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책방의 금요강독(http://blog.aladin.co.kr/mramor/3166496)에 들렀다 귀가하느라 매주 거르지 않던 서점순례를 생략했다(대신에 이음책방에선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을 구입했다. 듣자하니 서점 운영이 상당히 어렵다고 한다). 이번주 신간에 대해서 알라딘의 '새로나온 책'과 언론리뷰를 참조할 수밖에 없는데, '이거다!' 싶은 뜻밖의 책은 눈에 띄지 않지만 몇 권의 책은 관심도서로 눈도장을 찍어둘 만하다.  

내 경우엔 지리학자 하름 데 블레이의 <공간의 힘>(천지인, 2009)와 빈스 에버르트의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이순, 2009)가 그런 책이다. 사실 둘다 제목에 끌린 셈인데, <공간의 힘>의 경우엔 부제가 '지리학, 운명, 세계화의 울퉁불퉁한 풍경'이다. 그의 전작인 <분노의 지리학>(천지인, 2007)도 사실 제목에 끌려 구입해놓고 읽진 못했는데, 이번엔 '세계화'를 다루고 있기도 해서 필독해볼 참이다. 게다가 "우주론에 있어 칼 세이건이 남긴 업적을, 하름 데 블레이는 지리학에서 이루고 있다"(빌 모이어스) 같은 추천사는 아주 '쥐약'이다.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의 광고 문구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아내도 아니고 지식쯤이야!). '빌 브라이슨을 능가하는 지식예능인의 출현!' 저자가 물리학 전공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고 하니까 '지식예능인'이 구라는 아니다. 최근엔 '강연콘서트'도 새로 등장했다고 하니 우리라고 '지식예능인'이 출현하지 말라는 법은 없겠다. '개그정치인'이나 '만담재판관'들보다야 우리의 정신 건강에 유익할 듯싶다. 관심도서 두 권의 리뷰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9. 11. 07) 세계는 두 부류다… 평평하거나 주름지거나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화로 인해 세계가 평평해졌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유럽, 북미, 동아시아, 호주 등 ‘중심부’에만 적용되는 얘기다. 하름 데 블레이는 “지구는 문화적으로는 물론이고 물리적으로도 아직 울퉁불퉁한 땅”이라면서 “주변부에는 세계인구의 85%가 살지만 세계 총소득의 25%만 돌아간다”고 말한다. 지도상의 검은 점은 미국·멕시코의 국경, 중국과 대만 사이의 해협, 이스라엘의 분리장벽 등 중심부와 주변부를 가르는 주요 경계지점들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화에 의해 수십억 인구와 기업들이 장소와 언어·문화에 상관없이 동시에 경쟁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내용의 <세계는 평평하다>를 쓰면서 자신의 ‘발견’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 대비시키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는 미국 정보통신 산업의 중요한 아웃소싱 대상으로 떠오른 인도를 다녀온 뒤 아내에게 “여보, 내 생각에는 말이야. 지구는 평평해”라고 속삭이면서 마음 속으로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경향’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수식어를 생각해 내고 있었다.

중동문제 전문가이기도 한 칼럼니스트 프리드먼은 자신이 평평하다고 명명한 세계가 결코 평평하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될 것을 예상했다. 그는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나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관심을 높이기 위해 저자의 권한으로 그런 제목을 만들어본 것뿐이다”라며 도망갈 구멍을 남기는 영악함을 보였다. 물컵을 보면서 ‘물이 반밖에 차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계적인 칼럼니스트가 뽐내면서 내놓은 ‘평평한 세계’라는 키워드는 울퉁불퉁한 현실의 세계를 가려버림으로써 세계인의 인식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갈 위험성을 안고 있다.

