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이비드 호크니 《명화의 비밀》 (한길아트, 2003)

* 진중권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휴머니스트, 2005)

 

 

 

영국의 팝 아트(Pop Art)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15세기 유럽 화가들이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는 주장을 제기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페르메이르(Vermeer)앵그르(Ingres)의 극사실적 묘사에 의문을 제기했다. 어떻게 해서 ‘사진과 같은 그림’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호크니는 화가의 옛 거장들의 비법을 알아내려고 분석했다. 그 결과, 그는 광학 장치(거울, 렌즈, 카메라 옵스쿠라)에 능숙한 화가들은 사실적이며 섬세한 묘사를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의미한다. 화가는 빛이 차단된 어두컴컴한 방 안에 들어가 눈으로 보기 힘든 내밀한 세상을 바라봤다. 빛이 차단된 커다란 상자에 작은 구멍을 뚫으면 바깥의 상이 상자 반대편 벽면에 거꾸로 맺혀진다. 화가는 구멍 안으로 들어온 빛이 만든 형상을 베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이곳저것 떠돌아다니면서 그리고 싶은 대상 또는 장소를 물색한다. 그런데 거대한 카메라 옵스쿠라를 이리저리 옮길 수 없다. 화가의 고민을 해결해준 것이 바로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이다. 거울과 프리즘을 이용해 물체의 상을 화면에 비추게 하는 장치이다. 화가는 렌즈에 보이는 형상을 종이 위에 그릴 수 있었다.

 

 

 

 

 

 

 

 

 

 

 

 

 

 

 

 

 

 

* 장 뤽 다발 《사진예술의 역사》 (미진사, 1991)

* 윌리엄 A. 유잉 《몸》 (까치, 1996)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는 1859년에 발표한 평론 글에 사진에 대해 불쾌한 반응을 드러냈다. 이 글의 요지는 이렇다. ‘사진을 예술의 한 분야로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보들레르는 회화란 자연을 완벽히 복사할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이지만, 사진이 자연을 복사하는 것은 창조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엥? 그림은 자연 모방이 되고, 사진은 안 된다? 보들레르의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 논리이다. 보들레르는 사진을 ‘예술의 한 분야’가 아닌 ‘공업의 한 분야’라고 봤다. 사진의 등장으로 예술이 파멸될 수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한다. 장 뤽 다발은 보들레르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를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고 꼬집어 말한다. (《사진예술의 역사》 104쪽)

 

 

 

 

 

보들레르의 전망은 틀렸다. 사진의 등장으로 인상주의 미술이 태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자연을 완벽히 모방하는 사진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진을 자신의 경쟁자로 생각했고, 밥벌이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변화의 흐름을 예술의 위기가 아닌 새로운 예술로 지향할 수 있는 돌파구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자연의 모방이 아닌 조형적 입장에서 형태나 색채의 자유로움을 구현하였다. 에드가 드가(Edgar De Gas)는 말년에 조각 제작과 사진 촬영을 병행했다. 펠릭스 나다르(Felix Nadar)는 친구 보들레르의 초상 사진을 남겼으며 1874년에 열린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의 장소는 나다르의 개인 작업실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사진기가 없었던 시절에 귀족들은 화가에게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다. 그런데 그림값을 내는 능력이 없는 중산층 사람들은 사진가에게 초상 사진을 의뢰했다. 초상 사진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커질수록 화가들은 미래에 불안을 느꼈고, 생계유지를 위해 사진 찍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화가에서 사진가로 직업을 바꾼 사람들은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회화의 고전적 주제를 모방한 사진 작품을 남겼다.

 

 

 

 

 

영국 출신의 오스카 구스타브 레일랜더(Oscar Gustave Rejlander)는 회화주의 사진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는 원래 화가였다. 레일랜더의 사진 작품 『화가에게 붓 한 자루를 더 주는 아기』는 고전 회화의 양식과 흡사하다. 화가들은 종종 뮤즈(Muse)가 예술적 영감을 불어 넣는 장면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다. 화가의 손에 붓을 건네주는 아기는 ‘어린 뮤즈’이다. 하지만 이 사진을 예술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는 관람객들은 레일랜더의 의도를 거부한다. 사진 작품을 고전 회화를 어설프게 흉내 낸 복제품으로 생각한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실제 인간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거부했고, 화가나 조각가가 묘사한 이상적인 인간상을 선호했다. 하여튼, 이 시대 사람들의 이상한 편견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 아서 코난 도일 《주홍색 연구》 (황금가지, 2002)

 

 

 

시대가 변하면서 사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인물 사진의 수요가 증가했다. 유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사진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이때 ‘직업 미인(professional beauties)’으로 알려진 여성들이 등장했다. '직업 미인'의 사진은 남자들이 선호했고, 남자들이 항상 들고 다니는 담뱃갑 표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직업 미인’을 언급하거나 상세한 소개를 한 책이 많지 않다. 윌리엄 A. 유잉의 《몸》 282쪽에 잠깐 언급되어 있다. 홈즈 시리즈 첫 번째 작품 《주홍색 연구》에서 셜록 홈즈(Sherlock Holmes)가 직접 이 단어를 언급한다. (참고 : [질투심 많은 직업여성] 2017년 5월 25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9358530)

 

‘직업 미인’이 등장한 사진들이 예술적인 감각을 반영했어도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특히 포르노 사진의 등장은 누드화를 그린 화가들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보들레르는 포르노 사진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포르노 사진이 사람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더욱 부추기는 외설적인 것이라고 비난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린 눈길로, 무한으로 열린 다락방의 창밖을 내다보듯이 만화경의 구멍 위에 몸을 굽히고 그 안을 들여다본다. 자신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에 깊이 뿌리내린 사람들의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사랑은 자기만족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포르노그래피에 넋을 빼앗겼다.

