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악몽을 통해서 배워야 할 교훈

 

 

 

 

 

 

 

 

 

 

 

 

 

 

 

가면이 가지는 의미는 긍정적 요소보다 부정적 요소가 많다. 사회학자인 어빙 고프먼이 주장했듯이, 사람들은 어떤 한 가지 성격만을 일관되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상황에서 다른 역할을 연기한다. 예를 들어, 나는 친구들을 대할 때, 일하는 동료들을 대할 때, 알라딘 서재에 접속하여 ‘cyrus’가 되어 회원의 글을 읽을 때 각각 다른 사회적 가면을 사용한다. 만약 이 가면들을 모두 강제로 벗겨버린다면, 남는 것은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 방어능력을 잃어버린 상처 입은 인간이다. 가면 속에 가려진 실체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위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제임스 앙소르의 그림은 위협적이다. 그의 그림에는 낯선 것과 낯익은 것이 엉켜 있는 가면(얼굴)들이 가득하다. 앙소르는 낯익은 것의 낯선 배신을 시도한다.

 

 

 

 

 

 

해골 화가에서 앙소르는 그림 그리는 해골로 묘사된다. 만약에 앙소르가 자신의 모습을 해골로 그리지 않았으면 이 그림은 낯익은 얼굴을 그린 평범한 자화상이 된다. 앙소르는 해골이라는 낯선 가면을 쓴다. 그의 아틀리에는 실재(낯익은 것)와 환상(낯선 것)이 서로 엉겨 상호 침투하는 기묘한 공간이다. 행복한 책읽기를 쓴 김현의 말을 빌리자면, 앙소르의 그림이 주는 공포는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그림 속 얼굴과 화가의 실제 모습이 같아야 자화상이 성립된다. 그런데 앙소르는 낯익은 얼굴을 스스로 벗겨 낸다. 이젤 밑에 젊은 남성의 모습을 한 가면이 있다. 젊은 시절의 앙소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해골 가면을 쓴 앙소르는 우리가 아는 화가가 아니다. 섬뜩한 죽음그 자체다. 그림 속 죽음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면서 관객에게 말한다. “내가 화가(앙소르)로 보이니?”

 

 

 

 

 

 

 

 

 

 

앙소르는 가면뿐만 아니라 해골을 주제로 한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는 죽은 인간이 부패하는 현상에 매료되었다. 앙소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오스텐데라는 마을에 시체가 엄청나게 많았다. 17세기 초 스페인이 벨기에를 점령한 적이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오스텐데가 확장 공사를 하게 되면서 스페인 군대에 희생당한 시체들이 대량 발굴되었다. 어린 앙소르는 땅 속에 묻힌 시체를 보게 되었고, 그 상황은 지워지지 않는 섬뜩한 기억으로 남았다. 앙소르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죽음에 대한 불안한 정서를 잊기 위해서 앙소르는 죽음의 신으로 분장했다. 그리고 가면을 쓴 자들과 함께 카니발 연회의 흥겨운 분위기에 취하고 있다. 하지만 앙소르의 카니발은 유쾌하다기보다는 기괴하다. ‘낯익은 얼굴의 가면과 낯선해골이 함께 어우러진 앙소르의 그림에서 죽음과 불안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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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위한삼계탕 2016-05-1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가면을 쓰고
가면무도회로 갑니다~

cyrus 2016-05-11 20:04   좋아요 0 | URL
알라딘/북플은 가면무도회가 열리는 공간 같아요. 오늘은 어떤 가면을 쓰면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 생각하니까요. ^^

yureka01 2016-05-1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x-ray찍어도 보이는 해골인데,단지 사진일뿐이겠지만...
해골이 가면이 아니라 진면이란 보장이 없겠지요.
간혹 자신도 자신이 낯설 때가 많아서 말이죠..ㅋㄷㄷㄷㄷ

cyrus 2016-05-11 20:06   좋아요 1 | URL
어떻게 보면 우리 몸을 이루는 해골도 진짜가 아닐 수 있겠어요. 뼈도 세월이 지나면 부식되어 사라지니까요. ^^

영혼을위한삼계탕 2016-05-1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에서
˝언어유희˝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지금은 재밌네요^^

cyrus 2016-05-11 20:28   좋아요 0 | URL
여기 오랫동안 놀다보면 점점 지겨워질 때가 있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으로는 옛날에 앙소르 전시회가 열렸던 것으로기억합니다. 아니면, 종합 전시회 때 옹소르 작품 몇 점이 있었는지.. 하튼, 그림을 본 기억이 나네요..


