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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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피지 쪽들에 호메로스가 다 담기다니!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그 많은 모험이

프리아모스 왕국의 적이었던 오뒷세우스 말야!

그 모든 것이 양피 한 조각에 갇혀 버리다니

겨우 자그마한 몇 장으로 접은 양피 조각에!

 - 마르티알리스

 

 * * *

 

만약에 인류의 역사에서 호메로스라는 시인이 없었더라면 세상은 과연 지금과는 얼마만큼 달라졌을까. 단 한 사람의 시인을 두고, 그의 존재 여부에 따라 세상이 얼마나 더 달라졌을지를 상상해 보는 일이 과연 온당키나 한 일일까. 비록 내가 이 시인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들이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이 인물에 대해서만큼은 내가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아낌없이 다 바치고 싶다. 그만큼 나는 그로부터 만들어진 단 두 편의 서사시가 후세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이 견줄 데 없이 심원하고도 광대하다고 믿는다.

 

그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라는 불후의 작품을 남긴 덕분에, 우리 인류의 삶은 그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빨리 앞당기지 못했을 '인간다운 세상'에 보다 일찍 살게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가 지어낸 몹시도 훌륭한 두 가지 이야기 덕분에 우리 인류는 야만으로부터 좀 더 일찍 고상한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도 여겨지고, 또 그가 지어낸 『오뒷세이아』라는 매혹적인 모험 이야기 덕분에 우리 인류는 훨씬 더 일찍부터 미지의 세계를 향해 좀 더 두려움없이 용기있게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만큼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무수한 문학작품과 예술작품에 놀라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끊임없이 지속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창조해낸 숱한 이야기들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또한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지금까지 지구 위에서 창조되었던 온갖 그림들과 조각들, 혹은 음악이나 연극작품들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줄어들었음이 틀림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가 쓴 불멸의 두 작품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주요한 문학작품들이 얼마나 많았을지를 헤아려 보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마는, 그래도 나는 내가 읽었던 몇몇 작품들만이라도 당장 손에 꼽아 보고 싶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들은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들의 작품들이다. 그 세 사람의 천재 시인들이 쏟아낸 수많은 걸작들 가운데 상당수는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창조해낸 것들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무려 8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로마 최고의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의 걸작 서사시 『아이네이스』로 이어졌으며, 거기서 또다시 천 년 이상의 세월을 건너뛰고 나면 단테의『신곡』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불후의 명성을 얻은 문학작품들 말고도 그 사이사이에 호메로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가와 문학작품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내가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작가들만 하더라도 몽테뉴, 셰익스피어, 괴테, 헨리 데이빗 소로우 등을 아주 쉽게 예로 들 수 있다.(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5년 동안 독문학을 공부했던 이 책의 역자 천병희 선생님은 <옮긴이 서문>에서 '괴테의 소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가 얼마나 호메로스에 심취해 있었는지 엿볼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한다.) 

 

호메로스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시도는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추앙받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와 영국의 계관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율리시스』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심지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니메이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까지도 이어졌다.

 

흔히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는 서양 최초의 문학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 최초의 두 작품이 그 이후의 모든 유럽 문학의 '근원이자 원천'이 되었으며, 새로운 사상으로 향하는 '드넓은 관문'이 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다. 최근에 들어 서양 철학의 원천을 호메로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연구도 드물지 않다고 하는데,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목숨이 걸린 재판에서 『일리아스』의 구절을 인용한 점이나, 심지어 플라톤이 '호메로스를 능가하기 위해' 애쓴 결과물이 대화편이라는 주장이 있을 정도이니 그런 연구 성과 또한 조금도 이상할 이유가 없을 듯싶다.

