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신발」 (1887년)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 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반 고흐라는 이름에서 가장 많이 따라붙는 단어는 광기. 정신병에 시달린 끝에 권총 자살을 선택한 충격적 최후 때문이다. 정신병 환자의 광기가 위대한 예술가의 열정으로 포장되는 것이 못마땅하다. 대중은 반 고흐를 미친 화가로만 기억하는 탓에 그의 강렬한 색과 상징적 표현이 불타는 정신세계에서 번쩍 태어났을 거라고 오해한다. 반 고흐는 정신이 미쳐버려서 갑자기 그림을 잘 그려진 것이 아니다. 여러 화가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스스로 만족스러울 때까지 데생을 열심히 그렸다. 그를 미친 천재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노력을 잊히게 하는 하나의 오해일 뿐이다.

 

반 고흐는 절대로 미치지 않았다. 그는 외로움을 유난히 참지 못하는 사람이다. 애정 결핍에 울부짖고, 몸부림쳤을 뿐이다. 늘 자신의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고독과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면서 살았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매춘부가 있는 방을 찾았고, 괴롭지 않기 위해서 빈속에 압생트를 마셨다. 마지막으로 총구를 심장의 스위치에 겨눌 때까지 반 고흐에게 그림 작업은 고독과의 싸움을 멈추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반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데생을 열심히 그리는 이유를 설명한다. 첫 번째 이유는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두 번째 이유로는 비용이 많이 드는 유화보다 데생을 그리는 것이 수월하다. 고흐가 편지에서 언급하지 않은 세 번째 이유도 있다.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반 고흐 「타라스콩으로 향하는 길을 걷는 화가」 (1888년)

 

 

 

반 고흐는 그림으로 그릴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 산책도 즐겼다. 1888년 아를에 머물렀을 시기에 산책하는 고흐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어느 프랑스 사람이 간직하고 있다가 2005년에 열린 경매에 내놓은 적이 있었다. 실제로 고흐는 아를에 정착한 후,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의 풍경에 반해 아침마다 산책했다. 반 고흐는 아를의 따사로운 햇살과 전원 풍경을 사랑했다. 반 고흐는 유난히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네덜란드에 살았던 시절에 쥘 브르통이라는 화가를 존경한 나머지, 직접 그를 만나려고 했다. 반 고흐는 10프랑을 챙기고, 프랑스 국경 너머의 지역까지 70km를 혼자서 걸었다. 이때의 경험을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자랑스럽게 밝혔다.

 

반 고흐는 울적할 때마다 집 밖으로 나가 지칠 때까지 걸었을 것이다. 걷기는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려 준다. 머릿속에 가득한 고뇌 찌꺼기를 깨끗이 비우는 과정이다. 소요학파가 느릿느릿 걸으면서 진리를 발견하려 했다면, 반 고흐는 걸으면서 자신의 몸을 자연 속으로 던졌다. 그는 산책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고, 때로는 넘쳐나는 고독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 자연과 대화한다. 정원은 클로드 모네만 좋아했던 것이 아니다. 비록 모네처럼 멋진 정원이 딸린 집에 살아본 적은 없지만, 반 고흐도 정원을 무척 사랑했고, 그림으로 남겼다. 걷는 것이 몸에 밴 반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얼마나 갑갑했을까. 1889년 아를 병원에 입원한 그해 9월에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6주간 한 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못했어. 정원에도 못 나갔지. 하지만 다음 주에는 시도해 볼 거야라고 썼다.

 

반 고흐는 평생 아홉 점의 구두 그림을 남겼다. 하이데거는 그림 속 신발 주인은 고단한 노동의 삶을 살았던 농부 혹은 아낙네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미술사학자 샤피로는 하이데거의 해석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제작 연대를 근거로 내세워 반 고흐의 신발이라고 주장했다. 샤피로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발 그림은 반 고흐의 자의식을 표현한 자화상이다. 필자는 샤피로의 해석에 전적으로 손을 들어주고 싶다. 사실 하이데거의 해석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반 고흐가 밀레처럼 일하는 농부의 모습을 그렸던 경험을 근거로 해석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반 고흐는 밀레를 존경하던 습작 시절을 한참 지난 뒤에 신발 그림을 그렸다. 신발은 반 고흐가 죽을 때까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생필품이다. 무겁기만 한 고독을 양쪽 어깨에 짊어진 화가가 걸을 수 있도록 지탱해준 든든한 연장(延長)이다. 너덜너덜해진 신발에는 반 고흐의 외로움이 보이고, 거기에 고독한 인생의 체취가 남아있다. 이제 신발의 주인은 죽고 없어졌다. 틈만 나면 산책하는 신발 주인이 없어지면서 신발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림 속 신발은 주인의 부재를 슬퍼하며 울고 있다. 소금기로 남아야 할 신발의 땀 자국은 외롭게 계속 길을 걸은 자의 눈물이 된다. 신발은 진실을 알고 있다.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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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8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7-19 15:05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틀린 글자를 알려줄 땐 비밀 댓글로 설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stella.K 2015-07-18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맞아. 고흐는 외로움의 화가지 광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구두 그림을 보면 뭔가 짠해. 그지?
저 구두 그림과 시가 참 절묘하다.ㅠ

cyrus 2015-07-19 15:08   좋아요 0 | URL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다가 문득 반 고흐의 신발 그림이 생각났어요. 묘하더라고요. 외로운 반 고흐의 신발을 소재로 쓴 시 같았어요.

