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한국에서 '강북의 고찰'이란 커버스토리 기사를 잠깐 보게 됐다. 그 중 인문학적으로 바라 본 강북지역과 그 문화를 짚어본 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eekly.hankooki.com/lpage/coverstory/201001/wk20100119144259105430.htm). 윤지관 교수의 '강북지역의 상상과 인문학적 실천'이라는 한 심포지엄 발표논문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
주간한국(10. 01. 22) 강북, 인문학적 사유가 필요해
한강을 사이로 둔 강남과 강북. 집값만 놓고 봐도 두 지역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부인하기 어려운 건 경제적 격차뿐이 아니다. 한강은 남과 북의 문화적 경계를 점점 뚜렷하게 그려놓고 있다. 강남이 풍요롭고, 세련되고 현대적이라면, 강북은 상대적으로 근대적이며 촌스럽다. 그런 모습들이 강남과 강북의 문화에 어떻게 투영될까. 강북의 문화는 빈약한 것인가? 그건 정답이 아닌 것 같다. 강남이 소비 자본주의 문화라면, 강북에서는 아직도 유구한 역사와 탈근대의 모순에 대한 성찰과 문화적 힘과 상상, 그리고 도시적ㆍ문화적 획일화에 대한 대안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강북이라는 지역, 그리도 강북개발을 인문학적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지난해 말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가 '지역문화와 인문학-강북지역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그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던 강북의 문화. 인문학적으로 바라 본 지역문화의 특성은 어떠한가? 또, 강북이라는 도시문화가 강남지향적으로 획일화되는 것을 막고, 대안적인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까?
경계성, 대도시에 대한 새로운 상상의 가능성
'촌스럽고, 근대적이고, 개발이 덜 돼 살기 불편하다….'
흔히 강북 하면 떠오르는 말들로, 자본논리에 입각해 강남에 대한 대타 개념으로 강북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문학이라는 학문적 고찰을 통해 본 강북의 문화는 어떤 양상일까?
지난해 말, 지역문화 심포지엄에서 '강북지역의 상상과 인문학적 실천'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던 덕성여대 윤지관 영문학과 교수는 우선, 강북이 갖는 '경계지대'로서의 특성에 주목한다. 그는 경계지대로서의 강북은 한강 이북의 서울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강북구와 노원구, 도봉구 등 강북 3구에 한정된다고 봤다. 따지고 보면, 강남에도 중심지역과 주변지역이 있듯이 강북도 중심과 주변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 등 강남의 중심지역인 '강남3구'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강북의 주변지역인 '강북3구'다.
윤 교수가 말하는 '경계지대로서의 강북'은 첫째, 지리적 차원에서의 경계성이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주변지역이면서 의정부 등지의 남한 최북단 지역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분단이라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레드 콤플렉스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현실에서 이러한 지리적 위상이 가지는 의미는 이 지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둘째는 경제적 차원의 경계성이다. 이곳은 대도시 내에서 상대적으로 저개발된 곳으로, 구로나 영등포지역과 같은 공업지대도 아니고, 활발한 소비가 일어나는 소비지대도 아니다. 즉, 대도시의 영역에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농촌적인 혹은 도시주변마을적인 요소들이 혼재하는 접이지대의 특성이 있다. 그러나 상대적인 저개발은 획일화, 개인주의, 소외 등 개발위주가 안고 있는 대도시의 문제들을 상대적으로 덜 야기하고, 농촌의 공동체적인 요소들을 보존할 수 있는 환경을 낳기도 했다.
