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후세의 서양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라틴문학의 걸작으로 흔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꼽는다고 한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베르길리우스가 쓴 '로마 건국 신화'가 아무리 장중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로마의 위대함'을 노래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수백 년 혹은 천 년 이상이나 오랜 세월 동안 로마 제국에 편입되어 지냈던' 유럽 사람들의 자의식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오비디우스가 쓴 신화 속에 담긴 드넓은 주제와 광활한 시공간을 넘나들며 종횡무진으로 펼쳐지는 온갖 흥미롭고도 별의별 기가 막힌 이야기들에 비춰 보면, 먼저 내세운 시인의 이야기는 너무 로마 중심적인 데다가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엄숙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지닌 탓에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에게조차 여전히 접근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책이었지 싶은 생각을 해 본다.


그에 비해 오비디우스가 쓴 이 작품은 그 주제의 범속성이나
세계성 측면에서 베르길리우스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치 폭넓고도 보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후세의 서양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조각 등 온갖 예술작품 등에 두루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그리고 로마의 밖에서만 살아온 수많은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조차도 낯설지 않거나 심지어 친숙한 이야기들이 많다는 점에서도 나로서는 두 천재 시인 가운데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보다 좀 더 쉽게 읽어볼 만한 책으로 남들에게 권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오늘날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많이 쏟아져 나온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룬 온갖 책들도 결국 그 내용의 대부분은 오비디우스의 작품에 담긴 이야기에서 비롯됐다는 사실까지 고려해 본다면, 그런 이야기들의 원조격이나 다름없는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한번쯤 제대로 살펴보는 일은 이천 년 동안의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신화의 원형'을 직접 고스란히 마주 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좀 특별한 경험을 맛보는 일이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서양에서조차 오비디우스가 쓴 '원전' 형태의 변신 이야기가 '서사시' 형식으로 쓰여진 탓에 읽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던 때문인지 미국 사람 토마스 불핀치가 산문으로 풀어 쓴 신화집이 오비디우스의 작품보다 오히려 더 큰 인기를 끌었다는 기이한 형편까지 고려하면 오비디우스에게 다가가는 일이 더욱 흥분되는 모험처럼 느껴진다.

 

그러면 도대체 모든 그리스·로마 신화의 원조나 다름없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왜 그토록 재미있고도 유명한 책이면서도 여전히 읽기 쉽지만은 않은 묘한 책이 되었을까. 그 이유를 나는 무엇보다도 우선 '신화'가 지니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찾아보고 싶다. 신화는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신들만 하더라도 너무나 여러 '계보'가 있어서 그들의 족보와 촌수를 따지는 일이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닌데다가, 거기에 덧붙여 온갖 다양하고 낯선 이름들을 지닌 인간들조차 쉼없이 끼어드니 신화는 일단 너무나 복잡하다는 느낌부터 든다. 게다가 신화에는 결코 신과 인간만 등장하는 법이 없다. 수많은 강과 바다에 사는 온갖 요정들도 신과 인간들 사이에 쉼없이 끼어들기 마련이고, 다양한 이름들을 지닌 여러 지방과 섬과 도시, 산과 강, 호수와 바다가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니 도무지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신들의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다 한들 갈피도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더군다나 온갖 함축적인 표현들로 가득찬 '시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신화'를 읽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오비디우스의 신화를 읽게 되면서 겪게 되는 두 번째 어려움은 대체로 '이야기의 방대함'에 있지 싶다. 이 작품만 하더라도 '시로 함축시켜' 펼쳐 놓은 이야기의 전체 행수가 무려 1만 2천 행에 이르는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9천 9백 행에 못 미치는 걸 고려해 보면 그 길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1만 5천 행, 『오뒷세이아』가 1만 2천 행 정도여서 그와 비슷한 길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나, 라틴어는 그리스어에 비해 표현이 훨씬 더 함축적이기 때문에 오비디우스의 작품이 길이가 훨씬 더 긴 작품으로 느껴진다고 다들 말한다.