초딩 2015-07-18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 자연이나 사람을 (또는 사랑) 을 아름답게 표현한 한국 시인과 시집 좀 추천해주실 수 있으세요? 표현 아름다운.
시대는 상관 없구요 :)
좋아하시는 시인의 시집을 말씀해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
일방통행처럼 요청 드려 죄송합니다. 인용하신 시가 너무 좋고 또 요즘 한글말이 아름다운 시를 읽어 보고 싶어서 찾고 있던 중이어서요.

cyrus 2015-07-19 15:12   좋아요 0 | URL
제가 상대방에게 책을 추천해본 일이 잘 없는데다가 최근에 시집을 즐겨 읽기 시작한 터라 아로님이 좋아할만한 시집을 추천하기가 어렵네요. ㅎㅎㅎ 제가 선호하는 시인은 문인수, 황동규, 정호승, 안도현입니다. 이 분들이 쓴 시가 어렵지도 않아서 좋아해요. ^^

북다이제스터 2015-07-18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넘 좋아요. 이러다 국내 고흐 전문 일인자 되실 것 같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

cyrus 2015-07-19 15:1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요즘 고흐 관련 책만 읽다가 글의 소재가 나오면 바로 쓰는 편입니다. 그런데 북플은 ‘고흐’ 마니아를 만들어주지 않네요. ㅎㅎㅎ

라스콜린 2015-07-18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때 마다 감탄^^..) 이제야 비로소 저 신발에서 고흐의 외로움이 느껴지네요

cyrus 2015-07-19 15:15   좋아요 0 | URL
소설이나 영화에 비춰진 고흐가 아닌 정말 고흐의 실제 삶을 알고 난 뒤에 그의 그림을 보면, 진짜 그림에 대한 느낌이 확 옵니다. 사실 예전에 고흐의 신발 그림을 눈여겨보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고흐 책을 읽다보니까 저 신발 그림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yamoo 2015-07-19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그림 관련 페이퍼가 많네요. 좋습니다. 단지, 개인적으로 고흐는 좀 지겨워지는 감이 있어서요. 요즘은 미술책보단 건축쪽 책을 사재기를 하고 있어 미술 관련 책을 읽지 못해 이런 페이퍼가 참 유익합니다~ㅎㅎ

cyrus 2015-07-19 15:17   좋아요 0 | URL
저도 고흐 책을 3주 동안 읽으니까 지겹습니다. ㅎㅎㅎ 그래서 고갱에 관한 책도 읽고 있습니다. 저도 건축 책도 읽어봐야 하는데, 야무님께서 건축 분야 책을 추천해주실 수 있습니까? 기본 지식이 없다보니까 저 같은 초보 독자는 뭐부터 읽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


바람향 2015-07-19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고흐를 좋아해서 이런 글을 만나니 반갑네요^^ 예전에 서울 미술 전시회에서 고흐의 유명하지 않은 그림 한 점을 봤습니다. 제목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냥 풍경화의 작은 그림이었는데요. 그래도 고흐의 실제 그림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벅찬 기분을 느꼈습니다. 고흐의 유명하고 좋아하는 작품을 실제로 본다면 대체 어떤 기분을 받을지 상상도 안되었는데요. 언젠가는 고흐의 실제 작품을 꼭 봐야지,,, 다짐만 하고 있답니다^^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ㅎ

cyrus 2015-07-20 18:56   좋아요 0 | URL
바람향님이 가본 전시회를 저도 봤습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혼자서 서울까지 갔어요. 생각보다 고흐의 그림들이 대체로 크기가 작았어요. 자화상도 그렇고요. 지금 대구에서 고흐 미디어 아트 전이 열리고 있는데 역시 실물로 보는 것과 느낌이 확 차이가 났어요. ^^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자화상이라고 해서, 거울에 비추듯 자신의 모습을 사실적으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외부에 비치고 싶은 이미지, 오래 남기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거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미 큰 명성을 얻었던 렘브란트 역시, 자화상 속의 자신이 좀 더 거장답게 보이길 원했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세월이 흐를수록 렘브란트의 자화상에는 어두운색과 그늘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제 젊은 날의 모습은 없고 늙고 볼품없는 노인이 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에 주목하면서 평생 자신을, 아니 영혼까지를 화폭에 담아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을 철저하게 살펴봤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점점 늙어가는 삶에 대한 초탈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반 고흐의 자화상은 극도의 불안감에 대한 적극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자화상에는 일관되게 심각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강렬한 시선이 있다. 절망하는 한편에 도전의식이 자리 잡고, 불완전하고 불안해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항상 무언가를 갈구한다.

 

이름난 화가 중에는 유독 자화상을 그린 화가가 많다. 반 고흐와의 악연으로 알려진 고갱 또한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고갱의 인기는 반 고흐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반 고흐의 그림은 꾸준히 복제되고, 그의 이름이 들어간 노래는 지금도 라디오에 흘러나온다. 반면, 고갱의 이름은 반 고흐가 일으켰던 귀 절단 사건을 소개할 때에만 언급될 뿐이다. 이 이야기에서 고갱은 반 고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 최악의 파트너가 된다. 고흐의 자해 소동이 신문에 보도되어 동네 전체에 퍼지게 되자, 고갱은 아무 말 없이 노란 집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반 고흐의 귀는 그 자신이 자른 것이 아니라 펜싱을 했던 고갱이 잘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도 있었다. 올드한 세대라면 반 고흐의 치열한 삶을 그린 영화 ‘열정의 랩소디’에서 고갱 역으로 분한 앤서니 퀸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반 고흐의 엄청난 인기에 밀리는 바람에 우리나라에서 고갱은 과소평가를 받고 있다. 고갱의 자화상이 반 고흐와 렘브란트의 자화상 못지않게 흥미로운 그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된다. 알고 보면 고갱도 반 고흐처럼 불행한 일을 많이 겪었다. 반 고흐와 렘브란트처럼 고갱도 기쁨과 슬픔이 느껴지는 자화상으로 자신이 처한 주변 상황을 이야기했다. 

 

 

 

 

 

폴 고갱 「이젤을 앞에 둔 자화상」 (1885년)

 

 

 

고갱이 1885년에 그린 자화상을 보라. 인상주의 회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초창기 때 제작한 것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냥 평범한 느낌을 주는 자화상이다. 그렇지만, 자화상에 묘한 긴장감이 가득하다. 그림 속 고갱은 뭔가 쫓기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고갱이 앉은 공간이 비좁아 보인다. 고갱의 한쪽 손은 이젤로 향해 있지만, 붓을 확실하게 쥐어지지 않고 있다.