 

(보들레르의 「현대의 대중과 사진」 중에서, 윌리엄 A. 유잉 인용, 《몸》 206쪽)

 

 

사진은 탄생일이 분명한 예술 분야이다. 다게르(Daguerre)가 만든 은판사진술이 1839년에 발명품으로 공식 인정받은 뒤 사진은 화가들의 습작 활동을 돕는 역할을 했다. 화가들은 사진이 혁신적인 발명품이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고, 사진을 회화의 한 단계 아래로 봤다. 보들레르처럼 자연을 완벽히 모방하는 사진기술을 인정하지 못했다. 사진기술이 점점 발달하고, 사진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전문 사진작가들이 활동하기 시작했고, 사진도 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받았다. 일상의 소품은 예술 작품의 재료로, 평범한 사람은 예술 창조의 주체가 된다. 이처럼 오늘날의 예술은 '고급스러운 품격'과 거리가 멀다. 예술가와 시민들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교류하는 일상예술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일상예술에 가장 근접한 분야가 사진이다. 사진이 너무 친숙한 탓일까, 아니면 사진을 가볍게 보는 인식이 문제일까. 프로와 아마추어 불문하고 사진가의 작품을 도용하고, 허락 없이 공유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진 도용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진을 '사진가의 노력과 열정이 스며든 작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진 한 장 조차도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예술 작품‘으로 생각한다면, 누구도 함부로 도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이 찍은 사진 한 장 달랑 올려놓고 자신의 게시물인 척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사진에 무지한 나도 화가 난다. 알라딘 서재에도 그런 사람이 있던데…‥ 매일 인터넷에 떠도는 남의 사진을 출처 없이 올리니까 마음이 뿌듯하십니까? 하긴 몇 시간 투자해서 글 쓰는 것보다 남의 사진 한 장 몇 분 만에 올리는 것이 더 편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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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5-27 2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요즘 cyrus님 글은 ‘기-승-전- 홈즈‘입니다. 2017년을 ‘홈즈의 해‘로 보내실 기세군요.^^:

cyrus 2017-05-28 01:29   좋아요 3 | URL
제가 한 작가의 전작 읽기를 달성한 일이 잘 없어요. 초반에 열심히 읽기 시작해요. 여기까진 좋아요. 전작 읽기를 시도한지 3주 지나면 슬슬 흥미가 떨어져요. 한 작가의 책만 계속 읽는 일이 쉽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지겹습니다. 다른 작가의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

dellarosa 2017-05-27 2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더니스트 보들레르가 사진예술을 폄훼하는 모습이 흥미롭네요. ^^

cyrus 2017-05-28 01:35   좋아요 2 | URL
저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1859년에 발표된 평론’이라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번역문은 찾지 못했어요. 보들레르의 미술 평론이 번역되긴 했는데, 사진을 부정하는 글이 그 평론의 일부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

2017-05-28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5-28 03:02   좋아요 3 | URL
북플의 댓글 알림을 확인하자마자 ***님의 댓글을 읽었습니다. ***님이 댓글에 첨가된 내용도 확인했습니다. 제가 원래 심야시간에는 서재 접속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님의 댓글을 여러 번 읽으니까 생각이 많아졌어요. 답글을 어떻게 써야할지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혹시 제 답글의 문장에 비문이 있어도 이해해주세요. 비밀 댓글의 답글은 ‘공개 상태‘로 하겠습니다. 답글을 공개한 이유는 제가 저지른 실수나 문제점을 인정한다는 입장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 실수를 공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님의 댓글을 보면서 불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어요. qualia님은 가끔 제 글에 있는 어색한 문장 한두 가지 알려주는 분입니다. 그 분은 공개 댓글을 남기는데, 기분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분의 지적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qualia님을 여기서 잠깐 언급했습니다. 알라딘 서재에 상대방의 글이나 댓글을 꼼꼼하게 보는 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qualia님을 포함한 총 다섯 분입니다. 이 다섯 분에 당연히 ***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독까지는 아니지만, 평소에 ***님의 글을 보면서 ***님도 글을 꼼꼼하게 읽는 성격일 것이라고 주관적으로 판단했었는데, 다행히 제 생각이 맞았군요.

글 한 편을 완성하면 항상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를 합니다. 절대로 한두 번만 하지 않습니다. 제가 마음에 들 때까지 열 번 이상은 검사합니다. 그래도 끝내 고치지 못한 문법이 하나쯤 있기 마련입니다. 다음 날에 어제 쓴 글을 다시 읽습니다. 어제 보지 못했던 비문이 보여요. 번거로운 과정이지만, 저는 이 과정이 한 편의 글을 남기기 위한 루틴(routine)으로 생각합니다.