 

오비디우스의 신화를 읽게 되면서 겪게 되는 세 번째 어려움이자 쉽게 극복하기 힘든 난제는 대체로 '사전 지식의 부족'에서 찾는 게 맞지 싶다. 호메로스의 작품이 되었건,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이 되었건, 혹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들의 작품이 되었건 그 작품들은 거의 모두 기본적으로는 시로 쓰여진 작품들이며, 아무리 이야기 형태의 시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함축적인 표현'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그런 경향이 유난히 더 강하다. 가령 헤르쿨레스(헤라클레스)의 죽음을 다룬 짧은 이야기만 하더라도 그 유명한 '12 고역'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어리둥절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 대목을 여기서 조금만 살펴 보자.

 

"이러자고 내가 잔혹한 안타이우스에게서 어머니의 힘을 빼앗았던가요?"라는 짧은 구절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안타이우스가 땅의 자식으로서 땅에 닿을 때마다 힘을 얻기 때문에 헤르쿨레스가 그를 공중에 들어 올린 후 졸라 죽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석'을 살펴보고 겨우 그 뜻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뭔가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 남게 마련이어서 알 듯 모를 듯한 애매함과 곤란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이러자고'가 그저 한 두번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마치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듯이 줄기차게 계속 이어져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이러자고 내가 이 책을 펼쳤단 말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갑자기 그 틈을 비집고 불쑥 튀어나오지나 않을까.

사실 헤르쿨레스의 '12 고역'만 하더라도 이야기 하나 하나가 온갖 흥미로운 요소들을 두루 지니고 있는 데다가(가령 불을 내뿜는 용이 지키고 있는 '황금 사과'를 따오기 위해 지축을 떠받치고 있던 아틀라스를 찾아가, 어쩔 수 없이 그를 대신해서 그 무거운 짐을 떠메고 있다가 나중에 결국 황금사과를 손에 넣게 되자 이 영웅이 교묘한 꾀를 내어 그 무거운 짐을 도로 아틀라스에게 되돌려주는 이야기는 얼마나 '상상력'을 즐겁게 자극하는가), 도저히 이뤄낼 수 없을 듯한 난제들을 척척 해내는 이 영웅을 보고 열광하지 않을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탓에 마치 고대판 '미션 임파서블'을 보는 즐거움과 통쾌함을 누구나 만끽할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들조차 이 영웅의 이야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33편의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 가운데 무려 3편이 '그의 신화'를 다룬 작품이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또한 '그의 신화'만 따로 떼어내어 온전히 한 권의 책으로 펴냈을 정도다. 최근에는 '현대판 헤르쿨레스'로 종종 여겨지는 축구 영웅 호날두의 연인 이리나 샤크가 '대작 영화'로 만들어진 『허큘리스』에서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일이 화제가 된 적도 있었을 정도로 그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영웅'처럼 가까이 있다. 그의 도무지 믿기지 않는 영웅적인 활약을 고대 로마의 시인이 '헤르쿨레스의 입'을 통해 '이러자고 내가 그 고생을 했단 말인가'하고 열두 번 거푸 탄식을 연발하는 식으로 응축시켜 놓았으니 그 이야기가 온전히 '귀에 들리는 사람에게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반쯤만 열려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지 싶다.
(헤르쿨레스의 죽음)

 

이러한 난관들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여전히 매혹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오비디우스가 집대성해 놓은 수많은 신화들 자체가 지닌 이야기의 매력과 더불어 시인이 풀어가는 기가 막힌 이야기 솜씨 덕분일 것이다. 그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널리 알려진, 그래서 나름대로 꽤나 식상한 이야기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문체로 그 이야기들을 정말 기가 막히도록 재미있게 술술 풀어낸다. 이 책을 번역한 천병희 선생님은 '그의 표현이 평이하고 유려하고 우아하면서도 재치와 유머와 파토스와 위엄이 있기 때문에' 오비디우스가 널리 읽힌다고 했는데, 역자의 평가만 들어봐도 그의 문체가 얼마나 다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금세 알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신화가 여전히 매혹적인 또다른 이유는 좀 더 근본적이다. 그가 쓴 신화를 읽으면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인간 본성을 탐구할 수 있는 상징체계'를 무수히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아무리 위엄있는 신이라고 하더라도 오비디우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인간 속물들과 크게 달리 비치지 않는다. 신들도 인간처럼 질투하고 시기하고 남의 아내를 넘보고 자신의 욕망이 좌절될 때마다 분을 이기지 못한다. 신화 속의 영웅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도 우리처럼 쉽게 걸려 넘어지며 어떨 땐 너무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어서 나라도 얼른 달려가서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 주고 싶을 만큼 안쓰러워 보일 때조차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신화 속의 영웅들을 우리와는 다른 머나먼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와 비슷한 또는 가까운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오비디우스의 생애는 특기할 만한 대목이 몇 있다. 그는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바로 이듬해에 태어났는데, 그가 차츰 성장하여 로마에서 시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마침 로마의 정치 체제가 공화정을 끝내고 제정으로 넘어간 때였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된 이후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대권'을 위해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끝에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개막된 소위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살았던 인물인 셈이다.

