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한국에서 '강북의 고찰'이란 커버스토리 기사를 잠깐 보게 됐다. 그 중 인문학적으로 바라 본 강북지역과 그 문화를 짚어본 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eekly.hankooki.com/lpage/coverstory/201001/wk20100119144259105430.htm). 윤지관 교수의 '강북지역의 상상과 인문학적 실천'이라는 한 심포지엄 발표논문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  

주간한국(10. 01. 22) 강북, 인문학적 사유가 필요해 

한강을 사이로 둔 강남과 강북. 집값만 놓고 봐도 두 지역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부인하기 어려운 건 경제적 격차뿐이 아니다. 한강은 남과 북의 문화적 경계를 점점 뚜렷하게 그려놓고 있다. 강남이 풍요롭고, 세련되고 현대적이라면, 강북은 상대적으로 근대적이며 촌스럽다. 그런 모습들이 강남과 강북의 문화에 어떻게 투영될까. 강북의 문화는 빈약한 것인가? 그건 정답이 아닌 것 같다. 강남이 소비 자본주의 문화라면, 강북에서는 아직도 유구한 역사와 탈근대의 모순에 대한 성찰과 문화적 힘과 상상, 그리고 도시적ㆍ문화적 획일화에 대한 대안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강북이라는 지역, 그리도 강북개발을 인문학적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지난해 말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가 '지역문화와 인문학-강북지역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그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던 강북의 문화. 인문학적으로 바라 본 지역문화의 특성은 어떠한가? 또, 강북이라는 도시문화가 강남지향적으로 획일화되는 것을 막고, 대안적인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까?

경계성, 대도시에 대한 새로운 상상의 가능성

'촌스럽고, 근대적이고, 개발이 덜 돼 살기 불편하다….'

흔히 강북 하면 떠오르는 말들로, 자본논리에 입각해 강남에 대한 대타 개념으로 강북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문학이라는 학문적 고찰을 통해 본 강북의 문화는 어떤 양상일까?

지난해 말, 지역문화 심포지엄에서 '강북지역의 상상과 인문학적 실천'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던 덕성여대 윤지관 영문학과 교수는 우선, 강북이 갖는 '경계지대'로서의 특성에 주목한다. 그는 경계지대로서의 강북은 한강 이북의 서울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강북구와 노원구, 도봉구 등 강북 3구에 한정된다고 봤다. 따지고 보면, 강남에도 중심지역과 주변지역이 있듯이 강북도 중심과 주변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 등 강남의 중심지역인 '강남3구'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강북의 주변지역인 '강북3구'다.

윤 교수가 말하는 '경계지대로서의 강북'은 첫째, 지리적 차원에서의 경계성이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주변지역이면서 의정부 등지의 남한 최북단 지역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분단이라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레드 콤플렉스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현실에서 이러한 지리적 위상이 가지는 의미는 이 지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둘째는 경제적 차원의 경계성이다. 이곳은 대도시 내에서 상대적으로 저개발된 곳으로, 구로나 영등포지역과 같은 공업지대도 아니고, 활발한 소비가 일어나는 소비지대도 아니다. 즉, 대도시의 영역에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농촌적인 혹은 도시주변마을적인 요소들이 혼재하는 접이지대의 특성이 있다. 그러나 상대적인 저개발은 획일화, 개인주의, 소외 등 개발위주가 안고 있는 대도시의 문제들을 상대적으로 덜 야기하고, 농촌의 공동체적인 요소들을 보존할 수 있는 환경을 낳기도 했다.

세 번째로 환경적 경계성을 들었다. 이 지역은 대도시에서는 드물게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 가운데 대부분의 큰 산들이 이 지역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을 특별하게 만드는 특성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서울의 팽창이 본격화된 60년대 초 이전까지 이 지역은 지방 혹은 농촌적 속성을 가지고 있던 지역이었다. 삼각산도당제처럼 이 지역의 전통의례들이나 제식들은 아직까지도 전승돼 오고 있다. 대도시 지역이면서 향토성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며, 특히 도봉서원과 그 주변의 마을처럼 진보적인 성리학의 터전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윤 교수는 "이 지역이 갖는 경계지대로서의 속성은 대도시에 대한 상상을 새롭게 펼쳐낼 토대가 된다"고 주장했다. 가령, 마을과 도시적 요소의 공존은 대도시에서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시험할 수 있는 자원이 된다. 그런가 하면, 자연이 인공적인 것과 조화를 이룬 점은 대도시가 환경친화적인 성격을 간직한 채 발전을 지향하는 데 있어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근대성의 문제

윤 교수는 또한, 강북문화가 가진 근대성에 주목한다. 강남문화가 완전한 현대라면, 강북은 근대성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근대성에 대한 성찰이란 근대와 전통 사이의 갈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근대와 전통의 사이, 그리고 이와 동시에 근대의 성취와 탈근대의 지향 사이의 대립도 이 지대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사건의 일부다. 급격한 근대화에 따른 도시팽창의 과정에서 이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근대형성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존의 역사는 문학작품 속에서도 만날 수 있다. 