***님이 지적한 비문은 ‘문법 검사기’가 발견하지 못한 것들입니다. 정확히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답글을 다 쓰고 난 뒤에 수정하겠습니다. 허술한 제 글을 오랜 기간 동안 참고 읽으셨다는 말씀에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글을 계속 쓰고, 고치는 일을 반복하면 조금이라도 잘못된 문법을 사용하는 악습이 고쳐질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님의 의견을 듣고 보니 제가 착각했습니다.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바른 문장을 쓰는 것이 글쓰기의 기본인데 제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글 쓸 때 나타나는 악습이 금방 고쳐질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퇴고할 때 좀 더 꼼꼼하게 확인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제 글을 애독하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애독’의 의미는 ‘정독’입니다. 제 글은 북플의 기능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북플로 짧은 글을 금방 읽을 수 있어서 좋아요. 그런데 제 글의 분량이 길어서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기 불편해요.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으면 시력에 악영향을 줍니다. 저는 제 글을 좋게 보는 분들에게 꼭 이런 말을 합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재미없고 긴 글을 읽지 말아 달라고요. 정말로 정독을 하는 분이라면 ***님처럼 쓴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물론,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쓴소리하는 분도 있어요. 처음에 제가 언급한 다섯 분 모두 좋은 의도로 제게 쓴소리를 합니다. 저는 잊을 만하면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다음에 제가 또 실수를 하면 참지 말고 알려주세요. 제 답글을 인용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인용문은 셜록 홈즈의 말입니다.


“왓슨, 만일 내가 능력을 과신한다거나, 최선을 다해야 마땅한 사건을 건성으로 다루려고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면, 부디 내 귓전에 ‘노버리’라고 속삭여줘. 그래 주면 정말 고맙겠어.” (《셜록 홈즈의 회고록》의 단편 ‘노란 얼굴’ 마지막 문장, 현대문학 121쪽)

2017-05-28 0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5-28 11:24   좋아요 1 | URL
이 글의 결말이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님도 공감하실 거라 믿습니다. ^^

AgalmA 2017-05-28 2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샤를 페로는 『예술의 종류』에서 여덟가지 ‘순수예술‘로 웅변술, 시, 음악, 건축, 그림, 조각, 광학, 기계공학을 꼽았다. 프랑스에서는 17세기 말까지 광학과 기계학은 회화 및 조각과 같은 범주로 여겨졌다.
1746년에 아베 바퇴가 자신의 영향력 있는 논문 『하나의 원리로 통일된 순수예술』을 출판하면서 순수예술 - 음악과 시, 그림, 조각, 무용 -을 일상기술과 분리했다. 바퇴의 체계는 18세기말 유럽 사회에 널리 퍼졌다. 유명한 1751년의 『백과전서』와 그 후에 나온 재판再版들에서 바퇴와 순수예술 체계는 명시적으로 승인되었다.˝
ㅡ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중.

위 인용을 보듯이 예술의 정의는 특정 시대의 분류였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유동적이죠. 보들레르 경우 예술은 ‘천재가 만든 창작‘이라는 당시 낭만주의 풍조 때문에 더 저렇죠^^

cyrus 2017-05-29 06:29   좋아요 1 | URL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순수예술‘의 의미를 고집하는 경향이 있어요. 보들레르는 사진을 ‘순수예술‘에서 분리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의 안목이 짧았어요. 사진이 회화에 영향을 준 것을 생각하면 사진도 ‘예술‘의 범주가 될 수 있는데, 사진과 회화를 별개의 분야로 보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일부 미술 연구가들은 호크니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호크니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회화를 ‘천재(거장)이 만든 창작‘이 탄생되는 분야로 생각했을 겁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인간을 정신과 신체로 구분하고 정신만을 강조했던 이성 중심의 근대적 도그마(dogma)에서 벗어나려는 취지에서 생겨났다. 사람의 몸이 행위예술로 불리는 퍼포먼스(performance)의 표현물로 자주 등장하게 된 배경도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에 있다. 오늘날의 대량소비문화는 인간의 이성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몸에서만 확실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고 자아도 거기에서 찾아야 한다. 여성의 신체가 퍼포먼스의 단골 메뉴가 되는 것도 그런 현상과 무관치 않다. 여성이 더 이상 소외되고, 착취되고, 지배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페미니즘 담론까지 퍼포먼스에 내포되어 있다.

 

 

 

 

 

 

 

 

 

 

 

 

 

 

 

 

 

 

 

 

 

 

 

 

 

 

 

 

* 진동선 《현대사진가론》(태학원, 1998)

* 강태희 《현대미술의 또다른 지평》(시공사, 2000)

* 소피아 포카 《포스트페미니즘》(김영사, 2001)

* 정윤희 《젠더 몸 미술》(알렙, 2014)

 

 

신디 셔먼(Cindy Sherman)은 일찍이 여성의 신체에 주목한 사진작가이다. 특히 여성의 정체성을 욕망과 쾌락, 사랑과 고통, 소외와 고립 등의 측면에 집중 조명해 왔다. 이 같은 작업으로 역사적, 문화적 특수성 속에서 여성이 처한 억압 상황을 표출하는 것이 그녀의 관심사였다. 셔먼은 원래 순수 미술을 전공했다. 그녀는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사진을 이용한 퍼포먼스에 관심이 많았다.

