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헐, 브뢰겔, 브뢰헬. 이 위대한 플랑드르 화가에 대한 글을 쓰면 성(姓)을 어떻게 써야 할지 헷갈린다. 네덜란드 원어명은 ‘Brueghel’이다. 특이하게 브뤼헐은 그림에 자신의 서명을 남길 때 ‘h’를 뺀 ‘Bruegel’로 적었다. 그래서 외래어 표기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영어식 발음에 가까운 ‘브뢰겔’이 더 많이 알려졌다. 네덜란드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Bruegel’은 ‘브뤼헐’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

 

성의 발음만 복잡한 것이 아니다. 복잡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브뤼헐이라는 성을 가진 화가가 한 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화가로 활동해서 이름을 알린 브뤼헐이 모두 네 명이나 있다. 이들은 브뤼헐 집안(家)사람이다. 브뤼헐 가는 플랑드르를 대표하는 화가 집안으로 명성을 떨쳤다. 사람들은 여러 명의 브뤼헐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별명을 만들었다. 미술사를 공부한 사람도 브뤼헐이 그린 그림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혼동한다. 예를 들면 아버지 브뤼헐이 그린 그림을 그의 아들이 그린 것으로 착각한다. 오늘날 현존하는 그림에 ‘Bruegel’이라는 서명이 있으면 아버지 브뤼헐이 그린 것인지 아니면 아들이 그린 것인지 한 번에 구별하기가 어렵다. 브뤼헐의 그림이 유명해서 모사작품도 많이 나왔는데, 아들 브뤼헐이 아버지 브뤼헐의 그림을 모사한 작품도 있다. 

 

 

브뤼헐 가의 계보와 그들의 별명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1. 피터르 브뤼헐 / 대 브뤼헐
(네덜란드: Pieter Brueghel de Oude, 영어: Pieter Brueghel the Elder, 1525?~1569)

 

 

 

 

 

피터르 브뤼헐(대 브뤼헐) 자화상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1562년경)

 

 

 

 

 

피터르 브뤼헐 『눈 위의 사냥꾼』 (1565년)

 

 

 

 

피터르 브뤼헐 『농민의 결혼식』 (1568년)

 

 

농민의 생활 장면이나 네덜란드 전통 풍습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남겼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농민 브뤼헐’이다. 한때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화풍에 가까운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서 ‘도깨비 브뤼헐’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the Elder’는 나이가 많은 사람의 이름 뒤에 붙는 형용사구다. 성이 비슷한 부자(父子)를 구별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the Elder’를, 아들은 ‘the Younger’를 쓴다. 우리말로는 ‘대(大)’와 ‘소(小)’를 사용한다. ‘농민 브뤼헐’로 알려진 피터르 브뤼헐은 ‘대 브뤼헐’로 부르기도 한다.


 

 

 

2. 피터르 브뤼헐 / 소 브뤼헐
(네덜란드: Pieter Brueghel de Jonge, 영어: Pieter Brueghel the Younger, 1564~1638)

 

 

 

 

 

안토니 반 다이크 『피터르 브뤼헐(소 브뤼헐)』

 

 

 

 

피터르 브뤼헐(소 브뤼헐) 『새덫이 있는 겨울 풍경』 (1601년)

 

 

‘농민 브뤼헐’의 장남이다. 그는 아버지와 다르게 괴물이 등장하는 공상적인 세계의 풍경화를 그렸다. 별명은 ‘지옥의 브뤼헐’이다.

 

 

 


3. 얀 브뤼헐 / 대 얀 브뤼헐
(네덜란드: Jan Brueghel de Oude, 영어: Jan Brueghel the Elder, 1568~1625)

 

 

 

 

피터르 파울 루벤스 『얀 브뤼헐 가족』 (1612~1613년)

 

그림 오른쪽에 있는 소년은 커서 화가가 됩니다. 

 

 

 

 

 

 

얀 브뤼헐, 피터르 파울 루벤스 『후각의 알레고리』 (1618년) 

 

 

 

대 브뤼헐의 차남이자 소 브뤼헐의 동생이다. 다행히 차남의 이름은 ‘얀’이다. 얀 브뤼헐은 꽃과 동물 그림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별명은 ‘꽃의 브뤼헐’이다. 사람들은 지옥을 생생하게 묘사한 형과 구분하려고 얀에게 ‘천국의 브뤼헐’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줬다. 얀은 루벤스와 함께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4. 얀 브뤼헐 / 소 얀 브뤼헐
(네덜란드: Jan Brueghel de Jonge, 영어: Jan Brueghel the Younger, 1601~1678)

 

얀 브뤼헐의 아들은 ‘소 얀 브뤼헐’로 부른다. 아들도 화가로 활동했으나 그가 그린 그림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할아버지(대 브뤼헐)와 큰아버지(소 브뤼헐) 그리고 아버지의 명성이 높아서인지 얀 브뤼헐 아들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자,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요약한 것만 외우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피터르 브뤼헐 (1525?~1569) – 대 브뤼헐, 농민 브뤼헐
피터르 브뤼헐 (1564~1638, 대 브뤼헐의 장남) – 소 브뤼헐, 지옥의 브뤼헐
얀 브뤼헐 (1568~1625, 대 브뤼헐의 차남) - 꽃의 브뤼헐, 천국의 브뤼헐
얀 브뤼헐 (1601~1678) - 얀 브뤼헐의 아들

 

 

 

 

 

 

 

 

 

 

 

 

 

 

 


 

 

 

 

 

 

《관능미술사》 31쪽에 얀 브뤼헐이 그린 그림이 있다. 여기서는 ‘얀 브뤼헐(아버지)’로 적혀 있다. 이 그림은 얀 브뤼헐이 혼자 그린 것이 아니라 피터르 파울 루벤스와 공동 제작한 것이다. 얀 브뤼헐의 아들이 화가로 활동한 사실을 모르는 독자들은 ‘얀 브뤼헐(아버지)’가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지 못한다. ‘얀 브뤼헐(아버지)’로 쓰려면 얀 브뤼헐과 그의 아들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추가했어야 한다.

