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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의 묘비명은 딱 세 마디다. “살고, 쓰고, 사랑했다.” 스탕달은 숨을 거두기 20년 전에 이미 자신의 묘비명을 만들었다. 원래 스탕달이 처음 생각해 낸 묘비명은 쓰고, 살았고, 사랑했다였다. 그런데 스탕달이 세상을 떠난 뒤에 사람들은 단어의 순서를 바꿨다. 단어의 순서가 달라져도 간결한 묘비명에는 작가 한 사람의 삶이 농축되어 있다.

 

 

 

 

 

 

박범신 작가는 성희롱 논란이 불거지자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사과문을 올렸다. 박 작가는 스탕달의 묘비명을 인용했다. 트위터리안들의 비난이 이어지자 사과문을 삭제했다. 어느 정신건강 전문의가 박 작가의 사과문을 해석했는데, 두 가지로 나왔다. 첫 번째 해석, 작가 자신이 젊었을 때는 자신의 행동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번째 해석, 나이가 들면 성적 매력이 떨어지므로 여자들을 만나면 (성희롱으로 간주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결국, 자신이 오래 사는 바람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세기의 작가, 예술가들의 곁에는 늘 뮤즈(Muse)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들의 관계를 생각할 때면 남성 예술가와 여성 뮤즈를 많이 언급한다. 뮤즈가 예술가에게 창작의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특별한 존재로 평가받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예술가들이 엉큼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찾는 남자들의 부속물’로 전락하기도 했. 박 작가를 포함한 문제 있는 남성 작가 및 예술가들은 자신의 성적 매력 발산을 뮤즈를 찾으러 다니는 순수한 예술가의 낭만으로 포장하고 다녔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르누아르는 생전 화가로서의 부와 명예, 자유, 그리고 남성적 욕망을 마음껏 누렸을 거로 생각한다. ‘행복을 화폭에 옮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화가를 꼽으라면 르누아르라고 단언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르누아르의 그림은 화려한 빛과 색채로 늘 행복을 담고 있다. 그 속에 세상의 시름이나 어둠을 찾아볼 수 없는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르누아르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인물화와 누드화를 많이 남겼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한 여성은 어린 소녀의 얼굴에 풍만한 여체로 묘사되었다. 지금으로선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지만, 르누아르는 만일 신이 여성의 가슴과 엉덩이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화가가 되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는 여성의 신체를 찬미했으면서도, 여성의 정신이 남성보다 낮은 수준으로 이해했다.

 

 

 

 

말년의 르누아르는 폐병과 류머티즘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창작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손이 심하게 비틀려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붕대로 고정시킨 채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은 절망과 분노가 아닌 행복으로 충만하다. 괴로운 일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에서 그림은 영혼을 씻어주는 선물이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유달리 장미꽃, 아이들, 그리고 여인들을 주로 그렸다. 르누아르의 둘째 아들이자 영화감독인 장 르누아르는 어린 시절에 바라본 르누아르의 아틀리에 정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집은 여자들로 가득했다. 어머니와 가브리엘 르나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하녀나 모델 같은 온갖 여성들로 해서 참으로 비남성적인 경향을 띠었다.” (장 르누아르, 예경 Art Classic 시리즈의 르누아르192)

    

 

르누아르는 전문 모델보다 가족과 친구 등 주위 사람들을 그리기 좋아한 화가였다. 특히 르누아르에게 가브리엘 르나르는 가장 중요한 뮤즈였다. 르누아르의 아내 알린의 사촌인 르나르는 둘째 아들 장이 태어날 무렵 르누아르의 집에 유모 겸 하녀로 들어왔다. 그리고 르누아르의 말년까지 모델을 했다. 심지어 그녀는 누드모델이 되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집에 사는 아내의 친척이 누드모델로 나섰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아내는 남편의 작업 방식을 이해해줬을까? 르누아르에 대한 아내의 증언이나 일기 같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녀의 속마음이 어떤지 알 수 없다. 물론 르나르가 르누아르의 예술적 열정을 이해하고, 누드모델이 되어주기를 흔쾌히 수락했는지 정말 궁금하다.

 

뮤즈들을 단순한 남성 예술가의 연인으로 바라보는 건 편견에 치우진 착각이다. 하지만, 남성 예술가들이 뮤즈를 찾은 이유가 절대 예술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 ‘뮤즈라는 이름은 여성을 속박하는 언어의 감옥이 되기도 한다. 그때의 남성 예술가들이 강조했던 예술’은 남성의 어두운 욕망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변질된다.