 

셔먼은 1970년대 중반 이후 30여 년간 사진을 발표했다. 이 작가의 모델은 늘 작가 자신이다. 그녀는 자신을 옛 명화 속 모델이나 영화배우 또는 주부처럼 정교하게 분장하고 치장해 촬영, 배우 겸 연출자처럼 여성을 재현한 500여 점의 사진을 발표해왔다. 사진의 작품명은 ‘무제(Untitled)’ 혹은 ‘무제 필름 스틸(Untitled Film Still)’이며 각각의 작품에 일련번호가 있다. 『무제 필름 스틸』 연작은 작가 자신이 직접 영화 속의 배우처럼 자세를 취한 것이다. 셔먼은 할리우드나 산업 광고에 의해 묘사된 여성의 정체성을 차용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 과정에서 정형화된 성 역할과 성적 이미지의 사회화에 미디어의 영향이 어떤지를 탐구하고 있다.

 

 

 

『무제 필름 스틸 #21』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금발머리 여배우로 직접 분장해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작품이다. 이 작품 뒷면에 ‘City Girl’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무제 필름 스틸 #21』을 1분 동안 가만히 주시하면 케이트 잠브레노(Kate Zambrano)의 소설에 등장하는 ‘Green Girl’의 얼굴이 떠오른다.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

*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 출구》(동문선, 2004)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의 저자 록산 게이(Roxane Gay)는 여성성을 연기하는 여성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케이트 잠브레노의 소설 《Green Girl》(국내 미번역)을 언급한다. ‘Green Girl’은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햄릿》의 대사에 나오는 단어인데, ‘어리고 순수한 여자’를 뜻한다. 잠브레노의 《Green Girl》은 사회 속에 억압받는 여성이 연기하는 수동적 여성성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기차 안에서도, 패션쇼에서도 그들은 의식한다. 남자들은 언제나 여자들을 쳐다본다. 언제나 그 끈적한 눈길로 여자들을 쳐다보고 있다. 쇼핑은 하지만 물건은 사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생활은 어렵다. 가끔 그녀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잠브레노의 《Green Girl》 중에서,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191쪽)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남성중심 문화가 만든 규범 아래서 행동을 반복하면서 젠더 정체성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즉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된 존재가 여성의 정체성을 수행(performance)하고 있다.

 

 

 

 

 

 

여성적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할수록 전통적 여성성이 강화된다. 그러면 자신의 시선으로 ‘나’를 평가하기보다는 주위 시선으로 ‘나’를 평가한다. 대대적인 억압의 시선이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는 억압당한다. 남성 중심적 사회가 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따라가려는 노력은 ‘아름다운 여성’이 되기 위한 고통스러운 수행이다. 엘렌 식수(Helene Cixous)는 여성 직접 여성성을 텍스트 안에 집어넣는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eminine)’를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로 보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제 필름 스틸』 연작은 셔먼 자신을 사진 안에 집어넣은 작품이다. 그 속에는 셔먼은 ‘여성’이라는 불안정한 정체성을 연기하는 개인을 연기한다. 여성성을 연기하는 개인을 통해 왜곡된 여성상 이면에 가려진 정신의 그늘과 신체의 피곤까지 담아내며 과연 여성의 실제 모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억압되어 왔던 여성의 신체를 드러내는 셔먼의 사진 작업은 아름답고 용감한 일이다. 그녀의 『역사 인물화』 연작은 여성 신체를 신비화하며 재현하는 남성 중심의 예술에 반기를 든 작품이다. 『무제 #230』은 어디선가 본 듯 친숙한 여성의 누드이다. 이 작품은 라파엘로(Raphael)의 『라 포르나리나(La fornarina)』를 패러디(parody)했다. 패러디는 원작을 똑같이 모방하는 수준에 그쳐선 안 된다. 그 원작에 드러나지 않았거나 은폐된 문제점을 폭로해야 한다. 라파엘로의 그림 속 여성의 왼팔에는 ‘우르비노의 라파엘로(Raphael Urbinas)’라는 이름이 새겨진 팔찌가 채워져 있다. 셔먼은 ‘제빵사의 딸’이자 ‘화가 라파엘로의 애인’으로만 알려진 ‘이름 없는’ 여성으로 분장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분장하지 않았다. 자세만 똑같이 흉내 낼 뿐 지극히 현실적인 피부와 신체를 가진 작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의 신체는 처진 가슴과 볼록해진 배를 가진 임산부의 신체에 가깝다. 그래서 관객은 그 사진에서 눈요깃거리에서 해방하여 거짓이나 왜곡 없는 ‘그저 벗고 있는 몸’으로 바라본다.

 

 

 

 

 

『무제 #250』은 남성 관객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 준 누드 사진을 전복한 작품이다. 셔먼은 과장된 신체 묘사를 통해 여성에게 향했던 남성 중심의 관음증적 시선에 저항한다. 늙은 모델은 에로틱하기보다는 도발적인 표정이다. 남성 관객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예술이라는 이름 뒤로 은폐된 남성의 성적 욕망을 콕 짚어낸다.

 

 

 

 

 

 

 

 

 

 

 

 

 

 

 

 

포르노는 전시의 대상이 된 벌거벗은 삶이다. 포르노는 에로스의 적수다.

