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책&(422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애초에는 감정이란 주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려고 했지만, 분량상 경제와 협상에서 감정의 문제를 다룬 몇 권의 책을 살펴보는 데 그쳤다. 더 넓게 다루자면, <감정의 인문학>(봄아필, 2013) 같은 책이 더 보태질 수 있다...

 

 

 

책&(13년 9월호) 감정과 행동

 

무엇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개인적 차원은 물론 사회적 차원에서도 우리가 더 나은 판단과 의사결정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흔히 어떤 상황에서 인간이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경제적 인간(호모 이코노미쿠스)’에 대한 가정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식과 일상 경험은 많은 경우 우리를 지배하는 건 이성이 아닌 비이성, 혹은 감정이라는 걸 알려준다. 이 감정은 합리적 사고와 객관적 인식을 왜곡시키는 장애물일까? 감정을 배제하고 판단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9월에는 행동의 동인으로서 감정(비이성)이 어떤 역할을 하며, 이에 대한 대처법은 무엇인지 경제와 협상 관련서 몇 권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행동경제학은 경제학에 심리학을 접목시킨 새로운 연구영역으로 주류 경제학과는 달리 인간이 비이성적인 존재라는 걸 전제한다. 행동경제학의 대략적인 윤곽을 소개해주는 책이 댄 애리얼리의 <경제심리학>(청림출판, 2011)이다. 우리가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장기적인 목표보다는 단기적인 즐거움에 빠지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가령 어떤 병에 걸렸을 때 의사의 처방이 채소를 많이 먹고, 물을 많이 마시고, 하루에 몇 킬로미터씩 걸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게 행동하면 분명 건강이 나아질 거라는 건 모두가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장은 안락과 편의를 선택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만약 우리가 그만큼 이성적인 존재라면 수백만 장의 헬스클럽 회원권이 사용되지 않은 채 만기를 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습관이나 데이트 상대의 선택, 동기의식, 기부 행위, 애착행동과 복수욕 등 다양한 비이성적 행동을 검토한 뒤에 저자가 얻어내는 교훈은 두 가지다. 우리는 비이성적인 성향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과 이러한 비이성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 그에 따라 저자는 직관을 맹신하지 말고 우리의 사고와 논리의 한계를 인식하고서 그에 맞게 대응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비이성적인 특성이 보통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기에 예측가능하다는 점이다.


댄 애리얼리의 베스트셀러 <상식 밖의 경제학>(청림출판, 2008)은 바로 그러한 비이성적 행동의 패턴과 함정을 다룬다. 한 대학에서 이루어진 실험을 보자. 컴퓨터 화면 왼쪽에 있는 원을 마우스를 이용해서 오른쪽의 네모상자에 포개놓는 일을 참가자들에게 주문하면서 각기 다른 시장규칙을 적용했다. 5분 동안 이 따분한 일을 하는 대가로 첫 번째 그룹에는 5달러를, 두 번째 그룹에는 50센트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룹에는 물질적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저 시간을 좀 내달라고만 부탁했다. 결과는? 5달러를 받은 참가자들은 평균 159개의 원을 끌어다놓았고, 50센트를 받은 참가자들은 평균 101개의 원을 끌어다놓았다. 반면,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은 참가자들은 가장 열심히 작업을 해서 평균 168개의 원을 끌어다놓았다. 돈이 아니라 명분이 오히려 더 효과적인 행동의 원인으로 작용한 사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이 인센티브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계산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희망적인 부분이다.

 

 

 

월스트리트의 ‘멘탈 트레이너’ 로버트 코펠의 <투자와 비이성적 마인드>(비즈니스북스, 2013)은 금융 거래에서 우리의 비이성성을 어떻게 극복한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이익은 내고 손실은 줄이고 자본을 늘려라’라는 게 투자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합리적 투자에서도 비이성적 행동과 그러한 행동을 유발하는 뇌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한 대학에서 진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돈을 벌 때 두뇌가 경험하는 감정은 사랑에 빠졌을 때 갖는 감정과 똑같다고 한다. 참가자들에게 종이 지폐를 세게 하고 두뇌를 촬영한 결과 사랑에 빠졌을 때 반응이 오는 부분과 똑같은 곳이 활성화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이 사랑이라는 또 다른 고통 완화제의 대체재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실험 결론 이상의 암시를 던져준다고 할까.


