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 강의가 있었다. 올해도 여러 차례 강의한 작품이다(<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에 포함돼 있다). <더블린 사람들>(1914)의 몇몇 단편을 제외하면 조이스의 작품들 가운데 유일한 강의 레퍼토리에 해당한다. 내년에 <율리시스>에 도전할 계획이어서 미리 관련한 책들을 준비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데, 강의중에도 곧잘 언급하는 것이지만 나는 조이스가 <율리시스>(1922) 정도에서 멈추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걸작이라고 부른 ‘괴물‘ <피네간의 경야>(1939)는 우주의 언어로 쓰였다는 말 그대로 인간의 언어로는 이해하거나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도단‘의 여실한 사례가 아닐까.

조이스 전문가로서 김종건 교수가 학자로서의 일생을 바쳐서 이 작품을 번역하고 주석을 붙였지만 결과를 놓고 보건대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번역의 불가능성 내지 무의미성을 보여주는 게 <피네간의 경야> 번역이기 때문이다. 조이스의 숱한 신조어를 옮기기 위해 역자는 생경한 한자어를 무수히 동원하는데 그로 인해 이 작품은 한글 번역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국한문혼용체 소설이 되어버리고 만다. 한자 병기를 생략하고 초반부를 읽어보자.

˝사랑의 재사, 트리스트람경, 단해 너머로부터, 그의 반도의 고전을 재차 휘두르기 위하여 소유럽의 험준한 수곡 차안의 북아모리카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니 오코노의 흐르는 샛강에 의한 톱소야의 암전이 항시 자신들의 감주수를 계속 배가하는 동안, 조지아주 로렌스군의 능보까지 아직 지나치게 쌓지 않았으니 뿐만 아니라 원화로부터 혼일성이 ‘나 여기 나 여기‘ 하고, 풀무하며 다변강풍으로 패트릭을 토탄세례하지 않았으니 또한 아직도, 비록 나중의 사슴고기이긴 하나, 아직도 피의 요술사 파넬이 얼빠진 늙은 아이작을 축출하지 않았으니, 비록 바네사 사랑의 유희에 있어서 모두 공평하였으나, 이들 쌍둥이 에스터 자매가 둘 혹은 하나의 나단조와 함께 과격하게 격노하지 않았나니, 아빠의 맥아주 한 홉마저도 젬 또는 셴으로 하여금 호등으로 발효하게 하지 않았나니, 그리하여 눈썹 무지개의 붉은 동쪽 끝이 바다 위에 반지마냥 보였을지라.˝(<복원된 피네간의 경야>,3쪽)

<피네간의 경야>는 원어민들도 ‘읽을 수 없는 책‘으로 치부하며 독자보다 박사학위자가 더 많다고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첫 페이지에 나오는 한 문장을 예시했지만 우리말(?) 번역으로도 당연히 읽을 수 없는 작품이다. 심오해서가 아니다. 그냥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박상륭의 <칠조어론>이 이에 견줄 만한 사례라고 할까). 원문으로야 소수의 독자가 심오한 무엇을 찾아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투의 문장을 600쪽 넘게 읽고, 거기에 딸린 12000개가 넘는 주석을 읽어야 한다는 건 고문에 가깝다(책값은 48000원이다).

<피네간의 경야>가 심오한 걸작이라는 데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설사 그렇다 한들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작품이다. 내가 찾을 수 있는 의미는 조이스가 문학의 막다른 길, 문학의 벼랑을 보여주었다는 것. 덕분에 많은 작가와 독자들이 그 벼랑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물론 그럼에도 남들은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굳이 그 벼랑길로 가보려는 독자도 있으리라. 나는 이쯤에서 그들을 배웅하고자 한다. 내가 동행할 수 있는 조이스는 <율리시스>까지만이다. 그 정도만으로도 조이스의 다이달루스적 기예는 충분히 훌륭했다. 추락의 기예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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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24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피네간의 경야를 살까 주저하다가 단념했습니다.
잘했다고 하기엔 상황이 아쉽네요.
 

에드거 앨런 포 전집(시공사)이 새로 나왔다. 장르별 분류로 전6권이다. 기존에 전집이 없지 않았지만 소설 전집이었던 데 반해서 이번에는 시와 에세이까지 포함돼 있는 게 특징이다. 게다가 양장본이어서 결정판의 모양새도 갖추었다(내가 갖고 있는 건 문고본이었다).

주요 작품들을 한데 모아놓는 게 전집의 의의이지만 분량상 강의 교재로는 불편하다. 강의에 참고하는 정도. 올해 미국문학을 강의하며 포 문학의 의의에 대해서도 짚어본 터라 기회가 닿을 때 한마디 하기로 하고, 이번 전집에 대해서는 에세이 선집 <글쓰기의 철학>이 포함돼 있다는 걸 특별히 강조하고자 한다(‘작문의 철학‘이 포함돼 있어서 제목이 그렇게 붙여진 듯하다).