포르노는 성애 자체를 파괴한다.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65쪽)

 

포르노(porno)는 여성의 신체를 박제하여 전시의 대상으로 만든 영상이다. 포르노 속 여성은 ‘사람’이 아니다. 이름도, 표현도 없는 오로지 노골적인 성애를 드러내도록 수행하는 박제된 대상이다. 셔먼은 오랫동안 여성의 몸에 입혀진 사회적 억압의 관습을 과감히 벗은 채 몸만이 아닌 ‘사람’을 찍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있어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은 단순히 모방에 불과한 박제의 대상이 아니다. 그녀의 사진은 다시 살아 꿈틀거린다. 그녀의 작업이 과감할수록 사진을 보는 관객들은 사진 속 인물이 분장한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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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6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6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7-04-27 02:23   좋아요 1 | URL
그, 글케 생각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님의 깊은 마음에 경배합니다.
 

 

 

 

 

 

 

 

예경 출판사에 나온 책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이다. 두툼한 ‘벽돌 책’을 논할 때 《서양미술사》가 빠지면 섭섭하다. 색인, 도판 목록 등 기타 내용을 포함하면 《서양미술사》의 총 쪽수는 687쪽이다. 이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순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평소에 관심 있었던 미술 사조를 소개한 장만 골라 읽었다.

 

《서양미술사》가 워낙 많이 알려져서 그런지 《동양미술사》를 아는 독자가 많지 않다. 사실 《동양미술사》가 《서양미술사》보다 먼저 나왔다. 알라딘에서는 《동양미술사》의 초판 발행연도가 ‘1998년’으로 되어 있다. ‘1998년’이 아니라 ‘1993년’이다. 《서양미술사》의 초판은 1997년에 나왔다. 《동양미술사》와 《서양미술사》 두 권 모두 공역이다. 《서양미술사》의 역자는 두 명(백승길, 이종숭), 《동양미술사》의 역자는 총 여섯 명이다. 이 중 세 명은 중국 미술, 나머지 세 명은 각각 인도 · 동남아시아 미술, 서역 · 이란 미술, 일본 미술을 정리한 장을 맡아 번역했다. 이 책의 순서는 원서의 순서와 다르다. 원서를 시작하는 첫 번째 장은 일본 미술에 영향을 준 ‘한국 미술’을 소개하고 있다. 번역본은 중국 미술부터 시작한다. 중국 미술이 우리나라 미술에 영향을 준 점을 고려해서 변경되었다. 그리고 한국 미술을 소개한 내용은 제외되었다. 《동양미술사》는 1981년에 나온 동양미술사 개설서이다. 새로운 자료가 추가된 요즘 동양미술사 개설에 비하면 아쉬운 점이 있으나 동양 미술의 기본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색인을 포함한 《동양미술사》의 전체 쪽수는 653쪽이다. 이 책도 책장을 장식하기 딱 좋은 ‘벽돌 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예경 출판사가 시도한 출간 기획 중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20세기 미술의 발견’ 시리즈이다. 1995년 예경 출판사는 《르네 마그리트》, 《마티스》, 《호앙 미로》, 《프랜시스 베이컨》, 《바실리 칸딘스키》, 이 네 권으로 ‘20세기 미술의 발견’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다. 이듬해에 《살바도르 달리》, 《조르조 데 키리코》, 《마르크 샤갈》, 《오스카 코코슈카》, 《파블로 피카소》를 펴낸 이후로 출간 소식이 없다. 곧 나올 예정인 책들이 꽤 많이 있는데도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속 출간 소식이 없는 걸로 봐서는 출판사가 출간 계획을 접은 듯하다. 이 책이 9권의 책 중에 절판되지 않은 책이 딱 두 권이다. 《오스카 코코슈카》와 《조르조 데 키리코》이다. ‘20세기 미술의 발견’ 시리즈는 도판집 성격이 강하다. 화가 소개와 그림 설명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코코슈카와 데 키리코는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지만, 다른 화가들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코코슈카는 그림보다는 사생활이 더 유명하다. 그는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미망인 알마 말러(Alma Mahler)를 사랑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알마는 코코슈카보다 7살 연상이다. 알마에 향한 감정을 가득 담은 그림이 바로 코코슈카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바람의 신부』이다. 이 그림은 《오스카 코코슈카》의 앞표지를 장식했다. 공교롭게도 절판되지 않은 《오스카 코코슈카》와 《조르조 데 키리코》는 해당 화가의 작품을 소개한 국내 유일의 책이다.

 

 

 

 

 

출처 : 예경 출판사 공식 블로그

(http://blog.naver.com/yekyong1?Redirect=Log&logNo=220980435286)

 

 

 

사실 이 글은 ‘책 소개’를 빙자한 이벤트 응모 글이다. 출판사의 이벤트 공지 게시판을 개인 블로그에 공유만 하면 되지만, 그냥 복사한 것만 올리기가 뭐해서 예경 출판사의 책 몇 권 소개해봤다. 이놈의 ‘장문(長文)’ 습관이 또……

 

내가 원하는 책은 《Who?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들》이다. 요즘 사전 형식의 책을 모으는 중이라서 예전부터 눈길만 주고 있었던 책이다.

 

 

이 글을 보고 계실 출판사 관계자님!

제게 원하는 책을 주신다면 정성을 다해 리뷰를 쓰겠습니다.

예경 출판사의 책을 참고해서 정리한 글이 꽤 많습니다.

그 중에 정식 리뷰는 달랑 두 편 뿐이지만(굵은 표시를 한 제목),

이 블로그에서 예경 출판사의 책을 많이 소개했습니다.

