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는 두 눈으로 시작된다

 

독서는 두 눈으로 시작된다. 키케로는 텍스트를 단순히 듣기만 할 때보다는 두 눈으로 볼 때 더 명확히 기억 속에 남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예민한 것은 시각"이라고 쓰고 있다. 성 아우쿠스티누스도 두 눈을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구"라고 극찬했으며 (후에는 저주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도 시력을 "지식을 획득하는 감각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 했다.(47쪽)

 

인간의 눈은 마치 카멜레온과 같아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눈은 마치 카멜레온과 같아서 관찰 대상의 다양한 형태와 색깔을 받아들여 그 정보를 눈이 지닌 이해력을 통해 전지전능한 내장, 즉 심장, 간, 폐, 쓸개, 혈관을 포함하는 장기의 집합체로 전달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동작과 감각을 지배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49쪽)

 

독서를 박탈당한 상태 

 

『걸리버 여행기』의 주인공인 걸리버는 라퓨타 섬의 스트럴드브러그를 묘사하면서 나이 아흔에도 이들 늙은이들은 책 읽기로 시간을 즐길 줄 모른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기억력이 한 문장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며, 이런 결함으로 인해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면 즐길 수 있었을 유일한 즐거움인 독서를 박탈당한 상태에 놓여 있다."(58쪽)

 

글을 읽을 때 두 눈이 이곳 저곳으로 마구 뛰어다닌다는 사실

 

우리는 뭔가를 읽을 때 두 눈이 책장의 글을 따라 중단 없이 움직이는 것으로, 예를 들어 서양의 글을 읽을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1세기 전, 프랑스의 안과 의사인 에밀 자발은 글을 읽을 때 두 눈이 이곳 저곳으로 마구 뛰어다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점프나 단속성 운동은 초당 약 2백도의 각도를 움직이는 속도로 1초에도 서너 번씩 일어난다. 책장을 가로지르는 눈의 움직임의 속도는-그러나 움직임 그 자체는 아니다-인지력을 방해하며, 우리가 실제로 '읽는' 행위는 눈의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의 찰나에서 이뤄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독서가 두 눈의 실질적인 단속성 운동에 따르지 않고 책장에 나타나는 텍스트의 순서나 스크린상의 텍스트와 같은 두루마리식 연결에 결부되는 이유는 뭘까. 그것도 머리 속으로 문장 전체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이 의문에 대해서도 과학자들은 아직껏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59쪽)

 

내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런 존재가 되었는가에 따라

 

이 모든 것들이 암시하는 것은, 지금 책 앞에 앉아 있는 나라는 존재도 나보다 앞섰던 알 하이삼처럼, 텍스트를 구성하는 단어들의 철자와 빈 공간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검정과 흰색의 기호 체계에서 메시지를 뽑아내기 위해 나는 먼저 깜빡거리는 눈으로 그 체계를 파악하고 이어서 나의 뇌에서 뉴런들의 체인-이 체인은 내가 읽는 텍스트에 따라 달라진다-을 통해 기호들의 암호 체계를 재구축하고, 내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런 존재가 되었는가에 따라 그 텍스트에 뭔가-감정, 육체적 감각, 직관, 지식, 영혼-를 불어넣는다.(60쪽)

 

지극히 개인적인 재구축 과정

 

멀린 C. 위트록 박사는 1980년대에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로 읽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 텍스트를 위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낸다"고 적고 있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 "독서가는 텍스트에 정성을 기울인다. 그들은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이미지와 언어의 형태적 변화까지 창조해 낸다. 너무나 감동적이게도, 독서가들은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면서 자신들의 지식, 경험에 얽힌 기억과 글로 쓰여진 문장, 절과 단락 사이의 관계를 구축해 나감으로써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독서는 감광성 종이가 빛을 포착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텍스트를 자동적으로 포착하는 과정이 아니라, 당혹스럽고 미로 같기도 하고 예사로우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재구축 과정이 되는 것이다.(61쪽)

 

인간 정신의 활동 중에서도 가장 복잡다단한 활동의 상당 부분을 밝혀 내는 것

 

미국의 E.B. 휴이는 금세기 초 이렇게 시인했다. "뭔가를 읽을 때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분석해 내는 일은 심리학자들에게는 성취의 정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작업은 인간 정신의 활동 중에서도 가장 복잡다단한 활동의 상당 부분을 밝혀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거기에 대한 해답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내리지도 못하면서 읽기를 계속하고 있다. 독서 행위가 기계적인 모델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과정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 뇌의 특정 부위에서 독서가 이뤄지고 있음을 잘 알지만 우리는 또한 그런 부위도 독서에 관여하는 우일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일련의 독서 과정은 사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텍스트와 사고를 구성하는 단어, 즉 언어를 해독하고 이용할 줄 아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안다. 연구원들이 염려하는 것은 자신들이 내리는 결론이, 그 결론을 표현하는 바로 그 언어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꼴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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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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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러므로 나는 외롭지 않다.