하튼 그림이 굉장히 독특해서 아주 기묘한 감상에 빠졌던 기억이 나네요. 기분 더럽달까... ㅎㅎㅎㅎㅎㅎㅎ 참 독특한 감상이었씁니다..

cyrus 2016-05-12 17:10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기분이 더럽습니다. 사실 앙소르가 가면과 해골을 그려서 무얼 나타내고자 하는 건지 전문가들도 잘 몰라요. ㅎㅎㅎ

yamoo 2016-05-11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앙소르는 처음 듣는 미술가네요~
좋은 화가 소개 감사합니다~ 찾아 봐야 겠어요!

cyrus 2016-05-12 17:11   좋아요 0 | URL
그림이 무섭고, 어둡습니다. 그 점을 참고해주세요. ^^;;
 

 

 

배고픈 당나귀가 길을 걷다가 맛있어 보이는 건초 더미를 발견했다. 그쪽으로 발걸음으로 옮기는 순간, 그 옆에 있는 다른 건초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도 맛있어 보이는군.’ 당나귀는 두 개의 건초 더미 모두 맛있어 보였다.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 건초가 더 먹음직스러워 보였고,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이 먹고 싶어졌다. 밤새도록 갈팡질팡하던 당나귀는 굶어 죽고 말았다. 그는 건초 한 개도 입에 대지 못했다. 자기 앞에 놓인 두 개의 건초 더미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나은지 줄곧 고민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당나귀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이 우화는 뷔리당의 당나귀(Buridan’s ass)’로 알려졌다.

 

당나귀가 말해주듯 때때로 선택의 자유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들거나 개인의 삶을 좀 더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당나귀는 다른 건초 더미를 배제하고 어떤 한 건초 더미를 선택할 충분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둘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 순간 자신의 선택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정당화될 뿐이었다. 어떤 것을 선택했다고 해서 선택하지 않고 남겨진 것이 곧바로 하찮은 것이 되어버리는 것도 아니다. 당나귀는 미련하고 욕심이 너무 많다. 우리 또한 당나귀처럼 무언가의 결정을 눈앞에 두고 우왕좌왕하는 우매한 모습을 드러낸다. 뷔리당은 당나귀를 통해 자유의지의 무력함을 조롱했다.

 

 

 

 

 

 

 

 

 

 

 

 

 

 

 

우화의 주연은 당나귀지만, 그의 최후에 영향을 준 건초 더미를 무시할 수 없다. 중세에 건초 더미는 인간의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해석되었다. 그렇게 되면 뷔리당의 당나귀는 두 개의 건초 더미 사이에서 고민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욕심이 자유의지의 힘을 잃은 것으로 볼 수 있다. 15세기 네덜란드에는 이런 유행가가 있었다고 한다.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지상의 훌륭한 것들을 건초 더미처럼 쌓아 올렸는데, 사람들이 그 더미를 혼자 독차지하려고 서로 다툰다는 내용의 노래다. 그 노래에서 가장 유명한 가사 한 구절이 건초의 부정적 의미를 강조한다. 결국, 그것은 모두 건초일 뿐이다.” 욕심 많은 인간은 보잘것없는 건초마저 탐낸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건초 수레(1500, 삼면제단화 중앙 부분)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인간의 무력함을 풍자하기 위해 건초 더미 수레를 소재로 한 똑같은 그림 두 점을 제작했다. 엄청난 높이로 쌓아 올린 건초 더미 수레가 지나가자 온갖 직업과 계급의 사람들이 뒤따라온다.

 

 

 

                    

 

 

농부뿐만 아니라 왕과 왕비(혹은 귀족 부부), 교황으로 추정되는 화려한 복장의 인물들도 행진에 동참한다.

 

 

 

                  

 

건초 더미 수레 위에는 노래를 연주하는 젊은 연인들이 앉아 있다. 그들의 모습이 부러워서인지 몇몇 사람들은 건초 더미 위에 올라가려고 시도한다. 이들의 행진은 즐겁고 유쾌하다기보다는 혼잡하다. 이와 중에 서로 싸우는 시민들도 있다.

 

 

 

                  

 

 

그림 오른쪽 밑에 시골 아낙네들이 건초 더미를 자루에 실어 넣는다. 뚱뚱한 수도원은 아낙네들의 일을 앉아서 지켜보기만 하고 있다. 건초 더미 수레는 어디로 향하는 걸까? 괴상한 짐승처럼 생긴 악마들이 수레를 끌고 있다. 그들은 건초 더미에 욕심을 부리는 인간들을 유혹하여 지옥으로 이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감지한지 못한 채 행진한다. 하늘 위의 예수도 개판 5분 전인 속세의 상황을 말리지 못한다.

