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해외 지성 동향'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7246). 지령 500호 특집의 하나인데, 기자는 특별히 스티글리츠, 울리히 벡, 피터 싱어, 아즈마 히로키 등을 거명하고 있다. 출간된 책들의 이미지들을 덧붙여놓는다.

교수신문(08. 11. 17) 불확실한 세계의 내일을 보려거든 이들을 주목하라

미국의 금융위기와 그로인한 경제 불황의 그림자와 불안은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 변화는 경제 정책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오바마에게 미국의 리더십이 넘어간 것은 이러한 변화의 물결이 시작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처한 맥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곧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오늘의 세계를 진단하고 내일을 전망하는 학자들의 시선도 다를 수밖에 없다.

우선 체감 온도 영하를 기록 중인 경제 불황의 한파 속에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대신할 미래의 경제학은 누구에게서 단초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지난 2001년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의 행보에 주목할 수 있다. 그는 본래 주류 경제학에서 출발을 했지만, 정보 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이 높다. 스티글리츠는 전통경제학의 완전 시장 개념이 정보 완전성을 전제했다 주장하면서, 현실에서는 정보의 결함 및 불완전성이 존재한다고 지적, 정보의 비대칭성을 고려하는 새로운 경제학 모델을 주창했다. 또 스티글리츠는 보험시장은 물론이고 노동시장, 신용거래시장, 국제금융시장 등의 여러 사례의 분석을 통해 정보 비대칭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초했다.

그런데 그를 미국 경제학계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학계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이론적 업적만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선진국의 경제 정책을 비판한 행보 때문이기도 하다. 스티글리츠가 세계화에 반대하는 평등주의 시장 경제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최근의 저서들을 보면, 그는 미국의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에 힘을 쏟고 있다.

올해 9월에 출간된 『3조 달러 전쟁 : 이라크 전쟁의 진짜 비용』에서 스티글리츠는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3조 달러(우리 돈으로 3000조원 이상)를 이미 썼고, 전쟁 부상자들의 간호 비용으로 수십억 달러를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스티글리츠의 이러한 분석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세계화와 그 불만』과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정면에서 문제 삼는 저작들로 역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홍훈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스티글리츠에 대해 “굳이 계보를 따지자면 케인지안에 속하겠으나, 범상한 케인지안과는 다른 학자”라면서 “기존 경제학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이번 금융 위기에 대해서 경제회생에 최소 18개월이 필요하다고 진단하고, 폴 볼커 전 연준의장을 차기 재무장관으로 추천하는 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오바마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지 주목된다.



현대 사회가 낳는 문제는 비단 경제적 위기와 미국 중심 질서에 한정될 수는 없다. 얼마 전 광우병 파동과 사스 등 신종 질병의 출현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고유하게 나타나고 있는 과학 기술의 부정적 산물 역시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이 같은 위험에 대해 사고한 사회학자로는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 그는 하버마스, 기든스 등에 견줄만한 학자로 손꼽힌다. 뮌헨 대학에서 사회학 학위를 받고, 뮌스턴 대학과 밤베르크 대학을 거쳐 뮌헨 대학 사회학 연구소장직을 맡고 있는 울리히 벡은 지난 86년 『위험사회』란 저서를 통해 서구 근대화 과정이 낳은 현대 사회의 위기화 경향을 진단하면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의 성찰은 특히 현대의 과학기술이 현대 문명의 여러 이기를 낳았지만, 동시에 위험도 증폭시킨 상황에 대한 분석에서 두드러진다. 벡은 탈지역화, 계산불가능성, 보상불가능성이라는 특징으로 현대 사회의 위험을 바라보면서, 예기된 재난 속에서 현대 인류는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뻔히 그것이 일어날 것임을 알면서도, 즉 예기됐으면서, 감내할 수밖에 없는 재난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인 면까지 있다. 벡은 근대화의 근본적 한계를 진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법 모색에도 힘을 쏟고 있다. 최근 『성찰적 근대화』, 『정치의 재발견』,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등의 저서를 통해 근대화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정일준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울리히 벡에 대해 “벡은 현대의 과학기술이 일종의 예기된 재난을 야기한다는 점에 주목한 학자”라고 하면서 “세계위험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새로운 비판 이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또 “국내에는 그의 위험 개념이 희화화되고 오해된 측면이 많은데, 진면모가 소개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울리히 벡은 최근 『코스모폴리탄 유럽』, 『코스모폴리탄 비전』등의 저서를 통해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대를 염두에 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사유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촛불 시위에 대해서도 언론사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고, 방문 강연을 한 적도 있어, 친숙한 학자로 인식되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한 학자는 많이 있다. 그러나 벡처럼 전면적이고, 치밀하며, 독창적인 관점에서 현대 문명의 위험성을 분석한 사람은 드물다. 벡이 과연 새로운 비판 이론의 역사를 열어갈지 관심이 간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봉착한 문제는 비단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다. 환경오염 등은 자연을 대하는 현대인의 근본적 태도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윤리학계의 좌장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피터 싱어(Peter Albert David Singer)는 현대 사회가 제기하는 여러 윤리적 문제 해결의 지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싱어는 특히 동물 해방론 및 생명 공학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탁월한 해법을 제시해 명성이 높다.

