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애니메이션 4기 1화 에피소드는 '르누아르 대 세잔'이다. 이 에피소드에 인상파 화가들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르누아르와 세잔이다.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에드가 드가는 엑스트라 급으로 나온다.

 

 

 

 

 

'르누아르 대 세잔'은 서양미술에 관한 지식이 없어도 볼 수 있는 에피소드다. 이 만화의 주요 설정이 개그라서 역사적 인물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드가는 사람 형태가 아닌 회전초로 그려졌다.

 

 

 

 

 

 

르누아르는 여자 알몸이 그리고 싶다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르누아르의 라이벌인 세잔이 이를 엿듣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부 다 얘기하겠다고 협박한다.

 

 

 

 

 

 

 

 

 

화가 난 르누아르는 세잔에게 '르누아르 로켓'을 날려 공격하고, 자존심 상한 두 사람은 그림 시합을 펼치기로 한다.

 

 

 

 

 

 

그림 시합의 심사위원은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드가. 르누아르와 세잔은 그림을 그리는 와중에도 유치하게 티격태격 싸운다. 르누아르는 세잔에게 자신의 파란색 물감을 빌려줬는데, 세잔은 그 물감을 남김없이 다 써버린다. 단단히 화가 난 르누아르는 드가를 집어던져 세잔에게 맞추려고 했으나 드가는 세잔의 그림에 부딪혀 죽는다. 드가가 흘린 체액은 세잔의 그림을 망치게 했다. 르누아르와 세잔은 그리라는 그림은 안 그리고, 몸싸움으로 대응하자 피사로는 시합을 중단시킨다. 피사로가 르누아르와 세잔에게 시합용 그림(이라 부르고 낙서라 한다)을 전시회에 출품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만화 에피소드처럼 실제로 르누아르와 세잔이 그림 시합을 한 적이 없다. 이 만화를 본 사람들은 르누아르와 세잔이 인상파의 라이벌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잔은 르누아르의 풍경화를 '솜뭉치'로 비유하면서 반감을 드러낸 적이 있다. 이 증언이 존 리월드의 세잔 전기에 나온다. 그러나 이 증언만으로 세잔이 르누아르를 싫어했다고 볼 수 없다. 세잔은 르누아르를 존경했다.

 

 

나는 모든 생존 화가들을 경멸하지만 모네와 르누아르는 예외이다.


(세잔, 《르누아르 : 빛과 색채의 조형화가》 150쪽)

 

 

피사로가 자신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르누아르는 세잔의 그림을 좋아했다.

 

 

드가와 르누아르는 세잔 작품을 매우 좋아한다. 볼라르(인상파 화가들과 친하게 지낸 화상-글쓴이 주)가 세잔의 과일 스케치를 보여 주었는데, 그들은 누가 그 그림을 소유할 것인가를 놓고 동전을 던졌지.

 

(카미유 피사로가 아들 루시앙에게 보낸 편지, 미셸 오 《세잔 : 사과 하나로 시작된 현대 미술》 153쪽)

 

 

세잔은 시골에서 자란 탓에 도회적 분위기의 동료 화가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동료 화가들은 세잔의 그림을 좋아했고, 그의 그림들을 구입하기도 했다. 피사로는 10점, 르누아르는 4점, 드가는 7점을 구입했다.

 

르누아르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그림 수집가 빅토르 쇼케(1821~1891)에게 세잔의 그림을 소개하기도 했다. 르누아르의 주선에 의한 세잔과 쇼케의 만남은 세잔의 일생 중에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화가가 아닌 일반 수집가가 세잔의 그림을 사는 일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쇼케는 세잔의 그림을 흡족해했고, 세잔의 후원자가 되었다. 쇼케가 수집한 세잔의 그림은 총 34점이다.

 

 

 

 

 

 

 

 

 

세잔과 르누아르는 쇼케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리기도 했는데, 두 사람이 그린 초상화를 보면 확실히 스타일에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잔의 인물화는 모델의 외양을 자세히 그리는 것보다 모델 내면의 감성을 표현하는 데 치중했다면, 르누아르는 인물을 최대한 아름답게 그리려고 했다. 세잔을 인정해주던 동료 화가들은 새롭게 변화를 준 세잔의 화풍에 당황했다. 세잔 못지않게 자존심 세고, 독설가로 알려진 드가는 '미친 사람이 그린 미친 사람의 초상화'라고 평가했다.

 

 

 

 

 

 

 

 

 

 

 

 

 

 

 

 

 

 

사실 세잔과 드가가 서로를 경멸하는 불편한 관계였다고 한다. 한때 무명이었던 르누아르, 드가, 세잔 등의 그림을 판매한 앙부르아즈 볼라르(1868~1939)는 세잔과 드가를 자기 그림에 대한 긍지가 강하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봤다. 두 사람 다 무뚝뚝하고, 부끄럼을 타는 편이라서 동료 화가들에 대한 칭찬에 인색했을 것이다.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끼리 자주 만나면 정이 생긴다고 해야 할까? 드가는 세잔의 첫 개인 전시회에 참관하여 세잔의 그림을 인정했다.

 

르누아르, 세잔, 드가. 이 세 사람의 일생을 소개한 관련 도서 여러 권을 참고해도 이 세 사람이 어떠한 관계인지 명확히 파악하기 불가능하다. 세잔을 싫어한 드가가 그의 그림을 7점이나 구입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드가는 츤데레(ツンデレ, 겉으로는 상대방을 퉁명스럽게 대해도 점점 애정을 느끼기 시작하면 좋게 대해주는 성격) 유형에 가깝다.