 

 

 

 

 ※ 딴죽걸기 하나 더

 

 

 

 

책을 만드는 사람은 이 사소한 내용을 절대로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책의 오점이 그대로 남는다. 사진 속 문장은 레옹 보나의 그림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잔혹미술사》 96쪽에 있다. 여기서 잘못된 문장 한 줄이 있다.

 

[라울 뒤피나, 조르주, 브라크 등 개성 넘치는 제자들을 길러냈다.]

 

두 개의 쉼표(,)를 빼야 한다. 그러면 화가의 이름이 정확하다. 쉼표를 빼면 라울 뒤피(Raoul Dufy)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가 올바르다. 서양미술사에 ‘라울 뒤피나’라는 이름의 화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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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3-28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뢰헬의 <아이들의 놀이>는 <아동의 탄생>에서 <교수대의 까치>는 아마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책에서 근래 만나서 친숙하고 몹시 반갑네요. ^^

cyrus 2016-03-29 15:29   좋아요 0 | URL
브뤼헐의 그림은 특별한 상징과 의미가 숨어 있어서 재미있어요. 그래서 플랑드르 출신 화가 중에서 브뤼헐을 제일 좋아합니다. ^^

yureka01 2016-03-28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름이 어려울만합니다..ㅎㅎㅎㅎ우엉..

cyrus 2016-03-29 15:32   좋아요 0 | URL
네덜란드어 발음이 영어식 발음과 달라서 읽을 때 어렵게 느껴져요. 학창시절에 과학교과서에 나온 물리학자 호이겐스를 요즘에는 ‘하위헌스’라고 발음하더군요. <중세의 가을>의 저자 호이징가는 ‘하위징아’로 부릅니다.

cyan 2016-03-28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 집안이라는 정도만 알았지 이렇게 정리된 내용은 처음 보아요. 감사합니다~

cyrus 2016-03-29 15:34   좋아요 0 | URL
저도 브뤼헐을 구분하지 못해서 알기 쉽게 어제 글로 정리해봤습니다.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붉은돼지 2016-03-29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옛날부터 브뢰겔,,브뤼헐,,브뢰헬.... 이름이 참 헷갈리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정리해 주시니 너무 감사해요...`브뤼헐` 이 올바른 표기법이군요...그래도 왠지 조금 어색합니다. 입에 익지 않아서...

`곤두박질`인가 뭔가 브뢰헬(아마 대 브뤼헐) 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도 기억납니다.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지만 말입니다. ^^

cyrus 2016-03-29 15:3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브뢰겔’이 더 친숙했습니다. <곤두박질> 표지에 나오는 그림이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입니다. 그 그림은 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겁니다. 저는 그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

표맥(漂麥) 2016-03-29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는 내용이군요. 눈요기 공부하고 갑니다.^^

cyrus 2016-03-29 15:36   좋아요 0 | URL
또 헷갈리면 제가 썼던 글을 다시 보면 됩니다. ^^

뽈쥐의 독서일기 2016-03-29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사람들 다 다른 사람이었군요. 대충 읽는 버릇 좀 고쳐야겠어요. ㅠㅠ 프랑드르 화풍하면 뭔가 항상 연출된 느낌이 들어요. 사진찍힐 때 과도하게 의식해서 굳은 것 같은... 묘하게 매력이 있어요.ㅎㅎ

cyrus 2016-03-29 15:38   좋아요 0 | URL
브뤼헐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자신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일종의 암호인거죠.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면 현실적으로 맞지 않거나 과장된 장면이 있는데,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화가가 관객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해주려고 의도적으로 그린 것입니다. ^^

qualia 2016-03-29 2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몇 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⑴ 네덜란드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Bruegel’은 ‘브뤼헐’로 발음하는 것이 맞다.

→ 위 문장에서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로 발음하는” 부분은 문장 자체의 의미에 따르자면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로 표기하는”으로 쓰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왜냐면 표기법에 관한 얘기를 해놓고 끝에 가서 발음법 얘기로 결론 짓는 것은 앞뒤가 호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표기하는”은 “음역하는”으로 하면 더 정확하고요. “적는”다고 해도 괜찮겠죠.

⑵ 농민의 생활 장면이나 네덜란드 전통 풍습에 소재로 많은 그림을 남겼다.

→ “전통 풍습에 소재로”에서 “에”는 오타인가요? “전통 풍습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남겼다고 해야 맞겠죠.

⑶ ‘the Elder’는 나이가 많은 사람의 이름 뒤에 붙는 형용사다.

