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 실은 '언어의 경계에서' 칼럼을 옮겨놓는다. 미국문학 강의에서 자주 다루는 멜빌의 <바틀비>에 대해 적었다(지면에서는 분량상 한두 문장이 축약되어 나갔다). 요점은 바틀비의 '저항'에 대해 다른 시각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상용구(I would prefer not to)에서 prefer는 가장 낮은 수준의 주체성(의지)을 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겨레(18. 12. 14) '바틀비'라는 자본주의 우화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은 언제부턴가 <필경사 바틀비>의 작가로도 불린다. 대작 장편과 단편을 같은 비교 대상으로 삼기는 어렵지만 당대에 주목받지 못하다가 오늘날 독보적인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에 부응하듯 번역본도 다수가 출간되었다. 분명 필경사라는 직업은 사라진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필경사 바틀비’가 문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새로 읽을 때마다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힌트가 되는 것은 ‘월스트리트 이야기’라는 부제다. 19세기 중반에 쓰인 작품이지만 뉴욕의 중심가로서 월스트리트는 오늘날에도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이다. ‘필경사 바틀비’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의미심장한 우화로도 읽을 수 있는 근거다. 이야기는 바틀비를 고용한 적이 있는 변호사 화자의 회고로 시작한다. 월스트리트에서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그는 법률서류를 베껴 쓰는 직원으로 필경사들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일이 폭주하게 되자 한 명을 더 채용하게 된다.

 

그때 찾아온 청년이 바틀비인데 기존 직원들과 달리 조용해 보이는 인상 때문에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가장 가까운 책상을 내준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바틀비는 마치 베껴 쓰는 일에 굶주리기라도 한 듯이 밤낮으로 일에 몰두한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조용히 기계처럼 일한다. 하지만 그렇게 성실한 태도를 보여주던 바틀비가 뜻밖에도 베낀 서류를 원본과 대조해보자는 변호사의 주문을 거절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는 특이한 상용구를 반복하는데 번역본들에서는 이렇게 옮겨졌다. “안 하고 싶습니다”(창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문학동네),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현대문학).


예기치 않은 반응에 깜짝 놀란 변호사는 바틀비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흥미롭게도 바틀비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나 흥분도 비치지 않았다. 마치 석고 흉상 같은 바틀비의 태도에는 인간다운 요소가 전혀 없었다. 바틀비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대칭성으로 보인다. 곧 변호사에게는 지시의 이행과 거부가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지만 바틀비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비대칭성을 이야기의 핵심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필경사 바틀비’의 결말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서류 대조 작업 거부로 시작된 바틀비의 거부는 정서 작업 자체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고 변호사는 바틀비를 방치한 채 아예 사무실을 이전한다. 주인이 바뀐 사무실에 남겨진 바틀비는 부랑자로 간주돼 교도소에 수감되는 처지에 이르고 나중에는 음식까지 거부하다가 아사한다. 변호사는 이 기이한 인물의 뒷이야기를 전해 듣고서야 바틀비를 이해하게 된다.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오기 전에 바틀비가 배달불능 우편물 취급부서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풍문으로 듣는데, ‘죽은 편지들’을 다루다 보니 바틀비가 그렇게 되었으리라고 그는 추정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라는 영탄은 그가 바틀비를 이해하고 동정하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이러한 결말에서 변호사와 바틀비의 비대칭성은 과연 해소되는 것일까? 마치 기계와도 같았던 바틀비는 ‘인간화’되는 것일까? 그와는 반대로 비대칭성을 그대로 고수하는 해석도 가능하다. 사실 배달불능의 우편물이 ‘죽은 편지들’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복사기에 의해 대체된 서류 베껴 쓰기는 인간적인 노동이 아니라 기계적인 노동이고 ‘죽은 노동’이다. 사무실의 다른 동료들이 그 무료한 노동을 견디지 못해 오전과 오후에 각각 발작을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바틀비는 그 죽은 노동을 기계처럼 반복했다. 지시의 이행과 분간되지 않는 그의 지시 거부는 그러한 ‘기계’의 오작동이 아니었을까. 바틀비를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저항의 주체로 보는 철학자들의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기계적 충실성이 역설적으로 강력한 위협이 되는 사례를 바틀비에게서 발견한다.


18.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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