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해외 지성 동향'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7246). 지령 500호 특집의 하나인데, 기자는 특별히 스티글리츠, 울리히 벡, 피터 싱어, 아즈마 히로키 등을 거명하고 있다. 출간된 책들의 이미지들을 덧붙여놓는다.

교수신문(08. 11. 17) 불확실한 세계의 내일을 보려거든 이들을 주목하라

미국의 금융위기와 그로인한 경제 불황의 그림자와 불안은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 변화는 경제 정책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오바마에게 미국의 리더십이 넘어간 것은 이러한 변화의 물결이 시작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처한 맥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곧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오늘의 세계를 진단하고 내일을 전망하는 학자들의 시선도 다를 수밖에 없다.

우선 체감 온도 영하를 기록 중인 경제 불황의 한파 속에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대신할 미래의 경제학은 누구에게서 단초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지난 2001년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의 행보에 주목할 수 있다. 그는 본래 주류 경제학에서 출발을 했지만, 정보 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이 높다. 스티글리츠는 전통경제학의 완전 시장 개념이 정보 완전성을 전제했다 주장하면서, 현실에서는 정보의 결함 및 불완전성이 존재한다고 지적, 정보의 비대칭성을 고려하는 새로운 경제학 모델을 주창했다. 또 스티글리츠는 보험시장은 물론이고 노동시장, 신용거래시장, 국제금융시장 등의 여러 사례의 분석을 통해 정보 비대칭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초했다.

그런데 그를 미국 경제학계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학계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이론적 업적만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선진국의 경제 정책을 비판한 행보 때문이기도 하다. 스티글리츠가 세계화에 반대하는 평등주의 시장 경제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최근의 저서들을 보면, 그는 미국의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에 힘을 쏟고 있다.

올해 9월에 출간된 『3조 달러 전쟁 : 이라크 전쟁의 진짜 비용』에서 스티글리츠는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3조 달러(우리 돈으로 3000조원 이상)를 이미 썼고, 전쟁 부상자들의 간호 비용으로 수십억 달러를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스티글리츠의 이러한 분석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세계화와 그 불만』과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정면에서 문제 삼는 저작들로 역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홍훈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스티글리츠에 대해 “굳이 계보를 따지자면 케인지안에 속하겠으나, 범상한 케인지안과는 다른 학자”라면서 “기존 경제학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이번 금융 위기에 대해서 경제회생에 최소 18개월이 필요하다고 진단하고, 폴 볼커 전 연준의장을 차기 재무장관으로 추천하는 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오바마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지 주목된다.



현대 사회가 낳는 문제는 비단 경제적 위기와 미국 중심 질서에 한정될 수는 없다. 얼마 전 광우병 파동과 사스 등 신종 질병의 출현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고유하게 나타나고 있는 과학 기술의 부정적 산물 역시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이 같은 위험에 대해 사고한 사회학자로는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 그는 하버마스, 기든스 등에 견줄만한 학자로 손꼽힌다. 뮌헨 대학에서 사회학 학위를 받고, 뮌스턴 대학과 밤베르크 대학을 거쳐 뮌헨 대학 사회학 연구소장직을 맡고 있는 울리히 벡은 지난 86년 『위험사회』란 저서를 통해 서구 근대화 과정이 낳은 현대 사회의 위기화 경향을 진단하면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의 성찰은 특히 현대의 과학기술이 현대 문명의 여러 이기를 낳았지만, 동시에 위험도 증폭시킨 상황에 대한 분석에서 두드러진다. 벡은 탈지역화, 계산불가능성, 보상불가능성이라는 특징으로 현대 사회의 위험을 바라보면서, 예기된 재난 속에서 현대 인류는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뻔히 그것이 일어날 것임을 알면서도, 즉 예기됐으면서, 감내할 수밖에 없는 재난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인 면까지 있다. 벡은 근대화의 근본적 한계를 진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법 모색에도 힘을 쏟고 있다. 최근 『성찰적 근대화』, 『정치의 재발견』,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등의 저서를 통해 근대화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정일준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울리히 벡에 대해 “벡은 현대의 과학기술이 일종의 예기된 재난을 야기한다는 점에 주목한 학자”라고 하면서 “세계위험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새로운 비판 이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또 “국내에는 그의 위험 개념이 희화화되고 오해된 측면이 많은데, 진면모가 소개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울리히 벡은 최근 『코스모폴리탄 유럽』, 『코스모폴리탄 비전』등의 저서를 통해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대를 염두에 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사유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촛불 시위에 대해서도 언론사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고, 방문 강연을 한 적도 있어, 친숙한 학자로 인식되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한 학자는 많이 있다. 그러나 벡처럼 전면적이고, 치밀하며, 독창적인 관점에서 현대 문명의 위험성을 분석한 사람은 드물다. 벡이 과연 새로운 비판 이론의 역사를 열어갈지 관심이 간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봉착한 문제는 비단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다. 환경오염 등은 자연을 대하는 현대인의 근본적 태도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윤리학계의 좌장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피터 싱어(Peter Albert David Singer)는 현대 사회가 제기하는 여러 윤리적 문제 해결의 지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싱어는 특히 동물 해방론 및 생명 공학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탁월한 해법을 제시해 명성이 높다.

