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값이 좀 세긴 하지만 지난주에 나온 한국문학 관련서로 가장 탐나는 책은 이상문학회에서 기획한 <오감도> 전작 해석집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수류산방, 2013)다. 소개는 이렇다.

이상문학회가 기획하고 수류산방이 펴낸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이상의 <오감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는 이상 시의 핵심으로 지목되지만 한국 문학사상 가장 난해하다고 평가되는 <오감도> 연작 15편 전체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전작 해석집이다. 이를 위해 이상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대표적 현역 문학평론가와 한국 문학 연구자 17명이 한 책에 모였다.

 

필진은 김인환, 황현산 등 원로로부터 신형철, 조연정, 함돈균 등 소장 평론가/연구자까지 두루 망라돼 있다. 이 중 함돈균, 신형철 평론가의 박사학위논문이 이상 연구인 것으로 아는데, 함돈균의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 이상 시적 주체의 윤리학>(수류산방, 2012)가 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이상 연구도 기대가 된다. 소장 연구자들의 논문모음으로는 <이상 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역락, 2006)이 있었다.

 

 

 

이상 연구와 관련하여 내가 처음 읽은 책은 고은의 <이상 평전>(청하, 1992; 향연, 2003)과 함께 김윤식 교수의 책들인 듯싶은데, <이상 연구>(문학사상사, 1987), <이상문학 텍스트 연구>(서울대출판부, 1998), <이상의 글쓰기론>(역락, 2010) 등이 거기에 속한다(<이상 연구>가 절판된 건 유감이다). 김윤식 교수가 엮은 문학사상사판 이상문학전집(전5권)이 내가 처음 구비한 전집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절판된 듯싶다.  

 

 

이후에 나온 전집으론 김주현, 권영민 교수가 각각 엮은 전집판이 있다. 각각 <정본 이상 문학전집>(소명출판, 2009, 전3권)과 <이상 전집>(뿔, 2009, 전5권)이다(뿔에서 나온 전집은 일부 품절 상태다).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어떤 판본이건 전집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이상적인 이상 독자에 대열에 들어가볼 수 있겠다. 소설에 한정하면 권영민 교수가 엮은 <이상 소설 전집>(민음사, 2012)이 요긴하다.

 

 

거기에 더 보태자면 권영민 교수의 <이상 문학의 비밀 13>(민음사, 2012), 김민수 교수의 <이상 평전>(그린비, 2012), 그리고 신범순 교수의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현암사, 2007)까지 꼽아볼 수 있다. <13인이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란 제목에 괜히 마음이 들떠 생각나는 책들을 적어보았다...

 

13. 03. 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인'이라 하면 무슨 별종 같지만 암튼 책을 좋아하는 독서인들이라면 빙긋이 미소를 지을 만한 책이 출간됐다. 정수복의 <책인시공>(문학동네, 2013). 사회학자이면서 한때 방송인이었던 저자는 '걷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보태자면 '읽는 사람'이기도 하다. 책의 부제는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다. '책 읽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제목의 '책인'인 것(조어 자체는 '책 만드는 사람'을 뜻할 수도 있다). 

 

 

 

저자가 서두에 '독자 권리 장전'을 붙인 게 눈에 띄면서 재미있는데, 나도 언젠가 읽은 다니엘 페낙의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 2004)에 나오는 '독자의 절대적 권리 선언'을 보완한 것이다. 좀 밋밋한 제목을 베르나르 베르베르 버전으로 바꾸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독자 권리 장전'쯤 되겠다. 그 권리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책 제목은 <책을 읽을 권리>라고 해도 무방했겠다. 언제(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장소에도 구애받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저자는 17가지의 권리를 나열한다. 설명은 생략하고 항목만 나열하면 이렇다.

