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페미니즘 공부법 - 도쿄대에서 우에노 지즈코에게 싸우는 법을 배우다
하루카 요코 지음, 지비원 옮김 / 메멘토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페미니즘의 새로운 목소리는 사회에서 금기시됐던 성, 남녀 성차, 몸과 정체성 등의 문제들을 공개적인 담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낡은 인식의 틀을 깨부수었고, 미지의 세계에 인식의 밝은 빛을 던졌다. 페미니즘 운동 안에선 수많은 이론이 등장해 서로 경합하고 비판과 반박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여전히 완결되지 않은 진행형이다. 계속 성장 중인 이 이론은 이제 막 두 발로 섰을 뿐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일하는 여성들은 착취당하고 있으며, 어머니들은 보상 없는 노동에 짓눌리고 있다. 메갈리아 논란은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의 온도 차를 여실히 보여주는 문제였다.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은 합의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된 상태다.

 

긍정적 전망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나라 페미니즘을 위한 책이 나왔다. 나처럼 말로만 번지르르하게 페미니즘을 외치면서 실천은 하나도 못하는 철없는 남자들을 위하여 이 책은 여기에 왔다.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의 저자 하루카 요코는 성차별과 성희롱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연예계에 활동한 일본인이다. 그녀가 80년대 일본 페미니즘의 기수라고 불렸던 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교수의 세미나에 참석하여 페미니즘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과정을 그렸다.

 

페미니즘은 사회 변혁을 위한 필수적인 전략이다.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가 잘못된 것이고 바뀔 수 있다"는 인식이 형성된 것만 해도 엄청난 변화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보편적으로 실현된 것은 아니다. 차별은 논리적인 게 아니라 미묘하고 감정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차별은 느껴지는 것이다. 느낌은 객관적이지 못하고 틀릴 수도 있지만, 차별을 당하는 사람에겐 실재적이다. 남자는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을 느낄 재간은 없다. 남자가 차별의 대상이 되어야 여성들의 진짜 목소리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하루카 요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이 차별을 느껴지는 것은 ‘위화감’이다. 여기서부터 현실을 새로 보고, 인식이 전환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의심’한다. 하루카 요코는 페미니즘을 ‘느끼는 사람을 위한 학문’이라고 했다.

 

페미니즘을 새롭게 이해하는 그녀의 공부 과정이 흥미롭다. 그녀는 그동안 여성 차별에 향한 수많은 의구심이 언어화되지 않아 불편하게 느꼈던 상황을 되돌아본다. 하루카 요코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시작한 남녀 누구나 가부장제, 차별 등 거부해야 할 것들에 대해 저항하지 못한다. 솔직히 나도 이 점에 대해서 남모르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왜 모두들 그런 논리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까? 그건, 지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지적하지 못할까? 모순이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아서, 언어화되어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낀다. (89~90쪽)

 

 

저자의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은 남성 지배 문화의 허위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그것에 대응하지 못하는 여성의 소외감과 고통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은 여성들이 일상적 삶에서 부닥치는 성차별이라는 일차적 모순 외에 사회의 억압과 갈등구조에 대한 현실 비판의 목소리를 보여준다. 80, 90년대 활발하게 전개된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의 부상은 21세기가 여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까지 낳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모두 90년대 이후 진행된 경제위기(한국은 IMF 외환위기, 일본은 부동산 경제 거품 붕괴)는 뿌리 깊은 성차별 의식과 여성들이 그간 구축해 놓은 사회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여성 노숙자 문제를 외면한 김대중 정부의 복지 정책을 비판한 송재숙의 《복지의 배신》을 참고할 것) 단순한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서의 여성과 어머니로서의 여성만을 강요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문제가 다시금 주목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페미니즘을 공부한 사람만이 여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페미니즘을 단순히 여성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다. 이러한 발상은 ‘여성의 이익만 찾는 페미니즘’이라는 왜곡된 편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루카 요코는 ‘학문이라는 권력 장치를 알아차리기 위한’ 페미니즘을 강조했지만, 나는 그녀의 주장을 확장하여 페미니즘은 (남성이 구축한) 사회라는 권력 장치를 간파해내는 이론으로 보고 싶다. 우리가 사회의 권력 장치에 민감하려면 페미니즘을 멀리하게 만드는 편견의 먹구름을 걷어치우고, 권력 장치의 모순을 언어화해야 한다. 머릿속으로 느낀 것, 심장으로 이해된 것들이 모여 말로 구체화된다면 부당한 사회를 흔들 수 있는 목소리가 되고, 미래의 후손들을 위한 메아리가 된다. 페미니즘을 제대로 공부했으면 바로 지금 당장부터라도 내 일상생활을 고쳐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용하는 자세이다.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말끔히 떨쳐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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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24 18: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참. 자랑은 아니지만..제가 대학 1학년때 교양과목으로 여성학 3학점 이수했습니다.(공대에서는 저혼자더군요..)

