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관심도서의 분야가 여럿으로 나뉘어 고심하다가 역사분야의 책들을 주로 골랐다. 타이틀은 이정철의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역사비평사, 2013)로 삼았다. 부제는 ;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 소개에 따르면 "조선시대 경세가인 이이, 이원익, 조익, 김육의 이야기다. 이들은 민생의 원칙을 안민에 두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부었다. 책은 '조선의 개혁'이라는 큰 주제하에 네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작은 평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평전 속에서 각각의 삶과 이념, 그 시기의 정치 상황과 사건 전개, 그리고 인물 관계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새정부 출범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공무원들이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닌가 한다. 저자의 전작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역사비평사, 2010)과 같이 읽어도 좋겠다.

 

 

두번째 책은 중국사 관련서로 리전더의 <공주의 죽음>(프라하, 2013). '우리가 모르는 3-7세기 중국 법률 이야기'가 부제다(그 시대의 우리 법률에 대해선 우리가 아는가?). "3세기에서 7세기경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기 법률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선비족이 세운 북위 시기 난릉공주의 비극적 죽음을 실마리로 삼아 이 사건의 처리 과정과 판결에 반영된 당시의 법률, 사회, 여성, 민족, 정치 등의 여러 주제를 폭넓게 이야기한다." 얼핏 미시사 스타일의 저작처럼 보이는데, 얼마나 대중적일 수 있느냐는 저자의 이야기 솜씨가 관건이겠다. 세번째 책은 유럽사로 넘어가서 스웨덴의 역사학자 스테판 욘손의 <대중의 역사>(그린비, 2013). '세 번의 혁명 1789, 1889, 1989'가 부제다. 말 그대로 세 번의 혁명과 그 속의 대중 투쟁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미술사를 겸하고 있다는 점. 당대의 미술작품을 통해서 대중을 읽는 독특한 시도가 눈길을 끈다.

 

 

네번째 책은 다시 중앙아시아로 넘어와서 제임스 밀워드가 쓴 <신장의 역사>(사계절, 2013)다. 역사책에서 '서역'이라고 나오는 곳이 신장이고, 보다 중립적인 용어로는 '동투르키스탄' 혹은 '중국령 투르키스탄'이라고. 부제대로 '유라시아의 교차로'에 해당하는 이 지역의 역사를 소개한다. <중국의 서진 - 청의 유라시아정복사>(청, 2012)의 저자인 예일대 중국사학과 피터 퍼듀 교수도 "독자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역사를 매우 탁월하게 서술한 책"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마지막 책은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말리노브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전남대출판부, 2013). 전혀 예기치 않은, 이주에 나온 가장 놀라운 책인데,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도서출판b, 2012)에 일역본이 언급된 걸 보고 부러워했던지라 더욱 반갑다. 두께와 가격이 만만찮지만, 말리노프스키의 대표작이자 20세기 인류학의 주요한 저작에 한번 도전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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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
이정철 지음 / 역사비평사 / 2013년 2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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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죽음- 우리가 모르는 3-7세기 중국 법률 이야기
리전더 지음, 최해별 옮김 / 프라하 / 2013년 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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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중의 역사- 세 번의 혁명 1789, 1889, 1989
스테판 욘손 지음, 양진비 옮김 / 그린비 / 2013년 2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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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의 역사- 유라시아의 교차로
제임스 A. 밀워드 지음, 김찬영.이광태 옮김 / 사계절 / 2013년 1월
38,000원 → 34,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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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책과 지식'란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토머스 프랭크의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갈라파고스, 2013)에 대한 것이다. 2009년 이후 미국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티파티 운동과 함께 보수주의가 득세한 일)에 대한 자세한 보고와 함께 신랄한 비평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중앙일보(13. 02. 16) 좌파는 모르고, 우파는 알았던 것

 

197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전에서 사고가 났다. 핵연료봉이 녹아 내리고 방사성 물질이 유출돼 주민 10만 명이 대피해야 했다. 86년 구(舊) 소련에서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사고 전까지 스리마일은 최악의 원전사고였다. 원자력의 안전 신화가 무너졌다. 그런데 그런 재앙이 일어난 지 불과 며칠 뒤에 더 많은 원전을 지어달라고 요구한다면 제 정신일까.

이 책 (원제 Pity the Billionaire·억만장자를 동정하라)에서 토머스 프랭크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바로 그와 같은 일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 저명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그의 문제의식이다. 세계경제를 침체로 몰아넣은 금융위기는 자유시장이라는 이상을 우리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으며, 이에 대처하는 공화당의 무능력과 도덕적 가식을 폭로했음에도 2009년 초부터 붐을 타기 시작한 미국의 보수주의 운동은 상황을 역전시켰다.