미시간 주립대 지리학과 교수인 하름 데 블레이가 <공간의 힘>(원제 The POWER of Place)의 서문을 “두바이 힐튼 호텔의 전망 좋은 방에서, 혹은 싱가포르 항공의 비즈니스 클래스 창가 좌석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실제로 평평해 보인다”는 말로 장식한 것은 일부 사람들에게 세계는 실제로 평평해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동시에 프리드먼의 외눈박이 시각이 내포한 해악을 지적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블레이는 우선 지구에 살고 있는 70억 인구를 세계인·지역인·이동인으로 분류했다. 세계인은 중심부에서도 상위층에 위치한 운 좋은 사람들을, 지역인은 가장 가난하고 이동성이 적으며 울퉁불퉁한 공간의 영향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동인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해 하위층에 자리잡는 이주민들이다. 공간적으로는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를 지나 동아시아와 호주에 이르는 세계화가 이뤄진 지역을 평평한 중심부로, 그 밖의 지역을 주변부로 나눴다.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엔 완고한 장벽이 존재한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남아공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저자는 이 장벽을 남아공 백인 정권이 펼친 악명 높은 흑백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비유했다. 이 장벽이 자연적인 경계가 아니라 기득권 세력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란 뉘앙스를 담고 있다. 이런 접근 방식은 세계를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로 나누어 정치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적 방법론을 연상시킨다.

저자는 지리학자답게 각 장마다 언어, 종교, 질병, 재난, 분쟁, 출생률·평균수명, 도시화율, 여성의 정치참여 비율 등을 담은 세계지도들을 동원했다. 이런 시각적 자료들은 지구촌의 현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해준다. 블레이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야 센이 제기한 “아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장소에 따라 커다란 번영의 수단과 기반을 갖게 될 수도 있고, 절망적인 결핍의 삶에 직면할 수 있다”는 명제다.

그렇다고 블레이를 반세계화론자로 단정지을 수는 없어 보인다. 그는 현대로 올수록 절대빈곤은 감소하고 있으며, 다양한 이동수단 및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도입은 문화적 선택권을 넓히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세계화의 중심점과 주변부들은 현대화와 통합의 네트워크를 구축해나가고 있지만, 그에 따라 장벽이 더 높아지고 공간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는 세계화의 모순을 직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저자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은 ‘평평한 중심부’ 내부의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프리드먼의 주문은 평평한 세계의 끝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미국식 세계화에 동참하라는 것이지만, 블레이는 반대로 시각을 평평하지 않은 외부로 돌려 지구를 더 평평한 세계로 만드는 데 동참하라고 주문한다. 그렇다. 문제는 ‘어떤 세계화이냐’인 것이다. (김재중기자)   

서울신문(09. 11. 07) 우리는 정말 스스로 생각하고 사는가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북극 빙하가 녹고,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기후변화의 결정적인 원인을 늘어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탄소 배출을 제한하고 태양열 같은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하는 데 온갖 돈을 쏟아붓는다. 과연 이런 행동은 옳은 방향인가.  

사랑에 빠진 상대가 멍청이인 것을 알지만 헤어나질 못하는 여성이 있다. 이성이 자리한 대뇌피질은 “녀석을 차버려!”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감정 중추인 변연계는 소리친다. “그래도 저이는 진짜 귀엽잖아!” 결국 그냥 사귄다.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면서. 그런데 이게 세계적인 커피 브랜드의 소비를 촉진하는 힘이었다면, 어떤 상관관계로 풀어낼 수 있을까.

●보고 듣는 대로 믿는 현대인 꼬집어
독일에서 ‘가장 재미있는 물리학자’로 불리는 빈스 에버르트는 끊임없이 묻는다. 인간이 지금처럼 생활한다면 수년 뒤 지구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환경론자의 히스테리는 정당한가. 진정 친환경 제품을 이용하면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을까. 휴가철에 여행가방을 들지 않고, 해외로 벗어나지 않는 독일인은 삶의 지평을 넓힐 수 없는 것인가. 유전자 변형 토마토를 생산하는 기업은 인류의 건강에 해악을 저지르고 있는가.