오거서 2016-10-24 18:50   좋아요 0 | URL
청일점! 강의실에서 인기를 독차지하였겠습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ㅎㅎ

서니데이 2016-10-24 18:56   좋아요 0 | URL
그 때에도 교양과목에 여성학이 있었나요. ^^

cyrus 2016-10-25 18:32   좋아요 0 | URL
저도 학부생 시절에 ‘여성학’ 교양과목을 신청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연히 사나이답게 학점 받기 쉬운 과목을 선택했습니다. ㅋㅋㅋㅋ

stella.K 2016-10-24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제목이 혹 한다.
솔직히 며칠 전 불쾌한 일을 좀 당했거든.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는데...?ㅋ
여기 저기서 페미니즘 하니까 나도 왠지 공부를 해야할 것만 같네.^^

cyrus 2016-10-25 18:34   좋아요 1 | URL
남자들 때문에 불쾌한 일을 겪은 여자들뿐만 아니라 그걸 목격한 남자들도 언어로 표현해야 됩니다. 《맨 박스》라는 책의 저자가 말하길, 남자들은 성폭행, 성희롱이 잘못된 걸 알면서도 ‘남자가 잘못했잖아’라고 표현을 안(못) 합니다.

서니데이 2016-10-24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샀는데 나중에 잊어버리지 말고 꼭 읽어봐야겠어요.
cyrus님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6-10-25 18:35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

2016-10-24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25 18:35   좋아요 0 | URL
공대생들이 여성학을 수강 신청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을 거예요. 첫 번째는 여학생들이 많아서, 두 번째는 교수가 학점을 잘 준다고 해서... ㅎㅎㅎ

비로그인 2016-10-25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건강한 양성평등을 응원합니다.

cyrus 2016-10-25 18:36   좋아요 1 | URL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들지만, 남자들이 여자들의 불만을 이해해줄 수만 있다면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
 

 

 

누구든 세상엔 한 가지씩 무서워하는 것들이 있다. 특히 특정 동물을 무서워하는 동물 공포증 환자들은 목숨을 위협받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동물을 무서워한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은 뱀, 거미, 높은 곳 등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무섭게 여겨 이를 피하도록 진화해왔다.

 

 

 

 

 

 

 

 

 

 

 

 

 

 

 

 

 

 

에드워드 윌슨은 거미 공포증이 있다. 그는 이미 여러 편의 글을 통해 자신의 거미 공포증을 고백했다. 이런 공포증이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거미 공포증에 극복하려면 거미를 만지는 훈련을 통해 공포를 극복하면 된다. 그런데 윌슨은 거미 공포증의 치유책으로 개미를 열심히 탐구했고, 개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다. 윌슨의 책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에 수록된 뱀의 변신은 인간의 공포 본성을 과학적인 관점으로 분석한 글이다. 윌슨은 뱀 공포증이 야생에 살던 인류가 생명을 지키기 위해 대물림된 본능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평생에 한 번 뱀과 마주칠 확률조차 희박한 도시인은 뱀에 혐오감을 드러내고, 일부는 뱀 공포증이 있다.