2010년 공화당은 미국 의회 선거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고, 정부로부터 규제받지 않는 자유시장이 곧 자유의 본질이라는 주장이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저자가 보기엔 이것이 1929년의 경제공황과 현 경제위기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나는 지금의 경기불황 이전까지, 불경기의 희생양이 된 대다수가 신고전주의적 경제학에 박수를 치거나 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업적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난 적대감을 드러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1929년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진 대공황기에는 사정이 달랐다. 이 ‘어려운 시절’에 먼저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다. 자유방임주의 대신에 정부의 적자지출이라는 케인스 경제학이 받아들여졌다. 현대 산업자본주의의 탐욕적 개인주의에 반대해 공동체와 나눔의 삶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6년 미국자유연맹의장은 라디오연설에서 “뉴딜은 미국에 전체주의 정부를 만들려는 시도”라고 공박했다. 하지만 대중은 이들 보수주의자들을 조롱하면서 루스벨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 민주당은 하원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것이 프랭크가 소환하는 1930년대식 포퓰리즘의 기억이다.

뉴욕 증권시장의 대폭락이 있은 지 79년 만에 들이닥친 2008년의 금융위기는 얼핏 1929년의 ‘시즌2’처럼 보였다. 제너럴 모터스·크라이슬러가 파산을 선언했고, 리먼브라더스·인디맥·베어스턴스 등이 사라졌다. 기업만이 아니다. 퇴직금은 날아갔으며 동료들은 직장에서 쫓겨났고 제조업 공장은 작동을 멈췄다. 대출담보금은 집값을 훨씬 웃돌았고 중산층은 폭삭 내려앉았다. 재앙이 닥치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골드만삭스는 직원들에게 165억 달러가량을 보너스로 나눠주며 사치와 방종을 부추겼다. 신자유주의 혹은 ‘자유방임주의의 황금시대’에 정부의 규제완화를 틈타 현란한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어낸 트레이더들은 승승장구했고 전용기를 쇼핑하러 다녔다. 대신에 시간당 급여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팍팍해졌다. 그러다가 터진 금융위기였기에 경제부실과 실패의 책임을 물었어야 했다. 그것이 ‘금융질서’이자 최소한의 경제정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이 공황상태에 빠지기 시작하자 긴급 구제금융이 이뤄졌고 ‘금융산업계의 망나니들’은 살아남았다. “정부는 월가 지배자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게 구제금융이 던진 메시지였다. 대중들은 분노했으나 시간이 흐르자 월가의 탐욕과 도덕적 해이는 잊혀졌다. 대중의 분노가 향한 곳은 월가에서 워싱턴으로 바뀌었고, 자유시장이 아니라 정부와 세금이 도마에 올랐다. 정부의 적자지출과 구제금융에 대한 분노는 “실패한 자들은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구호로 모아졌다. 그리고 놀라운 바꿔치기가 일어났다. 분노의 표적이 긴급구제를 받은 은행들에서 ‘헤픈 이웃’들로, 곧 담보대출을 받고는 결국 길거리에 나앉아버린 방종한 사람들로 바뀐 것이다.

이렇듯 분노의 방향을 돌리는 데 일조한 인물이 폭스뉴스의 진행자였던 글렌 벡이다. 그는 경기침체와 불황이 자유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음모라는 시나리오를 전파했다. 오바마 정부의 의료보험 개혁안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그것은 미국을 끝장내는 것입니다”라며 종말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부추겼다. 또 이러한 종말과 ‘사회주의자 오바마’로부터 미국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자유시장이라는 신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자유시장이야말로 지고의 가치이고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이라는 소위 ‘시장 포퓰리즘’은 한낱 CEO들의 믿음이었지만 이제는 수백 만의 믿음이 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믿음을 기치로 내건 티파티 운동이 ‘좌파 따라하기’의 모양새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퇴직 국제정치학 교수인 안젤로 코데빌라는 미국사회에 ‘지배계급’과 ‘국민계급’, 두 계급이 존재한다고 여긴다.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주의 사관의 뒤집힌 재림이라고 할까. 지은이는 민주당의 실패가 이러한 ‘부흥 우파’의 득세를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2008년 위기와 재난에 대해서 그들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분노한 국민에게 해주지 않았다. 그 틈새를 파고든 것이 우파 이상주의자와 기회주의자였다.

2008년 금융위기를 분석하고 현 경제위기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제시한 책은 그간에 무수히 출간됐다. 이 책도 그런 범주에 포함될 수 있지만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증세에 반대하는지를 분석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에 이어 ‘대중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우파는 그것을 읽었고, 진보를 자처하는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읽지 못했다.

 

그 결과 실패한 우파가 승자가 된 나라가 미국만은 아닐 것이기에 저자의 분석을 한국적 상황에 그대로 대입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지만, 이 책의 용도는 그 이상이다. 좌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반면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 있다’라는 영국 시인 예이츠의 시구를 빌려 우파 포퓰리즘의 득세를 설명한 적이 있다. 탈정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무기력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격정에 찬 우파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파야말로 오늘날 유일한 ‘정치세력’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런 연유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뭔가 달라지기 위해선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다.

 

13. 02. 16.

 

P.S. '더 읽을 만한 책들'도 골랐는데, 모두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에서 언급되고 있는 책들이다. 특히 에인 랜드의 <아틀라스>(민음사, 2003)에 대해선 자세한 소개와 비평을 제시하고 있어서 유익한데, 한국어판은 절판된 상태다.

