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를 정리하던 중 비공개로 예전에 스크랩해놓은 글 가운데 '라캉과 라클라우'라는 게 있어서 '로쟈의 지젝'으로 옮겨놓는다. 몇년 전 글이지만 '라캉주의 좌파'에 대해 글을 쓸 일도 있어서 요긴한 참고가 된다. 필자는 스타브라카키스의 <라캉과 정치>(은행나무, 2006)의 역자이며, 주로 라클라우-스타브라카키스와 라캉-지젝의 주장을 대비해서 정리해주고 있다. '정리'라곤 하지만 내용은 다소 전문적이다.      

 

담비(07. 05. 27)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급진적 정치철학으로

스타브라카키스의 저서 『라캉과 정치』의 영어판 부제는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기(thinking the political)’이지만 보다 더 정확한 부제를 달면 ‘라클라우와 라캉’ 정도가 될 것이다. 즉 이 저서는 라클라우를 정신분석화하고 있으며, 탈구나 헤게모니와 같은 라클라우의 개념을 통해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정치철학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시도만이 유일한 정신분석학의 정치철학화인가?’ ‘왜 정신분석학인가?’ 왜냐하면 푸코의 권력이론이나 들뢰즈·가따리의 정치이론과 같이 정신분석학에 근거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는 급진적인 이론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그것이 이 저서를 이론과 정치의 공간에서 맥락화하며 그 맥락화 속에서 보다 정확하게 이 저서가 담고 있는 이론적·실천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질문과 관련된 논쟁의 결절점을 제공해주는 (곧 도서출판b에서 번역 출간될)『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공저자인 라클라우와 버틀러, 지젝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왜 정신분석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버틀러와 지젝이 대립하고 있으며, 『라캉과 정치』가 제시하는 결론에 대해서는 라클라우와 지젝이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이 논쟁들은 라클라우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는 『라캉과 정치』 안에서 다시 반향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라캉과 정치』를 맥락화하는 데 매우 유용한 논의들을 제공해준다. 우선 스타브라카키스와 지젝의 대립을 보여주는 두 언급을 보자.

급진적 민주주의와 라캉의 윤리
스타브라카키스는 민주주의의 역설로서 ‘동유럽과 남아프리카에서의 민주주의의 성공’과 서구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침울한 실망감을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지젝은 동유럽에서의 민주주의가 오히려 근본적인 민족주의를 자신의 이면으로서 불러냈다고 지적한다. 이 서로 다른 지적은 두 이론가의 주장 모두 정신분석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스타브라카키스는 사회주의를 포함한 모든 유토피아 정치는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그는 환상과 증상의 변증법이라는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와 대타자는 모두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는 환상을 통해서 대타자의 결핍을 메움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 한다. 이를 라클라우의 용어로 번역하면 적대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사회적 환상을 통해 부인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적대의 한 담지자는 완전한 사회의 실현을 방해하는, 그렇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할 방해물(증상)로 환상화된다. 이런 맥락에서 스탈린의 굴락과 나치의 아우슈비츠는 유토피아 정치의 어두운 이면이다.  



그렇다면 이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통과하면서도 급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이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스타브라카키스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라고 대답하고 있다. 왜냐하면 급진적 민주주의는 사회적 적대와 그로 인한 사회적 탈구의 논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유일한 정치기획이며,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정치기획이기 때문이다. 라캉의 윤리적 행위가 환상의 가로지르기라면, 급진적 민주주의의 토대는 바로 이 윤리학에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윤리적 행위란 유토피아적인 조화의 윤리학을 넘어선 사회적 결핍의 제도화이며, 라클라우와 무페의 용어로 하자면 민주주의 혁명으로 창출된 권력의 공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정치의 유일한 이름은 오로지 라클라우와 무페 식의 헤게모니 투쟁이다.