우선 피터 싱어는 자신을 저명한 윤리학자로서 자리매김해준 저서인 『실천 윤리』에서 이기적 행동은 이기주의적 원칙에 어긋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불합리하며, 윤리 도덕적 삶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곧 비이기적인 삶이 이기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싱어의 논의는 윤리적 행동의 필요성을 그저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과 ‘의무’를 이유로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논증적으로 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도덕 법칙의 존재를 거부하는 자도 납득하지 않을 수 없는 논증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른 한편 싱어는 인간 중심의 윤리관에서 탈피할 것을 촉구한다. 싱어는 동물이 비록 지적으로 인간보다 저능하지만, 그것이 동물의 윤리적 권리를 박탈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인간 중에서도 발달이 더딘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이유로 차별을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비판이다. 이는 우리가 윤리적 고려를 나누는 대상을 확정하는 기준으로 어떤 이해관계나 이성이 아니라 고통을 삼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윤리적 의식의 근원에는 고통에 대한 의식이 있으며, 따라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기능이 윤리 공동체에 편입될 수 있는 자격을 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로부터 싱어는 생물중심주의 윤리학을 구축했는데, 광우병 파동으로 관심이 커진 동물 보호 운동의 이론적 준거를 제공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변순용 서울교대 교수(윤리교육)는 싱어에 대해 “살아 있는 윤리학자 중 가장 강하게 생명 윤리와 동물 윤리에 대한 주장을 펼치면서 확고한 이론적 업적을 세운 학자”라고 지적했다. 박상혁 계명대 교수(윤리학)는 “자신 수입의 20퍼센트를 빈민을 위해 사용하는 실천하는 철학자이고, 의료 윤리 등 다양한 응용 윤리 연구의 진보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 학자”라고 강조했다. 피터 싱어는 최근 대형 농장에서 잔인하게 살육되고 있는 동물의 현실을 문제 삼은 화제작 『죽음의 밥상』(산책자, 2008)을 내놓은 한편, 『세계화의 윤리』등을 통해 비판적 지성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피터 싱어가 이렇게 인간의 윤리적 지향에 대한 모범을 제시했지만, 윤리적 삶은 언제나 대중의 삶과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이는 윤리적 규범과 의무에 대한 강조만으로는 현대 사회의 보다 거칠고 생생한 이면을 들여다 볼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특히 최근 묻지 마 살인이 빈발하고, 니트족이 사회 현상의 상수로 자리매김한 상황에서, 하위의 대중 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 절실해지고 있다. 이에 우리는 일본의 젊은 논객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에 주목하게 된다. 1971년생인 히로키는 1998년 『존재론적, 우편적─자크 데리다에 관해』라는 화제의 저작에서 데리다의 논의를 하이데거·프로이트와 연계하면서 ‘우편적 불안’이라는 테마로 재해석해 존재론적 함의를 이끌어낸 바 있다.

이후 히로키는 일본 특유의 오타쿠 문화를 포스트모던과 연결해 사고하고자 하는 시도로도 유명해졌다. 특히 국내에 번역이 된 바 있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문학동네, 2007)와 연작인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에서 거대 오락 산업과 오타쿠 집단의 출현을 포스트모던적으로 읽어내면서 현대 일본사회의 정신적 구조와 인간의 새로운 변화 양상을 진단했다.

그는 이 저작들에서 많은 독창적 테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오리지널 대 복제라는 구도를 데이터베이스 대 시뮬라크르라는 구도가 대신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여기서 데이터베이스는 기존에 표층을 규정하던 심층으로서 커다란 이야기를 대신해, 유저(독자)의 읽어내기에 따라 결정되는 심층으로서 데이터베이스를 말한다. 기표에 대한 기의의 초월적 귄위를 거부한 포스트적 관점을 인터넷 세대의 감수성으로 풀어내고 변형한 독창적 제안이다.

히로키는 더 나아가 사람들이 시뮬라크르 수준의 작은 이야기들에 대한 욕구와 데이터베이스 수준에서 생기는 커다란 非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해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람들은 △ 타자 없이 충족하는 동물적 존재가 돼가는 동시에 △ 데이터베이스 수준의 커다란 非이야기에 대한 욕망에 따르는 형해화된 인간성을 유지하는 이층적 주체로 변모한다고 본다.

일부에서는 히로키를 가라타니 고진의 뒤를 이를 사람으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다른 일부에서는 초기의 진지한 인문학적 사유를 팽개치고, 일본 특유의 오타쿠 하위문화에 천착해서, 능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나 미국의 포스트모던주의자들보다 진일보한 관점에서 과감한 테제와 분석을 제시하는 히로키를 이론적으로 천대시할 수만도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아직 젊다는 점에서 그 미래가 주목된다.