우선 피터 싱어는 자신을 저명한 윤리학자로서 자리매김해준 저서인 『실천 윤리』에서 이기적 행동은 이기주의적 원칙에 어긋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불합리하며, 윤리 도덕적 삶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곧 비이기적인 삶이 이기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싱어의 논의는 윤리적 행동의 필요성을 그저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과 ‘의무’를 이유로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논증적으로 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도덕 법칙의 존재를 거부하는 자도 납득하지 않을 수 없는 논증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른 한편 싱어는 인간 중심의 윤리관에서 탈피할 것을 촉구한다. 싱어는 동물이 비록 지적으로 인간보다 저능하지만, 그것이 동물의 윤리적 권리를 박탈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인간 중에서도 발달이 더딘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이유로 차별을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비판이다. 이는 우리가 윤리적 고려를 나누는 대상을 확정하는 기준으로 어떤 이해관계나 이성이 아니라 고통을 삼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윤리적 의식의 근원에는 고통에 대한 의식이 있으며, 따라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기능이 윤리 공동체에 편입될 수 있는 자격을 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로부터 싱어는 생물중심주의 윤리학을 구축했는데, 광우병 파동으로 관심이 커진 동물 보호 운동의 이론적 준거를 제공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변순용 서울교대 교수(윤리교육)는 싱어에 대해 “살아 있는 윤리학자 중 가장 강하게 생명 윤리와 동물 윤리에 대한 주장을 펼치면서 확고한 이론적 업적을 세운 학자”라고 지적했다. 박상혁 계명대 교수(윤리학)는 “자신 수입의 20퍼센트를 빈민을 위해 사용하는 실천하는 철학자이고, 의료 윤리 등 다양한 응용 윤리 연구의 진보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 학자”라고 강조했다. 피터 싱어는 최근 대형 농장에서 잔인하게 살육되고 있는 동물의 현실을 문제 삼은 화제작 『죽음의 밥상』(산책자, 2008)을 내놓은 한편, 『세계화의 윤리』등을 통해 비판적 지성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피터 싱어가 이렇게 인간의 윤리적 지향에 대한 모범을 제시했지만, 윤리적 삶은 언제나 대중의 삶과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이는 윤리적 규범과 의무에 대한 강조만으로는 현대 사회의 보다 거칠고 생생한 이면을 들여다 볼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특히 최근 묻지 마 살인이 빈발하고, 니트족이 사회 현상의 상수로 자리매김한 상황에서, 하위의 대중 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 절실해지고 있다. 이에 우리는 일본의 젊은 논객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에 주목하게 된다. 1971년생인 히로키는 1998년 『존재론적, 우편적─자크 데리다에 관해』라는 화제의 저작에서 데리다의 논의를 하이데거·프로이트와 연계하면서 ‘우편적 불안’이라는 테마로 재해석해 존재론적 함의를 이끌어낸 바 있다.

이후 히로키는 일본 특유의 오타쿠 문화를 포스트모던과 연결해 사고하고자 하는 시도로도 유명해졌다. 특히 국내에 번역이 된 바 있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문학동네, 2007)와 연작인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에서 거대 오락 산업과 오타쿠 집단의 출현을 포스트모던적으로 읽어내면서 현대 일본사회의 정신적 구조와 인간의 새로운 변화 양상을 진단했다.

그는 이 저작들에서 많은 독창적 테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오리지널 대 복제라는 구도를 데이터베이스 대 시뮬라크르라는 구도가 대신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여기서 데이터베이스는 기존에 표층을 규정하던 심층으로서 커다란 이야기를 대신해, 유저(독자)의 읽어내기에 따라 결정되는 심층으로서 데이터베이스를 말한다. 기표에 대한 기의의 초월적 귄위를 거부한 포스트적 관점을 인터넷 세대의 감수성으로 풀어내고 변형한 독창적 제안이다.

히로키는 더 나아가 사람들이 시뮬라크르 수준의 작은 이야기들에 대한 욕구와 데이터베이스 수준에서 생기는 커다란 非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해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람들은 △ 타자 없이 충족하는 동물적 존재가 돼가는 동시에 △ 데이터베이스 수준의 커다란 非이야기에 대한 욕망에 따르는 형해화된 인간성을 유지하는 이층적 주체로 변모한다고 본다.

일부에서는 히로키를 가라타니 고진의 뒤를 이를 사람으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다른 일부에서는 초기의 진지한 인문학적 사유를 팽개치고, 일본 특유의 오타쿠 하위문화에 천착해서, 능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나 미국의 포스트모던주의자들보다 진일보한 관점에서 과감한 테제와 분석을 제시하는 히로키를 이론적으로 천대시할 수만도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아직 젊다는 점에서 그 미래가 주목된다.

인간의 미래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지성들은 이밖에도 더 열거할 수 있다.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는 푸코와 더불어 20세기 후반 세계 지성사에 독보적 획을 그은 바 있다. 아주 최근은 아니지만 인간복제 등 생명공학의 발전에 대해서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의 심화, 생태 및 환경윤리에 대한 요구의 증대, 집단지성의 출현 등 급변하는 현실을 사고하기에는 낡은 틀을 고수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푸코, 데리다, 들뢰즈와 다른 목소리가 프랑스에도 존재함을 각인시켜주고 있다. 현대의 대표적 플라톤주의자로 꼽히지만 결코 고루한 이성주의자에 머물지 않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바디우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복수의 진리를 내세운다. 또 문화적 차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문제의 핵심은 그러한 차이들을 넘어 작동하는 보편성의 차원에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현대 정치 철학의 거장이자 기존 마르크스주의를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네그리도 시선을 끈다. 그의 저서들은 늘 화제를 몰고 있으며, 영미와 유럽대륙은 물론이고 한국에까지 광범위하게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다. 다만 몇 년 전, 대부분의 좌파들이 ‘NO’를 외친 유럽연합 헌법투표에 대해 ‘YES’를 외쳐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또 그의 자율주의가 함의하는 대중 정치 역량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문제 삼는 경우도 많다.(오주훈 기자)

08. 11. 18.