 

1. 책을 읽을 권리

2. 책을 읽지 않을 권리

3. 어디에서라도 책을 읽을 권리

4.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

5. 책을 중간중간 건너뛰며 읽을 권리

6.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7. 다시 읽을 권리

8.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9.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을 읽지 않을 권리

10. 책에 대한 검열에 저항할 권리

11. 책의 즐거움에 탐닉할 권리

12. 책의 아무 곳이나 펼쳐 읽을 권리

13. 반짝 독서를 할 권리

14. 소리내서 읽을 권리

15. 다른 일을 하면서 읽을 권리

16. 읽은 책에 대해 말하지 않을 권리

17. 책을 쓸 권리

 

저자의 말대로 이것은 '시안'이다. 그래서 '상대적이며'란 말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사실 이런 권리라면 남못지 않게 누리고 있는 터여서(남용 수준이라고 할까) 마치 '나의 권리'를 읽는 듯하다. 이 가운데 <책인시공>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주로 '어디에서라도 책을 읽을 권리'와 '언제라도 책을 읽을 권리'다. 제1부 '책을 읽는 시간'이 후자와 관련된 것이라면, 제2부 '집 안에서 책을 읽다'와 제3부 '집 밖에서 책을 읽다'는 모두 전자와 관련된 것이다. 개인적으는 '집 밖에서 책을 읽다'에 한몫 거들고 있어서 반가운데 저자가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의 한 대목을 인용해서다. 

 

김훈의 책을 읽는 가장 좋은 장소는 어디일까? 내 경험에 의하면 저녁시간에 좀 한산한 시내버스이다. 나는 십년도 더 전에, <풍경과 상처>에 맨처음 실린 글이 책으로 묶이기 전에 바로 그 저녁 버스 안에서 읽었고, 읽으면서 황홀했다. 지방 소도시에서 방위생활을 하다가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서 산 책의 말미에 그 글이 붙어 있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던 것인지. 나는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 부분을 에어콘이 고장 나 창문을 열어 놓고 달리는 저녁 버스의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읽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책장을 넘기며 그의 글들을 읽을 때, 나는 이 세상에 그만 안 있어도 좋을 듯했다. 

 

요즘 버스 안 조명이 그리 밝은 편은 아니지만, 여하튼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책장을 넘기며 달리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그 정도 행복은 누릴 권리가 우리에겐 있다...

 

13. 03. 10.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3-10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의차 오랜만에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포가 건드린 다양한 형태의 미스터리물들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이럴 땐 일차적으로 관련서를 모두 모아놓는 게 상투적으로 하는 일인데 '미국추리작가협회 지음'으로 돼 있는 <미스터리를 쓰는 방법>(모비딕, 2013)도 관련서의 하나다. 아직 '미스터리 걸작선'들에까지 손을 댄 건 아니지만 경험상 '작법'은 언제나 '독법'으로도 유용하기 때문이다.

 

 

곧 <미스터리를 쓰는 방법>은 거꾸로 <미스터리를 읽는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급수를 맞춘다고 할까. 추리소설 작가에게는 <현대범죄수사> 같은 범죄 수사 교과서나 <법의학, 병리학, 독극물학> 같은 법의학 교과서, 그리고 <범죄학 개론> 같은 경찰학 교과서들이 그것도 최신판으로 필요하다고 하는 대목에선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검색은 해봤다.

 

 

 

'교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한국의 연쇄살인>(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한국의 CSI>(북라이프, 2011)가 많이 팔린 책이고, 전대양의 <범죄수사>(21세기사, 2013)는 거의 안 팔리는 책이지만 두툼한 대학 교재다. 경찰행정학과 같은 곳에서 교과서로 쓰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추리소설 작가들도 이런 류의 책들을 여럿 구비하고 있을 터이다.

 

 

 

검색하다가 알게 된 저자는 독일의 법의곤충학자이자 과학수사 전문가 마크 베네케인데, 의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알마, 2008), <연쇄살인범의 고백>(알마, 2008), <살인본능>(알마, 2009) 등의 책이 눈에 띈다. 이 정도면 추리소설 작가뿐 아니라 독자들도 눈여겨볼 만한 것 같다.