비만이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꼭 벗어나야할 ‘악의 축’으로 규정한다면, 다이어트 팁을 ‘먹는 양을 줄이고 운동해라.’가 아닌 ‘다른 부모를 찾아라.’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에버르트는 이런 질문들은 던지고 다소 황당하면서도 유머스럽고 기발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조경수 옮김, 이순 펴냄)를 완성했다.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합니까.” 책 첫머리부터 저자는 뜬금없이 질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인용하며 그럴싸하게 ‘당연하지. 생각하지 않는 그 순간은 나 자신은 내가 아닌거야.’라는 대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생각하고 있을까.

저자가 말하는 ‘생각’은 ‘언제 천장 페인트칠을 했더라?’거나 ‘괴델의 정리가 뭐였지.’라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판단과 주장을 만들어내는 사고 행위이다. 하지만 정보 홍수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인간은 그 사고를 대체로 ‘아웃소싱’한다. 확인되지 않는 소문과 각종 음모론, 감언이설 등에 접하며 사고의 오염을 겪는다.  

“인간은 특별히 잘 듣지도 못하고, 냄새를 잘 맡지도 못하고 털도 별로 없으며, 날카로운 발톱이나 맹수같은 이빨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토끼만큼 증식했다. 수레바퀴와 천연두 백신을 발명했고 심지어는 전기로 창문을 올리는 장치마저 고안해냈다. 사고는 우리의 진화적 지위이다. 그런고로 생각하는 사람이 그토록 적다는 사실이 나는 매번 놀랍다.” 저자는 책을 통해 안일하게 생각하고, 들은 대로 되풀이하며, 본 대로 믿어버리는 무감각에 강력한 전기 자극을 주어 사고 세포를 되살리고자 한다.

논리적이면서도 유머 가득한 풍자
앞서 말한 질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지구 역사를 보면 인간이 이산화탄소를 방출하지 않았을 때도 이미 엄청난 기온 변화가 있었다. 1만 5000년 전 빙하가 녹은 것은 네안데르탈인들이 고기를 불에 구워먹기 시작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 탓이 아니다. 기후 변화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이산화탄소만 꼽을 수는 없다. 사실 기후 연구도 결코 정확한 과학이라 하기 힘들다. 저자는 세계 기후 보고서 13장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기후 모델은 연계된 비선형적인 카오스적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기후 시스템의 장기적 예측은 불가능하다.” 

지금의 환경 오염이 안전한 수준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보험에 가입할 때든, 세상을 구할 작정이든, 어떤 경우에도 간과하기 쉬운 세목을 꼼꼼히 읽어라.”는 저자의 말은 영향력있는 학자들의 말이라도 비틀어보고 따져보는 과정을 가져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스타벅스’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기, 종류, 추가사항 등을 캐묻는 커피 주문이 귀찮아도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저자는 “평범한 일상에서는 결정권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뭔가 결정한 기회를 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2유로 80센트를 내고 얻는 것은 커피 한 잔이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빈스, 톨, 프라푸치노, 캐러멜, 로우팻, 디카페인’으로 규정되는 자아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책은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 기발한 전략으로 가득하다. 물론 과학자답게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논거로 주장을 뒷받침한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정작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잊어버린 엘 고어 같은 사람들이 짜증난다.”거나 “전 재산을 침대 밑에 보관하고 빨리 돈을 꺼내줬던 할머니가 홈뱅킹의 최초 형태” 등 톡톡 튀는 내용으로 재미를 더한다. 마치 해학 넘치는 시사 스탠딩 쇼를 글로 옮겨놓은 듯.(최여경기자)

09. 11. 06. 