윤 교수는 강북지역을 배경으로 한 <녹천에는 똥이 많다>(이창동·1992년)와 <장석조네 사람들>(김소진·1995년)을 예로 든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소설가 이창동에게 한국일보 문학상을 안긴 역작으로, 근대화의 과정에서 한 시민이 겪는 정신적 갈등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주인공은 자수성가해 상계동에 소형 아파트를 마련하고, 행복한 소시민으로 정착해가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기, 대학졸업 후 노동운동으로 쫓기는 이복동생을 숨겨 주었다가 위기를 맞는다. 소설의 배경을 이루는 녹천역 주변은 한편에는 입주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아파트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악취가 풍기고 열악하지만, 한 푼 없이 상경해 직장을 얻고 가정을 꾸리고 사는 주인공에게는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윤 교수는 "그러나 주인공이 천신만고 끝에 이룩한 가정의 행복이 알량한 자기만족과 허위에 지어진 초라한 모조품에 불과한 것으로 깨어지고 있는 것을 작품은 목격한다"고 말했다. 노동운동으로 쫓기는 이복동생을 숨겨줬다가 위기를 맞게 된 주인공은 결국 동생을 고발하고 거대한 오욕의 세상에서 살아남기로 다짐한다. 이 작품이 시대적인 전형성을 가지는 이유는 80년대라는 시대 상황에서 소시민이 되어가던 서민들의 삶의 양상의 외적 조건과 내적인 갈등을 면밀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석조네 사람들>은 70년대에서 8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의 미아리 산동네를 배경으로 기층민중의 삶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김소진이 불러낸 70년대의 미아리는 인구의 도시유입으로 서울이 팽창을 거듭하던 시기다. 이 시기에 각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인간군상이 서로 갈등하고 미워하고, 화해하고 도우면서 삶의 공간을 창출해가던 도시변두리의 모습이 작품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산동네라고 불리는 지역 민중의 삶이 산업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과 비극에 활력과 인간적인 훈기를 불어넣었다.

윤 교수는 이 같은 근대성의 모순들에 대한 성찰을 예술의 원동력으로 보았다. "강북문화에 내장된 성찰이야말로 이 지역이 가진 문화적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강남의 문화를 부러워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소비문화일 뿐입니다. 유행의 첨단이며, 자본의 논리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지요. 강북의 문화가 빈부격차와 도시문제 등 근대성의 모순들에 성찰을 담고 있는 반면, 강남은 성찰이 없어요. 자본화, 세계화, 현대화에 전적으로 승복하는 게 강남인데, 그것은 문학 등 창조적인 예술의 원천이 될 수 없겠지요."

그는 강북의 문화는 전통이 있고, 질적인 면에서의 깊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인문학의 관점에서 바라 보면, 꼬불꼬불하고 좁은 골목길이나 현대화 되지 않은 가옥, 빈약한 학원시설, 촌스러운 스타일 등 강북적인 삶의 양식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전세화 기자) 

10. 01. 25. 

 

P.S. 도시인문학에 대해선 작년에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에서 펴낸 책들이 있다. 짐작엔 시리즈로 계속 출간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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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 2010-01-25 15:45   좋아요 0 | URL
마포에서 얼마간 일을 할 때..광흥창역 근방..
같이 전철을 타고 다녔던 한 사람(강남에서만 살았다고 했던)이 그러더군요.
처음 출근하면서 서울에 이런 동네가 있는가 싶어 깜짝 놀랐다고...
저는 그 사람 말에 깜짝 놀랐었죠.
그냥 학교에 일반주택에 아파트에 시장에 다 섞여있는 평범한 동네인데(살만한 동네같던데)
달동네 처음 보는 부잣집 공주 같은 시선이라서요.

로쟈 2010-01-26 08:58   좋아요 0 | URL
네, 변두리엔 아직 70년대 풍경도 남아 있더군요. 나머진 아파트가 다 집어삼키고...

펠릭스 2010-01-25 19:09   좋아요 0 | URL
인류의 최초의 공간은 동굴같습니다. 동굴밖으로 여행은 계속되고, 결국 문명의 도시를 만들었죠. '도시 공간에 대한 사유'는 곧 도시속 사물간의 연계(역사)성을 이해하고 상상하기에 좋습니다. 도시 공간의 분할과 결합 그리고 확장속에 인간의 서사가 있죠. 대도시 사람들은 도시의 공간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도시 공간에서의 추억(조용필, 서울 서울 서울)을 잊지 못합니다. 도시속에는 강남/강북, 진보/보수, 우성/열성/, 승자/패자, 파괴/건설이 혼재합니다. <사라진 서울/강명관/푸른역사>과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황두진/해냄>처럼 어둔한 역사 흔적과 개인의 소박한 삶을 품고 있으며, <말테의 수기/라이너 마리아 릴케/민음사>처럼 도시의 빈곤과 타락과 절망적인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숨기고 있습니다.

로쟈 2010-01-26 08:56   좋아요 0 | URL
네, 서울에 대한 책이 최근에도 나왔죠...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최근에 나온 <뉴레프트리뷰>(길) 제2권을 대상으로 했으며 주로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관한 <뉴레프트리뷰>의 시각을 정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여러 사정 때문에 급하게 읽고 써 보낸 탓에 편집자가 애를 먹었을 듯하다).   