    

 

경쟁자와 싸우듯이 호메로스와 상을 다툰 플라톤

헤로도토스만이 가장 호메로스적이었을까요? 천만에 그 이전에 스테시코로스와 아르킬로코스가 있었고 어느 누구보다도 플라톤이 있었소. 그는 호메로스라는 샘으로부터 그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여 수많은 실개천을 냈던 것이오. 나는 그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겠지요. 암모니오스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들을 간추려 기록해두지 않았더라면 말이오. 그런 것은 표절이 아니오. 그것은 조각이나 그 밖에 다른 예술에 의하여 아름다운 형상들을 재현하는 것과도 같소. 그리고 생각건대, 플라톤은 마치 젊은 전사가 만인이 경탄하는 경쟁자와 싸우듯이 호메로스와, 제우스 신께 맹세코, 온 마음을 다해 상을 다투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철학 이론들을 그렇게까지 꽃피우지 못했을 것이고, 시의 주제와 언어에 그렇게 자주 함께 승선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는 아마도 경쟁심에서 지나치게 투지에 넘쳐 있지만, 그런 다툼은 결코 무익한 것이 아니었소.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그런 불화는 인간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이오. 그리고 선배들에게 지더라도 그것이 불명예가 아닌 곳에서는 명성을 위한 투쟁과 승리의 영관(榮冠)은 정말이지 그 무엇보다도 다투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숭고에 관하여〉중에서

 

 

그러니 입심 좋은 몽테뉴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특출한 인물을 골라 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탁월한 인물' 가운데 첫 번째로 호메로스를 꼽는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
아리스토텔레스나 바로가 그만큼 박식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니고, 예술에서 베르길리우스가 그에게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이 판단은 그들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 둔다. 한편밖에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단지 내가 아는 한도로 시신(詩神)들까지도 이 로마 시인보다 뛰어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단에서도 베르길리우스가 그 재질을 주로 호메로스에게서 배워 온 것이었으며, 이 시인이 그의 안내자이며 스승이었고, 《일리아드》의 단 한 줄이 저 위대하고 거룩한 《아에네이스》에 본체와 재료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고찰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사실 나는 자기 권위로 많은 신들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을 믿게 한 그가, 자신이 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자주 이상하게 여겨 왔다. 앞을 보지 못하며 궁핍한 몸으로 학문이 아직 규칙과 확실한 관찰로 사물들을 기록해 놓기도 전에, 그는 이런 일을 모두 알고 있어서, 다음에 정치를 세우고 전쟁을 지휘하고, 어느 학파에 속하건 종교나 철학에 관한 것을 쓰고, 기술을 다루는 일에 간섭하는 자들을 누구나 다 그를 모든 사물들에 관한 지식의 지극히 완벽한 스승과 같이 보며, 그의 작품을 모든 종류의 능력을 기르는 기초 터전 같이 이용했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받는 호메로스의 작품을 나는 왜 이토록 뒤늦게 접하게 되었던 것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호메로스의 작품을 꼭 그렇게 늦게 읽은 것만은 아니었다.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온갖 영웅들이 등장하는 그 유명한 이야기를 은연중에 들어서 알게 된 사람들 가운데 그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고 싶어하지 않을 독자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서 나도 대학 입시를 막 끝낸 이후 서울로 상경하기 전까지의 몇 달 동안에 대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붙잡고 읽기 시작했다. 