 

기독교의 일곱 가지 대죄 중 하나가 탐욕(Avaritia)이다. 보스는 죄악 앞에서 무력한 인간들의 세상을 보여준다. 그들의 눈에는 건초는 소유하고 싶은 물화(物貨). 탐욕은 갈등을 초래한다.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려고 폭력을 불사하면서까지 빼앗으려고 한다. 탐욕을 경계하라고 강조하던 종교인들마저 악덕의 그림자에 점령당했다. 수도승은 아낙네들이 바치는 건초 더미를 받으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운다. 건초 더미 꼭대기 위의 연인들은 환락의 잔치를 즐긴다. 사람들은 그들을 동경한다. 재물이 많을수록 달콤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힌다. 이들의 욕심은 부질없다. 어차피 죽으면 소유할 수 없다. 하나뿐인 인생에 헛된 욕심만 부리면서 살기에는 너무 짧다. 탐욕은 자꾸만 우릴 부추긴다. 하나도 모자라서 하나 더를 원한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해 남이 가진 것을 노린다. 그래서 내가 남보다 얼마나 가졌는지 비교해보기도 한다. 뷔리당의 당나귀 같은 사람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비교하면 별반 차이 없는 두 개의 재물 앞에 생각이 많아진다. 둘 중 하나를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리석은 당나귀가 있다.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그 역시 두 개의 건초 더미 앞에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한다. 두 개의 건초 더미의 양은 동일하다. 양쪽 건초에 가격표가 있다. 왼쪽 건초의 가격은 5만 원, 오른쪽 건초의 가격은 천 원이다. 당나귀는 고민하지 않고, 왼쪽 건초를 먹는다. 건초의 양이 비슷해도 높은 가격으로 매겨진 건초가 맛있어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당나귀는 5만 원짜리 건초 더미를 실컷 먹고 왔다고 동료 당나귀들에게 자랑할 것이다. 그런데 이 당나귀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베블런(Veblen)의 당나귀. 당나귀 이름의 의미가 이해가 안 되는 분은 인터넷 검색창에 '베블런 효과'를 검색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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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3-08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블런효과..이거 사진 찍다보면 뽀대주의자를 간혹 보게 됩니다.
사진 실력이 자신이 가진 카메라 가격과 동일시하는 착각....
돼지목에 진주인지는 고려한 바가 없었거든요..

cyrus 2016-03-09 14:20   좋아요 1 | URL
사진 찍는 일에도 베블런 효과가 작동되고 있었군요. 사진 실력이 그저 그런 수준인데 값비싼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림스네 2016-03-09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세시대에는 건초더미를 인간의 탐욕의 대상으로 해석했네요.
그림 해석이 재미있어요.
베블런 당나귀도 재미있고,

cyrus 2016-03-09 14:24   좋아요 0 | URL
중세 역사를 공부할 때 재미있는 내용이 중세에 유행한 상징들에 관한 것입니다. 중세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자연과 사물이 신의 의미가 들어있는 피조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중세 상징에 종교적 분위기가 남아있습니다.

서니데이 2016-03-09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세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적 의미가 강조된 그림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cyrus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6-03-09 20:2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
 

 

 

 

 

 

 

 

 

 

 

 

 

 

 

 

 

 

 

아직도 일본 크리넥스 광고를 쉬이 잊을 수가 없다. 꼬마 오니와 흰옷의 여인이 나오는 그 광고 말이다. 이 광고를 두세 번 봤는데도 으스스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광고를 보면서 어떤 그림이 생각났다. 이 그림도 특이하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하위징아는 이 그림에서 퇴폐적인 느낌을 받았다. 《무서운 그림》 시리즈의 저자 나가노 교코는 이 그림을 ‘불온하고 기묘한 에로티시즘’을 자아낸다고 했다.  

 

 

 

 

 

 

장 푸케  「믈룅의 성모 마리아」 (1450년)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다. 그런데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모습이 어색하다. 마리아는 하얀 피부를 가졌고 이마가 훤하다. 특이하게 동글동글한 가슴 한쪽만 드러냈다. 왕관과 옷이 없었으면 하얀 마네킹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기 예수의 시선이 부자연스럽다. 아기 예수는 왼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킨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 주변을 에워싼 천사들이 더 기괴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사는 보통 흰색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림 속 천사는 날개 달린 빨간색, 파란색 괴물처럼 그려졌다. 특히 빨간색 천사는 일본 크리넥스 광고에 나온 꼬마 오니를 보는 것 같다. 빨간색 천사가 파란색 천사보다 많다. 천사도 아기 예수처럼 표정이 없다. 강렬한 색깔 탓인지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는 것 같다. 빨간색 천사는 세라핌(Seraphim), 파란색 천사는 케루빔(Cherubim)이다. 세라핌은 천사 중 최고의 지위를 가졌다. 원래 날개가 세 쌍, 즉 여섯 개로 되어 있다고 한다. 붉은색 피부에 여섯 개의 날개를 지닌 모습으로 그려졌다면 기괴한 분위기가 한층 더 배가 되었을 것이다. 케루빔은 이름의 의미와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천사다. ‘cherub’은 ‘귀여운 아기 천사’라는 뜻이다. 케루빔은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불의 칼로 쫓아냈다. 세라핌 다음으로 지위가 높다.