하버드대학교 협상연구소의 저자들이 펴낸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감정을 흔들어라>(한국경제신문, 2013)도 어떤 종류에서의 협상에서건 감정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유용한 감정을 자극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감정은 관심사를 돌려놓거나 관계를 악화시키는 등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협상에서 위대한 자산이 될 수도 있다. 협상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을 높여주고 상호관계를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인정, 친밀감, 자율성, 지위, 역할 등 5가지 핵심관심에 집중함으로써 긍정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최철규, 김한솔의 <협상은 감정이다>(쌤앤파커스, 2013)는 내 것을 많이 챙기는 것을 목표로 한 분배적 협상(협상1.0)과 공정하게 나누는 것을 지향하는 통합적 협상(협상2.0)을 넘어서 상대의 감정과 심리적 만족감을 극대화하는 가치 중심의 협상을 ‘협상3.0’이라고 명명한다. 요컨대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감정도 만족도도 만족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13. 09. 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프레시안 books'에 실린 '3인 1책 수다'를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906183704§ion=03 참조). 화제의 만화, 윤태호의 <미생>(위즈덤하우스, 2012-13)을 읽고 좌담을 나눴다. 아직 읽지 못했지만 <미생>은 9권으로 완결되었다(나는 7권까지 읽었다). 마저 읽어볼 참이다...

 

  

 

프레시안(13. 09. 06) '설국열차' 남궁민수는 알고 '미생' 장그래는 몰랐던 것?

 

(...)

 

김용언 : 전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갈등이 튀어나올 때마다 굉장히 공감하면서 읽다가도 언뜻언뜻 '아 이건 픽션이지'라고 거리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어요. 영업3팀 같은 경우 팀원들의 사생활을 절대 안 보여줘요. 정확하게는 사생활이 없지요. 다른 팀의 사원들 같은 경우 근무 중 트위터를 한다든가 애인과 통화하며 영화 약속을 잡는 장면이 조금 부정적으로 다뤄지잖아요. 장그래가 "난 그런 거 할 시간 없는데"라고 한 마디를 던진다든가. 그럴 때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게 되더라고요. (웃음) 사실 그처럼 짬짬이 딴 짓하고 한숨 돌리는 게 직장생활의 일상인데, 장그래 이 녀석은 왜 딴죽을 거는 거지! 하면서요.

물론 영업3팀의 특성상 늘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야 하고 심지어 '리세터'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매우 바쁩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그렇게 지나치게 과로하면서 사생활을 가질 자유도 없는 삶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잖아요. 왜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 앞에서, <미생>은 사실 침묵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며 그 모든 과정에 성심을 다해 내 시간을 바친다는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그걸 당연시하는 어조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있었습니다.

 

 


이권우 : 또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로는 여성 직원인 선차장이 있지요. 맞벌이 부부 중 아내가 느낄 수밖에 없는 고충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요. 퇴근 후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순번을 정하는 것 때문에 남편과 다투고, 남편이 승진하면서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하다'며 선차장의 퇴직을 요구하는 부분들이요. 직장 생활의 가장 내밀한 고충을 솔직하게 묘사하지요. 윤태호 작가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작가로 유명한데, <미생>에서도 직장 여성에 대한 시선이 굉장히 긍정적이고 우호적입니다. 안영이나 선차장도 그렇고, 재무팀의 깐깐한 여성 부장님도 그렇고요.

 

<미생>의 만화적 특성에 대해서도 첨언하고 싶어요. 사실 만화에서 사람 얼굴을 그리는 게 아주 어려워요. 다른 유명 작가들의 만화를 보면 얼굴의 현실감이 별로 안 느껴지지만, 윤태호 작가의 만화에선 정말 사람 같거든요. 예를 들어 미국에서 온 스티브 부장 같은 경우, '프레시안 books'에도 글을 자주 쓰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의 이정모 관장이 모델인데, 보면 딱 알아볼 수 있어요.(웃음)

또 장면 묘사도 남다릅니다. 옛날 만화는 공간이 평면적인데, 여기선 카메라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입체적으로 묘사하지요. 만화가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은 단연 IT 영업팀 박 대리 부분입니다. 2권 37쪽에서 박대리 등에 날개가 돋는 장면은 압도적이죠. 소설 같았으면 이런 결정적 순간에 온갖 수사학을 동원했어야 할 텐데, 만화에서는 박 대리의 심리적 변화를 묘사할 때 이런 날개를 묘사하는 것만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남깁니다. 그렇게 곳곳에 뛰어난 만화적 기법이 돌출되기 때문에 독자들을 강하게 매료시키는 측면이 있어요. 다만 개인적인 불만이라면, 의성어를 너무 많이 쓴 게 아닌가 싶어요. 예능 프로 자막을 보는 느낌이 들거든요. '저벅저벅'하는 발소리는 지나치게 자주 나와요.

