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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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와 그의 가족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사실

 

아마 그녀도 저 유명한 라틴 격언인 '구원받는 사람은 적고, 저주받는 사람은 많다'(Salvandorum paucitas, damnandorum multitudo)를 프랑스어로 옮긴 말은 알고 있었을 테지만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구원받을 사람의 비율을 나머지 인간의 수에 비교해 볼 때 노아와 그의 가족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159∼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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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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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에서 '최후의 단정' 같은 것이 불가능하다면

 

만약 책 읽기에서 '최후의 단정' 같은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어떤 권위도 우리에게 '정확한' 책 읽기를 강요할 수 없을 것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어떤 책 읽기의 경우 다른 책 읽기보다 조금 나을 수 있다는 점을-보다 견문이 높다거나, 보다 명쾌하다거나, 좀더 도전적이라거나, 보다 유쾌하다거나, 좀더 불온하다는 따위-깨달았다. 그렇지만 새롭게 눈을 뜨게 된 자유에 대한 감각만은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어떤 서평자가 악평한 책을 즐기거나 그때까지 뜨겁게 칭찬받던 책을 젖혀 두기도 했던 그때의 반항적인 감정을 나는 지금도 꽤 생생하게 돌이킬 수 있다. (129쪽)

 

 

나는 그 책들이 나에게 손짓을 보내고 있다고 확신한다

 

내 서가에 꽂힌 책들은 내가 책장을 펼쳐 줄 때까지는 나와는 상관이 없겠지만, 나는 그 책들이 나에게-나를 포함하는 다른 모든 독서가들에게-손짓을 보내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 책들은 나의 해설과 의견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책에 대해서 그렇듯이, 플라톤에 대해서도 건방지게 그 내용을 추정한다. 심지어 내가 결코 읽지 않을 책에 대해서조차 뻔뻔스럽게 추정을 내린다. (130쪽)

 

 

 

이런 책을 너희들 같은 인간과 함께 읽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야

 

고등학교 1년 수업 10개월 중에서 3분의 1은 고전 언어들에, 나머지는 독일어와 지리, 역사에 할애했다. 수학은 중요도가 덜한 과목으로 여겨졌고, 체코어와 프랑스어와 체육은 선택과목이었다. 학생들은 배운 과목을 암기했다가 누군가가 주문만 하면 금방 뱉어 낼 수 있어야 했다. 카프카와 같은 시대의 고전학자인 프리츠 마우트너는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 반 학생 40명 중에는 그나마 땀을 뻘뻘 흘리는 정성을 기울인 끝에야 고전 일부를 글자 한자 한자씩 번역해 낼 수 있었던 학생이 겨우 서너 명에 지나지 않았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그런 번역이 고대의 정신이란 게 어떤 개념인지, 그리고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고대의 그 낯설음이 어떤 것인지 아주 흐릿하게나마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게 했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 그 나머지 학생들, 학급의 90% 학생들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끝낸다는 사실에도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시험만 통과할 뿐이고 졸업하고 돌아서면 금방 깡그리 잊어버렸다.

 

선생들도 그런 현실에 대한 실망에서인지 학생들이 고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비난했으며 학생들을 대하는 시선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몇 년 뒤 자기 약혼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프카는 "우리에게 『일리아드』를 읽어 주면서 '이런 책을 너희들 같은 인간과 함께 읽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야. 너희들은 이 책을 이해하지 못 해. 이해한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너희들은 아무것도 몰라. 아주 보잘것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인생을 엄청 치열하게 살아야 하거든' 이라고 말했던 선생을 떠올리게 하는군" 이라고 썼다. 카프카는 평생을 자신이 이해의 첫 자락을 들추는 데 필요한 경험이나 지식조차도 갖추지 못했다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133쪽)

 

 

바빌로니아의 탈무드를 보면

 

18세기 하시디즘의 대가였던 베르디체프의 랍비 레비 이츠하크는 바빌로니아의 탈무드를 보면 책의 첫 페이지가 모두 결락되어 꼭 두 번째 페이지부터 읽도록 되어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그 랍비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책을 읽는 사람일지라도 아직 그 책의 첫 페이지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오" 라고 대답했다.(135쪽)

 

 

카프카의 독특한 읽기법

 

