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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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을 바꾸는 것도 어려운데, 그것은 습관이 본성을 닮았기 때문

 

그런데 자제력 없음과 자제력 있음은 대부분 사람들의 품성상태를 넘어서는 것에 관계한다. 자제력 있는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견디는 반면, 자제력 없는 사람은 그것보다 못 견디기 때문이다.

 

자제력 없음의 종류들 가운데 불같은 성질의 소유자가 보여 주는 자제력 없음이, 숙고는 하되 숙고한 바에 머물지 못하는 자제력 없음보다 더 고치기 쉽다. 또 습관으로 말미암아 자제력 없게 된 사람이 본성적으로 그러한 사람보다 더 고치기 쉽다. 습관을 바꾸는 것이 본성을 바꾸는 것보다 더 쉬우니까. 사실 습관을 바꾸는 것도 어려운데, 그것은 습관이 본성을 닮았기 때문이다. 에우에노스48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친구여, 오랜 시간에 걸친 훈련, 실로

그것이 결국 인간의 본성이 되네

 

 

 

 

────────

48 에우에노스, 단편9(Diehl). 그는 파로스(Paros) 출신의 시인으로 비가(悲歌)와 격언시를 썼다고 전해지는데, 소크라테스에게 시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플라톤의 작품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변론』20a ;『파이드로스』267a ; 『파이돈』60d-61a.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7권 제10장「자제력 없음과 품성」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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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을 이유로 성립하는 친애


유익을 이유로 성립하는 친애가 서로 가장 받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이 부자와 맺는 친애나 무지한 사람이 식자와 맺는 친애의 경우처럼. 자신이 마침 필요로 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다른 것을 보답으로 주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사랑을 구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 사이의 친애, '아름다운 사람'과 '못생긴 사람' 사이의 친애를 끌어 올 수도 있겠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사랑을 구하는 사람'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데, 그들이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기를 요구할 때이다. 둘이 비슷한 정도로 사랑할 만한 사람들이라면 동등하게 요구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서도 동등하게 사랑받기를 요구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마 서로 반대되는 것 중 한편은 다른 한편을 그 자체로는 추구하지 않고 우연히 추구할 것이다. 욕구하는 바는 사실 중간이며 이것이 좋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른 것은 젖은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이르기를 바라고, 이것은 뜨거운 것이나 다른 것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이제 접기로 하자. 상당히 다른 논의에 속하니 말이다.(296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8권 중 제8장「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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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건넬 수 없음이...

 

탁월성들에 관한 논의에서 어떤 사람들은 품성상태(hexis)에 따라, 또 어떤 사람들은 활동(energeia)에 따라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되듯, 친애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좋음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고 있는 사람들, 혹은 장소상 서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친애]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처럼 활동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기도 한다. 공간적 거리는 친애를 단적으로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활동을 막을 뿐이다. 그러나 친구의 부재(不在)가 길어질 경우 친애의 망각이 빚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말을 건넬 수 없음이 많은 친애들을 해체시켰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9장 「친애들의 특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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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가 바로 그러한 것을 지향했으니까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가 잘 되기를 바라는데, 그들이 사랑하는 그 관점에서 그러기를 바란다. 유익을 이유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상대로부터 자신들에게 어떤 좋음이 생겨나는 한 사랑하는 것이다. 즐거움을 이유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재담꾼을 사랑하지만 재담꾼이 어떤 성격의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유익을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어떤 좋음을 이유로 상대에게 애착을 가지는 것이며, 즐거움을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즐거움이 돌아오는 이유로 그러한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사람인 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유익을 주는 한, 혹은 [자신들이] 즐거운 한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우연적인 의미에 따른 친애이다. 사랑받는 사람이 그 자체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좋음이나 즐거움을 주는 한에서만 사랑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친애는 [사랑을 주고 받는 친구들이] 계속 이전 같지는 않을 때 쉽게 해체되고 만다. 더 이상 즐거움이나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될 경우 그들의 사랑 역시 멈추게 된다. 그런데 유익한 것은 지속적이지 않고 경우에 따라 유익한 것이 달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그들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그 이유가 사라지고 나면 친애 역시 해체된다. 친애가 바로 그러한 것을 지향했으니까. 이러한 종류의 친애는 주로 나이 든 사람들에게서 생겨나는 것으로 보인다. 나이 든 사람들은 즐거움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전성기에 있는 사람이나 젋은이들 중에서도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친애가 해당되는 것 같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일이 별로 없다. 사실 어떤 때에는 피차 상대방이 즐겁게 느껴지지 않으니까. 서로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친교도 필요하지 않다. 그들이 좋음의 희망을 가지는 바로 그만큼만 [서로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손님에 대한 친애'도 이러한 범주에 넣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면서