P.S. 아즈마 히로키에 대해서는 중앙대 대학원신문의 기사를 보충해놓는다. 기사에서 언급되는 아키라의 책 <구조와 힘>은 국내에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새길, 1995)로 소개된 바 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03) 아즈마 히로키, 새로운 사상보다 사상의 새로움을

일본사상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1971~ )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그는 가라타니 고진의 후계자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물론 일본의 한 비평가가 푸념했듯이, 예전의 대학원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진을 읽었다면, 요즘에는 히로키를 읽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히로키는 고진의 후계자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히로키의 출세작 <존재론적, 우편적>(1998)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고진의 추천으로 등단한 히로키가 <비평공간>에 연재한 글로, 연재 시작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3살이었다. 그리고 3년 후 이 글이 묶여 출간되자 높은 평가를 받으며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함은 물론이고, 대개 소설에 수여되는 미시마유키오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아사다 아키라에게 “<구조와 힘>은 이제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찬사를 받으며 현재까지 수만 부가 팔려나갔을 뿐 아니라 만화로까지 출간됐다. 그 난해하다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 연구서가 이처럼 많이 읽혔다는 것은 확실히 일본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물론 예외는 있다. 80년대에 <구조와 힘>은 20만 부 정도 팔렸고, 고진의 책도 대부분 수만 부씩은 팔리고 있다).

그러나 히로키는 이와 같은 화려한 데뷔 이후 철학사상 연구를 내동댕이친다. 그리고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오타쿠문화(하위문화) 연구에 매진한다. 국내에 유일하게 소개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001)은 바로 그와 같은 연구의 성과물 중 하나이다. 이 책의 국내 소개에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내용도 잘 모른 채 책제목과 저자에 대한 소문만 듣고 이 책을 출판사에 추천한 이가 정작 출간된 뒤에는 실망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확실히 징후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생각보다 너무나 완고한 나머지 익숙한 분석대상이나 개념, 인명이 등장하지 않으면 한시도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그런 한국의 인문학도들에게 히로키는 어쩌면 실망의 대상일 수 있다.

히로키 자신도 이와 관련해 많은 충고를 들었다고 한다. “자네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인문학(철학이나 사상) 연구 대신에 미소녀 게임이나 분석하고 있다니 재능이 아깝네”라고 말이다. 이에 대한 히로키의 답변은 대충 이랬다. “내가 데리다에 관한 책을 낸 것은 하위문화 비평가가 되기 위해 일종의 지명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위문화는 엄청나게 생산되고 소비되지만 정작 주류 비평가들은 기존 틀에 갇혀 이런 현실적 문제들을 일관되게 무시해왔다. 그러나 나는 서구사상을 학습하며 조립하는 데 만족하기보다 실제 우리의 삶 가까이에 널려 있는 문화의 정체를 분석하고 싶었다.” 이처럼 우리에게 히로키는 새로운 사상가라기보다는 사상의 낯섦(새로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조영일/ 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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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20 13:17   좋아요 0 | URL
일본에서는 아즈마 히로키 처럼 20대초반에 떠오르기도 하는군요.우리나라 고교생 독서현실로는 어림없는 일이죠.

로쟈 2008-11-20 20:44   좋아요 0 | URL
고교생도 읽을 수 있게끔 번역이 돼 있지도 않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11-21 14:10   좋아요 0 | URL
사실은 우리나라는 고졸이나 대졸의 차이점도 없는 것 같아요.모두 수험서만 읽으니까요.저도 졸업하고 나서 이런저런 책을 읽었지 대학 시절엔 고졸과 지적수준은 똑같았다고 봐야죠.

로쟈 2008-11-21 22:16   좋아요 0 | URL
사실 우리나라 학생들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은 영어나 일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의 1/10도 안될 듯싶은데요. 원초적인 한계가 있는 듯싶어요...
 

이번에 한겨레21에 실린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지면 배치가 달라지면서 원고가 약간 축약됐지만 대의는 그대로이다(지면기사와 달리 온라인기사는 축약되지 않았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3803.html 참조). 작년에 나온 <88만원 세대>(레디앙, 2007)가 한국 사회에 '세대모순'을 처음 이슈로 제기했다면 강준만 교수는 <지방은 식민지다>(개마고원, 2008)를 통해서 이미 수차례 제기되어온 '지역모순' 문제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다(강 교수가 먼저 낸 <각개약진 공화국>(인물과사상사, 2008)과 '세트'로 읽을 만하다. 지역모순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지 못할 때 봉착하게 되는 양상이 각자가 알아서 제 살길을 찾는 '각개약진'이다. 하니 그 또한 '식민주의'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중요한 이슈임에도 최근의 경제난 때문에 다소 묻히는 감이 있다. 수년전 지방분권론이 공론화되던 시기에 나왔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이미 발표한 칼럼들을 중심으로 책을 엮은 탓인지 더러 중복되는 부분이 있고 핵심적인 주장이 도드라지지 않는 점도 읽으면서 좀 아쉬웠다.    

한겨레21(08. 11. 24) 억울하면 서울 시민이 돼라?

“지방이 지방주의를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울이 나라 전체를 생각하는 발상을 포기한 만큼 그 걱정도 지방이 해야 한다... 한국을 지방이 책임지자.”