 

 

드가 : 흥! 딱... 딱히 널 위해 그림을 구입한 건 아니야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ora 2016-12-16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면서 괴롭히는 그런 심리ㅜ 아닐까요?

cyrus 2016-12-16 16:18   좋아요 0 | URL
그럴 수도 있겠어요. ㅎㅎㅎ

2016-12-16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2-16 16:44   좋아요 1 | URL
만화 에피소드가 제 관심사와 연관이 있어서 관련 도서를 찾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6-12-16 17: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르누아르가 그린 빅토르 쇼케가 훨씬 좋습니다~ㅅ!
그림이 좋아 완전 한참을 서성이고 머물다가 갑니다~^^

AgalmA 2016-12-16 18:44   좋아요 1 | URL
저도 르누아르 쇼케. 르누아르 그렇게 좋아하는 편 아닌데, 저 그림에선 쇼케 손이 너무 아름다워서 계속 보게 돼요^^
세잔은 인물이 아니라 붓터치와 덩어리 질감을 계속 보게 됩니다. 결국 그림이 아니라 세잔을 보게 만든다는 것. 대단한 세잔.

cyrus 2016-12-16 21:52   좋아요 0 | URL
To. 양철나무꾼님 / 르누아르 그림의 매력이 밝고 화사한 분위기죠. 그리고 르누아르가 묘사한 남성도 여성성이 느껴져요.

cyrus 2016-12-16 21:54   좋아요 0 | URL
To. Agalma님 / 세잔의 화풍을 잘 보셨습니다. 세잔은 모든 대상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것보다 자신만의 붓터치와 질감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stella.K 2016-12-17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만화가 있었네. 급땡김이다.
요즘엔 드라마와 영화 찔금 보는 정도라 만화는
여력이...ㅠㅠ

cyrus 2016-12-17 16:53   좋아요 0 | URL
이 만화 소재와 개그 코드가 일본풍이라서 재미없을 수 있어요. ^^;;
 
소리의 정치 - 식민지 조선의 극장과 제국의 관객
이화진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는 기술 발전의 산물이다. 인류의 역사에 처음 등장한 영화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무성 영화였다. 무성 영화는 화면만 움직이고, 화면 옆에서 변사(辯士)가 영화 내용을 관객에게 설명해 주었다. 무성영화 시대에는 극장에서 대사를 읽어주는 변사가 고소득 인기직종이었다. 소리가 없는 영화였던 탓에 영사막 옆에서 영화를 읽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과 배우들의 목소리가 첨가된 발성 영화(talkie, 토키)가 나오자마자 변사는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했다. 영화 속 음향은 영화의 화면을 구성하는 시각적 요소와 함께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것은 무성 영화에서 발성 영화로 전환된 1920년대 이후부터 유효했다.

 

통상 한국영화의 역사는 한국인들의 손으로 처음 만들어진 <의리적 구투>(1919년 작)로부터 시작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해방기 혼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대다수 필름이 사라져 한국영화사 복원은 추측과 주변 자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원본이 없기에 어떤 추측과 주장도 입증 불가능한 명제로 남는다. 그래서 일본이 패전한 1945년까지 제작된 조선영화의 작품성을 평가하는 일이 쉽지 않으며, 상당히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조선영화사에서 당대 정서를 절절히 녹여낸 첫 작품으로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년 작)이 꼽힌다. (올해가 <아리랑> 개봉 90주년이며, 내년은 나운규 사망 80주기다) 나운규는 일본에 억눌린 민중의 한을 스크린에 담아내 전국에서 관객 약 15만 명을 끌어모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제창하고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전한다. 그 후로 나운규는 <아리랑 후편><아리랑 제3>을 제작, 출연했으나 무성영화 시대에서 토키 시대로 넘어가는 변화의 과정을 넘어서지 못했다.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스타였던 나운규는 조선어 토키를 만들어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야심차게 준비한 것이 바로 <아리랑 제3>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 출연한 그는 연기의 한계를 드러냈고, 흥행에도 처참히 실패했다. 최초의 조선어 토키는 이명우 감독의 손에 의해 탄생되었다. <춘향전>(1935년 작) 개봉 이후 무성영화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명함만 영화평론가인 조희문(왜 이렇게 소개했는지 궁금하면,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조희문을 검색해보시길)<아리랑>의 감독이 나운규가 아니라 일본인일 가능성과 <아리랑>이 항일영화가 아니라는 의견을 주장한 적이 있다. 억측에 가까운 주장이다. 다만, 조선영화 제작 과정에 일본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조선인들은 조선어로 된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극장은 조선인 상영관과 일본인 상영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조선인 상영관은 외국영화, 일본인 상영관에는 일본영화가 상영되었다. 우리가 이 시절로 되돌아가서 조선인처럼 생활하면서 영화를 본다고 상상해보자. 조선어 영화를 보기 힘든 시절이었다. 한글이 1도 없는 영화를 무슨 재미로 보는가. 게다가 외국영화에 일본어 자막을 입혔기 때문에 영화의 대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화면을 바라봐야만 했다. 피식민지인으로서의 차별을 피하려면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인처럼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일본인 상영관에 드나들어야 한다. 조선인들은 공적 공간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가정을 포함한 사적 공간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 상태(diglossia, 다이글로시아)에 처했다. 

