이블에 펼친 책을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읽었다. 존슨 박사는 전기를 쓴 보즈웰은 "그는 마치 책을 삼키려는 듯 게걸스럽게 읽었는데, 어느 모로 보나 그의 공부 방식 그대로였다"고 적고 있다. 보즈웰에 따르면 존슨 박사는 "(저질스런 직유법을 쓴다면) 코앞에 놓인 음식을 먹으면서도 나중에 먹으려고 발로 뼈다귀를 잡고 있는 개를 닮아, 한 가지 오락거리를 늘 준배해 두려는 욕구에서, 저녁 식사 시간에도 책을 식탁보로 덮어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있었다"고 한다.(253쪽)

 

 

어떠한 책 읽기도 결코 완성이 될 수 없는 이유

 

한 권의 책이랄 수 있는 이 세상은 이 세상이라는 텍스트에서 글자 한 자에 해당하는 독서가에 의해 게걸스레 먹힌다. 이리하여 독서의 끝없음을 위해서 순환적인 은유가 끊임없이 창조된다. 우리 존재는 읽은 만큼 성장한다. 그 순환이 완성되는 과정은 단순히 지적인 과정만은 아니라고 휘트먼은 주장했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는 지적으로 읽어 어떤 의미를 파악하고 어떤 사실들을 지각하지만, 그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도 텍스트와 독서가는 서로 한데 얽히면서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택스트를 섭취하여 텍스트가 가두고 있던 무언가를 풀어 낼 때마다 그 텍스트의 깊은 곳에서는 우리가 아직 파악해 내지 못한 다른 무언가가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휘트먼이 자신의 시를 거듭 손질하고 다시 펴내면서 믿었던 것처럼, 어떠한 책 읽기도 결코 완성이 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25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자신이 불러들인 사람들에 한해서만 훼방이 용남되는 공간

 

아버지의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그리고 어머니의 감시의 눈길을 벗어나기 힘든 현실에서 그 소녀는 자기 방에서, 밤에 자신의 침대에서 유일한 피난처를 찾는다. 어른이 된 후에도 줄곧 콜레트는 이런 식으로 혼자만의 독서 공간을 추구하게 된다. 안뜰이 딸린 아담한 여관이든, 아니면 널찍한 시골 저택에서든, 세를 낸 침실 겸용 거실에서든, 아니면 파리의 넉넉한 아파트에서든, 가족과 함께든 아니면 혼자든 그녀는 자신이 불러들인 사람들에 한해서만 훼방이 용납되는 공간을(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지만) 따로 두곤 했다. 담요를 포근하게 깐 침대에 쭉 펴고 드러누워서 두 손에 쥐어진 귀중한 책을 자신의 배에 얹고 있으면 그녀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의 단위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221쪽)

 

 

세월까지 멎게 했다는 기분으로 베개에 푹 파묻힐 때 밀려오던 그 기쁨

 

나 역시도 침대에서 책을 읽는다. 어린 시절 수많은 밤을 맞았던 침대 속에서, 천장으로 길을 달리는 차량의 불빛이 괴기스럽게 스쳐 지나치는 낯선 호텔방에서, 방안의 냄새와 소리가 내게는 너무도 낯설었던 집에서, 해무(海霧)로 끈적거리던 여름날의 작은 별장에서, 아니면 산 속의 공기가 하도 건조하여 내가 호흡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옆에 유카리나무 수액을 끓인 대야를 둬야만 했던 별장에서, 침대와 책의 결합은 어느 하늘 밑에 있더라도 나에게 매일 밤 고향을 찾은 듯한 안온함을 안겨다 주었다. 그 누구도 나를 불러내 이것 해라 저것 해라 요구하지 않았다. 나의 육체는 그저 침대 시트 밑에 꼼짝 않고 파묻혀 있을 뿐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벌어지는 일들은 모조리 책 속에서였고, 나는 그 이야기의 변사가 되었다. 삶의 전개도 내가 책장을 넘기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지막 몇 장을 아끼며 책을 내려놓을 때, 마지막 장면은 적어도 내일까지는 일어나지 못하게 책장을 몇 장 남겨 두고서 세월까지 멎게 했다는 기분으로 베개에 푹 파묻힐 때 밀려오던 그 기쁨보다 더 황홀한 즐거움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222쪽)