 

 

 

 

[] <박범신 삭제 사과문 해석> (조선일보, 2016102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23&aid=000322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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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1-02 2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르느와르 생존 당시 그리고 그 이전부터 세습되어 온 시대 분위기에 기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남성과 여성은 성역할 뿐만 아니라 차별에 의해 존재감이 달랐다고 알고 있습니다. 중세 마녀사냥으로 여자들이 다수 희생되었어도 남자는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신분제도도 그렇고 초야권이 있었음은 상상하기 힘들지요 남자가 여자의 목숨조차 하찮게 여기는 시대였고, 그런 성차별 마인드가 사회적으로 공인되는 시대였죠. 계몽시대라고 해서 세상이 변하는 속도에 따라 사람이 빨리 바뀌지는 않았을 겁니다. 안타깝지만요.

cyrus 2016-11-03 11:01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성차별이 암묵적으로 공인되는 시대 분위기 때문에 여기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천관우 주필의 말을 인용하자면, ‘연탄가스에 중독된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남성들이 만들어 낸 연탄가스에 남성, 여성 모두 문제의 심각성을 몰랐던 거죠. 그 상황 속에 용기 있게 저항하는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있었지만, 조용히 묻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과거의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이제부터 낡고, 잘못된 생각의 인습에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왜 이제야 뒷북 치냐고 따지는 사람들의 의견은 무시해도 됩니다.

2016-11-02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03 11:04   좋아요 0 | URL
강자는 자신의 이익을 누리기 위해서 약자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강자는 자신의 막강한 힘뿐만 아니라 편견과 차별을 동원합니다.

북프리쿠키 2016-11-02 2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우리는 왜 르누아르의 그림이 그렇게도 당시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분노를 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의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스케치 풍으로 보이는 것이 경솔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예술적인 지혜의 소산이라고 어려움 없이 인식한다. 만약 르누아르가 각 세부까지 세세히 다 그렸다면 그의 그림은 진부하고 생동감없게 보였을 것이다. <서양미술사-521쪽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그림설명중>

밝은 색채의 즐거운 혼합물을 보여주고 쏟아지는 햇빛의 효과를 연구하고자 했던 인상주의자 르누아르네요.

특히나, 인상주의 그림을 감상할 때 몇 걸음쯤 뒤로 물러나서 보면 이러한 혼란스러운 색점들이 갑자기 우리의 눈 앞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고 생기를 띠게 되는 기적과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대중들이 알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하네요.

싸이러스님의 르누아르 그림에 대한 리뷰를 보니 서양미술사에서 배웠던 부분을 다시 언급하여 기억에 남겨봅니다.^^;

cyrus 2016-11-03 11:08   좋아요 1 | URL
르누아르는 말년에 인정받아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르누아르는 자신의 그림이 살롱에 인정받고 싶어서 친했던 인상주의 화가들과 거리를 두었죠.

북프리쿠키님은 저보다 미술사를 열심히 공부하시는군요. 솔직히 저는 <서양미술사> 521쪽을 읽어보지 않았어요. ㅎㅎㅎ

:Dora 2016-11-02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범신 트위터 계폭했어요.. 박진성 일 터지고 좀있다 줄줄이 나오니까 감당 안 되었겠죠...사실 저 트위터 내용도 꼴 보기도 싫음 역겨움

cyrus 2016-11-03 11:09   좋아요 0 | URL
박근혜, 박진성, 박범신. 요즘 박 씨가 문젭니다. ^^;;

처음에 올린 트위터 사과문이 수정된 사실을 확인했을 때, 진짜 어이가 없었습니다.

:Dora 2016-11-03 11:49   좋아요 1 | URL
저도 박인딩...;;;;

cyrus 2016-11-03 11:51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제가 큰일 날 소리를 했군요. 문제 많은 세 명의 박씨 때문에 가만히 있는 박씨들이 피해를 받습니다...

:Dora 2016-11-03 11:53   좋아요 0 | URL
아녀요 잘못된 건 지적하고 고쳐야죠!! 나쁜 소수때문에 안그런 다수가 피해입는 오류도 없어야하구용

cyrus 2016-11-03 11:56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최 씨입니다. 그래서 최 모 아줌마가 싫어요..