→ “the Elder”를 형용사라고 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Pieter Brueghel the Elder”에서 “the Elder”가 형용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형용사라고 하신 것인데요. “the Elder”가 형용사 역할을 한다고 해도 형용사 자체는 아닙니다. ‘형용사구’라고 해야 맞겠죠. 그리고 “the Elder”는 해석하기에 따라 명사구로도 볼 수 있을 거예요. ‘정관사 the + 형용사’ 형태는 일종의 명사구로 인정되거든요. 이 경우, Pieter Brueghel과 the Elder를 동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걸 형용사구 아니면 명사구로 보는 문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릴 것이라 봅니다. 아무튼 ‘정관사 the + 형용사’ 형태의 구를 단순히 형용사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⑷ 아들도 화가로 활동했으나 그가 그린 그림이 많이 알려지지 않다.

→ “알려지지 않다.”에서 “았“을 빼먹었군요. 그리고 위 문장을 더 정확하게 쓰자면 “~ 그가 그린 그림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로 해야 합니다. 즉 조사 “-이”를 “-은”으로 바꿔줘야 합니다.

cyrus 2016-03-30 14:13   좋아요 0 | URL
틀린 곳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qualia님이 아니었으면 제가 글자 하나를 빠뜨리면서 글을 쓴 사실을 몰랐었을 겁니다. qualia님이 알려 주신대로 수정했습니다.
 

 

 

 

 

 

 

 

1891년, 폴 고갱은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향하는 해군 함정에 몸을 실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떠돌이 인간 고갱은 미지의 세계를 갈망했다. 작열하는 태양, 드넓은 쪽빛 바다, 물결 위로 부서져 내리는 은빛 햇살. 가장 오염되지 않은 섬이라고 생각했기에 원시와 야성을 화폭 안에 담아내고자 했던 소망이 실현될 것이라 여겼으리라. 하지만 타히티에 도착한 고갱은 얼마 동안 상상을 빗나간 광경에 실망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수도 파페에테는 조그만 식민지 항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타히티에 정착한 지 2년 뒤인 1893년에 고갱은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섬에서 그린 작품들을 중심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에는 많은 관람객을 몰렸으나 상업적으로는 대실패였다. 돈 한 푼 벌지 못했지만, 대중의 반응에 기운을 얻은 고갱은 타히티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목판화 시리즈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목판화 시리즈물의 제목은 《노아 노아》 . ‘노아 노아’는 타히티 어로 ‘향기’를 뜻한다. 고갱의 친구이자 상징주의 시인인 샤를 모리스가 《노아 노아》의 원고를 일부 다듬었다.

 

 

 

 

 

 

 

 

 

 

 

 

 

 

 

 

 

 

 

 

 

 

 

 

 

 

 

 

 

 

 

《노아 노아》는 열화당(1979년)을 통해서 처음 나왔고, 20년 뒤인 1999년에 서해문집 출판사에서 《고갱의 타히티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 이 두 권의 책이 절판되는 바람에 《노아 노아》 원본에 실린 목판화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어서 아쉽다. 고갱이 말년에 그린 대작 이름에서 따온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가람기획, 1999)《폴 고갱, 슬픈 열대》(예담, 2000)라는 책에서도 《노아 노아》에 있는 글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목판화 그림을 도판으로 수록하지 않았다. 고갱은 《노아 노아》 이외에도 자기 생각을 정리한 글을 많이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출간된 《전과 후》는 고갱과 반 고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반 고흐가 귀를 자르게 된 경위까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고갱의 증언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자해 사건의 내막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와 《폴 고갱, 슬픈 열대》는 《전과 후》와 《노아 노아》를 같이 번역한 책인데 고갱의 책을 완역했는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와 《폴 고갱, 슬픈 열대》를 비교해서 읽어본 결과, 서로 중복되는 내용이 있었으나 문장 일부가 누락된 것도 있었다. 고갱이 반 고흐보다 인지도가 낮아서 그런지 고갱의 글을 번역한 책들 전부 절판되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반 고흐의 편지가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오고 국내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상황이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대중에게 친숙한 유명 화가들을 소개하는 책은 잘 팔리고, 제아무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예술가가 쓴 글이라고 해도 국내에서의 인지도가 낮으면 외면받기 마련이다. 2013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고갱 전이 열렸을 때 고갱의 글 모음집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오기를 바랐건만 오히려 반 고흐에 관한 책만 더 나왔다.

 

 

 

 

 

 

 

 

 

 

 

 

 

 

사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와 《폴 고갱, 슬픈 열대》를 좋은 책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는 글의 출처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이 글이 《전과 후》에 있는 건지 아니면 《노아 노아》에 있는 것인지 혼동이 될 정도로 글의 구성이 조악하다. 책 후반부에 고갱이 소년 시절을 회상하는 글이 나온다. 그나마 《폴 고갱, 슬픈 열대》가 읽을 만하다. 글 하나하나에 출처가 적혀 있고, 고갱의 글을 시대순으로 엮었다. 또한 이 책에 고갱이 아내 메테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도 실려 있다. 비록 반 고흐의 편지와 비교하면 문학성은 떨어지지만, 가난과 무명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예술가의 절박하고도 솔직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아내에게 돈을 부쳐 달라고 조르기도 하며, 고갱의 그림을 판매한 화상이자 친구인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타히티에서 보고, 느끼고, 들은 것들을 상세하게 보고한다. 고갱은 아내뿐만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동지인 에밀 쉬펜네케, 에밀 베르나르, 말라르메, 샤를 모리스, 알베르 오리에(고갱을 ‘상징주의 예술가’로 소개한 비평가) 등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희귀한 편지글들은 《야만인의 절규》(창해, 2000)라는 제목의 책에 있다.

