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인의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55#).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가 허연 시인의 두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를 소개하고 있다.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란 시 등이 마음에 들어서 서평을 읽고 바로 시인의 시집 두 권을 주문했다(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는 알라딘에서 할인판매하고 있다). 시집을 받아들고 보니 "지난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와 종일 굶었을 고양이는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 다 절실해서 슬펐다." 같은 구절들을 거느리고 있는 시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가 맨앞에 실려 있다(미리 말해두자면 내 얘기는 아니다). 해서 나는 김경주의 두번째 시집 <기담>보다 허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지지하기로 했다. 자기 나이에 맞는 시들에 끌리는 법이다(시인의 인터뷰기사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02698&PAGE_CD=19 참조)...

 

시사IN(08. 11. 11) 이제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사는 그대에게

언제 나이를 실감하시는가. 내가 좋아하는 L선생님의 말씀. “예전에는 나랑 동창인 녀석들이 그라운드를 누볐어. 지금은 그 녀석들이 다 감독이 돼 있더라고.” 어르신들께는 민망하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 10년쯤 선배인 분들이 쓴, 삶의 피로가 흥건한 시를 읽다가 ‘어어’ 하면서 와락 공감이 되어버릴 때 나이를 느낀다. 20대였으면 ‘왜 이렇게 징징거려!’ 하고 말았을 것을. 시인 허연의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가 그랬다는 얘기다. 첫 번째 시집 이후 13년 만이다. 왜?

“벽을 보고 누워야 잠이 잘 온다. 그나마 내가 세상을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다. 세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밥이나 먹고 살기로 작정한 날부터 벽 보는 게 편안하다. 물론 아무도 가르쳐준 적은 없는 일이다. 여기는 히말라야가 아니다.”(‘면벽’에서)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슬픈 빙하시대2’에서)

생업에 시달리느라 시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죄와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고 시와 그만 어색해진 것이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유라서 새삼 더 쓸쓸하다. 김훈은 이렇게 썼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그래서 이 시인의 마음에도 슬픈 신경질이 차곡차곡 쌓였던가 보다. 가끔 술자리에서나 폭발할 그런 신경질. 게다가 신경질 한번 부릴라치면 후배는 얄밉게 말한다. “형, 좀 추한 거 아시죠?”(‘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에서)

쓸쓸하다. 이 쓸쓸함이 이 시집에 흥건하다. 그러나 밥을 버는 일, 그거 하찮은 일 아닐 것이다. 밥을 버느라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말하기보다는 무언가를 희생하고 밥을 벌었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시집의 쓸쓸함에도 마음이 짠했지만 밥벌이의 준엄함을 인정하면서 삶을 견뎌내는 시에 더 마음이 움직였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 한다.”(‘일요일’에서) 체념인가 다짐인가. 나는 그냥 다짐으로 읽어버렸다. 이런 시가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서) 다시 ‘나쁜 소년’이 되겠다는 이 오기가 멋지다. ‘밥과 시’가 과연 상극일지라도, 아니라고 호기롭게 외치는 ‘나쁜 소년’ 선배를 볼 때 후배는 막 살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선배님들, 힘내세요. 푸른 잉크 한 통을 다 마시는 한이 있어도.(신형철_문학평론가)

08. 11. 14.

P.S. 참고로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에 이어지는 마지막 연은 이 한 줄이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아주 오래전 이상희의 시집 <잘 가라 내 청춘>(민음사, 1992)을 읽으며 이미 작별을 고했건만 굳이 '확인사살'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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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11-1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문을 넣어야겠군요.

로쟈 2008-11-15 16:44   좋아요 0 | URL
^^

PhEAV 2008-11-17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20대 중반인데도 읽고 싶네요. <기담>보다 더!
(아니 무슨 청춘이 갔다고!)

로쟈 2008-11-17 21:57   좋아요 0 | URL
마음으론 중년이신가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