라쉬가 죽고 몇 세기가 지나서, 한때 하시디즘이 번창했던, 독일 문화와 체코 문화와 유대 문화가 합류를 이루는 터전 한가운데서, 또 이 지구상에서 유대인의 모든 지혜를 싹 쓸어 버리겠다는 대학살이 닥쳐 오던 전야의 분위기에서 카프카는 독특한 읽기법을 개발했다. 자신에게 단어를 판독하도록 허용하면서도 그 단어를 판독하는 자신의 능력에 의심을 품고, 그런 식으로 책을 이해하려고 끈질기게 매달리면서도 결코 그 책의 환경과 자신의 환경을 혼동하지 않았던 것이다.(136∼137쪽)

 

 

카프카의 작품들이 이해라는 환상을 한 자락 살짝 내비추는 듯하다가 금방 거둬들인다는 점

 

에른스트 파벨은 1984년에 쓴 카프카의 전기 말미에서 "세계 주요 언어권에서 카프카와 그의 작품을 다룬 문헌은 현재 1만 5천 종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현재 카프카의 텍스트는 글자 그대로의 독서만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심리적으로도 읽힌다. 책 읽기야말로 언제나 그 책 읽기를 낳는 텍스트를 수적으로 훨씬 상회한다는 이야기는 좀 케케묵은 관찰일까. 그렇지만 한 독서가가 낙담하는 바로 그 책장에서 또 다른 독서가는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는 독서 행위가 갖는 창조적인 본질이 담겨 있다. 나의 딸 레이철은 『변신』을 열세 살에 읽고는 매우 익살스런 작품이라고 생각했고, 카프카의 친구인 구스타프 야누흐는 그 작품을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우화로 읽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변신』을 '유일한 진짜 볼셰비키주의 작가'의 작품으로,ㅡ 헝가리의 비평가인 기오르기 루카치는 퇴폐적인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보르헤스는 제논의 역설을 재구성한 작품으로 읽었다. 또 프랑스 비평가인 마르트 로베르는 그 작품을 독일 언어를 가장 명징하게 구사한 예로 꼽았으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그것을 청년기 고민에 대한 비유로 읽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카프카 자신의 독서 경험을 자양분으로 해서 태어난 카프카의 작품들이 이해라는 환상을 한 자락 살짝 내비추는 듯하다가 금방 거둬들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카프카의 작품들은 독서가로서의 카프카를 만족시키려다 보니 작가로서의 카프카의 기교를 훼손시켰다는 뜻이다.(140∼141쪽)

 

 

요컨대 나는 우리를 마구 물어뜯고 쿡쿡 찔러대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카프카는 1904년에 친구인 오스카르 폴라크에게 이런 글을 보냈다. "요컨대 나는 우리를 마구 물어뜯고 쿡쿡 찔러대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읽고 있는 책이 머리통을 내리치는 주먹처럼 우리를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면 왜 책 읽는 수고를 하느냐 말야? 자네가 말한 것처럼 책이 우리를 즐겁게 하기 때문일까? 천만에, 우리에게 책이 전혀 없다 해도 아마 그만큼은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책들은 우리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쓸 수 있단 말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마치 우리 자신보다도 더 사랑했던 이의 죽음처럼, 아니면 자살처럼, 혹은 인간 존재와는 아득히 먼 숲속에 버림받았다는 기분마냥 더없이 고통스런 불운으로 와닿는 책들이라구. 책은 우리 내부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깰 수 있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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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호프만의 어느 동시대인은 "선생은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야 할 뿐 아니라 기독교적 미덕과 도덕도 가르쳐야 한다. 선생은 학생들의 영혼에 미덕의 씨앗을 심도록 애써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훗날 인생살이에서 어릴 때 받았던 교육에 따라 처신하기 때문에 이 일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습관은, 특히 훌륭한 습관은 어린 시절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어서 뒷날 아무리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는 법이다"라고 적고 있다.(119쪽)

 

 

독서는 분석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가슴으로도 읽어야 한다고

 