 

 

국내 법의학자가 쓴 책으론 이윤성의 <법의학의 세계>(살림, 2003)이 소개서이고 '대한민국 최초 법의학자' 문국진의 <법의관이 도끼에 맞아죽을 뻔했다>(알마, 2011), <죽은 자의 권리를 말하다>(글로세움, 2012) 등이 읽어볼 만하겠다. 이 역시 독자들에게도.

 

 

범죄학 개론서는 국내서도 좀 나와 있는데, 번역서 가운데서는 Larry J. Siegel의 <범죄학>(Cengage Learning Korea, 2012)이 최신판이다. (그린, 2012)도 무게감이 있는 책인데, 책에 관한 정보는 올라와 있지 않다. 앨런 군의 <범죄수사를 위한 필수 법생물학>(월드사이언스, 2011)도 2판인 걸로 보아 이 분야에서는 읽히는 책인 모양이다. 

 

물론 미스터리를 위해서라면 그밖에 많은 미스터리물에 대한 독서도 필수이겠지만 이런 류의 참고도서도 기본적으로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 <미스터리 쓰는 방법>은 이런 충고까지 보탠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법률, 법의학, 탄도학, 지문과 음성인식 등 범죄와 관련된 분야를 다루는 정보가 엄청나게 많으며, 새로운 과학기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따라서 항상 가까운 도서관에 가 필요한 책을 찾아보길 권한다.(10쪽)

우리의 '가까운 도서관'에 '필요한 책'이 꽂혀 있을지는 심히 의문스럽지만, 여하튼 미스터리 소설을 쓰기 위해서도, 그리고 읽기 위해서도 우리는 항상 도서관을 애용하도록 해야겠다. 아, '범죄도서관'이라는 게 있다면 딱 좋을 듯하군...

 

13. 03. 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독도서관에서 열린 벤야민 심포지엄에 들렀다 귀가하는 길에 집어든 주말판 경향신문에서 목수정 작가의 '해외 책' 란을 읽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081935545&code=900308). 국내엔 <부자들의 대통령>(프리뷰, 2012)이 번역돼 있는 사회학자 팽숑 부부의 신작 <돈, 양심도 법도 없는>(2012)을 소개하고 있는데, 흥미로울 뿐더러 필독할 만한 이유가 충분한 책이다. 언젠가 언급한 바로우파키스의 <글로벌 미노타우로스>(2013)와 함께 번역되면 좋겠다...

 

 

며칠 전 포브스는 지난해 세계 최고 거부들 리스트를 발표했다. 10억달러 이상을 소유한 갑부들의 수는 27년 전 리스트가 발표되기 시작한 이래 최고치였다. 1426명. 지난해에 비해 200명이 늘었다. 이 1426명의 거부들은 5조4000억달러를 소유하고 있다. 27년 전 거부 숫자는 140명이었고 이들이 소유한 재산은 2950억달러에 불과했다. 반면 세계 인구의 20%는 여전히 하루 1달러도 되지 않는 돈으로 살아간다. 분명 상황은 더 악화되어 간다. 지구촌 거의 모든 곳에서.

 

 

<부자들의 대통령>의 저자이자 부자 전문연구자로 유명한 사회학자 커플인 모니카 팽송과 미셸 팽송은 “과연 돈이 언제부터 이렇게 미쳐 돌아가기 시작했는가”를 새 책 <돈, 양심도 법도 없는>(L‘argent sans foi ni loi·2012)에서 묻고 답한다. 돈은 분명 인간사회를 좀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해 물물교환 대신, 그리고 조개껍데기 대신 생겨난 거 아니었어? 그런데 지금 돈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저자는 돈이 언제부터 유용한 도구의 위치를 넘어 한줌도 안되는 인간들이 나머지 모든 인간들을 지배하는 데 사용하는 ‘무기’가 돼 버렸는지를 쉽고 명확한 언어로 설명한다.