 



김용언 : 전 그런 발소리 자체는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큰 사무실에선 소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요. 사장님 어디 가냐, 옆 팀에서 뭐하냐 하는 정보들이 그런 소리들로 전달되니까요. '큰 인물'의 등장이라든가 어떤 사건 발생의 전조쯤으로 의성어를 강조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임원급 쯤 되면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지요. 오히려 위압감을 주기 위해서라도 발소리나 말소리를 크게 내는 편입니다. 안영이의 경우, 또각또각 소리 나는 구두를 신고 다니다가 상사한테 꾸중을 듣고 바로 단화로 바꿔 신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전 2권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인턴 P.T 시험에 합격한 후배들에게 오차장이 검은 넥타이를 사준 다음, 시청 앞 쌍용차 해고자 복직 투쟁 텐트로 데려가 해고자의 영정 앞에서 인사를 시킵니다. 아주 뜻밖의 전개였고 그만큼 인상적이며 그 안에 담긴 의미도 분명하지요.

"근로자로 산다는 것. 버틴다는 것.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아가는 것…."

하지만 이 부분에서의 생경함 자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현우 : 작가적 개입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인데, 이후에 이 해고자들과 연관되는 장면도 없으니 상당히 이례적이긴 하죠. 전 <미생>을 보면서 상사맨들의 일상과 함께 상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처음 알았어요. (웃음) 동창 중에 상사에 다니는 친구들도 잘 못 만나거든요. 이젠 생각도 관점도 사용하는 용어도 다르니까 대화 자체가 힘들어지죠.

김용언 : 장그래가 무역 용어를 못 알아듣고 힘들어하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이현우 : 이게 직장인 독자들에게 어필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세계가 있는 거지요. 자신들만 이해할 수 있는 애로사항이 존재하는, 바깥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문턱이 존재하는 고유한 영역이요. '우리는 팀원, 같이 살고 같이 죽는다'는 팀워크의 정서가 존재하는 영역. 그걸 <미생>이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아쉬운 점은, 한 번도 원 인터내셔널 바깥의 시선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시즌 2가 예고되었다고 하니 좀 성급한 의문일 수 있는데, 원 인터내셔널이 유일한 삶의 조건처럼 설정되어 있어요. 퇴사한 오차장의 선배들이 그러잖아요. 회사는 전쟁터지만 바깥은 지옥이라고, 회사 나올 생각 하지 말라고. 그 대사가 직장인들의 무의식을 건드린다고 생각하는데, 한편으론 그게 위험한 인식의 공유이기도 합니다.

이권우 : 오차장이 퇴사 결심할 때 바로 현실이 튀어나오죠. 지금껏 회사를 통해 아파트 융자금을 저리로 처리할 수 있는데 이제 높은 이자의 융자금 계정으로 바꿔야 합니다. 결국 부인이 직원가로 살 수 있는 가전 제품을 전부 사라고, 보너스 받는 다다음 달까지는 일하라고 말하잖아요.(웃음) 워낙 대기업 중심 사회다보니, 그곳에서 나가 자리 잡는 것도 대단히 어렵구요. 중소기업을 차렸더라도, 살아남기가 쉽지 않겠지요.

이현우 : 기업 사회라는 용어도 있지요. 자본주의의 속성상 어쩔 수 없겠지만, 한국 사회가 어느 순간부터 기업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기업 바깥에 사는 게 어려워졌어요. 바깥이 지옥이니까, 어떻게든 기업 내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아까 나온 쌍용차 분향소에 가는 에피소드가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기업 사회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바깥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아쉽습니다. 미생, 즉 생존 자체가 지상과제이며 '바깥은 없다'라는 구도 자체를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게 놀라운 겁니다.

이권우 : 자영업자들이 잠깐씩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의 실패가 좀 더 철저하게 그려졌다면 이들이 조직에 연연하게 되는 이유가 더 잘 설명될 텐데 말이죠.