 

그는 초창기엔 주로 여러 가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사랑의 노래』, 신화와 전설 속의 유명 여성들이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된『여걸들의 서한집』, 연애 기술을 다룬『사랑의 기술』, 실연한 자들을 위한 『사랑의 치료약』등을 썼는데, 여기서 크게 성공을 거둔다. 그 뒤에 그는 기원후 2년에『로마의 축제일들』과 함께 자신의 대표작인『변신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이미 선배 시인들이었던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가 세상을 떠나고 오비디우스가 로마의 문학계를 대표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돌연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흑해 서안의 토미스(오늘날의 루마니아)로 유배된다. 거기서 그는 비참하고 쓸쓸한 만년을 보내다가 유배된 지 10년 만인 기원후 17년 또는 18년에 눈을 감고 마는데, 그가 얼마나 간절히 로마도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는 유배지에서 쓴『비탄의 노래』와『흑해로부터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그가 유배된 이유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두 가지 죄('詩'와 '과오') 때문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이에 관해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까지『비탄의 노래』에서 말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말한 '시(詩)가 『사랑의 기술』일 것으로 보는 데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작품은 그가 추방되기 무려 8년 전에 나온 작품이기 때문에 유배의 직접적인 이유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가 추방된 결정적인 이유는 결국 '과오' 때문으로 보이는데, 오비디우스는 자신의 처지를 '악타이온'에 비교했다고 한다.(☞ 디아나의 알몸을 본 악타이온) 쉽게 말해서 '못 볼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오비디우스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의 역사』를 쓴 피터 왓슨은 오비디우스가 추방된 이유를 보다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는 황제의 손녀가 난잡한 성적 습관을 가졌다는 글을 쓴 죄로 흑해로 추방되었을 때 가혹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실용성을 강조했던 로마인들은 '읽기는 쓰기와 이어질 때에만 유용한 활동'이라고 생각했으며 특히 "글은 무엇보다도 도덕적으로 유용해야 했다." 그 때문에 결국 시는 문제가 되었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했지만 시를 통째로 감싸는 것은 확실히 경솔한 짓이었던 것이다.


비록 오비디우스는 끝내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그의 작품은 자신이 예언했던 대로-이 작품은 윱피테르의 노여움도, 불도, 칼도, 게걸스런 노년의 이빨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끝까지 살아남아 영생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오비디우스의『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_맺는 말) 오비디우스는 비록 로마인이었지만 '예전의 그리스인들처럼' 시인이 어떤 면에서 특별하다고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시인을 우아테스uates, 즉 '예언자'라고 불렀으니 말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변신 이야기』에 담긴 '이야기'를 이야기할 때이다.

 