한겨레21(10. 02. 01) 핵확산 금지조약은 핵항의금지조약

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길 펴냄) 제2권이 출간됐다. 1960년에 창간돼 올해로 50년의 전통을 자랑하게 된 이 저명한 월간지의 한국어판이 지난해 초에 처음 소개됐고, 딱 1년만에 제2권이 나왔다. 제1권이 200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뉴레프트리뷰>의 입장과 색깔을 보여주는 다양한 주제와 저자들을 묶었다면, 제2권은 ‘인권과 문화이론’을 주제로 한 3부를 제외하면 모두 2008년과 2009년에 발표된 글들을 선별해 실었다. 그만큼 시의성이 강화됐고 ‘뜨끈한’ 이슈가 많아졌다.     

‘세계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를 주제로 한 1부에 이어서, 2부는 ‘세계의 민주주의 현실’을 라틴아메리카와 미국, 그리고 러시아의 현 상황을 사례로 짚어주고 있고, 데이비드 하비와 프레드릭 제임슨 등의 글이 3부, <장기 20세기>와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의 저자로 지난해 세상을 떠난 경제학자 조반니 아리기와의 대담이 4부에 배치됐다. 특집이라 할 만한 것은 1부에서 다루는 로버트 브레너의 <지구적 혼돈의 경제학> 심포지엄과 2부에 들어 있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관한 세 편의 글이다. 특히 NPT 문제를 다룬 글들을 북핵 문제와도 연계된 사안인지라 눈길을 끈다. <뉴레프트리뷰>는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노먼 돔비, 피터 고언, 수전 왓킨스 등 세 필자의 주장을 정리해서 재구성하자면, 일단 1960년대에 미국과 소련이 타협한 결과물로서 1970년에 발효된 NPT는 애초에 핵보유국과 비핵국가들이 맺은 불평등한 ‘거래’였다. 비핵국가들이 핵무기 개발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국제사찰 아래 원자력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였으니, 핵보유국인 프랑스조차 NPT가 열강들의 독점적 지위를 강화할 뿐이라면 ‘도의적 차원’에서 협상을 거부했을 정도다.   

실제로 NPT는 핵보유국이 져야 할 의무사항은 거의 전무한 반면에 비핵국가들은 갖가지 제약조건을 수용해야 하는 일방적인 조약이었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핵확산이 억지돼야 한다는 ‘억지 이데올로기’의 힘을 빌려 이 조약이 큰 성과를 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유엔안보리의 5개 상임이사국 외에는 이스라엘과 인도, 파키스탄만이 현재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원자력 프로그램 보유국 수에 비하면 놀랍도록 적은 수다. 이스라엘과 인도, 파키스탄은 모두 안보상의 위협에 직면했던 상황에서 초강대국의 안전보장을 기대할 수 없었던 나라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는 북한과 이란, 이라크도 비슷한 경우다. 하지만, 핵무기를 보유하고도 노골적으로 NPT를 거부해온 세 나라와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았다.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악의 축’이라 지목됐다.  

이란이 무기급 우라늄을 생산했다는 의혹이 있음에도 사찰을 거부한다고 서방으로부터 비난받았지만, 한국 또한 2002년과 2003년에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방문을 허용하지 않았고 나중에야 비밀리에 우라늄을 농축했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연합은 이 문제를 안보리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반면에 북한은 하찮은 핵개발 프로그램으로 원조를 얻어내려고 여러 차례 교섭을 시도했으나 강대국의 속임수에 당한 전형적인 사례로 꼽힌다. NPT 가입을 대가로 약속받았던 소련제 원자로도 미국제 경수로도 결국엔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NPT는 세계평화를 지키는 수단이 아니라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미국 군사력의 세계적 팽창이 억지력 확대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실상 이란이나 북한이 핵 억지력을 갖춘다고 해도 미국이 동원할 수 있는 파괴력의 2백만분의 1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NPT가 출현하면서 핵무장 해제 운동은 잦아들었고, 부유한 국가들이 엄청난 양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혀졌다. 이 때문에 ‘핵확산금지조약’은 오히려 ‘핵항의금지조약’으로 불려야 마땅하다. “진정한 핵무장 해제로 나아가라면 NPT를 폐기해야만 한다.”는 것이 <뉴레프트리뷰>의 결론이다.  

10. 01. 24. 