또다른 중요한 에세이로 보들레르와 프랑스 상징주의에 큰 영향을 미친 ‘시의 원리‘도 들어 있다(단편론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전에 <생각의 즐거움>이란 제목의 산문집에 번역돼 있었는데 이미 절판된 지 오래돼 참고할 수 없었다. ‘시의 원리‘는 자작시 ‘갈가마귀‘의 해설도 겸하고 있는데 이 시의 후렴구 ‘Never more‘를 어떻게 옮겼느냐도 번역본 선택의 포인트. 이번 전집판은 시 제목은 ‘까마귀‘로, 시구는 ‘결코 더는‘이라고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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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에 일본 현대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에 이어서 내년 봄에는 중국 현대문학을 읽으려 하고 일정도 미리 짜 두었다. 한데 책장에서 왕샤오보의 <혁명시대의 연애>(창비)를 꺼내 보다가 자리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1952년생으로 1955년생인 모옌보다 나이는 많지만 공식적인 데뷔는 더 늦다. 1989년에 첫 소설집을 펴내는데, 1981년에 데뷔한 모옌의 대표작 <붉은 수수밭>(<홍까오량 가족>)이 발표되는 게 1987년이다.

<혁명시대의 연애>에는 표제작과 함께 중편 ‘황금시대‘가 같이 수록돼 있다. 두 편이 포함된 작품집이 중국에서는 <황금시대>(1994)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1997년 45세의 나이에 급서. 왕샤오보에게 주목한 것은 ‘중국의 제임스 조이스‘ 내지 ‘중국의 카프카‘로 불린다는 소개 때문이다. 모옌의 경우에도 ‘중국의 카프카‘, ‘중국의 포크너‘ 등으로 불리기에 공통 별칭을 빼면 중국의 조이스와 포크너라고 할까. 그런 별칭이 가능한 건 물론 1980년대 초반에 조이스와 포크너, 카프카, 마르케스 등의 문학이 중국에 전격적으로 수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수용이 중국문학의 도약을 가능하게 했다(고 나는 본다).

봄학기 강의에서 읽을 모옌의 작품은 문혁기를 다룬 대표작 <개구리>를 골랐는데 발표 시기를 고려하면 <혁명시대의 연애>를 먼저 읽어야 할 것 같다. <개구리>는 여러 번 강의에서 다룬 작품이지만 처음 읽게 될 <혁명시대의 연애>는 기대가 된다. 강의자에게 해가 바뀐다는 건 새로운 작품들을 강의하게 된다는 뜻이다. 새해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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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2018-12-16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수고하셨습니다. 내년을 기대합니다.
많이 읽어 뼛속까지 달라지고 몰라보게 성장해져 단단하게
홀로서는 법을 배워야겠어요~

로쟈 2018-12-16 20:40   좋아요 0 | URL
네, 내년에도 뼈들이 잘 버텨줘야겠어요.^^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강의할 때마다 경탄하게 되는데 중편 분량의 <곰>도 예외가 아니다. 별도로 발표되기도 했지만 1942년에 출간된 <모세여 내려가라>의 한 장이다. 이 소설은 7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출판과정에서 편집자가 <모세여 내려가라와 다른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소설이 아닌 소설집으로 만들었고 나중에야 포크너의 뜻에 따라 <모세여 내려가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국내에는 <곰>만 몇 차례 번역되었고 <모세여 내려가라>는 아직 완역되지 않았다.

포크너는 자신의 대표작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소리와 분>(1929),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1930)와 함께 <모세여 내려가라>를 꼽기도 했다.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주요작이 여러 편 되지만 <모세여 내려가라>의 완역본을 특히 기다리는 이유다. 떡 줄 사람이 없음에도 바람을 저자면, <소리와 분노>의 전작으로 ‘요크나파토파‘ 시리즈의 출발점이 된 <사토리스>(1929)와 <성역>(1931)의 후속작 <어느 수녀를 위한 진혼곡>이 번역되었으면 싶다. <어느 수녀를 위한 위한 진혼곡>은 카뮈가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카뮈와 사르트르는 열광적인 포크너 숭배자였다).

그리고 <압살롬, 압살롬>(1936) 이후작으로 <정복되지 않은 사람들>(1938)과 <어둠 속의 침입자>(1948)가 읽고 싶은 책들이다. 후기작 <우화>(1954)는 퓰리처상 수상작이고(퓰리처상 수상작도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게 포크너의 문학이다), <햄릿>(1940), <타운>(1957), <저택>(1959)은 ‘스놉스 3부작‘이다. <병사의 보수>(1926)가 첫 소설이고, 두번째 퓰리처상 수상작인 <약탈자들>(1962)이 마지막 소설이다. 36년간의 대단한 여정이다!