이 작품에 담긴 이야기는 약 250편이며, 크게 신들에 관한 이야기(1권 452∼6권 420행),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6권 421∼11권 193행),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11권 194∼15권 744행)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신화의 경우에는 전후 관계나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기 몹시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제의 유사성이나 상이성, 지리나 계보 등을 따라 절묘하게 이야기들을 연결시켜놓았다. 그래서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어쩌면 거의 대부분 따로 떼어놓아도 좋을 이야기들이지만 시인의 솜씨 덕분에 느슨하게나마 주욱 이어진 이야기처럼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신들의 이야기든 영웅들의 이야기든 서로 아무런 관계조차 없을 정도로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오비디우스가 이 작품에서 한데 두루 붙들어놓을 수 있도록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물론 '변신'이다. 그렇지만 '변신'은 이 작품의 주제라기 보다는 이야기를 끌어모으는 데 필요한 하나의 '구실'이나 '핑계거리'에 더 가까운 인상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 담긴 모든 이야기들이 반드시 '변신'을 포함하지는 않는 데다가, '변신'이 꼭 필요하거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변신'은 그저 인간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신화 속에 자연히 딸려나오는 또다른 상상으로의 자연스런 변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게 되는 건 '여자들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섬세한 심리 묘사'인데, 이 책을 번역하신 천병희 선생님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부분은 그리스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헤르쿨레스의 죽음'을 노래한 대목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작품을 온전히 제대로 감상하려면 '당연히' 오비디우스가 여기 저기서 끌어온 이야기들을 독자들이 미리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좋겠다는 생각이 정말 여러 번 들었다. 이에 대해 옮긴이 해제의 일부분을 다시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베르길리우스 시의 묘미를 느끼려면 호메로스의 시를 알아야 하듯,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도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그 깊은 맛을 구석구석 느낄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비롯한 그리스 라틴문학의 읽는 재미를 극대화하려면 텍스트 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을 파악할 것을 권한다. 앞서 말했듯이 네스토르는 젊은 나이에 칼뤼돈의 멧돼지 사냥에 참가하지만 멧돼지가 덤벼들자 당장 이를 피해 마치 장대높이뛰기 하듯 창자루를 짚고 나무 위로 도망치는데(8권 260∼546행 참조), 이 장면은 그가 『일리아스 』에서 그리스 장수들의 회의석상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는 젊었을 때 아무리 강한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며 다른 장수들을 나무라는 장면들을 알고 있어야만 더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과연 얼마만큼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좋을까. 내 판단으로는 적어도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 그리스 3대 비극작가들의 비극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정도는 미리 읽고 난 뒤에 이 시를 읽는 게 좋겠다 싶다. 가령 이 책에 실린 대표적인 명문장 가운데 하나인 '아킬레스의 무구를 두고 벌이는 아이약스와 울릭세스의 설전'만 하더라도, 이 두 영웅이 트로이아 전쟁에서 얼마만큼 드높은 무공을 쌓았으며(『일리아스 』), 아킬레스만 빼고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장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약스(아이아스)가 '무구 재판'에서 울릭세스(오뒷세우스)에게 패했을 때 그가 왜 기어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소포클레스의 비극『아이아스』), 또한 트로이아 전쟁이 끝난 뒤 오뒷세우스가 귀향하던 중에 고난을 겪는 와중에 잠시 저승으로 내려갔을 때, 그의 눈에 띄었던 '아이아스의 혼령'이 오뒷세우스에게 '끝내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그냥 돌아서고 말았던 장면까지 떠올릴 수 있다면(『오뒷세우스』), 오비디우스가 노래한 두 영웅 사이의 설전이 훨씬 더 깊은 울림과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오비디우스는 이 책 속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온갖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변주'해서 들려준다. 이미 젊은 시절부터 '연애시'에 특별한 능력을 발휘했던 시인이 자신의 특출난 재능을 '사랑 이야기'에 아낌없이 쏟아낸 덕분에 시인의 노래는 '어떤 사랑'에서나 거침이 없으며, 몽테뉴가 말했던 '마치 풍부한 물이 억지로 맹렬하게 밀려 나가다가 좁은 홈통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은 조금도 찾을 수 없다.

 