입시 공부에 여념이 없을 때조차,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도서관에서 여러 권으로 이어지는 '완역판'『삼국지』를 대출해서 읽으며, '수학의 정석'에 담긴 오묘한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는 영웅호걸들이 말을 타고 내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무용담이 수천 배는 더 재미있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기에 까마득한 옛날에 트로이아의 벌판에서 벌어진 서양 고대의 전쟁을 둘러싼 영웅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작품은 삼국지와는 전혀 다른 낯선 고대의 '서사시'였고, 내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무수한 지명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는 데다가, 수많은 신들과 인간들이 오래 전부터 복잡한 사건들로 깊숙하게 얽혀 있어서, 마치 오랜 세월 동안 같은 나라나 도시에서 살고 있어서 모두들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들을 나만 홀로 까맣게 모르는 나그네가 된 심정과도 닮은 당혹감을 그 책을 읽는 내내 좀처럼 떨치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때만 하더라도 나의 독서 경험은 정말 보잘 것 없었을 테고, 호메로스의 걸작 서사시에 대해서도 충분히 그 매력을 깨닫지 못했을 게 틀림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애를 쓰며 꼼꼼하게 그의 서사시를 끝까지 다 읽었다 하더라도, 그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느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 갑자기 발을 내디딘 어느 이방인처럼 느껴졌고, 이국의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에는 몹시 흥미를 느끼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말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아 힘겨워 하는 고달픈 여행자와 다름없는 신세였던 것이다. 
그때 내가 겪었던 일들은 어쩌면 어느 책에서 만났던 하버드의 문학부 졸업생이 학창 시절의 '고전 강의'를 회고하면서 남긴 다음과 같은 모습과 얼마간 똑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일리아스』가 무슨 늪지대라도 되는 양 여기저기 발이 푹푹 빠지면서 호메로스를 그저 읽어내는 게 과제였다. ······ 이 불후의 서사시가 담고 있는 영광과 찬란함과 부드러움과 매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었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Great Books』을 쓴 데이비드 덴비David Denby(1943∼ )는 "고전은 사람을 기죽게 하는 점령군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다시 또 독자와 싸우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들의 왕국"이라고 말했는데, 어쩌면 내가 그 당시 아무런 무장도 갖추지 않고 너무 일찍 '야수들의 왕국'에 발을 들여놓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나는 그 이후로 호메로스가 꾸며낸 이야기 뿐만 아니라 호메로스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에 대해 쓴 이야기들을 여러 책들 속에서 적잖이 마주쳤지만 정작 그의 두 작품을 다시 읽을 시간은 좀처럼 할애하지 못했다. 그건 아마도 얼마쯤은 다음의 두 가지 생각에다 핑계를 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하나는 아마도 '호메로스의 작품은 이미 꽤 오래 전에 깔끔하게 다 읽었거든...'과 같은 얄팍한 정복감이었을 테고, 또다른 하나는 아마 지금까지도 여전히 '야수들의 왕국'에 섣불리 들어갔다가는 아직도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릴 것 같은 일말의 두려움이나 걱정 같은 감정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만큼 흥미진진한 모험담도 드물지 싶고,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특별히 좋아했던 이야기가 바로 '오뒷세이아'를 닮은, 주인공이 낯선 곳을 떠돌며 수많은 모험과 고난을 겪는 바로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어쩌면 내가 어릴 때 완전히 매료되며 읽었던 많은 이야기들, 가령 <보물섬>, <15 소년 표류기>, <80일간의 세계 일주>, <걸리버 여행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알라딘의 요술 램프>, <신밧드의 모험>, <정글북>, <톰 소여의 모험>, <로빈슨 크루소> 등등이 모두 『오뒷세이아』의 머나먼 자식들인지도 모르겠다.