 

젊은 날의 아리스토텔레스. 두 발을 편안하게 꼰 채 푹신한 의자에 앉아, 한 손은 옆으로 늘어뜨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마를 받친 자세로 무릎 위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읽고 있다. 베르길리우스가 죽고 1500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에 그려진 그의 초상화. 터번을 쓰고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베르길리우스가 한 손으로 유난히 튀어나온 콧등 위에 '틀안경'을 잡고서 책장을 넘기고 있다.

 

······ 어부이자 수필가였던 아이작 월턴이 웬체스터 성당 가까이 흐르는 이첸 강가에서 자그마한 책을 읽는 모습을 그린 그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스테인드 글라스 화가가 던지는 충고는 바로 "조용하도록 애쓰라(Study to be quiet)"이다.

 

······ 앞을 못 보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책 읽어 주는 사람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더 분명하게 들으려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

 

이들 모두가 독서가다. 그들의 몸짓, 기술, 독서를 통해 얻는 기쁨과 책임감과 지식은 나의 그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나는 외롭지 않다.(9∼12쪽)

 

(나의 생각)

책의 시작부터 뭔가 범상치 않다. '젊은 날의 아리스토텔레스'로 시작되는 책도 다 있구나 싶다. 책의 첫 머리에 실어 놓은 열여덟 장의 사진들도 하나같이 다들 인상적이다. 기대 만발이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아니면 이해의 단서를 얻기 위해 읽는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또 어디쯤 서 있는지를 살피려고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읽는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아니면 이해의 단서를 얻기 위해 읽는다. 우리는 뭔가를 읽지 않고는 배겨 내지 못한다. 독서는 숨쉬는 행위만큼이나 필수적인 기능이라고 하겠다.(15쪽)

 

 

그러므로 나는 외롭지 않다.

 

이들 모두가 독서가다. 그들의 몸짓, 기술, 독서를 통해 얻는 기쁨과 책임감과 지식은 나의 그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나는 외롭지 않다.(9∼12쪽)

 

 

1백만 권의 자서전

 

캐나다의 수필가인 스탠 퍼스키는 언젠가 나에게 "독서가들에게는 이 세상에 1백만 권의 자서전이 있음에 틀림없어" 라고 말했다. 우리 인간들은 책 한 권 한 권에서 우리네 삶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 같다는 뜻에서였다. 버지니아 울프도 "해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새로 읽고 그때마다 감동을 글로 남기면 그것은 사실상 우리 자신들의 자서전을 기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인생 경험이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인생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해석도 그만큼 더 절실하게 와닿기 때문이다" 라고 적고 있다.(19쪽)

 

 

어린 시절의 독서야말로

 

미국의 심리학자인 제임스 힐먼은 어린 시절에 이야기를 직접 읽었거나 다른 사람이 읽어 주는 것을 들으면서 성장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줄거리로만 듣고 자란 사람들에 비해 예지력이 훨씬 뛰어나고 정신 발달 상태도 더 낫다고 주장했다. 일찍부터 삶을 경험한다는 것, 그것은 이미 인생에 대한 전망을 얻는 것이다. 힐먼은 어린 시절의 독서야말로 몸소 경험하며 살아 본 듯한 그 어떤 것으로 남게 된다고 보았는데, 그게 바로 영혼의 깊이를 더하는 길이 아닐까.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끊임없이 그런 책 읽기로 되돌아갔고 지금도 그런 되풀이를 거듭하고 있다.(20쪽)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싶은 욕망과 가능한 한 결말 부분을 늦추려는 욕망 사이

 

보모가 편물기계 일을 가느라 자리를 비우거나 내 방 건너편 침실에서 코를 골며 잠에 빠질 때면 나는 침대 옆 램프를 켜곤 했다. 그렇게 책에 빠져들면 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싶은 욕망과 가능한 한 결말 부분을 늦추려는 욕망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었다. 아주 재미있는 대목이면 몇 쪽 앞으로 되돌아가 그 부분을 다시 음미하면서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놓쳐 버렸던 세부적인 내용까지 다시 잡아 내려고 무척 노력했다.(21쪽)