 

이런 부당하고,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운규 같은 영화인들 사이에서 우리도 조선어 토키 제대로 만들어보자!”라는 공통된 생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말재주가 뛰어난 변사들은 극장을 찾은 조선인 관객들에게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취하는 역할도 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변사가 관객의 영화 이해와 감상을 돕는 무성영화의 해설자로만 이해했다. 이러한 인식 탓에 그들이 다이글로시아의 풍경에 저항한 주체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어 토키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이명우 감독의 형이자 <춘향전> 녹음 작업을 담당한 이필우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토키 제작자들의 조언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국 영화 한 편 만들어지려면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어야 한다. 당시 조선이 처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필우의 시도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이리하여 조선어 음악이 배경음으로 깔리는 조선어 토키가 나올 수 있었다. 이필우가 설립한 경성촬영소는 조명과 촬영 설비를 최신형으로 바꾸고 촬영장을 개축하는 데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

 

조선의 영화인들은 양질의 자본이 투입된 영화 제작의 중요성을 몸소 경험했다.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고, 변화를 과감하게 시도한 영화인들 덕분에 우리나라도 뒤늦게나마 발성영화 시대의 포문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인들을 위해 조선어 영화를 만들겠다는 영화인들의 초심이 희미해져 갔다. 일본의 대동아(大東亞) 환상에 찬양하는 조선어 영화나 전시 체제 동원을 긍정적으로 강조하는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조선인 배우가 일본어 대사를 하면서 등장한 영화를 조선영화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일본영화로 봐야 하는가. 여기서도 또 한 번 복잡한 다이글로시아에 마주친다. 복잡하고 불편한 상황에서도 조선인 관객들의 저항 의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존재를 위협하는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그것에 저항하고 견디어내는 힘이 나온다. 아마도 조선어 토키는 일종의 고통에 대한 저항 에너지 효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진경의 말을 빌리자면, 극장은 자유롭고 억압받지 않는 삶에 대한 욕망과 혁명이 조우하는 특별한 지점이다. 이 지점, 극장은 식민지 시대를 탈주하려는 자들이 통과하는 곳이었다. 그런 점에서 저항의 탈주를 이끌어 내는 매체로 일제강점기 영화인들이 선택한 것이 다름 아닌 조선어 토키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고 지배적인 예술이 된 영화야말로 권력이 자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은밀하게 대중들에게 전파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지배 권력의 피해물들이며 동시에 그 지배 권력을 공격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ansient-guest 2016-11-24 0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장이네요.ㅎ 지금도 이어지고 있죠. 한쪽에서는 국뽕을, 양식있는 이들은 언론이 다뤄주지 않는 문제를 영화로, 그 중간에서는 이쪽저쪽을 기웃거리는...

cyrus 2016-11-24 09:3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오늘날의 영화는 상업 쪽으로 많이 치우쳐져 있습니다. 국위선양 목적의 상업 영화도 만들어지기도 하죠. 민감한 소재를 예리하게 파헤친 영화를 보기 힘들어요.
 

 

 

 

 

 

 

 

 

 

 

 

 

 

 

 

 

 

 

 

 

폴 고갱은 나이 마흔셋에 문명을 등지고 원시적 감성이 살아 숨 쉬는 태평양의 섬 타히티로 떠났다. 고갱은 이후 문명과 원시를 몇 차례 오가며 변화무쌍한 삶의 궤적을 남겼다. 그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노아 노아(Noa noa》를 썼다. 산문집의 표지와 삽화를 직접 그렸고, 자비로 출판했다. 비록 상업적으로 실패했지만, 이 책에 고갱의 고독했던 삶과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 그리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노아’는 마오리족 어로 ‘향기’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노아 노아 : 폴 고갱의 타히티 체류기》(열화당, 1979년, 재판 1994년), 《고갱의 타히티 기행》(서해문집, 1999년)은 《노아 노아》를 번역한 책이다. 열화당 판은 출간 연도가 상당히 오래 돼서 구하기 힘들고, 서해문집 판(약칭 《타히티 기행》) 도 절판되었다. 《폴 고갱, 슬픈 열대》(예담, 2000년, 약칭 《슬픈 열대》)에는 《노아 노아》의 일부 내용만 소개되었다.

 

 

 

 

 

 

세 권 중에 비교적 완성도가 높고, 읽을 만한 판본은 열화당 출판사의 《노아 노아》이다. 이 책에 수록된 고갱의 판화는 그의 제자 다니엘 드 몽프레가 복제한 것이다. 《타히티 기행》의 일러스트는 원본이다. 고갱의 자필 문장도 볼 수 있다. 그리고 1962년에 작성된 서머싯 몸의 서문이 있다. 번역어만 가지고 고갱의 문장 실력을 평가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 고갱의 친구이자 상징주의 시인인 샤를 모리스가 《노아 노아》 원고 일부를 다듬었기 때문에 《노아 노아》의 원문 전체 중에 고갱이 쓴 것을 찾아내 구별하기가 어렵다. 원고를 윤색한 친구 때문인지 은유, 상징, 관념적인 표현이 들어간 문장이 많다.

 

 

 

 

 

 

 

 

 

 

 

 

 

 

 

 

 

 

알라딘에 프랑스 원어로 쓰인 전자책 《노아 노아》를 무료로 내려받아서 읽어볼 수 있다. 프랑스 원어와 《타히티 기행》 번역문을 대조해서 읽어보고 싶었으나 프랑스어를 1도 몰라서 포기했다. 그래도 구글 번역기를 사용하면서까지 《타히티 기행》 1장 전체 내용을 원문과 대조해서 읽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하지만 프랑스어 문법을 몰라서 꼼꼼하게 읽지는 못했다.