제법 나이가 들어서 이번에야 다시 읽은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그 둘 중에서도 특히『오뒷세이아』는 까마득한 옛날에 그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도 미묘한 이야기로 내게 다가왔다. 그건 아마 무엇보다도 내가 그저 '옛날의 내가 아니기 때문'임에서 비롯되는 것임이 틀림없다.

우선, 내가 처음으로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두발의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던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머리카락조차 제대로 기르지 못한 더벅머리 총각이었으나 어느새 나도 이젠 세상 경험을 적잖이 겪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오뒷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에) 어엿한 성년으로 자라났듯이 내 자식들도 어느새 모두 스무 살을 넘긴 나이가 되었을 만큼 '장성한 자식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니 오뒷세우스가 '가족'과 '고향'을 애타게 그리는 이 이야기가 단지 애송이에 불과했던 그 까마득한 옛날보다 얼마만큼 더 달리 읽혀지겠는가.

 

그 다음으로, 나는 어쨌든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제대로 읽기 위해 필요한 '여러 다양한 사전 지식들'을 예전보다는 훨씬 더 많이 부지불식간에 자연스럽게 습득했으리라 스스로 여긴다. 그래서 내가 경험을 통해 더욱 뚜렷이 알게 된 일이지만, 서양의 다양한 고전들 가운데 특히 '호메로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들의 작품을 어느 정도 미리 읽고 나면 확실히 '늪지대'를 덜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옛날에 늪지대로만 느꼈던 곳들이 어느새 바닥이 단단하게 굳어 있는 땅으로 변했음을 느끼거나 혹은 친숙한 사람들조차 가끔씩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광장처럼 변해 있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그런 작품들 가운데 호메로스를 다시 만났을 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작품들은 단연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오늘날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총 33편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천병희 선생님의 각별한 노고에 힘입어 (전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원전 번역을 다 갖추게 되었고, 그 덕분에 나도 그 작품들을 오롯이 우리말로 다 읽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오뒷세우스가 겪는 모험들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들이 꽤나 많으며,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한 영웅들 가운데 끝까지 살아남은 인물들 중에서는 그리스군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의 두 형제를 빼고는 가장 우뚝했던 그가, 전쟁을 끝낸 직후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고향 이타케로 돌아오면서 겪게 되는 놀랍고도 눈물겨운 이야기들은 그 하나 하나를 따로 떼어놓아도 훌륭한 '모험 단편'처럼 다채롭고 흥미롭기 그지 없다.

그 이야기들을 굳이 오뒷세우스가 겪은 시간대별로 여기서 다시 길게 나열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트라키아 지방 이스마로스라는 도시에서의 해적질, 그 열매를 먹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잊어버린다는 '로토스를 먹는 종족'을 만난 이야기, 외눈박이 괴물들인 퀴클롭스 종족들이 사는 섬에서 폴뤼페모스를 눈 멀게 하고 도망치는 이야기, 바람들의 왕 아이올로스가 사는 아이올리에 섬의 이야기, 식인 거한들의 나라 라이스트뤼고네스족을 만난 이야기, 마녀 키르케의 섬에서 1년 동안 지낸 이야기, 오뒷세우스가 저승으로 내려가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아가멤논과 아이아스 등 트로이아 전쟁에서 함께 싸웠던 '이미 죽은' 영웅들과 만난 이야기, '세이렌 자매들의 섬'에서 밀랍으로 귀를 막으며 노래의 유혹을 견디는 이야기, 떠다니는 플랑크타이 바위들을 피해 괴물 스퀼라가 살고 있는 동굴 옆으로 배를 모는 이야기, 헬리오스의 수많은 암소들과 양들이 있는 트리나키에 섬에서 도망치다가 전우들을 모두 잃는 이야기, 머리를 곱게 땋은 칼륍소에게 붙잡혀 7년 동안 동굴에 갇혀 사는 이야기, 뗏목을 타고 열여드레 동안 항해한 끝에 
나우시카아 공주가 살고 있는 파이아케스족의 나라 스케리아 섬에 당도하여 알키노오스의 궁정에 머문 이야기, 거기서 다시 고향 이타케로 돌아와 '귀향자' 오뒷세우스가 '고향에서 겪는 모험' 이야기 등.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가 무려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은 단지 '기가 막힌 이야기들을 기가 막힌 솜씨로 풀어냈기 때문에' 불후의 걸작으로 떠받들려지는 것일까. 물론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사실이 변함이 없다는 점은 월트 디즈니를 오랫동안 경영했던 마이크 아이스너의 다음 이야기만 들어보아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호머(Homer), 초서(Chaucer), 그리고 세익스피어(Shakespeare) 시대로 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전달 매체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이었다."

 