 

이 자화상의 제작 시기는 고갱이 화가가 되려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3년 차로 접어든 해이다. 원래 고갱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먹고 살기에 충분했던 주식중개인이었다. 이때 당시만 해도 고갱에게 미술은 취미였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분을 맺었지만, 모네와 르누아르는 고갱을 독창성이 부족한 아마추어 화가로 여겼다. 1882년 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고갱은 실직자 신세로 전락했다. 고갱 가족들에게는 실직자가 된 가장의 모습에 절망했으나 고갱 본인은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할 중대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섯 아이를 키우는 덴마크 사람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림에 전념하기로 했다. 곧 마흔을 앞두는 남편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아내는 탐탁지 않았다. 아내의 냉정한 태도는 외로이 그림을 그리는 고갱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었고, 설상가상으로 대중과 평론가들은 고갱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이 있는 보금자리와 화가들의 세계, 둘 중 한 곳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고갱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불만족스럽고, 그림에 대한 내적 고민이 많았다. 「이젤을 앞에 둔 자화상」은 그림에 열중하는 화가의 모습이 아니라 불투명한 미래 앞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가장의 모습이다. 좁게 느껴지는 공간은 고갱의 열악한 삶을 보여준다.

 

 

 

 

 

 

폴 고갱 「레 미제라블」 (1888년)

 

 

 

「이젤을 앞에 둔 자화상」을 그리고 난 뒤, 3년이 지나서야 동료 화가들은 고갱의 능력을 인정했다. 고갱은 브르타뉴 지방의 퐁타방이라는 시골 마을에 머물면서 친분이 있는 화가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토론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퐁타방 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화가 모임이 만들어지면서 고갱은 퐁타방 파를 이끄는 대표 화가로 인정받았다. 이때가 고갱의 첫 번째 전성기였다. 1888년에 제작된 「레 미제라블」은 성공대로를 걸으면서 한결 여유로워진 ‘화가’ 고갱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일단 1885년에 그린 자화상에 비하면 색채가 상당히 밝아졌다. 고갱은 자신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으로 묘사했다. 그림 오른쪽 하단에 ‘레 미제라블, 빈센트, 그리고 고갱’이라는 사인이 있다. 고갱은 이 자화상을 반 고흐에게 선물로 주었다. 친분이 있는 화가들은 자신의 모습이 있는 자화상을 서로 주고받았다. 반 고흐가 먼저 자신의 자화상을 고갱에게 주었고, 이에 대한 답례로 고갱은 「레 미제라블」 자화상을 제작한 것이다. 서명 위에 있는 사내의 옆모습이 그려진 그림은 퐁타방 파 소속 화가였던 에밀 베르나르의 초상화이다. 베르나르는 고갱과 반 고흐와 친했다.

 

하지만 고갱은 여전히 자신이 대중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사실 그가 주도한 ‘퐁바방 파’는 새로운 기법을 추구하는 진보적인 화파였으나 인상주의파의 영향력만큼으로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회로부터 외면 받은 장발장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반 고흐와 베르나르에 비하면 고갱은 이들보다 좀 더 앞선 화가임은 분명했다. 고갱이 아무리 장발장 코스프레를 했어도 고갱 특유의 매서우면서도 생기 있는 눈빛은 그대로다. 고갱은 눈빛으로 자신이 반 고흐와 베르나르보다 한 수 더 위라는 점을 은근히 과시한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 있는 자화상」 (1890년)

 

 

「황색 그리스도 있는 자화상」은 고갱의 자화상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왼쪽에는 1889년에 완성된 「황색 그리스도」가, 오른쪽에는 자신의 얼굴을 그로테스크하게 형상화한 도자기 병이 놓여 있다. 자화상은 거울에 비친 상을 그리는 장르라서 예수의 얼굴이 오른쪽 아래로 향해 있다. 이 자화상에서 예수는 예술가의 고뇌를 상징한다. 고갱은 예술에 대한 외로운 투쟁을 경건하게 묘사하기 위해 예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그림 왼쪽에 배치했다. 항아리 병은 고갱이 그토록 동경했던 '야만', '원시'를 상징하는 페르소나다. 그는 문명의 때에 묻지 않은 고귀한 야만인이 되고 싶은 문명인'이었다. 파리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타히티로 가서 '야만'의 가면을 써서 타히티 사람이 되었고, 다시 파리로 돌아올 때는 '야만'의 가면을 벗고 문명인이 되었다. 고갱의 세 가지 얼굴을 그린 작품으로, 화면 안에서 화가는 자신의 다양한 인격적 측면을 보여 준다.

 

 

 

 

 

 

폴 고갱 「골고다 근처의 자화상」 (1896년)

 

 

 

「골고다 근처의 자화상」에서 고갱은 예수로 변신했다. 그러나 고갱의 표정은 침울하다. 검은색으로 가득한 골고다 언덕은 고갱을 집어삼킬 듯하다. 예수라기보다는 늙고 지친 병자처럼 보인다. 말년의 고갱은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해 다시 열대의 섬으로 돌아가서 초라한 여생을 보낸다. 파리는 고갱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고, 가족과 동료 화가들은 그의 곁을 떠났다. 매독과 피부병은 노쇠한 고갱을 더 지치게 하였다. 이제 고갱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죽음. 어두컴컴한 배경 속에 저승사자가 고갱을 노려본다. 고갱은 목덜미에 스치는 저승사자의 눈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생기 잃은 고갱의 눈빛에는 삶에 대한 미련을 찾아볼 수 없다.

 

이제 예술가의 자화상은 더 이상 단순한 인물화에 머물지 않는다. 화가의 얼굴은 저마다의 경험과 세상의 풍파에 의해 음영이 달라진다. 자화상은 한 사람의 일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그림이다. 우리는 저만치 떨어진 거리에서 캔버스 안에 남아있는 한 사람의 인생 드라마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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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14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과 6펜스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죠. 자유로운 영혼이여.. 첫번째, 세번째 자화상만 봤었는데요.. 렘브란트 자화상을 보면 당시 그가 앓았던 질병도 짐작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cyrus 2015-07-15 18:1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최근에 고흐의 자화상을 통해서 고흐의 병명을 추정하는 연구 결과도 나왔어요. 몸의 소설은 아직 안 읽어봤습니다. 고갱 책을 더 찾아봐서 읽은 뒤에 소설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

yamoo 2015-07-1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고갱이군요!! 고갱에 관계된 미술책을 몇 권 읽었습니다. 그의 자서전 격이 책도 봤습니다. 근데, 아직달과 6펜스는 완독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관심있는 화가를 보니 반갑네요...데이비드 호크니도 함 다뤄주세요. 저 완전 좋아하는 화가입니당~ㅎ

cyrus 2015-07-15 18:16   좋아요 0 | URL
저도 몸의 소설은 안 읽어봤습니다. 그래도 고갱의 실제 삶 자체가 드라마틱합니다. 그가 처한 상황에 연민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족을 외면하고 타히티 소녀들을 자신의 성적 욕구를 푸는 대상으로 여기는 고갱의 모습이 불편했습니다. 나중에 호크니의 책을 다시 잃어봐야겠어요. ^^