 

고갱이 쓴 편지 중에서 스웨덴의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에게 보낸 것이 지금도 널리 회자하고 있다. 1차 타히티 여행을 마친 뒤 파리에 돌아온 고갱은 이 편지에 스트린드베리에게 자신의 전시회 도록 서문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스트린드베리는 루소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극작가였다. 고갱 역시 루소의 책을 읽어서 원시를 향한 동경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의 요청을 거절하는 내용의 답장을 보낸다. 고갱의 원시 예술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 편지 때문에 고갱 관련 책에서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근시안적 인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스트린드베리의 편지 전문을 읽어보면 그가 고갱의 재능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트린드베리가 고갱의 요청을 거절한 진짜 이유는 따로있었다.

 

 

“나 또한 선생을 분류하고, 사슬 속에 고리를 끼우듯이 선생을 끼워넣어 그 발전의 자취를 알아보려고 진지하게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중에서, 44쪽)

 

고갱의 예술은 당시에 유행하는 예술사조와 거리가 먼 독창적인 화풍이었다.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의 독창적인 예술이 언젠가는 제대로 인정받을 날이 오리라 확신했으나 자신의 수준으로는 시대를 앞서간 예술을 설명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면서도 고갱을 ‘창조주를 시샘하고, 늘 도전하는 예술가’라고 칭찬했다. 또한, 두 번째로 타히티로 향하는 고갱이 다시 파리로 돌아올 때까지 그의 예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배우겠다고 약속했다. 스트린드베리의 겸손한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안타깝게도 이 편지를 끝으로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고갱은 자유를 갈망하는 영원한 보헤미안이자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화가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등지고 오로지 그림에만 몰입해야 스스로 존재감을 느꼈던 고갱 인생은 너무나 고독하고 외로운 느낌이다. 고갱의 타히티행과 방종에 빠지기 쉬운 그의 성격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스트린드베리의 말대로 고갱은 그림에 대한 열망을 강렬하게 표출하는 ‘도전하는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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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5-08-01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메시스에서 소개된 `뭉크` 그래픽 노블을 보면 스트린드베리가 등장해요. 뭉크만크이나 인상적인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cyrus님 글속에 그를 만나니 왠지 반갑네요. ^^

cyrus 2015-08-02 11:53   좋아요 0 | URL
`뭉크` 그래픽 노블을 읽어보고 싶군요. 뭉크와 스트린드베리의 관계가 궁금해요. ^^

지금행복하자 2015-08-01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트린느베리 익숙한 이름인데.. 미스 줄리의 작가인가 싶기도 하고~ 최근에 본 이름인데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나중에 알려주실거라 믿고 검색은 패스할께요~~
어디서 봤더라~~~ 만 반복하고 있어요~^^

cyrus 2015-08-02 11:5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혹시 ‘미스 줄리’를 읽어보셨습니까? 저는 아직 안 읽어봤습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5-08-03 11:05   좋아요 0 | URL
아니요~ 읽어보진 못 했어요. 최근 마스 줄리 영화가 개봉해서 찾아봤었어요. 연극계의 고전이라고 하더군요~~
영화에서는 묘한 매력의 줄리아가씨였어요~~
 

 

 

 

 

 

 

 

 

 

 

 

폴 고갱은 나이 서른다섯 살까지만 해도 증권거래소 직원으로 일했다. 증권거래소에 다니면서 저축한 돈으로 경제적 안락함을 누릴 수 있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했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주말 화가’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주식으로 흥한 자는 주식으로 망한다. 주식이 크게 폭락하고 증권거래소가 문을 닫으면서 고갱은 실직자가 되고 만다. 1882년의 주식 폭락은 1929년의 블랙 튜스데이(Black Tuesday)와 1987년 블랙 먼데이(Black Monday)에 비할 만큼 경제사의 암울한 날로 기억되지 않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백수 고갱은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나이 마흔둘에 남태평양의 타히티에 정착하여 그림을 그렸다. 가족들과 주변 동료들은 고갱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생전에 그림 한 점만 팔렸다는 반 고흐보다는 조금 더 나은 형편이었지만, 고갱의 그림 또한 생각보다 많이 팔리지 않았다. 생전에는 상업적으로도 실패면서 남들이 보기엔 말년에 꼬인 실패한 인생이라고 볼지 모르겠지만, 그는 미술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병마와 고독 속에서 끝까지 붓을 놓지 않는 모습에 연민이 생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반 고흐에게는 ‘광기의 화가’, 고갱에게 ‘고귀한 야만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그들의 삶을 총칭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대중은 이 수식어만 믿고 그들의 그림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결과를 볼 뿐, 우여곡절 많은 삶의 과정을 아는 사람은 적다. 고갱에 대한 평가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를 원시의 화가로만 기억하는 것은 고갱의 삶 반쪽만 보는 것과 같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고갱의 진실을 아는 순간, 그동안 미디어가 부추긴 예술가를 향한 맹목적인 열광과 평가가 허상임을 알게 될 것이다. 