그런데 호메로스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우리가 단순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스토리'와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들을 훨씬 더 뛰어넘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사실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훨씬 더 방대한 규모의 이야기인 서사시권(敍事詩圈 epikoskyklos)이라는 더 큰 전체의 일부로서, 작시(作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을 무엇보다도 '플롯의 통일'에서 찾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 점에 대해서는 호메로스를 따를 시인이 없다'는 것이며, 트로이아 서사시권 가운데 호메로스의 두 작품 말고는 다른 작품들이 아예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만큼 호메로스가 지어낸 두 이야기가 무엇보다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이 특별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통해 '호메로스의 탁월한 점'을 거듭 강조하는데,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그가 왜 10년 동안 벌어진 '트로이아 전쟁' 가운데 단 며칠 동안의 사건만을 다뤘으면서도, 『일리아스』가 영원불멸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아울러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에 '트로이아 전쟁'과 '고대 그리스 비극'과의 관계도 조금 더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호메로스는 앞서도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이 점에서도 다른 시인들보다 탁월한 것 같다. 그는 트로이아 전쟁이 시초와 종말을 가진 전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부 다 취급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필시 그 스토리가 너무 방대하여 통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든지, 혹은 그 길이를 제한한다 하더라도 그 속의 사건이 다양해서 너무 복잡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전체에서 한 부분만 취하고, 그 외 많은 사건은 삽화로 이용하고 있다. 예컨데 「함선 목록」이나 다른 사건은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덜기 위하여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시인들은 한 사람 또는 한 시기를 취급한다지만, 그들이 취급하는 행위는 하나라 하더라도 그 속에 여러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퀴프리아』와 『소(小) 일리아스』의 작가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 결과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로부터는 각각 한 편, 또는 많아야 두 편의 비극이 만들어질 수 있는 데 비하여 『퀴프리아』로부터는 다수의 비극이,  그리고 『소일리아스』로부터는 8편 이상의 비극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무구 재판』, 『필록테테스』, 『네옵톨레모스』, 『에우뤼필로스』, 『걸인 오뒷세우스』, 『라케다이몬의 여인들』, 『일리오스의 함락』, 『출범(出帆)』, 『시논』및 『트로이아의 여인들』이 그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제23장

 


흔히들 말하기를, 『일리아스』는 호메로스의 재능이 절정이 달했을 때 쓴 작품이어서, 작품 전체를 극적인 행동과 투쟁으로 가득 채운 반면, 『오뒷세이아』는 호메로스가 노년에 그 작품을 쓴 것으로 추정하며, 그런 특징 때문에 작품의 대부분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사람들은『오뒷세이아』에서의 호메로스를 '크기는 그대로지만 힘이 없는 지는 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하며, '
이미 『일리아스』의 노래들에서와 같은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니, 그곳에는 결코 범용으로 떨어지지 않는 숭고도 곤두박질치며 쏟아지는 격정도, 다재다능함도, 현실성도, 일상생활에서 끌어온 풍부한 심상도 없고, 그것은 마치 오케아노스가 자신 속으로 도로 흘러들어 자신의 경계 안에 조용히 머무는 것과도 같다'고도 말한다.

 

이런 지적은 『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의 지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들린다.

 

『일리아스』를 읽고 나서 『오디세이아』를 집어 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작품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조차도 다르게 들린다. 『일리아스』에서는 무기의 충돌로 시끄러운 쇳소리가 나는 데 비해, 『오디세이아』에서는 수많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바다의 속삭임 또는 노호努號가 들려온다.

하지만 두 작품 사이의 차이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일리아스』는 비극적이다. 그것은 서구 문학에서 되풀이 되어 온 주제, 우리의 마음속에서 늘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아무리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일지라도, 불변의 운명이 지배하는 세상과 맞서서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다는 주제이다. 하지만 『오디세이아』는 비극적이지 않다. 이 작품은 우리의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을 강조한다. 그 주제는 죽음과 맞선 용기가 아니라, 고난에 맞서는 지성이다. 그것은 지성의 힘이라는 또 다른 주제를 천명하는데, 우리 현대인은 이 주제에 즉각 반응한다. 오디세우스는 용감하지만 그의 영웅적 행위는 지성에서 나온다.


 

『오뒷세이아』를 읽으면서 새삼 '고전의 매력'을 실감하게 된다. 예전에 내가 스무 살을 갓 바라볼 때 읽었던 오뒷세우스의 모험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20년 동안이나 집을 비운 아버지를 기다리는 청년 텔레마코스'의 입장에서 많이 생각했을 듯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읽어 보니 비로소 나이를 먹은 오뒷세우스의 마음에 훨씬 더 쉬이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귀향'을 애타게 그리는 오뒷세우스의 간절한 처지와 고향에 남겨진 연로한 아버지와 훌쩍 나이가 든 아내와 어느덧 어른이 다 되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결코 작품 속의 이야기로만 들리지도 않는다.