 

 

 

'부흥 우파'의 생각

저자 토머스 프랭크는 ‘부흥 우파’를 ‘새로운 십자군전쟁’이라고 부른다. 자유시장이라는 옛 종교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입장에서다. ‘부흥 우파’의 생각을 대변하는 책으로는 글렌 백의 『글렌 벡의 상식』(부글북스·2010)과 스티브 포브스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우리를 구할 것인가』(아라크네·2011)가 있다. 이들은 2008년 경제위기를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닌 정부개입의 실패로 본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티파티 보수주의의 경전 역할을 하는 책은 자유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에인 랜드의 『아틀라스』(민음사, 2003)다. 에인 랜드는 앨런 그리스펀의 정신적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1957년 발표된 이 ‘1000 페이지짜리 소설’의 주된 내용은 기업가 집단이 큰 정부의 탄압에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다. 전기작가에 따르면 에인 랜드는 ‘우파 진영의 존 스타인벡’이 되고 싶어 했다. 좌파에게 『분노의 포도』가 있다면 우파에게는 『아틀라스』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프랭크는 이 방대한 소설을 읽은 독자가 정작 얼마나 될지 의문스럽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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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의 '3인 1책 전격수다'를 발췌해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215134151§ion=04). 이달의 수다 거리는 권보드래, 천정환 두 국문학자의 <1960년을 묻다>(천년의상상, 2012)이다. 부제는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인데, 60년대를 다룬 책이니까 초점은 주로 '박정희 시대'의 전반기이다.

 

 

 

프레시안(13. 02. 15) 2013 대한민국, 우리는 모두 '박정희'의 유산이다!

 

(...)

 

사상의 선택은 곧 체제의 선택

 

이권우 : <1960년을 묻다>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사상 전향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이현우 : 여기서 두 인물을 대비시킵니다. 먼저 동백림 사건의 발단이 된 임석진 교수를 거론하는데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오도르 아도르노 밑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던 국내 헤겔 연구의 거두지요. 두 번째 인물은 잡지 <청맥>의 주간이었던 엘리트 김질락입니다. 전자는 박정희와 일대일 독대를 통해 자기 과오를 해명하고 사법적으로 용서받은 뒤 대학 교수로서 정년을 마쳤지만, 후자는 자기 과오를 공개적으로 고백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희생되었지요.

 

흔히 전향이라고 하면 과거 문제로만 생각했습니다. 1930~40년대 일본 공산주의자들의 전향 문제, 혹은 한국 계급문학 작가들과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전향 문제만을 떠올렸지요. 하지만 1960년대 임석진과 김질락 사건을 통해 전향이 현재진행형의 문제라는 게 만천하에 밝혀졌지요. 이에 대해 연구자들이 더 주목해야 한다는 저자들의 지적에도 공감했어요.

 

이권우 : 두 저자가 분명 김윤식 교수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김윤식 교수는 식민지 시기 일본의 진보주의자와 우리 문인들의 전향 연구를 했잖아요. 그 연구 성과를 60년대에 도입하여 분석한 시도는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김용언 : 극단의 변화를 겪은 사람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강철' 김영환이라든가 김문수 경기도 도지사처럼 사상적인 극단을 겪은 사람들이요. 안 그래도 얼마 전 쓰루미 슌스케의 <전향>(최영호 옮김, 논형 펴냄)을 구입했었는데, <1960년을 묻다>의 저자들도 <전향>을 언급하면서 한국에서의 전향이 일본의 경우에 그대로 대입될 수 없다, 전혀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고 써서 흥미로웠습니다.

 

 

이현우 : 한국식 전향의 가장 큰 특수성은 사상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체제 선택까지 아우른다는 데 있지요. 자기 내면의 문제만이 아니라, 남이냐 북이냐를 선택한다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 말입니다. 거꾸로 얘기하면 전향이란 문제에 대해 한국이 일본보다 더 깊이, 더 멀리 나갈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분석하는 간첩 부분도 굉장히 흥미로워요. 1967년 귀순한 북한 지식인 이수근 사건은 대단하죠. 전 <1960년을 묻다>를 보던 중 이수근 부분에서 완전히 몰두해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도 찾아보고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인물과사상사 펴냄)도 뒤적거리고 그랬습니다.(웃음) 최인훈의 <광장>(문학과지성사 펴냄) 주인공 이명준이 그대로 현실화한 것 같은 인물이죠.

 

 

북한에선 조선 통신사 부사장까지 지냈던 고위 임원이었고, 남한에서도 중앙정보부에서 요구하는 대로 적당히 맞췄더라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중간첩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당합니다. 당시 남북 대립 상황 속에서 자유를 찾고 싶어했던 지식인이, 적당히 타협하면 잘 살 수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놓아버릴 수 없었던 양심을 지키고자 했을 때 불가피하게 어디에서도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요. 이수근의 사형 직후부터 박정희의 유신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권우 : 사상 전향에 대한 집요한 강제가 자기 검열에 이르면서 생긴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였지요. 이는 통일과 중립의 가능성이 좌절되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나는데요. 4·19 직후 한때 냉전을 넘어선 중립화 통일론이 지식인층에서 주류 담론으로 부상했다가 1960년대 후반 들어 남북이 각각 유신과 주체사상 체제로 전환하면서 그 꿈은 바로 사라집니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 최인훈 역시 저자들의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됩니다.