책한엄마 2016-11-03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르누아르가 그런 사람이었군요.
박범신에 대한 정신과의사 분석이 참 인상 깊네요.
이번에 새로 출간될 예정이었던 유리라는 책 볼 일 없게 될까요?
박범신 작가님이 타계하시면 재조명될라나요?
고산자 대동여지도 영화도 그닥이었지만 박범신 작가 원작도 별로였어서 그닥 후기를 쓸 의지가 없었네요.백자평이나 간단히 남겨야겠어요.

cyrus 2016-11-03 11:14   좋아요 0 | URL
르누아르의 그림을 알아도, 그가 어떻게 살았고, 생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화가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들을 알 수 있습니다. ^^

저는 박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독자들 중에는 박 작가의 안 좋은 소식을 접했을 거고,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작가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준다면 괜찮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모르거나 작가의 문제점을 강하게 부정하는 독자들이 문제죠. ^^;;

transient-guest 2016-11-03 0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의 욕망을 자리나 명예, 위치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폭력적으로 투사한 결과가 오늘의 박범신, 아니 한국 사회의 수많은 박범신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과는 직설적으로 미안합니다 하는 것이지 ~했다면 미안하다는 물러날 지점을 잡아놓은 사과행위지요. 추하게 늙지 않도록, 늙어서 하는 짓거리가 추하지 않도록 죽을 때까지 노력할겁니다...저렇게 되는 거 너무 싫어요..

cyrus 2016-11-03 11:17   좋아요 0 | URL
요즘은 사과문을 글로 공개만 하면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글로 표현한 사과문은 사과를 한 사람의 진심 어린 반성을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저는 올해 사과문 비슷한 글을 한 두 차례 쓰면서 그렇게 느꼈습니다. 아무리 내용을 길게 써도, 제 진심이 온전하게 전해졌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부끄러워도 차라리 피해를 준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서 사과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심성 2016-11-03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추행 파문을 일으키고 사과문이랍시고 스탕달이 말한 묘비의 내용을 인용하여 포장하듯 끄적인 자체가 역겹군요. 진정한 문호라면 자신 밥벌이로 써먹던 달콤한 포장이 아니라 미안합니다. 사과합니다. 등 직설적이고 진심 어린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과가 불특정다수를 위한 sns 보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먼저 해야하는게 우선이 아닌가 싶군요. 박범신 작가의 은교를 볼때처럼 그 알 수 없는 스멀스멀한 불쾌감이 왜 드는지 알 것 같군요. 역시 창작물은 창조주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인가 봅니다.

cyrus 2016-11-03 19:02   좋아요 0 | URL
사과하는 자세가 잘못됐죠. 묘비명을 인용하는 건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유식한 작가이니까 불미스러운 일과 전혀 관련 없다는 식의 뉘앙스를 드러내서 논란의 중심에 빠지려는 것이죠.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
피터 멘델선드 지음, 김진원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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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지나친 독서로 실명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됐을 무렵이었다. 보르헤스는 노트도 없이 기억에만 의존해 문학에 대한 사랑을 내보였다. 그의 소설 쓰기는 독특한 상상의 산물이나 현상을 마치 실재했던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든다. 상상과 사실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한데 모아놓고 독자들이 혼돈과 착각 속에서 삶의 현상과 본질을 탐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칼과 쟁기가 팔의 확장이라면,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말했다. 눈이 멀었으면서도 계속해 책을 사 모았던 그는, 독서를 향한 치명적 열정을 보여줬다. 책은 보르헤스의 존재양식 그 자체였다.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멀어진다.” 보르헤스가 인용한 괴테의 시구처럼 독서 행위는 실명의 진행 과정과 다르지 않다. 책은 상상의 여러 가능성을 보여준다. 독자는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고 있지만, 그러한 경험의 총합이 무조건 진실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책은 상상의 공간, 즉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이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 속 주인공의 얼굴에 그리운 사람의 모습을 불러낼 수 있다. 소설의 이국적 장소를 친숙한 동네 모습으로 탈바꿈해서 볼 수도 있다. 때로는 문장 일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그냥 건너뛰어 넘어가기도 한다. 책 표지 전문 디자이너로 활동한 피터 멘델선드는 독서 행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누구나 당연하게 믿었던 책을 읽는 행위가 실제로는 책을 보는 행위에 더 가깝다고 확신한다. ‘책을 보는 행위에는 독자의 개인적인 기억과 상상력 등이 동원된다.