바람향 2015-07-16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갱보다는 <달과 6펜스>를 먼저 읽었는데요. 주인공이 이제 자신만의 삶을 살겠다며 가족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는데, 그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 주인공이 실제 화가인 고갱이었다는 것을 알고 고갱의 삶이나 작품들을 찾아보기도 해서 제게는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책과 화가네요^^ㅎㅎ cyrus님~ 미술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ㅎㅎ

cyrus 2015-07-16 20:05   좋아요 0 | URL
어렸을 적에 위인전으로 반 고흐와 고갱이 누군지 처음 알았어요. 두 사람의 삶에 관한 책을 읽으니까 위인전에서 봤던 것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어요. 특히 고갱이 아내와 자식이 있는데도 원주민 소녀들을 정부로 삼은 사실은 충격적이었어요.
 

 

 

 

 

 

 

 

 

 

 

 

 

 

 

 

 

 

 

 

몇 년 전에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노래방을 많이 갔다. 말 그대로 노래방 정모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그땐 아이돌에 열광하는 젊은 친구들도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는 조용필의 ‘Bounce’가 나오지 않았다. 20대에게 조용필은 왕년에 잘 나갔던 가수였고, 그의 노래를 즐겨 듣는 20대를 찾아볼 수 없었다. 부모님은 조용필 노래를 워낙 좋아해서 조용필의 인기곡을 모은 카세트테이프를 자주 들었다. 거의 수백 번 정도 지겹도록 조용필의 노래를 듣다 보니 조용필 음악의 진가를 벌써 알게 되었다. 노래방에서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부르면 친구 녀석들은 키득키득하면서 웃었다. 그들은 독백이 절반을 차지하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우스운 노래로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독백이 마음에 들어서 노랫말이 많아도 이 노래를 꼭 노래방에서 불러본다. 실제로 꼭대기에 만년설이 덮인 킬리만자로 산에 표범은커녕 원숭이조차 올라갈 수 없지만,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의 방황과 고독, 꿈과 희망, 존재의 의미를 대변하는 듯한 긴 독백은 언제나 들어도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가사 중에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란 대목이 특히 끌린다. 산정 높이 홀로 올라가는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고흐는 통하는 점이 있다.

 

고흐는 짧은 생애 동안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한 고독한 이방인이었다. 그의 주위는 항상 쓸쓸했으며 고독한 환경 속에서 생활했다. 물론 괴팍한 고흐를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꽤 많은 양의 편지를 주고받은 동생 테오는 고흐의 삶을 논할 때 고갱과 함께 언급된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편배달부 조세프 룰랭, 화가 카미유 피사로, 그리고 병든 고흐를 진찰해준 폴 가셰 박사도 빠질 수 없다. 고흐는 자신에게 호감을 느낀 사람을 만나 교제를 맺으면 그림을 통해 기쁨의 답례를 해주었다. 고흐는 가난한 자신에게 무료로 그림 도구를 빌려준 탕기 영감과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해준 룰랭 가족을 위해 초상화를 그려줬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은 고흐의 성격상 고마운 사람들에게 보답해줄 수 있는 것이 그림뿐이었다.

 

 

 

 

 

 

반 고흐 「슬픔」 (1882년) 

 

 

고흐가 동생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외부 사람과의 관계가 서툰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가장 설득력 있게 보는 원인이 어머니와의 관계다. 고흐는 1853년에 목사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실제로 고흐는 맏아들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나기 일 년 전에 고흐의 형이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죽은 고흐의 형 이름은 빈센트였고, 세상에 사라질뻔한 이름은 1853년에 태어난 아이가 가지게 되었다. 고흐의 삶을 소개하는 책에서는 죽은 형과 화가 고흐가 태어난 날, 장소 모두 일치한다고 설명한다. 불행의 씨앗을 예고하는 것 같은 비극적인 우연한 일치는 고흐를 세상에서 불행한 화가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과연 이 기록이 정말 사실인지 미심쩍지만, 실제로 어린 고흐는 죽은 형의 무덤 근처에 있는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자랐다. 고흐는 죽은 형이 있다는 사실에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아들의 마음을 몰랐던 고흐의 어머니는 죽은 형의 무덤에 고흐를 대동했다. 고흐는 일기에서 자신은 어린 시절에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다고 적었다. 어머니는 죽은 형을 그리워했고, 형의 이름만 물려받은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비관적인 생각은 고흐를 평생 괴롭게 하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고흐는 어머니와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었고, 자신이 원하는 이상형을 만나 용기 있게 청혼을 하면 연거푸 싸늘한 거절만 당했다. 고흐는 좋은 반려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가장이 되고 싶었지만, 불행하게도 고흐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나마 고흐가 가장 역할을 했던 시기가 창녀 시엔 호르닉과의 동거였다. 그는 시엔이 낳은 아기를 자기 아들로 받아들여서 시엔과 함께 살려고 했으나 고흐 집안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 사건 또한 고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가슴 아픈 일이었으리라.