 

《노아 노아》는 보들레르의 시구를 사용한 제사(題詞)로 시작된다.

 

“말해주오... 무엇을 보았는지?” (Dites, qu'avez-vous vu?, 《타히티 기행》 13쪽)

 

《슬픈 열대》는 제사가 없다. 《노아 노아》가 시작되는 첫 번째 글이 《슬픈 열대》 중반부에 배치되는 바람에 번역자가 제사를 삭제한 것 같다. 그리고 발췌 편집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문장을 삭제한 흔적도 보인다.

 

 

* Les vahinés reprenaient le bras de leur tanés, parlaient haut, dodelinaient des fesses, tandis que leurs larges pieds nus foulaient lourdement la poussière du chemin. Près de la rivière de la Fatüa, éparpillement général.

 

* 여자(vahines)들은 다시 남자(tanés)의 팔을 잡고 엉덩이를 가볍게 흔들면서 그 큰 발로 먼지를 일으키면서 파튜 (Fatü) 강가를 따라 흩어져 갔다.

(《노아 노아》 12쪽)

 

* 아내는 남편의 팔을 잡고 생기 있게 떠들었고 엉덩이를 가볍게 흔들며 튼튼한 맨발로 길바닥의 먼지를 심하게 일으켜댔다. 파투(Fatü) 강가 근처에서 모두 흩어졌다.
(《타히티 기행》 20쪽)

 

* 여자들은 남자들의 팔짱을 끼고 엉덩이를 흔들며 먼지 이는 파타우아 강가를 따라 흩어졌다. (《슬픈 열대》 138~139쪽)

 

 

vahiné타히티의 여자뿐만 아니라 아내, 정부(情婦)도 의미하는 단어다. 원서에는 강의 이름이 ‘Fatüa’로 되어 있으나《노아 노아》와 《타히티 기행》의 번역가는 ‘Fatü’로 썼다.

 

 

 

—Tu sais, Gauguin, fit la princesse en se levant, je n'aime pas ton La Fontaine.
—Comment? Notre bon La Fontaine!
—Peut être est il bon, mais ses morales sont laides. Les fourmis….
(et sa bouche exprimait le dégoût).
Ah! les cigales, oui! Chanter, chanter, toujours chanter!

 

 

"고갱, 당신 알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네 나라의 라 퐁텐을 싫어한단 말이에요."

"어째서? 우리들의 선량한 라 퐁텐을?"

"아마 그는 선량한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사람의 도덕이란 게 도시 맘에 들지 않는단 말예요. 개미...?"

그녀의 입가엔 혐오의 정이 역연했다.

"오, 베짱이. 그는 좋다. 노래하고 또 노래하고 항상 노래하는..."

 

(《노아 노아》 18쪽)

 

 

"고갱 씨, 알아요?" 일어나면서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당신네 라 퐁텐느를 좋아하지 않아요."
"어째서? 우리 훌륭한 라 퐁텐느를?"
"아마 훌륭한 사람이겠죠. 하지만 그 사람 도덕은 마음에 안 들어요. 개미는..."
(그리고 그녀의 입은 불쾌감을 나타냈다)
"아, 베짱이는, 그래요. 노래하고 노래하고 항상 노래해요!“


(《타히티 기행》 25~26쪽)

 


"아시나요, 고갱? 난 당신네 작가 라 퐁텐을 싫어해요."
"왜 우리 선량한 라 퐁텐을?"
"선량한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사람이 말하는 도덕은 도무지 마음에 안 들어요. 개미라고!"
그녀의 입이 혐오스럽다는 듯 일그러졌다.
"난 매미가 좋아요. 이것들은 노래하고 또 노래하고, 언제나 노래하죠..."


(《슬픈 열대》 145쪽)

 

 

프랑스어를 조금 할 줄 아는 티티(Titi)라는 타히티 여자가 고갱 앞에서 라 퐁텐의 우화를 암송한다. 그리고 그녀는 고갱에게 우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 라 퐁텐 우화집은 동물을 위주로 한 소재와 접근방식이 비슷한 탓에 흔히 이솝 우화집과 혼동된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가 유사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오랜 시간, 전세계로 구전되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살짝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개미와 베짱이’ 우화가 프랑스에선 ‘개미와 매미’로 알려져 있다. ‘cigale’은 매미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이솝 우화 그리스어 원전에도 ‘개미와 매미들’로 되어 있다.

 

 

 

 

 

 

 

 

 

 

 

 

 

 

 

 

 

 

 

고갱이 그린 타히티 여인들의 그림은 문명 세계를 떠난 순수하고 위안을 주는 예술로서 칭송받아 왔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 그리젤다 폴록은 고갱의 그림이 식민주의(colonialism)와 관광주의(tourism)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아 노아를 읽어 봐도 유럽중심주의와 식민주의가 결합한 고갱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고갱은 원시적이고 순수한곳을 찾아 섬 깊숙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문명의 손길이 닿은 타히티의 현실에 실망했다. 그곳에는 원시의 향기를 맡을 수 없었다. 고갱은 자신의 몸과 정신에 배어있는 문명의 요소를 말끔히 씻어내기 위해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 과정에서 고갱은 자신이 원주민의 삶에 동화된다고 생각했다. 고갱과 동행한 원주민들이 그에게 친밀한 원시의 향기를 맡았는지 알 수 없다. 노아 노아는 고갱의 시점으로 야생의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고갱의 타히티 정착 생활은 야생에 완벽히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백인의 관광주의적 체험과 유사하다.