 

독자는 책 앞에 서면 장님이 된다. 두 눈으로 글을 보고 있어도, 책을 다 읽고 나면 눈으로 봤던 내용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책읽기는 두 눈을 감은 세계와 비슷하다. 눈꺼풀 같은 막 뒤에서 일어난다. 일단 펼쳐놓은 책은 눈 먼 사람인 척한다. 두꺼운 표지를 넘기고 책장을 한 장씩 넘겨야 비로소 현상세계에서 나는 떠들썩한 자극을 봉쇄하고 상상은 날갯짓을 한다. (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76)

 

현실적인 세계를 드러내길 좋아했던 플로베르는 소설을 통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완성했다. 플로베르의 소설 속 문장과 단락은 스크린이 되고, 독자는 관객처럼 스크린 속 구체적인 현실을 경험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구절구절 문장을 씹어 먹었어도 독자는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마담 보바리의 결말은 책 안 읽는 사람들도 안다. 그러나 마담 보바리를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모두 보바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하는 이레네오 푸네스(보르헤스의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주인공)가 아닌 이상 모르는 게 정상이다. 푸네스처럼 말에서 떨어지면서까지 기억력의 천재가 되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비록 기억력의 천재가 되지 못해도, 상상력의 천재는 될 수 있다. 독자는 눈뜬장님이 되어 상상의 날갯짓을 활짝 펼치기만 하면 된다. 보바리 부인은 전형적인 프랑스 여성이지만, 독자는 자기가 알고 지낸 모든 여성의 얼굴들을 동원하여 부인의 모습을 자유롭게 상상한다. 보바리 부인이 과거의 첫사랑 모습으로 될 수 있다.

 

나처럼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혹은 상대방을 비판할 근거를 취하기 위해 책 읽는 독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독서는 자기 생각에 혼자서 맞장구치는 정도에 불과하다. 책을 꼼꼼하게, 분석하듯이 읽는 독자는 자신이 한 번 읽었던 책의 내용을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피터 멘델선드의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은 대부분의 독자가 공공연히 알고는 있지만, 확인하면서 해부하고 싶지 않은 은밀한 독서 행위를 정면으로 포착하고 있다. 그래선지 이 책을 보게 되면 자신의 상상 밀실을 들킨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만나고 다니는 동안, ‘눈뜬장님이 되어 딴생각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독자들은 "눈이 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었다. 독서란 단순히 책에 기록된 문자를 추적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가 아니라 문자와 문자로 조형된 세상, 그리고 그사이 행간에 은닉된 세상과의 접촉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이 곧 이성인 시대는 지났다. 역시 보르헤스는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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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02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명하면서까지 독서라니....상상이 안되지만....
그런데 상상불가한 일을 상상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대단하네요..
책은 이성의 시대를 넘어 상상의 이상의 시대로 ^^...

cyrus 2016-11-02 19:18   좋아요 1 | URL
제가 읽은 책에 유명 작가들이 언급되었는데요, 이상하게도 저자가 보르헤스를 한 마디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보르헤스가 생각났습니다. ^^

stella.K 2016-11-02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고 싶기는 한데
네 글 읽으니까 생각 보다 좀 어려울 것도 같다.