P.S. 지면에는 네번 째 문단에서 "그런 점에서는 북한과 이란, 이라크도 비슷한 경우다. 하지만, 핵무기를 보유하고도 노골적으로 NPT를 거부해온 세 나라와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았다."란 대목이 "그런 점에서는 북한과 이란, 이라크도 비슷한 경우다. 하지만, 핵무기를 보유하고도 노골적으로 NPT를 거부해온 이들 세 나라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았다."라고 수정됐다. 모호하게 쓴 탓이긴 한데, 내가 쓴 문장에서 "핵무기를 보유하고도 노골적으로 NPT를 거부해온 세 나라"는 '이스라엘과 인도, 파키스탄'을 가리켰지만, 수정되면서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뜻하는 게 됐다. '북한과 이란, 이라크'는 아직 핵보유국이라고 하기 어렵다(북한은 핵보유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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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25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은 비핵보유국일까요, 보유라는 의미를 생각합니다. 자기명의 통장, 본인도 모르는(발뺌) 비자금, 우리는 인근 보유국의 지정학적인 개연성에 포함되는 것은 아닌지,,,힘의 사용자는 우군과 적군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만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로쟈 2010-01-25 09:26   좋아요 0 | URL
핵보유국은 아니고, 핵우산 속에 들어가 있는 걸로 봐야겠죠...
 

아마도 내주에나 리뷰가 올라올 거 같은데, 이번주 철학분야의 관심도서는 김진석 교수의 <더러운 철학>(개마고원, 2010)과 여덞 명의 사상가의 정치철학을 다룬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난장, 2010)이다. 이 중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의 목차와 함께 '기획의 말'을 도서출판 난장의 블로그에서 발췌해 옮겨놓는다.  

   

1. 클로드 르포르: 정치적인 것의 발견과 현대 민주주의의 모색(홍태영)
2. 알랭 바디우: 진리와 평등으로서의 정의(장태순)
3. 자크 랑시에르: 감성적/미학적 전복으로서의 정치와 해방(최정우)
4. 가라타니 고진: 교환 X로서의 세계공화국(조영일)
5. 에티엔 발리바르: 도래할 시민(권)을 위한 철학적 투쟁(장진범)
6. 조르조 아감벤: K(양창렬)
7. 샹탈 무페: 경합적 다원주의로서의 급진민주주의(홍철기)
8.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구조와 논리(강병호)
  



기획의 말 
현대, 정치철학, 모험

2008년 봄과 여름의 길거리를 수놓았던 촛불은 사그라졌다. 그러나 그 촛불은 현재 ‘공화국’에 대한 논의, 87년-97년-08년 ‘체제논쟁,’ 그리고 ‘급진민주주의’에 대한 토론을 낳았다. 이런 촛불의 흔적 또는 촛불효과는 신자유주의라는 반(反)정치를 넘어서는 ‘정치(철학)의 귀환’으로 규정할 수 있을 듯하다.  

서구 유럽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 나아가 맑스주의의 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귀환은 맑스주의의 경제주의적 경향을 레오 스트라우스나 한나 아렌트 식의 ‘정치’의 자율성론으로 비판하고 존 롤즈, 마이클 샌들, 찰스 테일러, 로버트 노직,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같은 영미 정치철학자들의 이론을 수용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처럼 서구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결국 철학이 곧 정치라고 봤던 루이 알튀세르,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 ‘68사상가들’을 결산하며 정치철학의 고유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와 달리 지금 이 땅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대중운동이 지성계에게 사유할 것을 요청, 심지어 명령하는 상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보다 건설적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귀환은 하나의 철학적 조류에 또 다른 조류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컨)텍스트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건강하다. 하지만 반신자유주의 연합이든, 반MB 연합이든, 또 그밖에 어떤 구체적인 전략을 사유하든 간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촛불의 교훈은 이것이다. 즉, 정치란 (국가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인 동시에, 제대로 된 ‘국가’ 자체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이중의 의미에서) 국가에 대한 요구를 초과한다는 것, 민주주의는 일종의 합의나 체제가 아니라 갈등·경합·투쟁·계쟁·봉기의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것. 우리가 지금 소개하는 철학자들은 바로 이런 공통의 지평 위에 서 있다. 

정치철학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람직한 국가형태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떤 권력이 정당하며, 누구에게 권력이 돌아가야 하는가 등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질문은 지금까지도 정치철학의 주된 물음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정치학』에서 평등/불평등의 문제가 정치철학의 난제라고 밝히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는 체제에 대한 고민의 가장자리야말로 정치철학의 아포리아가 자리하는 곳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권력의 정당성과 배분이라는 문제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정치 또는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지를 묻기. 기존의 정치 개념(권리, 정의, 자유, 평등, 인민주권 등)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 바로 이것이 여덟 명의 철학자를 통해 우리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따라서 이 모음집은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하나의 전략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주)텍스트를 읽기 위한 (곁)텍스트, 그러나 늘 곁에 두고 사유하며 곱씹을 것을 요구하는 (곁)텍스트이다. 

