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이 출간됐다. 올해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로 처음 소개된 이 철학자의 책들이 여러 권 더 출간될 예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도 바울(바울로)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강의'인<남겨진 시간>이 먼저 나오는 줄은 몰랐다. 출판사나 역자도 의외이고. 아무려나 바울과 벤야민의 메시아니즘에 대한 묵직한 독해를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서는 그런 '묵직한 독해'를 따라가기 이전에 '색인' 같은 '곁다리텍스트'나 가볍게 읽어본다.

어제 책을 들고 와서는 습관처럼 '인명색인'을 들춰보았다. 책의 품새와 역자의 역량을 판단하는 데 가장 간편한 지표가 되는 것이 이 '색인' 혹은 '찾아보기'다. 어째서 그런가? 고유명사의 표기를 보면 역자가 국내에 소개된 저자들에 대해서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표기를 쓴다면, 그건 역자가 해당 저자를 모르거나, 적어도 국내에 소개된 책을 읽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컨대, <남겨진 시간>의 인명색인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건 '게르숌 쇼렘'이다. 14쪽에서 '게르숌 쇼렘 Scholem'이라고 처음 등장하는바 벤야민의 친구이자 유대교 철학자 '게르숌 게라르트 숄렘(Gershom Gerhard Scholem, 1897-1982)을 가리킨다. 벤야민에 대한 회고록 <한 우정의 역사>(한길사, 2002)로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다. 일단, 성이 '숄렘'이므로 'ㄱ'이 아닌 'ㅅ' 항목에 배치되어야 하지만 'ㄱ'쪽에 나오게 된 건 색인 작성자가 개념이 없다는 뜻이다. 'ㅎ' 항목에서 '하이데거' 다음에 '한나 아렌트'가 나오는 식인데, 이런 색인을 정색을 하고 작성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퀴즈. '미셸 푸코'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미셸'이니까 'ㅁ'에서다. '미그엘 드 세르반테스'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미그엘'이므로 'ㅁ'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자크'니까 또 'ㅈ'이고, '조르주 바타이유'도 'ㅈ'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프란츠 카프카'가 아니어서 그냥 'ㅋ'에서 찾는다. '칸트'도 'ㅋ'. 하지만 '칼 슈미트'는 'ㅅ'이 아니라 'ㅋ', 뭐 이런 식으로 대중없다. 참고로 이런 조잡한 색인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책은 토드 메이의 <질 들뢰즈>(경성대출판부, 2008)이다. 대학출판부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허접한 '찾아보기' 실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쇼렘'. 왜 '숄렘(Scholem)'이 아니라 '쇼렘'이 됐을까? 첫째는 역자가 '숄렘'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지 못해서이고, 둘째는 일역본을 참조해서다(옮긴이 후기에는 영어본을 옮겼다고 했지만 내 짐작으론 일어본을 옮긴 듯하다). 가령 '히포라테스(Hippokrates)'는 '히포라테스'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본식이다. 'l'과 'r'의 표기방식이 우리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일역본을 참조했거나 일어 표기법에 따르고 있다는 건(물론 익숙한 저자들에 대해서는 우리 표기를 따르고 있지만) 역자의 약력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와세다 대학의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했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더라도 편집자나 교정자가 바로잡아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적어도 인문서를 다루는 편집자/교정자라면 말이다.  

다시 퀴즈. 'ㅂ' 항목에 가 있는 '벤야민 월프 Benjamin Whorf'는 어떻게 표기되어야 할까? '벤자민 워프'라고 표기하고 'ㅇ'에 배치해야겠다. 일단 '워프(Whorf)'가 '월프'가 된 것이 일어식 표기라는 건 지적한 대로다. 워프가 저명한 언어학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엉뚱한 표기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벤자민 워프'는 '에드워드 사피어'와 함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우리가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의 주창자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교정되어야 할 인명들이 이 색인에는 다수 등장한다. '본헤퍼(Bonhoeffer)'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를 가리킨다. '부르멘베르그(Hans Blumenberg)'는 저명한 문학이론가 '한스 블루멘베르크'이고 '레비트(Karl Lowith)'는 <역사의 의미>(문예출판사)나 <헤겔에서 니체로>(민음사) 등의 저작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칼(카를) 뢰비트'로 표기된다. 어느 경우이건 요즘은 검색창에 이름을 한번만 처넣어봐도 알 수가 있는 인명들이다. 게다가 독일 시인 '횔덜린(Holderlin)'을 굳이 '횔더링'으로 새로 작명하는 일 따위는 피해도 좋지 않을까? 러시아의 언어학자 "트루베츠코이(Trubetzkoy)의 유무대립(privative opposition)이라는 개념"을 "트루벳코이의 결여적 대치라는 개념"(169쪽)으로 옮기는 건 어찌해볼 도리가 없더라도 말이다.