호프만은 이런 텍스트의 문법적 완벽함을 강조하면서도 때때로 학생들에게 독서는 분석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가슴으로도 읽어야 한다고 일깨워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자신이 그런 고대의 텍스트에서 아름다움과 지혜를 발견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도 이미 오래 전 사라진 영혼의 단어에서 선인들이 바로 그 시기 그 장소에 있는 학생들에게 개별적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도록 격려했다. 예컨대 1498년에 학생들이 오비디우스의 『달력』4,5,6권을 공부하고 있을 때, 그리고 일 년 뒤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도입 부분과 『농경시』전체를 베낄 때 이를 칭송하는 단어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격정적인 해석이 여백에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런 어휘를 적을 때는 호프만이 학생들의 필기를 멈추게 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환희와 존경을 나눠 기지도록 했으리라고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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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이나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나는 학창 시절에 읽었던 『고백록』을, 나의 라틴어 선생이 다른 어떤 시리즈보다 좋아했던, 오렌지색 표지에 두께가 얄팍했던 로마 고전판을 지금도 가지고 왔다. 그 책을 손에 쥔 채 여기 이렇게 서 있노라니 언제나 주머니 크기만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품고 다녔던 저 위대한 르네상스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와 어떤 동료 의식까지 느끼게 된다. 『고백록』을 읽을 때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다정스레 속삭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던 그는 인생 말년에 가까워서는 그 성인과 상상 속에서 3번이나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 『나의 비밀』이 그것이다.(86쪽)

 

이 책은 그 먼지까지도 품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어투에는 어떠한 비밀이라도 터놓고 나눠도 좋을 만큼 아주 편안한 친밀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 책을 펼치는 순간 내가 여백에 긁적거려 놓은 낙서가 눈에 들어오면서 사방 벽 색깔이 카르타고의 모랫빛이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 대학의 널찍한 교실이 떠올랐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외우던 선생님의 목소리를 회상하고 있었고, 그리고 정치적 책임과 형이상학의 본질을 놓고 벌이던 우리들의 오만했던 논쟁들(그때가 열네 살이었던가 열다섯, 아니면 열여섯이었을 것이다)도 아련히 되살아났다. 그 책은 아득한 청년기의 기억과 선생님(지금은 작고했음)에 대한 추억, 그 선생님이 우리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들려 주었던 페트라르카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교실, 그리고 폐허가 되었던 카르타고에 건설되었다가 또다시 파괴되고 만 도시에 대한 기억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폐허를 뒤덮고 있는 먼지는 이 책보다 훨씬 더 오래 전의 것인데도 이 책은 그 먼지까지도 품고 있다.(86∼87쪽)

 

그러므로 나는 외롭지 않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처럼 예리한 관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가 그렇게 억누르려고 노력했던) 그 예민한 감수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인생의 후반기를 깨달음과 마음의 혼란이라는 역설적인 상태에서 보냈는데, 그 기간 내내 그는 자신의 감각이 자신에게 가르치는 것에 감탄하면서도 신에게는 육체적 쾌락의 유혹을 뿌리치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간청했다.(87쪽)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유사품에 지나지 않소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루스 사이에 오고 간 고대의 대화는 사랑의 본질에 관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대화가 이리저리 정처 없이 떠돌다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간혹 문학의 역할로 옮아가기도 했다. 언젠가 한번은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루스에게 주사위, 체커, 숫자, 문자, 기하학, 천문학 등을 발명한 이집트의 신(神)인 토트가 이집트 왕을 방문해 이런 발명품을 이집트 국민들에게 넘겨 주자고 제안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왕은 신이 줄 선물 하나하나를 놓고 저마다의 이점과 해악을 따졌는데, 마침내 토트가 문자의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토트는 "여기 이것은 국민들의 기억을 향상시켜 줄 배움의 한 종류요. 내 발명은 기억과 지혜 모두에게 유익한 비결을 제공할 것이오" 라고 설명했다. 이 말에도 왕은 전혀 감명을 받지 않았다. 그는 신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신하들이 이걸 배운다면 그들의 영혼에 망각할 수 없는 무언가를 심는 결과가 되오. 그 사람들이 앞으로는 쓰여진 것에만 의존하려 들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더 이상 기억 속에서 무엇인가를 더듬어 내려 하지 않고 눈에 드러나는 기호에만 의존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기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거요. 당신이 발명한 것은 기억을 위한 비법이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한 비결이오. 그리고 그대가 그대의 신봉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유사품에 지나지 않소. 왜냐하면 그대의 신봉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는 않고 말만으로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오. 신봉자들 대부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할 텐데도 말이오. 그리고 신봉자들은 지혜가 아니라 지혜에 대한 자만심만 커질 것이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짐만 될 것이오."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루스에게 "독서가라면 쓰여진 글은 누군가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만큼 순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89∼90쪽)