지금 선보이는 여덟 명의 철학자는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핵심 주장은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수십 년 지난 게 대부분이다. 이제와 이들의 사유를 소개한다는 것은, 그것도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니라 입문서의 형태로 소개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성사적으로 늘 뒤쳐져서 남들 뒤꽁무니 따르기에 바쁜 우리 모습에 대한 자조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아니면 유행하고 있거나 유행할, 하지만 결국 사라질 운명에 처한 일군의 신상품을 풀어놓는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허나 무엇보다도 푸코가「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근대’를 하나의 태도, 그것도 ‘비판적 태도’로 규정했듯이 우리 역시 ‘현대’ 또는 ‘동시대’를 하나의 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거의 모든 철학자는 오늘을 사유하기 위해 과거의 텍스트를 읽었다. 이것은 오늘과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시차적(時差的)이며, 과거의 텍스트를 다른 시각으로 읽는다는 점에서 시차적(視差的)이다. 요컨대 현대/동시대는 이 이중의 시차를 경유함으로써만 우리에게 온전히 주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독자들이 이 모음집의 텍스트를 그 맥락에서 떼어내 자유롭게 인용할 때, 다시 말해서 이 텍스트들이 경전들에 대한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이해하기 위한 (곁)텍스트가 될 때 이 모음집에 수록된 정치철학은 비로소 현대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음집에 참여해주신 글쓴이들의 약력에는 대부분 ‘과정’이라는 꼬리말이 붙어 있다. 그러나 학계와 사회의 끝자락 또는 가장자리에 있는, 이 ‘과정 중의’ 사람들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들이 아닌가. 이제는 당신의 차례이다. 

10. 01. 24.  

P.S. 개인적으론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의 '슬라보예 지젝' 편 집필을 제안받았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많아서 사양했었다. 가령 <지젝의 정치학>(2006)을 아직 읽지 않았고, <바디우, 지젝, 그리고 정치의 변형>(2009)이란 책은 배송되는 대로 읽어봐야 한다. 예정대로라면 하반기에는 지젝의 정치철학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혹은 그럴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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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25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속에도 철학적인 사유가 존재합니다. 우연과 필연에 대한 계속되는 선택의 문제는 정치에서도 다를게 없습니다. 세계속에 한국의 정치는 어디로들 향하는지, 뱀의 머리가 되어 봄처녀를 따라 오겠지만요.

로쟈 2010-01-25 13:16   좋아요 0 | URL
정치가 인간의 본질적인 차원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해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대중적 자각 같은 게 필요해보입니다. 신간도 그런 맥락에서 의의가 있을 듯싶고요...
 
'레닌 재장전' 예고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이 드디어 출간됐다(아직 이미지는 뜨지 않지만 알라딘에도 입고돼 있다). 책은 어제 배송받았는데, 표지가 깔끔하고 책도 분량에 비해 가벼운 것이 마음에 든다. 속표지(표2)에는 특이하게도 지난 11월 '번역자 간담회' 자리에서 나온 얘기가 발췌돼 있다(7명의 역자 중 5명이 참석했었다). 사진은 마티출판사의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마르크스와 달리, 여전히 언급하길 꺼리던 레닌이 이렇게 세상에 다시 등장한 것! 이것 자체가 의미가 크다. 레닌이 귀환했다. 게다가 세계의 담론을 이끌어가는 살아 있는 최고의 석학들이 레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레닌을 읽을 것인가? 그의 책 제목처럼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이현우(알라딘 블로거 '로쟈')  

“80년대 끝무렵부터 90년대 초반을 고비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진보 운동이 사그라들었다. 정의, 저항, 혁명 등의 단어가 증발한 것 같았다. 철저하게 자본주의를 향해 걸어와 노동자들의 연대와 희망이 사라진 지금 우리 앞에 ‘레닌’이 부활하고 있다.” - 이재원   

“이 책을 옮기며 알게 되었다. 나에게 레닌은 ‘질문’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구하도록 나를 이끌었다. 그는 자신의 몸 전체를 던져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 자체가 질문이었고 고민이었으며 민주주의였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우리에게 절실한 책이다.” - 한보희  

“왜 레닌을 읽을 필요가 생겼을까? 이 점이 중요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오랫동안 잊혀졌던 단어들을 되새기게 되었다. 정의, 정당, 조직…. 오히려 마르크스는 지식인의 세계에 속한 사람(사상), 고전이 되었다. 하지만 레닌은 지식인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은 사상가다. 그런 점에서 새로웠고 자극적이다. 왜 레닌을 읽을 필요가 생겼을까? 다시 한번 자문하게 된다.” - 최정우(알라딘 블로거 '람혼') 

“바디우의 레닌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냉혹한 현실 정치인이란 통념과는 완전히 반대로, 레닌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기로에 섰을 때 언제나 ‘정의와 이념, 그리고 진리를 선택했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레닌은 말랑한 타협의 정치가 아니라 ‘진리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 이은정 

   

레닌의 철학과 정치적 실천에 대한 재해석/재평가를 담은 17편의 글 가운데 내가 맡은 건 지젝이 쓴 '오늘날 레닌주의적 제스처란 무엇인가; 포퓰리즘적 이성에 맞서' 하나이다. 다른 역자들, 특히 역자들을 대표해 '옮긴이의 글'을 쓴 이재원씨나 가장 어렵고 많은 분량의 텍스트들을 옮긴 한보희씨에 비하면 대수로운 수고는 아니었다(그럼에도 편집부를 애먹게 했지만). 지젝의 텍스트는 이렇게 시작한다(이 서두는 <시차적 관점>의 내용과 일부 중첩된다). 이후 포퓰리즘에 대한 논의에서 지젝은 주로 라클라우의 포퓰리즘론(<포퓰리즘적 이성에 대하여>)과 대결한다.     