 

이 그림은 장 푸케(1420?~1480?)가 제작한 두 폭의 제단화 오른쪽 날개 부분이다. ‘믈룅의 성모 마리아(The Melun Madonna)’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믈룅은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도시다. 장 푸케는 프랑스 르네상스 회화를 대표하는 궁정 화가다. 그는 샤를 7세(1403~1461)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기존의 종교화와 달리 믈룅의 마리아는 고귀한 귀족 부인처럼 그려졌다. 푸케는 샤를 7세의 정부 아녜스 소렐(1421~1450)을 모델로 마리아를 그렸다. 이 그림을 아녜스 소렐의 초상화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다. 소렐은 궁정의 패션 스타였다. 그녀는 가슴을 드러내는 복장을 하고 다녔다. 또한 처음으로 다이아몬드를 몸에 걸쳐서 등장했다. 오늘날에는 다이아몬드는 여성을 빛나게 해주는 보석이지만, 소렐이 다이아몬드를 달고 다니기 전에는 보석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소렐은 새하얀 피부색을 유지하기 위해서 백반을 넣은 물을 피부 곳곳에 발랐다. 백반을 넣은 물은 피부를 하얗게 해주는 화장품이다. 여기에 수은이 첨가되기도 했다.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지려고 몸의 잔털을 없앴다. 속눈썹, 이마 위의 잔털까지 모두 핀셋으로 뽑았다. 그래서 마리아의 이마가 넓은 것이다. 소렐뿐만 아니라 그 당시 귀족, 왕족의 여자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치장했다. 마리아가 한쪽 가슴만 드러낸 이유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마리아를 보통 사람들과 다른 존재로 보여주기 위해서 가슴을 일부러 완벽하면서도 현실감 없게 그렸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마리아의 가슴은 에로틱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젖줄이 나오는 신성한 대상이다. 하지만 가슴을 드러낸 마리아를 불경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교황이다. 그는 소렐이 유행시킨 가슴을 드러낸 복장에 불평했다고 한다.  

 

소렐은 네 번째 아이를 사산하면서 자신도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그녀의 죽음이 비소 중독에 의한 타살로 추정되었지만, 실제 소렐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사인이 수은 중독으로 밝혀졌다. 소렐은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바람에 너무 일찍 생을 마감했다. 수은이 들어간 백반은 피부병이나 천연두 흉터를 가리는 데 유용한 화장품으로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치명적인 질환을 유발하는 죽음의 물질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렇게 소렐은 너무 허무한 죽음을 맞았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돼서 제단화가 완성되었다. ‘믈룅의 성모 마리아’는 죽기 전 소렐의 모습이 완벽하게 남아있는 그림이 되었다. 그녀는 죽어서도 그림이 되어 아름다움을 발휘했다. 아마도 하위징아는 눈을 지그시 감은 마리아의 모습에서 생기가 사라지기 직전의 소렐이 떠올랐을 것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푸케의 그림에 어울리는 말이다. 소렐의 죽음을 아쉬워한 귀족 남자들은 마리아에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를 간접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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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1-12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서운 그림이 3탄까지 나왔군요. ^^

cyrus 2016-01-13 16:20   좋아요 0 | URL
`무서운`이 들어간 제목 때문에 이 책이 인기를 많이 받았습니다. ^^

초딩 2016-01-12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림 보고 우선 담아 봅니다.

cyrus 2016-01-13 16:21   좋아요 0 | URL
책을 읽어보면 그림이 무섭지 않게 느껴질겁니다. ^^

stella.K 2016-01-13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거 그림 한 번 독특하다.
불경스럽다기 보다 정말 고전스럽다는 느낌이 확...!ㅋ

cyrus 2016-01-13 16:24   좋아요 0 | URL
이 그림이 많이 튀어 보여도 걸작에 속합니다. ^^

나비종 2016-01-15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정면을 바라보는 단 한 명의 세라핌이네요. 음, 또, 성모마리아의 얼굴과 오른손과 아기 예수의 왼쪽 팔꿈치로 이루어진 커다란 삼각형 안에 닮은 꼴로 들어가 있는 또 다른 삼각형이 인상적입니다. 아기 예수의 왼쪽 팔꿈치와 마리아의 배쪽으로 늘어뜨려진 장식용 띠와 마리아의 왼쪽 가슴이 꼭지점이 되네요. 왜 하필 왼쪽을 드러냈을까. 구도를 맞추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왼쪽에는 심장이 있으니까 그랬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얀 심장 같기도 해서 야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네요.
그런데, 네크로필리아는 개인적으로 이해되지않는 감정입니다. 무섭기도 하구요ㅡㅡ;
 