우리시대의 논객 강준만 교수가 <지방은 식민지다>(개마고원 펴냄)에서 던지는 제안이다. 그가 이번에 한국사회 변혁을 위한 화두로 삼은 것은 ‘지역모순’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얘기가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대개 모른 체하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치부하는 문제, 곧 서울과 지방,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의 모순이 문제다. 그는 아예 ‘내부식민지’란 말까지 꺼내들었다. 대한민국은 식민주의 국가란 말인가?

독일의 중국학자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식민주의>(역사비평사 펴냄, 2006)를 참조하면 억지스런 주장만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식민주의는 먼저, 하나의 사회 전체가 자체의 역사 발전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타인에 의해 조종되며, 식민자의 경제적인 필요와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것을 말한다. 말을 바꾸어, 지방이 자체의 발전 기회를 박탈당하고 중앙(서울)에 의해 조종되며 수도권 부유층의 이해관계에 종속된다면 바로 ‘식민주의’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우리가 남이가?’라고 말할 텐가? 하지만 유의할 것은 ‘서울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는 점.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렇게 말했다. “서울은 어떤 의미에서 대한민국보다 중요하다.” 억울하면 서울 시민이 되라는 뜻이겠다.  

오스터함멜은 또 근대 식민주의는 무엇보다도 ‘주변’ 사회를 ‘중심’의 필요에 종속시키려는 의지와 관련되며 역사적으로 유럽의 근대 식민주의자들은 종속민들에게 유럽의 가치와 관습을 이식하려고만 했지 그들의 문화에 적응·동화하고자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중심’과 ‘주변’이란 말 대신에 ‘서울’과 ‘지방’을 대입해보면 바로 한국사회 아닌가? 지방의 ‘서울 따라하기’는 있어도 서울의 ‘지방 따라하기’는 없다는 점도 말하자면 식민주의의 징후다.  

거기에 식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이라고 부를 만한 특정한 의식이나 태도도 덧붙일 수 있다. 가령 16세기 이래 이베리아 국가들 및 영국의 식민지 이론가들은 유럽의 팽창과정을 보편적인 사명의 달성으로 표현하고,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성을 전제로 하여 이교도 전도, 야만인·미개인의 문명화, 특권을 수반한 ‘백인의 부담’ 등을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로 내세웠다. 서울이 잘 돼야 지방도 잘 된다는 논리는 그런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정이 이러하므로, 비록 내부식민지론이 1970년대 남미의 국가 간 종속이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이론이라 하더라도 한국사회의 지역 간 불평등과 경제적 격차에 적용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사실 한국적 현실의 ‘특수성’은 얼마나 자주 상식적 판단을 빗나가게 만드는가. 그 ‘특수한’ 현실은 강 교수가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는 간단한 인구 통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2007년 10월 말 현재 주민등상 인구 4919만4085명 중 서울·인천·경기 3곳의 인구는 2390만3785명으로 48.6%를 점하고 있다. 국토면적 11.8%인 수도권의 인구 비중은 1960년 20.8%에서 1980년 38.4%, 2000년 46.3%, 2002년 47.2%, 2004년 48.0%, 2007년 48.6%로 증가했다.” 그렇게 수도권 인구가 증가하는 만큼 감소하는 것이 비수도권 인구이다. 과연 이러한 추세가 역전될 수 있을까?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강 교수는 진정한 지방분권과 자치를 위해서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하는 ‘발상의 대전환’, 그리고 지방 내부의 개혁과 함께 한국사회의 아킬레스건인 교육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방신문과 지방방송, 지방문화 육성을 위한 관심과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내부식민지’의 토대가 되는 것은 역시나 ‘교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구의 과잉집중을 억제하고 지역 간 균형발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즉 ‘내부적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분산’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서울에 편중된 대학들 지방으로 분산시키자는 ‘대학의 지방분산론’이다. 혹은 차별적인 지원정책으로 명문대학을 수십 개로 늘려 ‘경쟁의 병목현상’을 타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란 의구심이 바로 들 만큼 현실적으론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에 명문대 입학을 사교육 수요는 점점 늘어만 가고 해마다 대입제도 개선안이 발표되어도 학생들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는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도외시한 탓에 올바른 방향을 잡지 못해서다. 강 교수는 이런 점에 있어서는 “이명박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이나 전교조나 모두 다 한통속”이라고까지 질타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대문 밖으로 이사 가지 말고 버텨라. 머리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며 사회적으로 재기하기 어렵다.” 다산 정약용이 자녀들에게 남긴 유언이라 한다. 정조시대에 서울인구는 전국인구의 2.55%에 불과했지만, 서울이 문과 급제자의 43%를 차지했다고 하니 서울 중심의 집중화와 출세를 위한 교육의 연계는 오랜 뿌리를 갖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제 우리의 과제는 그 ‘뿌리’를 뽑는 것이다. 지방을 볼모로 한 ‘우리 안의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일에 서울 시민도 동참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08. 11. 17.

P.S. 지난주 시사IN의 인터뷰기사 '‘한탕주의’를 응징하지 않는 데 비극이 있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64)도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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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세곰 2008-11-24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의 경쟁력이 대한민국의 경쟁력입니다"는 광고를 들을 때마다 경악하던 중이었습니다.
세계로 뻗어나가자는 글로벌을 그렇게 외치면서도 정작 서울이라는 울타리도 벗어나질 못하고 있으니...
 

