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베를린의 아침, 마지막 아침이다. 오후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기에. 마지막 일거리로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바르가스 요사의 <새엄마 찬양>(문학동네, 2010)을 다룬 것으로 출국일 아침에 써보낸 원고였다. 시간이 나면 공항 구내서점에서 요사의 작품도 있나 찾아봐야겠다...

 

 

한겨레(14. 08. 18) “오르가슴이 뭐예요, 아빠?”

 

“생일 축하해요, 새엄마! 돈이 없어서 선물은 준비 못 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꼭 일등 할게요. 그게 내 선물이 될 거예요.” 마흔 번째 생일날 루크레시아는 침대맡에서 의붓아들 알폰소가 손으로 조심스레 눌러쓴 편지를 발견하고 감동한다. 남편 리고베르토의 어린 아들이 재혼에 장애가 될 거라고 염려했던 터라 기쁨은 두 배다. ‘내가 이겼어. 저 아이는 이제 날 사랑하고 있어.’ 남미의 대표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새엄마 찬양>은 그렇게 시작한다. 어떤 결말을 예상할 수 있을까?

 

요사는 매우 짓궂은 결말을 선택한다. 알폰소의 ‘찬양’이 비난으로 바뀐 건 아니다. 다만 너무 에로틱한 찬양이란 게 문제다. 결말에 이르러 알폰소는 못된 개구쟁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새엄마에게 들은 말의 의미를 아버지한테 묻는다. “아주 근사한 오르가슴을 느꼈다”는 말이다. 리고베르토의 손에서 위스키 잔이 떨어진 건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그는 아이가 이야기를 꾸며댄다고 의심하지만 알폰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아이다. 이를 입증하려는 듯이 작문 과제로 쓴 글을 보여준다. ‘새엄마 찬양’이 제목이고, 알폰소는 새엄마 루크레시아와의 에로틱한 관계를 모두 적어놓았다. 아들의 글을 읽은 리고베르토는 행복에 대한 모든 환상이 비누 거품처럼 한순간에 꺼져버리는 걸 느낀다.

 

리고베르토는 어떤 환상을 가졌던가. 보험회사 관리자인 그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 사는 중산층 가장이다. ‘평범한 무명인’의 삶을 사는 듯이 보이지만 그에겐 비밀이 있었다. 남들과 다르게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는 비밀이다. 그는 밤마다 루크레시아와 최고의 쾌락을 맛보았으니 그 행복감에는 근거가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몸을 철저하게 미학적으로 통제했다. 밤마다 완벽한 배변을 통해서 육체를 정화하고, 요일마다 신체의 한 부위를 정해서 세심하고 철저하게 닦아내는 의식을 치렀다. “각 기관과 부위에 하루씩 공을 들임으로써 그는 신체를 전체적으로 보살피는 데 있어 완전한 공평성을 보장했다.” 그의 말로는 ‘공평한 사회’라는 불가능성을 현실화한 게 그의 몸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리고베르토도 세상을 바꾸고 싶어했다. 하지만 모든 집단적 이상은 불가능한 꿈이며 언제나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 패배로 끝날 전쟁에 나서는 건 시간 낭비이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대신에 그는 제한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그런 이상이 실현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에로티시즘의 실천과 함께 몸을 닦는 세정식이나 야간 배변 등을 통해서 그는 매일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완벽함에 이르고자 한다. 침대가 그의 왕국이었으며 아내의 팔과 다리 사이에서 그는 군주처럼 군림했다. 심지어 자신을 신이라고까지 생각한다. 리고베르토의 환상은 그렇게 충족되는 듯 보였다. 그의 아들이 “오르가슴이 뭐예요, 아빠?”라고 질문하기 전까지는.

 

아들 알폰소의 ‘새엄마 찬양’ 이후에 리고베르토의 행복은 무너진다. 그는 자신의 여신이자 왕비였던 루크레시아를 내쫓았고 신심이 독실한 체하는 위선자로 급속하게 늙어간다.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알폰소를 하녀는 비난하지만, 알폰소는 ‘마치 더할 나위 없는 즐거운 장난을 하는 것처럼’ 진정한 기쁨으로 가득한 웃음을 짓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난다. 중산층 부르주아에 대한 짓궂은 풍자를 끝내면서 바르가스 요사가 지었을 법한 웃음이다.