그릇에 대하여

 

 

 

 

그릇은 인간 됨됨이에 대한 은유이다. 평생 대접받기를 원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그릇이 작은 사람이다. (곰곰생각하는발의 그릇에 대하여중에서)

 

나는 동시대 함께 살아있는 작가에게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싶습니다. 죽고 난 후 작가는 자기 작품에서 손이 떠납니다. 떠나버린 작가의 허울 같은 작품이야 남겠지만 작가의 살아있는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살아있는 작가의 작품에 귀를 열고 눈으로 듣는 그런 활동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yureka01동시대를 함께 사는 작가들중에서)

 

    

 

 

세상에 수많은 그릇이 있다. 재료에 따라 스테인리스 스틸·놋쇠·플라스틱·나무·자기로 나뉘고, 용도에 따라 밥그릇·접시 등으로 분류된다. 그것뿐이 아니다. 혼자의 힘으로 들 수 없을 만큼 큰 용기도 있고, 물 한 방울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은 그릇도 있다. 사람의 능력은 곧잘 그릇에 비유된다. 큰 그릇은 능력이 크고, 작은 그릇은 능력이 작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릇의 크기와 용도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지듯이 사람의 인생도 그러하다. 아무리 값비싼 좋은 그릇이라도 개밥을 담으면 개밥그릇이 된다. 우리는 매일 음식을 담고 비운 그릇을 깨끗이 씻는다. 그래야 새로운 음식을 담을 수 있다. 그릇이란 자고로 뭔가를 담아두는 게 그 쓰임의 본 용도이건만, 요즘은 싸움판에 차출(?)됐다. 정치판의 밥그릇 싸움이 그 대표라 할 만하다. 정치인들은 국민이 맡긴 신성한 권력을 이용해 밥그릇이나 챙기고 팔자를 고치느라 바쁘다.

 

 

 

 

우리나라 전통식기 중에 탕기(湯器)’라는 것이 있다. , 찌개를 담는 그릇이다. 탕기는 밥그릇(주발)의 모양과 비슷하다. 그래서 탕기를 밥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만큼 탕기는 12역을 소화할 줄 아는 식탁 위의 주연배우다. 그러나 특별한 음식을 담는 그릇이 식탁 위에 등장하면, 탕기는 잠시 물러나 있다. 반병두리는 떡국이나 비빔밥을 담을 때 쓰는 그릇이며, 벙거짓골  전골 요리를 담는 그릇이다. 특별한 날이면 이 두 개의 그릇이 탕기를 대신하여 식탁 위의 주연배우로 발탁된다. 탕기는 가장 많이 식탁에 등장했고, 아주 많이 사용했음에도 다른 그릇에 비하면 너무 평범하다. 이름도 평범하다. 뜨거운 국을 담는 그릇이라고 해서 이름이 탕기로 남게 되었다. 조반기, 대접, 바리, 보시기, 양푼, 이런 그릇의 이름이나 용도는 사람들이 알아도, 탕기는 잘 모른다. 사람들에 눈에는 그저 국그릇일 뿐이다. 밥그릇을 닮아서 이걸 탕기라고 부르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식탁의 주연배우가 아니라 약방에 감초역할을 하는 신 스틸러(Scene stealer)에 가깝다. 그래서 탕기는 소중하다. 밥과 국 아무나 담을 수 있는 편안한 그릇이니까.

 

 

 

 

 

 

 

 

 

 

 

 

 

 

 

 

 

 

 

그릇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사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외국에서 탕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탕기는 사람이다. 외국인 이름이 탕기라니, 특이하다. 쥘리앙 탕기(Tanguy)는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에 있는 그림물감 가게를 운영했다. 탕기의 가게는 단순히 물감을 파는 그저 그런 곳이 아니었다. 파리 코뮌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과 화가들이 탕기의 그림물감 가게를 자주 방문했다. 탕기는 싼값에 그림을 팔기도 했다. 그가 파는 그림은 이름이 알려진 화가가 제작한 것이 아니었다. 무명 화가의 그림들이 많았다. 탕기는 가난한 젊은 화가들을 아낌없이 지원할 정도로 배려심이 많았다. 돈이 없는 화가들은 품질 좋은 그림물감을 사지 못한다. 탕기는 화가들에게 그림물감을 빌려주었다. 물감뿐만 아니라 미술 도구와 돈도 잘 빌려주었다. 탕기의 배려에 크게 감동한 화가들은 돈 걱정 없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들은 완성한 그림을 재력이 있는 그림 애호가에게 팔지 않고, 바로 탕기에 건네주었다.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으로 탕기의 은혜에 보답했다. 그의 온정을 잊지 않은 화가들은 탕기를 페르(Père, 아버지, 영감, 아저씨)’라고 불렀다.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7)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8)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8)