 

 


 

 Scene #1  <아방 에 아프레>와 <노아 노아>

 

 

 

 

 

 

 

 

 

 

 

 

 

 

 

 

 

 

 

 

 

 

 

 

 

 

 

 

 

 

고갱은 생전에 글을 많이 남겼다. <아방 에 아프레(Avant et apres, 우리말로는 ‘전과 후’)>는 고갱이 사망한 후에 나왔다. 책 내용은 전반적으로 자서전에 가깝다. 여기에 반 고흐와 함께 살았던 일과 반 고흐가 귀를 자르기 전의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고갱은 반 고흐가 면도날로 자신을 위협했다고 증언한다. <노아 노아(Noa Noa)>는 타히티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수기다. ‘노아 노아’는 ‘향기’ 를 의미하는 타히티 어다. 타히티 생활을 뒤로하고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타히티의 풍속과 신화를 소개하는 <마오리의 고대 신앙>과 <노아 노아>를 펴낸다. <노아 노아>는 고갱이 생각하는 원시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하지만 이 책에 사실보다는 허구가 많다. 고갱이 타히티에서 본 것은 태초의 원시성을 그대로 간직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이미 문명의 손아귀에 들어간 식민지 섬의 모습이었다. <노아 노아>에서는 타히티 신화 일부를 소개하기도 하는데, 이 내용 또한 고갱이 조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프랑스 식민지가 된 타히티에서 기독교가 타히티 민간 신앙 자리를 대신했다. 그래서 타히티 신화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고갱은 타히티의 원시성을 강조하여 유럽 독자들의 입맛을 맞추려고 일부러 윤색했을 가능성이 있다. <노아 노아>에 나오는 일부 이야기는 피에르 로티의 소설 <로티의 결혼>과 거의 비슷하다. <로티의 결혼>은 타히티를 배경으로 한 연애소설이며 고갱은 이 소설을 읽었다.


 

 

 

 Scene #2  바느질하는 쉬잔

 

 

 

 

폴 고갱 누드 습작또는 바느질하는 쉬잔」 (1880년)

 

 

앞으로 이 그림을 소개할 땐 ‘「누드 습작」 또는 「바느질하는 쉬잔」’ 으로 불러야 한다. 그림 속 모델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고갱은 1881년 인상주의 전시회에 「누드 습작」을 출품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벌거벗은 모델은 고갱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 쉬잔이다. 그런데 고갱의 아내 메테는 그림에 푹 빠진 남편에 못마땅했다. 당연히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누드화를 그리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메테가 직업 모델을 부르지 못하게 하자, 고갱은 하녀를 누드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이 성공하자, 메테는 쉬잔을 해고했다.

 

 

 


 Scene #3  친구의 여동생을 사랑했네

 

 

 

 

 

폴 고갱 「마들렌 베르나르」 (1888년)

 

 

고갱은 에밀 베르나르, 샤를 라발, 메이에르 드 한 등과 함께 퐁타방 파를 결성한다. 이들은 퐁타방 지방에 거주하면서 함께 그림 작업을 했다. 에밀 베르나르의 여동생 마들렌은 퐁타방 파의 홍일점이었다. 그녀는 샤를 라발과 약혼한 사이였다. 고갱은 유부남임에도 불구하고, 마들렌에 특별한 감정을 가졌다.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고갱은 노골적으로 그의 여동생에게 관심이 있다고 썼으며 심지어 그녀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다행히 에밀의 부모의 반대로 고갱과 마들렌의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하지 않았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90년)

 

 

고갱은 자신의 얼굴을 기괴한 형태로 변형해서 만든 도자기 병을 마들렌에게 사랑의 선물로 주었지만, 마들렌은 고갱의 선물을 거부했다. 당시 고갱은 그로테스크한 얼굴의 표정이 있는 도자기 병 제작에 열중했다. 마들렌의 눈에는 고갱이 만든 도자기가 예술 작품이 아닌 그냥 괴상망측한 물건으로 보였을 것이다. 고갱의 도자기는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오른쪽 상단에 등장한다.

 

 

 


 Scene #4  가족의 믿음을 저버리다

 

 

 

 

 

폴 고갱 「이브닝 드레스을 입은 메테」 (1884년)

 

 

 

고갱은 아내 메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꼭 파리에서 성공한 화가가 되면 예전처럼 같이 살자고 썼다. 고갱은 메테와 자식들을 아내의 고향이 있는 덴마크에 남겨두고, 아들 클로비스를 데리고 파리에 거주했다. 그러나 고갱의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고, 수중에 들어오는 돈만으로 고갱 혼자 아들을 양육하는 것이 무척 버거웠다. 결국, 고갱은 아들을 아내가 있는 덴마크로 돌려보냈다.

 

아내에게 보내는 고갱의 편지를 이중섭의 낭만적인 편지로 생각해선 안 된다.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했고, 닭살 돋는 애정의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고갱은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처한 궁핍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아내에게 돈을 부쳐 달라고 부탁한다. 경제 형편이 어렵다고 호소하는 아내의 불만을 다그치기 위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낫다고 합리화한다. 한 번은 아내가 가슴에 종양이 생겼다는 소식을 편지로 접하자, 수술을 무조건 받으라고 썼다. 아내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의 태도에 서글펐을 것이다. 고갱은 편지로나마 아내와 아이들을 항상 생각한다고 썼지만, 몸과 마음이 멀어질수록 예전의 화목했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고갱은 화가로서의 성공에 눈이 먼 나머지, 가족의 믿음을 저버리는 태도로 돌변한다. 고갱은 삼촌으로부터 유산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삼촌의 유산을 양분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고갱은 그 돈으로 자신의 새 작업실을 마련하는 데 써버렸다.