 

단어는 매우 지적인 듯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추론에 설득당한 파이드루스는 그 뜻에 동의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말을 이었다. "파이드루스, 글쓰기가 그림 그리기와 비슷하다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사실 때문이라는 점을 자네도 잘 알고 있어. 화가의 작품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우리 앞에 서 있지. 그렇지만 한번 그 그림에게 질문을 던져 봐. 그래도 그림들은 엄숙한 침묵을 지킬 뿐이야. 글로 쓰여진 단어들도 마찬가지지. 단어는 마치 매우 지적인 듯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하지만, 더 많은 것을 알려는 욕망에서 뭘 말하고 있는지 글에게 물어 보면 되풀이해서, 아니 영원히 똑같은 것만을 이야기할 뿐이야."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읽혀지는 텍스트는 기호와 의미가 당혹스러울 만큼 정확하게 포개지는 단어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해석, 주석, 주해, 요지 설명, 연상, 반론, 그리고 상징적·우화적 의미 등은 텍스트 자체에서가 아니라 독서가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텍스트는 화가에 의해 그려진 그림처럼 '아테네의 달'만 말할 뿐이다. 그 달의 상앗빛 얼굴과 시커먼 하늘, 소크라테스가 한때 걷기도 했던 길에 널브러진 고대의 폐허 따위로 장식하는 것은 독서가의 몫이다.(90∼91쪽)

 

구두 강의의 거장

 

소크라테스의 시대만 해도 글로 쓰여진 텍스트는 보편적인 도구가 아니었다. B.C. 5세기 아테네에는 상당수의 책이 존재했고 서적 교역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개인적인 독서 관행은 적어도 한 세기 뒤 자신만이 이용할 목적으로 귀중한 필사본들을 수집했던 최초의 독서가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충분히 확립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배움을 얻고 그렇게 배운 것을 전파하는 수단은 대화였으며, 소크라테스도 모세, 부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구두 강의의 거장에 속했다.(92쪽)

 

끼르륵 끼르륵 낮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전자 미로

 

내 경우를 말하면, 책을 읽다가 남기게 되는 해설이나 메모는 타인의 기억력을 대신해 주는 워드 프로세서에 보관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만의 기억의 궁전을 떠돌며 인용구나 이름을 끌어낼 수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처럼, 나도 화면 뒤편에서 끼르륵 끼르륵 낮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전자 미로로 들어간다. 워드 프로세서의 기억력의 도움으로 나는 저 유명한 나의 선조들보다 더 정확하게(정확성이 중요하다면) 그리고 더 많은 양을(양이 가치있는 것이라면) 기억할 수 있지만, 수많은 해설 가운데서 중요도를 판단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일은 여전히 내 몫으로 남아 있다.(95쪽)

 

페트라르카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페트라르카도 젊은 시절에 꽤 혼란스런 삶을 살았다. 단테의 친구였던 그의 아버지는 단테처럼 자신의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해 페트라르카가 태어나자마자 가족들을 아비뇽에 있던 클레멘스 5세 교황의 궁정으로 옮겨야 했다. 페트라르카는 몽펠리에와 볼로냐의 대학들을 다녔으며 아버지가 죽고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는 다시 아비뇽에 정착했다. 이때 그는 이미 돈 많은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부(富)도 젊음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방탕한 생활 몇 년 만에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 대부분을 탕진하고 어느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서 발견한 키케로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책들은 새로 서품을 받은 성직자의 말에 잠재해 있던 문학 취미를 일깨워 주었고, 그는 여생을 걸신들린 듯이 책을 읽어댔다.