오비디우스가 노래한 사랑 이야기 가운데 내게 특히 매혹적으로 다가온 이야기들만 해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다. '사랑의 쾌감'에 대한 남녀간의 차이를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현명하게' 밝힌 사랑의 쾌감을 이야기한 티레시아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한 나르킷수스와 에코 이야기, (오비디우스로부터 특히 깊은 영향을 받은) 셰익스피어가 지어낸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조가 된 퓌라무스와 티스베 이야기,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투스 이야기, 낙랑공주 이야기를 닮은 이아손과 메데아 이야기, 해서는 안 될 사랑, 오라비를 사랑한 뷔블리스 이야기, 소녀에서 남자로 바뀌는 이피스 이야기,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 나오는 아리아 '에우리디체 없이 어찌 살라고'라는 노래로 더욱 유명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이야기, 자신의 조각 작품을 사랑한 이야기 퓌그말리온의 기도, '말도 안되는 사랑'을 절묘하게 노래한 아버지를 사랑한 뮈르라 이야기, 애닯고도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인 물총새로 변한 케윅스와 알퀴오네 등이 내게는 하나같이 매혹적으로 다가왔고, 그 얘기들에 얽힌 명화들을 찾느라 한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링크를 통해 보았듯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술가들의 보물 창고'와 다름없는 작품이 되었다. 숱한 회화와 조각 작품들은 물론 수많은 음악 작품에도 그 소재를 제공했던 것이다. 오페라의 효시로 인정받는 1607년에 초연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캉캉 춤'으로 유명한 오펜바흐의 <지옥의 오르페오> 등이 모두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이야기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아예 <변신 이야기>를 교향곡의 제목으로 단 작품들도 여럿인데, 벤자민 브리튼의 <변신 이야기>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디터스도르프(1739∼1799)의 <변신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1783년에 작곡된 디터스도르프의 작품은 6개의 교향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곡에는 제목은 물론 오비디우스가 쓴 '라틴어 원문에서 발췌한 인용문'까지 붙어 있다고 한다. 그 작품의 제1번 교향곡은 <네 시대>, 제2번은 <파에톤의 추락>(☞ 아버지의 마차를 모는 파에톤), 제3번은 <사슴으로 변한 악타이온>.(☞ 디아나의 알몸을 본 악타이온), 제4번은 <안드로메다를 구한 페르세우스>, 제5번은 <개구리로 변한 뤼키아의 농부들>, 제6번은 <돌로 변한 피네오스와 그 친구들>이다. 이천 년 전에 죽은 오비디우스가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불어 넣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이미 적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이쯤에서 나는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책을 쓴 이탈로 칼비노의 이야기를 좀 덧붙이고 싶다. 그는 자신의 책 속에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세 번째로 올려 놓고, 그 글의 제목을〈오비디우스와 우주의 인접성〉으로 붙였을 정도로『변신 이야기』에 담긴 매우 심오한 이야기들을 길게 펼쳐 놓는다. 나는 칼비노가 짚어낸 '사물의 기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오비디우스의 생각까지 여기서 언급할 엄두는 차마 못내겠다. 다만 그가 '여러 고전들'을 내세우기에 앞서 미리 꺼내 놓은 '고전의 정의'에 관한 몇몇 대목만큼은 여기서 다시금 들춰 보고 싶다. 그는 '고전'에 대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정의를 여럿 만들어냈지만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정의는 그 책의 두 번째 줄에 나오는 다음의 정의일 것이다.

 

 1.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그는 이 정의를 내린 이후 곧바로 '동사 '읽다' 앞에 붙은 '다시'라는 말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궁색한 위선을 드러낸다.'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그리고 '그들이 안심하도록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아무리 청소년기부터 폭넓게 책을 읽어 왔다 해도, 항상 읽지 못한 중요한 작품들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라는 위안도 덧붙인다. 이탈로 칼비노의 첫 번째 정의에 의하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내게는 좀 독특한 고전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결코 '다시' 읽지 않고 이번에 난생 '처음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속 이어지는 칼비노의 '고전의 정의'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의중을 금세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읽는다'라고 말하느냐, '다시 읽는다'라고 말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는 게 칼비노의 핵심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고전의 정의'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5.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6.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내게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그런 표현에 딱 어울리는 바로 그런 책이었다. 이탈로 칼비노의 주장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그의 고전에 대한 정의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어찌 그리 찰떡 궁합을 이루고 있는지 자꾸만 놀라게 된다. 이왕 이야기를 시작하였으니 칼비노의 이야기를 계속 인용해 보자.

 

7. 고전이란 이전에 행해졌던 해석의 그림자와 함께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것이 한 문화 혹은 여러 다른 문화들에(더 단순하게는 언어나 관습들에) 남긴 과거의 흔적들을 우리의 눈앞으로 다시 끌어오는 책들이다.