 

 

 

 

 

살바도르 달리 「욕망의 수수께끼 - 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1929년)

 

 

 

 

 

살바도르 달리 「죽은 형의 초상」 (1963년)

 

 

 

고흐처럼 늘 광기라는 단어가 항상 따라오는 스페인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도 어린 시절 고흐와 같은 경험을 했다. 살바도르라는 이름이 원래는 죽은 형의 이름이었다. 달리의 부모는 어린 달리를 형의 묘지에 데려갔다. 달리는 형의 그늘 속에서 성장했고, 보이지 않는 형의 영혼이 그를 괴롭혔다. 달리의 부모는 어린 달리를 귀하게 보살폈다. 생후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달리의 형 살바도르에게 해주지 못한 부모의 애정은 어린 달리에게로 향했고, 이로 인해 달리는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화가로 성공한 달리는 유명 인사들과 만나기를 좋아했고, 범상치 않은 언사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달리의 그림 욕망의 수수께끼 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죽은 형의 초상은 달리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어머니와 죽은 형의 기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특히 욕망의 수수께끼 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에서 치즈처럼 생긴 형체의 구멍 안에 나의 어머니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그 단어는 모성애를 애타게 갈망하는 달리의 욕망, 마음 속으로만 외쳐야해던 달리의 구슬픈 목소리였다.

 

고흐와 달리, 이 두 사람은 생전에 미치광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누구는 광기의 본질을 정서불안이라고 말하며, 또 누구는 정신병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정서불안에 시달리고, 특이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어떤 요인이나 고흐와 달리를 극도로 불안정한 정신 상태로 몰아갔을 것이 분명하다. 고흐와 달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대체물이라는 박탈감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사랑의 대상이 생기면 지나치게 집착하는 성격이 되었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두 사람에게는 그림만이 구원이었고 그림만이 사랑이었다. 그들이 남긴 그림은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아이러니다.

 

 

 

 

P.s 테오는 자신의 아들에게 형의 이름과 같은 ‘빈센트’라고 지어줬다. 테오의 아들은 고흐와 그의 아버지보다 오래 살았고 88세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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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7-03 0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니뫼니 해도 탕기 할아버지가 최고죠....
갈 때 자주 먹을 것을 싸가지고 갔다고 하더군요. 고흐 주려고 말입니다.
탕기네 가족 그림도 많이 그린 것으로 압니다.

cyrus 2015-07-03 18:56   좋아요 0 | URL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고흐 전에서 탕기 영감의 초상화를 실제로 봤습니다. 생각보다 그림이 컸습니다. 탕기 영감에 대한 고흐의 존경심이 묻어난 그림이었습니다.

푸르미원주 2015-07-03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흐와 달리의 비슷한 출생, 성장과정과 그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네요. 고흐 그림 저도 좋아해요. ^ ^
글 서두에 조용필 노래를 끄집어내신 이유를 주욱 읽으니 공감가요.

cyrus 2015-07-03 18:56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단발머리 2015-07-04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고흐의 형에 대한 이야기를 님의 페이퍼를 읽고 처음 알았네요.
역시 정보와 재미를 듬뿍 얻고 갑니다.
제 친구 중에도 ˝킬리만자로의 표범˝ 즐겨 부르던 친구가 있었는데, 친구 이름이 가물가물하네요.

cyrus 2015-07-06 13:48   좋아요 0 | URL
사소한 가족사라서 고흐의 죽은 형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는 책도 간혹 있습니다.

오쌩 2015-07-0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계로 부터의 소외가 오히려 그림에 몰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사랑을 갈망하고 불일치에 고통받고,사후에 이르러 인정받고 사랑받으니.님말대로 아이러니네요.

어쩌면 고흐같은 방황과 고독이 필요조건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결핍은 어쩔수없는 천형인지도 모르겠네요.
고흐가 테오에게 쓴편지를 보면서 감동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잘보고갑니다.

cyrus 2015-07-06 13:56   좋아요 0 | URL
네, 고흐가 목사의 꿈을 완전히 접고 나서 할 수 있는 게 그림 그리는 일뿐이었어요. 이제 사회생활을 하고 있어야 할 나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이렇다 보니 고흐가 사람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려서라도 인정을 받고 싶었을 겁니다.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 때 서양미술사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었다. 그 수업은 교양과목이 회화과 2학년 학생들이 수강하는 전공필수과목이었다. 내 전공은 행정학이었지만,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과감하게 타과 전공 수업을 신청했다. 수강인원 50명 중에 나를 포함해서 남학생은 단 3명이었고, 회화과 전공이 아닌 학생은 4명이었다. 성적을 잘 받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하는 회화과 여학생들과 이런 학생들이 성적을 잘 받기를 원하는 교수의 보이지 않는 텃세(?)가 신경 쓰였지만, 이미 독서를 통해서 서양미술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진도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교수는 수업내용을 척척 알아듣고 이해하는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양미술사 과제는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이었다. 회화과 학생들은 그림을 제작하고, 제출해야만 졸업할 수 있기에 언제든지 그림 제작에 사용할 소재들이나 습작들을 포트폴리오 형태로 준비한다. 쉽게 말하자면, 그림 제작을 위한 기본 아이디어를 정리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나도 회화과 학생들처럼 포트폴리오를 제작했으며 학생들 앞에서 공개 발표까지 하게 되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형' 연구 3부작」 중 일부 (1962년)

 

 

 

서양미술사 수업을 듣는 회화과 학생 중에 머리가 똑똑한 친구가 있었다. 여학생이었는데 수업을 듣는 자세가 다른 학생들보다 바른 편이었고, 교수도 그 학생의 재능을 유심히 눈여겨 봤다. 교수는 똑똑한 학생들을 뽑아서 발표를 시켰다. 당연히 그 여학생도 포트폴리오 발표자로 선정되었다. 여학생이 공개한 습작은 빈방 한가운데 돼지고기가 덩그러니 놓인 상태를 그린 것이었다. 여학생은 이 그림을 축 늘어진 돼지고기가 세상과 단절되어 빈사 상태에 빠진 고독한 현대인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교수는 30분 동안 진행된 여학생의 발표를 말없이 끝까지 다 듣고 나서, 습작에 대한 평가를 밝혔다. 여학생의 돼지고기 그림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이 떠올린다고 말했다. 이어서 여학생의 제작 의도는 좋았으나 그림 소재가 된 돼지고기가 이미 베이컨이 사용한 적이 있어서 독창력 면에서는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교수는 여학생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학생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어요?" 여학생은 베이컨의 그림이 좋아서 도록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교수는 대가의 그림을 무조건 모방하기만 하면 다음에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믿는 여학생의 착각을 지적했다. 대가의 그림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 그저 그림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림 일부를 제 것인 마냥 사용하면 절대로 독창적인 그림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창작을 위한 모방이 아닌 남의 것을 그대로 베낀 표절이 될 수 있으니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 점을 꼭 명심하라고 당부했다.