 

그는 30대 중반에 두 개의 작품 『저명한 남자에 대하여』와 시 『아프리카』를 창작하면서 신중하게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들 작품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작가들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고 실토했으며, 이 작품으로 그는 로마의 국민과 상원으로부터 월계관을 얻는 영광을 누렸다.(96쪽)

 

책이 손을 떠나자마자 그 책에 대해 느꼈던 모든 감정도 눈 녹듯 사리지고 마는걸요

 

『나의 비밀』에서 페트라르카(그의 기독교 이름인 프란체스코로)와 아우쿠스티누스는 '진리 부인'이 뚫어져라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 정원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프란체스코가 자신은 도시의 공허한 번잡스러움에 지쳐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란체스코의 삶에 대해, 시인인 프란체스코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 가운데 한 권이긴 하지만 아직 프란체스코가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할지 방법을 모르고 있는 책과 같다고 대답하면서 그에게 미쳐 버릴 만큼 성가시게 구는 군중을 주제로 한 텍스트를 몇 권 상기시킨다. 그 중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것도 들어 있다. "이런 책들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묻는다. 그 질문에 프란체스코는 책을 읽을 때는 매우 유익하지만 "책이 손을 떠나자마자 그 책에 대해 느꼈던 모든 감정도 눈 녹듯 사리지고 마는걸요" 라고 대답한다.

 

아우구스티누스 : 그런 식의 독서는 지금 매우 보편적이라네. 학식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으니까. ······ 하지만 자네가 적절한 여백에 약간의 메모를 간결하게 적어 놓으면 아마 독서의 열매를 쉽게 즐길 수 있을 걸세.

 

프란체스코 : 어떤 종류의 메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우구스티누스 : 책을 읽다가 자네의 영혼을 뒤흔들거나 유쾌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문장을 마주칠 때마다 자네의 지적 능력만을 믿지 말고 억지로라도 그것을 외우도록 노력해 보게나.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이 명상하여 친숙한 것으로 만들어 보라구. 그러면 어쩌다 고통스런 일이 닥치더라도 자네는 고통을 치유할 문장이 마음 속에 새겨진 것처럼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걸세. 자네에게 유익할 것 같은 어떤 문장이든 접하게 되면 분명히 표시해 두게. 그렇게 하면 그 표시는 자네의 기억력에서 석회의 역할을 맡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멀리 달아나고 말 걸세.

  

(페트라르카의 상상력으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암시하는 독서법은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다. 사고를 위한 버팀목으로 책을 이용하지도 않고, 또 사람들이 현인의 권위를 믿는 것처럼 책을 믿지도 않으면서, 책에서 사고와 문장과 이미지를 취한 뒤에 그것을, 오래 전부터 머리 속에 담고 있던 다른 텍스트로부터 정제해 낸 또 다른 사고나 이미지와 연결시키고, 거기다가 독서가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곁들여서 사실상 전혀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해 내는 독서 방법이었다.(97∼98쪽)

 

다른 독서 경험을 기억해 냄으로써만

 

페트라르카의 말을 빌리면 이런 독서법도 그 자신이 '신성한 진실'이라 부르는 그 어떤 것을 고려하다 우연히 터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신성한 진실'이란 책장의 유혹에도 전혀 흔들임 없이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해석해 내기 위해 독서가들이 꼭 갖춰야 하는 감각이었다. 어떤 텍스트를 평가하는 데는 심지어 작가의 의도마저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런 작업은 독서가 자신이 다른 독서 경험을 기억해 냄으로써만 가능하며, 그런 기억을 통해 작가가 책장에 담은 기억이 자연스레 흘러 나온다고 페트라르카는 암시한다.(98∼99쪽)

 

우리가 결코 똑같은 책으로, 아니면 똑같은 페이지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유

 

수많은 편지를 남긴 페트라르카는 어느 편지에서 "만약 '신성한 진실'이라는 빛이 독서가의 머리 위를 비추면서 어떤 것은 읽고 어떤 것은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독서는 좀처럼 위험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라고 쓰고 있다. (페트라르카의 심상을 비추는) 이 빛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비출 뿐 아니라 인생 여정의 단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우리는 결코 똑같은 책으로, 아니면 똑같은 페이지로 되돌아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다양한 빛에 싸여서 우리도 변하고 책도 변하고, 그리고 우리의 기억도 밝았다가 쇠해졌다가 또다시 밝아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배우고 까먹고 또 기억하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도 한다.(99쪽)

 

마치 호수의 물 위에 쓰여진 것처럼

 