 

(나의 생각)

까마득한 옛날 '어린이 세계문학전집'을 읽던 그 시절의 나 또한 그랬었다. 그토록 오래 전의 기억들이 망겔의 책 덕분에 순식간에 다시금 떠오르게 될 줄이야. '맞아, 맞아'

 

 

나는 '맞아, 맞아' 라고 중얼거리면서

 

책 한 권 한 권은 나름대로 하나의 세계였고 그곳에서 나는 안식처를 찾았다. 비록 나 자신은 내가 즐겨 읽던 작가들의 작품처럼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 낼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더러는 내 의견이 작가들의 것과 일치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몽테뉴의 표현대로) "나는 '맞아, 맞아' 라고 중얼거리면서 그 작가들보다 훨씬 뒤처져서 그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21∼22쪽)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부분을 펴보면

 

발터 벤야민도 그와 똑같은 경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 누구든 책을 독파하지는 못한다. 어느 대목에 한참 머물며 맛을 음미했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부분을 펴보면 당신의 눈길이 머물렀던 그 문장의 새로움에 깜짝 놀랄 때도 있지 않은가."(22∼23쪽)

 

 

그러므로 나는 외롭지 않다.

 

『작은 아씨들』과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사들고 오던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이들 책에는 한결같이 '이 책이 쓰여지게 된 사연'이란 제목으로 메이 램버턴 베커가 쓴 서문이 실려 있었다. 그 서문에 담긴 가벼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책을 이야기하는 방식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방법의 하나로 보인다. 『보물섬』에 쓴 베커 여사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1880년 9월의 어느 차가운 아침, 스코틀랜드의 빗줄기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스티븐슨은 벽난로 쪽으로 다가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24쪽)

 

그 책과는 도저히 헤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책들 중 많은 것들이 먼지를 털어 내는 차원을 넘어 마구 나를 유혹하는 게 아닌가. 그 책들은 마치 나의 손에 잡혀서 책장이 넘겨지고 또 자세히 검토되기를 바라는 듯했다. 간혹 책장을 살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몇 번은 유혹에 못이겨 책을 훔치기도 했다. ····· 소설가 자메이카 킨케이드도 어린 시절 안티과에서 도서관에 다니다가 책을 훔쳤다는 비슷한 죄를 고백하면서 자신의 의도는 책을 훔치는 것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던 적이 있다. "단지 어떤 책의 경우 읽고 나면 그 책과는 도저히 헤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28∼29쪽)

 

(나의 생각)

나는 왜 여태까지 '책 한 권' 훔쳐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그는 서점을 떠날 때쯤 나에게 저녁 시간에 바쁜지 물어 왔다

 

어느 날 오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여든여덟 살 된 노모의 손에 이끌려 그 서점을 찾아왔다. 당시 그는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는데도 나는 그의 시 몇 편과 소설을 읽었을 뿐 아직 그의 문학에 압도감을 느끼지는 않던 때였다. 그는 거의 맹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거부했으며 서점에 들르면 마치 손가락으로도 제목을 볼 수 있다는 듯이 손으로 서가를 훑곤 했다. 보르헤스는 당시 자신이 막 열정을 쏟고 있던 영어를 연마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고 있었는데, 그를 위해 우리는 월터 윌리엄 스키트의 사전과 주해가 붙은 『몰던의 전투Battle of Malden』를 주문해 주었다. ······ 마침내 그는 몸을 돌려 나에게 책 몇 권을 주문했다. 나는 그 중 몇 권을 찾아 줬고 나머지 책은 서지 사항 등을 적어 두었는데, 그는 서점을 떠날 때쯤 나에게 저녁 시간에 바쁜지 물어 왔다. ······

 

그 후 2년 동안 나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다른 우연한 만남이 그러하듯, 저녁 시간이나 또 학교가 허락할 때는 아침 시간에도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31∼32쪽)

 

 

이미 보르헤스가 죄다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거실에서, 로마의 원형 폐허를 조각한 피라네시의 작품 아래에서 나는 키플링, 스티븐슨, 헨리 제임스, 브로크하우스 독일어 백과사전의 몇 개 항목, 마리노, 앙리크 방크, 그리고 하이네의 시들을 읽었다(그렇지만 이들 시는 이미 보르헤스가 죄다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머뭇거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곧 이어 그가 한 구절 한 구절 기억 속에서 되살려 낼 때면 나의 책 읽기는 방해를 받곤 했다. 보르헤스의 망설임은 오로지 시의 가락에서 나타날 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던 시어에서는 절대로 그러질 않았다).(32쪽)