 

 

 

 

 

 

 

 

 

 

 

 

 

 

 

 

이때 당시 교수의 뼈 있는 지적을 제대로 이해하는 회화과 학생은 과연 몇이나 되려나. 교수는 서양미술사를 가르치면서 모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위대한 화가들은 정식으로 화가가 되기 전, 그러니까 수련생 시절에는 미술관에 가서 대가들의 그림들을 끊임없이 모사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대가나 스승의 작품을 베끼는 것은 그림 제작에서 중요한 훈련이다. 마네는 벨라스케스의 표현력에 감탄하여 그의 그림을 모사했고, 마네를 존경했던 모네는 마네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우리가 존경하는 위대한 화가들은 그림 실력이 출중해서 단번에 대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니다. 그들도 나름 그림을 잘 그리려고 몇십 년 동안 남의 그림을 베끼던 시절이 있었다. 대가의 그림을 반복적으로 모사하면 대가의 능숙한 표현력이 자연스럽게 손에 배게 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는 대가의 표현력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능력을 갖춘 화가가 성공의 길을 걸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780년)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종교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780년)는 오늘날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고야의 걸작이다. 이 그림은 젊은 고야가 이제 막 정식 화가로 발돋움하기 직전에 그려진 초창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고야는 원래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제작하는 일을 했다. 고야가 활동했던 18세기 유럽에 귀족이나 왕족들이 선호하는 고급 실내 장식품이 유행이었다. 고야는 직업상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화가'가 아니었다. 평생 태피스트리 밑그림 제작하는 일에 전념하면, 이름 없는 '장인'으로 남을 뿐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성공에 대한 욕심이 많은 고야는 세상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여 화가가 되리라 결심한다. 고야의 목표는 궁정화가가 되는 것. 궁정화가가 된다면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다.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일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무명의 고야가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당시 스페인의 수석 궁정화가는 독일 출신의 안톤 라파엘 멩스(1728~1779)였다. 멩스의 신고전주의적 화풍은 스페인 왕족들을 흡족 시켰고, 멩스는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오늘날에 멩스는 잊혀진 화가가 되었지만, 고야가 유명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멩스는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멩스가 1779년에 사망하자, 궁정화가와 왕립 아카데미 회원직에 공석이 생겼다. 이 기회를 고야가 그냥 놓칠 리가 없다. 고야는 명예로운 두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그림을 제출하기로 했다. 제출한 그림이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인정받으면 정식으로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고야가 아카데미에 제출한 그림이 바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다. 이 그림 덕분에 고야는 아카데미 회원 자리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고야의 명성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화가로서의 꿈의 목표인 수석 궁정화가 자리를 얻기까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고야는 기어이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631년, 왼쪽)

안톤 라파엘 멩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761~1769년, 오른쪽)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잘 그린 그림에 속하지만, 고야만의 표현력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고야의 걸작들과 비교하면 작품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 그림 속에는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싶은 무명의 태피스트리 밑그림 제작자의 열망만이 보일 뿐이다. 고야의 세속적 열망 때문인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에 겨워하는 예수의 자세는 마치 십자가에 억지로 매달린 마네킹을 보는 듯하다. 그림을 좀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고야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눈에 익은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 가면 고야의 예수 그림과 비슷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렇듯 고야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기존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따라 그린 것에 불과하다. 고야는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싶은 마음에 대가의 방식을 의도적으로 대놓고 차용했다. 고야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벨라스케스를 존경하여 그의 그림을 모사했다. 1631년에 벨라스케스가 그린 예수 그림을 고야는 틀림없이 봤을 것이다. 또 스페인 내에서 알아주는 멩스의 예수 그림을 고야가 전혀 모를 리 없다. 벨라스케스와 멩스의 그림을 고야의 그림과 비교해보라. 고야가 두 점의 그림에서 빌린 표현법을 확인할 수 있다. 어두운 배경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하늘 위로 고개를 향하면서 괴로워하는 예수의 표정은 멩스의 그림에서 빌렸다.

 

이 정도면 고야는 대가의 그림을 베낀 비양심적인 사람으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는 고야를 남의 그림이나 베끼는 데 능숙한 최악의 화가라고 욕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공개되었을 때에도 아카데미로부터 큰 호평을 얻었다. 아카데미는 고야가 대가의 그림을 베껴 그린 사실을 다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고야는 창작을 위한 모방을 능숙했기 때문에 아카데미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훌륭한 그림으로 인정했다. 아카데미가 원했던 것은 대가의 표현 양식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 그릴 줄 아는 화가였다. 고야는 아카데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만약에 고야가 숙련되지 않은 실력으로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예수를 그렸다면, 아카데미 회원직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옛날 화풍을 선호하고 고집하는 아카데미의 심미안 덕분에 고야는 성공한 화가가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데 성공한 고야는 왕족과 귀족 들이 좋아할 만한 화려하고 장식적인 그림만 그리지 않았다. 벨라스케스와 멩스 같은 자신이 존경했던 과거의 대가를 뛰어넘기 위해서 개인적인 표현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수석 궁정화가로 임명된 이후부터 고야는 과거 화풍에서 벗어난 그림들을 그렸고 전보다 많은 명성을 얻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년)

 

 

 

 

 

조르조네 「전원의 합주」(1508~1509년, 왼쪽)

라파엘로의 그림 복사본 (오른쪽)

 

 

우리는 예술에서 창작을 위한 모방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할까?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고야처럼 훌륭한 그림으로 인정받지만, 가끔 표절로 문제 되는 경우가 있다. 마네도 고야처럼 벨라스케스를 존경하여 벨라스케스의 방식을 빌려서 그림을 그렸는데 살롱으로부터 그저 대가를 흉내 낸다는 비판을 받았다. 살롱의 보수적인 그림 평가에 불만을 품은 마네는 다음번에 열리는 살롱에서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림 한 점을 제출했다. 그 그림이 바로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년)였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라파엘로의 그림 복사본과 조르조네의 「전원의 합주」(1508~1509년) 일부를 빌려서 고전적 양식을 따랐다. 여기에 관객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나체를 그려 넣어 고전적 방식을 과감하게 변주했다. 지금까지 그림 속에 벌거벗을 수 있는 여자는 신화 속에 나오는 여신만 가능했다. 마네는 길거리를 지나가면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여인을 그림 속에서 옷을 벗기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시대를 앞서간 마네의 도발적 표현은 당연히 살롱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이 그림으로 마네는 근대 회화의 시발점을 알리는 선구자로 인정받았다.