cyrus 2016-11-02 19:20   좋아요 0 | URL
제가 책의 세부 사항을 언급하지 못했군요. 그런데 알라딘으로 검색하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요. 거짓말 아니고, 책 내용이 어렵지 않습니다. 저자가 디자이너라서 글보다는 그림을 많이 채워 넣었어요. 정말 글보다 그림이 많습니다. ^^;;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평등한 대우를 받기를 원한다. 사회주의가 결과의 평등을 강조하듯이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기회의 균등을 시장경제의 가장 핵심적인 초석으로 삼고 있다. 물론 기회의 균등을 완벽하게 보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회의 균등이 보장된다면 개개인의 창의력, 능력, 노력에 따라 보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에서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불평등 문제가 심화하여 빈곤층이 늘어나면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사회적 통합이 저해된다. 이는 경제성장력을 잠식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지나친 불평등은 기회의 균등을 깨뜨리고, 다시 소득과 기회의 불균등을 심화시키는 경제의 악순환을 낳는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경제성장을 위해 불평등이 심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학자들은 많은 수치를 통해 불평등이 성장을 막는 것은 물론 경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빈부 격차가 최악의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미국식 자본주의를 최고로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방한했던 스티글리츠가 미국식 자본주의를 모방하는 우리나라에 충고한 적이 있다. 90년대 이후 미국은 사회적 불평등 문제로 인해 저조한 성장률을 기록했다. 불평등을 높이는 주요 요인은 부자들을 유리하게 만든 ‘담장 공동체(gated community)’를 허용하는 정치구조다. 경제 규모는 커졌어도 소득과 부가 ‘담장 공동체’ 안에 사는 부유층으로 집중돼 중산층은 줄고, 빈곤층은 증가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회구조는 미국의 양상과 흡사해졌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세계화가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불평등이 빈곤층의 삶을 위협한다고 한탄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빈곤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과 《새로운 빈곤》이라는 두 권의 책을 통해 실업자, 노숙자 등의 빈곤층이 격리의 대상인 사회의 ‘쓰레기’로 전락하는 경제성장의 이면을 꼬집는다. 담장 공동체 밖에는 다수의 빈곤층이 몰린 쓰레기장이 있다. 과거에는 빈곤층 증가 현상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취급되었지만, 이제는 경멸받는 범죄의 차원으로 바라본다.

 

 

 

 

 

 

 

 

 

 

 

 

 

 

 

 

 

영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차브(Chav)’ 현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무직의 하층계급을 ‘차브’로 규정하여, 복지급여를 부정적으로 타내는 게으른 대상으로 비하한다. 전통과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가벼움과 저속함을 무기로 종종 주류문화에 반격을 가한다. 세련되지 않은, 저급하고 값싼 취향의 패션과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은 ‘차브 족’으로 변신했다. 전문가들은 차브 족의 등장으로 부정적인 의미의 ‘차브’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주목했지만, 싸구려를 자처하는 그들의 모습은 쓰레기더미에서 향기 나는 꽃을 피우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잉여로 전락한 하층민들이 정상인 대접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정치적 기구가 없다는 암울한 현실이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의 또 다른 착각이 GDP(국내 총생산)에 대한 맹신이다. 스티글리츠와 아마티아 센은 GDP가 경제지표로서 유용하지 못한다고 줄기차게 비판했던 경제학자들이다. 이 두 사람은 2008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주도한 ‘경제 실적과 사회 진보의 계측을 위한 위원회’에 활동하여 GDP의 결함을 공식적으로 증명하는 보고서를 공동으로 펴내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GDP는 틀렸다》라는 책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전 지구적 세계화의 추세에 힘입어 GDP는 국가의 경제성장 수준을 판별하는 공통된 지표였다. 하지만 GDP가 기업의 현금 흐름만 고려할 뿐, 삶의 질, 환경파괴, 불균형한 소득 분배 등을 측정하지 못한다. GDP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도 이미 GDP의 한계를 인정했다.

 

 

 

 

강대국은 GDP를 국력 비교의 잣대로 사용했다. 가난한 나라들은 GDP 실적을 올려 ‘개발도상국’의 굴레를 벗어 ‘선진국(또는 강대국)’으로 도약하고자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지금도 GDP를 신뢰하고, 대통령들이 경제성장을 약속할 때마다 GDP 실적 목표를 언급한다. 결과와 수치에만 집중해서 알맹이 없는 양적 성장을 본격적으로 경계하는 시각이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2030년 GDP 규모 세계 7위’ 도약 목표에 매달리고 있다. 한국 경제가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국민의 행복 지수와 복지 지출 수준이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재난 불평등’을 분석한 존 C. 머터는 재해에 큰 피해를 본 빈곤층에 주목했다. ‘담장 공동체’ 사람들은 지배층의 보호 아래 피해를 면하지만, 담장 밖의 낙후된 지역에 있는 빈곤층들은 정부의 무관심과 리더십 부재로 인해 복구 혜택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지도자들은 사망자 수가 많은 대형 재난 소식을 접하면, ‘후진국에서 일어날 법한 일’로 생각해서 부끄러워한다. 안타깝게도 대다수 사람 역시 재난 피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심지어 재난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모욕하고, 비하하는 못된 사람들도 있다.