 

 

일종의 행복한 포로처럼

 

에블린 워의 작품 중에는 아마존 정글 깊숙한 곳에서 위험에 처했다가 구조받은 사람이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의 강요로 남은 인생 내내 디킨스의 작품을 큰 소리로 읽어 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보르헤스에게 글을 읽어 주는 일을 두고 나는 그저 하루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만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그 경험은 일종의 행복한 포로처럼 느끼게 했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보르헤스가 나에게 안겨 준 텍스트 그 자체였다기보다는(그들 중 상당수는 결국 나 자신도 사랑하는 작품이 되었지만), 광범위하면서도 전혀 막힘 없이 해박하고, 매우 재미있고, 가끔은 잔인하지만 거의 언제나 무시할 수 없는 그의 논평이었다.(35쪽)

 

 

독서는 등비급수적으로 진행된다

 

독서는 누적적이어서 등비급수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나는 재빨리 깨달았다. 독서를 할 때마다 읽은 내용은 그전까지 읽었던 것들 위에 덧쌓인다는 말이다. 보르헤스가 나에게 선택해 주는 작품에는 언제나 선입견부터 앞섰다. 키플링의 산문은 딱딱하다든지, 스티븐슨의 문체는 유치하다든지, 조이스의 것은 난해하다든지 ······. 그러나 곧바로 그런 편견은 경험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고, 한 작품의 발견은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작품을 기대하도록 만들었으며, 그 작품들은 보르헤스의 반응과 나 자신의 반응에 대한 기억으로 더욱 풍요롭게 되었다. (36쪽)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그의 반응에 자극을 받아 나는 나 혼자 읽었을 때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까지도 이제는 마치 이미 오래 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을 회상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전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회상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불러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아르헨티나의 작가인 에세키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는 촌평했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보르헤스는 체계적인 도서 목록을 불신하고 그런 간통 같은 독서를 권장했다.(37쪽)

 

 

독서가의 '막연한 명성'

 

그렇지만 책 읽기를 두려워하는 건 전체주의 정권만은 아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정부 관공서나 교도소 못지않게 학교 운동장이나 탈의실에서도 구박을 당한다. 거의 모든 곳에서 독서가라는 공동체는 그 자체가 풍기는 기득권에서 비롯된 막연한 명성을 안고 있다. 독서가와 책의 관계가 갖는 어떤 특성은 현명하고 유익한 것으로 인식되는 한편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세상의 소란함에는 무관심한 듯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한 인간의 이미지가 침범할 수 없는 프리이버시와 이기적인 눈길, 그리고 은밀한 행동을 풍기기 때문이다(내 어머니께서는 내가 책 읽는 모습을 보면 마치 나의 조용한 행동이 인생에 대한 당신의 판단과는 모순된다는 듯이 "밖에 나가서 놀아라!" 하고 꾸짖곤 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책에 파묻혀 무슨 꿍꿍이수작이라도 부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남자들이 여자를 마주할 때 여체의 은밀한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 그리고 요술쟁이나 연금술사들이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컴컴한 곳에서 어떤 짓을 하는지에 대해 느끼게 되는 두려움과 별 차이가 없다.(39쪽)

 

 

그래서 나는 야심만만하게도 독서 행위의 역사로 나아가려 한다

 

그래서 나는 야심만만하게도 독서가로서의 나 개인의 역사에서 벗어나 독서 행위의 역사로 나아가려 한다. 아니 여러 독서의 역사 중 하나로 나아가려 한다. 역사는 어떤 것이든-역사란 특별한 직관과 개인적인 환경의 산물이랄 수 있다-철저히 개인적인 특성을 배제시킨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여러 개인 역사 중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40쪽)

 

 

독서의 역사와 문학 비평사의 순서

 

독서의 역사는 문학 비평사의 순서를 그대로 따를 수도 없다. 그 이유는 19세기의 신비주의자인 안나 카타리나 엠머리히가 표현한 우려(인쇄된 텍스트는 결코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담을 수 없다)의 경우 그보다 2천 년 앞서서 소크라테스(책이 배움에 방해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에 의해, 그리고 우리 시대에는 독일의 비평가인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문맹을 칭송하고 구술 문학이 갖는 본래의 장조성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다)에 의해 훨씬 더 강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41쪽)

 

 

만약 당신이 책을 한 권 들고 있다면

 