P.S. '빈스 에버르트'를 검색하면 뜨는 책은 <스스로 생각하시오!>이다. 이게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의 원제인가?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 동영상은 http://www.youtube.com/watch?v=n1180FGXW0U 참조. 독어라서 내용은 전혀 모르겠지만, 어떤 분위기인지는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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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6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장정일의 신작 소설이 나온 김에 그의 최근 칼럼도 읽어본다. 핀란드식 명품교육에 관한 책들이 요즘 유행인데, <영국의 독서교육>(대교출판, 2009)을 주제로 한 책도 나와 있다는 건 칼럼을 보고 알았다. 영국 경제의 토대인 '창의산업'의 기반이 독서교육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인 듯싶다.       

한겨레(09. 10. 31) ‘양파 총리’보다 아이들에게 한마디

원래 이번 글감은 양반론(兩班論)을 통해, 까고 또 까도 의혹의 끝이 보이지 않는 ‘인간 양파’ 정운찬 총리를 까는 거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늘 내게 하신 ‘남자는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철들지 못하면, 영영 철들지 못한다’는 말을 용케 떠올리고, 벼르던 글감을 포기했다. 총리가 이따위 글을 읽지도 않겠지만, 어머니의 지론에 따르자면, 읽어봤자 별무소용이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은하의 <영국의 독서교육>(대교출판, 2009)을 대신 읽는다.

영국은 전체 고용인구의 80%가 서비스 산업에 종사한다. 음악·서적·영화처럼 지적재산권이 중요한 산업이나 스포츠·관광 등의 산업을 창의산업(Creative Industry)이라고 하는데, 빈약한 제조업과 천연자원을 가진 영국으로 하여금 세계 5위의 경제규모를 유지하게 해주는 일등공신이 바로 창의산업이다. 1997년 이후 10년 동안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로 벌어들인 수출 총액 231조원은, 같은 기간 조앤 캐슬린 롤링이 <해리 포터> 시리즈와 파생상품으로 벌어들인 308조원보다 적다.

6년 넘게 영국의 교육현장을 일선에서 체험했던 저자는 영국 어린이들이 어떤 독서 환경에서, 어떤 독서 교육을 받는지를 세밀히 보여준다. 그러고 나서 내린 결론은 “출판·방송·디자인·예술·관광·광고 등 영국의 창의산업 중심에는 책”이 있으며, 창의적인 인력을 키우기 위한 “영국 교육의 키워드” 역시 책이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라’라는 강요만으로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어린이의 독서는 성인의 독서나 똑같이 책을 읽고, 토론하고, 독후감을 쓰는 행위에 국한된다. 하지만 영국은 캐릭터 상품, 애니메이션, 여행, 작가와의 만남은 물론이고 그저 도서관에서 놀게 하는 것만으로 어린이들을 제한적인 ‘독서 교육’이 아닌, 아이들의 삶에 깊숙이 파고드는 ‘독서 경험’과 접속시킨다.

지은이에 따르면, 이렇듯 한 사회가 어린이들에게 ‘독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선비들처럼 독서란 혼자 읽는 것이란 생각에서 벗어나, 함께 하는 활동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출판사·서점·도서관들이 개별적인 독서운동이 아닌 “유기적인 네트워킹으로 모든 부문이 ‘윈윈’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 전에 정부가 결단해야 할 것은 어린 학생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옥죄는 국정 교과서를 해체하고, 입시 위주의 교육을 개선하는 일이다.

흠모하는 중국의 작가 루쉰은 유교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제도’라고 말하면서, 아직 인육을 먹은 경험이 없는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고 썼다. 과연 <영국의 독서교육>을 소개하게 된 것은, 비유적으로 말해 불법에 맛 들였던 가망 없는 총리에 대해 한마디 하는 것보다 훨씬 탁월한 선택이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 하면, 다 큰 어른이 아무 대가 없이 용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염치 또한 생길 테니 말이다.(장정일 소설가)   

09. 11. 05.