 

 

 

 

홍수나 지진처럼 자연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것만 통틀어 재난이라고 보지 않는다. 어떤 재난은 인재(人災)로, 누군가의 무관심, 사회적 부조리에서 재앙이 시작된다. 청와대에 4년 동안 숙박한 시녀가 세월호 사고 이후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불평등 현상이 경제위기의 본질임을 깨닫지 못한 지도자는 국민의 고통을 외면한 채 ‘청와대 시녀 놀이’에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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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나린 2016-11-01 1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녀=꼭두각시=아바타=하야!

cyrus 2016-11-02 16:26   좋아요 1 | URL
별명이 많은 대통령으로 기억될 겁니다. 박그네, 닭그네, 최순실 꼭두각시, 최순실 아바타, 병신년

yureka01 2016-11-01 19: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집안이 나라를 말아 먹는 기분 ㄷㄷㄷㄷ

cyrus 2016-11-02 16:29   좋아요 1 | URL
박 가쪽 사람들은 이제 정계 주변에 얼씬도 못할 겁니다.

감은빛 2016-11-02 12: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뿌리깊은 불평등 구조를 과연 바꿀 수 있을까요?
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많은 국민들이 ˝부조리하지만 어쩔수 없어˝가 아니라
˝부조리하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정도가 되어야,
저들도 마음대로 해먹지 못하겠지요.

아직도 오가며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를 옹호하더라구요.
그렇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cyrus 2016-11-02 16:3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완전히 해결되기 어려운 문젭니다. 불평등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명화에는 비밀이 있다 - 화려한 빅토리아 시대, 더욱 숨어드는 여자 이야기
이주은 지음 / 이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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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단순히 그림 한 장이 아니다.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가 시끄러울수록 매혹을 더 하는 마르지 않는 예술의 샘이다. 이주은의 아름다운 명화에는 비밀이 있다는 명화를 살아있는 인간의 이야기로 소개한다. 풍요와 결핍이 공존한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그림과 함께 지나치기 쉬운 여성들의 생활상을 전달한다.

 

한때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알려진 적이 있다. 지구가 돌아 영국 본토에는 밤이 오더라도 세상 어딘가 영국의 식민지 중 하나는 낮이라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은 대표적인 산업 자본주의 국가이자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였다. 또 성 불평등이 극심한 대표적인 나라였다. 빛과 어둠의 시대, 영광의 이면에 잔혹한 착취를 숨기고 있던 시대, 그 시대를 보통 사람들은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른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1837~1901)는 대영제국의 황금기였다. 당시 영국인들은 여왕 폐하 만세!’를 외치는 데 추후도 망설임이 없었다. 또 여인들에게 깍듯하고 극진한 것이 신사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이런 신사의 나라에도 실제는 여성 비화와 차별이 뿌리 깊었다.

 

 

 

 

금반지 안에서 희망이 보인다고? 거짓말, 거짓말이다.” 결혼생활의 실패로 자살한 미국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이렇게 자문자답한 뒤 슬픔만이 거기에 있다고 자신의 한 시에서 단정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 당연한 얘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런 결혼관이 생긴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서의 결혼상은 빅토리아 시대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결혼은 그리 낭만적이지도, 애절하거나 가슴 뭉클하지도 않은 정치행사이자 사회행사의 일환이었다. 과거에 결혼은 여성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했다. 그러나 남성 지배, 여성 복종이라는 가부장적 질서가 여성을 몸과 마음을 가정에 헌신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강인한 신사의 반대편에는 집안의 천사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 여성상이 등장했다.

 

 

 

빅토리아 시대에서는 섹스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 섹스는 단지 은밀하고 어두운 곳에서만 화제에 올릴 수 있었다. 금욕주의와 성애주의는 늘 빅토리아 시대 문화와 사람들 영혼 속에 공존해왔다. 억압에 더욱 강해지는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듯이, 이 시대 영국에서는 매춘과 성병이 유독 기승을 부렸다. 금욕을 강조했던 시대에 매춘부들은 타락한 여자로 취급받아 멸시의 대상이 되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많았다. 물에 떠오른 익사체의 여성이 많이 그려진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이 시대의 여성은 사회적 권리가 없어 늘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감금되어 남편을 기다리고, 만일 버림받으면 갈 곳 없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충동과 규범의 사이에서 여성의 생활은 지속해서 심리적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자식을 홀로 키우면서 세상의 따가운 시선들을 견디는 과부를 그린 에밀리 오즈본의 이름도 없고, 친구도 없고를 보면 그 당시의 시대상이 잘 나타난다.