이현우 : 외부가 차단되어 있으니까 직장 생활에 대한 성찰적 거리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거기서 살아남느냐, 탈락하느냐의 구도만이 지배하게 돼요. <미생>이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는 그 전제에 대한 불만인 건데요, <미생>이 그 부분까지 다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권우 : 윤태호 작가가 <미생> 시즌 2에서 '장그래, 설국 열차를 타다'를 그릴 수도 있지요.(웃음)

이현우 : 기업 사회를 비판적으로 다룬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기업을 아이스하키에 비유합니다. 그야말로 전쟁터에요. 아이스하키에는 반칙이 허용되는데, 반칙을 저지르면 몇 분간 퇴장당하는 페널티가 주어져요. 그 다음 다시 나올 수 있으니까, 경기 내에서 반칙이 권장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아이스하키 링크 바깥은 다른 세계잖아요. 거기엔 다른 규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거죠. 제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건, 직장 내 문화가 바깥 세상으로까지 확산되는 그 상황 자체입니다. 하버마스를 흉내내자면 '생활세계의 기업화'라고 해야 하나, 아까 주인공들에게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주인공들의 사생활은 '준비'로만 보여줍니다. 출근 준비.

김용언 : 엑셀을 배우라는 말을 듣자마자 컴퓨터 학원을 끊고, 외국어가 필요하다고 하면 바로 영어학원을 끊지요. 물론 직장 생활에 필요한 스킬을 습득하는 건 직원의 당연한 의무지만 그 끊임없는 연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좀 힘들더라고요.

이현우 : 기업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 대한 비판 의식이 없다면, 직장인들의 애환을 위무하는 데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

김용언 : 원 인터내셔널이 닫힌 생태계인데, 그 생태계가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죠.

이권우 : 시즌 1이 그 닫힌 생태계의 생리를 보여줬다면, 시즌 2는 아마 '지옥에서 살아남기'가 되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

 

13. 09. 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주간경향(104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주간경향에 싣는 마지막 리뷰다). 최근에 나온 미야자키 하야오의 <책으로 가는 문>(현암사, 2013)을 서평감으로 골랐는데,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해선 신작 영화도 개봉되고 해서 관련 인터뷰가 많이 올라오고 있다. 여름에 나온 <미야자기 하야오: 출발점> <반환점>도 가을에 시간을 내어 읽어보려고 한다...

 

 

 

주간경향(13. 09. 10) 책 한 권을 잘 만나면 어린이 인생이 바뀐다

 

오랜만에 어린이 책을 손에 들었다. 전에 읽은 책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책으로 가는 문>(현암사).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건 아니어서 개인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해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TV만화 <미래소년 코난>을 보고 자란 세대이니만큼 빚이 없는 건 아니다. 게다가 ‘거장’이 고른 어린이 책 목록에 대한 관심도 이 얇은 책에 대한 독서를 부추겼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린이 책에 관한 책’이다. 이와나미 소년문고 400여권 가운데 50권을 골라서 추천사를 쓰고 미야자키 자신의 어린 시절 독서경험 등을 덧붙였다. ‘이와나미 소년문고’는 1950년에 창간됐다고 하는데, 일본의 대표적 아동문학 총서인 듯싶다. 1941년생인 미야자키도 1950년대 언제쯤 이와나미 문고를 읽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책을 아주 많이 읽은 건 아니라고 한다. 어린이문학과의 본격적인 만남은 대학에 가서 이루어진다. 만화연구회에 들고 싶었지만 그런 게 없어서 들어간 동아리가 어린이문학연구회였다. 그는 거기서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로 책을 읽는다. 당시엔 교양에 대한 강박관념이 아직 남아 있어서 ‘이 정도는 읽어야 한다’는 책 목록이 죽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너무 어렵고 난해한 책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생하다가 자신의 기질에는 어린이문학이 맞는다는 걸 비로소 발견한다.

미야자키가 생각하는 어린이문학의 의미란 무엇인가. 흥미로운 정의를 내리는데, 그에 따르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라고 인간에 대해 엄격하고 비판적인 문학과는 달리 어린이문학은 “살아 있어 다행이다. 살아도 된다”는 응원을 보내는 문학이다. 그 밑바탕에 있는 태도는 ‘다시 해볼 수 있다’는 긍정이다. “아이들에게 절망을 말하지 마라”는 뜻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평소에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일지라도 눈앞에 아이들을 두고서 ‘너희들이 태어난 건 다 쓸데없는 일이야’라는 식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즉 경계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주위에 없으면 그런 마음을 금방 잊어버리지만, 제 경우는 이웃에 보육원이 있으므로 내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거장다운 유머다.