 

P.S. 그러한 영국식 교육의 이면일 듯싶은 책은 닉 데이비스의 <위기의 학교>(우리교육, 2007)이다. 부제는 '영국의 교육은 왜 실패했는가'이고 원제는 그냥 건조하게 '학교 보고서(The school report)'. '위기의 학교' 속에서도 '책읽기에 열광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일까? 두 가지 보고서가 어떻게 양립가능한지 궁금하다. 누가 같이 읽고 리포트를 써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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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세알 2009-11-06 10:55   좋아요 0 | URL
그 문제의 해답중 일부는 닉 데이비스가 영국사람이라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나라 어떤 학자들도 '잘나가는 한국교육'같은 제목의 책은 쓰지 않을 것 같거든요. ^^;;
오랫동안 심심풀이로 영국tv를 봐온 저의 경험에 한정해서 얘기해도 영국문화의 중심에 책이 있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해마다 찰스 디킨스나 제인 오스틴같은 영국작가들의 작품이 드라마화 된다는 뻔한 사실을 빼고도 드라마, 퀴즈나 오락 프로그램, 컬쳐쇼, 코메디, 다큐멘터리 등등에게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는 것을 보거든요.

로쟈 2009-11-06 23:06   좋아요 0 | URL
네. 그럴 법한 지적이십니다. 닉 데이비스의 진단이 '영국의 교육은 독서교육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인지 알고 싶어서요...

펠릭스 2009-11-06 14:18   좋아요 0 | URL
영국 교육제도의 기초되는 존 로크의 '미래를 위한 자녀교육'도 읽을 만합니다.

로쟈 2009-11-06 23:07   좋아요 0 | URL
그런 책도 나온 적이 있었네요!^^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마쓰모토 겐이치의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문학과지성사, 2009)을 다뤘는데, 따로 염두에 두었던 책이 잘 읽히지 않아서 원고 마감일 아침에 부랴부랴 읽고 작성한 것이다. 원제는 '사상으로서의 우익'. 읽다 보면 '사상으로서의 한국 우익'은 뭘까, 라는 의문을 갖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일본 우익에 관한 책은 여럿 나와 있지만 한국 우익에 대한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한겨레21(09. 11. 09) 일본 한국 우익, 차이가 더 크다 

우익이란 무엇인가? 역사적 고찰이건 이념에 대한 분석이건 한국의 ‘우익’을 전면적으로 다룬 책은 드물다. 우익이라면 민족주의나 보수주의보다는 곧장 반공주의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한국적 현실이다. 이러한 특수성이 우익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물음까지도 봉쇄해버린 것은 아닐까? 일본의 평론가 마쓰모토 겐이치의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문학과지성사 펴냄)을 접하면서 갖는 궁금증이다.    

1976년에 첫 출간된 이후 여러 차례 개정판이 나왔다고 하므로 일본에서도 우익사상에 관한 대표적인 저작에 속하는 이 책의 원제는 ‘사상으로서의 우익’이다. 초점이 우익의 활동과 역사보다는 사상적 본질의 해명에 두어졌다는 걸 시사한다. 물론 그러한 해명을 위해서는 우익의 성립과 전개과정에 대한 고찰도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마쓰모토가 독특하게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근대 일본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계급은 좌익도 우익도 아닌 리버럴(liberal)이었다. 원래 자유주의자를 뜻하는 리버럴이 일본에서는 보수주의자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는 이 리버럴 세력이 좌우 양익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면서 지배계급으로 군림했다고 본다. 즉 프랑스 혁명 이후에 나타난 유럽의 좌파/우파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그것은 선진자본주의 열강 밑에서 일본이 뒤늦게 근대화를 추진해야 했던 특수한 사정에서 비롯됐다.  