 

14. 08. 18.

 

 

P.S. 바르가스 요사는 리고베르토 집안의 이야기를 몇편 더 썼다.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새물결, 2004)와 <나쁜 소녀의 짓궂음>(문학동네, 2011) 등이 '리고베르토 사이클'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새엄마 찬양>을 읽어본 독자라면 손에 들지 않을 수 없는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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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뉴스레터 독서인에 실은 '독서카페' 칼럼을 옮겨놓는다. 토니 주트의 <재평가>(열린책들, 2014)를 다루면서, 특히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한 회고와 성찰에 초점을 맞추었다.

 

 

독서인(14년 8월) 재평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어려운 문제이지만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열린책들)에서 주인공 유리 지바고는 아주 간명하게 답한다. 병환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안나 이바노브나에게 그가 건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인간,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자 영혼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당신이며 당신의 의식은 한평생 그것을 호흡하고 자기의 양식으로 삼으며 기쁨으로 삼아 온 것입니다.”


지바고에 따르면 우리의 영혼과 불멸은 모두 타인 속에 존재한다. 흔히 말하는 추억이든 뭐든지 간에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이 타인들에게 계속 존재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그러니 죽음이란 없으며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게 지바고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생각이기도 했다. 소설에서 지바고는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 격동의 시간을 살다가 모스크바의 거리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지만, 그의 삶이 그걸로 종결되는 건 아니다. 이를 입증하려는 듯이 파스테르나크는 지바고가 남긴 시들은 작품의 마지막 장에 배치했다. 그 시들이 지바고의 ‘사후의 삶’이다. 그는 시를 통해서 기억되고, 그 기억이 남아 있는 한 불멸의 삶을 누린다. 


그러한 불멸이 비단 시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모든 저자는 그들의 책이 계속 읽히는 한 망각에서 불려나와 불멸의 삶을 사는 게 아닐까. 이를테면 지난 2010년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난 역사학자 토니 주트도 그러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 현대사를 다룬 <포스트워>(플래닛)로 명성을 얻은 주트는 명망 있는 정치평론가이기도 했는데, 최근에 번역된 <재평가>(열린책들)는 그의 두 직함이 어떤 상승효과를 낳을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무엇을 재평가하고자 하는가. ‘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이란 부제가 그의 의도를 집약해준다.

 


1994년에서 2006년까지 잡지나 신문들에 쓴 평론 모음집에서 주트는 두 가지 주제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하나는 사상의 역할과 지식인의 책임이고(이 주제는 그가 <지식인의 책임>(오월의봄)에서 따로 다루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지나간 20세기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이다. 역사 또한 지속적으로 소환되고 기억되는 한 우리 곁에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반대로 역사의 망각이란 곧 죽음과 다를 바 없다. 망각된 역사는 역사의 죽음뿐 아니라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시대의 죽음을 뜻한다.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시대란 죽음의 시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토니 주트의 묵직하면서도 매력적인 성찰들 가운데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회고와 재평가다. 근래에 이 사건과 관련된 책들이 여럿 소개되면서 부쩍 관심을 갖게 된 때문이다. 가령 그래엄 엘리슨과 필립 젤리코는 국제정치학의 교과서 가운데 하나인 <결정의 엣센스>(모음북스)에서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사태를 20세기 후반 인류가 겪은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평가하고 비밀 해제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고 미‧소 양국의 정책 결정과정을 모델화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또 당시 미 대통령 J.K. 케네디의 동생이자 핵심 측근이었던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의 <13일>(열린책들)은 긴박하게 진행됐던 위기 상황에 대한 현장 증언과 회고를 담고 있으며, 역사학자로서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엑스콤)의 회의 녹취 테이프를 처음 청취한 셀던 스턴의 <존 F. 케네디의 13일>(모던타임스)은 회의 전체 내용을 압축하여 미국 측의 의사결정 과정을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한 책이다. 그리고 제임스 블라이트와 재닛 랭이 엮은 <아마겟돈 레터>(시그마북스)는 미사일 위기 사태의 주요 당사자이자 결정권자인 니키타 흐루쇼프와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케네디 등이 서로 주고받은 43통의 편지를 시간 순서에 따라 소개하고 있다. 거기에다 문제의 사태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와 분석을 담은 학술적 연구서로서 이근욱 교수의 <쿠바 미사일 위기>(서강대출판부)도 보탤 수 있다. 


