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책방의 금요강독(http://blog.aladin.co.kr/mramor/3166496)에 들렀다 귀가하느라 매주 거르지 않던 서점순례를 생략했다(대신에 이음책방에선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을 구입했다. 듣자하니 서점 운영이 상당히 어렵다고 한다). 이번주 신간에 대해서 알라딘의 '새로나온 책'과 언론리뷰를 참조할 수밖에 없는데, '이거다!' 싶은 뜻밖의 책은 눈에 띄지 않지만 몇 권의 책은 관심도서로 눈도장을 찍어둘 만하다.  

내 경우엔 지리학자 하름 데 블레이의 <공간의 힘>(천지인, 2009)와 빈스 에버르트의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이순, 2009)가 그런 책이다. 사실 둘다 제목에 끌린 셈인데, <공간의 힘>의 경우엔 부제가 '지리학, 운명, 세계화의 울퉁불퉁한 풍경'이다. 그의 전작인 <분노의 지리학>(천지인, 2007)도 사실 제목에 끌려 구입해놓고 읽진 못했는데, 이번엔 '세계화'를 다루고 있기도 해서 필독해볼 참이다. 게다가 "우주론에 있어 칼 세이건이 남긴 업적을, 하름 데 블레이는 지리학에서 이루고 있다"(빌 모이어스) 같은 추천사는 아주 '쥐약'이다.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의 광고 문구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아내도 아니고 지식쯤이야!). '빌 브라이슨을 능가하는 지식예능인의 출현!' 저자가 물리학 전공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고 하니까 '지식예능인'이 구라는 아니다. 최근엔 '강연콘서트'도 새로 등장했다고 하니 우리라고 '지식예능인'이 출현하지 말라는 법은 없겠다. '개그정치인'이나 '만담재판관'들보다야 우리의 정신 건강에 유익할 듯싶다. 관심도서 두 권의 리뷰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9. 11. 07) 세계는 두 부류다… 평평하거나 주름지거나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화로 인해 세계가 평평해졌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유럽, 북미, 동아시아, 호주 등 ‘중심부’에만 적용되는 얘기다. 하름 데 블레이는 “지구는 문화적으로는 물론이고 물리적으로도 아직 울퉁불퉁한 땅”이라면서 “주변부에는 세계인구의 85%가 살지만 세계 총소득의 25%만 돌아간다”고 말한다. 지도상의 검은 점은 미국·멕시코의 국경, 중국과 대만 사이의 해협, 이스라엘의 분리장벽 등 중심부와 주변부를 가르는 주요 경계지점들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화에 의해 수십억 인구와 기업들이 장소와 언어·문화에 상관없이 동시에 경쟁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내용의 <세계는 평평하다>를 쓰면서 자신의 ‘발견’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 대비시키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는 미국 정보통신 산업의 중요한 아웃소싱 대상으로 떠오른 인도를 다녀온 뒤 아내에게 “여보, 내 생각에는 말이야. 지구는 평평해”라고 속삭이면서 마음 속으로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경향’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수식어를 생각해 내고 있었다.

중동문제 전문가이기도 한 칼럼니스트 프리드먼은 자신이 평평하다고 명명한 세계가 결코 평평하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될 것을 예상했다. 그는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나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관심을 높이기 위해 저자의 권한으로 그런 제목을 만들어본 것뿐이다”라며 도망갈 구멍을 남기는 영악함을 보였다. 물컵을 보면서 ‘물이 반밖에 차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계적인 칼럼니스트가 뽐내면서 내놓은 ‘평평한 세계’라는 키워드는 울퉁불퉁한 현실의 세계를 가려버림으로써 세계인의 인식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갈 위험성을 안고 있다.