독서 행위 그 자체처럼, 독서의 역사는 우리 당대로-나를 향해서, 그리고 독서가로서의 내 경험을 향해서-돌진해 왔다가 아득히 먼 세기의 첫 페이지로 되돌아간다. 독서의 역사는 장(章)을 뛰어넘기도 하고 대충 훑거나 선별해 읽고 또다시 읽기도 하면서 판에 박힌 순서를 따르길 거부한다. 역설적이지만, 독서 행위를 역동적인 삶과 반대되는 일로 파악했던 그 두려움은, 나의 어머니로 하그음 나를 의자와 책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리고 열린 공간으로 나가도록 내몰게 했던 그 두려움은 정말 엄숙한 진실을 인정하고 있다.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하얀 성』에서 '편도 마차 승차권으로는 한번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시는 삶이라는 마차에 오를 수 없다"라고 적은 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책을 한 권 들고 있다면, 그 책이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당신은 그 책을 다 읽은 뒤 언제든지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음으로써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고 그것을 무기로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라고 덧붙이고 있다.(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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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보르헤스가 알베르토 망겔을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많은 운명적인 만남이 그러하듯이.

 

 

그는 서점을 떠날 때쯤 나에게 저녁 시간에 바쁜지 물어 왔다

 

어느 날 오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여든여덟 살 된 노모의 손에 이끌려 그 서점을 찾아왔다. 당시 그는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는데도 나는 그의 시 몇 편과 소설을 읽었을 뿐 아직 그의 문학에 압도감을 느끼지는 않던 때였다. 그는 거의 맹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거부했으며 서점에 들르면 마치 손가락으로도 제목을 볼 수 있다는 듯이 손으로 서가를 훑곤 했다. 보르헤스는 당시 자신이 막 열정을 쏟고 있던 영어를 연마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고 있었는데, 그를 위해 우리는 월터 윌리엄 스키트의 사전과 주해가 붙은 『몰던의 전투Battle of Malden』를 주문해 주었다. ······ 마침내 그는 몸을 돌려 나에게 책 몇 권을 주문했다. 나는 그 중 몇 권을 찾아 줬고 나머지 책은 서지 사항 등을 적어 두었는데, 그는 서점을 떠날 때쯤 나에게 저녁 시간에 바쁜지 물어 왔다. ······

 

그 후 2년 동안 나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다른 우연한 만남이 그러하듯, 저녁 시간이나 또 학교가 허락할 때는 아침 시간에도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31∼32쪽)

 

 

 

비록 망겔에게는 보르헤스에게 읽어 줄 '책을 선택할 자유'까지는 주어지지 않았으나, 그가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면서 자연스레 얻게 된 소득이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 '보르헤스에게 글을 읽어 주는 일을 두고 나는 그저 하루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만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그 경험은 일종의 행복한 포로처럼 느끼게 했다.' 그런데 망겔이 보르헤스로부터 배운 책 읽기 방법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건 바로 '간통 같은 독서'였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그의 반응에 자극을 받아 나는 나 혼자 읽었을 때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까지도 이제는 마치 이미 오래 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을 회상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전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회상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불러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아르헨티나의 작가인 에세키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는 촌평했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보르헤스는 체계적인 도서 목록을 불신하고 그런 간통 같은 독서를 권장했다.(37쪽)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중에서

 

 

그런데 보르헤스가 권장했던 '간통 같은 독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그리고 이왕이면 '간통의 심리'에 대해서까지도 얼마간 살필 요량으로 이리저리 뒤적거려 봐도 별다른 소득이 없다. 내가 고작 찾아낸 건 스티븐 핑커의 책 속에 담긴 다음의 몇 구절뿐.

 

 

간통 파트너와 결혼 파트너

이 모든 이야기는 단 하나의 성차이, 즉 남자들이 다수의 파트너를 더 많이 원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남자라고 해서 완전히 무차별적인 것은 아니고, 제아무리 독재적인 사회라도 여성의 발언권을 완전히 억압하지는 못한다. 양성은 각자 간통 파트너와 결혼 파트너를 고르는 기준을 갖고 있다. 인간의 다른 견고한 취향들처럼 그 기준들도 적응특성일 것이다.

