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프레시안 books'에 실린 '3인 1책 수다'를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906183704§ion=03 참조). 화제의 만화, 윤태호의 <미생>(위즈덤하우스, 2012-13)을 읽고 좌담을 나눴다. 아직 읽지 못했지만 <미생>은 9권으로 완결되었다(나는 7권까지 읽었다). 마저 읽어볼 참이다...

 

  

 

프레시안(13. 09. 06) '설국열차' 남궁민수는 알고 '미생' 장그래는 몰랐던 것?

 

(...)

 

김용언 : 전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갈등이 튀어나올 때마다 굉장히 공감하면서 읽다가도 언뜻언뜻 '아 이건 픽션이지'라고 거리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어요. 영업3팀 같은 경우 팀원들의 사생활을 절대 안 보여줘요. 정확하게는 사생활이 없지요. 다른 팀의 사원들 같은 경우 근무 중 트위터를 한다든가 애인과 통화하며 영화 약속을 잡는 장면이 조금 부정적으로 다뤄지잖아요. 장그래가 "난 그런 거 할 시간 없는데"라고 한 마디를 던진다든가. 그럴 때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게 되더라고요. (웃음) 사실 그처럼 짬짬이 딴 짓하고 한숨 돌리는 게 직장생활의 일상인데, 장그래 이 녀석은 왜 딴죽을 거는 거지! 하면서요.

물론 영업3팀의 특성상 늘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야 하고 심지어 '리세터'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매우 바쁩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그렇게 지나치게 과로하면서 사생활을 가질 자유도 없는 삶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잖아요. 왜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 앞에서, <미생>은 사실 침묵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며 그 모든 과정에 성심을 다해 내 시간을 바친다는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그걸 당연시하는 어조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있었습니다.

 

 


이권우 : 또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로는 여성 직원인 선차장이 있지요. 맞벌이 부부 중 아내가 느낄 수밖에 없는 고충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요. 퇴근 후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순번을 정하는 것 때문에 남편과 다투고, 남편이 승진하면서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하다'며 선차장의 퇴직을 요구하는 부분들이요. 직장 생활의 가장 내밀한 고충을 솔직하게 묘사하지요. 윤태호 작가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작가로 유명한데, <미생>에서도 직장 여성에 대한 시선이 굉장히 긍정적이고 우호적입니다. 안영이나 선차장도 그렇고, 재무팀의 깐깐한 여성 부장님도 그렇고요.

 

<미생>의 만화적 특성에 대해서도 첨언하고 싶어요. 사실 만화에서 사람 얼굴을 그리는 게 아주 어려워요. 다른 유명 작가들의 만화를 보면 얼굴의 현실감이 별로 안 느껴지지만, 윤태호 작가의 만화에선 정말 사람 같거든요. 예를 들어 미국에서 온 스티브 부장 같은 경우, '프레시안 books'에도 글을 자주 쓰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의 이정모 관장이 모델인데, 보면 딱 알아볼 수 있어요.(웃음)

또 장면 묘사도 남다릅니다. 옛날 만화는 공간이 평면적인데, 여기선 카메라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입체적으로 묘사하지요. 만화가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은 단연 IT 영업팀 박 대리 부분입니다. 2권 37쪽에서 박대리 등에 날개가 돋는 장면은 압도적이죠. 소설 같았으면 이런 결정적 순간에 온갖 수사학을 동원했어야 할 텐데, 만화에서는 박 대리의 심리적 변화를 묘사할 때 이런 날개를 묘사하는 것만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남깁니다. 그렇게 곳곳에 뛰어난 만화적 기법이 돌출되기 때문에 독자들을 강하게 매료시키는 측면이 있어요. 다만 개인적인 불만이라면, 의성어를 너무 많이 쓴 게 아닌가 싶어요. 예능 프로 자막을 보는 느낌이 들거든요. '저벅저벅'하는 발소리는 지나치게 자주 나와요.

 



김용언 : 전 그런 발소리 자체는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큰 사무실에선 소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요. 사장님 어디 가냐, 옆 팀에서 뭐하냐 하는 정보들이 그런 소리들로 전달되니까요. '큰 인물'의 등장이라든가 어떤 사건 발생의 전조쯤으로 의성어를 강조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임원급 쯤 되면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지요. 오히려 위압감을 주기 위해서라도 발소리나 말소리를 크게 내는 편입니다. 안영이의 경우, 또각또각 소리 나는 구두를 신고 다니다가 상사한테 꾸중을 듣고 바로 단화로 바꿔 신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전 2권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인턴 P.T 시험에 합격한 후배들에게 오차장이 검은 넥타이를 사준 다음, 시청 앞 쌍용차 해고자 복직 투쟁 텐트로 데려가 해고자의 영정 앞에서 인사를 시킵니다. 아주 뜻밖의 전개였고 그만큼 인상적이며 그 안에 담긴 의미도 분명하지요.