 

 

 

 Scene #5  고갱이 만난 여자들

 

고갱은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수도 파페에테에 정착했을 때, 티티라는 이름의 여인을 정부로 삼았다. 그러나 고갱은 티티가 완전한 타히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른 섬으로 떠나면서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 티티의 아버지는 영국인이었고, 티티는 서양식 생활에 관심이 많은 여자였다. 문명인이 되고 싶은 여자를 고갱은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원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처녀였다. 고갱은 외롭다는 핑계로 원주민 여자를 만났다. 그는 열세 살 혹은 열네 살로 추정되는 테하마나와 동거했다. 고갱은 테하마나와의 만남을 타히티의 전통 풍습이라고 둘러대면서 정당화했다.

 

 

 

 

폴 고갱 「자바 여인 안나」 (1893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화상 앙부르아즈 볼라르의 소개로 ‘자바 여인 안나’를 만났다. 그러나 안나와의 만남은 고갱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악연이 되었다. 안나와 함께 콩카르노 항구 주변에 산책하다가 동네 건달들과 시비가 붙었다. 고갱은 건달들과 맞서다가 그만 발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발목 부상은 고갱이 죽을 때까지 낫지 않았다. 고갱이 발목 부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사이에, 안나는 고갱의 작업실에 있는 귀중품만 훔치고 달아났다.

 

 

 

 

폴 고갱 「테 타마리 노 아투아 : 그리스도의 탄생」 (1896년)

 

 

파리에서의 굴욕적인 기억을 뒤로하고, 다시 타히티로 돌아왔을 때도 고갱은 자신의 곁에 있어야 할 동반자가 필요했다. 열네 살의 파후라를 만나 부부처럼 생활했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비록 첫딸은 태어나고 며칠 만에 죽었지만, 고갱은 출산의 기쁨을 「테 타마리 노 아투아 :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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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7-23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그림 그리는 분이 달과 6펜스를 읽을때 고갱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이기주의의 절정을 달리는 사람이라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저런 횡포와 방종을 합리화해서는 안된다면서..
예술가는 저래도 되는 어떤걸 가지고 있어도 된다는 인식이 너무 불편하다고 열변을 토했었던 적이 있었어요..
한편에서는 예술가는 저런 면 이해해야되는거 아니냐고~ 본인이 예술가면서 저런것을 도덕적으로 매도해버리면 안 되는것 아니냐고~ 반론하고 ㅎㅎ
가치관의 차이이겠지만 글을 읽으면서 드는느낌은 고갱은 그림뿐 아니라 합리화의 천재이기도 하는군요 ㅎㅎ
초기 직업의 영향일까요? ㅎ

cyrus 2015-07-23 21:36   좋아요 0 | URL
고갱은 참 재미있는 화가예요.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데, 국내에서 고갱은 인기가 없어요. 고갱도 은근히 반 고흐 못지않게 자존심이 세고,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고집하는 성향이 있어요.

오후즈음 2015-07-2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갱의 삶을 보니 고흐의 삶이 왜 이렇게 더 슬프게 느껴지는걸까요?

cyrus 2015-07-23 22:12   좋아요 0 | URL
제가 몇 주 전부터 반 고흐와 고갱에 관한 책을 읽어보니까 고갱의 삶도 슬퍼요. 공교롭게도 반 고흐와 헤어지고, 그가 자살한 후부터 고갱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자신을 따랐던 동료 화가들은 고갱의 곁을 떠났고, 고갱은 죽을 때까지 매독에 시달렸어요. 자신이 사랑하는 둘째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 자살을 시도했어요. 고갱은 말년이 좋지 않았어요.

syo 2015-07-23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그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고갱의 그림은 그렇게 색채가 강렬한데도 어쩐지 슬퍼보여요. 슬픈 반 고흐가 무얼 그려도 자기 안의 것이 뛰쳐나와서 슬프다면, 고갱은 무얼 그려도 자기가 원하는 자기 밖의 것을 그릴 뿐 결국 가 닿지 못한다는 느낌이라 슬프고 막 그렇더라구요.

cyrus 2015-07-24 18:49   좋아요 0 | URL
고갱의 그림 중에 슬프게 느껴졌던 것이 <황색 그리스도>였습니다. 온 몸에 상처 하나 없이 단순하게 그린 예수인데도 표정만으로도 슬픈 감정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그림을 좋아합니다.

꽃핑키 2015-07-24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리뷰 보니 갑자기 <달과 6펜스> 다시 읽고 싶어져요!! ㅋㅋㅋ

cyrus 2015-07-24 18:49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안 읽어봤어요. ㅎㅎㅎ
 
This is Gauguin 디스 이즈 고갱 This is 시리즈
조지 로담 지음, 슬라와 하라시모비치 그림 / 어젠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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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다출판사의 ‘This is’ 시리즈는 재미있는 일러스트를 곁들인 미술책이다. 출판사 소개에 의하면 그래픽 아티스트 평전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번역된 아티스트는 앤디 워홀, 살바도르 달리, 잭슨 폴록, 폴 고갱이다. 평전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내용 중간에 화가의 작품들을 설명하기도 한다. 미술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예술가의 일화도 볼 수 있다. 시공사, 마로니에북스, 예경, 한길아트 같은 출판사에서 만드는 화가 시리즈들을 읽으면 마치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가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공부하려는 독자들이라면 참고하면 좋은 책이지만, 미술 비전공자에게는 딱딱한 서술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This is’ 시리즈는 미술 비전공 독자들이 읽기에 아주 적합한 책이다. 또 책값이 착하다. 그러나 《디스 이즈 워홀》을 제외하면 나머지 시리즈들의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는 낮다. 디스 이즈 시리즈 중에서 가장 낮은 세일즈 포인트를 기록한 책은 《디스 이즈 고갱》이다.