읽혀지고 기억되는 하나의 텍스트는, 구원이라 이름할 수 있는 그런 반복 독서에서는 마치 내가 오래 전에 기억했던 그 시에 등장하는 얼어붙은 호수-대지만큼이나 단단해서 독서가의 횡단을 받쳐 줄 수 있다-같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텍스트의 유일한 존재의 터가 마음 속이기 때문에 글자들은 마치 호수의 물 위에 쓰여진 것처럼 늘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다.(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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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고백록』의 어느 중요한 단락에서 두 가지 방식의 독서법-소리를 내는 방법과 소리를 내지 않는 방법-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난 나머지, 또 자신의 과거 죄에 분노를 느끼면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그때까지 자신의 여름 정원에서 (큰 소리로) 함께 책을 읽고 있던 친구 알리피우스 곁을 빠져 나와 무화과 나무 밑으로 몸을 던져 흐느껴 울었다. 바로 그때 근처의 어느 집에서 어린이(소년인지 소녀인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노래의 후렴이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였다. 그 노랫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믿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알리피우스가 아직도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곳으로 다시 달려가 미처 다 읽지 못했던 바울의 『사도행전』한 권을 집어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그 책을 집어 펼친 뒤 시선이 가장 먼저 닿은 첫 부분을 소리내지 않고 읽었다"고 말한다. 그가 소리내지 않고 읽은 단락은 로마서 13장으로, "육신을 위해 양식을 준비하지 말고 그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갑옷처럼' 걸쳐라"라는 훈계였다. 혼비백산한 그는 문장의 끝에 이른다. '믿음의 빛'이 그의 가슴에 충만하고 '회의의 어둠'은 말끔히 걷힌다.(69쪽)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의 기호'

 

아우구스티누스는 시론과 산문의 운율에 능통한 수사학 교수로ㅡ 또 그리스어를 혐오하면서도 라틴어는 지독히 사랑했던 삭자로서 글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그저 기쁨을 위해 소리내어 읽는 습관-대부분의 독서가에게 공통적임-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그는 '심지어 눈앞에 없는 사람들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창조된' 문자들은 '소리의 기호'이고 더 나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의 기호'라는 것을 알았다.(70쪽)

 

그런 식의 독서 관행이 그대로 살아 숨쉴지도 모른다

 

중세 시대로 한참 들어와서도 작가들은 자신의 독자들이 단순히 텍스트를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듣기도 할 것이라 가정했다. 심지어 글을 창작할 때도 작가들은 혼자서 소리내어 읽어 보곤 했다. 상대적으로 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글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대중 앞에서의 독서가 보편적이었고, 그래서 중세의 텍스트들은 거듭해서 청중에게 '이야기에 귀기울여 달라고' 간청한다. 우리가 '아무개로부터 소식을 들었다'(I've heard from So-and-so. 편지를 받았다는 뜻임)거나 '아무개가 말하기를'(So-and-so says. 아무개가 썼다는 뜻임)이라거나 '이 텍스트는 훌륭하게 들리지 않아'(This text doesn't sound right. 잘 쓰여지지 않았다는 뜻임)라는 표현에서처럼, 우리 시대의 일부 관용구에서도 그런 식의 독서 관행이 그대로 살아 숨쉴지도 모른다.(74쪽)

 

지금 눈앞에 없는 사람들의 말까지도

 

구두점이 아직까진 믿을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사용 체계가 세워진 건 아니지만 이런 초보적인 아이디어들은 소리 없는 독서의 발전을 부추겼다. 6세기 말경에 시리아의 성 아이잭은 그런 방법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침묵을 훈련한다. 그러면 나의 독서와 기도의 한줄 한줄은 가슴을 기쁨으로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런 구절들을 이해할 때의 즐거움이 마치 꿈속에서처럼 내 혀를 침묵케 할 때면 나는 내 감각과 사고가 한 점으로 집중되는 경지로 들어간다. 그리고 침묵이 길어지고 뒤죽박죽이던 기억이 가슴 속에서 차분히 정리될 때면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생각으로부터 끝없는 기쁨의 파도가 여울져 밀려와 갑자기 내 가슴을 환희로 채운다." 그리고 7세기 중반, 세비야의 신학자인 이시도루스는 소리 없는 독서에 매우 익숙했기 때문에 묵독에 대해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읽은 것을 곰곰 반추하면서, 읽은 내용들이 기억에서 달아나지 않게 하는 책 읽기"의 한 방법이라고 칭송할 수 있었다. 자기보다 앞섰던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이시도루스는 독서야말로 시공을 초월해서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믿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와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어원학』에서 "문자들은 지금 눈앞에 없는 사람들의 말까지도 소리 없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힘을 지닌다"라고 쓰고 있다. 이시도루스의 문자들은 음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78쪽)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어느 이름 모를 필사자는 8세기 어느 때인가 필사를 끝내면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손가락 3개는 열심히 옮겨 적고, 두 눈은 끊임없이 보고, 혓바닥은 말을 하고, 온몸은 산고(産苦)를 치른다"고 적고 있다. 필사자들은 일을 할 때 자신이 옮겨 적는 단어를 하나하나 발음함으로써 혓바닥으로 말을 했던 것이다.(79쪽)