 

고갱은 토테파라는 이름의 원주민과 함께 산 속에 자란 장미 나무를 꺾는다. 그는 도끼로 장미나무를 꺾음으로써 마오리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확신한다.

    

토테파와 나는 무거운 장미나무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오두막까지 날랐다. 장미나무. 그것이야말로 노아 노아였다. 토테파가 나에게 말했다.

 

“Paia?(재미있었어요?)”

 

그럼!”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이 그럼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나는 장미나무의 목판에 온 힘을 다해 칼자국을 넣었다. 그리고 칼자국을 넣을 때마다 점차로 고양되는 승리와 회춘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노아 노아!

 

(노아 노아41)

 

 

제국주의 유럽은 자연을 정복과 이용의 대상으로 보면서 절대적인 존재로서 지구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야만인들을 문명화하는 것이 백인들의 의무(mission)라는 명분까지 내걸고 식민지 정복의 길로 나선 것이다. 고갱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식민지 정복을 과시하는 자아도취에 빠져버렸다. 그가 야생의 장미 나무를 꺾고, 확보한다는 것 자체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노아 노아는 원시 문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근대적 욕망이 만들어 낸 환상의 상징이다고갱은 '예술'이라는 명분으로 굉장히 추상적인 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건드리려고 시도했다. 고갱이 한평생 추구했던 의무는 가장 아름다울 수도, 더없이 추해질 수도 있는 이중적 욕망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한엄마 2016-11-22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미 고갱 자신이 문명 우월론자였으면서 원시상태를 꿈꾸고 그 모습을 완벽하게 그리려고 했다는 게 말이 안 됐었네요.자신이 이미 바뀔수가 없는데..

cyrus 2016-11-22 18:52   좋아요 1 | URL
고갱은 자기확신이 강한 편이었어요. 그렇지만 현실에 대한 실망감이 클수록 자신의 선택(타히티 섬 정착)에 실망했을 겁니다. 고갱의 글은 자기 합리화로 포장되어 있어요.

yureka01 2016-11-2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갱이 동양의 도교 사상을 알았더라면 혹시 어떻게 되었을까요..^^

cyrus 2016-11-22 18:54   좋아요 0 | URL
아마도 고갱이 동양미에 심취했으면 이인성 같은 화가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을 것 같습니다. ^^
 

 

 

 

 

 

 

 

 

 

 

 

 

 

 

 

 

 

 

 

 

 

 

그리스신화에 크레타 미노스 왕의 미궁(Labyrinthos) 이야기가 있다. 미노스의 왕비는 황소와 정을 통해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왕은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을 짓고 미노타우로스를 가둔다. 괴물의 제물은 아테네의 소년, 소녀들이었다.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는 괴물을 처치하기 위해 미궁에 들어간다. 테세우스를 보고 한눈에 반한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실타래를 줬다. 테세우스는 미궁의 문설주에 실 끝을 묶고 안으로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풀어놓은 실을 따라 무사히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미궁에 빠지다’, ‘미로를 헤매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살다 보면 출구가 안 보이는 것 같은 미궁과 미로에 봉착하게 마련이다. 로댕은 ‘우리는 자기를 둘러싸는 깊은 미궁 속에서 항상 방황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미로 게임을 즐겨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미궁=미로’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미궁을 연구하고 분석한 《우주의 자궁 미궁 이야기》의 저자 이즈미 마사토는 ‘미궁=미로’ 관념을 부정한다. 미궁은 의도적으로 탈출구를 찾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다. 발명가 다이달로스가 애초에 미궁을 그렇게 제작했더라면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고도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미궁은 탈출할 수 있는 통로 또는 도달 가능한 목적지가 있다는 전제하에 정밀한 계산으로 설계된 구조물이다. 실타래를 사용하지 않아도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다. 막힌 통로를 만나더라도 다시 지나간 통로를 되짚어 나오면 된다.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탈출구를 찾아낼 수 있다. 반면 미로는 (이즈미 마사토가 정의한) 미궁과 정반대의 뜻이 된다. 미로에는 탈출구가 없다. 또한, 통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므로 복잡한 상황에 부닥칠 때 사용되는 관용어구 ‘미궁에 빠지다’는 틀린 거고, ‘미로를 헤매다’ 또는 ‘미로에 빠지다’가 정확하다. 다만, 미로를 무조건 미궁으로 통일해서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미궁이나 미로나 이 구조물에 들어가면, 누구나 길을 잃어버려 헤매기 때문이다.

 

 

 

 

 

 

 

 

 

 

 

 

 

 

 

 

 

 

 

이즈미 마사토는 미궁이 이성의 힘을 통해 질서 정연하게 만들어진 구조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무질서하고 흐트러져 있는 세계보다는 질서 정연한 세계 속에 있을 때야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의 토대가 되는 규칙과 질서였다. 그런 규칙과 질서를 부여하는 권위가 바로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이었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에 따르면 인간은 개인이 느끼는 약점이나 한계를 보완(또는 부정적 현실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추상 충동’을 느끼기 시작한다고 분석했다.