젊은이들의 친애는 즐거움을 이유로 성립하는 것 같다. 젊은이들은 감정에 따라 살며 주로 그들에게 즐거운 것을 추구하고, 또 지금 있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즐거운 것들도 달라지게 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들은 쉽게 친구가 되고, 또 쉽게 헤어진다. 그들의 친애는 즐거움에 따라 바뀌는데 그러한 즐거움의 변화는 빠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또 에로스 지향적이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대부분 감정에 따른 것이며 즐거움을 이유로 성립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다가 순식간에 헤어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면서. 이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이 살기를 원한다. 이들에게 친애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 생겨나니까.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친애의 세 종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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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인 여러 좋음들에는 지나침이 있다

 

이제 어떤 즐거움, 예를 들어 고귀한 즐거움은 대단히 선택할 만한 것이지만 무절제한 사람들이 관계하는 육체적인 즐거움은 선택할 만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즐거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그것은 왜 육체적인 즐거움에 반대되는 고통이 나쁜가 하는 것이다. 물론 좋은 것이 나쁜 것에 반대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필수적인 [육체적] 즐거움들은 나쁘지 않은 것은 좋은 것이라는 이유에서만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느 정도까지만 좋은 것인가? 더 나은 것으로의 지나침이 불가능한 모든 품성상태와 운동에는 즐거움의 지나침도 없는 반면, 더 좋은 것으로의 지나침이 가능한 곳에서는 즐거움의 지나침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육체적인 여러 좋음들에는 지나침이 있다. 또 열등한 사람은 지나침을 추구하기에 열등한 사람인 것이며, 필수적인 것을 추구하기에 열등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음식과 술, 성적인 것들에서 어느 정도 기쁨을 느끼지만, 모두가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고통의 경우는 사정이 이와 반대다. 열등한 사람은 지나친 고통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고통을 피한다. 지나친 즐거움에 반대되는 것은 고통이 아니지만, 지나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하기 [고통이기] 때문이다. (273쪽)

 

 

 

육체적인 즐거움이 어째서 더 선택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그런데 우리는 참된 것뿐만 아니라 그릇된 것의 원인도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확신(pistis)에 도움이 되니까. 실제로는 참이 아닌 것이 어떻게 해서 참인 것으로 보이게 되는지를 이치에 맞게 설명할 수 있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것을 더 잘 확신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육체적인 즐거움이 어째서 더 선택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273∼24쪽)

 

 

 

즐거움이 신실하지 않은 이유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우선 육체적인 즐거움이 고통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지나친 고통으로 말미암아 마치 치료인 양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지나침으로 나아가고, 일반적으로 육체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치료가 고통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치료'는 강렬해지며, 그런 까닭에 [즐거움이] 추구되는 것이다.

 

이미 말했던 것과 같이, 즐거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신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즐거움이 열등한 본성들의 행위라는 이유에서이다. (열등한 본성이, 짐승들의 경우처럼 나면서 그러한 것이든, 열등한 인간의 경우에서처럼 습관에 의해 그러한 것이든 간에.) 둘째 이유는 즐거움이 결핍에 대한 치료이며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 [그리로] 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완성으로 가는 회복 과정에서 생겨 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우연하게만 신실할 뿐이다. (274쪽)

 

 

 

생물은 늘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

 