 

묵독

 

묵독은 책과 독서가 사이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는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한 표현대로 "정신을 상쾌하게" 만들었다.(80쪽)

 

훗날 프로테스탄트로 알려질 사람들

 

1517년 10월 31일, 어느 수도사가 성경을 은밀히 연구한 끝에 돈으로 구입한 믿음을 몰아내고 성스런 신의 은총을 지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급기야 그는 비텐베르크의 만성(萬聖) 교회 문에다가 탐욕스런 관행-면죄부 판매-과 성직자들의 권력 남용에 반대하여 95개 항목의 주장을 내걸었다. 이 행동으로 마틴 루터는 제국의 눈에는 범법자로, 교황의 눈에는 배교자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1529년 신성 로마 황제인 카를 5세가 루터의 추종자들에게 그때까지 허용했던 권리를 취소해 버리자 독일의 14개 자유 도시들은 루터주의를 신봉하던 왕자 6명과 함께 황제의 결정에 반대하는 항의문으로 맞섰다. "신의 명예와 구원, 그리고 우리 영혼의 영생에 관한 한 우리 모두 신 앞에 일어서서 각자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며 항의자들, 다시 말해 훗날 프로테스탄트로 알려질 사람들은 황제의 권위에 대항했다. 그보다 10년 앞서서 로마의 신학자인 실베스테르 프리에리아스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책은 오로지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는 신비로움을 간직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우리 인간에게는 증인이나 중개자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신의 말씀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82∼83쪽)

 

책과의 의사 소통은 두 뺨의 홍조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보내지는 법

 

수 세기가 흐른 뒤, 그 옛날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이 지구의 끝으로 비쳤을 대양 건너 신대륙에서, 그런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신앙의 빚을 졌다고 고백하는 랄프 왈도 에머슨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렇게도 놀라게 만들었던 독서법을 십분 활용했다. 오로지 사회적 책임감 때문에 참석하게 되는 지루하고도 따분하기 짝이 없는 교회 설교 시간에 그는 파스칼의 『팡세』를 소리 없이 읽었다. 그리고 밤에는 콘코드의 차가운 방에서 "턱까지 담요을 바싹 당겨 쓴 채" 플라톤의 『대화』를 읽었다(어느 역사가는 "에머슨은 그날 이후로 플라톤 하면 그 담요 냄새부터 떠올렸다"고 적고 있다). 비록 에머슨은 이 세상에는 책이 너무 많아 모조리 다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독서가들끼리 요점을 서로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책을 읽는 행위만은 개인적이고 은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우파니샤드』와 『팡세』를 포함하는 '성스런' 텍스트의 목록을 만들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이런 모든 책들은 보편적 양심의 장엄한 표현이며 올해의 연감이나 오늘의 신문보다도 더 우리의 일상 목적에 부합된다. 그렇지만 그런 책들은 밀실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읽어야 제격이다. 책과의 의사 소통은 입술과 혀 끝이 아니라 두 뺨의 홍조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보내지는 법이다." 침묵 속에서.(83∼84쪽)

 

한 무리의 묵독 독서가들

 

384년 그날 오후 성 암브로시우스의 독서를 관찰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 앞에 어떤 책이 놓여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암브로시우스가 귀찮은 방문객을 피함과 동시에 앞으로 있을 강의를 위해 목소리를 아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무리의 묵독 독서가들을, 그 후 많은 세기가 흘러 루터를, 칼뱅을, 에머슨을, 그리고 그를 읽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까지 포함하는 소리 없는 독서가들의 무리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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