사태의 발단은 무엇이었나. 1962년 10월 14일 미국의 U-2 정찰기가 쿠바 서부 상공을 비행하다가 건설 중인 미사일 기지 세 곳을 포착한다. 소련이 쿠바에 준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배치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실이 10월 16일 아침에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된다. 미사일 위기 사태의 시작이다.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엑스콤이 소집되었고 결국 22일 저녁 7시에 쿠바 주변 해상에 대한 봉쇄가 결정된다. 특이한 것은 쿠바 내 미사일 배치와 증강 계획이 발각될 가능성에 대비책을 흐루쇼프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인데, 준비가 없기로는 케네디 쪽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사전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미사일 발사기지의 성격과 위험 정도, 그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대응책 등을 긴급하게 결정해야 했다.


케네디의 최종 선택은 부분적인 해상 봉쇄였지만 회의에서는 더 포괄적인 봉쇄, 쿠바 미사일 발사기지 공습, 전면적인 군사적 침공 등 훨씬 더 강경한 대응책들이 제안되었다. 사실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하자 미국은 소련의 대륙간 탄도탄 발사 능력을 과장되게 염려하였고 케네디는 1960년 대선에서 이러한 두려움을 활용했었다. 하지만 쿠바 위기 시점에서 소련은 대륙간 탄도탄 미사일에서 17대 1로 불리한 상태였고 흐루쇼프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흐루쇼프의 목적은 이러한 군사적 결점을 상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새로운 우방 쿠바를 미국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미국은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카스트로를 제거하기 위한 온갖 공작을 짜내고 있었고 흐루쇼프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쿠바 내 소련 미사일 기지 건설이라는 발상의 배경이다.

 


미사일 사태 국면에서 흐루쇼프와 케네디는 모두 핵전쟁을 각오할 생각이 없었지만 둘다 그 반대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소련은 포커 게임에서 나쁜 패를 쥐고서도 허세를 부리는 것과 비슷한 처지였는데, 흐루쇼프는 그래도 막판에 판돈을 더 올리고픈 유혹을 억눌렀다. 케네디도 대외적으로 강하게 보이려는 욕구를 갖고 있었지만 중대한 위기 국면에서 놀라운 침착함을 유지하며 가장 온건한 방안을 선택했다. 즉각적인 군사 행동에 앞서 부분적인 해상 봉쇄를 선택한 것이다. 케네디는 비타협적인 선택을 하면서 소련에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미지를 남기고자 했지만 실상 마지막까지도 협상을 모색하면서 직접적인 군사 개입은 거듭 연기하고자 했다. 정작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게 해준 것은 그의 인내와 절제였고 대결보다는 협상을 일관되게 우선시했던 태도였다.


냉전 시대의 가장 큰 위기 국면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었던가에 대한 생생한 자료와 분석은 오늘날의 국제정치적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용한 참고가 된다. 더불어, 시인이 시를 통해서 기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인은 그의 판단과 행동을 통해서 기억된다는 사실 또한 토니 주트의 성찰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14. 08. 08.

 

 