 

 

 

 

 

동물에 대한 공포는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정신 반응이다. 이러한 특질로 인해 신비롭거나 부정적인 뱀의 이미지가 탄생하게 된다. 뱀이 지니고 있는 여러 상징 중에서 몇몇 부정적 측면만이 부각되어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표적이 되었다.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 이야기는 인간의 타락을 초래한 악마의 상징으로 뱀이 부각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여기에서 뱀은 빛과 생명에 대립되는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형상의 우로보로스(Ouroboros)는 우주의 무한과 영원성을 상징한다.

 

 

 

뱀에 대한 공포가 심한 사람들은 과장된 상상력을 발휘하여 미확인 생물체(Cryptid)를 만들기도 한다. 윌슨도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미확인 생물체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던가 보다. 그는 뱀의 변신에서 굴렁쇠 뱀(Hoop snake) 이야기를 언급했다. 미국과 캐나다 일부 지방의 사람들은 굴렁쇠 뱀이 인간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존재라고 믿는다. 과거에 전해 내려온 기록에 의하면 굴렁쇠 뱀은 우로보로스 형태로 자신의 몸을 둥그렇게 만들어 데굴데굴 구르면서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굴렁쇠 뱀의 정체는 현재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거대한 상상력의 파도는 미지의 대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겁에 질린 인간의 마음을 순식간에 덮친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 부유하는 환상의 조각들을 모아 독특하면서도 장대한 신화를 만들어냈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동물은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인어로 많이 알려진 세이렌(Seiren)은 바닷가에 앉아 뱃사람들을 유혹하는 존재이다. 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지나는 뱃사공의 영혼을 빼앗아 죽음의 바다로 빠뜨린다. 트로이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케로 돌아가는 도중에 이 세이렌의 은거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오디세우스는 인간의 모든 고통을 잊어주는 감미로운 죽음의 노랫소리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은 나머지 모든 선원에게는 밀랍의 귀마개를 하게 한 뒤 자신은 돛대에 단단히 몸을 묶는다. 중세에 널리 보급된 기독교 상징 사전으로 알려진 피지올로구스에서도 세이렌을 죽음을 부르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과학자들은 선원들이 목격한 인어가 수생 포유동물인 듀공(Dugong)이라고 주장한다. 새끼 듀공은 어미의 품에 안겨 젖을 빨아 먹으면서 자란다. 그래서 듀공이 새끼를 안고 젖을 빨리는 모습을 본 선원들은 그 동물을 인어로 착각했을 것이다.

 

 

 

 

 

 

바넘 효과의 창시자이자 흥행의 달인(이라 부르고 희대의 사기꾼이라 쓴다)으로 명성을 얻은 피니어스 바넘은 남태평양의 피지 제도에서 발견된 인어 사체를 전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바넘은 딱 일주일만 인어 사체를 공개했고, 엄청난 인파가 몰리면서 떼돈을 벌었다. 하지만 바넘의 피지 인어는 원숭이 사체의 상체와 물고기 꼬리 부분을 이은 것으로 밝혀졌다.

 

 

 

 

 

 

바넘의 사례처럼 인간의 공포 본능과 상상력의 결합은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기도 한다. 기상천외한 뉴스만 보도하는 언론으로 유명한 위클리 월드 뉴스(Weekly World News)는 인어를 목격했다는 식의 가짜 뉴스를 몇 차례 보도한 적이 있다. 인어를 소재로 한 가짜 뉴스가 식상했는지 상체는 물고기, 하체는 다리로 이루어진 괴생물체의 발견을 특종인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이 괴생물체 형상은 이미 마그리트가 먼저 그림으로 발명했다. 위클리 월드 뉴스 속 괴생물체의 사진은 조작된 것이다.

 

 

 

 

 

 

 

 

 

 

 

 

 

 

 

 

 

 

 