"근로자로 산다는 것. 버틴다는 것.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아가는 것…."

하지만 이 부분에서의 생경함 자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현우 : 작가적 개입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인데, 이후에 이 해고자들과 연관되는 장면도 없으니 상당히 이례적이긴 하죠. 전 <미생>을 보면서 상사맨들의 일상과 함께 상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처음 알았어요. (웃음) 동창 중에 상사에 다니는 친구들도 잘 못 만나거든요. 이젠 생각도 관점도 사용하는 용어도 다르니까 대화 자체가 힘들어지죠.

김용언 : 장그래가 무역 용어를 못 알아듣고 힘들어하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이현우 : 이게 직장인 독자들에게 어필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세계가 있는 거지요. 자신들만 이해할 수 있는 애로사항이 존재하는, 바깥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문턱이 존재하는 고유한 영역이요. '우리는 팀원, 같이 살고 같이 죽는다'는 팀워크의 정서가 존재하는 영역. 그걸 <미생>이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아쉬운 점은, 한 번도 원 인터내셔널 바깥의 시선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시즌 2가 예고되었다고 하니 좀 성급한 의문일 수 있는데, 원 인터내셔널이 유일한 삶의 조건처럼 설정되어 있어요. 퇴사한 오차장의 선배들이 그러잖아요. 회사는 전쟁터지만 바깥은 지옥이라고, 회사 나올 생각 하지 말라고. 그 대사가 직장인들의 무의식을 건드린다고 생각하는데, 한편으론 그게 위험한 인식의 공유이기도 합니다.

이권우 : 오차장이 퇴사 결심할 때 바로 현실이 튀어나오죠. 지금껏 회사를 통해 아파트 융자금을 저리로 처리할 수 있는데 이제 높은 이자의 융자금 계정으로 바꿔야 합니다. 결국 부인이 직원가로 살 수 있는 가전 제품을 전부 사라고, 보너스 받는 다다음 달까지는 일하라고 말하잖아요.(웃음) 워낙 대기업 중심 사회다보니, 그곳에서 나가 자리 잡는 것도 대단히 어렵구요. 중소기업을 차렸더라도, 살아남기가 쉽지 않겠지요.

이현우 : 기업 사회라는 용어도 있지요. 자본주의의 속성상 어쩔 수 없겠지만, 한국 사회가 어느 순간부터 기업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기업 바깥에 사는 게 어려워졌어요. 바깥이 지옥이니까, 어떻게든 기업 내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아까 나온 쌍용차 분향소에 가는 에피소드가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기업 사회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바깥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아쉽습니다. 미생, 즉 생존 자체가 지상과제이며 '바깥은 없다'라는 구도 자체를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게 놀라운 겁니다.

이권우 : 자영업자들이 잠깐씩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의 실패가 좀 더 철저하게 그려졌다면 이들이 조직에 연연하게 되는 이유가 더 잘 설명될 텐데 말이죠.

이현우 : 외부가 차단되어 있으니까 직장 생활에 대한 성찰적 거리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거기서 살아남느냐, 탈락하느냐의 구도만이 지배하게 돼요. <미생>이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는 그 전제에 대한 불만인 건데요, <미생>이 그 부분까지 다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권우 : 윤태호 작가가 <미생> 시즌 2에서 '장그래, 설국 열차를 타다'를 그릴 수도 있지요.(웃음)

이현우 : 기업 사회를 비판적으로 다룬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기업을 아이스하키에 비유합니다. 그야말로 전쟁터에요. 아이스하키에는 반칙이 허용되는데, 반칙을 저지르면 몇 분간 퇴장당하는 페널티가 주어져요. 그 다음 다시 나올 수 있으니까, 경기 내에서 반칙이 권장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아이스하키 링크 바깥은 다른 세계잖아요. 거기엔 다른 규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거죠. 제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건, 직장 내 문화가 바깥 세상으로까지 확산되는 그 상황 자체입니다. 하버마스를 흉내내자면 '생활세계의 기업화'라고 해야 하나, 아까 주인공들에게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주인공들의 사생활은 '준비'로만 보여줍니다. 출근 준비.

김용언 : 엑셀을 배우라는 말을 듣자마자 컴퓨터 학원을 끊고, 외국어가 필요하다고 하면 바로 영어학원을 끊지요. 물론 직장 생활에 필요한 스킬을 습득하는 건 직원의 당연한 의무지만 그 끊임없는 연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좀 힘들더라고요.

이현우 : 기업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 대한 비판 의식이 없다면, 직장인들의 애환을 위무하는 데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

김용언 : 원 인터내셔널이 닫힌 생태계인데, 그 생태계가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죠.

이권우 : 시즌 1이 그 닫힌 생태계의 생리를 보여줬다면, 시즌 2는 아마 '지옥에서 살아남기'가 되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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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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