양성은 모두 배우자를 원하고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간통을 더 많이 원하지만 그렇다고 여자들이 간통을 전혀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일 여자들이 간통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면, 여자를 희롱하는 남성 충동은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고(혼인을 빙자하는 경우에는 보상을 받겠지만, 그렇다 해도 결혼한 여자는 남자를 희롱하거나 희롱의 목표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진화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자의 정액은 수적으로 불리해질 위험을 겪지 않을 것이므로, 고환은 고릴라의 신체 대비 크기보다 더 크게 진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를 향한 질투 감정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보겠지만 남편들의 질투심은 분명히 존재한다. 민족지학의 기록을 보면 모든 사회에서 양성 모두 간통을 저지르고, 그때마다 여자들이 항상 비소를 먹거나 상트페테르부르크 5시 2분발 열차에 몸을 던지지도 않는다.(735쪽)

 

 

간통의 심리

 

여자들은 남편보다 애인을 고를 때 외모와 힘을 더 중시한다고 보고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외모는 유전자의 품질을 보여 주는 지표다. 그리고 여자들은 불륜 관계를 맺을 때 일반적으로 남편보다 지위가 높은 남자를 고르는데, 지위를 뒷받침해 주는 자질들은 거의 틀림없이 유전이 되는 것들이다.(명망 있는 애인에 대한 안목은 첫 번째 동기인 자원 얻어내기에도 도움이 된다.) 우수한 남자와 성관계를 하면 여자는 또한 결혼 시장에서의 거래 능력을 테스트할 수도 있다. 이것은 차후에 직면할 그런 거래의 전주곡이 되거나, 결혼 생활에서 자신의 입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사이먼은 성관계와 관련된 성차이에 대해, 여자는 남자가 어떤 면에서 우수하거나 남편을 보완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성관계를 하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간통을 한다고 요약한다.(737쪽)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중에서

 

 

스티븐 핑커의 다소 과학적인(?) 주장으로부터 '간통 같은 독서'와 관련해서 무슨 시사점을 얻으려는 자체가 너무 엉뚱하긴 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얻을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싶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불륜 관계'를 맺을 때 '명망 있는 애인에 대한 안목'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그러고 보니 알베르토 망겔이 『독서의 역사』에서 언급한 수많은 '책을 둘러싼 이야기들'도 어쩌면 책의 저자들과 독자들 사이에 벌어진 '온갖 흥미진진한 간통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책을 읽다 보면 문득 '어디선가 본 듯한' 혹은 '어디선가 분명히 읽은 듯한' 대목들을 마주치게 마련이다. 그러면 나는 늘 먼저 읽었던 책의 '바로 그 대목'을 찾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혀 좀체로 거기서 헤어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곤 한다. 분명히 어느 책에선가 읽은 듯한데 바로 그 '은밀한 간통 현장'을 찾아내지 못할 때의 그 안타까움이란 너무나 개인적이고도 독특한 것이어서, 이 세상 누구에게도 감히 하소연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그런 감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떤 책을 읽든지 그런 경험들은 늘 예고없이 불쑥 찾아들게 마련이겠지만, 내가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으면서도 그런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사실 그 철학자가 자신보다 더 앞선 시대를 살았던 '고대의 명망 있는 애인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신세를 졌고, 또 그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얻었는지를 발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후세의 수많은 학자들이 끊임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간통 현장'들을 찾으려 애쓴 결과 수없이 많은 '주석'들이 그의 책에 주렁주렁 달려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그런 '간통의 흔적'을 굳이 애써 찾으러 나설 필요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독서를 통해 많은 작가들의 은밀한 '간통 현장'들을 발견하는 일은 늘 즐겁다. 사정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심증은 가는데 물증을 확보하지 못할 땐 늘 괴롭다. 그나마 어젯밤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속 구절을 훔친 몽테뉴의 흔적을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찾아낸 건 큰 행운처럼 느껴진다. 비록 두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로 사뭇 다르지만 '기억에 남을 만큼 이상한 사례'를 두 사람의 책에서 똑같이 발견하는 일은 여전히 야릇하기만 하다.

 

 

분노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욕망에 대한 자제력 없음보다 덜 창피하다는 사실

 