 

 

 

저자들은 질문합니다. "미국은 변함없는 실체였으며, 한국은 언제나 친미에 의존해서만 생존할 수 있었던가?"(232쪽) 중립의 꿈은 일본 식민지 시절 이전부터, 한국이 열강의 구도 속에서 다각도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부터,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전쟁이 다가온다는 파국 의식 속에서 중요한 대안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냉전 체제에 접어들며 이 선택은 불가능해졌고, <광장>의 이명준이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됩니다. 최인훈 작가가 1970년대 침묵을 지키며 절필했다가 냉전 종식 후인 1994년 <화두>를 다시 발표했다는 것을 분석하는 부분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한 작가에 대한 애정, 그 작가가 놓여있던 시대에 대한 예민한 촉수가 드러난 부분이라 의미 있게 읽혔습니다.

 

이현우 : 1950년대는 미국 없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수 없는 시기였지요. 하필이면 그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 광풍으로 이한 반공주의가 득세하던 시절입니다. 한국 역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요. 그 상황에서 중립화의 공간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치명적인 위험이기 때문에, 최인훈 작가의 절필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고요. 말 그대로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그런 작가가 우리에게 있었다는 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교양은 국력이다!

 

이권우 : 자유교양운동은 말하자면 권력과 문화의 이중주이자, 그 협음과 불협화음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춘천에 살았는데, 자유교양운동의 끝물을 맛본 케이스입니다.(웃음) 3학년 때 학교에서 책 읽고 독후감 쓰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해서 무척 신나게 참여했던 기억이 생생해요. 권력층의 야망은 국가적 차원에서 교양을 보급하는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력을 키울 수 있다는 데 있었다지만, 거기서 파생된 혜택으로 제가 좀 더 나은 인문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 권력이반의 사례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이현우 : 1968년에 제1회 '대통령기쟁탈전국자유교양대회'가 시작됐지요. 1975년이 마지막 대회였는데 전 그 해 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체험하진 못했어요.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부작용이 속출하여 결국 폐지됐다고 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132종 800만 부의 '고전'이 보급됐고 총 7회에 걸친 대회에 연인원 1900만 명이 참가했다는 건 굉장한 '문화혁명'이라고 보입니다.(웃음) 최근 한국 대학들에서 인문 고전 읽기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잖아요. 오래된 미래인 겁니다. 공통점은 미국식 자유교양교육, 즉 리버럴 아츠 교육을 수입했다는 점이고요.

 

이권우 : 맞습니다. 지금의 교양 교육도 그때의 시카고 대학 모델을 여전히 따르고 있죠.

 

김용언 : 거칠게 정리하자면 짧은 기간에 효율적으로 책을 읽히는 제도인데요.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강제적인 방법으로나마 중고등학교 때 이런 책들을 읽힌다는 게, 부작용이 이만큼이었다면 장점도 분명 조금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현우 : 아, 저는 거꾸로입니다. 부작용이 조금이고 장점이 더 많을 수 있다고 봐요.(웃음) 한 학생 사례를 보면 학업 시간 외에 독서를 하루에 4시간씩 했다고 나오잖아요. 지금 한국에서도 그런 교육은 못하고 있지요.

 

김용언 : 그 학생이 제일 좋아하는 책이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향연>이라는 대목도 나오지요.

이현우 : 네. 그 학생은 실업계 학교를 다녔는데 자유교양대회를 준비하면서 소크라테스를 읽혔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획기적입니다.

 

김용언 : 저는 수능과 본고사, 논술 시험을 다 치른 세대인데요. 대학 입시를 위해 고등학교 때 '초치기'로 그런 인문 교양 공부를 해야 했어요. <독서평설>이라는 교재를 정기 구독했는데 일종의 세계명작 다이제스트였습니다. 한국 단편소설 등은 전문을 싣되 장편은 축약해서 소개하며 수능과 본고사에 나올 '예상치 못한' 지문들을 예습시키는 격이었죠.

 

또 저희 집에 일본 작가가 쓴 희한한 단행본도 있었어요. 일종의 '세계명작 100권 읽기' 개념인데, 모든 명작 소설들을 죄다 2페이지 내에 축약해서 소개해요. 전 그 책을 읽으면서 <안나 카레니나>나 <전쟁과 평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의 줄거리를 다 외웠어요. 그런데 정작 원작 소설을 읽진 않았단 말이죠. 책 제목과 작가 이름, 줄거리를 외우되, 그게 책 자체에 대한 교양의 차원이 아니라 수능과 본고사에 유용한 부분만 획득하는 식으로 학습하는 게 몸에 뱄던 거예요.