또 육체적인 즐거움들은 강렬하기에, 다른 즐거움에서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추구된다. 이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 안에 스스로 일종의 갈증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이러한 갈증이 해가 없는 것일 경우에는 탓할 것이 없지만, 해가 될 경우라면 나쁜 일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 기쁨을 누릴 다른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고, 즐거움도 고통도 아닌 상태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주장하는 자연학자들 또한 증언하듯이, 생물은 늘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에는 [육체의] 성장이 진행되는 까닭에 젊은이들은 마치 술에 취해 흥겨운 사람의 상태처럼 되고, 그래서 젊음은 즐거운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 본성에 있어 '성질이 불같은' 사람들은 늘 치료를 필요로 한다. 신체는 수축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긴장하고 있으며, 항상 강렬한 욕구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통은 그것에 반대되는 즐거움에 의해 쫓겨날 뿐만 아니라, 충분히 강력하기만 하다면 그 어떤 즐거움에 의해서든 쫓겨난다. 이런 까닭에 무절제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다.(274∼275쪽)


 

고통 없는 즐거움들은 지나침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 없는 즐거움들은 지나침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즐거움들은 본성상 즐거운 것들에 속할 뿐, 우연히 즐거운 것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치료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운 것들은 우연히 즐거운 것들이다. 치료받는다는 것은 아직 건강하게 남아 있으면서 행위하는 부분에 속하는 일이며, 그렇기에 즐거운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본성적으로 즐거운 것들은 바로 그러한 [건강한 ] 본성의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들이다.(275쪽)

 

 

 

동일한 것이 언제나 즐겁지는 않은 까닭

 

동일한 것이 언제나 즐겁지는 않은 까닭은 우리의 본성이 단순하지 않으며,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한 우리 안에 무엇인가 다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안의 [둘 중] 어느 하나가 행위하면 이 행위는 나머지 다른 것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반면에 두 요소가 서로 균형을 이루었을 때는 행한 것이 고통스러운 것도, 또 즐거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만약 누구든 단순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나 똑같은 행위가 가장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니까.(275∼276쪽)

 

 

   

즐거움은 오히려 운동보다는 정지 속에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

 

이런 까닭에 신은 언제나 하나이며 단순한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운동이라는 활동뿐만 아니라 '운동하지 않음(akinésia)'이라는 활동도 있으며, 즐거움은 오히려 운동보다는 정지 속에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은 "변화는 무엇이든 달콤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일종의 나쁨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변하기 쉬운 사람이 나쁜 사람인 것처럼, 변화를 필요로 하는 본성 또한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본성은 단순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으니까.(276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7권 제14장 「육체적 즐거움과 인간 본성」 중에서

 

 

 * * *

 

사람들은 즐거운 것은 선택하지만 고통스러운 것은 피하니까

 

이것들 다음으로는 아마도 즐거움에 관해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즐거움은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친밀하고 고유한 것이니까. 그런 까닭에 즐거움과 고통을 방향타로 삼아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또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에 대해 기뻐하고, 마땅히 혐오해야 할 것에 대해 혐오하는 것은 성격적 탁월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즐거움과 고통은 삶 전체에 뻗어 있으며 탁월성과 행복한 삶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즐거운 것은 선택하지만 고통스러운 것은 피하니까.(349쪽)

 

 

 

이러한 주제들은 많은 논쟁거리를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주제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로 보이는데, 이러한 주제들은 많은 논쟁거리를 가지고 있기에 특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즐거움이 좋음이라고 말하는 반면,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즐거움이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아마 실제로도 그렇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일 것이며, 다른 일부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즐거움을 나쁜 것들 중의 하나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우리 삶을 위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다중]이 즐거움으로 기울어지며 여러 가지 즐거움들의 노예가 된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반대 방향으로 이끌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중간에 도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349∼350쪽)

 

 

그래서 참된 말들은 앎에 있어 유용할 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가장 유용한 것 같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은 올바른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감정들이나 행위들에 관해, 말들(logos)은 실제 행동들(ergon)보다 신뢰할 만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들이 우리의 지각에 따른 것들과 일치하지 않을 때, 말들은 무시당하며, 참된 것을 훼손하다. 즐거움을 비난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즐거움을 추구하는 게 목격된 경우, 그런 즐거움에 이끌린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 이끌리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구별은 다중들이 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참된 말들은 앎에 있어 유용할 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가장 유용한 것 같다. 실제(ergon)와 잘 부합하는 말은 신뢰받고, 그런 까닭에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그 말에 따라 살도록 북돋우기 때문이다.(350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10권 제1장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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