이제 분노(thymos)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욕망(epithymia)에 대한 자제력 없음보다 덜 창피하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분노는 어느 정도 이성에 귀를 기울이긴 하지만 그것을 잘못 알아듣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달려 나가 지시와는 다르게 행하는 실수를 범하는 성급한 하인들처럼. 혹은 개들이 친한 사람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소리만 나면 짖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이렇게, 분노는 그 본성의 열기와 빠르기로 말미암아 듣기는 하되 해야 할 바를 듣지 않은 채 복수로 돌진하는 것이다. 모욕이나 멸시를 당했다고 이성이나 상상이 보여 주고 나면 [분노를 관장하는 부분이] 그런 일에는 마땅히 싸워야 한다고 추론해 낸 것처럼 대뜸 성을 내고 나서는 것이다. 반면에 욕망은, 이성이나 지각이 즐거운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만 하면 그것을 즐기는 일로 돌진하는 것이다. 결국 분노는 어떤 의미에서 이성을 따르지만 욕망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욕망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더 창피한 것이다. 분노에 대해 자제력 없는 사람은 욕망에 지는 것이지 이성에 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본성적인 욕구를 따르는 것을 보다 쉽게 용서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욕망들에 따르는 것은 더 쉽게, 또 공통적일수록 더 쉽게 용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노와 화를 잘 내는 성질은 지나침에 대한 욕망, 필수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보다 더 본성적이다. 마치 자기 아버지를 때린 것에 대해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 즉 "이 사람도 자기 아버지를 때렸고, 그렇게 맞은 사람도 그의 아버지를 때렸으니까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자식을 가리키면서 "얘도 어른이 되면 나를 때릴 겁니다. 우리 집안 내력이니까요"라고 변명하는 사람의 경우가 보여 주는 것처럼 말이다. 또 아들에 의해 끌려 나가다 문간에서 자신도 자기 아버지를 거기까지만 끌고 갔으니 거기에서 멈추라고 명하는 사람의 경우처럼. (251∼252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제6장 「자제력 없음의 종류들」 중에서

 

 

여기까지가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

 

제 아비를 때리고 있던 자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자기 집 습관이라고 하였다. 그 아비는 그 조부를 그렇게 때렸고, 그 조부는 그 증조부를 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가리키며, 이 애도 내 나이쯤 되면 나를 때릴 것이라고 하였다. 아들이 거리에서 아비를 잡아당기며 끌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문 앞에 와서는 아비가 아들에게 멈추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비를 거기까지밖에는 끌고 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아들들이 습관적으로 버릇이 되어서, 그 가정에서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였다.(127쪽)

 

 - 몽테뉴,『몽테뉴 수상록』「습관에 대하여, 그리고 이어받은 법을 쉽사리 변경하지 않음에 대하여」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몽테뉴를 나는 딱 '여기까지만' 끌고 오겠다. 이것이 나의 한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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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몽테뉴와 플루타르코스의 '불씨 이야기'
    from Value Investing 2016-04-28 23:57 
    "책을 읽으면서 그전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회상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불러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아르헨티나의 작가인 에세키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는 촌평했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보르헤스는 체계적인 도서 목록을 불신하고 그런 간통 같은 독서를 권장했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중에서 * * * 몽테뉴가 쓴 에세이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인용문들이 가득 담겨 있다. 그는 보르도 시장과 고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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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미시시피의 돈 vs 이아고의 말
    from Value Investing 2017-07-04 17:00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 읽기How To Read and Why』는 책의 제목이 번역 과정에서 엉뚱하게 바뀐게 몹시 아쉽다. 이 책을 볼 때마다 그냥 원제 그대로 번역했더라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블룸의 '책 읽기에 대한 강의'는 내 판단으로는 수준이 꽤나 높다. 문학 전공자들에게 권장할 만한 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쨌든 나는 그 책을 먼저 읽고 나서 '셰익스피어'도 읽고, '윌리엄 포크너'도 읽었는데, 이렇게 거
  4. 파리와 서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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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 2014-10-16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와 간통 절묘하게 연결시키셨네요

oren 2014-10-16 15:15   좋아요 0 | URL
그 둘 -독서와 간통- 사이를 연결시키는 게 말이 될까 싶어 많이 주저했었는데 좋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몽테뉴는 `사실을 밝혀 주는 자가 동시에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줄 방법과 도움도 제공하지 못한다면, 알려 주는 일이 큰 해독이며, 사실을 밝힌 공로보다도 더 마땅히 칼을 맞을 만한 일이다.`라는 섬뜩한 경고를 내놓은 적이 있었지요. 몽테뉴를 여기까지 함부로 끌고 오다 보니 문득 그 구절이 생각나 겁도 좀 납니다.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는 말도 그가 남겼으니 제가 좀 떠든다고 `여기까지` 와서 책망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ㅎㅎ