세 번째로 환경적 경계성을 들었다. 이 지역은 대도시에서는 드물게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 가운데 대부분의 큰 산들이 이 지역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을 특별하게 만드는 특성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서울의 팽창이 본격화된 60년대 초 이전까지 이 지역은 지방 혹은 농촌적 속성을 가지고 있던 지역이었다. 삼각산도당제처럼 이 지역의 전통의례들이나 제식들은 아직까지도 전승돼 오고 있다. 대도시 지역이면서 향토성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며, 특히 도봉서원과 그 주변의 마을처럼 진보적인 성리학의 터전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윤 교수는 "이 지역이 갖는 경계지대로서의 속성은 대도시에 대한 상상을 새롭게 펼쳐낼 토대가 된다"고 주장했다. 가령, 마을과 도시적 요소의 공존은 대도시에서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시험할 수 있는 자원이 된다. 그런가 하면, 자연이 인공적인 것과 조화를 이룬 점은 대도시가 환경친화적인 성격을 간직한 채 발전을 지향하는 데 있어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근대성의 문제
윤 교수는 또한, 강북문화가 가진 근대성에 주목한다. 강남문화가 완전한 현대라면, 강북은 근대성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근대성에 대한 성찰이란 근대와 전통 사이의 갈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근대와 전통의 사이, 그리고 이와 동시에 근대의 성취와 탈근대의 지향 사이의 대립도 이 지대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사건의 일부다. 급격한 근대화에 따른 도시팽창의 과정에서 이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근대형성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존의 역사는 문학작품 속에서도 만날 수 있다.
윤 교수는 강북지역을 배경으로 한 <녹천에는 똥이 많다>(이창동·1992년)와 <장석조네 사람들>(김소진·1995년)을 예로 든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소설가 이창동에게 한국일보 문학상을 안긴 역작으로, 근대화의 과정에서 한 시민이 겪는 정신적 갈등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주인공은 자수성가해 상계동에 소형 아파트를 마련하고, 행복한 소시민으로 정착해가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기, 대학졸업 후 노동운동으로 쫓기는 이복동생을 숨겨 주었다가 위기를 맞는다. 소설의 배경을 이루는 녹천역 주변은 한편에는 입주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아파트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악취가 풍기고 열악하지만, 한 푼 없이 상경해 직장을 얻고 가정을 꾸리고 사는 주인공에게는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윤 교수는 "그러나 주인공이 천신만고 끝에 이룩한 가정의 행복이 알량한 자기만족과 허위에 지어진 초라한 모조품에 불과한 것으로 깨어지고 있는 것을 작품은 목격한다"고 말했다. 노동운동으로 쫓기는 이복동생을 숨겨줬다가 위기를 맞게 된 주인공은 결국 동생을 고발하고 거대한 오욕의 세상에서 살아남기로 다짐한다. 이 작품이 시대적인 전형성을 가지는 이유는 80년대라는 시대 상황에서 소시민이 되어가던 서민들의 삶의 양상의 외적 조건과 내적인 갈등을 면밀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석조네 사람들>은 70년대에서 8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의 미아리 산동네를 배경으로 기층민중의 삶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김소진이 불러낸 70년대의 미아리는 인구의 도시유입으로 서울이 팽창을 거듭하던 시기다. 이 시기에 각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인간군상이 서로 갈등하고 미워하고, 화해하고 도우면서 삶의 공간을 창출해가던 도시변두리의 모습이 작품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산동네라고 불리는 지역 민중의 삶이 산업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과 비극에 활력과 인간적인 훈기를 불어넣었다.
윤 교수는 이 같은 근대성의 모순들에 대한 성찰을 예술의 원동력으로 보았다. "강북문화에 내장된 성찰이야말로 이 지역이 가진 문화적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강남의 문화를 부러워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소비문화일 뿐입니다. 유행의 첨단이며, 자본의 논리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지요. 강북의 문화가 빈부격차와 도시문제 등 근대성의 모순들에 성찰을 담고 있는 반면, 강남은 성찰이 없어요. 자본화, 세계화, 현대화에 전적으로 승복하는 게 강남인데, 그것은 문학 등 창조적인 예술의 원천이 될 수 없겠지요."
그는 강북의 문화는 전통이 있고, 질적인 면에서의 깊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인문학의 관점에서 바라 보면, 꼬불꼬불하고 좁은 골목길이나 현대화 되지 않은 가옥, 빈약한 학원시설, 촌스러운 스타일 등 강북적인 삶의 양식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전세화 기자)
10. 01. 25.
P.S. 도시인문학에 대해선 작년에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에서 펴낸 책들이 있다. 짐작엔 시리즈로 계속 출간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