어린이란 어떤 존재인가. 미야자키가 보기에는 무엇보다도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다. “때가 올 때까지 아이는 제대로 부모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합니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곧 부모를 불신하고 서둘러 성장하는 것보다는 의존하는 게 더 낫다. 인생수업을 거쳐서 어른으로의 성장과 자립을 중요시하는 독일식 교양소설과 어린이문학은 그래서 다르다. 의존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이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까지 미야자키는 단언한다. 그가 보기에 아이는 현명해지는 만큼 또 몇 번이고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으며, 아이에게는 거듭 바보 같은 짓을 할 권리가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를 구성하는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책에 관한 책’이니만큼 저자의 독서론도 눈여겨볼 만한데, 일단 미야자키는 책을 아무리 놓아두어도 아이들은 읽지 않는다고 한다. 책을 주변에 쌓아두면 자연스레 아이의 손이 갈 거라는 기대는 순진하다는 게 그의 경험담이다(많은 부모가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뭔가 거장다운 비책을 기대한 독자라면 좀 맥 빠진 답변이지만 미야자키는 책을 읽는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말한다. 무슨 효과 때문에 책을 읽히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더 없이 중요한 건 ‘역시 이것’이라고 할 만큼 아주 소중한 의미를 갖는 책 한 권을 만나는 일이라고. 그렇게 만난 책 한 권이 아이들의 인생을 바꾸게 될 것이다. 그가 추천한 50권의 어린이 책은 그 후보도서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할까. 우리 아이들의 책장에 그런 책이 꽂혀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13. 09. 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시사IN(31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의 <모든 것은 빛난다>(사월의책, 2013)를 읽고 적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단테의 <신곡>과 허먼 멜빌의 <모비딕>까지 3000년에 이르는 서양 고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되돌아보게 해주는 '올해의 책' 가운데 하나다. 리뷰에서는 풍부한 책의 내용 가운데 일부만 짚었다...

 

 

 

시사IN(13. 09. 07) 신들을 다시 만나는 방법

 

벌써 오래 전 영화이지만 쿠엔틴 타란티노의 걸작 <펄프픽션>(1994)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조직원인 줄(새뮤얼 잭슨)과 빈센트(존 트래볼타)는 두목의 가방을 빼돌린 자들을 찾아가 응징하는데, 화장실에 숨어있던 한명을 놓친다. 무방비 상태인 둘에게 그가 은빛 매그넘 권총을 겨누고 여섯 발을 연달아 쏜다. 놀랍게도 줄과 빈센트는 한발도 맞지 않는다. 그를 마저 처치하고 난 줄은 이 사건에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빈센트는 기막힌 행운이었다고 말하지만 줄이 보기엔 신이 개입한 기적이다. 당신이 보기에는 어떤가. 행운인가, 아니면 기적인가.

 

 

<모든 것은 빛난다>의 공저자인 두 철학교수의 말대로, “이 세속의 시대에는 아마도 빈센트의 태도가 더 표준적라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탈형이상학의 시대를 살고 있기에 그런 상황에서 경이나 감사의 감정에 압도되지 않는다. 기적을 목격했다고 믿은 줄은 조직에서 은퇴하지만 단지 요행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한 빈센트는 이후에도 두목의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다. 타란티노의 블랙유머가 빛을 발하는 이 이야기를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자들은 정색하고서 진지한 철학적 성찰 거리로 삼는다. 총알이 빗나간 게 신의 개입이라고 보는 줄의 관점을 호메로스의 세계와의 연관 속에서 조명한다.


그리스인들의 인간 이해에서 핵심은 삶에서의 탁월성이었다. 그런데 이 ‘탁월함’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레테’는 나중에 미덕(virtue)으로 번역됐지만 겸손이나 사랑 같은 기독교적 개념이나 의무의 준수 같은 스토아적 이상과 무관하다. 그것은 신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감사와 경외의 느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인간들은 누구나 신들을 필요로 하니까요”라는 게 그들의 세계관이었다. 즉 인간의 탁월한 성취를 그들은 인간의 공이 아니라 신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보았다. 심지어 호메로스는 잠든다는 것조차도 우리가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성스러운 행위로 간주했다. 한마디로 경이와 감사로 가득 찬 세계다.


하지만 니체의 말대로 “우리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은 어떤가. 저자들은 계몽주의가 형이상학적 개인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서양사의 가장 극적인 전환이라고 말한다. 결과는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모든 일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자율적인 개인을 이상으로 내세우면서 우리는 우주에서 유일한 행동 주체가 됐다. 인간이 자기 실존의 핵심을 통제하기에 불충분한 존재로 파악한 호메로스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관점이다.