슬로베니아의 늙은 공산주의 혁명가 요제 유란치치의 운명은 스탈린주의적 왜곡의 가장 완벽한 은유로 꼽을 만하다.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했을 때 유란치치는 아드리아해 라브 섬의 한 강제수용소에서 유고슬라비아 포로들이 일으킨 반란을 지휘했다. 그의 지휘하에 2,000명의 굶주린 포로들은 단독으로 2천 200명의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체포되어 인근의 작은 골리 오톡(‘벌거벗은 섬’)의 악명 높은 공산주의자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1953년 다른 죄수들과 함께 1943년 라브섬에서의 반란 10주년 기념비를 세우는 데 동원되었다. 요컨대, 공산주의자 죄수로서 유란치치는 그 자신이 지휘한 반란을 위한, 곧 그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운 셈이다. 만약 ‘시적 불의’(이 경우엔 ‘시적 정의’가 아니다)라는 게 있다면, 유란치치의 경우가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사실 이 혁명가의 운명이야말로 스탈린 독재시절 전체 인민의 운명, 처음엔 혁명을 통해서 구체제를 영웅적으로 전복시키고, 그 다음엔 새로운 규정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혁명적 과거에 대한 기념비를 강제로 세워야 했던 수백만 인민의 운명이 아니던가? 따라서 이 혁명가는 그 자신의 운명이 전체의 운명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아주 탁월한 ‘보편적 단독자’이다.   
여기서 진정한 과제는 10월 혁명의 비극을 사유하는 것이다. 곧 그 위대성, 유례없는 해방적 힘과 함께 그것이 스탈린주의로 귀결된 역사적 필연성을 동시에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두 가지 유혹에 맞서야 한다. 하나는 스탈린주의가 궁극적으로는 우발적인 일탈에 불과하다고 보는 트로츠키식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기획은 본질적인 차원에서 전체주의적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트로츠키에 대한 최고의 전기를 펴낸 아이작 도이처는 그 셋째 권에서 1920년대 말 강제 집산화와 관련하여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외부를 향하여 확장하는 데 실패하고 소련 안으로만 한정되자 혁명의 역동적 힘은 내부로 향하게 되고 소비에트 사회의 구조를 한 번 더 폭력적으로 재구축하기 시작했다. 강제적인 산업화와 집산화는 혁명 확산의 대체물이 되었고 러시아 부농계급(kulak)의 일소는 국외 부르주아계급 타도의 대용품이 되었다."(127-8쪽)

 

마지막에 인용된 아이작 도이처의 책은 '트로츠키 3부작'을 가리키는 것으로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필맥, 2005), <비무장의 예언자 트로츠키>(필맥, 2006),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필맥, 2007)로 번역돼 있다. 그 셋째 권은 물론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를 가리키는데, 책을 갖고는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대조해보진 않았었다. 미주를 보니 편집부에서 해당 쪽수를 찾아놓았다. 이렇게 번역됐다.  

"러시아혁명의 충격이 유럽에서 혁명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그 추동력은 아직 소진되지 않았음이 판명됐다. 그러나 그 추동력이 밖으로 작용하거나 확장되지 못하고 소련 안으로 응축되면서 내부지향적인 것이 되고 다시 한 번 격렬하게 소련사회의 구조를 재편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강제적인 공업화와 집단화가 혁명의 전파를 대체하게 됐고, 러시아 쿨라크의 해체가 해외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전복을 대신하는 대용품이 됐다."(166-7쪽) 

이하 '오늘날의 레닌주의적 제스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10. 01. 24. 

P.S. 교정을 한 차례 보긴 했으나 잘못 옮기거나 이해한 부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인용한 대목에서도 "새로운 규정의 노예가 되어"란 말은 "새로운 지배의 노예가 되어"라고 옮기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든다(옮길 때는 'rules'라고 복수형으로 돼 있어서 '지배'란 단어를 피했었다). 그리고 134쪽에서 "야만적인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조차도, 포퓰리즘 등가적 요구의 사슬에 엮어 들어갈 수 있다."는 "야만적인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조차도, 포퓰리즘 등가적 요구 사슬에 엮여 들어갈 수 있다."로 수정돼야 한다. 교정시에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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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25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단과 개인의 기억은 여진처럼 사라지지 않군요. 개인의 마음속에서 의심을 품었던 그 힘들이 물방울처럼 모여 새로운 변혁의 힘으로 작용하군요.

로쟈 2010-01-25 09:25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론 기표의 문제입니다. '레닌'이란 이름을 호명하고 소환하는 문제...

2010-01-25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5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화심리학과 절망의 진화
다윈의 렌즈와 인간 본성

지난 목요일 저녁에 <오래된 연장통>(사이언스북스, 2010) 출간기념 행사에 참석한 바 있는데, 프레시안에 취재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122190055&Section=04). 내 역할은 저자의 전중환 교수에게 저서와 진화심리학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주최측에선 처음에 '인문학자'의 반론을 기대했지만, 나는 시종 우호적인 입장에서 질문을 했고 몇가지 사안에 대해서만 아직 진화심리학의 성과가 미흡한 듯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진화심리학과의 개인적인 인연은 '진화심리학과 절망의 진화'란 페이퍼에 적어놓은 적이 있다). 소위 '다윈주의 좌파'의 가능성에 대한 의견도 문의했지만 저자는 진화심리학자는 현상을 설명할 뿐이라는 '과학자'의 입장을 견지했다.     