 

(...)

프랑스에서의 최근 상황 악화는 부자들에게 상상을 초월한 혜택을 베풀며 계급전쟁을 지배계급의 완전한 승리로 이끈 사르코지의 영향이 크다. 덕분에 프랑스 부자들이 스위스 계좌에 예치하고 있는 자산은 800억유로에 이르는 반면 이틀에 한 번 이상 단백질이 포함된 식사를 할 수 없는 프랑스 아이들의 숫자는 8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

 

불행하게도 상황은 지구촌 어디나 비슷하고, 다행스러운 점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해법도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금융 천국 스위스에서 기업 간부들이 고액 연봉을 나눠 갖는 것에 제동을 거는 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것처럼. 우선 도구여야 할 돈이 도끼가 되어 우리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것을 저자들은 요구한다. 대화로 풀어낸 가벼운 책 속에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타락한 돈의 민낯이 담겨 있다. 책장을 덮고 나면 주눅들었던 마음이 왠지 상쾌해진다.

13. 03. 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시안의 '3인 1책 전격수다'를 발췌해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308163736§ion=03 참조). 이달에 고른 책은 교사들의 현장 체험담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교육공동체벗, 2013)이다. 월간 <오늘의 교육>에 실렸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프레시안(13. 03. 08) 교실에서 '죽어가는' 교사들…"우리는 개가 아니다!"

 

(...)

 

이현우 : 제가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를 고른 이유는 이번 주가 개학이고 개강이고 해서인데요. 교육이 한국에서 워낙 중요한 이슈다 보니까 현장 교사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보는 게 의미 있겠다 싶어서였습니다.

 

이 책의 부제가 '학교의 배반'인 만큼, 현재 교육 현실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고 비관적으로 보고 있죠. 만일 이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발언하지 않는 대부분 교사들도 어느 정도 공감하고 동조하는 현실이라면, 참 암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제 아이가 중학교 입학한다며 신나게 등교했는데, 뭔가 매치가 안 되는 겁니다. 매번 학년이 올라가고 새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난다며 아이들이 기대를 품는 바에 달리, 이 책에서는 정작 선생님들이 교육 현실에 대해 갖는 생각이 지극히 비관적이고 부정적으로 토로됩니다. 이쯤 되면 대체 교육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거죠.

 

이권우 : 이 책은 교사들이 교단에서 겪는 잔혹사에 대한 증언록이죠. '우리는 이렇게 당하고 있다, 교사로서의 자율성이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학교 사회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교사들이 제도적으로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왜 교사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을 하지 못하는 건지, 또 근본적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그 교육이 진정한 교육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김용언 : 한국 사회에서 교육과 관련을 맺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잖아요. 학생이거나 교사거나 학부모거나 학생이었거나. 이 책에서는 교사들이 주로 승진과 얽혀있는 학교 내부 시스템과 몇 년마다 바뀌는 교육 정책 때문에 가르치는 일 자체에 혼동을 겪게 되는 내외적 조건들을 이야기합니다.

 

제 느낌으로는 책 전반적으로 학교 내적 문제에 더 치중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침묵의 암묵적인 카르텔이 형성된 상황에서 거기 대해 발화한다는 것 자체가 큰 사건일 순 있겠지만요. 그래도 교사 입장이 아닌 사람이 봤을 때에는 외적 시스템 문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더 궁금하긴 했거든요. 정의진 교사의 글 '끊임없이 '달리다' : 집중이수제가 휩쓸고 간 지난 학기 수업 풍경'이 그런 의미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최근에 교육과정이 얼마나 자주 개정되었는지 이제는 교사들도 헷갈린다. 교육과정 개정 횟수만 보면 가히 '교육혁명'의 시대다. 작년은 그 절정을 보여 주는 한 해였다. 중3(현 고1)은 2007 교육과정, 중2(현 중3)는 2007 개정 교육과정, 중1(현 중2)은 2009 개정 교육과정을 각각 따로 적용받았던 것이다(이 부분은 읽다가 숨 한번 쉬어 줘야 한다).