 

 

[거꾸로 읽는 미술사] 2010년 9월 25일

[다시 구할 수 없는 미술책 시리즈] 2012년 3월 17일

[두 사형수를 위한 보헤미안 랩소디] 2012년 8월 23일

[수태고지 도상의 변천으로 보는 서양 중세미술] 2012년 10월 4일

[사랑에 빠진 두 명의 단테] 2013년 8월 26일

[미(美), 욕망, 영혼] 2013년 9월 2일

[生의 감각] 2014년 4월 16일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 2014년 5월 14일

[삶을 위협하는 내면의 덫] 2014년 7월 13일

[라블레와 브뢰헬, 그들이 바라본 세상] 2014년 7월 20일

[현실을 바라보는 고흐의 눈] 2015년 7월 6일

[탕기(湯器)와 탕기(Tanguy)] 2015년 12월 4일

[네 명의 브뤼헐] 2016년 3월 28일

[벌거벗은 나무, 벌거벗은 고기] 2016년 4월 4일

[이 불길한 환영을 보라] 2016년 9월 9일

[데 키리코의 무(모)한 도전] 2016년 9월 12일

[살고, 그렸고, 사랑했다] 2016년 11월 2일

[곰곰 봐야하는 발] 2016년 11월 3일

[‘르누아르 vs 세잔‘ 에피소드 팩트체크] 2016년 12월 16일

[그렇고 그런 사이] 2017년 4월 4일

 

 

 

제가 내세운 약속은 그 어떤 대선 후보들의 공약보다 믿을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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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4-2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웃분들의 서평단 지원글을 읽는 것도 은근히 즐겁네요. 자기소개서를 읽는 것 같은 나름의 재미를 느끼네요^^: cyrus님의 좋은 활동 응원합니다.

cyrus 2017-04-23 18:30   좋아요 1 | URL
이벤트에 당첨되려면 출판사 관계자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해야 됩니다. 이렇게 했는데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

oren 2017-04-23 2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코코슈카의 그림을 비엔나 벨베데레 궁전에서 몇 점 본 기억이 나네요.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그림들과 함께요.. 비엔나에서 오래 근무했다던 제 친구의 사무실(해외 공관)을 찾아 갔을 때, 그 녀석이 비엔나에 있을 때 수집한 그림들 얘기를 한참이나 늘어놓던 기억도 나네요.

cyrus 2017-04-24 20:02   좋아요 1 | URL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 세 명 다 표현주의 화가들이죠. oren님의 친구 분이 그림을 수집하는 ‘큰 손‘이었군요.

2017-04-24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04-24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마감 됐네. 벽돌책에 대한 관심이 뜨겁네.
곰브리치 책을 한 번 읽어 볼만 할 텐데도 여태 못 읽고 있다.ㅠ
난 후가 보고 싶네.ㅋ

cyrus 2017-04-24 20:04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처음에 《천년의 그림여행》을 원했어요. 그런데 동생이 《Who》를 보고 싶다고 해서 선택 도서를 변경했어요. ^^;;

AgalmA 2017-04-25 0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경 책은 저도 여럿 가지고 있는데요. cyrus님만한 사람 찾기 힘들텐데 예경은 복받았다고 생각해야 함ㅎㅎ 저도 일전에 현실문화 서평단 모집 응모하며 ˝믿어주십셩~˝ 했는데ㅋㅋ

cyrus 2017-04-25 12:41   좋아요 2 | URL
사놓고 안 읽는 경우가 많아서 문젭니다. ㅎㅎㅎ

저도 AgalmA님이 공유한 글을 봤어요. 아주 정성 들여 쓰썼던데요. 출판사가 AgalmA님을 안 뽑아주면 열혈 독자를 무시한 것입니다. ^^

보슬비 2017-04-25 22:49   좋아요 3 | URL
두분다 꼭 당첨되시길 바랄께요~~~^^ 진짜 예경출판사는 두분 같은 좋은 독자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캐모마일 2017-04-26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첨되셔서 좋은 리뷰를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믿고 보는 사이러스님 리뷰? ㅎㅎㅎ

cyrus 2017-04-26 11:42   좋아요 1 | URL
빠르면 책이 오늘 집으로 옵니다. 실물을 한 번도 보지 못해서 벽돌 책의 실체가 궁금합니다. 책의 좋은 점 있으면 좋게 소개하고, 아쉬운 점 있으면 솔직하게 아쉬운 소리를 할려고요. ^^

2017-05-30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목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3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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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사물을 볼 때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사물도 달리 표현되고 또 어떤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것을 보면 예술가들의 시각이 부러울 따름이다. 그들의 미술작품을 본다는 것은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예술가가 고민하고 호흡한 모든 상념과 숨결을 느끼는 것과 상통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초발심을 유지하며 예술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일은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작품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 속에는 무엇이 담겨있을까?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복잡한 의문들과 궁금증이 인다. 이는 작품에 문외한이란 말이고 모르니 답답하기 그지없다는 토로이기도 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비, 2011)에 나오는 구절이다. 미술작품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누구나 똑같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작품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면 가까이 봐도 제대로 본 것은 없다. 유홍준의 《안목》(눌와, 2017)은 미술작품을 볼 때 필요한 ‘안목’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다. 내용 면에서는 저자의 전작 《국보순례》(눌와, 2011)와 《명작순례》(눌와, 2013)와 짝을 이룬다. 전작이 우리 미술과 한국 미학의 정수를 끄집어냈다면, 이 책은 안목이 어디서 유래했고 어떻게 그런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책이 주목되는 것은 학문의 틀 속에 빠져 자칫 ‘전문가의 안목’을 소개하는 것을 피하고, 보통사람들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한 점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안목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아예 안 보인다기보다는 오히려 주목을 받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을 발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뛰어난 미술작품을 지혜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고 적절하게 가치를 알아주는 것. 그것이 미술작품의 운명을 바꾼다. 오늘날에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추사체를 개성이 넘치는 글씨라고 말한다. 추사체는 추사가 9년간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에 완성됐다. 글 쓰는 일에만 전념했을 만큼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노력이 추사체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당대 사람들은 추사체를 괴이한 글씨체로 봤다. 추사는 자신의 개성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에 하소연을 드러냈다. 그래도 추사의 진가를 알아보는 당대 안목 있는 문인들이 적지 않았다.