P.S. <재평가>는 반가운 책이지만(<20세기를 생각한다>도 나옴직하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한 장을 읽다 보니 교정이 부실한 듯해 아쉽다. 419쪽, "케네디가 10월 9일에 이렇게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에서 케네디가 말한 날짜는 10월 9일이 아니라 10월 19일이다. "사흘 뒤 위기가 시작되었을 때"라고 나가는 문장에서는 '사흘 뒤'가 아니라 '사흘 전'(Three days earlier)이 맞다. "사흘 전 위기가 시작되었을 때"다(즉 10월 16일을 가리킨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10월 16일에서 28일까지 13일간 벌어졌던 일이다. 역자나 편집자가 기본적인 사실도 확인하지 않은 게 아닌가 싶다. 425쪽, "소련은 10월 17일 쿠바 상공을 정찰하던 U-2기 한대를 '무심결에' 격추시켰다."에서도 미국 정찰기가 격추된 날짜는 10월 17일이 아니라 27일이다. 이런 사소한 실수들로 책에 대한 신뢰를 깎아먹는 건 피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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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30호)에 실은 '키워드로 읽는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있어서 '교황'으로 잡았다. 이미 교황 관련서는 수십 종이 나와 있는 성싶은데, 몇 권만 추려서 볼 수밖에 없었다. '교황의 역사'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었지만 분량상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과 생각에 관해서만 적었다(교황의 이름은 베를골료, 베르골리오, 베르고글리오가 통일되지 않은 채 혼용되고 있다).  

 

 

책&(14년 8월호)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황의 여정

 

8월 방한을 앞두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뜨겁다. 지난해 3월 제266대 교황으로 취임한 이래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선도하고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과 복음의 회복을 강조함으로써 불과 1년 만에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에 미국 ‘타임’지는 교황을 ‘2013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무엇이 전 세계 12억 가톨릭신자뿐 아니라 타종교인과 비종교인에게까지 새 교황에 대한 관심과 존경을 불러 모으게 하는가. 몇 권의 책을 통해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과 생각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교황의 삶을 들여다 보는 데 기본서가 될 만한 책으로 위르겐 에어바허의 <프란치스코 교황>(가톨릭출판사)을 꼽을 수 있다. 독일 출신의 바티칸 전문기자가 쓴 책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출과정과 성직자로서의 여정, 그리고 교회 개혁에 대한 그의 생각과 가톨릭교회 내부의 평가 등을 담고 있다. 모든 일은 2013년 3월 13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이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고 공표됨으로써 시작되었다(한국천주교회에서는 ‘베르골리오’ 대신에 ‘베르골료’라는 표기를 권장하지만, 출간된 다수의 책에서 베르골리오라고 표기하고 있기에 그에 따른다).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사임하면서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선출되었다는 전언이었다.

 

 

베르골리오는 선임 교황들이 선택하지 않은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선택했는데, 이로써 몇 가지 기록을 세우게 된다. 즉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선택한 최초의 교황이며 최초의 남미 출신 교황이고 최초의 예수회 소속 교황이다.


호르헤 베르골리오는 19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이탈리아 피에몬테 출신으로 세계 대공황이 닥치자 당시 유럽과 달리 경제 호황을 누리던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왔다. 평범하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성장한 호르헤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3살이 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양말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17살에 공업학교에 진학해서는 제약공장에서 일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1시까지 공장에서 일한 다음에 한 시간 동안 점심을 먹고 저녁 8시까지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다. 추기경이 된 뒤 그는 이 시기의 노동 경험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제게 일을 시키셨던 아버지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을 하면서, 인간의 선한 모습뿐만 아니라 잔인하고 악한 모습도 직접 체험할 수 있었으니까요.”


십대 시절 공장에서 일하며 다니던 성당에서 젊은 사제를 만나 영적인 체험을 한 호르헤는 스무 살이 되자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1958년 예수회에 입회한다. 예수회 입회자로서 수련기를 거치는 동안 그는 인문학 전반에 대한 기초를 다졌고 대학에서 문학과 심리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횔덜린의 시를 좋아했고 보르헤스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도 정통했다. 단테의 <신곡>과 알렉산드로 만초니의 <약혼자들>이 그가 특히 아끼는 작품이며 톨킨의 <반지의 제왕>도 관심을 갖고 읽었다. 예수회 신부로 사목하던 베르골리오는 1992년 주교로 서품되고, 2001년 2월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된다.


바티칸에서 열린 서임식에 많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직접 참석하려고 했지만 그는 서임식 참석 비용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도록 직접 서신까지 썼다. 서임식 예복도 전임 추기경이 입던 옷을 자신의 치수에 맞게 고쳐 입으려고 했을 정도로 그는 청빈하고 소탈했다. 그의 검소함은 교황이 된 이후에도 이어져서 여전히 은으로 된 주교 십자가를 걸고 다니며 고향의 작은 구둣방에서 맞춘 검은 구두를 신는다고 한다. 교황의 이러한 인품은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에도 새겨져 있다. 교황에 따르면,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는 “청빈과 평화의 수도자이자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여 보호하신 분”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계승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문제와 복음 전파에 큰 관심을 쏟는다. 아르헨티나 현대 정치사의 굴곡을 몸으로 겪은 그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곳에서 인간이 얼마나 큰 고통에 빠질 수 있는지,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큰 위협에 처할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교황이기도 하다.  