 

 

 

 

 

 

 

둥그런 구멍 따위의 작은 것들이 뭉쳐 있는 것을 보면 공포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환 공포증’을 느낀다고 말한다. 환 공포증의 원인을 연구한 학자들은 환 공포증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독성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거나 천적의 위협을 피하려는 생물의 몸에는 원 무늬가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공작나비의 경우 앉아 있을 때는 보호색을 띠지만, 천적이 다가오면 날개를 펴서 눈알 모양의 무늬로 위협을 준다. 이런 무늬를 볼 때 인간의 뇌는 몸에 무의식적으로 신호를 보낸다. 위협적인 대상을 피하라는 일종의 신호인 셈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환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정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동그라미의 무시무시한(?) 존재에 맞서려면 그 형태 한가운데에 점 하나 콕 찍으면 된다. 아니면, 동그라미 안에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그려 넣으면 된다. 점을 찍거나 동그라미 안에 그림을 채워 넣는 행위는 ‘추상 충동’이다. 보링거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발생한 ‘추상 충동’이 예술 창작의 원동력으로 봤다.

 

 

 

 

 

 

미로는 인간의 ‘추상 충동’에 의해서 탄생한 ‘이성의 구조물’이다. 고대의 미로는 인간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 맞닥뜨려야 할 통과의례를 상징한다. 이렇게 인간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안은 채 힘든 통과의례를 치러야 한다.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날아오를 수가 없고, 막다른 통로 속에 갇혀 버린다. 힘든 과정 없이 미궁에 극적으로 탈출한 이카로스는 하늘을 나는 흥분에 도취하여 추락했다. 미노타우로스는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고, 미궁 안에서만 머무르는 괴물로 살아갔다. 이카로스와 미노타우로스는 공통으로 미궁이라는 통과의례를 넘어서지 못했다.

 

중세의 미로는 천상으로 도달하기 위한 순례의 길이다. 이 또한 종교인들이라면 절대로 피하면 안 될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인간은 미로를 제작함으로써 목적지로 향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파악하게 된다. 즉 미로는 인간에게 시련과 고난을 선사해주면서도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지혜의 힘을 북돋워 주는 안정적인 구조물이다.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 바닥에 미로가 디자인 요소로 그려졌다. 흑사병과 죽음 앞에 불안을 떨면서 살아간 중세 사람들은 바닥에 그려진 미로를 바라보면서 심신에 안정을 찾았을 것이다.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만 있으면 이 세상 어떠한 두려움을 잊고,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근대의 미로는 세속화의 바람을 맞으면서 과거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종교의 힘이 약화된 근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선택이 불가피한 시련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미로는 교회 건물 밖으로 나가 왕족 및 귀족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정원 도안으로 전락했다. 특히 연인들에게 미로는 최상의 안식처였다. ‘사랑의 미로’는 탈출구가 없어도 된다. 단둘이서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밖으로 나오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현대의 미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미로를 만나선 안 된다. 왜냐하면 현대의 미로는 출구와 입구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 <큐브>의 등장인물들처럼 이유를 모른 채 거대한 구조물 안에 갇혀 있다고 상상해보자. 특히 그 구조물이 출구와 입구를 모르는 미로라면 불안감과 공포심이 극대화된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은 우화」는 미로 같은 현실에 마주한 인간의 불안감을 우화 형식으로 표현한 짤막한 글이다. 나는 단 5줄에 불과한 이 글이 꿈도 희망도 없는 미로에 갇힌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잘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아아.” 하고 쥐가 말했다. “세상이 날마다 좁아지는구나. 처음만 해도 세상이 하도 넓어서 겁이 났었는데. 자꾸 달리다 보니 마침내 좌우로 멀리 벽이 보여 행복했었지. 그러나 이 긴 벽들이 어찌나 빨리 마주 달려오는지 어느새 나는 마지막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모퉁이엔 내가 달려 들어갈 덫이 놓여 있어.” ㅡ “넌 오직 달리는 방향만 바꾸면 되는 거야.”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었다. (프란츠 카프카 「작은 우화」, 《변신 (단편전집》 605쪽)

 

 

카프카도 종종 작품에 미로 구조를 도입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갑자기 달라진 세상과 마주친다. 미로 같은 세상의 몽환적 풍경 때문에 당혹스러워한다. 무턱대고 카프카의 미로에 들어간 독자들도 점점 자신을 에워싸는 불투명한 상황에 빠져나가지 못한다. 우리를 절실히 구원해 줄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기대하지 말라. 카프카도 자신이 만든 미로에 갇힌 다이달로스와 같은 신세가 됐다. 미로를 방심하면 금물이다. 한 번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6-11-14 2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른 이야기지만,요즘 나뭇잎들이 허공의 미로를 단 한번의 처녀비행이자 마지막 비행을 합니다.....바람의 미궁으로 헤매는 시간입니다.^^.

cyrus 2016-11-15 07:59   좋아요 1 | URL
정말 멋진 표현입니다. 어제 바람이 많이 안 불었는데도 바닥에 낙엽이 많았습니다. 가을이 짧아졌다고 해도 가을다운 분위기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의 묘비명은 딱 세 마디다. “살고, 쓰고, 사랑했다.” 스탕달은 숨을 거두기 20년 전에 이미 자신의 묘비명을 만들었다. 원래 스탕달이 처음 생각해 낸 묘비명은 쓰고, 살았고, 사랑했다였다. 그런데 스탕달이 세상을 떠난 뒤에 사람들은 단어의 순서를 바꿨다. 단어의 순서가 달라져도 간결한 묘비명에는 작가 한 사람의 삶이 농축되어 있다.