 

   

특별한 몸가짐과 특별한 자세

 

일부 책은 책 읽기에 특별한 몸가짐을, 즉 독자의 육체가 특별한 자세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자연히 그런 자세에 적합한 독서 장소도 필요하게 된다(예를 들어 콜레트는 '고양이 중에서 가장 현명한' 팡셰트와 함께 자기 아버지의 안락의자에 웅크리고 앉을 수 있을 때까지는 미슐레의 『프랑스사』를 읽을 수 없었다). 종종 책 읽기에 따르는 즐거움은 독자의 육체적 안락감에 크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223쪽)

 

훌륭한 이야기를 읽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사실 혼자서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나에게는 안락의자에 앉아 읽는 책도 있고, 책상에 앉아 읽는 책도 있다. 또 지하철에서나 전차에서, 또 버스 안에서 읽는 책들도 있다. 그 중에서도 기차 안에서 앉아 읽는 책은 안락의자에서 읽는 책과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이는 아마 안락의자나 기차에서는 주변으로부터 나 자신을 쉽게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영국 소설가 앨런 실리토도 "훌륭한 이야기를 읽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사실 혼자서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이다. 주위에는 온통 낯선 얼굴인 데다가 창으로 낯선 풍경들이 흐르면 책 속에 펼쳐지는 복잡한 삶은 매우 특별하고 강렬한 인상으로 독자의 마음에 각인된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224쪽)

 

꼭 화장실에서 읽어햐 하는 글들이 있다

 

공공 도서관에서 읽는 책들은 다락이나 부엌에서 읽는 책과는 결코 맛이 같을 수가 없다. 1374년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침실에 보관하기 위해' 연애 소설 한 권에 66파운드 13실링 4펜스나 지불했는데, 이는 그런 책의 경우 꼭 침실에서 읽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12세기 작품인 『성 그레고리우스의 생애』에는 화장실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서판(書板)을 읽을 수 있는 은밀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헨리 밀러도 이에 동의한다. "나의 훌륭한 독서는 화장실에서 이뤄졌다"고 언젠가 고백한 적이 있다. "『율리시즈』에는 문장의 맛을 철저하게 뽑으려면 꼭 화장실에서 읽어햐 하는 글들이 있다." 실제로 "보다 특별하고 망측한 목적으로 쓰이게 되어 있는" 그 작은 공간은 마르셀 프루스트에게는 "결코 침범당할 수 없는 고독이 요구되는 모든 일, 즉 독서나 몽상, 울음, 관능적 쾌락을 위한" 장소였다.(224쪽)

 

 

큰 나뭇가지 밑의 탁 트인 공간에서 시를 읽을 것

 

에피쿠로스 학파인 오마르 하이얌은 큰 나뭇가지 밑의 탁 트인 공간에서 시를 읽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몇 세기 뒤에 지식에 까다로웠던 생트뵈브는 스탈 부인의 『회고록』을 '11월의 나무 밑에서' 읽으라고 충고했다. 셸리는 "옷을 홀랑 벗은 채 바위에 걸터앉아 땀이 다 식을 때까지 헤로도토스를 읽는 것이 나의 습관"이라고 쓰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열린 하늘 밑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마그리트 뒤라스는 "나는 좀처럼 해변가나 정원에서 책을 읽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두 가지 빛, 다시 말해 햇빛과 책이 뿜어내는 빛을 한꺼번에 받으면서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언제나 전기불로만, 방안은 아둑하게 하고 책장에만 불을 밝힌 채 책을 읽도록 해야 한다."(225쪽)

 

 

'책 읽는 행위를 무척 존경하는' 동료들 

 