입헌정치를 시도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출현하면서 리버럴은 근대 일본의 지배계급이 되며, 이들은 메이지 국가체제의 근대화 노선을 적극적으로 주도해간다. 그리고 이때 이러한 노선에 반대하는 ‘반체제’로서 좌익과 우익은 마치 쌍생아처럼 태어났다. 좌익은 ‘계급’의 입장에서, 그리고 우익은 ‘민족’의 입장에서 근대화 노선에 반대했다. 사정은 전후에도 마찬가지여서 여전히 일본의 지배권력은 진주군(미군) 및 진주군과 결탁한 리버럴이었으며 이들이 처음에는 민주화를, 그리고 이후에는 우경화를 추진했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그렇다면 우익사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좌익은 ‘마르크스교’이고 우익은 ‘천황교’라고 단순하게 정의하는 안이한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저자는 우익의 사상을 ‘가장 높이 도달한 지점’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그가 제일 먼저 제시하는 것은 우익의 사생관이다. 사상이란 궁극적으로 논리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 곧 주체의 에토스의 문제라고 생각에서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익의 사생관은 일본의 전통적인 산화(散華)의 미학, 곧 ‘아름다운 죽음’의 미학 위에 형성된다. 삶의 극치에서 죽어야 하며 그렇게 죽는 것이 아름답다는 식이다. 또 일본의 우익은 리얼리스트를 자임해온 좌익과는 달리 언제나 낭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낭만(뜻)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더불어 그들은 반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농본주의자들이었다. 벼농사를 기반으로 형성된 일본의 사직을 관장하는 사제(司祭)가 천황이기에 천황론도 자연스레 우익의 기본 사상이 된다. 다만 천황을 장악하여 국가지배의 원리로 만든 것은 우익이 아니라 언제나 리버럴이었다.   

일본 우익은 또한 내셔널리즘(민족주의)과 아시아주의를 동시에 주창했는데, 아시아주의란 서구 열강에 대항하여 아시아 민족의 내셔널리즘과 연대하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정작 일본 자신이 제국주의화되면서 우익의 내셔널리즘과 아시아주의는 충돌하게 된다. 일본의 제국주의 또한 아시아 내셔널리즘의 타도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우익은 아시아주의를 포기한다. 그런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우익이 체제에 편입하면서 타락한 형태로 아시아주의를 표방한 것이 ‘대동아공영권’이란 저자의 지적이 흥미롭다. 한국어판의 머리말에서 저자는 내셔널리즘을 대의명분으로 한 일본 우익과 한국의 우익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궁금해하는데, 실상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은 게 아닌가도 싶다. 민족주의보다는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을 견지하고 있는 한국 우익의 견고한 반공주의와 현실주의가 떠올라서다. ‘사상으로서의 한국 우익’이란 무엇일까? 

09.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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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 2009-11-03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를 읽으니 한국 우익 청년의 성장기를 다룬 장정일의 신작, <구월의 이틀>이 떠오르네요..
장정일 소설은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로쟈님은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로쟈 2009-11-05 10:34   좋아요 0 | URL
덕분에 출간 소식을 알게 됐습니다.^^

자꾸때리다 2009-11-0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비-스트로스가 타계했네요.

자꾸때리다 2009-11-0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대입 논술에 구조주의가 나오지 않을까...

로쟈 2009-11-05 10:34   좋아요 0 | URL
그런 순발력이?^^

드팀전 2009-11-04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21에서 리뷰를 봤습니다. 종이가 눈에 더 잘 들어와요. 일본의 사생관이라는 관점과 오른쪽의 마루야마 마사오 리스트가 오버랩됩니다.

로쟈 2009-11-05 10:35   좋아요 0 | URL
장정일 신작 소설도 우연찮게 우익을 다루고 있어서 오버랩시켜볼 만할 듯해요...

2009-11-16 0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6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매주 월요일 한겨레신문에 전면광고로 나가는 휴머니스트 북리뷰 3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김용석의 <서사철학>(휴머니스트, 2009)에 대한 소개를 청탁받고 쓴 것이다.  