 

 

 

 

 

 

박범신 작가는 성희롱 논란이 불거지자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사과문을 올렸다. 박 작가는 스탕달의 묘비명을 인용했다. 트위터리안들의 비난이 이어지자 사과문을 삭제했다. 어느 정신건강 전문의가 박 작가의 사과문을 해석했는데, 두 가지로 나왔다. 첫 번째 해석, 작가 자신이 젊었을 때는 자신의 행동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번째 해석, 나이가 들면 성적 매력이 떨어지므로 여자들을 만나면 (성희롱으로 간주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결국, 자신이 오래 사는 바람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세기의 작가, 예술가들의 곁에는 늘 뮤즈(Muse)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들의 관계를 생각할 때면 남성 예술가와 여성 뮤즈를 많이 언급한다. 뮤즈가 예술가에게 창작의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특별한 존재로 평가받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예술가들이 엉큼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찾는 남자들의 부속물’로 전락하기도 했. 박 작가를 포함한 문제 있는 남성 작가 및 예술가들은 자신의 성적 매력 발산을 뮤즈를 찾으러 다니는 순수한 예술가의 낭만으로 포장하고 다녔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르누아르는 생전 화가로서의 부와 명예, 자유, 그리고 남성적 욕망을 마음껏 누렸을 거로 생각한다. ‘행복을 화폭에 옮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화가를 꼽으라면 르누아르라고 단언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르누아르의 그림은 화려한 빛과 색채로 늘 행복을 담고 있다. 그 속에 세상의 시름이나 어둠을 찾아볼 수 없는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르누아르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인물화와 누드화를 많이 남겼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한 여성은 어린 소녀의 얼굴에 풍만한 여체로 묘사되었다. 지금으로선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지만, 르누아르는 만일 신이 여성의 가슴과 엉덩이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화가가 되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는 여성의 신체를 찬미했으면서도, 여성의 정신이 남성보다 낮은 수준으로 이해했다.

 

 

 

 

말년의 르누아르는 폐병과 류머티즘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창작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손이 심하게 비틀려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붕대로 고정시킨 채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은 절망과 분노가 아닌 행복으로 충만하다. 괴로운 일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에서 그림은 영혼을 씻어주는 선물이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유달리 장미꽃, 아이들, 그리고 여인들을 주로 그렸다. 르누아르의 둘째 아들이자 영화감독인 장 르누아르는 어린 시절에 바라본 르누아르의 아틀리에 정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집은 여자들로 가득했다. 어머니와 가브리엘 르나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하녀나 모델 같은 온갖 여성들로 해서 참으로 비남성적인 경향을 띠었다.” (장 르누아르, 예경 Art Classic 시리즈의 르누아르192)

    

 

르누아르는 전문 모델보다 가족과 친구 등 주위 사람들을 그리기 좋아한 화가였다. 특히 르누아르에게 가브리엘 르나르는 가장 중요한 뮤즈였다. 르누아르의 아내 알린의 사촌인 르나르는 둘째 아들 장이 태어날 무렵 르누아르의 집에 유모 겸 하녀로 들어왔다. 그리고 르누아르의 말년까지 모델을 했다. 심지어 그녀는 누드모델이 되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집에 사는 아내의 친척이 누드모델로 나섰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아내는 남편의 작업 방식을 이해해줬을까? 르누아르에 대한 아내의 증언이나 일기 같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녀의 속마음이 어떤지 알 수 없다. 물론 르나르가 르누아르의 예술적 열정을 이해하고, 누드모델이 되어주기를 흔쾌히 수락했는지 정말 궁금하다.

 

뮤즈들을 단순한 남성 예술가의 연인으로 바라보는 건 편견에 치우진 착각이다. 하지만, 남성 예술가들이 뮤즈를 찾은 이유가 절대 예술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 ‘뮤즈라는 이름은 여성을 속박하는 언어의 감옥이 되기도 한다. 그때의 남성 예술가들이 강조했던 예술’은 남성의 어두운 욕망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변질된다.

 

 

 

 

[] <박범신 삭제 사과문 해석> (조선일보, 2016102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23&aid=0003222125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거서 2016-11-02 2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르느와르 생존 당시 그리고 그 이전부터 세습되어 온 시대 분위기에 기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남성과 여성은 성역할 뿐만 아니라 차별에 의해 존재감이 달랐다고 알고 있습니다. 중세 마녀사냥으로 여자들이 다수 희생되었어도 남자는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신분제도도 그렇고 초야권이 있었음은 상상하기 힘들지요 남자가 여자의 목숨조차 하찮게 여기는 시대였고, 그런 성차별 마인드가 사회적으로 공인되는 시대였죠. 계몽시대라고 해서 세상이 변하는 속도에 따라 사람이 빨리 바뀌지는 않았을 겁니다. 안타깝지만요.

cyrus 2016-11-03 11:01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성차별이 암묵적으로 공인되는 시대 분위기 때문에 여기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천관우 주필의 말을 인용하자면, ‘연탄가스에 중독된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남성들이 만들어 낸 연탄가스에 남성, 여성 모두 문제의 심각성을 몰랐던 거죠. 그 상황 속에 용기 있게 저항하는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있었지만, 조용히 묻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과거의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이제부터 낡고, 잘못된 생각의 인습에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왜 이제야 뒷북 치냐고 따지는 사람들의 의견은 무시해도 됩니다.

2016-11-02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03 11:04   좋아요 0 | URL
강자는 자신의 이익을 누리기 위해서 약자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강자는 자신의 막강한 힘뿐만 아니라 편견과 차별을 동원합니다.