 

아주 한참 후에서야 그 원작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소위 인문 교양이라는 부분을, 대학 입학 후에야 혼자서 더듬거리며 찾아가야 했어요. 때늦은 복습인 거죠. 그래서 항상 그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유교양운동 부분을 읽을 때 심지어 그 학생들이 부러운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웃음)

 

이권우 : 문제는 교양이 교양 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동원 체제 속에서 공유되었다는 점이죠. 현재 한국 대학들이 왜 다시 고전과 교양의 가치를 중요시하느냐고 물었을 때, 돈이 되는 걸 찾기 위한 부분이 분명 크거든요. 이 책에서도 1960년대 자유교양운동의 목적에 대해 교양과 국력을 일치시켰다는 정도의 언급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왜곡된 자유주의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싶어요. 미국적인 것, 서구적인 것, 무조건 새로운 것을 한국사회에 적용하려던 지식인들의 무비판적 문제의식이 과도하게 현실 교육과 접목되면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추측하게 됩니다.

 

교양이라는 건 사회적 맥락 내에서 당장 뚜렷한 효과를 보여주진 못하죠. 그냥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건데, 현재의 인문학 붐은 아주 천박하게 얘기하자면 스티브 잡스 때문인 겁니다.(웃음) 교양 교육의 본래 가치를 공유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1960년대 자유교양운동이 사라졌듯 현재의 고전 교육도 쉽게 무너지지 않겠냐는 걱정이 들더라고요.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교양은 지배의 기제이면서 동시에 지배와 대립하는 것을 생산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461쪽) 이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말하자면 196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교양 세대가 출현했고, 1970년대에 그들이 대학생이 되면서 체제 저항 세력으로 급부상했기 때문에 교양 교육을 접었을 수도 있는 겁니다. 현재 대학의 고전 교육이 결과적으로 저항적 세대를 탄생시킨다면 우리는 과연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고전을 통해 저항의 의미와 방식을 알게 된 세대가 현 체제에 대한 도전 세력이 될 수도 있는데, 이 점에 대한 이해가 배제된 교양 교육이 한시적으로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드는 거죠.

 

이현우 : 전 좀 더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요. 소위 국민 독서 시대, 동원된 독서의 시대지만 그게 1970년대 조세희, 이문구, 황석영 같은 본격문학을 즐기는 독자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까. 1950년대만 해도 문맹률이 70퍼센트였는데 1960년대 들어와서 10퍼센트 대로 줄어들었다고 하고요. 그런 상황에서 대대적인 국민 독서 운동을 추진했고, 결과적으로 1970년대의 두터운 독자층을 만들어냈으며,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까지 작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박정희식 국가 체제에 동원하기 위해 국민의 문화적 역량을 높이고 했지만, 양가적인 결과를 낳은 거죠. 동시에 비판적 문제의식도 고양되었으니까요.

 

1968년부터 1975년까지라는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수백만 권의 고전이 보급되고 전국적인 독서 붐이 가능했다는 건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1970년대 시민의식의 성장이 지금까지는 경제성장과 맞물려서 중산층의 형성 차원에서만 주로 이해되었지요. 문학전집 유를 사들이는 것도 중산층의 과시적인 속물적인 교양 취미가 발현된 걸로 이야기됐고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보단 좀 더 적극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0년대 이후의 질문들

 

이권우 : 이야기를 나눌수록 1960년대가 오늘의 우리를 빚어낸 원형이라는 생각이 강해지는데요.(웃음) 이 책은 매우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고, 지금 우리가 미처 얘기하지 못한 부분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정리 차원에서 한 명씩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덧붙인다면요?

 

 

 

이현우: 이 자리에서 미처 얘기하지 못한 주제 중 하나가 잡지 <사상계>입니다.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 이전의 한국에는 <사상계>가 있었지요. 1953년 장준하 선생이 창간한 종합교양지이자 지적 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이 잡지의 흥미로운 배경은 '문화자유회의'라는 조직입니다. 1950년 창립되어 세계 35개국에 지부를 건설했던, '자유세계' 진영 지식인들의 대대적 연대인데요. CIA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던 전력도 있지요. 또 문화자유회의의 가장 대표적인 잡지라고 할 수 있었던 영국의 잡지 <엔카운터>를 열렬하게 수용했던 잡지가 <사상계>고요. 결국 박정희 정권의 탄압 때문에 흐지부지 종간되었지만, 그런 외부적인 이유 말고도 <사상계>의 자체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부분은 흥미롭습니다.

 

지식인들의 친미 성향의 시발점이 1960년대에 있다는 걸 잘 보여준 사례기도 합니다. 일본 식민주의 유산을 극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압도적으로 미국 학문의 영향권 하에 놓이게 되었잖아요. 1만 명 이상의 유학생들이 미국으로 갔고, 그들이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 엘리트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요.

 

권보드래 선생과 천정환 선생은 국문학계의 '문학' 연구에서 '문화'연구로 방향을 전환한 첫 세대인데요. <1960년을 묻다>가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성과의 최대치는 아니겠지만 앞으로 더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잘 예시한 책입니다. 기존의 문학사와 다른 차원에서 맥락을 새롭게 보여주지요. 맥락 속에 놓고 보니까 전혀 다르게 보이고 새롭게 인지되는 부분들이 이 책의 큰 미덕입니다.