미시간 주립대 지리학과 교수인 하름 데 블레이가 <공간의 힘>(원제 The POWER of Place)의 서문을 “두바이 힐튼 호텔의 전망 좋은 방에서, 혹은 싱가포르 항공의 비즈니스 클래스 창가 좌석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실제로 평평해 보인다”는 말로 장식한 것은 일부 사람들에게 세계는 실제로 평평해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동시에 프리드먼의 외눈박이 시각이 내포한 해악을 지적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블레이는 우선 지구에 살고 있는 70억 인구를 세계인·지역인·이동인으로 분류했다. 세계인은 중심부에서도 상위층에 위치한 운 좋은 사람들을, 지역인은 가장 가난하고 이동성이 적으며 울퉁불퉁한 공간의 영향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동인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해 하위층에 자리잡는 이주민들이다. 공간적으로는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를 지나 동아시아와 호주에 이르는 세계화가 이뤄진 지역을 평평한 중심부로, 그 밖의 지역을 주변부로 나눴다.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엔 완고한 장벽이 존재한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남아공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저자는 이 장벽을 남아공 백인 정권이 펼친 악명 높은 흑백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비유했다. 이 장벽이 자연적인 경계가 아니라 기득권 세력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란 뉘앙스를 담고 있다. 이런 접근 방식은 세계를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로 나누어 정치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적 방법론을 연상시킨다.

저자는 지리학자답게 각 장마다 언어, 종교, 질병, 재난, 분쟁, 출생률·평균수명, 도시화율, 여성의 정치참여 비율 등을 담은 세계지도들을 동원했다. 이런 시각적 자료들은 지구촌의 현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해준다. 블레이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야 센이 제기한 “아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장소에 따라 커다란 번영의 수단과 기반을 갖게 될 수도 있고, 절망적인 결핍의 삶에 직면할 수 있다”는 명제다.

그렇다고 블레이를 반세계화론자로 단정지을 수는 없어 보인다. 그는 현대로 올수록 절대빈곤은 감소하고 있으며, 다양한 이동수단 및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도입은 문화적 선택권을 넓히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세계화의 중심점과 주변부들은 현대화와 통합의 네트워크를 구축해나가고 있지만, 그에 따라 장벽이 더 높아지고 공간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는 세계화의 모순을 직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저자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은 ‘평평한 중심부’ 내부의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프리드먼의 주문은 평평한 세계의 끝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미국식 세계화에 동참하라는 것이지만, 블레이는 반대로 시각을 평평하지 않은 외부로 돌려 지구를 더 평평한 세계로 만드는 데 동참하라고 주문한다. 그렇다. 문제는 ‘어떤 세계화이냐’인 것이다. (김재중기자)   

서울신문(09. 11. 07) 우리는 정말 스스로 생각하고 사는가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북극 빙하가 녹고,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기후변화의 결정적인 원인을 늘어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탄소 배출을 제한하고 태양열 같은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하는 데 온갖 돈을 쏟아붓는다. 과연 이런 행동은 옳은 방향인가.  

사랑에 빠진 상대가 멍청이인 것을 알지만 헤어나질 못하는 여성이 있다. 이성이 자리한 대뇌피질은 “녀석을 차버려!”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감정 중추인 변연계는 소리친다. “그래도 저이는 진짜 귀엽잖아!” 결국 그냥 사귄다.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면서. 그런데 이게 세계적인 커피 브랜드의 소비를 촉진하는 힘이었다면, 어떤 상관관계로 풀어낼 수 있을까.

●보고 듣는 대로 믿는 현대인 꼬집어
독일에서 ‘가장 재미있는 물리학자’로 불리는 빈스 에버르트는 끊임없이 묻는다. 인간이 지금처럼 생활한다면 수년 뒤 지구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환경론자의 히스테리는 정당한가. 진정 친환경 제품을 이용하면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을까. 휴가철에 여행가방을 들지 않고, 해외로 벗어나지 않는 독일인은 삶의 지평을 넓힐 수 없는 것인가. 유전자 변형 토마토를 생산하는 기업은 인류의 건강에 해악을 저지르고 있는가.