'프리케리아트'란 신조어가 있다고 한다(일본에서는 유행어인 듯하다). 불안을 뜻하는 영어의 ‘프리케리스’(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다(분류하자면 나도 프리케리아트로군). 아래 박혜영 교수의 칼럼에서 이 단어의 의미와 '프리케리아트 시대'의 배경에 대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최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는 올해의 대표 키워드를 '자기치유'라고 발표했는데, '희망 잃은 사회' 내지는 '희망 빼앗는 사회'로 내몰린 대중(프리케리아트)의 불가피한 독서 성향으로도 읽힌다. 그 '자기치유'로 우리는 과연 '치유'받을 수 있을까?.. 

교수신문(08. 11. 10) 藤田省三과 땅끝에 선 사람들

지금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은 불안감이다. 경제만은 반드시 살리겠다는 대통령후보에게 다른 자질은 전혀 묻지 않고 몰표를 몰아준 이유는 이 불안감 때문이었다. 경제지상주의와 무한생존경쟁시대를 맞아 한번 밀려나면 끝이라는 사람들의 극사실주의적 현실의식이 결국 떠받쳐준 당선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직장이 있어도 불안하고 없어도 불안하다. 건강해도 불안하고 건강하지 못해도 불안하며, 성공해도 불안하고 성공하지 못해도 불안하다. 집이라도 한 채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왜냐하면 우리사회가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스승도 없이 각자 돈벌이에만 올인하는 끝없는 경쟁체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윤리나 미학은 대학교양과목으로도 팔리지 않고, 인간에 대한 예의나 관심은 애완동물에 대한 배려에도 못 미칠 지경이다. 돈이 없으면 더 이상 삶도 없다는 것이 우리시대의 깨달음이 됐고, 투기와 사기는 이런 불안한 시대의 강을 건널 유일한 방법이 돼 버렸다. 치고 빠지는 기술이 최고의 삶의 기술(art of living)이 되고, 불안을 먹고 자라는 보험산업, 펀드산업, 오락산업, 노름산업 등이 최고의 돈벌이 산업으로 떠올랐다. 



우리시대의 불안은 과학지식이 없던 시절 인류가 자연과 우주에  막연히 느꼈던 신비적 두려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 우리시대의 불안은 자본주의 초기에 등장한 프롤레타리아들의 계급적 두려움과도 다르다. 단결할 노조조차 없고, 계급적 당파성조차 모호한 무한계약직, 혹은 임시비정규직이 모든 경제분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면서 등장한 ‘프리케리아트’(precariat)란 말은 불안을 뜻하는 영어의 ‘프리케리스’(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에서 나왔다. 이 말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널리 퍼진 일시적, 유동적, 간헐적, 비공식적 노동조건의 확산과 그에 따른 사람들의 정신적, 정서적 불안이 이들의 전반적인 삶의 조건이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프리케리아트는 우리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등장한 전혀 새로운 세대이며, 초국적 후기산업자본주의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이전의 노동계급보다 훨씬 더 전방위적인 자본의 공격에 노출돼 있지만 사람들은 단결할 계급의식조차 형성하지 못한 채 더욱 파편화되고 말았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공포로 위기상황은 일상화됐지만,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오직 혼자서만 분투하다 절망하게 된 것이다. 사실 신자유주의가 진정으로 세계화하는데 성공한 것은 지금 확산일로에 있는 이 프리케리아트들인지 모른다. 



원래 ‘프리케리어스’는 ‘기도에 의해 얻어지는’이란 뜻의 라틴어에서 나왔다. 다시 말해 이 말에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삶의 근원적 위험에 대한 민중의 인식과 동시에 그런 삶의 불확실성을 오직 신의 은총에 의지해 순정의 기도로 이겨내려는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지금의 프리케리아트는 원래의 종교적 실존의식과는 무관한 채 오직 경제적으로 끝없는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 시달리며 불안해하는 우리시대의 모든 약자들을 뜻한다. 이런 사회에서의 삶의 평화란 경제적 성공으로만 보장될 수밖에 없다. 즉 팍스 에코노미카(pax economica)가 만들어낼 안락에의 평화이다.

일본의 현대문명사상가인 후지따 쇼오조오는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라는 글에서 억제라고는 모르는 고도 기술사회의 정신적 기초가 바로 이 경제인간들의 안락에 대한 광적인 추구와 안락의 상실에 대한 초조한 불안이라면서, 이런 정신상태는 마침내 안락에 예속 되고, 따라서 사회는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로 치닫게 된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요즘은 신문이나 인터넷을 보기가 두렵다. 실직이나부도로 인한 사람들의 자살소식이 너무 많아서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가 자기 손을 떠났다고 느낄 때 절망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기도에 의지해서라도 그 강을 건널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그나마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어디선가 게오르그 루카치가 토로했듯이 인간이 밤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지금 우리세대는 강을 건널 배도 없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읽을 눈도 없이 그저 무작정 강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쇼오조오가 말한 이런 안락한 지상의 평화에서 내몰린 우리시대의 프리케리아트에게는 차라리 사람의 운명이 신의 은총에 달려있다고 믿었던 과거 희랍시대가 어쩌면 더 안전했다고 생각될지 모른다.(박혜영 인하대·영문학)


 
한겨레(08. 11. 14) 희망 빼앗는 사회 속 ‘자기치유 열풍’