인간의 미래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지성들은 이밖에도 더 열거할 수 있다.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는 푸코와 더불어 20세기 후반 세계 지성사에 독보적 획을 그은 바 있다. 아주 최근은 아니지만 인간복제 등 생명공학의 발전에 대해서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의 심화, 생태 및 환경윤리에 대한 요구의 증대, 집단지성의 출현 등 급변하는 현실을 사고하기에는 낡은 틀을 고수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푸코, 데리다, 들뢰즈와 다른 목소리가 프랑스에도 존재함을 각인시켜주고 있다. 현대의 대표적 플라톤주의자로 꼽히지만 결코 고루한 이성주의자에 머물지 않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바디우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복수의 진리를 내세운다. 또 문화적 차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문제의 핵심은 그러한 차이들을 넘어 작동하는 보편성의 차원에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현대 정치 철학의 거장이자 기존 마르크스주의를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네그리도 시선을 끈다. 그의 저서들은 늘 화제를 몰고 있으며, 영미와 유럽대륙은 물론이고 한국에까지 광범위하게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다. 다만 몇 년 전, 대부분의 좌파들이 ‘NO’를 외친 유럽연합 헌법투표에 대해 ‘YES’를 외쳐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또 그의 자율주의가 함의하는 대중 정치 역량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문제 삼는 경우도 많다.(오주훈 기자)

08. 11. 18.

P.S. 아즈마 히로키에 대해서는 중앙대 대학원신문의 기사를 보충해놓는다. 기사에서 언급되는 아키라의 책 <구조와 힘>은 국내에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새길, 1995)로 소개된 바 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03) 아즈마 히로키, 새로운 사상보다 사상의 새로움을

일본사상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1971~ )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그는 가라타니 고진의 후계자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물론 일본의 한 비평가가 푸념했듯이, 예전의 대학원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진을 읽었다면, 요즘에는 히로키를 읽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히로키는 고진의 후계자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히로키의 출세작 <존재론적, 우편적>(1998)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고진의 추천으로 등단한 히로키가 <비평공간>에 연재한 글로, 연재 시작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3살이었다. 그리고 3년 후 이 글이 묶여 출간되자 높은 평가를 받으며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함은 물론이고, 대개 소설에 수여되는 미시마유키오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아사다 아키라에게 “<구조와 힘>은 이제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찬사를 받으며 현재까지 수만 부가 팔려나갔을 뿐 아니라 만화로까지 출간됐다. 그 난해하다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 연구서가 이처럼 많이 읽혔다는 것은 확실히 일본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물론 예외는 있다. 80년대에 <구조와 힘>은 20만 부 정도 팔렸고, 고진의 책도 대부분 수만 부씩은 팔리고 있다).

그러나 히로키는 이와 같은 화려한 데뷔 이후 철학사상 연구를 내동댕이친다. 그리고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오타쿠문화(하위문화) 연구에 매진한다. 국내에 유일하게 소개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001)은 바로 그와 같은 연구의 성과물 중 하나이다. 이 책의 국내 소개에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내용도 잘 모른 채 책제목과 저자에 대한 소문만 듣고 이 책을 출판사에 추천한 이가 정작 출간된 뒤에는 실망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확실히 징후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생각보다 너무나 완고한 나머지 익숙한 분석대상이나 개념, 인명이 등장하지 않으면 한시도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그런 한국의 인문학도들에게 히로키는 어쩌면 실망의 대상일 수 있다.

히로키 자신도 이와 관련해 많은 충고를 들었다고 한다. “자네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인문학(철학이나 사상) 연구 대신에 미소녀 게임이나 분석하고 있다니 재능이 아깝네”라고 말이다. 이에 대한 히로키의 답변은 대충 이랬다. “내가 데리다에 관한 책을 낸 것은 하위문화 비평가가 되기 위해 일종의 지명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위문화는 엄청나게 생산되고 소비되지만 정작 주류 비평가들은 기존 틀에 갇혀 이런 현실적 문제들을 일관되게 무시해왔다. 그러나 나는 서구사상을 학습하며 조립하는 데 만족하기보다 실제 우리의 삶 가까이에 널려 있는 문화의 정체를 분석하고 싶었다.” 이처럼 우리에게 히로키는 새로운 사상가라기보다는 사상의 낯섦(새로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조영일/ 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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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20 13:17   좋아요 0 | URL
일본에서는 아즈마 히로키 처럼 20대초반에 떠오르기도 하는군요.우리나라 고교생 독서현실로는 어림없는 일이죠.

로쟈 2008-11-20 20:44   좋아요 0 | URL
고교생도 읽을 수 있게끔 번역이 돼 있지도 않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11-21 14:10   좋아요 0 | URL
사실은 우리나라는 고졸이나 대졸의 차이점도 없는 것 같아요.모두 수험서만 읽으니까요.저도 졸업하고 나서 이런저런 책을 읽었지 대학 시절엔 고졸과 지적수준은 똑같았다고 봐야죠.

로쟈 2008-11-21 22:16   좋아요 0 | URL
사실 우리나라 학생들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은 영어나 일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의 1/10도 안될 듯싶은데요. 원초적인 한계가 있는 듯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