 

김용언 : 저는 두 가지 부분을 꼽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아프레 걸(après girl)' 이후를 다룬 챕터입니다. 전후 1950년대, 개인의 자유를 매우 활발하게 모색하던 시기에 실존주의의 맥락 속에서 자유분방한 아프레 걸이 남성들을 두렵게 만드는 존재로 급부상하지요. 1930년대 '모던 걸'보다 훨씬 예외적인 존재로 부각되었지만 그녀들은 4·19 이후에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젊은 사자들'이라 불렸던 '남성' 대학생으로 순식간에 사회적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여성은 가정으로"라는 건전한 목소리가 사회에 울려퍼졌다는 것, 저로서는 어떻게 갑자기 여성에 대해서만 급속하게 보수화될 수 있었는지가 이해가 잘 가지 않을 만큼 놀라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의 정치 세력화의 가능성이 돌이킬 수 없이 수그러들었지요. 우리가 68혁명 얘기할 때 항상 60년대가 끝나고 보수반동의 70년대가 시작됐다는 레토릭을 많이 쓰잖아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미 그 '혁명'의 60년대에 여성이 끼어들 자리가 차단이 되어있었고 그 자리를 '젊은 가부장'이 채웠다는 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이현우 : 이 주제에 대한 단행본도 나와 있죠?

 

김용언 : 네, 저자 권보드래 선생님이 <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동국대학교출판부 펴냄)를 쓰셨더라고요.

 

이현우 : 해방 이후 50년대까지 여성 권익에 대한 의식이 급격하게 신장하다가 60년대 중반 들어와서 갑자기 보수화되는 과정을 겪는 건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이를테면 아프레걸 챕터 말미에는 1960년대 중반부터 신사임당의 표상이 선동되었다는 구절이 나오지요. 저도 70년대 초등학교 시절, 여학생들의 장래 꿈이 죄다 현모양처였던 게 기억납니다.(웃음) 책에서는 당시 최고의 여성잡지였던 <여원>이 1965년 신사임당 특집기사를 냈다는 것도 조명하잖아요. '현모양처=신사임당'이라는 공식이 이 시기에 만들어져서 80년대 초반까지 계속 이어졌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됐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60년대가 또 다른 기원이 된 거죠.

 

 

 

김용언 : 두 번째로 관심 있게 읽었던 부분은 교양의 구성입니다. 특히 전혜린을 설명하는 부분이요. 책에서는 전혜린을 두고 지성과 표현양식을 갖춘 "새로운 유형의 인간-여성"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그녀를 양육한 건 "식민지근대성과 그 시대의 교양주의"였고 "식민지 최상층 엘리트가 가진 돈과 문화자본에 의해 (길러진) 예외성과 천재성의 사회적·가정적 토대"였음을 지적하고요.(408~409쪽)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혜린이 일종의 '가당치 않은 문학소녀'의 느낌으로 놀림 받기도 합니다.(웃음) 전 중학교 때 우연한 기회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혜린 지음, 민서출판사 펴냄)의 삼중당 문고판을 읽으면서 컬처 쇼크를 받았거든요. 이 사람은 60년대 초반에, 90년대의 내가 여전히 가닿지 못하는 세계를 이미 성취했고 불과 내 나이 또래부터 비범한 교양을 쌓았다는 것에서 엄청난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저한테는 전혜린이 롤모델이었단 말이죠!(웃음)

 

그런데 <1960년을 묻다>를 통해 교양의 구성에 필요한 계급적 토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고, 60년대 근대화를 열망하는 제3세계 국민의 '자기계발'로서의 교양에 대해서도 좀 더 파고들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전혜린으로 대표되는 당시 지식인에 대해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현우 : 하다못해 <이방인>이나 <데미안> 등의 작품이 지금도 가장 많이 읽히는 고전이며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라고 강조되지요. 이게 한국에서만 유독 권장되는 도서 목록의 일부분입니다. 그 분위기의 뿌리가 60년대에 있다는 거지요. 그 주입된 교양의 뿌리가 불과 50여 전에 연원하고 있다는 점, 교양에 대한 혹은 독서나 고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의 많은 부분이 이 시기에 형성되어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일깨워주었어요.

 