 


예수회 신부 안토니오 스파다로와의 대담집 <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솔)는 교회의 역할과 성직자의 사명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각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그가 예수회를 선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교황은 예수회가 가진 선교성, 공동체, 규율이라는 세 가지가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태생적으로 규율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지만 예수회원들의 엄격한 규율 준수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혼자 사는 사제가 아니라 공동체 속의 사제이고자 했다. 더불어 교황 프란치스코에게 예수회란 언제나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둔다는 것을 가리킨다.


진리에 대한 교황에 생각도 음미해볼 만한데, 그는 결코 절대적 진리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절대적이란 말은 모든 관계에서 벗어난다는 뜻을 함축하는데, 그가 보기에 진리란 다른 무엇보다도 ‘관계’를 지칭한다. “진리란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결국 진리란 관계인 것이지요!”라고 교황은 강조한다. 그렇기에 진리는 항상 하나의 여정이며 하나의 삶으로서만 우리에게 자신을 내준다고 그는 덧붙인다. 교회에 대한 생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교황에게 교회란 어머니의 따뜻함을 의미한다. 그는 어떤 교회를 꿈꾸는가. “내가 분명히 보는 바로는 오늘날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상처를 치료하고 신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능력과, 가까이 머물기, 곁에 있기입니다. 나는 교회를 전투가 끝난 후의 야전병원으로 봅니다.” 이 야전병원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환자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직무자들은 무엇보다도 자비의 직무자여야 한다고 교황은 말한다. 


남미에서 직접 해방신학을 공부한 신학자 김근수의 <교황과 나>(메디치)는 ‘개혁 교황’으로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탄생과정과 그 의의,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과 행동이 한국사회에 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짚어본 책이다. 저자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읽는 세 가지 코드로 예수회와 성 프란치스코, 그리고 조국 아르헨티나의 현실 세 가지를 들면서 교황이 ‘온건 해방신학자’의 입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면서 교회개혁을 통해 사회개혁에까지 이르고자 하는 게 교황의 지향점이라고 보는 것이다. 교황의 꿈은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교회다. 한국사회와 한국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지 통렬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교황의 방한이 그러한 반성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14. 08. 08.

 

 

P.S. 참고로 교황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의 <교황들>(동화출판사, 2009), 호르스트 푸어만의 <교황의 역사>(길, 2013), P.G. 맥스웰의 <교황의 역사>(갑인공방, 2005) 등을 참고할 수 있다.

 

 

간략한 문고본으로는 프란치스코 키오바로의 <교황의 역사>(시공사, 1998), 두툼한 책으로는 <옥스퍼드 교황 사전>(분도출판사, 2014), 그리고 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교황 연대기>(바다출판사, 2014)를 더 참고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의 방한인지라 출판계의 반응도 사뭇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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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359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앤드루 스마트의 <뇌의 배신>(미디어윌, 2014)을 다뤘다. 뇌과학 분야의 책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우리에게 유익한 시사점도 던져주는 책이다. 관련서로 더 깊이 읽어볼 만한 책에는 승현준의 <커넥톰, 뇌의 지도>(김영사, 2014), '카이스트 명강' 시리즈의 <1.4킬로그램의 우주, 뇌>(사이언스북스, 2014) 등이 있다.

 

 

시사IN(14. 08. 02) 겨우 그만큼 자고 우리, 괜찮을까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잠이 부족한 국가'다. 2012년 기준으로 하루 평균 7시간49분을 자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 수치는 18개 조사 국가 가운데 꼴찌라고 한다. 이 평균을 놓고 대부분의 일상과 비교해 ‘그렇게나 많이 자나?’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일평균 수면시간이 7시간대로 떨어지는 국가는 일본과 한국뿐이다. 잠을 자지 않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긴 근무시간 때문이며, 자타공인 한국은 ‘전 세계 최고의 일중독 국가’다. 하지만 자랑스러울 건 없다. <파이낸셜타임스>가 꼬집은 대로 “노동생산성은 OECD 전체 평균의 66%에 머문 것으로 나타나 미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효과 없이 일만 많이 하는 셈이다.