프레시안(10. 01. 23) "내 안에 석기 시대의 마음이 들어 있다" 

"먼 훗날 나는 훨씬 더 중요한 연구 분야가 열리리라 본다. 심리학은 새로운 토대 위에 서게 될 것이다."

150년 전 다윈이 <종의 기원>의 말미에서 이렇게 예언했을 때, 그 얘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일군의 학자는 이런 다윈의 전망을 현실로 만들었다. 1980년대 중반 이들은 진화의 산물인 '인간 본성'을 규명하려는 자신의 연구에 이름을 붙였다. 바로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가지고 있을 마음의 틀에 관심을 갖는다. 그 마음의 틀은 수백만 년 동안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 초원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하면서 맞닥뜨린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전중환 경희대 교수는 최근 펴낸 <오래된 연장통>(사이언스북스 펴냄)에서 이 마음의 틀을 '오래된 연장통'에 비유한다.

"인간의 마음은 톱이나 드릴, 망치, 니퍼 같은 공구들이 담긴 오래된 연장통이다. (…) 우리의 마음은 어떤 배우자를 고를 것인가, 비바람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포식동물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등 수백만 년 전 인류의 진화적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다수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설계되었다."

진화심리학은 이 오래된 연장통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한국에서 맨 처음 진화심리학 박사 학위('가족 내의 갈등과 협동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연구')를 받은 전중환 교수는 <오래된 연장통>에서 그것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진화심리학의 유혹에 빠지다
지난 21일 마련된 전중환 교수와 책벌레들이 만난 자리('과학, 블로거를 만나다')에서도 진화심리학은 빛났다. 책벌레들을 대표해서 전 교수와 대담에 나선 이현우 박사도 진화심리학에 끌리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는 이 박사는 '로쟈'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서평가이다. 그의 얘기부터 들어보자.  

"(진화심리학에 대한 인문학자의 딴죽 걸기를 기대했을) 주최 측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진화심리학에 대단히 우호적이다. 국내에 이미 소개된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Moral Animal)>,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The evolution of Desire)>와 같은 책도 흥미롭게 읽었다. 진화심리학의 최신 연구 성과가 담긴 <오래된 연장통>도 열심히 읽었다.

이런 진화심리학의 연구 성과가 더 많이 소개되고, 여러 사람이 이것을 공유해야 한다. 인문학자들은 흔히 인간에게 기대를 갖고 있기가 쉬운데, 진화심리학은 이런 거품을 빼는데 기여해 결과적으로 인문학의 진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진화심리학을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 집어넣어야 한다."

이현우 박사의 이런 솔직한 고백은 진화심리학의 위상 변화를 잘 보여준다. 1970년대 그 전신인 사회생물학은 인문과학, 자연과학을 막론하고 대다수 지식인에게 극우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사이비 과학으로 받아들여졌었다. 여전히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상당수가 있지만, 이 박사의 얘기에서 엿볼 수 있듯이 분위기가 바뀌었다. 



인간의 발정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진화심리학을 둘러싼 환경이 변한 데는 그것이 지난 30년간 쌓은 놀라운 연구 성과 덕분이다. 전중환 교수는 <오래된 연장통>에서 이런 연구 성과를 가장 최신의 것까지 요령 있게 소개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믿음직한 진화심리학 길잡이의 출현이 반가울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대다수 포유류 암컷은 배란 직전에 발정기에 도입하며, 이 기간 동안 여러 수컷과 성관계를 맺는다. 인간은 이런 발정기가 없다.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도 (신경을 쓰지 않는 한) 배란 여부를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의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인간의 발정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전중환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 조상들이 진화한 원시 환경에서 모든 여성이 자식에게 우수한 유전적 형질을 전달해 주는 섹시한 남편들을 얻은 건 아니다. 이런 여성은 가임기에 섹시한 외간 남자와의 혼외정사를 추구하게끔 진화했을 것이다. 이 이론은 다음과 같은 예측을 한다. 가임기의 여성은 좋은 유전자를 지닌 남성을 남편감이 아닌 성관계 상대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예측은 사실로 확인이 되었다. 코와 턱이 발달한 남성적인 얼굴, 어깨가 넓고 근육이 탄탄한 남성적인 신체, 분위기 있는 저음의 남성적인 목소리, 남자답게 크고 훤칠한 키에 대한 여성들의 선호는 가임기가 되면서 뚜렷한 상승 곡선을 그렸다. (…) 가임기 여성은 비가임기 여성보다 거칠고 남성적인 사내의 체취를 보통 사내의 체취보다 더 선호했다."

이처럼 진화심리학은 마음의 틀이 어떻게 빚어졌는지 설명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인간의 비밀을 발견하면서 영향을 확대해 왔다. 전중환 교수는 <오래된 연장통>에서 진화심리학이 철학, 예술, 종교, 미학, 경제 등을 바라보는 시각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알려준다. 