 

이권우 : 우스갯소리로, 전 이 책을 보면서 댓글 단 국정원 직원이 생각났습니다.(웃음) 뛰어난 실력으로 국정원에 취직했는데, 위에서 요구한 건 인터넷상의 여론을 현 정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특정 댓글을 달라는 거였죠. 교사들이 겪는 고충도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교사가 되는 건 굉장히 치열하고 어렵지요. 아예 교사 T.O가 나지 않아 시험 준비를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채용됐는데, 소속 기관이 교사들에게 요구되는 특정 역할에서 갈등이 빚어집니다. 이런 뒷얘기도 있어요. 국정원 직원은 퇴근하면 댓글을 안 달았다면서요.(웃음) 분명 공무 수행이 맞았던 겁니다. 하지만 교사들은 6시 이후에도 퇴근하지 못하고 또 다른 할 일들을 맞닥뜨립니다. 교사는 조직 구성원으로서 지시 사항을 따라야 하지만 동시에 그걸 넘어서야 하는 직업적 특수성이 있습니다.

 

이현우 : 김용언 기자는 학교 내부 사정을 토로하는 부분이 좀 아쉬웠다고 했는데, 전 그게 오히려 인상적이었어요. 이 책은 학교 내 행정 업무와 승진 시스템에 대해 많이 다루고 있죠. 사실 교사는 한국에서 직업 만족도가 가장 높은 직업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만족도를 보이는 게 초등학교 교장입니다.(웃음) 승진을 지향하는 교사들로서는 지금 잘 버티면 나중에 그만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걸 믿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책의 저자들이 토로하는 바, 밖에서 볼 때와 안에서 볼 때의 갭이 굉장히 크다는 거지요.

 

 

승진을 위해, 나는 교장의 개였다

이권우 : 얼마 전에도 장학사 선발시험 문제가 유출된 사건이 터졌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이 책에 담긴 교사들의 잔혹사가 객관적 사실이라는 거죠. 전 이 책을 통해 진정한 교육을 불가능하게 하는 세 가지 문제를 얘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승진 체제, 교사의 정치적 자율성, 마지막으로 비정규직 교사 문제입니다.

 

장학사, 교감 혹은 교장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교사 업무보다 잡무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오지요. 일제의 유산이라고 해야 할 텐데, 한국에선 짧은 기간 내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사범대를 만들었고, 그 사범대가 아무래도 국립대학 중심이기 때문에 각 지역 거점 대학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라인'이 형성되었고 부조리한 문제가 비합리적으로 해결되는 구조가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먼저 승진을 위해 교사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행하는 잡무가 지나치게 많다는 문제 제기가 나오지요. 사실 학교 행정 업무는 행정 직원이 맡아줘야 하는데 그런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교사에게 전적으로 떠맡긴다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지요.

 

김용언 : 강아지똥 교사의 글 '내가 겪은 몹쓸 일, 방과후학교'를 읽으면 정말 실감나더라고요.

 

이현우 :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네이스)가 2011년 도입되면서 업무량이 폭증했다고 하죠.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의 글 '슬픈 사람, 안혜영'에 보면 희망에 부풀어 있던 신임 교사 안혜영 씨가 출근 첫날부터 맡은 업무가 바로 학적이었지요. 모두가 패닉 상태에 빠졌던 그 네이스 시스템 앞에서 신임 교사 안혜영 씨도 엄청난 좌절을 느꼈을 테고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한 달 만에 자살하고 맙니다.

업무 때문에 수업 준비할 시간이 너무 없다. 수업 준비도 제대로 못 한 채 아이들 얼굴을 만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

 

이 정도의 고통으로 자살까지 감행했다면 다른 교사들이나 교육 행정 담당자도 모두 이 시스템의 문제점을 알고 있을 텐데, 왜 해결이 안 되고 있는지 수수께끼입니다.