지략이 뛰어나고, 꾀도 많고, 참을성도 많은 오디세우스는 천신만고 끝에 결국 '귀향'에 성공할 뿐만 아니라, 귀국하자마자 왕비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아가멤논의 사례를 거울 삼아, 온갖 세심한 주의와 노력을 다한 끝에 '20년 동안이나 수절하며 기다리는 페넬로페'를 괴롭히며 오뒷세우스 집안의 재산을 일삼아 축내던 악랄한 구혼자들을 모조리 물리친다. 그런 주인공 오뒷세우스를 통해 호메로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아닌 '수많은 도시를 보고,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된 영웅'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시인 호메로스가 무사(Mousa) 여신에게 드리는 간청이자, 기나긴『오뒷세이아』의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시를 보았고 그들의 마음을 알았으며

바다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전우들을 귀향시키려다

마음속으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못된 짓으로 말미암아

파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 이 일들에 관해 아무 대목이든,

여신이여, 제우스의 따님이여, 우리에게도 들려주소서!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제1권 제1∼10행

 

 

마샤 콜리시(Marcia Colish)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교도의 습관은 '그냥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에서' 아무 책이나 집어들어 펼쳤다고 한다. 그런데 그 습관은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읽던 이교도들의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백록』이라는 저서를 남긴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날 정원에서 독서하는 도중 아이들의 노래를 들었는데, 그가 실제로 들은 노랫말은 "집어들고 읽어라"는 구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바울의 로마서를 펼쳤다고 한다. 호메로스의 이야기가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집어들고 읽지 않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러니 나도 그저 다음과 같은 간결한 말로 이 기나긴 리뷰를 끝낼 수밖에.

 

"집어들고 읽어라"

 

 '이 일들에 관해 아무 대목이든' 다 좋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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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년 연주회 일정_예술의 전당
    from Value Investing 2016-01-12 23:53 
    사이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오디세우스는 귀에 밀랍을 틀어막고 자신을 돛대에 단단히 묶게 했다. 물론 사이렌들에 맞서기 위하여 고래로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그 비슷한 것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멀리서부터 이미 사이렌들에게 유혹당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이런 것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온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사이렌의 노래는 무엇이든 다 뚫고 들어가니 유혹당한 자들의 격정은 사슬이나 돛대보다 더한 것이라도 깨뜨렸으리라. 그러나 오
 
 
LionHeart 2014-09-12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성들인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는 아직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책에 대한 깊은 이해에 감탄했습니다.
저는 아직 말씀하신 "야수들의 왕국"에 가녀린 나뭇가지 하나 잡고 서있는 수준인 것 같습니다. 실은 지난 읽었던 몇 개의 고전 서적들 모두 종종 공감도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아 인상을 찌그러트리며 책장을 넘긴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좀더 소양을 쌓고, 시간이 지나면 이 책의 또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되겠지요? 그때는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지 기대됩니다. :)

oren 2014-09-12 22:01   좋아요 0 | URL
LionHeart 님께서 남겨 주신 댓글을 읽으니 문득 『오뒷세이아』에서 주인공이 퀴클롭스에게 붙잡혔을 때 자신을 '아무도 아니'라고 소개한 대목이 떠오르네요. 누구든지 상대하기 벅찬 유명한 고전들과 맞닥뜨릴 땐 마치 자신이 '아무도 아닌' 것과 같은 느낌이 들게 마련이라고 생각됩니다. 저 역시 오뒷세우스처럼 '아무도 아니'라는 이름을 달고 퀴클롭스와 같은 괴물과 싸울 때가 정말 많답니다. ㅎㅎ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하더라구요.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고도 하고요.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될 때' 찾아오는 남모르는 기쁨 때문에라도 부지런히 '야수들의 왕국'을 자꾸만 기웃거리지 않을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