 

고전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이전에 그 책에 대해 생각했던 이미지와 비교해 보면서 새삼 놀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작품에 대한 이차 서적이나 주석본, 해설서 들을 가능한 피하고, 원전을 직접 읽으라고 계속해서 충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는 다른 책을 해설하는 어떠한 책도 해당 원전보다 많은 이야기를 해 주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한다. 그러나 학교는 실제로 학생들이 이러한 사실을 반대로 기억하게 만든다. 이와는 상반되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즉 원전의 의미를 원전 자체보다 더 풍부하게 말해 준다고 떠벌리는 매개물들이 없을 때만 읽어 낼 수 있는 것들을, 수많은 서문, 비평문, 참고 서적들이 연막처럼 차단하는 것이다.

 

 칼비노는 어쩌면 이토록 '고전'에 대해 날카로운 혜안을 지녔는지, 또 내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읽으며 느꼈던 '절실한 생각들'을 어쩌면 그토록 미리 그 사정에 꼭 알맞게 얘기해 놓았는지 그저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그의 아홉 번째 정의(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와 열 번째 정의(고전이란 고대 전통 사회의 부적처럼 우주 전체를 드러내는 모든 책에 붙이는 이름이다.) 또한 다른 수많은 고전에게도 그런 것처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도 너무나 잘 들어맞는 설명이다. 그러면 그 나머지 정의들은? 나머지도 전부 내 마음에 쏙 든다. 특히나 그런 정의들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함께 어울릴 때면 더욱 더.

 

 이쯤 되면 근본적인 문제를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즉 고전을 읽은 체험을, 고전이 아닌 책을 읽은 경험과 어떻게 관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동시대를 잘 이해하게 해 주는 다른 책들을 제쳐 두고 왜 굳이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여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오늘날 홍수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는 고전을 읽을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와 시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중략)

 

이상적인 상황은 한 고전 작품에서 잘 구성된 음악처럼 울리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현재에 관한 모든 것들은 창밖의 자동차 소음, 날씨의 변화와 같은 저 바깥의 잡음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행동하기 일쑤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전의 실체를 먼 메아리처럼 듣는다. 지금 발생하는 일들과 관련한 소식들은 쩌렁쩌렁 울리는 텔레비전 소리처럼 듣고, 고전은 그 바깥에서 들려오는 머나먼 메아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길게 이어지는 칼비노의 얘기는 결국 자신이 만든 14개에 이르는 '고전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할 듯하다면서 덧붙이는 다음 글에서 드디어 멈춘다. '고전이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이와 같은 결론은『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의 얘기와 너무나 닮았다. "고전을 다시 읽게 되면 당신은 그 책 속에서 전보다 더 많은 내용을 발견하지는 않는다. 단지 전보다 더 많이 당신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차라리 (칼비노와 패디먼의 견해에서 좀 더 나아가) 에머슨이 남긴 "좋은 책을 읽을 때면 나는 3천 년은 더 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는 말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훨씬 더 어울린다고 느낀다. 그리고 에머슨과 절친 사이였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다음 말 또한 주석처럼 맨끝에 덧붙이는 데 아무런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

요즘 저렴한 가격에 많은 출판물이 쏟아져 나오고 번역된 책도 많지만, 고대의 영웅을 그린 작가들은 좀처럼 소개되지 않는다.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멀리 동떨어진 사람들처럼 보이고, 그들의 작품을 인쇄한 문자는 희한하고 이상해 보인다. 그래도 고대 언어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암시와 자극이 될 만한 몇 마디를 배워 길거리의 천박함을 딛고 일어선다면, 젊은 날과 소중한 시간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다. 농부가 어딘가에서 들은 라틴어 몇 마디를 머릿속에 담아두고 반복해서 사용한다고 해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욕할 것은 없다. 때때로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결국에는 더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모험을 즐기는 학생이라면 어떤 언어로 얼마나 오래전에 쓰인 것인지 상관하지 않고 고전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고전이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고전은 결코 썩지 않는 유일한 신탁이어서, 지금 이 시대의 의문에 대한 해답까지 담겨 있다. 델포이와 도도나도 그 시대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달린 월든』, <독서>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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