책 읽는 행위를 통해 공간 자체를 변형시킬 수도 있다. 여름 휴가철 동안 프루스트는 다른 가족들이 아침 산책에 나서기만 하면 곧바로 살금살금 식당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럴 때면 그의 주위에는 벽에 걸린 그림 접시와 금방 어제 날짜가 찢겨 나간 달력, 시계와 벽난로 등 '책 읽는 행위를 무척 존경하는' 동료들만 남았으며, 이런 것들은 비록 말을 건다고 할지라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웅얼거림도 인간의 말과는 달리 프루스트 자신이 읽고 있는 단어의 의미를 결코 흐리게 하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프루스트는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런 축복의 시간을 두 시간 정도 보낼 때쯤 "'지나치게 일찍' 식탁을 차리려고 요리사가 나타난다. 그럴 때도 요리사가 묵묵히 식탁을 차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녀는 의무감에서 '그렇게 있으면 불편할 텐데, 책상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 시간이 더 흘러-밤에,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난 뒤에-앞으로 읽어야 할 페이지가 몇 장 남지 않았을 때는 발각될 경우에 예상되는 벌까지 감수하면서 그는 촛불을 다시 밝혔다가 밤을 하얗게 지새곤 했다. 그 이유는 책을 한 권 다 읽고 나면 그때까지 가슴 졸이며 좇았던 구성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열정에 들떠 잠을 이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225∼226쪽)

 

 

진정한 책은 어둠과 침묵에서 탄생해야

 

프루스트가 생의 종말에 가까워 천식의 고통을 덜기 위해 벽을 코르크로 바른 방에 갇혀 지내야 했을 때, 그는 푹신한 침대에 배를 깔고 엎드린 자세로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진정한 책은 밝은 햇살이나 다정한 대화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침묵에서 탄생해야 한다" 라고. 프루스트의 독자인 나도 한밤에 침대에 파묻혀 책장 위로는 어둑한 노란 불빛이 비치는 가운데 그 신비스런 탄생의 순간을 재연하고 있다.(226쪽)

 

 

오락 이외에 그 무엇, 은밀함 

 

조프리 초서는-아니 그의 작품 『공작 부인의 책』에 등장하는 불면증 환자 부인은-침대 위에서의 독서를 서양 장기보다도 더 훌륭한 오락으로 여겼다.

 

하지만 침대에서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에는 오락 이외에 그 무엇이 있다. 바로 은밀함이다. 침대에서 책을 읽는 행위는 자기 중심적인 것으로, 절대 흔들림이 없고 세상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며 일상의 사회 전통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또 그런 책 읽기는 욕망과 죄스럽기까지 한 나태의 영역인 침대 시트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금지된 장난을 하는 듯한 스릴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존 딕슨 카, 마이클 이니스, 앤터니 길버트의 탐정 소설에-이 작가들의 책을 나는 모두 사춘기 시절 여름 방학 때 읽었는데-이상야릇하게도 호색적인 색채를 불어넣었던 것도 바로 그런 한밤의 독서에 대한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책을 침대로 가져간다'는 일상적인 문구도 나에게는 언제나 관능적인 기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226∼227쪽)

 

침실이야말로 유일한 피난처

 

귀족풍 소설을 주로 썼던 미국의 여류 소설가 에디트 워튼에게는 침실이야말로 19세기 규범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읽고 쓸 수 있었던 유일한 피난처였다. ······ 침대에 파묻히면 그녀의 신체도 자유로웠고, 그녀의 펜도 자유로웠다. 자유롭기는 책 읽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은밀한 공간이면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왜 그 책을 선택했는지 아니면 그 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좋았다. 이런 공간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워튼은 한때 베를린의 에스플라나데 호텔에서 "호텔방에 침대가 적절하게 놓여 있지 않아 약간의 히스테리 증세를 느꼈고 침대를 창문으로 향하도록 다시 정리하고 나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베를린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도시란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고까지 한다.(23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손아귀에 충분히 쥐어질 만큼 작은 물건이 그처럼 무궁무진한 경이를 담는 신비로운 힘

 

1세기 고대 로마의 풍자 시인이었던 마르티알리스는 손아귀에 충분히 쥐어질 만큼 작은 물건이 그처럼 무궁무진한 경이를 담는 신비로운 힘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양피지 쪽들에 호머가 다 담기다니!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그 많은 모험이

프리아모스 왕국의 적이었던 오디세이 말야!