 

빅토리아 시대는 여왕의 시대였지, ‘여성의 시대는 아니었다. 화려한 옷과 고급스러운 화장으로 치장한 여인들의 그림 속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은밀한 속사정이 숨어있다. 그녀들의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남성들에게 부여받은 것이다. 그림 속 여인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관능적이라기보다는 씁쓸하게 느껴진다. 그녀들은 그림 밖 관람객들에게 우리가 행복해 보인다고? 거짓말, 거짓말이다.”라고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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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6-11-0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인 저의 시각에도 관능적이고 아름다움의 프레임이 걸려있다는 거죠~

cyrus 2016-11-01 18:32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좋아했던 회화 양식이 빅토리아 시대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살아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알고 나니까 그림에 대한 정이 떨어졌습니다. 저도 남성들이 만든 아름다움의 프레임에 착각했습니다.

나비종 2016-11-0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한 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가 과거의 한 면만을 보여주듯이, 명화도 마찬가지군요.
하긴 똑같은 장면을 촬영한 사진도 찍는 이의 생각에 따라 전혀 다른 사건으로 비춰지는 걸 보면, 예술이든 어떤 형태로든 모든 기록은 승자의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나 봅니다.
「이름도 없고, 친구도 없고」라는 제목이 가슴 아프네요.

cyrus 2016-11-01 19:12   좋아요 0 | URL
책 속에 생소한 화가들의 그림이 많았습니다. 에밀리 오즈본이라는 화가도 여자인데, 남자 화가들이 외면했고, 그리지 않았던 것을 그려냈습니다. 서양미술 책에 많이 소개되는 빅토리아 시대의 그림들은 주로 여성 모델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구도가 많습니다.

달걀부인 2016-11-01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미술사 책들을 읽고 있는데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책이네요. 추천 감사해요. ^^

cyrus 2016-11-02 16:34   좋아요 0 | URL
빅토리아 시대 회화를 주제로 한 책이 많지 않습니다. 이주은 씨의 책은 어렵지 않고, 도판이 많습니다. ^^

북프리쿠키 2016-11-01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양미술사로 미술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어 기뻐요~
그림과 화가를
공부하듯이 외우지 않아도
그림에 담긴 스토리와 시대상에 따른
작가의 스타일에 대한 내용이
흥미롭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느낌이 좋습니다.

앞으로 싸이러스님의 그림에 대한
리뷰~꼼꼼히 읽어볼께요^^;


cyrus 2016-11-02 16:38   좋아요 1 | URL
북프리쿠키님이 서양미술사가 재미있는 이유를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림 속에 숨겨진 상징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알아가는 게 재미있어요. 그리고 예술가들의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어요.

제 글은 스마트폰으로 보기가 불편합니다. 글을 짧게 안 쓰거든요. 꼼꼼하게 읽으면 시력이 떨어져요. ^^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허만하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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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감각을 열어서 평범한 사람들이 보지 못한 현상 너머의 본질을 캐는 통찰력. 그것이 시인의 주요 덕목 중 하나이다. 허만하 시인의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는 이런 통찰력이 잘 스며들어 있는 산문집이다. 시 속에 삶의 풍경은 어떻게 비치고, 함축될까? 시인은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때로는 통일신라의 기와 조각 무늬를 감상하면서 '지도 없는 여행'을 떠나는 공상에 잠긴다. 또 리치먼드의 길을 더듬으며 에드거 앨런 포를 회상하기도 하고, 이인성의 수채 풍경화에서 풍경의 의미를 배운다. 멀리 보들레르까지 가지 않더라도 화가와 시인의 관계를 정의한 예술가는 적지 않다. 강연균 화백이 그랬던가? "시인은 언어로 그림을 그리고, 화가는 그림을 통해 시를 이야기한다"라고.