 

 

 

탕기가 물감을 파는 가게 주인이지만, 나름 그림 보는 눈이 있었다. 탕기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한 일본 목판화(우키요에)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가게에 오는 화가들 역시 자연스럽게 일본 목판화의 새로운 세계에 매료되었다. 파리에 정착한 네덜란드 출신의 젊은 화가도 탕기가 수집한 목판화에 푹 빠졌다. 이 화가 또한 탕기에게 신세를 지면서 생활했다. 그리고 가게를 찾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하게 지냈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는 마음씨 좋은 탕기를 위해서 초상화를 제작했다. 탕기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다. 그의 태도에 인자한 품성이 느껴진다. 초상화 배경에 일본 목판화들이 가득하다. 이 그림에 관한 뒷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탕기의 초상화가 너무 성의 없게 그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네덜란드 화가는 탕기를 향한 무한한 존경심과 자신의 예술적 뿌리를 드러내려고 일본 목판화를 그려 넣었다. 부전자전(父傳子傳). 아버지의 모습이나 품행은 아들이 그대로 전해 받는다. 화가는 탕기를 만나게 되면서 일본 목판화의 매력에 빠졌고, 인상주의 회화에 주목했다. 탕기의 심미안을 화가가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화가의 친아버지는 예술에 자도 모르는 목사였다. 크게 낙심했던 화가는 파리에서 진짜 아버지를 찾았다. 파리의 이방인을 친절하게 대해주고, 자신의 그림을 알아주는 소중한 아버지. 탕기는 화가의 삶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아버지(Père)였다.

 

이 네덜란드 화가는 병마에 시달리다가 젊은 나이에 자살하고 말았다. 화가의 장례식에 탕기가 와주었다. 화가의 생의 온기가 멈추는 순간, 그가 남긴 그림의 온기도 사라진다. 탕기는 자신이 보관해둔 화가의 그림이 허무한 운명을 맞이한 것에 안타까워했다. 탕기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무명 화가의 그림에 이토록 애정을 가졌으니.

    

 

 

 

 

빈센트 반 고흐 글라디올러스 화병(1886)

 

! 가여운 빈센트! 어떻게 그런 불행한 일이...... 미르보 씨! 얼마나 엄청나게 불행한 일입니까! 그처럼 천재적인 사람이! 그처럼 선량한 인간이! 잠깐, 그 사람의 중요한 작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내 말이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요? 그의 그림들은 걸작입니다!”

 

사람 좋은 탕기 영감은 자신의 상점에서 4, 5점의 캔버스를 가지고 돌아오더니 우리들 주위에 있는 의자의 발판 틀에다 기대어 놓았다. (중략)

 

인간이 그렇게 죽어야 합니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렇게 슬플 수가! 내가 보기에 당신은 아직 빈센트가 그린 글라디올러스 화병을 알지 못하는 것 같구려. 마지막 그린 그림 중의 하나올시다. 대단한 작품이지요! 그 사람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글라디올러스 화병을 찾아보렵니다. 몇 분만 기다려 주세요.”

 

(옥타브 미르보의 <화가들> 중에서, 파스칼 보나푸 반 고흐, 태양의 화가146~147쪽 발췌 인용)

    

 

 

탕기(湯器)는 단순 소박하면서도 서민적 체취가 짙게 느껴진다. 탕기(Tanguy)는 소탈하다. 화려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은 그들을 자주 찾았다.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존재들이다. 탕기(湯器)는 밥그릇이 되어도 투정하지 않는다. 탕기(Tanguy)는 화가들이 돈이든 물감이든 빌려달라고 자신을 찾아오면 귀찮아하지 않았다. 그릇의 크기나 모양은 정신의 크기나 됨됨이와는 상관이 없다. 탕기(湯器)와 탕기(Tanguy)는 외형은 초라해 보여도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비운 자리가 깨끗하게 넓은 귀한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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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5-12-04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湯器)와 탕기(Tanguy)는 외형은 초라해 보여도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비운 자리가 깨끗하게 넓은 귀한 그릇이다... 마음에 듭니다.^^

cyrus 2015-12-07 09:44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yureka01 2015-12-04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시대의 예술가를 알아보는 안목..그 온기를 느끼는 공감력...결국 인품에서 나오나 봅니다.그래서 위대한 예술가들 뒤에는 후원자가 꼭 필요한 이유더라구요..