그 모든 것이 양피 한 조각에 갇혀 버리다니

겨우 자그마한 몇 장으로 접은 양피 조각에!

 

코덱스의 편리함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서기 400년경이 되자, 고전적인 형태의 두루마리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의 책들은 사각형으로 여러 장 모은 형태로 제작되었다. (191쪽)

 

   

가장 인기를 끌었던 책은 쉽게 독자들의 손에 잡히는 크기로 된 책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인기를 끌었던 책은 쉽게 독자들의 손에 잡히는 크기로 된 책이었다. 모든 텍스트에 통상적으로 두루마리가 사용되던 그리스·로마 시대에서조차도 사적인 서신은 일반적으로 손에 잡히는 작은 크기의 밀랍 서판(書板)이 이용되었는데, 이 서판은 다른 부분보다 가장자리를 약간 높게 하고 장식용 커버를 씌워 손상되지 않도록 했다. 때가 되어 서판들은, 다양한 색깔로 다듬어져 세련미가 넘쳤던 양피지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양피지가 요점이나 해설을 신속하게 적는 데 편리하다는 이유에서였다.(192쪽) 

 

우아한 손재능에 대한 동경

 

이제야 필사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는 예측에도 불구하고 인쇄술이 필사 텍스트에 대한 취향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는 사실은 마음 속 깊이 새겨 볼 만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구텐베르크와 그의 추종자들은 필사자들의 손재간을 흉내내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인큐내뷸러는 외관이 필사본을 쏙 빼닮았다. 15세기 말경에는, 비록 인쇄술이 확립된 터였지만 우아한 손재능에 대한 동경이 사그러들지 않았고, 서구 역사상 가장 기억할 만한 달필의 일부는 아직 미래의 일로 남아 있었다. 책을 대하기가 더 쉬워졌고,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배우는 한편으로 글자를 보다 우아하고 두드러지게 쓰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래서 16세기는 인쇄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육필 입문서의 시대이기도 했다. 기술상의 발전이-구텐베르크의 경우처럼-그 기술로 인해 뿌리째 뽑혀 버리리라고 예상되던 것들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발전시키는 예가 얼마나 많은지 주목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자칫 간과하가나 무시해도 좋다는 식으로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전통적인 미덕에도 참다운 가치가 담겨 있음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201쪽)

 

 

인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책 몇 권

 

1494년 마누티우스는 야심찬 인쇄 출판 프로그램을 마련했는데, 그는 훗날 인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책 몇 권을 남겼다. 처음에는 그리스어로-소포클레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투키디데스-이어서 라틴어로-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책을 찍었다. 마누티우스가 볼 때 이런 저명한 작가들은 '중간 매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읽혀져야만 했다(원래의 언어로,ㅡ 그리고 가능한 한 주석이나 해설 없이). 또한 그는 독자들이 고전 옆에다가 역시 자신이 출판한 문법서와 사전을 놓고 '걸출한 사자(死者)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203쪽)

 

 

고전 작가 명단에 특별히 위대한 이탈리아 시인이었던 단테와 페트라르카

 

하루 한 번 이들 학자들은 마누티우스의 집에 모여 앞서 수많은 세월 동안 체계화된 고전 소장품들을 추려 내면서 인쇄할 책에 대해 논의하고, 믿을 만한 자료로 어떤 필사본을 이용할 것인지를 의논했다. "중세 인문주의자들을 다 모아 놓고 보면 르네상스기 인문주의자들이 두드러지게 마련이었다"고 역사학자 앤터니 크래프턴은 적고 있다. 마누티우스는 아주 정확한 눈으로 식별해 냈다. 고전 작가 명단에 특별히 위대한 이탈리아 시인이었던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작품을 보탰다.(203∼204쪽)

 

 

그리고 마침내 펭귄이 떠올랐다

 

이제 레인에게 필요한 것은 시리즈의 이름이었다. '월드 클래식스' 같이 거창하지 않아야 하며 '에브리맨스' 처럼 선심 쓰는 체하는 이름이어서도 곤란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동물 이름들이었다. 돌핀, 이어서 포퍼스(참돌고래, 이 이름은 이미 파베르 앤드 파베르에 의해 사용되었음), 그리고 마침내 펭귄이 떠올랐다. 맞아, 바로 그 이름이었다.