저자들은 칸트의 자율적 인간이란 이념의 자연스런 귀결이 니체의 허무주의라고 본다. 이것은 일종의 막다른 골목이다.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모든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닫혀 있기 때문이다. 가령 1999년 뉴욕 양키스의 2루수 척 노블락은 1루 송구에도 애를 먹으며 관중석으로 공을 던지기까지 했다. 호메로스라면 신들의 간섭이라고 불렀을 일이지만 우리는 개인의 책임으로만 귀속시킨다. 모든 게 그런 식으로 설명되면서 우리는 무거운 선택의 짐만 짊어진 채 경탄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단조롭고 지루한 세계에 살게 됐다. 어떤 출구가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신들이 우리를 버린 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발로 걷어찬 것”이라는 점. 왜 우리는 신들을 버렸고 어떻게 다시 조우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면 <모든 것은 빛난다>는 우리가 드물게 만날 수 있는 기적을 보여줄 것이다.

 

13. 09. 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카뮈의 <전락>에 대해 적었는데, 이로써 카뮈의 주요작에 대해서 한번씩 다룬 듯하다. <전락>은 <이방인>이나 <페스트>와 비교해선 번역본이 많지 않다. 내가 읽은 건 창비판, 책세상판, 범우사판, 3종이다. 읽은 순서는 역순이다...

 

 

 

한겨레(13. 09. 02) 고해하는 재판관 클라망스의 회한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 가운데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고등학생 때 읽은 <이방인>이나 <페스트>가 아니라 대학생 때 읽은 <전락>(1956)이다. 아마도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당시엔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나와 있었다)를 읽은 뒤여서 더 흥미로웠는지 모른다. 두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같이 떠올리지 않는다는 게 불가능할 만큼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화자의 장광설로 채워진 형식을 비교해보더라도 그렇다.

 

도스토옙스키의 영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악령>의 각색가였던 카뮈는 무대에 올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이반 카라마조프 역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사상적으로 이반의 대척점에 놓이는 조시마 장로가 죽기 전에 남긴 설교의 한 대목. “당신은 어떤 사람의 심판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심판자 자신이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며, 아니 자기야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그 범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는 아무도 죄인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그는 비로소 심판자가 될 수 있다.” 요는 자신이 죄인임을 먼저 인정할 때 심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전락>의 주인공 클라망스가 자처한 형상 아닌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술집에서 자신을 ‘고해(告解) 판사’(범우사), ‘재판관 겸 참회자’(책세상), ‘속죄판사’(창비)라고 소개하는 클라망스는 원래 파리의 유능한 변호사였다. 육체를 향유하도록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그는 항상 정상에 오르고자 하는 성향을 지녔으며 약간은 초인이 된 듯한 기분으로 우쭐대며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우월감은 성격의 기본 옵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센강의 한 다리를 건너던 중에 그는 등 뒤에서 웃음소리를 듣는다. 깜짝 놀라 돌아보지만 아무도 없다. 환청을 들은 것이다. 대개 그렇듯이 그의 환청은 그가 억압한 기억과 관련이 있었다. 그날 저녁보다 2~3년 전에 그는 센강의 또다른 다리를 건너던 중 다리 난간에 허리를 굽히고 있던 젊은 여자를 본다. 외면하고 계속 가지만 아니나 다를까 물에 첨벙하고 뛰어든 소리가 들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비명이 잦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라고 자위해볼 따름이었다.

 

그렇게 상기하게 된 사건은 그에게 오점, 곧 제거할 수 없는 얼룩이자 상처가 된다. 이 상처는 그의 표식이 돼 사람들이 곧 그를 심판대에 올려세우고 마치 식인어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을지 모를 일이었다. 인간은 모두가 재판관이고 남의 눈에는 죄인이기에 그렇다. 더는 ‘재판관’(판사)의 지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클라망스는 방책을 고안해낸다. 그건 남들보다 먼저 자신을 심판대에 올려 단죄하는 것, 곧 자발적 속죄자, 참회자가 되는 것이었다. 타인의 심판을 벗어나기 위한 교묘한 선택이라고 할까.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었지만 수년 동안 억눌러 왔던 말을 털어놓는다. “오, 아가씨, 이번에는 내가 우리 둘을 모두 다 구원할 수 있도록 한 번 더 몸을 내던져주십시오!” 물론 이건 클라망스의 회한이자 유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기회가 종종 주어지는 듯하다. 혹은 억지로 기회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13. 09. 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