경제경영서를 펴내는 한 출판사 대표는 자신이 최근 ‘멜라민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멜라민을 이용해 수많은 식품을 만드는 일을 줄곧 해 왔는데 갑자기 멜라민을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니 앞이 노랗다는 이야기였다. 신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해 모든 기획을 진행해 왔지만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책 시장에서 신자유주의 철학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따라서 그동안 기획해 놓았던 책의 대부분을 폐기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처음부터 다시 기획해야 한다. 그러니 폐기해야 할 기획의 선인세를 크게 오른 환율로 당장 갚아야 하는 것부터가 난감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함정에 빠진 것이 어디 그 출판사 대표뿐이겠는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대통령을 뽑아놓았지만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갈팡질팡하기만 해서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나마 내세우는 정책마다 모두 가진 자를 위한 것뿐이라 없는 자들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지난 10년간의 상실감을 정신분열적 정책으로 되갚는 듯하다. 그에 따른 이분법적 사고의 확산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갈등의 확산, 빈부격차의 심화에 따른 양극화 심화, 고사상태로 빠져드는 문화시장, 해소되지 않는 청년실업, 심리적 불안으로 인한 자살자 증가 등으로 대중은 모든 희망을 접어야 할 상황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희망을 잃고 단지 목숨만 겨우 부지하는 상태다. 따라서 스스로 위안받는 자기치유(self-healing)를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대중은 이미 ‘성공’을 포기한 지 오래고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사치일 뿐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상처를 보듬는 것에 몰두한다. 이 자기치유가 2008년 출판시장을 상징한다. 대중은 이제 ‘물질’이나 ‘권력’의 획득도 포기하고 자신의 상처난 마음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만을 찾고 있다. 또 먼 미래보다는 당장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틸 것인가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시크릿>(론다 번 외)의 ‘비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공지영)의 ‘응원’, <하악하악>(이외수)의 ‘거친 숨소리’, 아고라 광장에서의 치유로서의 글쓰기, <개밥바라기별>(황석영), <완득이>(김려령), <리버보이>(팀 보울러) 등 성장소설, 죽음과 자살을 다룬 책, 섬세하게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 심리학 서적 등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올해 출판시장에서 자기치유가 거대한 흐름을 이뤘음을 방증한다.

함정에 빠진 이들을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정말 우리는 아무것에도 희망을 걸기 어렵다. 개인에게는 국가나 사회, 나아가 가족 등 거의 모든 울타리가 사라진 지금, 우리는 오로지 스스로 위로하며 절망감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와야 한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 출판시장에서는 자기치유의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 것으로 보인다.(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08.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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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11-16 21:02   좋아요 0 | URL
공감하지만.. 아래 허연의 시집을 선택하겠어요!! ^^ 내 치유는 그를 통하여.

로쟈 2008-11-16 21:17   좋아요 0 | URL
"가난한 사람이 음식 앞에서 수줍어하는 것처럼 나는 오늘 눈물 앞에서 수줍어합니다." 아무데나 펼쳐서 읽은 구절입니다. '치유'에 도움이 되시길.^^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이 출간됐다. 올해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로 처음 소개된 이 철학자의 책들이 여러 권 더 출간될 예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도 바울(바울로)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강의'인<남겨진 시간>이 먼저 나오는 줄은 몰랐다. 출판사나 역자도 의외이고. 아무려나 바울과 벤야민의 메시아니즘에 대한 묵직한 독해를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서는 그런 '묵직한 독해'를 따라가기 이전에 '색인' 같은 '곁다리텍스트'나 가볍게 읽어본다.

어제 책을 들고 와서는 습관처럼 '인명색인'을 들춰보았다. 책의 품새와 역자의 역량을 판단하는 데 가장 간편한 지표가 되는 것이 이 '색인' 혹은 '찾아보기'다. 어째서 그런가? 고유명사의 표기를 보면 역자가 국내에 소개된 저자들에 대해서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표기를 쓴다면, 그건 역자가 해당 저자를 모르거나, 적어도 국내에 소개된 책을 읽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컨대, <남겨진 시간>의 인명색인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건 '게르숌 쇼렘'이다. 14쪽에서 '게르숌 쇼렘 Scholem'이라고 처음 등장하는바 벤야민의 친구이자 유대교 철학자 '게르숌 게라르트 숄렘(Gershom Gerhard Scholem, 1897-1982)을 가리킨다. 벤야민에 대한 회고록 <한 우정의 역사>(한길사, 2002)로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다. 일단, 성이 '숄렘'이므로 'ㄱ'이 아닌 'ㅅ' 항목에 배치되어야 하지만 'ㄱ'쪽에 나오게 된 건 색인 작성자가 개념이 없다는 뜻이다. 'ㅎ' 항목에서 '하이데거' 다음에 '한나 아렌트'가 나오는 식인데, 이런 색인을 정색을 하고 작성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퀴즈. '미셸 푸코'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미셸'이니까 'ㅁ'에서다. '미그엘 드 세르반테스'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미그엘'이므로 'ㅁ'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자크'니까 또 'ㅈ'이고, '조르주 바타이유'도 'ㅈ'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프란츠 카프카'가 아니어서 그냥 'ㅋ'에서 찾는다. '칸트'도 'ㅋ'. 하지만 '칼 슈미트'는 'ㅅ'이 아니라 'ㅋ', 뭐 이런 식으로 대중없다. 참고로 이런 조잡한 색인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책은 토드 메이의 <질 들뢰즈>(경성대출판부, 2008)이다. 대학출판부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허접한 '찾아보기' 실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쇼렘'. 왜 '숄렘(Scholem)'이 아니라 '쇼렘'이 됐을까? 첫째는 역자가 '숄렘'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지 못해서이고, 둘째는 일역본을 참조해서다(옮긴이 후기에는 영어본을 옮겼다고 했지만 내 짐작으론 일어본을 옮긴 듯하다). 가령 '히포라테스(Hippokrates)'는 '히포라테스'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본식이다. 'l'과 'r'의 표기방식이 우리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일역본을 참조했거나 일어 표기법에 따르고 있다는 건(물론 익숙한 저자들에 대해서는 우리 표기를 따르고 있지만) 역자의 약력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와세다 대학의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했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더라도 편집자나 교정자가 바로잡아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적어도 인문서를 다루는 편집자/교정자라면 말이다.  