 

 

 

나는 풍경을 사랑한다. 풍경이란 살아있는 공간이다. 나의 눈길이 닿을 때까지 그 공간은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 죽어있던 공간이 내 시선이 닿는 순간 목숨을 가진 표범처럼 나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았던 수많은 풍경 - 그 가운데의 어느 하나의 풍경이(또한 한 순간이) 나의 망막을 보이지 않는 인두로 지지는 것이다. 그때 그 풍경은 나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피 흘리는 풍경' 중에서, 38쪽)

 

 

시인에게 있어서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망막세포 하나를 죽여 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의 눈에는 죽어 있던 공간이 하나의 역동적 풍경으로 보인다. 그 공간 안에서 선과 점과 면은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인다. 그런 점에서 풍경이 그려진 시는 '움직임의 시'이자 '깨달음의 시'다. 얼핏 보면 정적인 시인의 풍경 속에는 움직임과 깨달음의 '가쁜 숨'과 땀방울이 들어 있다. 그 들이켜고 내쉬는 숨과, 솟아나서 떨어지는 땀방울을 새겨 넣는 시인의 손은 섬세하면서도 둔중하다. 거기에는 섣부른 계몽의 교훈이 없고, 그렇다고 화려한 묘사도 없다. 평이한 묘사와 진술만으로 자연의 풍경이자 '나의 풍경'을 빚는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느끼는 풍경은 밋밋해 보이지만 힘차며 그래서 아름답다.

 

풍경을 받아들이면서 체험하고, 성찰한 것을 근거로 완성한 시는 오래 간다. 언어로 묘사된 풍경은 단순히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숨과 땀방울이 스며든 존재로 표상되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려는 시인의 소도구가 된다. 숨겨진 부분, 가려진 부분을 보는 제3의 눈을 가진 견자가 시인이라는 점을 되새긴다면 허만하의 언어를 통해 세상의 가려진 부분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자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이다. 딱딱한 기계의 눈으로 결코 읽을 수 없는 그의 언어는 새삼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허만하 시인의 글은 감정의 묘사에, 자잘한 교훈에 자족하는 오늘날의 언어들에 대한 항변이기도 하다. 그 불완전한 언어의 틈 한가운데를 허만하 시인이 성큼성큼 걷고 있다. 저기 십리 밖 풍경 냄새 맡으러 시인이 걸어간다. 시인의 발걸음을 따라가기 위해선 그가 표식으로 뿌려놓고 간 조약돌을 잘 챙겨야 한다. 낯설면서도 깊은 언어로 뭉쳐진 텍스트의 조약돌(박남수, 릴케, 가스통 바슐라르, 쥘 쉬페르비엘[주])을 줍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주] 허만하 시인은 ‘6월에 바라본 한 시인의 뒷모습’이라는 제목의 글에 쥘 쉬페르비엘(Jules Supervielle, 1884~1960)의 시를 인용했다. 이 글이 쓰인 시기는 2000년이다. 이때 당시만 해도 쉬베르비엘의 시는 널리 소개되지 않았다. 비록 시집은 아니지만, 쉬페르비엘의 소설이 2014년에 《바다 위의 소녀》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이 국내에 유일하게 정식으로 소개된 쉬페르비엘의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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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3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들에게는 없는 것이, 시인들에게는 민감한 안테나가 있는 것이죠....

cyrus 2016-11-01 09:01   좋아요 1 | URL
정말 부러운 능력입니다. 그런데 음흉한 몇 몇 시인은 엉뚱한 안테나로 여성에게 접근했습니다..

매너나린 2016-10-3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들어 시인들의 시를 편견없이 바라보기가 힘들어졌다는 사실에 슬픕니다. . .

cyrus 2016-11-01 09:06   좋아요 2 | URL
반갑습니다. 매너나린님. 저는 한국 작가의 소설이나 시를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최근 불미스러운 소식을 접한 이후로 실망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국내 문학 작품을 즐겨 읽은 독자들이 더 큰 상실감과 분노를 느꼈을 겁니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던데, 한편으로는 심각한 상황들이 빨리 잊혀질까 봐 걱정입니다.

2016-11-03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03 15:45   좋아요 0 | URL
제 글은 북플로 보기 힘듭니다. 글이 길거든요. 분량을 줄인 게 A4 용지 1장 반 정도 나오는데, 스마트폰으로 보면 눈에 피로감이 금방 생겨요. ^^

마르케스 찾기 2016-11-03 22:43   좋아요 1 | URL
ㅋㅋ 노트북으로 읽어서 괜찮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폰을 거의(아니 전혀라 할 만큼ㅋ) 사용하지 않는 터라ㅋㅋㅋ

다른 리뷰들보다 더 찬찬히 꼼꼼히 읽게하는 힘과 정보가 있어 재밌게 잘 읽었어요.

cyrus 2016-11-04 17:27   좋아요 1 | URL
정성을 담아서 리뷰를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글을 찬찬히 보면 독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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