 

 

 

 

 

 

 

 

 

 

 

 

 

 

 

미술에서 모방은 관대하게 인정하는 편이다. 다만, 창작과 동일하게 보는 모방과 남의 것을 자신이 만든 것처럼 흉내를 내는 표절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윌컴퍼니, 2015)의 저자이자 미술사학자인 카롤린 라로슈는 창작을 위한 모방의 조건을 명시한다. 화가는 선대 화가 중 한 명을 전적으로 인정하여 선대 화가의 그림을 모방했음을 밝혀야 한다. 여기서 그림을 모방하는 데서 끝나면 안 된다. 이제 화가는 선대 화가의 기량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만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라로슈의 말처럼 위대한 화가들은 선대 화가의 옛 방식을 답습하되, 단점을 발견하면 이를 새롭게 바꾼 방식을 구사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그린 마네처럼 말이다. 표절 논란에 휩싸인 작가 신 모 씨의 변명 입장을 보면서 3년 전에 회화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당부했던 말을 곱씹는다. 아무리 좋은 문장, 좋은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모방에만 그친다면 훌륭한 걸작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신 모 씨는 창작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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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서치 2015-06-20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는 느낌이네요.. 문체가 화려하고 간결한 것이.. 내용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고요.. 얼마나 글을 많이 써야 이런 글이 나오는지... 정말 부럽네요

cyrus 2015-06-20 22:05   좋아요 0 | URL
글을 쓰다 보니 내용이 길어지게 되었는데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초딩 2015-06-2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가 물고 있어서 글을 다 읽지는 못했는데 교수님이 지적한 돼지고기 이야기는 지금의 문단 뿐만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

cyrus 2015-06-22 10:24   좋아요 0 | URL
그 때 교수님의 짧은 말씀이 지금에서야 중요하게 들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마음에 드는 걸 내 것으로 취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절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라스콜린 2015-06-22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작을 위한 모방과 베끼기만 하는 표절에 대한 교수님의 말씀이 참 마음에 와 닿네요.. 잘 읽었습니다 ^^

cyrus 2015-06-22 10:2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라스콜린님. ^^
 

 

 

‘프레너미’는 ‘Friend(친구)’와 ‘Enemy(적)’가 합쳐진 신조어다. 협력하면서 동시에 경쟁하는 관계를 뜻한다.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는 반 고흐와 폴 고갱은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유명한 프레너미다. 진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으면서 동시에 라이벌 관계였다. 두 화가의 성격과 창작 방식은 대조적이었지만 서로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고,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서양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면 흥미진진한 프레너미를 만날 수 있다. 프레너미 관계를 형성한 예술가들은 지속적인 노력과 합당한 경쟁을 통해 훌륭한 걸작을 탄생시켰다.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마티스와 피카소도 그랬다. 창의적인 사람은 라이벌을 자기 진화의 스승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자존심이 세서 종종 극단적인 상황을 연출하여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기도 한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자신의 귀 일부를 자른 고흐처럼 말이다. (최근에는 고흐와 고갱이 격렬한 언쟁을 벌이다 고갱이 홧김에 또는 자기방어를 위해 펜싱 검으로 고흐의 귓불을 잘랐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고흐와 고갱 이야기가 많이 알려지다 보니 에두아르 마네와 에드가 드가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 두 사람도 평생 막역한 사이로 지냈으나 가끔 불편한 갈등 관계를 빚기도 했다. 마네는 인상파 그룹의 전시회에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상파 그룹은 마네의 참신한 기법을 지지했다. 마네는 인상파 그룹의 아지트인 카페 게르부아에 자주 드나들었다. 인상파 그룹의 정기적 모임을 통해 마네는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과 어울릴 수 있었다. 드가를 인상파 그룹에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 마네였다. 마네는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드가의 능력을 처음으로 눈여겨봤다.

 

그렇지만 드가에게 약점이 있었는데 지나치게 날카롭고 예민한 성격이었다. 드가는 서슴없이 동료 화가의 그림에 대해 독설을 하기도 했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인상파 그룹에서 만나기가 껄끄러운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도 마네는 사귀기 쉽지 않은 드가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잠깐 냉각 상태가 된 사건이 있었다.

 

 

 

 

 

 

에드가 드가  「에두아르 마네 부부」 (1868~1869년경) 

 

 

 

드가는 마네의 부인 쉬잔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그 연주를 감상하는 마네의 모습을 그렸다. 완성한 그림을 마네에게 선물했고, 마네는 그 답례로 자두가 있는 정물화를 드가에게 주었다. 그런데 마네는 드가가 그린 쉬잔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부인의 얼굴이 나오는 부분을 캔버스로 세로로 잘라 내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드가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절반이 잘려나간 자신의 그림이 마네의 아틀리에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 드가는 불쾌한 마음에 그 그림을 들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마네가 선물한 정물화를 돌려주었다. 사실 마네의 행동은 경솔했다. 그림을 자신의 자식처럼 여기는 화가 입장에서는 자존심을 짓밟는 행동이다. 까칠하기로 유명한 드가 입장에서는 엄청 화가 났을 텐데 마네의 정물화를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낸 것은 다행한 일이다. 만약에 드가도 마네의 정물화를 훼손하여 돌려보냈다면 고흐와 고갱처럼 예전 관계를 회복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드가는 마네의 정물화를 돌려보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행동에 후회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마네를 바라보는 드가의 본심을 알 수 있다. 드가는 자신의 그림을 먼저 알아주고, 인상파 화가들에게 자신을 소개해 준 마네를 늘 존경해왔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또 두 사람이 추구하는 예술 주제도 같았다. 19세기 파리의 풍속을 그림에 담으려고 노력했으며 특히 인상파 회화 형성에 영향을 준 보들레르의 사상에 심취했다. 드가는 보들레르의 글을 읽었고, 마네는 드가에게 빌려준 보들레르의 전집 중 한 권을 돌려달라고 편지로 부탁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마네와 드가가 처음 만난 장소는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화가를 꿈꾸는 지망생들은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 걸작들을 모사했다. 마네를 처음 만났던 해인 1862넌에 드가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모사하고 있었는데, 마네 역시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선호했다.

