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책과 지식'란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토머스 프랭크의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갈라파고스, 2013)에 대한 것이다. 2009년 이후 미국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티파티 운동과 함께 보수주의가 득세한 일)에 대한 자세한 보고와 함께 신랄한 비평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중앙일보(13. 02. 16) 좌파는 모르고, 우파는 알았던 것

 

197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전에서 사고가 났다. 핵연료봉이 녹아 내리고 방사성 물질이 유출돼 주민 10만 명이 대피해야 했다. 86년 구(舊) 소련에서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사고 전까지 스리마일은 최악의 원전사고였다. 원자력의 안전 신화가 무너졌다. 그런데 그런 재앙이 일어난 지 불과 며칠 뒤에 더 많은 원전을 지어달라고 요구한다면 제 정신일까.

이 책 (원제 Pity the Billionaire·억만장자를 동정하라)에서 토머스 프랭크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바로 그와 같은 일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 저명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그의 문제의식이다. 세계경제를 침체로 몰아넣은 금융위기는 자유시장이라는 이상을 우리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으며, 이에 대처하는 공화당의 무능력과 도덕적 가식을 폭로했음에도 2009년 초부터 붐을 타기 시작한 미국의 보수주의 운동은 상황을 역전시켰다.

2010년 공화당은 미국 의회 선거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고, 정부로부터 규제받지 않는 자유시장이 곧 자유의 본질이라는 주장이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저자가 보기엔 이것이 1929년의 경제공황과 현 경제위기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나는 지금의 경기불황 이전까지, 불경기의 희생양이 된 대다수가 신고전주의적 경제학에 박수를 치거나 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업적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난 적대감을 드러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1929년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진 대공황기에는 사정이 달랐다. 이 ‘어려운 시절’에 먼저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다. 자유방임주의 대신에 정부의 적자지출이라는 케인스 경제학이 받아들여졌다. 현대 산업자본주의의 탐욕적 개인주의에 반대해 공동체와 나눔의 삶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6년 미국자유연맹의장은 라디오연설에서 “뉴딜은 미국에 전체주의 정부를 만들려는 시도”라고 공박했다. 하지만 대중은 이들 보수주의자들을 조롱하면서 루스벨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 민주당은 하원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것이 프랭크가 소환하는 1930년대식 포퓰리즘의 기억이다.

뉴욕 증권시장의 대폭락이 있은 지 79년 만에 들이닥친 2008년의 금융위기는 얼핏 1929년의 ‘시즌2’처럼 보였다. 제너럴 모터스·크라이슬러가 파산을 선언했고, 리먼브라더스·인디맥·베어스턴스 등이 사라졌다. 기업만이 아니다. 퇴직금은 날아갔으며 동료들은 직장에서 쫓겨났고 제조업 공장은 작동을 멈췄다. 대출담보금은 집값을 훨씬 웃돌았고 중산층은 폭삭 내려앉았다. 재앙이 닥치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골드만삭스는 직원들에게 165억 달러가량을 보너스로 나눠주며 사치와 방종을 부추겼다. 신자유주의 혹은 ‘자유방임주의의 황금시대’에 정부의 규제완화를 틈타 현란한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어낸 트레이더들은 승승장구했고 전용기를 쇼핑하러 다녔다. 대신에 시간당 급여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팍팍해졌다. 그러다가 터진 금융위기였기에 경제부실과 실패의 책임을 물었어야 했다. 그것이 ‘금융질서’이자 최소한의 경제정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이 공황상태에 빠지기 시작하자 긴급 구제금융이 이뤄졌고 ‘금융산업계의 망나니들’은 살아남았다. “정부는 월가 지배자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게 구제금융이 던진 메시지였다. 대중들은 분노했으나 시간이 흐르자 월가의 탐욕과 도덕적 해이는 잊혀졌다. 대중의 분노가 향한 곳은 월가에서 워싱턴으로 바뀌었고, 자유시장이 아니라 정부와 세금이 도마에 올랐다. 정부의 적자지출과 구제금융에 대한 분노는 “실패한 자들은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구호로 모아졌다. 그리고 놀라운 바꿔치기가 일어났다. 분노의 표적이 긴급구제를 받은 은행들에서 ‘헤픈 이웃’들로, 곧 담보대출을 받고는 결국 길거리에 나앉아버린 방종한 사람들로 바뀐 것이다.