포크너는 명실공히 20세기 최대 작가의 한 명이다. 당연히 나의 세계문학 이해와 강의에 있어서도 표준이 되는 작가다. 몇몇 작품이 번역돼 있긴 하지만 아직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다. 언제 다시금 포크너의 작품을 강의에서 다룰지 모르겠지만(번역된 장편들은 다 읽어본 듯하다) 전집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또다른 표준이 등장하거나 발견되기 전까지 포크너는 미국문학뿐 아니라 세계문학사에서도 손에 꼽을 작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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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12-15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드레 말로의 정복자는
포크너와 함께 강의를 듣게되는바람에
의문의 1패를~
포크너는 읽을수록 대단하다는 생각뿐.

로쟈 2018-12-15 14:54   좋아요 0 | URL
데뷔작으로 비교해달라고 하겠는데요.^^

종이달 2022-05-2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한겨레에 실은 '언어의 경계에서' 칼럼을 옮겨놓는다. 미국문학 강의에서 자주 다루는 멜빌의 <바틀비>에 대해 적었다(지면에서는 분량상 한두 문장이 축약되어 나갔다). 요점은 바틀비의 '저항'에 대해 다른 시각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상용구(I would prefer not to)에서 prefer는 가장 낮은 수준의 주체성(의지)을 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겨레(18. 12. 14) '바틀비'라는 자본주의 우화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은 언제부턴가 <필경사 바틀비>의 작가로도 불린다. 대작 장편과 단편을 같은 비교 대상으로 삼기는 어렵지만 당대에 주목받지 못하다가 오늘날 독보적인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에 부응하듯 번역본도 다수가 출간되었다. 분명 필경사라는 직업은 사라진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필경사 바틀비’가 문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새로 읽을 때마다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힌트가 되는 것은 ‘월스트리트 이야기’라는 부제다. 19세기 중반에 쓰인 작품이지만 뉴욕의 중심가로서 월스트리트는 오늘날에도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이다. ‘필경사 바틀비’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의미심장한 우화로도 읽을 수 있는 근거다. 이야기는 바틀비를 고용한 적이 있는 변호사 화자의 회고로 시작한다. 월스트리트에서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그는 법률서류를 베껴 쓰는 직원으로 필경사들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일이 폭주하게 되자 한 명을 더 채용하게 된다.

 

그때 찾아온 청년이 바틀비인데 기존 직원들과 달리 조용해 보이는 인상 때문에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가장 가까운 책상을 내준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바틀비는 마치 베껴 쓰는 일에 굶주리기라도 한 듯이 밤낮으로 일에 몰두한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조용히 기계처럼 일한다. 하지만 그렇게 성실한 태도를 보여주던 바틀비가 뜻밖에도 베낀 서류를 원본과 대조해보자는 변호사의 주문을 거절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는 특이한 상용구를 반복하는데 번역본들에서는 이렇게 옮겨졌다. “안 하고 싶습니다”(창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문학동네),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현대문학).


예기치 않은 반응에 깜짝 놀란 변호사는 바틀비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흥미롭게도 바틀비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나 흥분도 비치지 않았다. 마치 석고 흉상 같은 바틀비의 태도에는 인간다운 요소가 전혀 없었다. 바틀비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대칭성으로 보인다. 곧 변호사에게는 지시의 이행과 거부가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지만 바틀비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비대칭성을 이야기의 핵심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필경사 바틀비’의 결말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서류 대조 작업 거부로 시작된 바틀비의 거부는 정서 작업 자체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고 변호사는 바틀비를 방치한 채 아예 사무실을 이전한다. 주인이 바뀐 사무실에 남겨진 바틀비는 부랑자로 간주돼 교도소에 수감되는 처지에 이르고 나중에는 음식까지 거부하다가 아사한다. 변호사는 이 기이한 인물의 뒷이야기를 전해 듣고서야 바틀비를 이해하게 된다.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오기 전에 바틀비가 배달불능 우편물 취급부서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풍문으로 듣는데, ‘죽은 편지들’을 다루다 보니 바틀비가 그렇게 되었으리라고 그는 추정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라는 영탄은 그가 바틀비를 이해하고 동정하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이러한 결말에서 변호사와 바틀비의 비대칭성은 과연 해소되는 것일까? 마치 기계와도 같았던 바틀비는 ‘인간화’되는 것일까? 그와는 반대로 비대칭성을 그대로 고수하는 해석도 가능하다. 사실 배달불능의 우편물이 ‘죽은 편지들’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복사기에 의해 대체된 서류 베껴 쓰기는 인간적인 노동이 아니라 기계적인 노동이고 ‘죽은 노동’이다. 사무실의 다른 동료들이 그 무료한 노동을 견디지 못해 오전과 오후에 각각 발작을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바틀비는 그 죽은 노동을 기계처럼 반복했다. 지시의 이행과 분간되지 않는 그의 지시 거부는 그러한 ‘기계’의 오작동이 아니었을까. 바틀비를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저항의 주체로 보는 철학자들의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기계적 충실성이 역설적으로 강력한 위협이 되는 사례를 바틀비에게서 발견한다.


18.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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