다시 퀴즈. 'ㅂ' 항목에 가 있는 '벤야민 월프 Benjamin Whorf'는 어떻게 표기되어야 할까? '벤자민 워프'라고 표기하고 'ㅇ'에 배치해야겠다. 일단 '워프(Whorf)'가 '월프'가 된 것이 일어식 표기라는 건 지적한 대로다. 워프가 저명한 언어학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엉뚱한 표기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벤자민 워프'는 '에드워드 사피어'와 함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우리가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의 주창자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교정되어야 할 인명들이 이 색인에는 다수 등장한다. '본헤퍼(Bonhoeffer)'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를 가리킨다. '부르멘베르그(Hans Blumenberg)'는 저명한 문학이론가 '한스 블루멘베르크'이고 '레비트(Karl Lowith)'는 <역사의 의미>(문예출판사)나 <헤겔에서 니체로>(민음사) 등의 저작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칼(카를) 뢰비트'로 표기된다. 어느 경우이건 요즘은 검색창에 이름을 한번만 처넣어봐도 알 수가 있는 인명들이다. 게다가 독일 시인 '횔덜린(Holderlin)'을 굳이 '횔더링'으로 새로 작명하는 일 따위는 피해도 좋지 않을까? 러시아의 언어학자 "트루베츠코이(Trubetzkoy)의 유무대립(privative opposition)이라는 개념"을 "트루벳코이의 결여적 대치라는 개념"(169쪽)으로 옮기는 건 어찌해볼 도리가 없더라도 말이다.

물론 본문은 이런 부실한 고유명사 표기나 인명색인과는 달리 충실하게 옮겨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곁다리텍스트'에 대한 이런 일람은 '텍스트'에 대한 기대를 얼마간 잠식하는 것도 사실이다. <남겨진 시간>의 역자나 편집자가 이미 앞서 나온 <호모 사케르>의 '찾아보기'만 참조했더라도 많은 오류/오기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지나친 기대일까?

한편 <호모 사케르>의 '찾아보기'에도 재미있는 오류가 하나 있다. 'ㅇ' 항목에 '윌슨, 에드워드 O.(Edwaard O Wilson)'이라고 나오는데,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을 가리키는 것. 아감벤의 책에 어인 카메오 출연인가 싶어서 영어본을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Paul Ravinow refers to the case of Wilson, the biochemist who decided to make his own body and life into a research and experimentation laboratory upon discovering that he suffered from leukemia"(185쪽) 이것을 번역본은 "폴 래비노우(Paul Rabinow)는 생물학자 윌슨(Edward O. Wilson)의 사례를 언급하는데, 윌슨은 자신이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자기 신체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무제한적인 연구의 실험의 장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348-349쪽)라고 옮겼다.

문제는 에드워드 윌슨(1929- )이 아직 살아있으며 백혈병 환자도 아니라는 것. 역자나 편집자는 '윌슨'이란 이름만으로 예단하여 '에드워드 윌슨'이라는 풀네임을 병기해주고 '생화학자(biochemist)'를 '생물학자'라고까지 수정해준 듯하다. '에드워드 윌슨'이 '윌슨'이란 성을 가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이긴 하지만, 백혈병에 걸려서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기증한 생화학자는 따로 있으니 짐작에 '앨런 윌슨(Allan Wilson, 1934-1991)'이 그이다('짐작에'라고 한 것은 백혈병으로 죽은 생화학자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책에는 그 이상의 정보가 주어져 있지 않다).

만약 앨런 윌슨이라고 하면, 뉴질랜드 출신의 이 생화학자는 '미토콘트리아 이브' 가설로 유명한 분자생물학자이기도 하다. 현대여성이 15만-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한 여성으로부터 기원했다는 가설로 ‘아프리카 기원론’ 또는 ‘이브 가설’이라고도 불린다. 아무튼 백혈병에 걸린 자신의 살아있는 신체를 기증함으로써 윌슨은 그것을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은 대상으로 만들었다. 래비노우는 이러한 윌슨의 생명을 '실험실의 생명(experimental life)'이라고 불렀다. 아감벤은 이를 '더이상 조에와 구분되지 않는 비오스'의 사례로 제시한다.   

아무려나 '찾아보기'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윌슨'은 교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왕 교정을 한다면 본문의 한 대목도 같이 교정될 필요가 있다. 근대성의 '노모스'로서 수용소를 다룬 대목으로 이렇게 번역된 부분이다. "수용소의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예외상태와 수용소 사이의 이러한 구성적 연결관계를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319쪽)

문맥상 이상해서 영어본을 찾아보니 "The importance of this constituive nexus between the state of exception and the concentration camp cannot be overestimated for a correct understanding of the nature of the camp."(168쪽)라고 돼 있다. 'cannot be overestimated'는 직역하면 '과대평가될 수 없다'이고, 뜻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이다. 아감벤의 핵심적인 주장과 관련되는 부분이라 주의해서 읽어야 할 대목이다...