 

 

 

 

 

 

에두아르 마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859년) 

 

 

 

 

 

에드가 드가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875~1876년)

 

 

마네와 드가의 그림을 프레너미의 관점으로 비교해서 보면 두 사람 다 공통으로 추구했던 미학적인 관점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59년에 완성한 마네의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와 역시 같은 제목인 드가의 1876년 작 그림을 보라. 두 그림이 처음으로 살롱전에 출품했을 때 혹독한 반응을 얻었다. 관객과 비평가들은 살롱전에 어울리지 않은 주제에 심기가 불편했다. 마네의 「압생트」에는 주정쟁이가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중독성이 강하기로 유명한 압생트 한 잔이 놓여 있다. 주정쟁이는 이 독한 술 한 병을 혼자서 다 마신 듯하다. 그의 얼굴을 봐서는 오랜 음주로 인한 취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술병과 배경에 있는 주정쟁이의 그림자는 사회에서 소외당한 고독한 주정쟁이의 암울한 현실을 암시한다. 드가의 「압생트」도 마찬가지다. 두 남녀는 텅 빈 카페에 앉아 있다. 그런데 마네의 「압생트」의 주정쟁이처럼 두 남녀도 고독한 분위기에 지배당했다. 여자는 압생트를 받아놓고 무료한 듯 넋 빠진 표정을 지으면서 앉아 있고, 남자는 아예 여자 쪽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다른 곳으로 향한다. 서로 아무런 소통도 못 하면서 말이다. 마네와 드가의 「압생트」는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두 그림 속 화면 전체가 술 냄새로 진동하고 있다. 매혹적인 초록색 빛깔을 드러내는 압생트는 강렬한 도시의 고독을 잊으려는 도시인을 유혹한다. 근대 파리의 우울과 고독을 이만큼 잘 드러내주는 그림들이 또 있을까.

 

 

 

 

 

 

에두아르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1882년) 

 

 

 

마네가 죽기 전에 완성한 그림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화려한 파리의 이면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대리석 바에 있는 리큐어와 샴페인은 파리지앵의 감각적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음료이다. 술집의 여급은 드가의 「압생트」에 나오는 여인처럼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의 표정은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딱 어울린다. 그녀 또한 마네의 「압생트」의 주정쟁이처럼 도시에 소외된 하층계급 시민이다. 거울 속에 비친 화려한 술집 내부의 광경은 술집에 갇혀 있는 동시에 유흥의 쾌락에 소외된 여급의 상태와 대비된다. 그림 배경으로 설정된 거울은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이중적 장치다. 현실에서 행복함을 찾고 싶은 여급은 자신도 화려한 파리지앵으로 사는 삶에 합류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녀의 소망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 그녀가 바라보는 술집 광경은 도시가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하다. 그녀가 집착하는 환상은 지난한 현실을 버텨내기 위한 일시적인 안락일 뿐이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왼쪽 위 끝에 공중 곡예사의 다리가 보인다. 그림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단번에 확인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을 소개하는 미술 서적에서는 다리만 드러낸 공중 곡예사의 정체에 관한 설명을 간과한다. 마네는 왜 공중 곡예사의 다리를 그려 넣었을까? 그냥 관객의 주의를 끌기 위한 마네의 장난기 섞인 맥거핀일까?

 

 

 

 

 

에드가 드가  「페르낭도 서커스의 라라 양」 (1879년)

 

 

 

나는 마네가 의도적으로 그려 넣었을 거로 생각한다. 서커스는 근대 파리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며 인상파 회화에서 많이 다룬 주제이기도 하다. 파리에는 파리지앵의 몸과 마음을 풀어놓고 즐길 수 있는 공간들이 즐비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술집, 카페 그리고 서커스 공연장이었다. 폴리 베르제르는 술집, 카페, 서커스 공연장을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으니 공중 곡예사의 다리가 그림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공중에 매달린 곡예사의 모습은 인상파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드가도 서커스 공연을 자주 보러 갔는데 ‘라라’라는 이름의 여자 곡예사의 공연 장면을 그려냈다. 라라는 양 무릎과 발목이 묶인 채 그네에 매달려 대포에 불을 붙이는 묘기를 선보였다. 드가가 묘사한 그림 속 라라는 점점 공중으로 뜨는 것처럼 보인다. 아슬아슬하게 그네에 매달린 곡예사의 모습은 곡예와 같은 하루를 보내는 도시인의 고단한 삶을 상징한다. 마네가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에 공중 곡예사를 은근슬쩍 그려 넣은 의도는 쾌락의 환상을 애써 붙잡으려고 아등바등 매달린 채 괴로워하는 여급, 아니 파리지앵의 번뇌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영국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은 ‘적을 만들어 본 적 없는 사람은 결코 친구도 만들 수 없다.’라고 말했다. ‘경쟁’의 이면에 자리 잡은 ‘우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발전시키고 싶다면 라이벌만큼 소중한 존재도 없다. 마네와 드가는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뛰어난 안목을 가졌고, 서로에게 예술적 영감의 빛을 비춰주는 창작의 거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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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5-25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가의 그림에 마네가 훼손을 하다니 충격이다.
전에 내 작품을 무대에 올려준 단장이 내 작품을 함부로
자기 멋대로 고쳐 나의 분노를 샀었던 적이 있는데
꼭 그런 인간들이 있어.

프레너미라. 참 말들 잘 만들어네. 그지?ㅋ

cyrus 2015-05-26 22:36   좋아요 0 | URL
글이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작가 동의 없이 함부로 고치고 바꾸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이것 또 맨스플레인에 해당되는 사례로 볼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