cyrus 2015-12-07 09:46   좋아요 1 | URL
유레카님의 글에 제 글을 먼댓글 설정할려고 시도했는데, 실패했어요. 유레카님의 블로그에 먼댓글 설정이 안 된 것 같아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12-04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그 보니 제가 탕기와 룰랭을 혼동했거든요. 탕기는 물감 파는 사람이었고, 룰랭은 우체부였죠... ㅎㅎㅎㅎㅎ 룰랭이 그렇게 자주 찾아갔다네요. 술 마시러... 갈 때는 고흐 형편을 알고 있어서 늘 술과 안주가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cyrus 2015-12-07 09:47   좋아요 0 | URL
저는 탕기가 그림 파는 화상인 줄 알았어요. 착각했어요. 그림물감 가게 사장이라는 사실을 이 글을 쓸 때 준비하면서 알았습니다. ^^

서니데이 2015-12-0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릇 사진을 보다보니, 뚜껑이 있는 그릇이 많이 있네요. 전에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뚜껑있는 국그릇을 집에서 쓰지 않아서 그런지, 아주 오래 전에 썼던 그릇처럼 느껴져요.
고흐는 동생이 먼저 생각나는 편인데, 앞으로는 탕기는 그림보다 그릇이 먼저 생각날 것 같아요.
cyrus 님, 편안한 밤 되세요.^^

cyrus 2015-12-07 09:53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뚜껑 있는 그릇을 가정집에서 보는 것이 드물어졌어요. ^^

yureka01 2015-12-07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 .몰랐습니다..저도 이런 기능을 모르겠더라구요.트랙백 걸기..해본적이 없었거든요 ..ㅎㅎㅎ^^..인용.. 감사합니다~~~

cyrus 2015-12-07 14:49   좋아요 1 | URL
가끔 이웃이 쓴 글을 읽고, 영감을 얻으면 감사의 의미로 먼댓글 기능을 사용합니다. ^^
 

 

 

 

오늘 오랜만에 MBC에서 하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봤다. 본방송을 챙겨보지는 않지만, 가끔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게 된다. 오늘 방송된 내용 중 하나가 영국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사랑 이야기다. 화가의 연애담은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존 에버렛 밀레이  「성 아그네스의 전야」 (1863년)

 

에피와 결혼한 이후에 그려진 그림이다. 밀레이는 에피를 그림 속 여인의 모델로 썼다. 그러나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 비평가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여인의 모델이 ‘러스킨의 전처’라는 사실에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거부감이 느꼈던 것일까. 비평가들은 그림 속 여인이 ‘앙상하다’, ‘역겹다’라는 식으로 심한 표현을 써가면서 비난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모습을 그릴 화가가 내정된 소식을 듣자마자 화를 낸다. 그 화가는 존 에버렛 밀레이. 무엇이 여왕을 분노하게 하였을까. 밀레이의 사생활이 여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밀레이가 유부녀와 결혼한 것이 문제였다.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엄격한 도덕성의 사회였다. 근면, 성실, 종교적이고 도덕적 가치가 강화되는 가운데 여성들은 성적 충동을 가져서는 안 되고, 재혼을 부도덕한 죄를 범한 것으로 여겼다. 밀레이는 실력이 출중한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이혼 경력이 있는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세간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밀레이와 결혼한 여자는 에피 밀레이. 화가를 만나기 전의 이름은 에피 러스킨이었다. 그녀의 전남편은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미술평론가인 존 러스킨이다. 밀레이, 에피 그리고 러스킨. 이 세 사람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밀레이에게 러스킨은 자신의 재능을 널리 알려주게 한 은인이었다. 밀레이는 러스킨의 집을 자주 방문했고, 에피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밀레이와 에피는 ‘화가-모델’의 관계를 넘어서서 사랑의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사회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랑을 더욱 간절한 원했던 사람은 에피였다. 그녀는 남편 러스킨과 6년 동안 성관계를 하지 못했다. 러스킨은 그녀와의 성관계를 거부했다. 아이를 갖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임신으로 에피의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식으로 궁색한 변명을 했다. 공허한 부부 생활이 지겨운 에피는 밀레이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일단 여기까지가 TV에 방송된 내용이다.

 

 

 

 

 

 

 

 

 

 

 

 

 

 

 

사실 러스킨이 성관계를 거부한 이유는 따로 있다. 미술평론가답게 그는 고대 그리스 미술에 심취했고, 옛것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미술을 강조했다. 그런 미술양을 공유한 화파가 바로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했던 ‘라파엘 전파’다. 밀레이는 이 화파에 속했다. 러스킨은 자신의 미적 취향과 실생활을 혼동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진 벌거벗은 여신상의 아름다움에 너무 빠진 나머지, 자신의 아내도 여신상처럼 아름다울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러스킨은 아내의 체모를 처음으로 본 순간부터 성관계를 피하기 시작했다. 털이 있는 아내의 몸에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에피는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마음은 점점 밀레이로 향한다.