이권우 : 한국 현대사에서 특정한 세대로 명명된 것은 4·19세대와 386세대밖에 없어요. 그리고 '세대'라는 이름 앞에 국가정체성에 도전하는 혁명에 준하는 사건이 있지요. 즉 4월 혁명과 광주민주화항쟁을 말하는 겁니다. 전 이번 대선 결과가 386세대의 역사적 역할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젊은 세대가 386세대의 꿈과 좌절, 이상을 분석하고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열어갈 때가 된 듯합니다. 소위 '88만원 세대'라는 치욕적인 이름을 부여받은 젊은 분들이 이 책을 보면서 조금 더 정치적 각성, 문화적으로 새로운 도전이 활발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통해 386세대가 4·19세대에게 도전하듯, 이제 젊은 세대가 386세대에게 답을 요구할 시점인 겁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386세대 역시 <1960년을 묻다>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386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백기완, 송건호, 임헌영 외 지음, 한길사 펴냄)을 읽고 자랐지요.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남북한의 역사를 읽으면 콤플렉스를 느낀 세대지요. 그런데 <1960년을 묻다>를 보면, 남북한 두 체제가 동일한 파국으로 향하고 있지 않았나라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됩니다. 1960년대에 대한 이 386들의 문화사적인 접근을 읽는다면,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으면서 느낀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제 바람은 <1940년대를 묻다>라는 책이 나오는 겁니다.(웃음) 이전 성과를 바탕으로 일제 말기와 해방,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문화사를 정리해준다면 더 중요한 대목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현우 : 저로서는 <1970년대를 묻다>를 기다리는 쪽입니다.(웃음) 저자들이 60년대를 정리한 다음 할 얘기가 더 많이 있을 것 같은데, 그 후행 연구가 70년대로 이어지길 개인적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13.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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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독서>(웅진지식하우스, 2013)의 서문을 옮겨놓는다. 미리보기로도 읽어볼 수 있지만, 이 서재에도 걸어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다. 서문을 포함해서 목차의 제목들은 모두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책의 처음 가제는 <마담의 서재>였다. 아마 그렇게 결정됐다면 전혀 다른 표지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일곱 편의 고전에 대한 강의를 묶은 책입니다. 대학 안팎에서 고전에 대한 강의를 여러 해 동안 해오고 있는데, 강의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독서'의 제안이고 권유입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독서의 가치를 새삼 강조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책을 읽지 않는 무독서도 하나의 선택이고 그것이 삶의 신조인 분도 계시겠지요. 한편에 독서가가 있다면 다른 편에는 무독서가도 있을 법합니다. 제 관심은 무독서가가 아니라 독서가, 그리고 잠재적 독서가에 가 있습니다. 평소에 책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기는 분이 독서가라면, 독서의 가치에 공감하고 책을 읽고 싶지만 어떻게 읽어야 할지 자신이 없거나 경험이 부족한 분들을 잠재적 독서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비 독서가라고 할까요. 이 강의는 그런 분들을 위한 독서의 시범 같은 것입니다.


잠재적 독서가는 물론이고 아무리 책을 남들보다 많이 읽는 독서가라 할지라도 모든 분야의 책을 두루 망라해서 읽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필독할 만한 고전에 한정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독서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래서 길잡이가 될 만한 가이드북이 필요하고 로드맵이 필요합니다. 한정된 시간을 좀 더 유익한 독서에 할애하기 위한 방도이고 곁눈질이지요. ‘나는 이렇게 읽는다’라는 독서의 시범은 그런 용도로서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타일의 독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참고해볼 수 있는 것이죠.


주로 문학고전 독서에 관심을 가진 분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그것을 책으로 엮으면서 제가 고심한 것은 ‘규모’입니다. 이 책의 각 장은 대부분 두 시간짜리 강의를 풀어서 편집한 것입니다. 실제 강의한 내용에서 분량을 많이 덜어냈기 때문에 짐작으론 90분 강의 정도의 분량일 듯합니다. 이러한 시간상의 제약과 형식적 제약은 동시에 강의의 조건이기도 한데, 그 정도 분량 안에서 작가와 작품에 대해 요령 있게 소개하고 흥미를 부추김과 동시에 제 나름의 해석을 보태고자 했습니다. 이런 경우, 너무 간략해도 안 되고 너무 자세해도 곤란합니다. 너무 가벼워도 안 되고 너무 무거워도 안 됩니다. 너무 식상해도 안 되고 너무 생경해도 안 되지요. 그러면서 재미도 있어야 하고, 우아하면 더 좋습니다. 그래서 그런 결과를 얻었는지에 대해선 제가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런 걸 염두에 두었다고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시범 조교의 역할은 절반만 보여주고 나머지 절반은 실제로 해보도록 보조하는 것이죠. 가령 자전거를 탈 때도 처음에는 누가 뒤에서 붙잡아주는 게 필요합니다. 몇 차례 그런 도움을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스스로 탈 수 있게 되지요. 독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길잡이가 될 만한 책을 읽고 도움을 얻게 되면 곧 스스로 책을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읽었던 책이라도 다시 읽고서 새로운 발견을 하거나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이 그런 자극과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로선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책의 제목은 <아주 사적인 독서>로 정했습니다. ‘사적인’이란 말이 여러 가지 뜻을 가질 수 있지만 여기서는 ‘남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독서’라는 의미로 쓰고자 합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교양으로서의 독서는 ‘읽은 척 매뉴얼’을 참고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아주 사적인 독서’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독서를 가리킵니다. 나의 관심과 열망, 그리고 성찰을 위한 독서입니다. 그런 독서의 과정에서 우리는 고전과 나 사이의 사적이고 은밀한 관계를 각자 만들어나가게 됩니다. 강의에서 간간이 제가 작품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이나 견해를 서슴지 않고 제시한 것은 그런 ‘사적인 독서’의 일면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다룬 작품은 <햄릿>부터 <돈키호테>, <파우스트>, <석상손님>, <마담 보바리>, <주홍글자>, <채털리 부인의 연인>까지 일곱 편입니다. 모두 ‘욕망’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는 게 공통점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순서로 목차를 짜려고 했지만 주인공의 성별에 따라 각각 남성 편(<햄릿>, <돈키호테>, <파우스트>, <석상손님>)과 여성 편(<마담 보바리>, <주홍글자>, <채털리 부인의 연인>)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되자 ‘레이디 퍼스트’의 정신에 따라서 여성 편을 앞에 배치했습니다. 어떤 장을 먼저 읽을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지만 제가 권장하고 싶은 것은 ‘여성 편’을 순서대로 읽거나 ‘남성 편’을 순서대로 읽는 것입니다. 가장 유명한 서양문학 고전들에 나타난 여성적 욕망과 남성적 욕망이 어떤 것인지 일람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저로선 기쁘겠습니다