마음의 '오작동'에 주목하라!
전중환 교수가 <오래된 연장통>에서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의 마음은 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 초원의 수렵·채집 생활에서 겪어야 했던 문제를 잘 풀게끔 진화했다. 불과 1만 년 정도밖에 안 되는 농경 생활이나, 길어야 200년 짧으면 수십 년에 불과한 도시 생활이 마음의 진화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적다.

"우리 안에는 석기 시대의 마음이 들어 있다."

이러다 보니, 인간의 마음은 현대의 일상생활 속에서 갖가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예를 들어 보자. 먹을거리가 부족한 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 초원에서 인류의 조상은 열량이 높은 음식을 달게 느끼게끔 마음이 진화해 더 많은 에너지원을 섭취했다. 그러나 이런 본성은 단 것이 지천에 있는 현대에서 각종 성인병을 일으키는 원흉으로 작용한다.

포르노에 흥분하는 남성도 마찬가지 예다. 전중환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인류가 진화한 환경에서 포르노는 없었다. 남성이 포르노에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을 감상할 때, 남성의 두뇌는 그 모습이 실제 여성이 아니라 점과 선이 조합된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포르노 속 여성과 성관계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남성의 두뇌는 포르노를 보면서 아무런 실익도 없이 심장 박동 수를 높이며 발기를 시킨다."

이현우 박사는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대중문화도 이런 진화심리학의 시각으로 볼 수 있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TV 속의 선남선녀 연예인에게 열광을 한다 한들, 실제 현실에서 얻는 이익은 없다. 우리의 마음이 수백 만 년 전 아프리카 사바나에서는 그런 선남선녀를 배우자로 선호하도록 빚어진 데서 비롯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좌파든 우파든 진화심리학을 접수하라!
전중환 교수의 주장대로, 진화심리학이 오래된 연장통의 비밀을 하나씩 해명해 인간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인정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의 미래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이현우 박사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물었다. "진화심리학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전 교수의 답을 들어보자.

"많은 진화심리학자는 오래된 연장통의 비밀을 해명하는 데서 멈춘다. 그렇게 발견된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해석해 처방할지를 놓고는 대부분의 진화심리학자가 침묵한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이, 진화심리학자의 주장은 인류가 진화한 환경에서 빚어진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따르자,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자연주의 오류).

그러나 인간의 마음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면 온갖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참고 사항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정치적으로 우파든 좌파든 진화심리학을 통해서 얻은 인간에 대한 통찰은 세상을 이해하는 시각을 더욱더 깊게 해줄 것이다.

나는 국문과, 영문과, 불문과 학생들에게 진화심리학 강의를 들으라고 권유한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그리고 우리 삶을 둘러싼 모든 지식 분과들은 진화심리학을 토대 삼아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진화적 접근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며 무시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지만, 다윈 혁명은 어쨌든 진행 중이다."

다윈 혁명은 진행 중이다!
이런 전중환 교수의 선언이 현실이 될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진화심리학의 있는 그대로의 면모를 제대로 전달할 전문가를 한국 사회가 얻은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다. 장담하건대, 진화심리학을 둘러싼 지적 논쟁은 앞으로 전 교수의 존재로 더욱더 풍성해 질 것이다.

전중환 교수는 농담처럼 "대중을 위한 진화심리학 책은 <오래된 연장통>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이 책에 실린 수많은 진화심리학 연구에 필적할 만한 성과를 내겠다는 한국의 첫 진화심리학자의 야망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연구에만 몰두하겠다는 그의 바람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대중과 잘 소통할 수 있는 과학자가 드문 한국 현실에서, 대중이 이런 감각과 솜씨를 가진 전중환 교수를 그대로 둘 리가 없다. 또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도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 그가 앞으로 오래된 연장통의 어떤 비밀을 파헤쳐 우리를 놀라게 할지 기대된다.(강양구기자) 

10. 0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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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3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3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10-01-23 18:13   좋아요 0 | URL
생명체의 속성은 생명체가 영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며, 이 바램은 우성(극우 이데올로기로 이용됨)과 열성에 의해 진행됩니다. 생명체(조직,개체)의 극소단위가 유전자(DNA)라 한다면 진화심리학이 생명체의 외형적인 행동습성(반응) 등을 가지고 유전적인 속성(우리 안에는 석기 시대의 마음이 들어 있다)을 증명하기보다는 좀 더 미시적인 유전자의 특성이나 역활 등을 증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화심리학이 진화생물학 등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최근에 유전학에서 어떤 이론적인 근거가 되고 있는지를 살펴 봄도 좋을 듯해요.

로쟈 2010-01-24 21:17   좋아요 0 | URL
진화심리학이나 진화생물학이나 요즘은 유전학과도 요즘은 연계돼 있는 듯싶은데요. 서로 대립되지 않는 걸로 압니다(초기엔 물론 왓슨과 에드워드 윌슨 같은 이들이 서로 대립했다고 얼핏 읽은 듯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