휴머니스트 북리뷰(09. 11. 02) 스토리텔링, 그 비밀의 문을 열다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아우르면서 유례없는 ‘깊이와 넓이’의 인문학적 사색을 펼쳐온 철학자 김용석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이번엔 아주 묵직하다. 제목부터가 한푼의 에누리도 없다. 서사철학! 일단 육중한 책의 무게가 월척의 손맛을 느끼게 한다. 마치 거대한 향유고래가 수면으로 솟아오르는 걸 보는 기분이랄까. 이건 ‘책’이라기보다는 그냥 ‘강적’이다!   

‘서사’에다 ‘철학’이 붙었다. 무엇을 다루는 것인가? 사실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틈틈이 보아온 것이어서, 제목을 통해 나는 ‘이야기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적 탐구’ 정도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나 노에 게이치의 <이야기의 철학>을 얼핏 상기했다. 하지만, 저자의 스케일은 이 두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가 다루는 일곱 가지 이야기 장르 가운데 ‘만화’와 ‘영화’는 물론 ‘진화’까지 포함된 걸 보고서 나는 저자의 상대가 그 자신밖에 없음을 알아차렸다.  

저자 또한 그런 자부심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철학자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필로소피아’의 정신으로 찾고자 한 세상의 이치가 크게 ‘원리’와 ‘윤리’, ‘진리’라고 말하면서 이제 네 번째 탐구의 대상으로 ‘설리(說理)’를 내세울 때 그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철학의 제4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요컨대 그는 ‘이야기의 철학’을 주창하며, ‘설리의 철학자’를 자처한다.   

물론 계보가 없는 건 아니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이야기 철학’ 또는 ‘서사철학’의 원조로 꼽는다. 하지만 알다시피 <시학>은 ‘비극’이라는 한 가지 장르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것은 서사철학의 가능성이지 그 전모가 아니다. 그 서사철학이 거대한 윤곽을 드러내면서 이름에 걸맞은 규모를 자랑하게 된 것은 전통적인 서사 장르뿐만 아니라 대화와 혼화, 만화까지 포괄하여 서사철학의 집대성을 시도한 <서사철학>에 와서이다. “이야기에 대한 철학적 관심과 연구를 총괄하여 서사철학이라고 부른다”는 정의 그대로다. 과연 저자가 그어놓은 서사철학의 경계 바깥이 가능할지 궁금할 정도로 저자는 다양한 장르와 범위에 걸친 이야기들을 다룬다.  

‘서사’ 또는 ‘이야기’라고 했지만 요즘 뜨는 말로는 ‘스토리텔링’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옛말이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옛말이다. 요즘 이야기는 상종가다. 어디서나 주문하고 이야기를 보챈다. 사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건 이야기를 말하며 이야기와 만난다. 리쾨르의 말을 빌면, 우리의 정체성 자체가 이야기로 구성되는 것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서사 장르에 한정하더라도 우리의 주변은 온갖 신화적 이야기와 중세적 판타지와 마술적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우리의 주인공은 해리 포터이고, 우리의 연대기는 나니아 연대기이며, 우리의 성공담은 언제나 모든 난관들을 극복해 나가는 모험 서사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누군가가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세상 자체가 이야기의 중층 구조다. <서사철학>은 이러한 이야기들의 세계, 이야기들의 우주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고, 무엇을 해석할 수 있는지 시범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비록 아직 불안정하며 불완전한 ‘시론(試論)’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하지만 지나친 겸손이자 과소평가다. 자신의 텍스트 읽기를 여러 스토리텔링이 품고 있는 철학 콘텐츠를 발굴하는 작업 정도로 정의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허구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곧 ‘서사적 인간’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사철학>은 서사철학을 넘어선다. 그것은 ‘서사적 인간학’을 창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 가지 특색을 지닌 장르에 대한 연구로 구성된 <서사철학>이 ‘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가 되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기대는 이미 이루어졌다. 단, 내가 염두에 둔 ‘아이리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무지개의 여신 아이리스가 아니라 요즘 뜨고 있는 블록버스터급 드라마 <아이리스>다. <서사철학>은 오랜만에 등장한 인문서의 블록버스터다.  