비만이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꼭 벗어나야할 ‘악의 축’으로 규정한다면, 다이어트 팁을 ‘먹는 양을 줄이고 운동해라.’가 아닌 ‘다른 부모를 찾아라.’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에버르트는 이런 질문들은 던지고 다소 황당하면서도 유머스럽고 기발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조경수 옮김, 이순 펴냄)를 완성했다.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합니까.” 책 첫머리부터 저자는 뜬금없이 질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인용하며 그럴싸하게 ‘당연하지. 생각하지 않는 그 순간은 나 자신은 내가 아닌거야.’라는 대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생각하고 있을까.

저자가 말하는 ‘생각’은 ‘언제 천장 페인트칠을 했더라?’거나 ‘괴델의 정리가 뭐였지.’라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판단과 주장을 만들어내는 사고 행위이다. 하지만 정보 홍수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인간은 그 사고를 대체로 ‘아웃소싱’한다. 확인되지 않는 소문과 각종 음모론, 감언이설 등에 접하며 사고의 오염을 겪는다.  

“인간은 특별히 잘 듣지도 못하고, 냄새를 잘 맡지도 못하고 털도 별로 없으며, 날카로운 발톱이나 맹수같은 이빨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토끼만큼 증식했다. 수레바퀴와 천연두 백신을 발명했고 심지어는 전기로 창문을 올리는 장치마저 고안해냈다. 사고는 우리의 진화적 지위이다. 그런고로 생각하는 사람이 그토록 적다는 사실이 나는 매번 놀랍다.” 저자는 책을 통해 안일하게 생각하고, 들은 대로 되풀이하며, 본 대로 믿어버리는 무감각에 강력한 전기 자극을 주어 사고 세포를 되살리고자 한다.

논리적이면서도 유머 가득한 풍자
앞서 말한 질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지구 역사를 보면 인간이 이산화탄소를 방출하지 않았을 때도 이미 엄청난 기온 변화가 있었다. 1만 5000년 전 빙하가 녹은 것은 네안데르탈인들이 고기를 불에 구워먹기 시작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 탓이 아니다. 기후 변화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이산화탄소만 꼽을 수는 없다. 사실 기후 연구도 결코 정확한 과학이라 하기 힘들다. 저자는 세계 기후 보고서 13장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기후 모델은 연계된 비선형적인 카오스적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기후 시스템의 장기적 예측은 불가능하다.” 

지금의 환경 오염이 안전한 수준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보험에 가입할 때든, 세상을 구할 작정이든, 어떤 경우에도 간과하기 쉬운 세목을 꼼꼼히 읽어라.”는 저자의 말은 영향력있는 학자들의 말이라도 비틀어보고 따져보는 과정을 가져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스타벅스’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기, 종류, 추가사항 등을 캐묻는 커피 주문이 귀찮아도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저자는 “평범한 일상에서는 결정권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뭔가 결정한 기회를 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2유로 80센트를 내고 얻는 것은 커피 한 잔이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빈스, 톨, 프라푸치노, 캐러멜, 로우팻, 디카페인’으로 규정되는 자아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책은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 기발한 전략으로 가득하다. 물론 과학자답게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논거로 주장을 뒷받침한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정작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잊어버린 엘 고어 같은 사람들이 짜증난다.”거나 “전 재산을 침대 밑에 보관하고 빨리 돈을 꺼내줬던 할머니가 홈뱅킹의 최초 형태” 등 톡톡 튀는 내용으로 재미를 더한다. 마치 해학 넘치는 시사 스탠딩 쇼를 글로 옮겨놓은 듯.(최여경기자)

09. 11. 06. 

P.S. '빈스 에버르트'를 검색하면 뜨는 책은 <스스로 생각하시오!>이다. 이게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의 원제인가?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 동영상은 http://www.youtube.com/watch?v=n1180FGXW0U 참조. 독어라서 내용은 전혀 모르겠지만, 어떤 분위기인지는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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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2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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