인간은 동물에 대한 두려움을 무마시키려고 파괴적인 본능을 드러냈다. 이 파괴 본능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었지만, 인간이 진화에 성공하여 기세등등할수록 파괴 본능은 동물을 위협하는 무기로 변질하였다. 인간의 얄궂은 미식을 위해 상어의 지느러미가 잘려나간다. 지느러미가 없는 상어는 헤엄을 치지 못해 죽어간다. 우리는 상어가 인간을 공격하는 위험 동물로 생각하는데, ‘죠스의 주인공인 백상아리와 청상아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윌슨은 상어를 분류하는 기준이라는 제목의 글에 백상아리가 상어를 공격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고 썼지만, 사람이 건드리지 않아도 공격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1년에 백상아리의 공격에 희생당한 사람이 많아봐야 수백 명 나오지만, 지느러미가 잘려나가 사람에게 희생당한 상어의 수는 수백만 마리나 된다고 한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공포는 이제 자연에 대한 착취와 정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윌슨은 우리 머릿속에 박아 놓은 공포심의 편견을 버리고 야생 동물을 바라보라고 당부한다. 조물주가 빚어 만든 경이로운 야생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우리 공포의 대상은 뱀, 백상아리가 아니고 지구마저 파괴하려는 포식자 즉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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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22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샥스핀 먹으려고 상어 씨를 말리더군요..ㄷㄷㄷㄷ

cyrus 2016-10-22 19:54   좋아요 1 | URL
영천시장의 돔베기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어요. ^^;;

2016-10-22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23 19:11   좋아요 0 | URL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생선회를 많이 먹지 못한 것과 비슷한 상황인가요? ^^

AgalmA 2016-10-22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어느 사진관에서 마그리트 <집합적 발명>을 인물 사진들과 함께 쇼윈도에 전시해놔서 뭐지@@....한참 들여다 본 기억이 있어요. 어린 아이를 충격에 빠뜨리다니! 사진관 아저씨가 저걸 진짜로 알고 그런 건 아니었길 지금에서야 빌어 보네요;

cyrus 2016-10-23 19:13   좋아요 0 | URL
마그리트 그림 중에는 아이들 정서에 충격(?)을 줄 만한 것들이 있어요. ^^;;

붉은돼지 2016-10-23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 반인반어 오래전에 봤던 기억이납니다 ~~

cyrus 2016-10-23 19:15   좋아요 0 | URL
요지경 박물관 시리즈 《세상에 이런 일이》에 반인반어 사진이 실린 적이 있어요. 어렸을 땐 진짜로 있는 줄 알았어요. 지금 보면 합성티가 확 나요. ㅎㅎㅎ

서니데이 2016-10-23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인어는 다리가 길어서 수영하기 불편할 것 같아요.
cyrus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6-10-23 19:16   좋아요 1 | URL
오히려 걷는 속도가 빠를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 물고기 상체에 사람 다리 가진 괴물이 달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무섭습니다. ㅎㅎㅎ

서니데이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비로그인 2016-10-2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상상력은 대단합니다.
cyrus님 좋은 하루되세요.

cyrus 2016-10-25 18:3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알파벳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모든 것은 한 톨의 씨앗에서 비롯되었다

한 알의 씨앗이 수많은 불꽃으로 피어나느니

푸른 세상을 열어가는 위대한 첫 발이 되느니

 

- 박노해 -

 

 

 

 

 

 

 

 

 

 

 

 

 

 

 

 

 

 

 

우리는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고 있다. 그야말로 풍미(風味)의 시대다. 그래서 구석기시대에 살았던 먼 조상들보다 현재의 우리가 더 맛좋은 음식을 먹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술 취한 식물학자》와 《씨앗의 승리》를 읽어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식탁에 올라와 있는 대부분의 먹을거리는 인간이 인공적으로 재배하면서 단순화의 길을 걸었다. 특히 유전자 조작에 의한 품종 개량작업은 유전자의 다양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 신품종의 곡물 및 채소가 식탁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되면서 과거의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술 취한 식물학자》와 《씨앗의 승리》에서 소개된 식물과 종자 이야기는 흥밋거리 이상이다.

 

씨앗식물은 생명의 필수적 근원이다. 씨앗식물을 재배하는 기술은 수확물 중에서 품종이 좋은 것을 선택해 보존하고, 그것을 적절한 때에 다시 심는 데 있다. 벼, 밀, 보리, 옥수수, 수수 등의 씨앗식물 생산은 문명을 만드는 기초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이 육체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줬다. 특히 옥수수는 버릴 것 없다.