 

에피의 말 못한 결혼 생활을 알게 된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친정으로 호출했다. 하필 그 날은 러스킨과 결혼한 지 6주년이었다. 그녀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회 법정에 결혼 무효 소송을 신청한다. 말 그대로 러스킨에게 이혼을 요구한 셈이다. 교회 법정은 그녀의 요구를 들어준다. 이로써 러스킨은 결혼 생활 6년 만에 이혼한다. 러스킨은 전처와 친구와의 결혼을 막으려고 ‘우정’을 강조해보지만, 에피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전쟁 소식보다 더 회자에 올랐다. 대중은 유부녀가 결혼 관계를 거부하는 시도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었고, 특히 화가의 친구가 그의 아내를 빼앗는 과정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왕 또한 이 사실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  「나의 첫 설교」(1863년), 「나의 두 번째 설교」(1864년)

 

 

 

밀레이는 우정과 자신의 명예를 과감히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했다. ‘부도덕한 만남’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반대로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두 사람은 보란 듯이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고, 에피는 밀레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켜줬다. 밀레이는 설교에 참석하는 자신의 딸을 그린 그림으로 명성을 얻는 데 성공한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밀레이는 준 남작의 자리에 오르고,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896년에 왕립 아카데미 회장으로 선출된다.

 

 

밀레이와 에피의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행복하게 끝이 난다....고 말할 줄 알았지.

 

글이 조금만 더 길어져도 끝까지 참고 읽어주기를 바란다. 밀레이의 성공에 가려져야만 했던 억울하고도 슬픈 사연이 있으니까.

 

밀레이는 자신의 실력으로 ‘은인의 아내를 빼앗은 자’라는 오명을 벗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에피는 ‘전 남편을 버린 이혼녀’라는 낙인을 쉽게 지우지 못했다. 에피는 여왕이 주관한 공식 행사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밀레이의 명성이 더욱 높아질수록 그녀의 사회적 위치는 더욱 좁아진다. 명사들의 사교장이라 할 수 있는 무도회장을 출입할 수 없었다. 에피는 자신에게 ‘러스킨의 전 부인’, ‘이혼녀’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밀레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여왕은 그의 집에 시종을 보내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묻는다. 밀레이는 석판에 “여왕 폐하께서 에피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적는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생하는 에피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향한 에피의 사랑은 진실하다는 점을 세상에 알리는 것. 여왕에게 전해준 부탁은 유언이 된다. 여왕은 그의 유언을 들어준다. 하지만 에피가 명예를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녀는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늙었고, 시력마저 떨어진 상태였다. 밀레이와 재혼한 지 40년 만이다. 에피 밀레이. 그녀는 사랑과 성을 억압했던 빅토리아 시대에 정말 고통스럽게 46년 간 부부 생활을 감내했다. 가부장적 사회는 그녀의 성적 욕망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에피가 밀레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죽을 때까지 섹스리스 부부 생활을 했을 것이다. 단지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과감하게 재혼을 선택해보지만, 도덕성을 강조하는 엄격한 사회는 그녀의 자유를 옮아 매려고 했다. 에피 밀레이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을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실천한 선구자적 여성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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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9-15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런 멋진 언니 너무 좋아_ 에피 밀레이는 운이 좋았지만 불행하게 침묵을 강요당하는 여인들이 너무 많아_ 아직까지도.

cyrus 2015-09-15 11: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지금도 돌싱녀에 대한 편견이 많아요.

인디언밥 2015-09-15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맨 위에 그림 좋아요.. 사연을 들어서그런가 확 와닿는 감정

cyrus 2015-09-16 13:21   좋아요 1 | URL
‘존 에버렛 밀레이’로 검색하면 좋은 그림이 많이 나옵니다. 햄릿의 미친 연인 오필리아를 그린 사람도 밀레이입니다.

에이바 2015-09-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밀레이도 멋지고요. 빅토리아 시대나 백년이 지난 지금이나 돌싱에 대한 눈치는 여전한 것 같다는. 지금은 그래도 쬐금 더 낫지만요. 이 책 출간된 후 읽었는데 기억나지 않아 찾아보니 2003년이군요! 십이년이 지났어요. 다시 한번 읽어볼까 싶어요.

cyrus 2015-09-16 13:41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내용의 책인데 품절되어서 아쉬워요. 유명 화가들의 사랑 이야기를 한 권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사실 이 책에 나온 이야기 중 몇 개는 서프라이즈에 방송되었을 거예요. 오래전에 모딜리아니, 달리 이야기를 본 적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