 

짐작에 푸슈킨의 <석상손님>이 다소 생소할지 모르지만 가장 대표적인 <돈 후안> 텍스트로 고른 것이고, 그렇게 따지면 너무도 유명한 작품들만 모아놓은 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상 이 작품을 모두 읽은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안 읽는 책’이 고전이라는 말이 그래서 농담만은 아닙니다(어떤 고전 가이드북은 아예 제목이 <아무도 읽지 않는 책>입니다!). 아무래도 ‘고전’이란 말 자체가 ‘남들은 좋다지만 나와는 무관한 책’, ‘괜히 남들 따라 읽느라고 고생하는 책’이란 인상을 심어주는 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그래서 ‘고전에 대한 강의’도 덩달아 ‘나와는 무관한 강의’란 애꿎은 누명을 덮어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강의에서, 그리고 이 책에서 저는 고전을 최대한 우리 가까이에 갖다놓고 싶었습니다. 가까이 갖다놓는다는 게 집 현관에 갖다놓거나 부엌에 갖다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작품이 갖는 보편성을 발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발견은 자기 발견의 구문으로 이루어집니다. ‘나는 햄릿이다’, ‘나는 돈키호테다’, ‘나는 보바리다’라는 식입니다.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각자가 자기 안의 햄릿과 돈키호테와 파우스트와 돈 후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배합비율까지도 예민하게 의식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주인공들이 바로 근대인의 전형적 초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그렇다면 이 작품들은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고뇌와 욕망과 광기와 탄식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것이 고전이 갖는 현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칫 진부해보일지도 무르는 주인공들의 물음에 나의 물음이 포개질 때, 고전 독서는 시간이 남아돌 때나 가능한 독서가 아니라 필수적인 독서의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고전 강사, 곧 '고전을 읽어주는 사람'으로서 제가 기대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 수록된 강의는 대부분 제가 개인적으로 6년째 진행해오고 있는 책사랑 강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책사랑은 고전 애독자들의 자발적인 독서모임입니다. 매학기 16주씩 커리큘럼을 짜고 매주 수요일 오전에 함께 고전을 읽는 강좌를 지속해온 것이 저에겐 독서의 또 다른 자극이 됐고 공부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강의에 참석해준 회원들께 이 자리를 빌려서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녹취된 강의를 풀어서 초고를 만들고 편집자로서 책의 꼴을 만들기 위해 애쓴, 게다가 더디게 진행된 교정 작업을 인내해준  박혜정 편집자에게도 특별한 감사를 표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었기에 저에겐 모두가 좋은 인연입니다.  

 

13.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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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강의 공지다. 날이 좀 풀리면서 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데, 3월부터는 강의만으로도 분주할 듯싶다. 오늘 대구현대백화점에서 1-2월에 진행한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마지막 강의가 있었고, 3-4월에는 '보르헤스가 초대하는 바벨의 도서관'이란 타이틀의 강의를 진행한다. 보르헤스가 직접 고르고 해설을 붙인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의 여섯 작품을 6주에 걸쳐서 읽어보는 강의다(http://blog.naver.com/hcntculture/130158924413). 일정은 아래와 같다.

 

 

 

보르헤스가 초대하는 바벨의 도서관
금 15:30~17:10 (3/8 개강)

 

3.8 I 에드거 앨런 포 <도둑맞은 편지> - 19세기 최대의 독창가

에드거 앨런 포가 심연의 공포에서 길어 올린 환상

 

 

3.15 I 너새니얼 호손 <큰바위 얼굴> - 미국문학의 뿌리

<주홍글자>로 알려진 호손의 칩거와 몽상에 관한 우화

 

 


3.22 I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 미국문학의 고전

삶의 불행과 고독을 관통하는 멜빌의 독특한 상상력

 

 

3.29 I 빌리에 드 릴아당 <지난 파티에서 만난 사람> - 낭만적 상상력, 대담한 풍자

 

 

4.5 I 프란츠 카프카 <독수리> - 20세기 문학의 대표자

세계문학사상 가장 독특한 작가 카프카의 슬픔과 지연의 이중주

 

 

4.12 I 잭 런던 <미다스의 노예들> - 미국문학의 대표자

끝없는 방랑의 작가 잭 런던이 보여주는 극한적 삶

 

 

13.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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