     

보는 사람의 안목에 따라 작품과의 교감도 달라진다. 먼저 장점을 찾는 관심이 필요하다.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의 스승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문인화가다. 그는 인품이 너그러워서 제자의 작품을 평할 때 제자의 장점을 강조했다. 추사는 표암과 반대로 제자의 작품을 혹독하게 평했다. 그는 작품을 올바로 보려면 ‘금강안(金剛眼)’과 ‘혹리수(酷吏手)’, 즉 부릅뜬 눈과 혹독한 세리(稅吏)의 손끝이 필요하다고 했다.

     

“당대에 안목 높은 이가 없다면 그것은 시대의 비극이다. 천하의 명작도 묻혀버린다. 많은 예술 작품이 작가의 사후에야 높이 평가받은 것은 당대에 이를 알아보는 대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목》 19쪽)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렇지만 안목은 예술만큼 길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작품이 언젠가는 사상 최고의 명작이 될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안목은 예술보다 더 길 수도 있겠다.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의 안목을 양분으로 삼아 미술작품을 마음껏 즐기는 일은 독자들의 몫이다. 미술작품 속에 녹아든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은 미술을 ‘알고 사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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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8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4-18 16:47   좋아요 2 | URL
안목이 부족해서 문화재 관리를 소홀히 하면,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기 쉽습니다. 미래에 문화유산으로 인정받는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 탁월한 안목을 가진 주인을 만나지 못해서 훼손됩니다.

캐모마일 2017-04-20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주목되는 것은 학문의 틀 속에 빠져 자칫 ‘전문가의 안목’을 소개하는 것을 피하고, 보통사람들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한 점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안목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아예 안 보인다기보다는 오히려 주목을 받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을 발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뛰어난 미술작품을 지혜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고 적절하게 가치를 알아주는 것. 그것이 미술작품의 운명을 바꾼다.˝ 감명 깊게 읽고 갑니다. 책이 사랑받는 이유를 알 거 같네요.

cyrus 2017-04-20 17:24   좋아요 1 | URL
좋은 책도 훌륭한 안목의 눈길을 받지 못하면 알려지지 못한 채 절판됩니다. 저는 좋은 책을 잘 고를 줄 아는 안목을 가지고 싶습니다. ^^;;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을까?’ 1971년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 쓴 글의 제목이다. 그녀는 예술이란 오로지 천재적 재능을 지닌 한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탄생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 환경과 교육제도 때문이다.

 

 

 

 

 

 

 

 

 

 

 

 

 

 

 

* 《게릴라걸스의 서양미술사》 게릴라걸스, 마음산책 (2010년)

 

 

미국에서 고릴라 가면을 쓴 채 활동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그룹 ‘게릴라 걸스(Guerrilla Girls)’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된 누드화의 85%가 여성’이라고 지적했다.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중 여성 미술가들이 제작한 작품은 불과 5%에 불과했다.

 

 

 

 

 

게릴라 걸스는 이를 비꼬기 위해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벌거벗어야 하는가?(Do women have to be naked to get into the Met. Museum?)”라는 문구가 있는 포스터를 내걸었다.

 

예술은 남성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 미술가들은 눈부신 재능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하고, 연인이거나 라이벌격인 남성 예술가들의 그늘에 가려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여성이 직업 화가가 되는 게 사회적 분위기상 거의 불가능했던 시절에 여성은 남성 화가들을 위한 ‘재현’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여성은 예술로 대상을 재현하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9세기까지 여성은 누드를 그리는 법을 배울 수 없었다.

 

 

 

 

 

 

 

 

 

 

 

 

 

 

* 《인상주의자 연인들》 제프리 마이어스, 마음산책 (2007년)

*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제임스 H. 루빈, 마로니에북스 (2017년)

 

 

