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024호)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부산에 내려가기 전에 급하게 써보낸 원고인데,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어크로스, 2013)를 다뤘다. 언젠가 <뉴라이트 사용후기>(개마고원, 2009)도 다룬 적이 있기에 나로선 구면이다(<안티조선 운동사>(텍스트, 2010)는 읽지 않았지만 데뷔작인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텍스트, 2009)를 읽은지라 왠지 친숙하다). 20대 담론이 이슈가 되면서 호명된 논객/필자군(한윤형을 비롯해 노정태, 김현진, 김민하, 조연호, 박가분 등)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듯싶다.

 

 

 

주간경향(13. 05. 07) 잉여세대의 문제는 시대의 문제다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자칭 ‘청년논객 한윤형의 잉여탐구생활’이다.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는 세대의 자화상과 세대의식, 사회적 열패감과 무기력을 넘어서고자 하는 정치의식과 사회비평을 두루 담았다. 저자는 “군대를 다소 늦게 다녀온 25살 청년이 31살이 되는 동안 사적인 공간과 담론의 영역에서 어떻게 분투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자평하면서 야심도 털어놓았다. “또래에게는 위안을 주고, 다른 세대에겐 이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봐야 하는 책이 되면 좋겠다”는 야심이다. 어떤 위안을 건네고, 어떤 이해를 돕고자 하는가.

전체적인 골자는 세대 문제가 결국은 시대의 문제라는 점이다. 잉여세대 문제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시대를 반영하는 어떤 세대의 문제’일 뿐이다. 특정 세대가 뒤집어쓸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2007)가 세대간 착취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켰지만, 한윤형이 보기에 “세대 담론은 계급문제가 철저하게 정치에서 배제된 결과로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담론이다. 게다가 <88만원 세대>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건 ‘원래부터 88만원 정도를 벌었던 젊은이들’의 관심이 아니라 그런 빈곤층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중간계급의 불안감이었다. 그래서 88만원 세대 담론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쪽은 명문대생들이었다(루저들의 정서를 잘 표현한 노래 ‘싸구려 커피’를 부른 가수 장기하가 명문대 출신인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말하자면 ‘계급 불평등의 세대 전이’가 ‘88만원 세대 담론’의 성공 요인이었다.

중산층의 불안심리 내지는 중간계급의 욕망과 결부돼 있는 세대 문제는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 문제와 직결된다. 저자가 간추린 바에 따르면,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서 자산을 축적했고, 그와 함께 정치적으로 보수화됐다. 기업 활동에 투자돼야 할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자연스레 기업 경쟁력은 떨어졌고, 이를 보충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이 노동시장에 신규로 진입한 젊은 세대의 임금을 낮추는 것이었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춘 것이 한국식 자본주의의 운용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 중산층 자신의 자녀가 월급으론 독립을 꿈꿀 수 없는 사회다. 이 ‘멋진 신세계’에선 부모가 몇억원 보태주지 않으면 전셋집 하나 장만하기도 어려워 어지간한 청춘들은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세대’로 전락한다.

이러한 구조적 현실을 외면한 멘토 담론은 아무리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어낸다 하더라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 공허는 잉여세대를 근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386세대의 위선과도 맞닿아 있다. 가령 교육문제를 보더라도 386세대에게선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한 급진적 비판과 자기 아이를 외국이나 대안학교에 보내는 일이 양립 가능하다. 우파가 자식을 미국으로 보낼 때 소위 좌파는 독일이나 핀란드로 보내는 것 정도의 차이다. ‘결국 다 똑같다’는 냉소는 그래서 나온다.

물론 냉소가 우리를 구제해주지는 않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창의성을 말살하는 값싸고 질 나쁜 공교육’을 그대로 받아내는 것이 오히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일은 아닐까라는 저자의 반문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제안은 진보담론이나 개혁정책이 실효적 의미를 갖기 위해선 한국 사회의 제도와 문화라는 맥락에서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지에 대한 매우 세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상황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대학생의 85%가 비정규직이 되는 세상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동류의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건 계급간 연대의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 문제다. ‘루저’와 ‘잉여’를 양산해내는 사회체제와 경제구조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가능할까?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우리’를 발견하고 눈짓을 교환할 때 균열은 시작된다.

 

13.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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