두 가지 반응을 예상해볼 수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는 체념적 태도가 하나. 그렇게라도 일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저효율 장시간 노동 체제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 태도. 뭔가 변화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필히 참고해볼 만한 책이 있다. 앤드루 스마트의 <뇌의 배신>(미디어윌)이다. ‘배신’ 시리즈가 유행하기도 해서 제목은 그렇게 붙었지만, 원제는 ‘자동항법장치’를 가리키는 ‘오토파일럿’이다.


인간의 두뇌에도 오토파일럿 같은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이 일단 책의 전제다. 우리가 ‘휴식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두뇌는 ‘수동 제어’ 모드에서 오토파일럿 모드로 전환된다는 것. 항공기 조종사는 비행의 모든 과정을 수동으로 조작해야 할 경우 곧바로 위험한 수준의 피로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륙과 착륙 같은 위험 구간에 정신을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한데, 이러한 휴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오토파일럿이다. 두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두뇌는 격렬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진화했지만, 두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한가하게 쉬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주의할 것은 조종사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오토파일럿이 대신 일하는 것처럼 우리가 활동을 쉬는 동안에도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활성화된다는 점이다. 두뇌는 전체 몸무게의 2퍼센트에 불과한 기관이지만 신체 에너지의 20퍼센트를 소비한다. 아무 일 하지 않을 때도 산소를 운반하는 피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로 몰리며 두뇌 대사물질을 더 많이 소비한다. 놀랍게도 우리가 업무에 몰두하고 있을 때보다 멍하게 앉아 있을 때, 신경과학의 표현으로는 ‘무자극 사고에 빠져 있을 때’ 오토파일럿으로서의 두뇌는 더 바쁘다.


두뇌는 안정성과 유연성이라는 양극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나가는 게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는 ‘자아’로 인식해야 한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이 자아 유지에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 뇌를 단지 정보처리 기관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기능이 중요한 만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의 활동 수준을 최적화하는 것이 두뇌 건강뿐 아니라 일의 능률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베개를 베고 누워서 푹 쉬면된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낙서를 끼적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좋은 삶의 전제조건이라는 게 신경과학자인 저자의 메시지다. 방학을 맞이해도 빡빡한 일정에 치여 있는 아이들의 정신건강이 염려된다면 저자의 주장을 경청해볼 필요가 있다. “훗날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자유로운 형식의 몽상, 목적 없는 놀이, 생각 없이 즐거워하는 경험으로 채워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우리 삶의 질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한가한 휴식과 결근과 태만을 크게 늘려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누가 반대할까!

 

14. 0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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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삶의 향기' 칼럼을 옮겨놓는다. '마키아벨리에게 배우는 독서'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칼럼에서의 인용은 모두 앨런 제이콥스의 <유혹하는 책 읽기>(교보문고, 2014)에서 가져온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는 <마키아벨리와 에로스>(지식의풍경, 2002)에도 번역돼 있다.

 

 

 

중앙일보(14. 07. 29) 마키아벨리에게 배우는 독서

 

독서에 대한 유명한 문구나 일화를 남긴 저자가 많이 있다. 그래도 그 가운데 마키아벨리의 이름을 발견한다면 다소 의외일지 모르겠다. 『군주론』의 저자 말이다. 권모술수의 대명사로 오해받아왔지만 위대한 정치사상가로서 한창 재조명되고 있다. 위대한 정치사상가라는 타이틀에 견주면 사소하지만 그는 위대한 독서가이기도 했다. 1513년 마흔네 살에 쓴 한 편지에서 그는 저녁에 귀가하여 서재로 들어가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문가에 그날 입었던 진흙과 진창으로 더럽혀진 옷을 벗어두고, 위풍당당한 궁정풍의 옷을 입지.”