 

이권우 : 일종의 세대 착취 문제 아닐까요. 지금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집단은 여태껏 자기들이 해왔으니까 마땅히 너희들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죠. 거기서 비민주적 권위의식이 발동하고요. 또 새로운 행정 직원을 채용하지 않은 채 교사에게 맡겨버리면 돈이 적게 든다는 편의성도 있을 테고, 이런 방식으로 젊은 교사 길들이기 목적도 있어 보입니다.

 

이현우 : 저도 그 점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또 승진 관련해서 교사 평점을 매기는 부분에 있어 교장이 전권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책 속에서 어떤 교감 선생님은 '난 교장의 개였다'라는 자조적인 표현을 쓰지요. 과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권우 : 승진 점수를 받기 위해 일정 기간 벽지 초등학교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을 보노라면 그쪽 초등학교 교장이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렇다면 사립학교는 승진 문제에 있어 과연 어떨지 능히 짐작이 가는 상황이죠. 교육을 잘하는 선생님들이 승진하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라 승진하기 위해 교육 업무를 폐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겁니다. 승진과 교육이 서로 갈등을 일으켜요.

 

이현우 : 승진을 위해 교육청에서 불러주기만을 기다린다는 얘기도 나오잖아요. 이민아 교사의 글 '다시 쓰는 행복 인생, 3막 1장'을 보면 "학교를 퇴근함과 동시에 다시 교육청으로 출근하는 생활"을 하면서 "교육청 행사 추진에서부터 장학 자료 만들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교육청 일을 참 많이도 했다"고 고백합니다.

 

이권우 : 아주 솔직한 대목을 하나 볼까요. 가르치지 않기 위해 승진하려는 교사들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이 수업에 얼마나 집중하지 않고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지, 좋은 학교 진학만을 따지는 학부모들의 요구가 얼마나 거친지 잘 압니다. 그 상황에서 교사가 가르치는 자리에 연연하기보다 차라리 편하게 업무를 관장하는 자리로 승진하려는 욕구를 갖는다는 건 실질적으로 이해 가능합니다. 문제는 승진 체제에 있어요. 교육을 잘하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선생님이 승진하는 게 아니라 승진 자체를 위해 잡무를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아까 언급하신 이민아 교사의 경우 승진 체제에 정신없이 편승하다가 결국 그 안에 휩쓸리기를 거부한 분인데요. 이 대목을 한번 보지요.

 

출근하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만 두드리고 있을 때가 많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어떤 날은 수업 시간에 모니터 옆에 교과서를 펴 놓고 일을 하면서 아이들에겐 대충 설명으로 시간을 때워 버리기도 했다. 차라리 교사가 아니라 회사원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 적어도 교실에서 아이들 없이 마음껏 일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현우 : 대학에선 총장을 퇴직하고도 평교수로 다시 강단에 설 수 있잖아요? 하지만 초·중·고등학교에선 교장이 마지막 보직이고, 거기서 정년퇴직합니다. 교사는 평교사로 퇴직하느냐 교장으로 퇴직하느냐 두 갈래 길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후자를 선택한다면, 승진을 위해 굉장히 많은 '관리'를 해야 하죠. 아이들에게 충실하기보다 상급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러 과도한 업무를 견뎌내야 하는데, 그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이런 전근대적 관행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가슴 아픈 딜레마도 있죠. 아이들이 나이든 교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보직보다는 교사로서의 업무에 더 큰 만족감과 사명감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텐데, 평생 성실하게 교직을 수행해온 이분들이 교단에서 실패한 자, 낙오한 자 대접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평교사-실패한 자, 교장-성공한 자로 나뉘는 교단 문화 자체가 달라지지 않으면 교사들의 절망이 상당 부분 해소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

 

13. 03. 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