 

옥수숫대는 입에 넣고 씹으면 달착지근한 맛이 난다. 나는 옥수수 하나 먹고 나면 옥수숫대를 질겅질겅 씹거나 쪽쪽 빨아댄다. 입으로 들어갈 옥수수 알갱이가 남아있지 않은 옥수숫대는 쓰레기로 분류된다. 그렇지만 고대인들은 옥수숫대에 나오는 단물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멕시코 북서부에 사는 토착 부족은 옥수숫대에서 짜낸 단물로 음료를 만든다. 고대인들은 오래 씹고 나서 뱉어낸 옥수숫대 찌꺼기들을 모아 술을 만들었다. 지저분한 제조 방식이지만, 고대인들이 즐겨 마신 옥수숫대 술에는 그들의 지혜도 녹아 있다. 침에 들어있는 아밀라아제(amylase)가 옥수숫대의 전분을 분해하여 당분으로 만든다. 술이 만들어지려면 기본적으로 술의 원료로 쓰인 녹말이 당분으로 변해야 한다. 그 과정을 고대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옥수숫대는 치통 억제 효과가 있다고 해서 민간요법으로 널리 활용됐다. 옥수숫대를 씹은 고대인들은 치통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치통, 치주염 환자들은 옥수숫대를 버리지 않는 것이 좋다. 잘 씻어 말린 옥수숫대를 끊인 물로 입안을 헹군다. 그러면 잇몸의 통증이 사라지는 ‘천연 가글’로 사용할 수 있다.

 

 

 

 

 

 

 

 

 

 

 

 

 

 

 

 

 

 

술의 제조 방식을 몰랐던 옛사람들은 침으로 녹말을 당화 시켰다. 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쌀을 씹어서 술을 만든 사실을 기록한 문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 기록에 의하면 오키나와에서는 처녀가 씹은 쌀 잔여물로 술을 빚었다고 한다. 우리는 효모(이스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 애주가들은 효모의 존재를 절대로 모르면 안 된다. 효모 덕분에 우린 옛사람들처럼 타인의 침이 섞인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으니까. 인간은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이미 효모를 활용해 음식을 만들어왔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과일주 등 간단한 술을 제조했다. 현미경이 처음 발명되고 나서야 인류는 효모를 처음 발견했다. 효모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인류는 우연한 기회를 잘 살려서 술이 발효되는 과정을 터득했고 후손들에게 공유했다.

 

최근 과학자들은 곡물을 이용하는 고대인들의 지혜 그리고 씨앗을 오래 보존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동식물이 지구에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외국에서는 ‘씨앗은행’을 만들어 운영한다. 사철 엄혹하게 추운 북극권에 곡물 씨앗 표본 수백만 개가 보존되어 있다. 북극권 내에 위치한 노르웨이 스발바르에 ‘최후의 날 금고’가 세워져 있다. 밀과 벼, 배추, 상추 등 곡물과 채소 씨앗을 거대한 금고에 저장한다. 금고는 두께 1m 콘크리트로 축조되고, 폭발에도 견딜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됐다. 기후의 급격한 변화나 핵전쟁으로 어떤 곡물의 종이 멸종할 경우 인류가 꺼내 쓸 수 있다. 씨앗은행은 미래의 후손들이 금고에 보관된 씨앗을 꺼내 서로 교배시켜 새로운 식량원을 개발할 때 도움이 되도록 같은 종이더라도 가능한 한 다양한 종자를 보관하는 역할을 한다.

 

십여 년 전에 미국의 과학자 단체 ‘고민하는 과학자 동맹’은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재래식 농산물의 유전자를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제기했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조작을 재래식 농산물을 철저히 분리해 관리하지 않을 경우 향후 위험한 상황이 초래할 수 있다. 토종의 중요성은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 더욱 많은 수확량을 확보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개발된 신품종의 수명은 짧기 때문이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변종은 수시로 진화하는 자연의 적을 이기기 어렵다. 씨앗은 우리 먹거리 시스템의 원천이다. 급격한 기후 변화와 우리의 식량 자급률이 계속 떨어지는 현실을 생각하면, 씨앗 보존이라는 문제가 왜 중요한지 알게 된다. 잠자는 씨앗도 미래에 매우 유익한 자원으로 쓰일 수 있다. 한 톨의 씨앗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생명의 나무로 자라야 할 희망의 씨앗은 인류 멸망에 이르는 불행의 씨앗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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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0-21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것이 좋다라고 하지만 과연 `자연적`인 건 뭘까요? 자연선택은 오히려 변종으로 인한 진화에 대해 더 많은 걸 보여줬습니다. 목이 긴 기린처럼 말이죠. 자연도 유전자 변이 과정의 큰 틀 속에 있습니다.