08.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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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15 15:18   좋아요 0 | URL
정말 색인을 저런 식으로 만들면 정말 거시기하겠군요.그리고 디트리히 본헤퍼...헤픈 사람이라는 오해를 하게 왜 저렇게 표기를 했죠?
제가 헌책이 많기 때문에 일제시대 세대들이 번역하면서 일본식 발음을 그대로 표기해도 무슨 말인지는 알아먹습니다만 요즘에도 저런 표기를 한다니 뜻밖입니다.

로쟈 2008-11-15 16:37   좋아요 0 | URL
요즘은 엉터리 색인들이 많아서 '색인'이란 것 자체에 대해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란 생각까지 해보게 됩니다...--;

크네히트 2008-11-18 13:39   좋아요 0 | URL
궁금한게 있는데요. 왜 벤야민 워프가 아니고 벤자민 워프이 되는 건가요? 발터 벤야민은 벤야민이 맞는 것 아닌가요? 혹 워프가 미국에서 활동한 사람이라서 그런건지.. 아니면 발터 벤야민이 표기법상 틀린 건가요? 궁금해서 문의드려요^^

로쟈 2008-11-18 16:01   좋아요 1 | URL
같은 이름이라도 독어와 영어를 읽어주는 방식이 다릅니다. '벤야민 프랭클린'이 아니라 '벤자민 프랭클린'이라고 불러주는 것이죠. 발터 벤야민을 '베냐민'이라고 읽어주기도 하는데, 이미 '벤야민'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읽습니다...
 

이번주 시사인의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55#).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가 허연 시인의 두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를 소개하고 있다.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란 시 등이 마음에 들어서 서평을 읽고 바로 시인의 시집 두 권을 주문했다(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는 알라딘에서 할인판매하고 있다). 시집을 받아들고 보니 "지난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와 종일 굶었을 고양이는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 다 절실해서 슬펐다." 같은 구절들을 거느리고 있는 시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가 맨앞에 실려 있다(미리 말해두자면 내 얘기는 아니다). 해서 나는 김경주의 두번째 시집 <기담>보다 허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지지하기로 했다. 자기 나이에 맞는 시들에 끌리는 법이다(시인의 인터뷰기사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02698&PAGE_CD=19 참조)...

 

시사IN(08. 11. 11) 이제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사는 그대에게

언제 나이를 실감하시는가. 내가 좋아하는 L선생님의 말씀. “예전에는 나랑 동창인 녀석들이 그라운드를 누볐어. 지금은 그 녀석들이 다 감독이 돼 있더라고.” 어르신들께는 민망하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 10년쯤 선배인 분들이 쓴, 삶의 피로가 흥건한 시를 읽다가 ‘어어’ 하면서 와락 공감이 되어버릴 때 나이를 느낀다. 20대였으면 ‘왜 이렇게 징징거려!’ 하고 말았을 것을. 시인 허연의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가 그랬다는 얘기다. 첫 번째 시집 이후 13년 만이다. 왜?

“벽을 보고 누워야 잠이 잘 온다. 그나마 내가 세상을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다. 세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밥이나 먹고 살기로 작정한 날부터 벽 보는 게 편안하다. 물론 아무도 가르쳐준 적은 없는 일이다. 여기는 히말라야가 아니다.”(‘면벽’에서)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슬픈 빙하시대2’에서)

생업에 시달리느라 시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죄와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고 시와 그만 어색해진 것이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유라서 새삼 더 쓸쓸하다. 김훈은 이렇게 썼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그래서 이 시인의 마음에도 슬픈 신경질이 차곡차곡 쌓였던가 보다. 가끔 술자리에서나 폭발할 그런 신경질. 게다가 신경질 한번 부릴라치면 후배는 얄밉게 말한다. “형, 좀 추한 거 아시죠?”(‘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에서)

쓸쓸하다. 이 쓸쓸함이 이 시집에 흥건하다. 그러나 밥을 버는 일, 그거 하찮은 일 아닐 것이다. 밥을 버느라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말하기보다는 무언가를 희생하고 밥을 벌었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시집의 쓸쓸함에도 마음이 짠했지만 밥벌이의 준엄함을 인정하면서 삶을 견뎌내는 시에 더 마음이 움직였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 한다.”(‘일요일’에서) 체념인가 다짐인가. 나는 그냥 다짐으로 읽어버렸다. 이런 시가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서) 다시 ‘나쁜 소년’이 되겠다는 이 오기가 멋지다. ‘밥과 시’가 과연 상극일지라도, 아니라고 호기롭게 외치는 ‘나쁜 소년’ 선배를 볼 때 후배는 막 살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선배님들, 힘내세요. 푸른 잉크 한 통을 다 마시는 한이 있어도.(신형철_문학평론가)

08. 11. 14.

P.S. 참고로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에 이어지는 마지막 연은 이 한 줄이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아주 오래전 이상희의 시집 <잘 가라 내 청춘>(민음사, 1992)을 읽으며 이미 작별을 고했건만 굳이 '확인사살'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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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11-1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문을 넣어야겠군요.

로쟈 2008-11-15 16:44   좋아요 0 | URL
^^

PhEAV 2008-11-17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20대 중반인데도 읽고 싶네요. <기담>보다 더!
(아니 무슨 청춘이 갔다고!)

로쟈 2008-11-17 21:57   좋아요 0 | URL
마음으론 중년이신가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