* * *

알려짐으로써 더 꼬집히는 불행

사실을 밝혀 주는 자가 동시에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줄 방법과 도움도 제공하지 못한다면, 알려 주는 일이 큰 해독이며, 사실을 밝힌 공로보다도 더 마땅히 칼을 맞을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모르는 자와 마찬가지로 애써 가며 사실에 대비하는 자를 비웃는다. 마누라를 새치기당한 수치는 지워질 수 없다. 한번 걸리면 영원히 걸린 것이다. 그것에 징벌을 주면 잘못한 일 자체보다도 더 사실을 드러내 놓게 되는 셈이다. 알려지지 않은 의문을 풀어서 우리들의 개인적인 불행을 드러내고 비극의 무대 위에 나발을 불어 대면 보기 좋은 꼴이다. 그것은 알려짐으로써 더 꼬집히는 불행이다. 왜냐하면 착한 아내와 행복한 결혼 생활은, 그 사실을 말함이 아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괴롭고도 쓸모없는 지식은 피하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여행에서 돌아올 때에는 먼저 집에 사람을 보내서 아내에게 자기의 도착을 알려 주며 엉겁결에 들이닥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 * * * *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나는 점잖게 그리 꼴 흉할 것 없이 아내에게 속고 있는 사람 백 명은 알고 있다. 물론 활달한 대장부는 그 때문에 동정을 받아도 경멸은 받지 않는다. 그대의 인격이 불행을 틀어막게 하라. 점잖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정을 저주하게 하라. 그대를 모독한 자는 그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게 하라. 그리고 천한 자, 귀한 자 할 것 없이 이런 의미에서 소문나지 않은 자인가?

수많은 군대를 지휘한 장군까지도 ······
모든 점에서 너보다 나은 자들도 그렇다, 이 못난아. (루크레티우스)

그대 앞에 하고많은 점잖은 인물들이 어런 책망에 걸려 드는 것을 보는가? 다른 데서는 그대 일도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아마 부인들까지도 그대 일을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여자들은 금실 좋고 평화로운 결혼 생활 말고, 다른 무엇을 조롱하기를 더 즐기는가? 그대들은 각기 어느 누구의 마누라를 건드렸다. 그런데 본성은 모두가 마찬가지로 인과응보로 변화무상하다. 이런 사건이 잦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고민거리가 덜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것도 습관이 되어 버린다. 못난 격정이지만, 그것은 또 남에게 상의할 수 없는 일이니 딱하다.

운명은 우리에게 불평을 들어 줄
귀마저 내주기를 거절한다. (카툴루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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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은 신에게도 결여되어 있으니


사유 그 자체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지만 목적을 지향하는 실천적인 사유는 그렇지 않다. 사실 바로 이 사유가 제작적 사유까지도 지배한다. 제작하는 사람은 누구든 어떤 목적을 위해(heneka tou) 제작하며, 제작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가 단적인 목적이 아니니까. (그것은 어떤 것을 향한 것이며(pros ti) 또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다.) 단적으로 목적인 것은 행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to prakton)뿐이다. 잘 행위한다는 것(eupraxia)이 목적이며, 욕구는 이 목적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합리적 선택이란 욕구적 지성(orektikos nous)이거나 사유적 욕구(dianoētikē orexis)인 것이며, 인간이 바로 그러한 원리(
archē)이다.

 

그런데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어떤 것도 합리적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가령 그 누구도 일리온 도시가 함락된 사실을 합리적으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이미 지나 버린 과거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일에 대해서, 가능한 일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이며,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다음과 같이 말한 아가톤은 옳게 이야기한 것이다.

 

이미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만은 신에게도 결여되어 있으니.

 

지성적인 부분들 둘의 기능은 참이다. 그러니 각 부분이 그것에 따라 참을 가장 잘 인식하게 하는 품성상태, 바로 이것이 두 부분에 있어서의 탁월성이다.(205∼207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 제2장 「성격적 탁월성과 사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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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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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사로잡히고 즐거움에 이끌리기 때문

 

그런데 자신의 의견에 머물러 있으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고집쟁이라고 불린다. 이 사람들은 설득 자체가 어렵고, 또 한번 마음 먹은 것을 바꾸게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 사람들은 자제력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마치 낭비가 심한 사람이 자유인다운 사람과 비슷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고, 또 무모한 사람이 대담한 사람과 비슷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서로 다르다. 자제력 있는 사람은 감정이나 욕망 때문에 마음을 바꾸지는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설득을 잘 받아들이기에 자제력 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고집쟁이들은 이치에 닿는 말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데, 그것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대부분 즐거움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선적인 사람들, 무식한 사람들, 그리고 촌사람들 또한 고집쟁이들이다. 독선적인 사람들은 즐거움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고집쟁이가 된 것이다. 이들은 설득되어 마음을 바꾸는 일이 없기만 하면 승자로서 기뻐하고, 자신들의 견해가 민회에서 던진 표처럼 무효가 되면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제력 있는 사람을 닮았다기보다는 자제력 없는 사람을 더 닮은 것이다. (261∼262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제9장 「자제력 있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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