 

1935년 7월 30일, 펭귄 시리즈의 첫 열 권이 권당 6펜스에 선을 보였다. 레인은 각 타이틀마다 1만 7천 부만 팔리면 본전을 뽑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첫번째 판매는 겨우 7천 부에 지나지 않았다.

 

······ 펭귄 북스의 독특한 특징(엄청난 배부량, 저렴한 가격, 우수한 내용과 폭넓은 타이틀) 이상으로 펭귄의 위대한 성취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그토록 폭넓은 문학들을 거의 모든 사람에 의해, 그리코 튀니스에서 아르헨티나의 티커만까지, 또 쿡 제도에서 레이캬비크까지(이는 영국 팽창주의적 산물이어서 나도 이 모든 곳에서 펭귄을 사서 읽을 수 있었다), 거의 모든 곳에서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독자들에게 이 세상 어느 곳에나 책 읽는 사람들이 편재해 있다는 상징으로 와닿았다.(213∼21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엽궐련 제품에 그 책의 주인공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

 

이런 책 읽기에서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는 (엘 피가로 시절에서 보듯 자신이 번 돈으로 독사에게 수고비를 지불했던) 근로자들에 의해 미리 결정되었으며, 그 장르도 정치 논문과 역사물에서 현대 및 고전 소설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다. 예컨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얼마나 인기가 높았던지, 한 무리의 근로자들이 뒤마에게 자기들 엽궐련 제품에 그 책의 주인공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뒤마도 이 요청을 기꺼이 승락했다.(169∼170쪽)

 

 

그 즐거움은 흰 머리가 다시 검어질 만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즉흥적인 모임에서 비공개적으로 실시되는 공동 책 읽기는 17세기에도 꽤 빈번했다. 모험을 좇아 여행하는 돈키호테를 찾다가 어느 여관에 닿으면서, 돈키호테의 집 서재에 꽂혀 있던 책들을 그리도 열렬히 불태웠던 성직자는 사람들을 향해 기사도 소설이 돈키호테의 정신을 어떤 식으로 혼란에 빠뜨렸는지를 설명한다. 그러자 여관 주인이 나서서 자신은 주인공이 거인들과 맞서서 씩씩하게 전투를 벌이고 괴물 같은 뱀들의 목을 비틀고 혼자 힘으로 막강한 군사들을 격퇴시키는 그런 이야기를 듣길 즐긴다고 고백하면서 성직자의 말에 반대한다. 여관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추수기의 축제 동안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요. 그러면 그 중에는 틀림없이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몇 명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 중 한 명이 이 책들 가운데서 한 권을 손에 뽑아들면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그의 책 읽기에 귀를 기울이는데, 그 즐거움은 흰 머리가 다시 검어질 만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죠."(177∼178쪽)

 

 

혼자 소리 없이 읽을 때는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운 통일성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든 아니면 중세 말기의 겨울 방안에서든, 또 르네상스 시대의 여관이나 부엌이든 혹은 19세기 응접실이나 엽궐련 공장에서든-심지어 오늘날,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배우가 책을 읽는 테이프를 들을 때든-남에게 책을 대신 읽도록 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 책 읽기에서 누릴 수 있는 고유한 자유들을-목소리의 음색을 선택하고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고 가슴에 절실히 와닿는 문장은 다시 돌아가 읽는 따위의 자유를-박탈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식의 책 읽기는 또한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텍스트에, 그렇지 않고 혼자 소리 없이 읽을 때는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운 통일성을, 즉 시간적인 측면에서는 유대감을, 그리고 공간적인 면에서는 존재감을 불어넣기도 한다.(18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