GMO 경우 유전자 조작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라는 게 문제라는 것인데, 너무 많음, 너무 급격함, 너무 상업적...그런 특성이 우리의 두려움과 불신을 불러 일으키지만, 반대 급부로 우리는 그 혜택을 보았고 앞으로도 볼 것입니다.

`옛 것이 좋은 것이다`, `자연적인 것이 좋은 것이다`란 관점으로만 사안을 보는 건 보수성, 수동적이 될 수 있어 이렇게 글 남깁니다.

cyrus 2016-10-22 09:37   좋아요 1 | URL
`자연적`이라는 단어가 태초 모습 또는 성질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연적` 특징 그대로 유지한 생물은 많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제가 생물학을 심도있게 공부하지 않아서 `자연적` 특징을 유지한 생물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저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유전자 조작 식품의 문제점이 알려졌음에도 이용 추세는 높아질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유전자 조작 식품의 부작용을 줄이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 유전자 조작 식품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 중의 하나를 씨앗 보존 정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로그인 2016-10-25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의 중요함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합니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



여러분, 솔불곰 아재 응원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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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9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19 21:00   좋아요 0 | URL
솔불곰 서재 방명록에 비밀 댓글 남겼어요. 그런데 전번 안알라쥼 시전할 것 같습니다. 곰발님 서재에 사과 댓글을 연달아 다는 모습 봐서는 관심종자입니다. ㅉㅉ

2016-10-19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19 20:53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반성합니다`로 닉네임 고치다가 다시 `솔불곰`으로 돌아왔네요. 전혀 반성하지 않은 자세입니다.

2016-10-19 2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19 21:16   좋아요 1 | URL
반응해줄 때마다 선처해달라, 죄송하다는 식으로 연달아 댓글을 답니다. 솔불곰 오늘 관심 많이 받게 돼서 기분 엄청 좋아졌을 겁니다.

2016-10-20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20 18:53   좋아요 0 | URL
자기 정체가 들통났으니 다른 계정 만들어서 활동할 수 있어요. 솔불곰처럼 이중적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녀석과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게 없습니다. ^^

2016-10-21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21 17:36   좋아요 1 | URL
오늘 비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지 못해서 흐린 하늘을 봤을 때 비 내릴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다행히 아직까진 비 소식이 없군요. 주말 잘 보내세요. ^^
 
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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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과거는 역사로 기록되지 않는다. 과거의 일부분이 역사로 기록될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숱한 과거 중에서 기억되는 과거만이 역사의 현장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려는 인간의 의지보다 강렬한 건 과거를 아예 잊어버리려는 망각의 욕망이다. 인간은 그들이 속한 환경과 처지에 따라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과거를 망각하거나 왜곡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해방 후 70년이 지났건만 가혹 행위, 학살 등으로 점철된 위안부 문제는 그 실상이 오히려 망각이라는 편리한 도구에 편승, 한때 부끄러웠던 과거로까지 치부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민족적 비극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연행된 사람들의 인권에 관한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문제는 민족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한 권리라는 보편적 층위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김숨의 《한 명》은 고난의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무참하게 비틀리고 휘어진 한 개인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불치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할머니의 감춰진 마음을 들여다보는 서술을 통해서 끔찍한 기억의 상흔을 보여준다.