마키아벨리에게 서재는 고대의 대가들을 만날 수 있는 고대 궁전이다. 고대의 대가들을 더럽혀진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서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궁전에 초대받은 기분으로 입성하려면 최대한 격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 ‘위풍당당한 궁정풍의 옷’은 그래서 필요하다. 대가들과 만찬을 나누며 그들과 같은 수준의 고담준론을 나누기 위한 ‘드레스 코드’다.

서재에서, 아니 궁전에서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하는가. 일단은 따뜻한 환대를 받으면서 품위 있는 식사를 한다. 끼니를 때우는 식사가 아니라 나름대로 잘 준비된 식사여야 한다. 그리고 대가들과 서슴없이 대화를 나눈다. 옆에서 지켜본다면, 대화라는 건 책장을 이곳저곳 펼치는 것이겠지만 마키아벨리는 독서를 대가들에게 질문을 건네고 그들의 대답을 경청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 과정은 그에게 더할 수 없는 만족감을 가져다 준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그곳에 머무르는 네 시간 동안 나는 지루함을 전혀 느끼지 않고,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고, 빈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네.”

이 정도면 역사에 남을 만한 독서 아닐까. 마키아벨리를 오늘날에도 독서가의 모범으로 삼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주변에서 점점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인 건만은 분명하다. 조건도 충족되어야 한다. 궁전에 견줄 만한 자기만의 서재가 있어야 하고, 저자들에 대한 상당한 존경심을 갖고 있어야 하며, 그들과 어울릴 자격이 있다는 자부심도 갖춰야 한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독서의 비결이다. 물론 우리와는 무관해 보이는 비결이다.

이젠 새로운 소식도 아니지만 한국은 ‘책 안 읽는 사회’ 혹은 ‘독서 안 하는 나라’의 대명사가 되어 가고 있다. 먹고살 만한 수준의 나라들에 대한 독서량 조사에서 매번 꼴찌를 도맡고 있다. ‘2013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도 20대 이상은 연간 9.2권을 읽었다. 평균 잡아 ‘한 달에 한 권’에도 눈에 띄게 못 미치는 수치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하는 나라이면서 성인 독서량이 이토록 저조한 나라는 전 세계에 다시 없다. ‘책을 가장 적게 읽기’ 월드컵이라도 있다면 막강한 우승 후보다. 문제는 그래도 좋은가이다.

우리에게 다소 위안이 되는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독서를 많이 한다고 해서 더 훌륭한 인격을 갖게 되는지는 불확실하다.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나치의 수용소에서도 독일군 사령관은 틈나는 대로 괴테를 읽고 있었다고 하니 독서의 효과는 분명 제한적일 것이다. 일찍이 책은 거울과 같기 때문에 “거울에 당나귀를 비추면서 성직자의 모습이 나타나길 기대할 수 없다”고 일갈한 과학자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선 ‘책을 읽는 당나귀’가 좀 더 나은 선택이라고 믿는다. 적어도 ‘책을 읽을 자유’는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권리의 의미도 갖는다.

마키아벨리의 독서론이 시사하듯 우리는 독서를 통해 고대의 대가들뿐만 아니라 온갖 지식의 거장들, 그리고 지혜의 현인들과 만날 수 있다. 당장 내달 방한이 예정돼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책도 많이 나와 있기에 직접 바티칸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그의 생각과 메시지를 만나볼 수 있다. 교황 역시 단테의 『신곡』은 물론 톨킨의 『반지의 제왕』까지 섭렵한 상당한 독서가이다. 독서를 통해서라면 교황과도 마주앉아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겐 활짝 열려 있다. 그런 기회를 아낌없이 걷어찬다면 그냥 ‘당나귀 인증’이랄 수밖에 설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도 좋다면야!

 

14. 07. 29.

 

 

P.S. 물론 마키아벨리에게서 독서론만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해선 연이어 책들이 나오고 있는데, 필립 보빗의 <군주론 이펙트>(세종서적, 2014), 박홍규 교수의 <마키아벨리, 시민정치의 오래된 미래>(필맥, 2014), 최장집 교수가 서문을 붙인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후마니타스, 2014) 등을 필히 챙겨놓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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