09. 11. 02.   

P.S. <서사철학>에서 이채로운 것 중의 하나는 저자가 '서사'를 'tale'의 번역어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사철학'의 영어표현은 'Philosophy of Tale'이다. 나는 '서사'가 서사학의 대상인 '내러티브'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story'도 'narrative'도 아닌 'tale'이었던 것. 이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개인적으로 더 따져보려고 한다. 마침 서사학의 원조라 할 블라디미르 프로프의 <민담의 형태론>(박문사, 2009)이 새로 번역돼 나왔다. 이번이 세번째이지 싶다. 그러고 보니 <서사철학>에서 다루고 있는 아이리스(무지개), 곧 신화, 대화, 진화, 동화, 혼화, 만화, 영화라는 일곱 장르에 하나가 더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신화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인 민담, 곧 민화(民話)가 그것이다. 물론 대개의 민화는 동화적 요소를 갖고 있기에 그렇게 포괄될 수도 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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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krad 2009-11-0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사=내러티브라고 고민없이 생각해왔는데 tale이라니 좀 놀랍네요.
tale이라는 말에서는 이야기의 창조성이랄까 왠지 원초적인 느낌이 듭니다.^^

로쟈 2009-11-03 00:31   좋아요 0 | URL
제 느낌에는 narrative가 tale보다 더 포괄적인 듯싶어요...

놀이네트 2009-11-03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문사의 새 번역본은 두께가 두 배 값은 세 배가 되었네요. 다른 논문들을 좀 넣었을까요?
쁘로쁘 광팬이라...

로쟈 2009-11-03 20:26   좋아요 0 | URL
그런신가요? 먼저 보시고 제게도 알려주시길.^^

펠릭스 2009-11-03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차안에서 '서사철학' 서평을 읽으며 생각했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시민에게서 이성주의(계몽)
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한게 아닌가 싶어요.

로쟈 2009-11-03 20:27   좋아요 0 | URL
한겨레의 서평을 읽으셨나 보네요.^^

당근주스 2009-12-21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례사 서평처럼 보입니다. 웬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청탁받고 쓰신 서평이라서 그런지 광고하시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9-12-22 00:10   좋아요 0 | URL
전면광고로 나가는 서평이라고 미리 적었습니다. 그래도 KBS의 책읽는밤에서 '올해의 책'의 하나로 선정했구요, 책은 드물게 볼 수 있는 노작입니다.

당근주스 2009-12-22 12:53   좋아요 0 | URL
광고로 나가는 서평이니 주례사 서평일 가능성이 많아 보였습니다.또
'올해의 책' 선정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정한 사람도 신뢰가
가지 않고요. 제 생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독서대학 르네21의 이번달 금요대중강좌는 '책을 말하는 책'을 주제로 다룬다. 네 차례 강좌 중 한 꼭지를 나도 맡게 되었는데(http://www.renai21.net/bbs/settlement_view.php?s_id=61&schedule_type=4)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금요일 저녁(19시 00분 ~ 21시 30분) 광화문 대한성공회 대강당을 찾으시면 된다. 유료강좌이며 선착순 마감이다. 강좌 소개와 함께 일정을 안내한다.  


  

1. 11월 6일: 김이정, <순례자의 책> 

 

2. 11월 13일: 이현우, <로쟈의 인문학 서재> 

 

3. 11월 20일: 정혜윤, <그들은 한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4. 11월 27일: 조병철,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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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2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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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2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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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1-03 10:29   좋아요 0 | URL
듣고 싶군요

로쟈 2009-11-03 20:28   좋아요 0 | URL
저녁시간인데, 강좌가 운영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