지젝은 이와 같은 논의는 정치를 자유민주주의적 틀 안에 가두어버리고 진정한 행위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라캉의 윤리적 차원을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스타브라카키스의 행위란 실재 앞에서의 항상 실패한 행위라는 것이다. 지젝은 행위를 ‘발생한 불가능’으로서 정의한다. 여기에서 불가능성이란 불가능성으로서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상징적 질서의 좌표 내부’에서 불가능한 것이라는 의미이며, 지젝이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성과가 돌아가는 마이너스 성장률’과 같은 것들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행위란 사회-상징적 질서의 재정의 과정이다. 이러한 지젝의 논의는 어떤 점에서 라클라우와 버틀러와 다른 것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지젝이 제시하는 것은 역사성(historicity)과 비역사적인 중핵 간의 변증법이다. 이 변증법의 제시를 통해서 지젝은 라클라우와 버틀러의 입장을 모두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은 바로 ‘보편성’ 개념이다.

텅 빈 보편성과 근본적 불가능성의 문제
라클라우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그 내용이 선험적으로 결정될 수 없으며 항상 어떤 특정한 내용에 의해 헤게모니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이 장소는 헤게모니라는 우연성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계급본질주의와 같은 정치적 본질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버틀러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그 내용이 역사적인 배제/포함의 과정 속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특히 비역사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한 성차의 구별이라는 본질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즉 성차란 섹슈얼리티라는 본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젠더라는 수행적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이것이 정신분석학적 본질주의를 넘어선 성차의 정치이다.

여기에서 지젝은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들이 말하는 보편성 그 자체가 출현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성차의 우연성이든 정치의 우연성이든 이 모두는 특정한 역사적 형식이며, 이 형식이 출현하기 위해서 원초적으로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둘은 텅 빈 보편성을 헤게모니화하는 특수한 내용을 분석할 뿐 이 보편성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분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역사적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이 두 가지 관계를 적대와 차이에 종속된 적대(또는 무페의 용어로는 대항의 논리로 번역된 적대)의 변증법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근본적인 성적 적대란 ‘실재적으로 불가능한 것’(즉 외상적인 것)이며, 이 실재적 불가능성에 대한 각기 다른 대응을 통해 남/녀의 성차가 상징적으로 구성되고, 또는 이 불가능성의 원초적인 억압을 통해 텅 빈 보편성을 헤게모니화할 수 있는 장이 열린다는 것이다. 지젝의 논점은 정치적 적대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논리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며, 결국 이 둘이 누락한 문제는 바로 이 (불)가능성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되는, 즉 사회적인 것을 구조화하는 전체적인 원칙이라는 것이다.

억압된 역사적 유물론의 회귀?
흥미롭게도 지젝의 행위 개념과 정치경제학과 계급투쟁이 지젝의 논의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만약 근대 민주주의가 전근대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조직화 원리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정초적 행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지젝은 이 근대 민주주의(의 출현의 조건)를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논의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이와 동일한 논리로 라클라우와 무페의 다양한 주체성에 기반한 포스트모던 정치를 후기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지젝은 계급투쟁을 라클라우적 용어로 차이의 체계를 가로지르는 적대로 재개념화하며, 이러한 계급적대에 대한 분석의 누락은 포스트모던 정치가 자본주의를 탈정치화하는 징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지젝은 반자본주의적인 행위를 기존의 상징적 공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 즉 유토피아(u-topic)를 열어나가는 행위로 정의한다. 그러나 아직 지젝은 이러한 주장에 대한 정교한 이론화 작업을 내어놓고 있지 못하다. 만약 지젝의 입장에 동의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이병주 경희대 신문방송학 강사)  

10. 06. 26.  

P.S. 지젝 자신의 책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학에 관한 책도 연이어 출간되고 있기에 마지막 문단에서 필자가 제기한 '이론적 작업'에 대한 요구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면 또 애써 궁리해봐야겠고... 한편 지젝의 신작 <종말의 시대에 살아가기>(2010)는 어쩐 일인지 알라딘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하는 수없이 아마존으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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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7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7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 2010-06-27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찾아보겠습니다^^

2010-06-28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8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