북프리쿠키 2016-11-02 2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우리는 왜 르누아르의 그림이 그렇게도 당시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분노를 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의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스케치 풍으로 보이는 것이 경솔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예술적인 지혜의 소산이라고 어려움 없이 인식한다. 만약 르누아르가 각 세부까지 세세히 다 그렸다면 그의 그림은 진부하고 생동감없게 보였을 것이다. <서양미술사-521쪽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그림설명중>

밝은 색채의 즐거운 혼합물을 보여주고 쏟아지는 햇빛의 효과를 연구하고자 했던 인상주의자 르누아르네요.

특히나, 인상주의 그림을 감상할 때 몇 걸음쯤 뒤로 물러나서 보면 이러한 혼란스러운 색점들이 갑자기 우리의 눈 앞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고 생기를 띠게 되는 기적과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대중들이 알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하네요.

싸이러스님의 르누아르 그림에 대한 리뷰를 보니 서양미술사에서 배웠던 부분을 다시 언급하여 기억에 남겨봅니다.^^;

cyrus 2016-11-03 11:08   좋아요 1 | URL
르누아르는 말년에 인정받아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르누아르는 자신의 그림이 살롱에 인정받고 싶어서 친했던 인상주의 화가들과 거리를 두었죠.

북프리쿠키님은 저보다 미술사를 열심히 공부하시는군요. 솔직히 저는 <서양미술사> 521쪽을 읽어보지 않았어요. ㅎㅎㅎ

:Dora 2016-11-02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범신 트위터 계폭했어요.. 박진성 일 터지고 좀있다 줄줄이 나오니까 감당 안 되었겠죠...사실 저 트위터 내용도 꼴 보기도 싫음 역겨움

cyrus 2016-11-03 11:09   좋아요 0 | URL
박근혜, 박진성, 박범신. 요즘 박 씨가 문젭니다. ^^;;

처음에 올린 트위터 사과문이 수정된 사실을 확인했을 때, 진짜 어이가 없었습니다.

:Dora 2016-11-03 11:49   좋아요 1 | URL
저도 박인딩...;;;;

cyrus 2016-11-03 11:51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제가 큰일 날 소리를 했군요. 문제 많은 세 명의 박씨 때문에 가만히 있는 박씨들이 피해를 받습니다...

:Dora 2016-11-03 11:53   좋아요 0 | URL
아녀요 잘못된 건 지적하고 고쳐야죠!! 나쁜 소수때문에 안그런 다수가 피해입는 오류도 없어야하구용

cyrus 2016-11-03 11:56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최 씨입니다. 그래서 최 모 아줌마가 싫어요..

책한엄마 2016-11-03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르누아르가 그런 사람이었군요.
박범신에 대한 정신과의사 분석이 참 인상 깊네요.
이번에 새로 출간될 예정이었던 유리라는 책 볼 일 없게 될까요?
박범신 작가님이 타계하시면 재조명될라나요?
고산자 대동여지도 영화도 그닥이었지만 박범신 작가 원작도 별로였어서 그닥 후기를 쓸 의지가 없었네요.백자평이나 간단히 남겨야겠어요.

cyrus 2016-11-03 11:14   좋아요 0 | URL
르누아르의 그림을 알아도, 그가 어떻게 살았고, 생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화가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들을 알 수 있습니다. ^^

저는 박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독자들 중에는 박 작가의 안 좋은 소식을 접했을 거고,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작가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준다면 괜찮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모르거나 작가의 문제점을 강하게 부정하는 독자들이 문제죠. ^^;;

transient-guest 2016-11-03 0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의 욕망을 자리나 명예, 위치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폭력적으로 투사한 결과가 오늘의 박범신, 아니 한국 사회의 수많은 박범신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과는 직설적으로 미안합니다 하는 것이지 ~했다면 미안하다는 물러날 지점을 잡아놓은 사과행위지요. 추하게 늙지 않도록, 늙어서 하는 짓거리가 추하지 않도록 죽을 때까지 노력할겁니다...저렇게 되는 거 너무 싫어요..

cyrus 2016-11-03 11:17   좋아요 0 | URL
요즘은 사과문을 글로 공개만 하면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글로 표현한 사과문은 사과를 한 사람의 진심 어린 반성을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저는 올해 사과문 비슷한 글을 한 두 차례 쓰면서 그렇게 느꼈습니다. 아무리 내용을 길게 써도, 제 진심이 온전하게 전해졌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부끄러워도 차라리 피해를 준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서 사과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심성 2016-11-03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추행 파문을 일으키고 사과문이랍시고 스탕달이 말한 묘비의 내용을 인용하여 포장하듯 끄적인 자체가 역겹군요. 진정한 문호라면 자신 밥벌이로 써먹던 달콤한 포장이 아니라 미안합니다. 사과합니다. 등 직설적이고 진심 어린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과가 불특정다수를 위한 sns 보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먼저 해야하는게 우선이 아닌가 싶군요. 박범신 작가의 은교를 볼때처럼 그 알 수 없는 스멀스멀한 불쾌감이 왜 드는지 알 것 같군요. 역시 창작물은 창조주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인가 봅니다.

cyrus 2016-11-03 19:02   좋아요 0 | URL
사과하는 자세가 잘못됐죠. 묘비명을 인용하는 건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유식한 작가이니까 불미스러운 일과 전혀 관련 없다는 식의 뉘앙스를 드러내서 논란의 중심에 빠지려는 것이죠.