이렇듯 분노의 방향을 돌리는 데 일조한 인물이 폭스뉴스의 진행자였던 글렌 벡이다. 그는 경기침체와 불황이 자유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음모라는 시나리오를 전파했다. 오바마 정부의 의료보험 개혁안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그것은 미국을 끝장내는 것입니다”라며 종말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부추겼다. 또 이러한 종말과 ‘사회주의자 오바마’로부터 미국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자유시장이라는 신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자유시장이야말로 지고의 가치이고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이라는 소위 ‘시장 포퓰리즘’은 한낱 CEO들의 믿음이었지만 이제는 수백 만의 믿음이 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믿음을 기치로 내건 티파티 운동이 ‘좌파 따라하기’의 모양새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퇴직 국제정치학 교수인 안젤로 코데빌라는 미국사회에 ‘지배계급’과 ‘국민계급’, 두 계급이 존재한다고 여긴다.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주의 사관의 뒤집힌 재림이라고 할까. 지은이는 민주당의 실패가 이러한 ‘부흥 우파’의 득세를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2008년 위기와 재난에 대해서 그들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분노한 국민에게 해주지 않았다. 그 틈새를 파고든 것이 우파 이상주의자와 기회주의자였다.

2008년 금융위기를 분석하고 현 경제위기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제시한 책은 그간에 무수히 출간됐다. 이 책도 그런 범주에 포함될 수 있지만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증세에 반대하는지를 분석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에 이어 ‘대중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우파는 그것을 읽었고, 진보를 자처하는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읽지 못했다.

 

그 결과 실패한 우파가 승자가 된 나라가 미국만은 아닐 것이기에 저자의 분석을 한국적 상황에 그대로 대입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지만, 이 책의 용도는 그 이상이다. 좌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반면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 있다’라는 영국 시인 예이츠의 시구를 빌려 우파 포퓰리즘의 득세를 설명한 적이 있다. 탈정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무기력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격정에 찬 우파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파야말로 오늘날 유일한 ‘정치세력’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런 연유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뭔가 달라지기 위해선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다.

 

13. 02. 16.

 

P.S. '더 읽을 만한 책들'도 골랐는데, 모두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에서 언급되고 있는 책들이다. 특히 에인 랜드의 <아틀라스>(민음사, 2003)에 대해선 자세한 소개와 비평을 제시하고 있어서 유익한데, 한국어판은 절판된 상태다.

 

 

 

'부흥 우파'의 생각

저자 토머스 프랭크는 ‘부흥 우파’를 ‘새로운 십자군전쟁’이라고 부른다. 자유시장이라는 옛 종교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입장에서다. ‘부흥 우파’의 생각을 대변하는 책으로는 글렌 백의 『글렌 벡의 상식』(부글북스·2010)과 스티브 포브스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우리를 구할 것인가』(아라크네·2011)가 있다. 이들은 2008년 경제위기를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닌 정부개입의 실패로 본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티파티 보수주의의 경전 역할을 하는 책은 자유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에인 랜드의 『아틀라스』(민음사, 2003)다. 에인 랜드는 앨런 그리스펀의 정신적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1957년 발표된 이 ‘1000 페이지짜리 소설’의 주된 내용은 기업가 집단이 큰 정부의 탄압에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다. 전기작가에 따르면 에인 랜드는 ‘우파 진영의 존 스타인벡’이 되고 싶어 했다. 좌파에게 『분노의 포도』가 있다면 우파에게는 『아틀라스』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프랭크는 이 방대한 소설을 읽은 독자가 정작 얼마나 될지 의문스럽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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