 

고갱은 워홀, 달리, 폴록과 비교하면 국내에서 인기가 낮다.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전시회에서 고갱의 타히티 그림들이 선보였지만, 한때 절친한 동료였던 반 고흐의 인기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고갱도 반 고흐처럼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뒤늦게 인정을 받아 가장 비싼 화가의 대열에 올랐다. 반 고흐를 이해하는 데에 고갱의 존재감을 그냥 넘길 수 없다. 반 고흐는 고갱과 함께 노란 집에 머물었을 때 고갱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려고 했다. 또 르누아르, 피사로, 모네 등이 활동하여 근대 유럽에 맹위를 떨쳤던 인상주의의 위력이 떨어지고 있을 때, 인상주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넘어서려고 한 사람이 바로 고갱이다. 타히티의 원시적인 자연을 묘사하고자 했던 고갱의 정신은 훗날 피카소와 마티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인상주의(근대미술)에서 야수주의, 표현주의(현대미술)로 이어지는 회화의 흐름의 중간 지점에 고갱이 있었다.

 

 

 

 

 

 

 

 

※ 이 책에 고쳐야 할 내용이 있다. 이 그림은 고갱이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한 「누드 습작」 (1880년)이다. 누드모델은 고갱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 쉬잔이다. 그래서 이 그림을 ‘바느질하는 쉬잔’이라는 제목으로 부르기도 한다. 벌거벗은 쉬잔의 몸 전체를 감싸는 밝은 색의 흔적은 인상주의 회화에서 빛의 효과를 강조할 때 쓰는 기법이다. 그런데 《디스 이즈 고갱》의 12쪽에 보면 누드모델의 이름이 ‘쥐스탱’으로 소개되었다. ‘쥐스탱’(Justin)은 프랑스 남자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누드 습작 또는 바느질하는 쉬잔」의 프랑스어 작품명은 ‘Etude d'une Femme Nue, Suzanne entrain de Coudre’이다. ‘쥐스탱’(Justin)이 아니라 ‘쉬잔’(Suzanne)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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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15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를 노란 집도 원래 고갱 집 아니었어요? 기억이 가물가물.. cyrus님이 소개하는 명화들 잘 보고 있습니다^^

cyrus 2015-07-16 17:05   좋아요 0 | URL
반 고흐가 노란 집에 있는 방을 얻었습니다. 방을 마련하고 난 뒤에 반 고흐는 고갱에게 아를에 있는 노란 집으로 오라고 초청합니다. ^^
 
반 고흐 : 고독 속에 피워낸 노란 해바라기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 3
엔리카 크리스피노 지음, 정지윤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데생(소묘 혹은 드로잉)은 화가의 미적 표현이 구체화하여 나타난 최초의 조형표현이다. 이 때문에 거칠기는 하지만 생생하고 원초적인 작가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장르이다. 앵그르, 드가, 피카소 등 서양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대가들도 데생을 통해 작품의 아이디어를 수정해나갔던 것을 보아도 데생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데생은 유화의 그늘에 가려진 채 밑그림의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고흐는 100점이 넘는 유화를 남겼다. 우리는 고흐를 멋진 유화를 남긴 화가로만 기억할 뿐, 그가 1000점 이상의 데생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고흐의 그림이 컬렉션들에 주목받으면서 그의 데생 또한 값어치가 제법 상승했다. 만약에 고흐가 유명해지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데생은 홀대를 받았을 것이다.

 

 

 

 

 

고흐  「삽질하는 사람」 (1882년)

 

 

극빈했던 고흐에게 데생은 최고의 화가가 되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목사의 꿈을 포기하고, 무작정 전업 화가의 길로 뛰어들었던 고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목사였던 아버지와 갈등을 더욱 깊어져만 갔고, 고흐를 위한 경제적 지원도 줄어들었다. 미술도구를 살 돈이 없어서 마음껏 유화를 그릴 수 없었던 고흐는 데생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881년에서 1885년 사이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동안 상당히 많은 데생을 남겼는데, 고흐의 작품 연보를 논할 때 이 기간을 네덜란드 시기라고 말한다.

 

 

 

 

 

고흐  「손수레 끄는 여인」 (1883년)

 

 

 

색채의 효과를 처음으로 알기 시작했던 파리로 이주하기 전이라서 네덜란드 시기의 고흐 작품들은 화려하지 않다. 1880년대 유럽은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활력 넘치는 도시사회로 빠르게 변화하던 반면, 시골은 마치 정지한 듯 거의 변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고흐는 가난한 농민과 광부, 직조공들의 생활상을 그렸다. 특히 인물화는 고흐가 특히 매력을 느꼈던 장르였다. 가끔 보이는 어설픈 인물처리나 묘사는 입문 초기 표현기법의 미숙함에 기인하는 것도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투박한 모습을 꾸밈없이 묘사하려는 정직함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고흐는 한때 종교에 심취했었던 시절에 성경과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탐독했으며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것이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비록 목사의 꿈은 접었어도 고흐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종교적 감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 남아 있었다. 고흐는 도덕적 신념을 예술에 반영했다. 밀레를 흠모했던 고흐는 밀레의 그림을 십여 차례나 반복적으로 모사하며 그를 닮아가고 싶어 했다. 네덜란드의 고흐는 밀레처럼 소박한 그림을 그리는 농촌화가가 되고 싶었다.