 

입으로 가져가던 국숫발이 미끄러져 대접 속으로 떨어진다. 김치 서너 조각과 고추장으로 비벼 시뻘건 국숫발들은 그새 불고 있다. 국숫발들을 흩트리다 말고 슬그머니 젓가락을 놓는다. 국숫발을 뽑듯, 석순 언니의 몸에서 피가 쭉쭉 뿜어져 나오던 게 생각나 국수를 못 먹겠다. (19~20쪽)

 

할머니들의 정신적 상처는 인간역사의 부끄러운 상처일 뿐 아니라 개인의 인권이 조직의 힘으로 침해받은 상처다. 국가적인 아픔이기도 하나 그보다 피해자들인 여성에게 더할 수 없는 아픔이고 이제까지 겪어온 억울한 고통이기도 하다. 타인의 강압 때문에 몸과 마음이 유린당하는 것은 정신적인 살인을 당하는 것이라 할 정도로 그 아픔을 겪은 사람들의 상처는 그를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다만 그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치유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 정도를 할 수 있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작가에게는 곳곳에 산재한 망각과 왜곡의 욕망과 싸우면서 과거를 사심 없이 되돌아보는 진술의 힘과 이 진술을 한 편의 의미 있는 서사로 만들어내는 지혜가 있다.

 

 

 

 

 

독자들에게 《한 명》은 민족 수난이라는 구태의연한 플롯을 반복하는 무거운 소설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을 뒤로 돌리고 먼저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질문이 있다. 왜 우리나라에 위안부 피해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작품이 많지 않은 것일까? 1982년에 발표된 윤정모의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적 진실성을 명징하게 다룬 소설이다. 윤정모 작가는 이 소설을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전에 故 임종국 선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임종국 선생이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급선무는 위안부 문제를 외면한 친일파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위안부의 역사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소설을 써주세요.”[주] 하지만 이 소설은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선정적 작품으로 변질했다. 영화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만 외면한 채 일반인들의 호기심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려는 의도에서 성적인 장면만을 노출했다. 소설과 영화 모두 망각의 물결에 떠내려가면서 잊혀졌다.

 

할머니는 살아남기에 급급한 결과 자신이 역사의 피해자임을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할머니는 비록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지라도 불행의 상흔은 뚜렷하다. 그 흔적 중에서 가장 뼈아픈 것은 할머니에게 자아가 상실되어 있다는 점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그 다친 몸만큼 마음이 황폐해질 뿐 아니라 고립감과 죄의식을 갖게 되며, 자존감이 약해진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려 할 때마다 가장 먼저 치미는 감정은 수치심이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녀에게 모욕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생각을 하지 않다 보니, 그리고 말을 하지 않다 보니,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잊어버렸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어서 쩔쩔매던 그녀의 손가락들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

 

나도 피해자요.

 

그리고 또 뭐라고 써야 하나? 막막해하던 그녀는, 자신이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149~150쪽)

 

 

 

할머니의 사연은 팔자가 기구한 여자의 일생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는 많은 생각을 유발하는 함축이 있다. 할머니의 과거는 단지 불행한 생애 일부가 아니라 할머니 자신의 이야기로 인식되지 못하는 혼란이다. 할머니는 살아온 과거가 치욕적으로 느끼는 까닭에 그것을 현재의 자신 속으로 돌이켜 끌어들이는 과정을 힘겨워한다. 위안부 문제의 실상이 오랫동안 은폐되고 방치되온 탓에 할머니들은 저주스런 과거를 감추면서 숨어 살아야 했다. 가족에게조차 말할 수 없었던 치욕스런 기억은 ‘봉인된 고통’과도 같다. 할머니의 자아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억은 응집성 있는 서사적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구성되어 역사라는 이름으로 표출된다. 할머니의 수치심은 야만의 세월이 힘없는 여성에게 초래한 비극이다. 할머니의 머리와 마음에서만 울리던 공허한 메아리를 김숨은 현실의 문제로 끄집어내어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그렇게 세상을 기피하며 살아온 할머니가 자신의 과거와 한 꺼풀씩 대면하는 과정이 종이 위에 아프게 펼쳐져 있다. 알려지지 않은 비극적 진실은 역사로 복원되어 생명을 얻게 되었다. 《한 명》이 할머니들의 슬픈 마음을 널리 전해주고, 아픔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소설로 오래오래 기억되길 바란다.

 

 

 

[주] <위안부, 아직 끝나지 않은 지금 우리의 문제> 노컷뉴스, 2013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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