물론 본문은 이런 부실한 고유명사 표기나 인명색인과는 달리 충실하게 옮겨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곁다리텍스트'에 대한 이런 일람은 '텍스트'에 대한 기대를 얼마간 잠식하는 것도 사실이다. <남겨진 시간>의 역자나 편집자가 이미 앞서 나온 <호모 사케르>의 '찾아보기'만 참조했더라도 많은 오류/오기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지나친 기대일까?

한편 <호모 사케르>의 '찾아보기'에도 재미있는 오류가 하나 있다. 'ㅇ' 항목에 '윌슨, 에드워드 O.(Edwaard O Wilson)'이라고 나오는데,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을 가리키는 것. 아감벤의 책에 어인 카메오 출연인가 싶어서 영어본을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Paul Ravinow refers to the case of Wilson, the biochemist who decided to make his own body and life into a research and experimentation laboratory upon discovering that he suffered from leukemia"(185쪽) 이것을 번역본은 "폴 래비노우(Paul Rabinow)는 생물학자 윌슨(Edward O. Wilson)의 사례를 언급하는데, 윌슨은 자신이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자기 신체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무제한적인 연구의 실험의 장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348-349쪽)라고 옮겼다.

문제는 에드워드 윌슨(1929- )이 아직 살아있으며 백혈병 환자도 아니라는 것. 역자나 편집자는 '윌슨'이란 이름만으로 예단하여 '에드워드 윌슨'이라는 풀네임을 병기해주고 '생화학자(biochemist)'를 '생물학자'라고까지 수정해준 듯하다. '에드워드 윌슨'이 '윌슨'이란 성을 가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이긴 하지만, 백혈병에 걸려서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기증한 생화학자는 따로 있으니 짐작에 '앨런 윌슨(Allan Wilson, 1934-1991)'이 그이다('짐작에'라고 한 것은 백혈병으로 죽은 생화학자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책에는 그 이상의 정보가 주어져 있지 않다).

만약 앨런 윌슨이라고 하면, 뉴질랜드 출신의 이 생화학자는 '미토콘트리아 이브' 가설로 유명한 분자생물학자이기도 하다. 현대여성이 15만-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한 여성으로부터 기원했다는 가설로 ‘아프리카 기원론’ 또는 ‘이브 가설’이라고도 불린다. 아무튼 백혈병에 걸린 자신의 살아있는 신체를 기증함으로써 윌슨은 그것을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은 대상으로 만들었다. 래비노우는 이러한 윌슨의 생명을 '실험실의 생명(experimental life)'이라고 불렀다. 아감벤은 이를 '더이상 조에와 구분되지 않는 비오스'의 사례로 제시한다.   

아무려나 '찾아보기'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윌슨'은 교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왕 교정을 한다면 본문의 한 대목도 같이 교정될 필요가 있다. 근대성의 '노모스'로서 수용소를 다룬 대목으로 이렇게 번역된 부분이다. "수용소의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예외상태와 수용소 사이의 이러한 구성적 연결관계를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319쪽)

문맥상 이상해서 영어본을 찾아보니 "The importance of this constituive nexus between the state of exception and the concentration camp cannot be overestimated for a correct understanding of the nature of the camp."(168쪽)라고 돼 있다. 'cannot be overestimated'는 직역하면 '과대평가될 수 없다'이고, 뜻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이다. 아감벤의 핵심적인 주장과 관련되는 부분이라 주의해서 읽어야 할 대목이다...

08.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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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15 15:18   좋아요 0 | URL
정말 색인을 저런 식으로 만들면 정말 거시기하겠군요.그리고 디트리히 본헤퍼...헤픈 사람이라는 오해를 하게 왜 저렇게 표기를 했죠?
제가 헌책이 많기 때문에 일제시대 세대들이 번역하면서 일본식 발음을 그대로 표기해도 무슨 말인지는 알아먹습니다만 요즘에도 저런 표기를 한다니 뜻밖입니다.

로쟈 2008-11-15 16:37   좋아요 0 | URL
요즘은 엉터리 색인들이 많아서 '색인'이란 것 자체에 대해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란 생각까지 해보게 됩니다...--;

크네히트 2008-11-18 13:39   좋아요 0 | URL
궁금한게 있는데요. 왜 벤야민 워프가 아니고 벤자민 워프이 되는 건가요? 발터 벤야민은 벤야민이 맞는 것 아닌가요? 혹 워프가 미국에서 활동한 사람이라서 그런건지.. 아니면 발터 벤야민이 표기법상 틀린 건가요? 궁금해서 문의드려요^^

로쟈 2008-11-18 16:01   좋아요 0 | URL
같은 이름이라도 독어와 영어를 읽어주는 방식이 다릅니다. '벤야민 프랭클린'이 아니라 '벤자민 프랭클린'이라고 불러주는 것이죠. 발터 벤야민을 '베냐민'이라고 읽어주기도 하는데, 이미 '벤야민'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