 

 

 

 

 

고흐  「잡초를 태우는 농부」 (1883년)

 

 

 

반 고흐 : 고독 속에 피워낸 노란 해바라기는 고흐의 데생 작품을 비중 있게 소개한다. 사실 초창기 작품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흐 책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부분 고흐의 예술적 황금기라고 일컫는 아를 시기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고흐의 데생은 그의 삶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데생을 고집하는 이유를 밝혔다.

 

 

내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데생을 한다는 점을 네가 알아주기 바란다. 첫 번째 이유는 보다 정확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싶어서고, 두 번째 이유는 유화와 수채화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야.” (18927, 44쪽 인용)

 

 

고흐는 모델의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사진과 같은 정확한 묘사를 싫어했다. 하지만 타고난 성정(性情)에 의해 세상을 도덕주의자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고흐는 그림의 대상을 인생이라는 상징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취급했다.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이름 없는 농촌 이웃들, 가난하게 사는 광부들의 모습을 담아놓았다. 그래서 고흐의 데생은 차분하게 감정을 드러낸 캐리커처에 가깝다.

 

반 고흐 : 고독 속에 피워낸 노란 해바라기에서 독자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내용으로 귀를 자른 고흐의 자해 사건과 자살 사건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다. 저자는 고흐가 잘린 귀를 창녀에게 주는 이유를 고흐가 소의 귀를 잘라 미녀에게 선사하는 투우사의 모습을 흉내 낸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또 고흐의 광기 이미지를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칼 야스퍼스의 주장을 반박하는 저자의 주장도 흥미롭다. 야스퍼스는 고흐가 정신분열증에 앓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자해 소동 이후에도 비판적 분별력이 남아있었던 고흐의 정신 상태를 고려한다면 야스퍼스의 주장이 모순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고흐가 보리밭에서 자신의 가슴에 총 겨누었던 사건의 당시 정황을 설명하면서 가셰 박사를 의심하기도 한다. 고흐와 친분이 있었던 가셰 박사가 총상을 입은 고흐에게 어떠한 조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고흐와 가셰 박사의 우정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고흐는 박사의 능력을 의심했고, 그 이후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소원했다. 고흐의 죽음을 둘러싸고 완벽한 자살이라는 구체적인 증거는 학계에서도 밝히지 못한 상황이다.

 

 

 

 

※ 저자는 고흐의 그림을 ‘예술 작품과의 완전한 합일과 예술의 삶의 융화로 표현되는 독특한 상징주의’(110쪽)라고 말하면서도 그다음 문장에서 고흐가 상징주의 미술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다. 전후 문장의 의미가 상반된다. 저자는 고흐를 독특한 상징주의자로 평가하고 싶은 것 같은데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고흐는 자신이 상징주의자로 소개한 평론을 읽고 나서 평론가에게 편지를 보내어 반박했다. 

 

※ 37쪽은 고흐에게 영향을 준 헤이그파를 소개한 글이 있다. 여기서 헤이그파 화가들을 소개하는 과정에 ‘야코프 형제(1837~1899), 마테이스 마리스(1839~1917), 빌렘 마리스(1844~1910)’이라고 적혀 있다. 마리스 삼 형제 중 장남인 야코프 마리스를 ‘야코프 형제’라고 잘못 적었다.

 

※ “태양이 내 방의 노란 커텐을 스쳐 지나갈 때 이 꽃들은 금빛으로 넘치고...” (76쪽) ⇒ ‘커텐’을 ‘커튼’으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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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5-07-1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급 하신것 처럼 고흐에게 초기 중기 데생은 실력 향상과 유화의 비쌈을 피해갈 수 있는 안식처 같더군요. :) 그리고 농민들과 광부들의 투박하고 정감가는 모습들이 배어 있어서 좋았습니다. :)

cyrus 2015-07-12 20:16   좋아요 0 | URL
고흐가 남긴 데생 작품들도 훌륭한데 유화 작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 때문인지 책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페크pek0501 2015-07-1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 고흐에 대한 글 시리즈네요. 흥미롭게 잘 읽었어요.
한때 제가 고흐의 그림을 흉내 내고 싶어서 그의 스케치를 따라서 연필화를 그린 적이 있어요.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때이기도 했고 그림을 그릴 때의 화가의 정서를 알고 싶었던 이유도 있어요. 아직도 그 연필화를 가지고 있는데 우습답니다. 엉터리라서 말이죠.ㅋ

cyrus 2015-07-12 20:19   좋아요 0 | URL
고흐는 모델을 구하기 힘들어서 길을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장면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 바로 스케치를 했다고 합니다. 페크님처럼 선배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고요. 페크님은 화가의 정서를 근접하게 이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5-07-12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님의 글들이 다 좋은데 말이죠. 특히 이렇게 그림 관련, 화가얘기... 깊이와 애정이 느껴져서 더 좋아요~^^

cyrus 2015-07-12 20:20   좋아요 1 | URL
예전에는 고흐 책 한 권만 봐도 고흐를 다 아는 느낌이었는데, 관련 책을 더 찾아보게 되니까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화가의 삶에 대해서 더 애정이 느껴졌어요. 고흐의 편지를 읽을 때면 가슴이 뭉클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