메리 커샛(Mary Cassatt)은 인상주의 화가들도 인정한 화가이다. 미국 출신인 커샛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유학했다. 그녀는 오랜 전통이 있는 미술교육기관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 입학을 시도했으나 거부당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보수적인 아카데미 회화와 거리를 둔 커샛은 자연스럽게 인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렸다. 이때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의 줄임말)’으로 지내게 되는 에드가 드가(Edgar De Gas)를 만나게 됐다. 두 사람은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자라났고, 비혼(非婚)주의자였다. 드가는 커샛의 그림 실력을 인정했고, 그녀를 인상주의 화가들의 모임에 초대했다. 드가가 커샛에게 화가들의 모임 참석을 제안했을 때 그녀는 그 순간에 “황홀경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드가는 예술에 목말라하고 있었던 커샛에게 시원한 단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남성 중심의 시대는 커샛의 적극적인 성격을 곱게 바라보지 않았다. 평론가들은 그녀를 ‘남자 같은 미국인’으로 부르면서 조롱했다. 심지어 그녀의 그림을 향해 말도 안 되는 혹평을 내리기까지 했다.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는 커샛의 지인들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어떤 평론가는 그림에 있는 찻잔 세트에 시비를 걸었다. 그는 찻잔 세트가 ‘형편없이 그려진 흉한 물건’이며 그림의 격을 떨어뜨린다고 비난했다. 아마도 이 평론가는 전시회에 ‘벌거벗은 비너스’가 그려진 그림을 볼 수 없어서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옷 입는 여성’이 차를 마시고 있는 평범한 일상을 묘사한 그림을 ‘예술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 《여자, 그림으로 읽기》 시모나 바르톨레나 외, 예경 (2012년)

 

 

커샛과 드가는 연인이라고 봐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친분을 유지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은 비밀스러운 연애편지 같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라고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다. 커셋은 드가의 괴팍한 성격을 이해해주는 절친한 친구였지만, 드가의 지독한 남성우월주의는 싫어했다. 커셋은 남성 화가들이 가득한 보수적인 화단의 분위기에 여러 차례 염증을 느낀 적이 있었고, 드가의 여성 혐오를 절대로 모를 리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드가는 커셋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화폭에 담지 않았다. 그림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카셋은 직접 루브르 미술관에 가서 거장들의 그림들을 꾸준히 모사했다. 그런데 드가는 카셋의 진짜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카셋을 전시장 내부를 유유히 구경하는 한가한 여성의 모습으로 그렸다.

 

 

 

 

 

카드를 쥐고 있는 카셋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커셋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커셋이 드가가 그린 초상화에 불만을 드러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드가의 여성관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카셋이 쥐고 있는 카드는 점을 볼 때 쓰는 것이다. 그림 속 그녀는 카드 점을 보는 집시(Gypsy) 여인의 자세와 같다. 오래전부터 ‘점쟁이’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쟁이를 거짓과 사기를 일삼는 사기꾼으로 생각했고, 조르주 라 투르(Georges de la Tour)와 그 밖의 남성 화가들이 ‘상대방을 유혹하고 기만하는 여성’의 악덕을 묘사하기 위해 선택한 도상학적 이미지가 바로 점쟁이였다. 정말로 카셋이 드가가 그린 초상화에서 여성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도상학적 이미지를 발견했다면 당연히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드가는 여성 모델을 일부러 못생기게 그리기로 악명이 높았다. 드가는 커셋을 ‘턱주가리’로 그렸다. 드가는 골상학에 심취했고, 골상학적 관점을 토대로 인물의 얼굴을 묘사했다. 골상학자들은 큰 턱을 가진 얼굴이 진화가 덜 된 범죄형 얼굴이라고 주장했다. 드가는 자신의 친구를 ‘남을 속이는 범죄자’, ‘사악한 여성’의 모습으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 드가의 고집스러운 여성 혐오를 읽을 수 있다.

 

드가는 카셋을 ‘그림 그리는 일에 관심 많은 여성’으로 대했을 뿐이다. 그는 카셋이 ‘위대한 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녀의 그림이 루브르 미술관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릴 거라고 예상하지도 않았다. 드가가 카셋의 그림을 인정했어도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미술에 여성은 없다.’ 라는 궤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궤변은 1970년대까지 여성 미술가들의 존재를 은폐한 ‘유리 천장’이 되었다. 이 유리 천장이 완전히 부서져야 ‘여성 화가’는 ‘화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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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4-04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넌 참 글 주제를 잘 잡는 것 같아.
어디가 물어 오는 것도 잘 물어오고.ㅋ
난 이렇게 못 쓴다.ㅠ

cyrus 2017-04-04 20:52   좋아요 0 | URL
솔직히 이렇게 글을 쓰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요. 잘 쓰고 싶은 욕심 때문에 안 봐도 되는 책을 더 보게 되니까 글 한 편 쓰는 데 적어도 1주 정도 걸려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글은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질리는 스타일이에요. 나쁘게 말하면 보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글이죠. 후애님처럼 알라딘 책소개만 인용해서 글 쓰고 싶은 생각도 한 적 있었어요.

yureka01 2017-04-05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계의 종횡무진....이런글에 당선작으로 촉구합니다.

cyrus 2017-04-05 10:05   좋아요 0 | URL
당선작 선정은 독자위원회의 선택입니다. 선정작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도 그분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합니다. 언급을 안해서 그렇지 선정작을 고르는 일이 쉬운 게 아닙니다. 선정되든 안 되든 구애받지 않으면서 글을 쓸 겁니다. ^^

세실 2017-04-05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당선작으로 한표 던집니다^^
글 한 편 쓰는데 1주일이나.....역시 내공이 느껴집니다.
전 우리나라 여성화가중 나혜석이 찡합니다.

cyrus 2017-04-06 09:47   좋아요 0 | URL
글을 열심히 썼다고 해서 당선작이 되는 건 아닙니다. ^^;;

우리나라에 나혜석 이외에 여성 화가들이 더 있을 겁니다. 갑자기 알아보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